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13-3화 외전. 황제 폐하의 정치
이선의 뤽상부르 연설은 서방에 상당한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켰다.
21세기 기준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수준의 외교적 수사였지만, 20세기 초 기준으로는 급진적인 내용의 연설이었다. 하물며 동양에서 온 전제군주가 인민주권과 공화주의 혁명을 찬양했으니,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연설문을 황제가 직접 쓰진 않았을 테고. 김규식 대사가 썼다던데 그 사람 입김이 들어간 거 아닌가? 외교관치고는 상당히 급진적이라던데.”
“한국 황제는 연설문을 타인에게 맡기지 않는다더군요. 김규식 대사의 역할은 황제의 한국어 연설문을 프랑스어로 번역까지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외국어 가장 잘하기로 유명한 이라.”
“허, 그럼 황제 본인의 생각이라는 건데. 만약 왕자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혁명가라도 되었겠어.”
“동양에서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니, 혁명가라면 혁명가라지요. 뭐, 나폴레옹도 황제라지만 혁명가 소리 듣지 않았습니까?”
“이 시대의 혁명가라면 울리야노프나 트로츠키가 떠오르는데. 지긋지긋한 볼셰비키 놈들.”
“하지만 동양의 혁명가는 우리 편이지요.”
“물론 우리의 훌륭한 동맹이지. 더욱이 아주 영민한.”
뤽상부르 연설의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비공개 비보도’를 원칙으로 했지만, 의정기록에 남은 데다 큰 감명을 받은 의원들이 이곳저곳에 이야기를 했으므로 모를 수가 없었다.
* * *
1922년, 버킹엄 궁전.
“뭐, 프랑스와의 관계가 중요하긴 하지만, 짐이라면 그렇게까지 말하지 못할 거요. 프랑스인들이 대혁명과 공화국에 자부심을 갖는 건 알고 있지만, 군주의 입장에서 혁명을 찬양할 수는 없지. 프랑스와의 관계를 중시한 선왕(에드워드 7세)께서도 프랑스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지만, 혁명만은 예외였소.”
“물론입니다, 폐하. 존엄하신 군주께서 그러실 이유가 없지요.”
“그렇다면 한국 황제는 왜 그랬던 걸까? 하물며 동양의 전제군주 아니었던가.”
국왕의 물음에 로이드조지가 답했다.
“첫째로는 우방인 프랑스, 더 나아가 민주공화국인 미국에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었겠지요. 한국 황제는 외교적 수사라면 타고난 사람입니다. 영국에 대해서도 얼마나 찬사를 보냈는지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긴, 짐에게도 명예혁명과 영국식 입헌군주제에 대해서도 극찬을 했었지. 언젠가 영국식으로 개혁을 완수할 거라 하였고.”
“과연 그렇습니다. 둘째로는, 한국 황제는 귀국 직후에 보수파들을 숙청하고, 보통선거권 개혁과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천명했습니다. 그 자신의 의지를 보여 준 게 아니겠습니까?”
이선은 귀국 직후에 원산 사건을 명분으로 개화당 우파를 숙청하고, 보통선거권 개혁과 정당정치 입헌군주제로 나아갔다.
사건의 추이가 이렇게 되자, 서방의 관찰자들은 뤽상부르 연설이 이선의 진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꼭 서방에서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검열로 간략히 보도되었기에 많은 이가 알지 못했지만, 뤽상부르 연설을 직접 들은 서재필·이상설·이승만·김규식 등은 황제의 연설에 경악과 경의를 동시에 느꼈다. 그들도 외교적 수사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기에 이상설 등은 귀국 후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보통선거권 개혁에 나섰던 것이었다.
“그것도 놀라운 일이야. 아시아에서 보통선거권을 시행하는 국가가 생기다니. 덩달아 일본까지 따라 하지 않았나. 영국을 모범으로 한 입헌군주제를 추구한다니, 바람직하오.”
“한국이 아시아의 프랑스,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을 자처해 준다면 우리로서도 좋은 일이지요.”
고개를 끄덕이던 조지 5세는 문득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우리 외교관 중에 한국 황제와 독대한 사람이 있지 않았소? 젊은 외교관인데 독대를 하고, 한국 황제의 심경을 전해서 놀랐지. 그의 보고서를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이…….”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입니다, 폐하. 강화회의 대표단에 이어 파리 주재 외교관으로 근무하다, 이번 웨일스 공 전하의 아시아 방문에 수행원으로 동참했습니다.”
에드워드 카는 독일과 소비에트에 유화적인 데다 내각의 대외정책에 비판적이었으므로 로이드조지는 썩 내키지 않았으나, 일부러 아시아 순방명단에 합류시켰다.
“아, 그 친구도 에드워드군. 우리 에드워드가 이름 같다고 수행원으로 택했을 리는 없고, 정부가 일부러 포함시켰겠군.”
“한국 황제와 그토록 깊게 대화를 나눈 이도 드무니까요. 속내를 잘 밝히지 않는 사람인데. 황제와 여러 번 회견한 저나 윈스턴 경과도 정무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그 정도까진 아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에드워드 카는 좀 특수한 케이스지요. 당시만 해도 젊은 신참 외교관이었으니.”
“과연. 황제가 그 젊은 외교관이 마음에 들었나 보군.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할지 기대가 되는구려.”
* * *
광무 26년 5월, 경운궁.
그 무렵 웨일스 공 에드워드는 한창 아시아 순방 중이었다. 에드워드는 4월부터 한 달간 일본에 체류했고, 한국에서도 그만큼 체류할 예정이었다.
아시아 순방에 동참한 외교관 에드워드 핼릿 카는, 웨일스 공의 방한을 앞두고 협의를 위해 먼저 한국에 입국했다.
“외신(外臣)이 삼가 황제 폐하를 알현합니다.”
영국 외교관이 한국식 예의를 표하자, 이선은 빙긋 웃었다. 비록 어설프기 짝이 없는 발음이었지만, 정성이 마음에 들었다.
“호오, 언제 한국어를 익혀서 그런 고급 표현까지 익혔단 말이오? 아무튼 반갑소. 영국은 이 시간대가 티타임이지요? 좋은 실론 홍차 준비했소.”
이선은 카와 반갑게 악수를 하며 홍차를 권했다. 첫마디만 한국어일 뿐, 물론 두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였다.
“황공하옵니다. 아시아 방문을 앞두고 약간만 배웠을 뿐입니다.”
“그래요, 한국에 근무할 게 아니라면 굳이 배울 필요 없지. 차라리 러시아어 학습을 권하고 싶군요. 그게 경의 커리어에 더 도움이 될 터이니.”
“마침 근래 러시아어 학습 중입니다. 제가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걸 아셨습니까?”
“1919년 시점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에 그렇게 관심을 보였던 영국 외교관은 경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연히 익히고 있으리라 생각했지요.”
“공무다망하실 터인데 그걸 다 기억하고 계시다니, 감격할 따름입니다.”
“기억력이 짐의 장점이지요.”
이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정말로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E.H. 카라면 기억할 수밖에. 사학과 입학 후에 가장 먼저 읽은 책 중 하나인데. 카 평전도 완독했다고.’
후일, 외교관보다는 소비에트 러시아사 전문가이자 국제정치학자·역사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에드워드 핼릿 카. 바로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기억되는 그 E.H. 카이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영국 대표단에는 후일 학자로 명성을 떨칠 청년 외교관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그리고 에드워드 핼릿 카.
케인스는 재무부 소속으로 독일 배상금 문제를 전담하다 연합국 거두의 비타협적 태도에 환멸을 느껴 사임했고, 토인비는 외무부 고문이자 문명사학자로서 지중해-중동 국경문제를 전담했다.
카는 외무부에 소속된 외교관으로서 독일-폴란드 국경문제를 전담했다. 중산층 출신으로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엘리트인 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파리에서 열변을 토한 트로츠키의 ‘혁명적 견해’에 깊은 인상을 받고 소비에트 러시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 연구를 시작한 카는 백군이 우세할 때에도 소비에트가 내전에서 승리할 운명이라 확신했고, 처칠의 반(反)볼셰비키 개입정책에 반대하여 로이드조지에게 내전 불개입을 설파했다.
1919년 당시만 해도 20대 외교관에 불과했던 카의 견해는 무시당했지만, 내전에서 결국 소비에트가 승리하자 그의 식견은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카는 독일에 대해 지나치게 과도한 배상금과 굴욕을 안겨 주는 데 반대했고, 신생 소비에트 정권도 승인하여 국제질서의 일부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견해는 지나치게 대독, 대소 유화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카는 자신의 견해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결국 러시아에 대한 경의 예측은 맞아떨어졌지. 놀라운 식견이었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폐하께서는 저보다 먼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선이 카와 회견한 건 1919년 7월, 뤽상부르 연설 직후였다. 당시만 해도 적백내전 개입 여부를 두고 한국과 영국 간에 논의가 진행되던 중이었다.
당시 처칠은 곧 한국이 내전에 개입하리라고 호언장담했고, 개입정책에 반대하던 카는 김규식에게 비공식적인 회견을 요청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규식이 아니라 황제가 직접 카를 맞이했다. 카로선 깜짝 놀랄 일이었다.
“폐하, 결코 러시아 내전에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러시아에도 한국에도 비극이 될 것입니다.”
“미스터 카, 오늘의 회견은 영국 정부를 대표해서 온 겁니까, 아니면 개인적인 만남입니까?”
“송구하오나 개인적인 요청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오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는 겁니다. 피차 비공개를 전제로 말합시다. 동의하지요?”
“물론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황제가 아닌 개인 이선의 의견을 말하지요. 내 개인적인 견해를 말하자면, 내전에서 소비에트가 궁극적으로 승리하리라 확신합니다. 백군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신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처칠에게 한 약속하고는 달리, 이선은 카에게는 ‘개인적인’ 의견을 말했다. 어차피 독단적인 행동을 한 카가 회동 내용을 반대파인 처칠에게는 말하지 않을 거고, 최대한이 로이드조지에게 보고하는 것일 터였다. 로이드조지 자신도 개입에 소극적이었으므로, 이선의 ‘개인적인’ 우려를 이해할 터였다.
“특히 한국군은 시베리아에서의 전쟁이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영국 역시 노동계급의 반발을 불사하고, 개입에 나서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클 터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단독으로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카는 상관인 처칠이나 로이드조지보다 이선이 더 정세를 정확히 이해하는 걸 보고 놀랐고, 자신과 같은 의견에 기뻤다.
이후 카는 이선과 허심탄회하게 국제정세와 외교에 대해 논의했다. 두 사람의 회견은 서로에게 만족감을 주었고, 카는 이선과 한국에 대해 최고로 우호적인 보고서를 올렸다.
“폐하께선 오랜 외교 경력이 있으신데, 누가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는지요?”
“쉬운 외교란 없지요.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한 명만 꼽자면, 팔병신……, 아니 실례했소. 실언이니 잊어 주시오. 카이저 빌헬름이었소.”
‘공공의 적’ 빌헬름을 비하하는 말에 카의 얼굴에도 실소가 흘렀다.
“짐작이 갑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힘드셨습니까?”
“카이저의 그 장광설을 듣기가 너무 힘들었소. 한 소리 하고 또 하고, A 주제로 말하다 갑자기 B로 넘어가고, 뜬금없이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고.”
“아, 과연.”
이선에게는 니콜라이가 가장 상대하기 쉬었고, 영국 정부를 상대하기가 가장 힘들었다. 하지만 영국 외교관 앞에서 그렇게 말하긴 곤란하니, 공공의 적 빌헬름에게 화살을 돌렸다. 니콜라이와 조지 5세도 비슷한 이유로 사촌 ‘빌리’를 싫어했다.
“지금은 쫓겨나서 망명한 처지라지만, 한때 카이저의 자의식은 지구를 뚫고 우주까지 갈 것 같았소. 전쟁 전에 영국하고도 실언으로 크게 구설수 일으키지 않았소?”
“아, 1908년 ≪데일리 텔레그래프≫ 스캔들 말씀이시군요.”
「영국인들은 발정 난 토끼마냥 미쳤나? 왜 독일을 그리도 적대하는가? 위대한 나라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길 바란다. 독일 국민은 대부분 반영적인지 몰라도, 짐은 친영이다. 짐이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나? 거짓과 편견은 내 본성과 거리가 멀다.……」
카이저의 막말은 영국과 독일 양쪽에서, 특히 독일에서 더욱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독일 국민의 비난이 들끓었고, 제국의회에서도 격렬한 비판이 쏟아졌다. 카이저는 자신을 향한 비난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정부의 압박으로 카이저는 결국 외교정책에서 당분간 배제되었다.
“카이저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 영국인들 못지않게 독일인들도 어리석어 자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적반하장으로 나왔소. 그게 더 사태를 악화시켰지. 그냥 깔끔하게 실언이었다, 앞으로 주의하겠다 사과하면 될 것을 그놈의 허세 때문에 더욱 상황을 악화시킨 것 아니오. 그러는 바람에 오히려 황제의 위신은 더 떨어졌지. 어리석기는!”
이선은 혀를 끌끌 찼다. 카이저는 이미 그때부터 실패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영국에서는 독일에 적대감을 느꼈다기보다는, 카이저가 조울증이 아닌가 의심했지요.”
“뭐, 카이저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믿는 왕권신수론자였으니 그렇다 칩시다. 국민에게 선출되었다는 민주공화국에서도 이런 일이 빈번하게 벌어집니다.”
이선은 프랑스에 대한 찬사는 언제였냐는 듯, 화제를 프랑스의 치부로 전환했다. 진보적인 영국인에게는 즐거운 소재였다.
“드레퓌스 사건을 봅시다. 드레퓌스가 간첩이 아니고 에스테라지가 진범인 게 분명해진 후에도, 프랑스 군부와 우파는 유대인 드레퓌스가 범인이라고 끝까지 우겼소.”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어, 참전하여 독일군에 맞서 싸운 지금까지도, 드레퓌스 중령이 독일 간첩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요, 아직까지도 드레퓌스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고 있지요. 그리고 여전히 ‘유대인에 매수된 좌파, 언론, 지식인’ 탓을 합니다. 극우파가 반(反)유대주의자라서?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위신에 대한 광적인 집착 때문이오. 국가는, 군대는 무오류고 틀려서는 안 된다. 위신을 위해서라면, 설령 진짜 간첩이 아니더라도 간첩이어야만 한다. 이게 근본적인 오류란 말이오.”
이선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내가 권좌에 앉아 있는 이상, 이런 오류를 반복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부든 나든, 잘못을 저지르면 깨끗이 인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국민 탓으로, 의회 탓으로, 언론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지요. 권력에는 무한한 책임이 뒤따른다. 이는 정치가의 의무입니다.”
카는 문득 3년 전 대화를 떠올렸다. 이선이 귀국할 즈음, 바로 드레퓌스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원산학살 사건이 있었다. 카는 이선의 해결책을 고대했다. 과연 입바른 위선인가, 진심인가?
“폐하께서 친히 피해자에게 조의를 표하고, 책임자들을 단호히 처벌하는 것을 보고 영국에서도 놀랐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민주정에서도 정치인들은 사과에 인색합니다. 위신이 걸렸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명령도 내리지 않은 군과 경찰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고, 바로잡으셨지요.”
“당연히 짐이 사과하고 바로잡아야지요. 비록 내 명령이 없었다 할지라도, 짐은 국가원수이자 통수권자로서 책임이 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요? 권력에는 무한한 책임이 뒤따른다고. 짐은 통치자의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정색하던 이선은 표정을 풀고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덕에, 한국에 보통선거권과 진정한 입헌정치가 확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 상황에서 내가 끝끝내 군경의 말만 듣고, 사과를 거부한 채 사건을 묻어 버렸다고 칩시다. 진실이 묻힌 건 물론이고, 국가를 위해서도 굉장히 나쁜 선례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국민을 우민이라 여기며 속이고 억압하는 정권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짐은 늘 액튼 경의 경구를 기억합니다. 권력은 타락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온데 폐하께서 어떻게 이토록 매번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는지, 군주로서 서양 정치가들보다 더욱 진보적인 의식을 갖고 계신지, 진실로 궁금합니다.”
카는 단순히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경의를 담아 질문했다.
“역사를 공부하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오지요. 동양에서는 걸주(桀紂)가, 서양에서는 찰스 1세와 루이 16세가, 가까이로는 니콜라이 2세와 빌헬름 2세가 짐에게 반면교사가 되어 주지요.”
“과연, 역사는 중요하지요. 저도 늘 역사를 통해 배우려고 합니다.”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과거를 이해하고 다뤄야 합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니까요.”
‘History i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현직 외교관이자 미래의 학자인 카는 이선의 말이 꽤나 인상 깊은 듯,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언젠가 자신이 쓸 역사서의 경구로 인용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