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 3부-115화 (784/812)

3부 113-2화 외전. 황제 폐하의 외교

광무 26년(1922) 3월 이선의 대국민 연설, 이른바 ‘옥음 방송’은 한국 역사상, 아니 세계사에 남을 사건이었다.

군주가 전국의 국민을 향해 라디오로 연설을 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선의 라디오 연설은 현대적 프로파간다의 효시라고 할 수 있었다. 이웃 나라인 일본과 청국은 물론이요, 입헌군주국의 시초이자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에서도 깜짝 놀랄 일이었다.

“거 참, 한국 황제가 대단하기는 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지.”

“BBC의 제안입니다만, 라디오 개국 기념으로 국왕 폐하께서도 라디오 연설을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이오. 국가로 방송 시작하는 거지. God save the King이 브리튼, 아니 제국 전체에 울려 퍼지면 얼마나 좋겠소.”

바로 그해 1922년에 개국한 영국의 BBC 방송과 로이드조지 내각은 조지 5세에게 라디오 대국민 연설을 건의했다.

“짐은 영 내키지 않는군. 라디오는 오락이 아닌가? 군주가 어릿광대처럼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가?”

“이는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일입니다. 한국의 사례를 보면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조지 5세도, 한국 황제의 연설에 대해 듣고 나서는 생각을 바꿨다.

“알겠소. 그럼 올해 크리스마스에 대국민 연설을 하도록 하지.”

“폐하의 결단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20세기에 군주 노릇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오. 하긴. 유서 깊은 왕가들이 폐위되고, 볼셰비키와 파시스트가 날뛰는 시대에 필요하다면 어릿광대 노릇이라도 해야지.”

조지 5세는 진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듯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가, 문득 생각에 미치는 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에드워드가 일본에 이어 한국도 방문할 예정이지.”

“예, 한국 황실이 정식으로 초청했습니다. 웨일스 공께서 5월에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웨일스 공, 즉 왕태자 에드워드는 아시아 순방 중이었다. 이집트, 인도, 시암(태국)과 중국을 거쳐 작년 일본 태자 히로히토의 영국 방문 답방 형식으로 일본을 방문한 후, 한국 황실의 초청으로 방한할 예정이었다.

“아, 그때쯤 한국 태자와 러시아 공주가 혼례를 한다지? 에드워드를 결혼식 하객으로 불렀군.”

“예, 이진 태자와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이 혼례를 올릴 예정입니다.”

“놀라운 일이야. 동양 왕가에서 서양인 공주를 받아들이다니. 한국 황제와 니키(니콜라이)가 친밀한 관계였다지만, 이건 상상도 못 했던 일이오.”

“실로 세계적인 화젯거리지요.”

이진과 타티야나의 국혼 발표는 한국과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왕실 간의 혼사는 늘 있는 일이었지만, 동양 왕가와 서양 왕가의 결합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러시아제국이 망했다지만, 제국의 공주가 ‘동양 이교도’ 왕가에 시집을 간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우리도 놀랍다지만, 그쪽도 만만치 않을 텐데. 동양인들이 서양인 태자비, 혼혈 왕손을 받아들이겠소?”

“혼혈이라면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당장 황제의 차남이…….”

“아, 폴란드 혼혈이지. 이해했소. 하지만 제위를 계승할 태자는 입장이 다르지 않나?”

“거부감이야 강하겠지만, 한국에서는 황제의 권위가 절대적이니 황제의 결단이라면 따를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타티야나 여대공도 종교를 유교로 개종한 것 같더군요.”

“들었소. 니키의 사진 앞에서 곡을 했다지. 나 참, 별일 다 보겠군. 니키는 무슨 생각을 할지.”

조지 5세는 헛웃음을 흘리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그들 남매가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유일하게 한국 황제만이 보호해 줬으니까. 인간적인 도리를 본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니키와 나는 사촌인데도 외면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에드워드가 결혼식 하객으로 간다니, 니키가 내 결혼식에 하객으로 왔을 때가 생각이 나는군.”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의 이종사촌으로, 쌍둥이처럼 똑같은 외모로 유명했다. 조지 5세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한 니콜라이가 신랑으로 오인을 받아 축하를 받았다는 건 유명한 일화였다. 두 사람 모두 어머니를 닮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니콜라이가 폐위된 후 영국 망명을 희망했을 때, 조지 5세는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지만 영국 정부가 결사반대했다. ‘폭군 니콜라이’는 영국에서도 악명이 높았고, 니콜라이 일가의 망명을 받아들이면 노동당과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켜 전시단결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전달받은 영국 왕실은 공개적으로 망명을 거부했다.

그 당시에는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후일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 부부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지 5세는 죄책감을 느꼈다. 니콜라이는 실패한 군주라고 해도 자신의 사촌이오, 알렉산드라도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로 사촌이었다. 그나마 그 자식들은 한국이 보호해 준 덕에 살아남아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있었다.

“혹자는 격에 안 맞는 결혼이라고 하는데, 어쩌니저쩌니해도 한국 황제가 그들 남매를 보호해 준 거는 사실이오. 나도 감사를 느끼고 있소. 에드워드를 통해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군.”

“예, 정부 역시 축하의 뜻을 보낼 예정입니다.”

20세기 초는 인종적 편견이 극에 달했던 시대로, 동양인과 서양인의 결혼 자체에 반감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조지 5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럼 그사이에 태어날 왕손은 로마노프 왕가와 글뤽스부르크 왕가, 그리고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의 후예가 되는 건가. 이로써 한국 왕가도 유럽 왕가의 일원이 되었군.”

타티야나는 부계로는 로마노프 왕가의 후손이오, 모계로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증손녀였다.

즉, 이진과의 사이에 태어날 왕손은 유럽 유수의 왕가와 혈통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거대한 유럽 왕실 일가의 일원이 되는 셈이었다.

“한국 황제는 외교에 능하지. 아들의 결혼, 손자의 혈통도 외교에 써먹겠군.”

“그렇겠지요. 한국 황제는 국익에 필요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까요. 저희 정치가들과 외교관들도 감탄할 때가 여러 번입니다.”

“3년 전 파리강화회의에서도 역할이 상당했다고 들었소.”

“비공식 옵서버인데도 배후에서 활약했지요. 그렇게 숙련된 외교관은 드뭅니다.”

파리에 온 이선은 배후에서 윌슨, 클레망소, 로이드조지, 처칠 등과 잇달아 밀담하며 대한제국의 국익을 위해 노력했다.

“내가 진짜 놀란 건, 한국 황제가 프랑스 의회에서 연설했을 때였소. 군주가 그 정도 연설을 할 줄이야.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이 정확하오.”

“동양의 군주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혁명에 찬사를 보내다니, 어지간한 정치가와 외교관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지요.”

1919년 7월, 이선이 프랑스 상원에서 행한 연설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서방 세계 전체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 * *

시간을 잠시 앞으로 돌려, 1919년 7월.

이선은 귀국하기 전에,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130주년 기념식을 참관했다.

황제가 군주제 타도를 기념하는 혁명기념일에 참석하는 게 역설적인 것 같지만, 그해 7월 14일은 프랑스의 승전과 베르사유 조약 타결을 기념하는 행사였으므로 연합국의 군주가 참석하는 게 이상할 것 없었다.

파리 시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 프랑스군과 연합군은 승전 퍼레이드를 했고, 한국군 근위기마중대도 행진 대열의 일원으로서 박수를 받았다. 귀빈석의 이선 역시 파리 시민의 환호를 받았다.

진정 놀라운 건, 다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뤽상부르 궁전(Palais du Luxembourg)은 본래 루이 13세의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edicis)의 궁전으로, 부르봉 왕가의 궁전으로 쓰이다가 프랑스 혁명기에 다른 궁전들처럼 용도가 변경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통령정부 관저로 쓰이다, 황제 즉위 후 프랑스제국의 원로원으로 전용되었다. 제2공화국과 제2제정 시기에도 상원으로 쓰였고, 나폴레옹 3세의 명령으로 의사당은 고전주의 양식과 들라크루아의 아름다운 그림들로 극히 화려하게 꾸며졌다.

제3공화국 선포 이후에도 뤽상부르는 프랑스 원로원(상원)으로 기능했고, 부르봉 궁전에 자리 잡은 국민의회(하원)와 함께 프랑스 공화정을 상징했다.

바로 그 공화정의 상징에서, 한국 황제의 상하원 합동 연설이 있었다.

본래 이선의 연설은 예정된 게 아니었다. 파리를 떠나기 전, 총리 클레망소의 호의로 이선은 정부청사로 쓰이는 궁전들을 방문했다. 상하원뿐만 아니라, 대통령 관저, 총리 관저, 내무부 청사, 외무부 청사, 국방부 청사 등은 모두 옛 왕궁 또는 귀족의 저택으로, 화려한 건축 양식을 자랑했다.

이선은 예술애호가로서 방문 자체가 감개무량했다. 특히 그는 극히 화려한 양식과 아름다운 소장품들을 자랑하는 뤽상부르 궁전에 만족했다.

“뤽상부르 궁전은 평시에 원로원으로 쓰이므로, 일반에 공개하지 않습니다. 외국 군주 중에 방문하신 사례는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이후로 폐하가 처음이십니다.”

의회도서관을 장식하고 있는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의 그림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이선을 향해, 클레망소가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정말 훌륭합니다. 짐은 저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특히 좋아합니다.”

“폐하께서는 예술애호가시지요. 우리 프랑스인들은 폐하의 면모에 진심으로 감격하고 있습니다.”

이선이 르누아르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였다. 이선의 예술애호가적인 면모는 프랑스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선 역시 단순한 예술애호를 넘어 이미지메이킹과 프로파간다 용도로 사용했다.

‘외견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완전히 서구화된 한국 황제’는 근대화된 대한제국을 상징했고, 서양인들은 이선을 보고 한국에 대한 신뢰도를 높였다.

“호오, 여기가 바로 나폴레옹 1세가 원로원 의원들에게 연설했던 장소입니까.”

“예, 엄밀히 말하면 그 시절하곤 의사당 위치가 다릅니다만, 바로 그 장소입니다.”

의사당 한편에는 나폴레옹 1세가 프랑스 원로원 의원들에게 한 연설의 내용이 비문으로 만들어져 벽에 장식되어 있었다.

“괜찮다면 짐도 연설해 보고 싶군요. 동맹국인 프랑스 공화국과 대한제국의 우호를 위하여.”

이선의 발상은 상당히 즉흥적이었다. 클레망소가 보기에는 ‘동양의 나폴레옹’ 운운하는 비유가 유명하니, 자신도 나폴레옹처럼 연설해 보겠다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선은 외국 국가원수가 동맹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게 최고의 외교 이벤트인 21세기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연초에 윌슨도 프랑스 의회에서 연설을 하고 열렬한 환호를 받지 않았던가?

“외국 군주의 의회 연설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만,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의회와 의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기대하겠습니다.”

과연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원로원 의장 레옹 부르주아는 이미 이선과 관계가 좋았으므로 적극 지지했다.

프랑스 상하원은 논의 끝에 이선의 연설을 받아들였다. 미국 대통령과 한국 황제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지만, 그만큼 이선의 이미지메이킹이 성공적이었고, 의원들도 동양의 군주가 무슨 연설을 할지 궁금해서였다.

1919년 7월 17일, 뤽상부르 궁전 정부-상하원 합동회의.

그날의 연사는 특별하게도 대한제국 황제였다.

“친애하는 프랑스 공화국 원로원과 국민의회 의원 여러분. 먼저 짐에게 연설의 기회를 준 대통령 각하, 총리 각하, 의장 각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선은 프랑스어로 연설을 시작했다. 이선의 프랑스어 실력은 영어만큼 유창하진 않았고, 발음도 전형적인 외국인 발음이라 프랑스인이 듣기에는 어색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동양의 군주가 그 정도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 자체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여러분은 프랑스 국민에 의해 선출된 국민의 대표입니다. 짐 또한 대한제국의 국민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물론 짐은 여러분처럼 선출직은 아닙니다만, 평생 임기제 공무원이라고 생각하고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군주가 공화국의 의원들에게 연설을 하는 어색한 상황을 농담처럼 짚고 넘어가자, 의원들도 어색함을 풀고 웃음을 흘렸다.

“본래 이 궁전은 부르봉 왕조의 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들의 의사당이 되었습니다. 혹자는 군주인 짐이 불편함을 느낀다고 생각하겠지만, 정반대입니다. 짐은 인민주권을 존중하며, 인민주권의 역사적인 첫발을 뗀 프랑스 대혁명에 깊은 경외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총리 클레망소 이하 정부 관계자, 상원의장 부르주아 이하 의원들은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이선을 쳐다보았다. 군주, 그것도 동양의 군주가 프랑스 대혁명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윌슨도 찬사를 보낸 바 있었지만, 그는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의 가치를 유럽에 퍼뜨렸습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유혈과 오류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프랑스 혁명의 가치는 오늘날 유럽을 넘어 세계에 퍼졌습니다.”

이선은 경악과 경의로 물드는 의원들의 표정을 보며, 연설을 이어 나갔다.

“대전쟁은 곧 민주주의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민주주의 국가들이 승리했습니다. 러시아와 독일에서 그랬듯이, 인민의 목소리를 거부한 군주는 패배하고 몰락했습니다! 짐은 중대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인민과 함께하지 않는 군주는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절반은 외교용 수사였지만, 절반은 이선의 진심이었다.

“짐은 군주이지만, 동시에 국가지도자로서 민주개혁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의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대한제국은 근대화를 위해 지난 40년간 노력의 경주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범은 그동안 프로이센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패배했습니다. 프로이센 전쟁기계는 인민의 힘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근대화는 외견적 근대화만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라는 내면적 근대화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짐은 대한제국의 우방이자 세계질서를 선도하는 프랑스 공화국, 대영제국, 미합중국을 모범으로 삼아 정치개혁에 돌입하고자 합니다.”

기실 이선 그 자신으로 말하면 서양 민주주의 국가들, 즉 자신들만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식민지에서는 여전히 군림하는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었지만, 국익을 중시하는 외교관으로서의 이선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과연 프랑스 정부와 의원들은 이선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 중간중간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선의 연설이 이어지자 다시 경청했다.

“……자유, 평등, 우애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가치와, 링컨 대통령이 말한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대한제국 만세! 프랑스 공화국 만세! 대한제국과 프랑스의 우호 만세!”

이선의 연설이 마치자, 프랑스 정부 인사들과 상하원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박수와 함께 만세를 외쳤다.

“대한제국 만세! 프랑스 공화국 만세! 대한제국과 프랑스의 우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Vive L'Empereur)’는 과거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을 향해 보내는 만세 구호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선을 향해 보내고 있었다.

동양의 황제가 프랑스인의 자부심인 공화국과 혁명의 의의를 이해하고 경의를 표했으니, 그들도 마땅히 동양의 황제를 향해 나폴레옹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자, 해당 국가가 듣고 싶어 하는 바에 중점을 맞춰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이선의 외교가 절정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