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 3부-117화 (701/812)

3부 113-4화 외전. 검은머리 국군 대원수

광무 26년, 대한제국 육군참모본부.

대전쟁기의 군제개혁으로, 원수부에서 완전히 독립한 참모본부는 군부의 새로운 중핵으로 떠올랐다. 여전히 군령권은 대원수인 황제와 그 직속기관인 원수부가 행사했지만, 군정권(軍政權)은 참모총장이 행사했다.

4대 육군참모총장 노백린은 황제의 신임을 받아, 국군의 현대화에 만전을 기울이고 있었다.

키가 훌쩍 큰 젊은 군인이 정복 차림으로 참모본부에 들어섰다. 군복만 입지 않았더라면, 군인이 아닌 청년 사업가로 보일 만큼 말쑥한 용모였다.

“참령 김유진, 참모총장 각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그래, 어서 오게. 앉게나.”

노백린은 청년장교에게 자리를 권한 후, 군인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이었다.

“김 부령의 새로운 부임지가 결정됐네.”

“부령이요? 아시다시피 전 참령입니다만.”

“내가 조금 전에 귀관의 부령 진급에 서명했어. 곧 폐하께서 부령으로 임명하실 거네. 축하하네, 김 부령. 나이 갓 서른에 부령이라니, 정말 빠른 진급 아닌가?”

김유진은 표정관리에 나섰다. 분명히 예상보다 빠른 진급이었다. 하지만 그 특유의 삐딱한 관점으로 보면…….

‘얼마나 힘든 일을 시키려고 벌써 진급시킨 거지?’

육군무관학교 28기 김유진은 군부 내에서 가장 빠른 진급 속도로 유명했다. 군부의 가장 촉망받는 엘리트들인 23기 김광서와 지대형, 24기 홍사익과 김좌진, 26기 이응준 등을 능가하는 속도였다.

“각하께서도 서른에 부령이셨지요.”

“그때와 지금이 같나? 그땐 군 규모의 성장에 비해 장교 자체가 부족해서 진급이 수월했지. 귀관은 특별한 능력을 인정받은 거고.”

까마득하게 높은 참모총장이지만, 김유진은 꽤나 편안한 태도를 보였다. 노백린은 바로 김유진의 후원자였다.

프로이센 군부와 유사하게도, 장성들은 유능한 청년장교들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예컨대 고 박유굉 대장은 김광서와 홍사익의 후원자였고, 이동휘 대장은 지대형을, 홍범도 대장은 김좌진을, 노백린 대장은 이응준과 김유진을 후원했다.

이러한 개인적 친소관계가 군부 내 파벌로 연결될 우려도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능한 청년장교들이 발탁되어 경험을 쌓고 빠르게 진급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혹자는 참모총장 노백린이 김유진의 후견인이라서 줄을 잘 탔다고 폄하했지만, 바로 그 자신이 대전쟁기에 다대한 전공을 세운 덕분이었다.

“제가 먼저 진급해서 이응준 선배의 실망이 클 것 같습니다만.”

“이 참령에게 기대가 컸는데, 근래 태도가 위험할 정도야. 소비에트에 지나치게 강경해. 대놓고 전쟁을 부르짖으니 말이야. 이갑 장군의 사위라서 러시아를 포기 못하겠다는 입장인 건 이해하는데, 공과 사는 가려야지.”

시베리아 파견군 정보장교인 이응준은 김좌진과 더불어 가장 강경한 소장파였고, 연해주 백군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응준 참령의 개인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이 참령은 원래 대외팽창주의자였습니다. 거기에 개인적인 감정이 곁들어진 거겠죠. 장인이자 존경하는 선배가 피를 흘린 땅에서 물러날 수 없다.”

“그러니까 더 위험하다는 거지. 군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귀관처럼 대국적으로 시야가 넓은 장교가 필요해. 특히 이번 일에는 말이야.”

“제 임무가 무엇입니까?”

“따라오게. 직접 설명해 주실 분이 있으니.”

노백린은 김유진을 대동하고 참모본부 맞은편에 있는 원수부 건물로 향했다. 김유진은 의아했다.

‘참모총장보다 높은 사람이 있나? 아, 군무대신인가? 그럼 군무부로 가야지, 왜 원수부로?’

김유진의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노백린이 평상시에는 비어 있는 대원수 집무실로 직행했던 것이다.

“대원수 폐하, 신 대장 노백린, 삼가 알현을 청합니다.”

“아, 들어오시오.”

어지간히 대담하고 여유만만한 성격의 김유진도, 통수권자인 황제를 직접 대면하는 순간에 긴장했다.

“대원수 폐하! 신 참령 김유진……,”

“아, 귀관이 김유진 부령인가. 막 귀관을 부령으로 임명한 참일세. 페트로그라드 전투에서 맹활약했다지. 좌좌진, 우유진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1918년 페트로그라드 전투에서 기동대를 이끌고 공훈을 세운 장교 중에 대표적으로 김좌진이 있지만, 그 못지않은 공로자로 김유진이 있었다. 김유진이 이끄는 제93기동대는 독일군의 전선에 균열을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이름도 비슷해서, ‘좌(左)좌진 우(右)유진’이라고 불렸다.

정작 김좌진과 김유진의 성격이나 지휘 스타일은 상극이라서, 두 사람 모두 그렇게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김좌진이 맹장이라면 김유진은 지장(智將)이었다.

“귀관이 쓴 육군대학 졸업논문은 매우 흥미로웠네. 그래서 직접 만나 보고 싶었지.”

김유진은 최근에 3년 과정의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참령 계급으로 육대에 입학한 특이한 케이스였다.

일반적으로 육대는 30세 이하의 정위와 부위를 선발하는데, 공교롭게도 김유진은 광무 18년(1914) 임관 이후 산동 전역과 동부전선에 모두 파병되어 육대에 입학할 시기를 놓쳤다.

그 사이에 공훈을 세워 예외적으로 26세에 참령까지 빠르게 진급했고, 원칙적으로 입학하기엔 계급이 높았지만, 종전 이후 노백린의 강력한 요구로 예외적으로 육군대학에 입학했다.

육군대학은 군부 내 최고 엘리트코스였고, 김유진은 지휘관으로서뿐만 아니라 참모이자 군사이론에서도 탁월했으므로 육대에서도 놓치고 싶지 않은 인사였다. 아니, 당장 강단에 서도 손색이 없었다.

“소파전쟁(蘇波戰爭, 소비에트-폴란드전쟁)의 사례로 본 전차와 전투기의 합동작전이라. 이건 김광서 부령의 보고를 떠올리게 하더군.”

“김광서 부령님의 보고서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김유진의 재능을 탐내는 곳은 많았으므로, 그는 육대에 재학하는 동안 참모본부 병기과에서 근무하며 새로 도입되는 전차와 전투기를 감독했다.

전차와 전투기를 활용하는 현대적 전술의 적극적인 지지자인 김유진은 육대 졸업논문에 현대전의 양상을 예측하는 논문을 썼고, 이는 군부 상층부뿐만 아니라 황제 이선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흥미롭군. 귀관의 논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겠나?”

“예, 대원수 폐하.”

갑자기 대원수에게 자신의 논문을 브리핑을 하게 된 김유진은 내심 당혹스러웠지만, 침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설명을 이어 나가던 김유진은 문득 옛일을 떠올렸다.

* * *

광무 6년(1902) 건원절, 근위사단의 열병식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위풍당당한 행진을 보았다.

고위관료인 부친의 손을 잡고 열병식을 지켜보던 소년이 물었다.

“저기 차 위에 있는, 가장 멋진 옷을 입은 사람이 누구예요?”

“대원수 폐하이시다.”

“와, 정말 멋지다. 나도 커서 대원수가 되고 싶어요!”

순간 부친의 얼굴이 굳어졌다.

“쉿! 이 나라에서 대원수는 황제 폐하만이 될 수 있어. 다시는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알았지?”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해도, 불경(不敬)이 될 수 있는 말이었다. 정작 이선이 듣는다면 어린아이가 대범해서 좋다고 웃어넘겼겠지만, 이미 대한제국에서 황제는 신성불가침한 존재였다.

소년 김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부친의 당부대로, 두 번 다시 대원수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광무 14년.

소년 김유진은 자라 열여덟 살의 수험생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기로 소문이 난 김유진은 황성대학에 합격하리라 자신했다.

유진은 특이했다. 수재 청년들은 대부분 관리로 입신양명을 꿈꿨지만, 그는 부친처럼 경제학을 공부하고 당대에 유행하는 최신 직업, ‘사업가’가 되리라고 마음먹은 터였다. 바야흐로 식산흥업에 자본주의가 팽창하는 시대 아니던가?

그런데, 부친의 요구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네가 육군무관학교에 가길 바란다.”

“예? 그럼 무관이 되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리 가문을 되살리려면, 장남인 네가 관직에 올라야 한다.”

“그럼 황성대학 졸업 후에 고등문관시험을…….”

“박영효 그 작자가 권좌에 있는 이상 너는 절대 문관으로 성공 못해! 앞으로 박영효의 권세는 적어도 20년은 갈 거다. 황제 폐하의 직속인 무관만이 그자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게야.”

김유진의 부친 김상준은, 장남을 향해 전에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김상준은 몰락한 양반이었으나, 개화의 시대를 만나 운명이 바뀌었다.

갑신경장 이전부터 개화당에 입당하여 행동대원이 되었고, 갑신경장 이후에는 국비 미국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영어와 근대 경제학을 배웠다.

귀국 후에는 상공부 관료로 특채되어 실무를 맡았고, 당시 총리인 김홍집과 유학 선배인 유길준의 눈에 들어 빠르게 승진했다. 개화당 내에서도 유길준 계파에 합류한 김상준은, 유길준 내각에서 상공부대신으로 입각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순간이 바로 김상준의 정점이었다.

광무 13년, 유길준이 퇴임하고 박영효가 신임 총리가 되었다. 유길준의 후임자인 박영효가 전임자와 사이가 나쁘다는 건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유길준은 김상준을 탁지부대신으로 추천했으나, 박영효는 유길준의 사람을 내각에 남겨 둘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유길준에 대해 정치적 공세를 벌였다. 원훈인 유길준을 직접 공격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크니, 그 측근인 김상준을 수뢰 혐의로 집중 공격했다.

수뢰 혐의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상공대신인 김상준이 기업들과 연결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는 관치경제였으므로, 정치와 경제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훗날 드러나듯이, 박영효 계파는 정경유착으로 훨씬 큰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결국에 본질은 권력투쟁이었다. 파워게임에서 패배한 유길준은 뒷방으로 물러났고, 김상준은 모든 책임을 지고 낙마하여 정계에서 은퇴해야 했다.

“박영효 네 이놈! 제 놈은 몇 배로 더 해 먹었으면서, 네놈 권세가 어디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

김상준은 분노했지만, 당시 박영효의 권력은 정점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박영효는 총리이자 개화당의 총수였고, 황제의 신임을 받아 공업화 정책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박영효의 몰락을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김상준은 기업계로 진출하는 길을 택했다. 상공업계의 인맥을 통해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와 관직에 대한 미련은 버릴 수가 없었고, 자신이 아니라면 총명한 장남이 국가를 위해 대업을 이루길 원했다.

“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업가가 되고 싶습니…….”

“그건 네 동생이 하면 된다. 장남인 너는 관직에 올라 입신양명하고 국가를 위해 일해야지! 이제 무관의 시대가 올 거다. 나는 너를 믿는다.”

“제가 사업을 하고 유신이가 무관학교 가면 되지 않을까요? 이름도 김유신이니 무관이 될 운명 아닐까요?”

“장남이 되어가지고 의무를 동생에게 떠넘길 생각이냐? 너, 어릴 적에 대원수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대원수는 못 되지만, 대장은 될 수 있다. 박유굉 대장을 봐라. 얼마나 권세가 대단하냐.”

“아니, 그건 어릴 적에 뭣도 모르고 한 말이잖아요. 저는 무관에 어울리는 성격이 아닌데요.”

불만스러워하는 아들을 향해 부친은 타협책을 내놓았다.

“장군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령까지만 올라도 퇴역 후에 갈 수 있는 곳이 많을 게다. 정령까지만 해라.”

부친의 판단이 자식의 운명을 결정하던 가부장제의 시대에, 특히 장남인 유진은 부친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약속하신 겁니다. 딱 정령까지만 할 겁니다.”

“그래, 그 후에는 네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김유진의 인생항로는 바뀌고 만 것이었다.

그 자신의 생각과 달리, 김유진은 대한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교가 될 자질이 있었다.

* * *

‘결국 박영효가 이렇게 실각할 줄 알았으면, 내가 굳이 무관학교 갈 필요도 없었잖아?’

광무 23년(1919), 철옹성 같던 박영효의 권세는 뜻밖에도 빠르게 무너졌다.

그 10년 사이에, 김상준의 금산기업은 한국-일본-미국을 잇는 대형 무역회사로 성장했다. 김상준은 정계에 복귀하지는 않았지만, 신민당의 정치자금을 맡았다. 정계의 떠오르는 총아인 이승만, 안창호와 모두 관계가 두터운 김상준은 배후에서 개화당-신민당 연립정부가 성사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 좋아. 벌써 부령이니 별다른 사고 안 치면 5년 후에는 정령이겠지? 그래도 서른다섯이니 새 인생을 살기에는 충분하네. 이 호황기는 당분간 계속되겠지. 사업가로 인생을 살기에 딱 좋은 시기야.’

김유진은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렸지만, 정작 군부에서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유능한 장교를 왜 퇴역시켜 준단 말인가? 하물며 이제는 황제의 눈에까지 들어선 상황이었다.

‘김유진, 김유진이라고? 원역사에서 어떤 인물이지? 김경천, 지청천, 홍사익, 김좌진 등은 누군지 다 알겠는데, 대체 김유진은 누구야? 전 상공대신 김상준의 장남? 어디서 이런 천재가 튀어 나왔지?’

이선은 열심히 기억의 회로를 돌렸지만, 도저히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역사의 변화가 만들어 낸 건가? 하긴, 이미 수많은 인간의 운명이 바뀌었는데, 원역사에는 없었던 천재가 튀어나오지 말란 법이 없지. 미래를 알지 못하는데 이런 전략적 안목을 갖고 있다면, 김유진이는 타고난 천재임이 틀림없어.’

이선은 노백린이 상신한 김유진의 육대 졸업논문을 읽고 감탄했다. 김유진은 장차 ‘전격전’의 양상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아직 초보적인 단계의 가정이었지만, 1922년 시점에서 이런 시야를 가졌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페트로그라드 전투의 공로자로서 지휘관으로서 검증되었고, 장군을 보좌하는 참모장교로도 유능했고, 대국적인 시야도 넓고 군사이론가로서도 탁월했다.

‘군부 삼대장, 홍범도와 이동휘와 노백린을 합친 완전체 느낌인데? 앞으로 중용해야겠어.’

김유진의 인생계획과 달리, 이선은 그를 앞으로 영원히 부려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코 ‘사직을 윤허하지 않을’ 터였다.

“잘 들었네. 짐의 기대 이상이야. 앞으로도 활약을 기대하지.”

“황공하옵니다, 대원수 폐하.”

“좋아. 이제 귀관의 임무를 설명하지. 곧 워싱턴에서 국제회의가 개최되는 건 알고 있겠지?”

“예, 폐하.”

원역사보다 몇 달 늦어지기는 했지만, 미국 대통령 우드가 요청한 10개국 회의가 워싱턴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주된 논의는 동아시아-태평양 문제, 특히 중국 이권 문제와 해군 군축 문제였다.

“귀관을 주미대사관 주재무관으로 임명하니, 다가오는 워싱턴 회의에 만전을 기하도록.”

이미 외무대신 이승만을 전권대사, 군무협판 박용만을 부대표로 하는 사절단이 꾸려져 있었다. 군사 논의는 주로 해군이 될 예정이라, 해군국장 신순성 부장과 보스포루스 해협통제위원을 역임한 안중근 부장이 군부를 대표할 예정이라 뜻밖의 명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육군이 이번 회의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되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선의 눈짓에 노백린이 대신 답했다.

“귀관의 역할은 주재무관이자 정보장교일세. 정관계 및 군부와 인맥을 트고, 다양한 정보를 얻고, 분석해서 보고하는 게 일이지. 나는 귀관의 영어실력과 정세판단력을 높이 평가해서 대원수 폐하께 추천했네.”

“황공하옵니다.”

정보장교는 처음이었지만, 김유진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미국의 경제성장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 지금이 기회야. 다양한 인맥을 트고, 전역 후에 금산의 샌프란시스코 지부를 맡으면 좋겠지. 뭐, 군대에 있는 동안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김유진은 일반적인 군인들과 달랐다. 국가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부르짖는 동료들과 달리, 훨씬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미국에서 자란 덕일 터이지만, 그래서 동료장교들은 그가 썩 내키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이 노백린과 이선의 눈에 들었다.

“귀관은 미육군사관학교장 더글라스 맥아더 준장과 상당한 친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예, 상당한 친분까지는 아니고, 동부전선에서 안면을 튼 정도지요.”

주미공사를 역임한 부친을 따라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김유진은 영어가 유창했고, 사고방식도 그만큼 자유롭고 유연했다. 미국인들과도 말이 잘 통했고, 기동대를 맡기 전에는 주차 러시아 한국군 사령부의 영어통역을 전담했다. 자연히 미군 동부전선 참모장인 맥아더와도 친분을 맺게 되었고, 맥아더는 김유진의 능력과 전공을 인상 깊게 보았다.

“그 맥아더 준장이 지금은 육군사관학교에 있지만, 곧 워싱턴으로 돌아갈 예정이네. 우드 대통령이 옛 참모장 맥아더를 신뢰한다는 건 유명하지. 장차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귀관은 그와 더 친분을 쌓도록 하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야.”

맥아더는 동부전선의 상관인 우드가 대통령이 되자 자연스럽게 군부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다. 미군 최연소 장군이자 최연소 육군사관학교장이 되어 웨스트포인트의 개혁을 이끌었고, 임기가 끝나자 우드의 부름을 받아 워싱턴으로 발령받았다.

‘아, 그 자의식 과잉, 자칭 미국의 시-저한테 잘 보여야 한다 그건가. 하긴, 그 양반이 똑똑하긴 하지.’

김유진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삼가 명을 받듭니다.”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이선이 특명을 내렸다.

“귀관의 활약을 기대하겠네, 김 부령. 그리고 귀관에게 내릴 특명이 하나 더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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