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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 3부-125화 (709/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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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121화 새로운 질서의 모색

과연 이선은 정치적 인간이었다.

아들의 결혼은 아버지로서 기쁘고 감개무량한 일이었지만, 이선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기쁨을 거두고 정치와 외교의 무대로 복귀했다.

지금처럼 새로운 질서가 모색되는 시기에는, 결코 마음을 놓을 여유가 없었다.

‘워싱턴 회의로 한영일동맹이 만료되더라도, 영국과의 우호는 유지되어야 해. 20세기 외교 원칙 제1호는 미국과 친밀해지는 것, 2호는 영국과 우호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외교의 전환점이 오고 있었다. 단순히 19세기 비밀외교가 공식외교로 바뀐 게 아니었다. 제국주의 세계질서를 대표해 오던 영국과 유럽대륙을 대신해 미국이 20세기 세계질서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미영 간의 대서양 동맹은 언젠가 결국 현실이 될 터. 역사가 바뀌었으니 일본이 앞으로 어떤 태도를 보일지 모르지만, 장차 미국과 태평양의 패권을 놓고 대립한다면, 대한은 무조건 미영과 밀착해야 한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세계혁명과 일본의 야심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로서 대한의 외교적 가치를 어필해야 해.’

이것이 바로 1922년 이선의 큰 그림, 대한제국의 외교적 구상이었다.

‘수십 년간 그렇게 공을 들였음에도, 영미는 여전히 일본을 더 선호한다. 그 환상을 깨 줘야지.’

분명 현시점에서는, 여전히 영국은 한국보다 일본을 더 선호했다. 런던은 ‘동양의 영국’이자 수제자를 자처하는 해양국가 일본을 기특하게 여겼다. 영국 정부와 군부에서는 한국은 몰라도 영일동맹은 포기할 수 없다는 정서가 팽배했다.

심지어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워싱턴에서는 한국보다 일본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의 해군력 강화에 의심하는 시선을 보내면서도, 팽창하는 미국 금융자본의 대일 투자액은 갈수록 증대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현시점에서는 일본의 국력과 대외 영향력이 더 크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한국이 단기간에 근대화에 성공하고 이선이 외교적인 노력을 다했다지만, 20년 더 빨리 시작되어 축적된 일본의 국력과 자산을 무시할 순 없었다.

‘1920년대의 선택이 30년대와 40년대의 운명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선의 계산대로라면, 바로 1920년대가 역사적인 변곡점이 될 순간이었다. 한국이 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떠오를 절호의 기회였다.

때마침 동시에 진행되는 워싱턴 회의와 웨일스 공 방한은 이선의 큰 그림을 적용할 기회였다.

“영국 정부는, 미국이 요구한 영일한동맹의 만료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귀국의 이해를 바랍니다.”

한영수교 40주년 특사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전 주한영국공사 존 조던(John Jordan) 경이 영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주한공사로 1896년부터 1906년까지 10년, 주청-주중공사로 1906년부터 1920년까지 14년을 재임한 조던은 어니스트 사토우와 함께 영국 동아시아 외교 최고 전문가였다.

“귀국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현시점에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나라는 없지요.”

본래 로이드조지 내각은 1923년 8월로 만료가 다가오는 한영일동맹의 연장을 원했지만, 미국과의 협력과 동맹 연장 중에서 양자택일하라는 미국 정부의 압력에 결국 동맹 종료를 선택했다.

“다만 대한제국 입장으로는 안보 공백을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소비에트 정권은 옛 러시아 영토를 넘어 세계혁명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몽골과 만주를 넘어 중국의 소비에트화가 목표지요. 이대로 한영일동맹이 만료되면, 소비에트 정권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까 우려가 됩니다.”

이선이 짐짓 소비에트의 위협을 강조하며 안보 공백 우려를 표명하자, 조던은 대안을 제시했다.

“귀국의 우려는 영국 정부 역시 충분히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렇기에 영국 정부는 영국, 미국, 일본, 한국 4개국이 공동으로 동아시아-태평양의 안보를 보장하는 협상을 희망합니다.”

바로 한국이 바라던 바였다. 영국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내심 반가웠지만, 이선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거듭 우려를 표명했다.

“귀국 정부의 계획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태평양 문제에서 일본과 협력하길 원치 않을 겁니다. 근래 일본의 해군력 확대는 지나치게 공격적이며, 미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일본 군부가 10대 5, 혹은 10대 6의 해군 군축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얼마 전 방일했을 당시, 하라 수상은 미국과 협력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미국은 회의 개막 첫날에 미국·영국·일본의 해군력을 10:10:5로 제한하자고 제안했다. 5는 질러본 것에 가깝고, 10:7을 요구하는 일본에 맞서 10:6을 관철하기 위함이었다.

하라 내각은 대미협력외교 방침을 정하고, 미국이 요구하는 10:6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총리 하라 다카시와 대장대신(재무장관)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경제력에서 압도하는 미국과의 군비 경쟁은 재정 파탄과 망국으로 가는 길임을 인지하고 있었고, 야당 역시 예산의 3할을 차지하는 건함 예산의 축소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하라 수상은 현실주의자니까요. 짐도 그를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짐은 이웃 나라에 사는 만큼 일본을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쓰시마해전으로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할 수 있었기에, 함대에 대한 해군의 열망은 집요합니다. 해군은 절대로 10대 7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일본 해군은 미국을 가상적국으로 상정했습니다. 대미 전력 7할 유지는 그들의 신성한 과제입니다.”

일본 해군은 ‘대미(對美) 전력 7할’에 집착했다. 하라 내각의 해군대신이자 해군 군축회의 수석대표인 가토 도모사부로(加藤友三郎) 제독은 현실주의자로, 미국과의 건함경쟁과 미일전쟁은 불가능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 내각의 방침을 지지했다.

하지만 쓰시마해전 승리 이후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리고 있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해군의 보수파들은 군비축소에 결사반대했고, 해군력 확대가 일본의 지상과제라 믿는 소장파들이 여론몰이에 합세하면서 하라와 가토는 곤경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하라 수상은······.”

“압니다, 대미협력외교. 그런데 하라 수상도, 가토 대신도 군부를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이미 그들은 미국의 압력으로 산동 이권을 중국에 반환하는 문제에 대해 격분하고 있습니다. 하라 수상 자신도 끊임없이 극우파의 암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한영일동맹의 연장이라면 모를까, 4국 협조체제는 일본 군부가 어깃장을 놓을 겁니다.”

하라 내각은 미국과 손을 잡을 의사가 분명했지만, 이선은 교묘하게 일본의 입장을 왜곡했다. 군비축소에 반대하는 보수파와 호전적인 소장파들이 일본을 대표하며, 정부도 통제 못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짐 역시 하라 수상이 해군의 불만을 잠재우고 군축을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4국 협력체계가 이뤄진다면 바라던 바이지요.”

“혹여 폐하께서는 복안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그건 일본 내부의 일이지요. 어찌 개입하겠습니까.”

이선은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러고 보니, 일본은 대한제국도 해군 군축조약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지요?”

“예, 영국·미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에 이어 6번째 해군 강대국이니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니, 어떻게 5대국과 비교합니까? 한국 해군은 전함 3척이 전부입니다. 귀국에서 구매한 전함, 독일로부터 배상받은 카이저급 전함과 몰트케급 순양전함이 전부란 말입니다.”

1919년 말,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하여 독일 대양함대는 연합국에 분배되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각 25%씩을 차지하고, 미국·이탈리아·일본·한국이 나머지 50%를 차지했다.

대한제국은 카이저급 전함 1척, 몰트케급 순양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6척을 분배받았다.

카이저급 2번함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Friedrich der Grosse)」는 피휘(避諱) 관습을 깨고 대한제국 전함 「태조 고황제」로 명명되었고, 순양전함 「몰트케(Moltke)」는 1019년 귀주대첩 승전 900주년을 기념하여 「강감찬」으로 명명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태조 이성계로, 참모총장 몰트케가 인헌공 강감찬으로 환생한 격이었다.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전함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마침내 전함 3척을 확보하게 된 대한제국 해군으로서는 눈물 나게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와 오스만이 혁명과 패전으로 동반 몰락하면서, 한국 해군은 졸지에 세계 6위권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5대국은 한국에 충분한 건함 저력이 있다고 보는······.”

“알다시피 대한제국은 대륙국가, 육군국입니다. 우리는 국토를 방어하고 동양 평화를 지키는 데에만 관심 있을 뿐입니다.”

시베리아 개입과 연해주 점령으로 인해 육군 예산이 크게 증대하고, 해군의 건함 계획은 배상함을 제외하면 줄줄이 연기된 상황이라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한국을 군축조약에 묶으려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부터 먼저 제한해야 맞지 않습니까? 이들의 군함 배수량은 대한제국보다 많습니다.”

남미의 3국은 1900년대에서 1910년대 초에 걸쳐 이른바 ‘ABC(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 건함경쟁’에 돌입했고, 국력과 경제력에 비해 과도한 군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재정적인 이유로 건함을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5대 해군국도 굳이 이들을 군축으로 제약할 생각이 없었다.

5대 해군국, 특히 일본이 보기에 한국은 앞으로 해군력이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한 나라였다.

동아시아 유일의 해군강국으로 남고 싶은 일본은 한국도 군축조약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영국도 동조하는 입장을 보였다.

“남미 3국은 재정적인 문제로 더 이상 건함경쟁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대한제국 역시 함대를 건설할 의지도,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럴 재정적 여유가 있다면, 차라리 상비사단을 더 늘리겠지요.”

이선은 일부러 앓는 소리를 냈다.

‘물론 지금 당장은 해군력을 강화할 여유가 없지. 일본이 미국과 건함경쟁을 할 수 없듯이, 우리도 일본과 건함경쟁 안 하지. 대신 우린 잠수함과 공군력 증대에 집중할 거라고. 본격적인 해군력의 증대는 한 10년 뒤에나. 그때는 항공모함도 도전해 볼 수 있겠지.’

“아무르 임시정부가 보유한 함대, 전 흑해함대가 대한제국 해군에 편입될 거란 소문이 자자합니다. 특히 이번 국혼의 지참금 명목으로······.”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아무르 정부는 독립국입니다, 대한제국 소속 아니라. 하물며 황태자비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살기로 했는데, 무슨 시대착오적인 지참금입니까? 아무르 함대는 콜차크 제독의 지휘하에 러시아 해군의 전통을 이어갈 겁니다.”

드레트노트급 전함 2척을 포함한 백군 흑해함대는 옛 러시아제국 해군을 계승했다. 극동으로 이전한 흑해함대는 ‘아무르-태평양 함대’로 명칭을 변경, 아무르 임시정부의 주요 자산이 되었다.

열강들은 아무르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의 보호를 받는 위성국이라 의심했고, 국혼도 그 절차라고 받아들였다. 그리되면 아무르 함대도 한국 해군 산하가 될 터이니, 일순간에 드레트노트급 전함 5척을 보유하게 되는 셈이었다.

“폐하, 영국 정부는 한국 역시 국제사회의 주요한 축이 된 이상, 군비축소와 평화라는 모범을 먼저 보여 주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일랜드와 이집트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인도에서 총질하는 놈들이 평화 타령하는 거 보소.’

이선은 아니꼬웠지만, 표정은 부드럽게 했다.

“귀국도 아시다시피, 대한제국은 소비에트의 붉은 위협에 맞서 아시아를 방위하는 육군국입니다. 우린 건함에 관심도 없으니, 워싱턴에서 실질적인 논의를 바랍니다.”

워싱턴 회의에 임하는 대한제국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1. 한영일동맹을 한미영일 4국 협상 체제로 대체. 불가할 경우 별도로 한미관계, 한영관계 강화.

2. 해군 군축조약에 불참. 은밀히 미국과 협력하여 일본의 해군력 제약을 지지.

3. 일본은 산동 이권을 중국에 반환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지지.

4. 중국의 ‘주권 보호’와 열강의 침탈 방지.

5. 만주 지배의 독점적 권리. 대신 경제적 이익은 열강과도 과점.

6. 열강의 아무르 임시정부 승인과 한국의 연해주 장악 인정.

‘1910년대와 달리, 이제 슬슬 한국의 확대에 슬슬 제동이 걸리는군. 저들이 보기에 우리도 이제 열강의 일원이니 제약을 걸어야 한다 이건가? 으음, 앞으로도 계속 약소국 흉내 내고 싶었는데.’

대한제국은 이제 명실공히 세계 ‘8대 열강’이었다.

‘빅3’, 즉 3대 강국인 미국·영국·프랑스, 패전과 혁명으로 국제사회에서 배제되었으나 여전히 강대국으로 복귀할 준비가 되어 있는 독일과 러시아에 이어, 일본·이탈리아·한국이 뒤를 따랐다.

열강들의 몰락으로 ‘졸지에 세계 6위권이 되어 버린’ 해군과 달리, 육군은 정말로 세계 5위권으로 평가받았다.

패전국 독일과 도나우 연방이 육군력 보유가 제한되고, 일본이 육군력 대신 해군력에 집중하며, 소비에트 러시아의 군사력이 파악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 육군은 미국·프랑스·영국·이탈리아와 함께 세계 5위권의 육군을 보유한다고 평가되었다.

이러자 과거에 과소평가 받았던 것과 달리, 한국의 위상은 크게 올라간 상태였다. 상승기에 이른 한국의 군비와 세력 확대도 일정 부분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열강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원 역사의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아 최대한 온건하게 세력 확대에 나서고, 열강과 협조해도 슬슬 태클이 걸려 오네. 동양 주제에 강대국이 되는 건 못 봐주겠다 이건가? 그럼 우리 말고 더 야욕이 가득 찬 일본을 먼저 때려야지.’

국력이 일취월장한 이상 견제구가 들어오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이선은 최대한 열강의 견제구를 한국이 아닌 일본이 대신 맞게 해 주고 싶었다.

‘특히 영국은 대한보다 일본을 더 선호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으니. 어떻게 하면 저들의 코를 꿸 수 있을까? 미국과 달리 영국은 만주와 연해주 이권에도 크게 관심 없고. 뭐로 낚으면 좋을까.’

웨일스 공의 방한에 대한제국의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건, 외교적 구상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국이 한국보다 일본에 더 경도되어 있다는 걸 확인한 이선은, 영국을 유인할 비장의 수를 탐지했다.

그런데 그 ‘비장의 수’는, 이선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드러났다.

“이 밤 중에 어인 일인가? 영친왕.”

“폐하, 웨일스 공에 대해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웨일스 공 방한의 접반사를 맡고 있는 이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알현을 청해 왔다.

“뭔가, 말해 보게.”

“그게, 차마 아뢰기가 어려운······.”

“무슨 일이든, 당장 보고하게.”

이영의 표정을 보고 이선은 심상치 않은 소식임을 직감했다. 황형의 압박에, 이영은 얼굴을 붉히며 보고를 시작했다.

작가의 말

사실 영미권의 일본 선호와 한국 경시는 19세기말부터 지속된 전통이라, 아무리 국력이 신장하고 외교적 노력을 다해도 쉽게 뒤집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본도 가만히 놀고 있었던게 아니고, 축적되어온 자산은 결코 무시할수 없기에...

??? : 하지만 치명적인 정치질과 결정적인 삽질이 등장한다면 어떨까?

10월 10일 대체공휴일은 휴재입니다. 대신 이번주처럼 주중 연참하거나 주말 연재로 보강해서 주5회는 지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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