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36화 이토 암살
시간을 잠시 거슬러, 다이쇼 11년(1922) 초.
전(前) 육군 중위 사토 히로시는 15년 형기를 채우고 석방되었다.
그간 히로시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가 쏟아져 들어왔지만, 정부는 쉽게 사면령을 내리지 못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정부 고관 2인을 살해하고 징역 15년을 받았으니 실로 관대한 처분으로, 이미 감형된 것이다.’라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그가 석방되면 전국의 ‘지사(志士)’를 자처하는 자들이 준동할까 우려해서였다.
정부는 형기 만료로 석방되는 히로시를 향해 정치행동을 금하는 서약을 요구했고, 그는 받아들였다.
“나는 이미 불법(佛法)에 귀의하였습니다. 어떠한 불법(不法)적 행위도 저지르지 않을 것을 맹세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히로시는 모범수였다. 형기를 치르는 동안 불교에 귀의했고, 불경을 읽고 사색하며 모범적인 형기를 보냈다.
하지만 단신으로 조슈벌을 박살 낸 능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육군과 조슈벌이 몰락한 이유가 히로시 때문이라 생각한 조슈벌 잔당이 옥중 살해를 기도했으나, 러일전쟁의 지옥도에서도 살아남은 히로시는 오히려 암살자를 제압했다.
깜짝 놀란 정부는 히로시를 육군교도소에서 일반교도소로 옮기고, 상대적으로 쾌적한 특급 정치범 독방에 옮겨 특별관리대상으로 두었다.
“간적을 처단한 사토 지사께서 나오신다!”
“사토 히로시 지사!”
석방되는 사토를 향해 무수한 환영이 쏟아졌다. 일본의 ‘지사’ 숭배 풍토는 정치적 암살자를 신성화했고, 특히 본인이 전쟁영웅으로서 만주 참사의 주범인 가쓰라와 데라우치를 처단한 사토를 향한 동정과 숭배는 대단했다.
무수한 정치단체, 극우뿐만 아니라 심지어 좌익에서도 히로시를 초청하였으나, 그는 정치활동을 일제 고사했다.
“본인은 이미 불법에 귀의하였으니, 속세의 일에는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부에 서약한 히로시는 일체의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옥중에서 받아들인 불교 종파는 일련종(日蓮宗, 니치렌)이었다.
생활불교를 지향하는 일련종은 다수의 신도를 거느렸는데, 메이지 시대에 접어들어 종교적 이상주의와 결합하여 현실에 불국토를 성립시킨다는 사상으로 발전했다.
일련종의 일파는 급진사상과 결합하여 혁명적 세계관을 갖추게 되었는데, 바로 기타 잇키가 일련종 급진파의 대부였다.
“혁명은 지사 1인의 테러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각성한 인민의 봉기로 이뤄지는 것이다.”
기타 데루지로는 1907년 1.26 사건에 연루되었다. 사토 히로시가 그의 저작을 읽고 심취했다는 사실로 인해, 일본 정부의 요시찰대상이 되어 중국으로 도피했다.
중국으로 도피한 기타는 손문, 송교인 등과 접촉하며 신해혁명에 투신했다. 이때 이름을 봉기를 의미하는 ‘잇키(一輝)’로 개명했다.
국민당 중에서도 송교인 파벌에 속했던 기타는 중국혁명이 원세개나 단기서와 같은 군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걸 보고,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되었다.
“군부를 포섭하여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 혁명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군인들을 다수 만드는 데 성패가 달렸다.”
1920년이 되어서야 사면령을 받은 기타는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급진적 국수주의 세력과 손을 잡고 ‘국가개조운동’에 나섰다.
“사토 지사, 천황의 성총(聖聰)을 흐리고 만주 벌판에 수많은 피를 흘리게 한 간적을 처단한 지사의 위명(威名)을 수많은 청년이 본받고 싶어 합니다. 지사는 이대로 역사 속에 묻힐 사람이 아닙니다.”
“소생은 이미 불법에 귀의하고,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터인지라······.”
“정치 활동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일련종의 일원으로서, 지상에 불국토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어 주십시오.”
“그렇다면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피 끓는 젊은이들에게 모범이 되어 주십시오. 지사의 경험을 회고록으로 출판하십시오. 강연의 방식도 좋습니다.”
혁명 혹은 쿠데타를 꿈꾸는 기타는, 히로시와 같은 ‘지사’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히로시가 대중적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걸 보고,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히로시도 과거 자신이 감탄했던 기타에게 힘을 보태기로 결심했다. 한때 ‘유신혁명’을 꿈꿨던 그 자신도, 기타의 주장에 공감하는 바였다.
“워싱턴 조약의 결과로 우익들이 분개하고 있다. 코민테른의 확장에 좌익들이 준동하고 있다. 전시 호황의 좋은 시절은 오직 간신과 재벌들만이 누렸을 뿐이다. 국민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고통은 분노가 될 것이고, 분노는 혁명의 거름이다. 국민은 러시아와 독일에서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기타는 1924년으로 예정된 보통선거에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정부는 의회와 별개로 돌아가는데, 의회에서 민의가 반영될 리가 없었다.
“일본은 머지않아 혁명적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여, 젊은 장교들을 포섭해야 한다. 간적을 베어 버린 육군 중위 사토 히로시 지사는 피 끓는 장교들의 모범이 되어 주겠지.”
‘사상가’ 기타 잇키와 ‘지사’ 사토 히로시의 결합은 더 많은 추종자를 양산했다.
당장 군부에 추종자가 확산되는 건 아니었지만, 재야에서는 기타를 추종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존황토간! 천황을 받들어 간신을 토벌한다!”
기타의 추종자들은 ‘존황토간(尊皇討奸)’이란 기치를 내걸었다.
천황 주위의 ‘간신’들을 토벌하여 혁명을 완수하자는 주장에 적잖은 청년들이 동조했다.
기타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배후에서 움직였다. 황태자 국혼으로 황실과 정부-원로 사이에서 틈이 발생했을 때, 기타는 추종자들로 하여금 ‘찌라시’를 배포해 정부와 원로가 황실을 모독하고 있다는 여론을 부추겼다.
이 사건에 연루된 하라와 이토를 향한 국수주의자들의 어마어마한 비난이 쏟아졌다.
기타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천황과 황실에 대한 존중심이 조금도 없었다. 일본 국민이 숭배하는 천황과 황실을 이용해서 ‘혁명’을 완수하는 게 목표였다.
* * *
도쿄, 어느 뒷골목의 여관.
“이토, 이 천하의 역적놈. 로탐 짓도 모자라 이제는 영미의 개 노릇까지 해! 그때 폭탄을 맞고 죽었어야 했는데, 다리만 잃었지.”
한 사내가 ‘찌라시’신문을 읽으면서 분노로 몸을 떨었다.
1914년 산동 전역 참전용사로 훈장을 받았던 사내는, 전역 후에도 만주와 중국을 누비며 ‘대륙낭인’ 노릇을 했다.
만주의 아시아주의자들과 접촉하던 사내는 주청한국공사관의 요주의대상에 올랐고, 만주에서 퇴거당해 일본으로 추방됐다.
그런데 워싱턴 회의 결과 한국은 만주 장악을 공인받았는데도, 일본은 산동을 중국에 넘기다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매국노! 아직도 목숨을 붙이고 하라의 배후에서 조종을 하고, 감히 천황 폐하의 성총을 흐려 다카하시와 같은 영미 앞잡이를 후임 총리로 추천하다니. 반드시 제거해야 할 국적이다.”
사내는 하라와 ‘그 배후에 있다고 의심되는’ 이토를 원망했다. 일본 국수주의자들에게 이토는 오래전부터 ‘로탐(러시아 스파이)’이자 서양의 앞잡이였다. 이토의 다리를 앗아 버린 18년 전 테러도 극우 국수주의자들의 소행이었다.
“기타 선생의 말처럼 일본에는 혁명이 필요해. 정부와 의회는 국민의 이익이 아니라 모리배의 이익만을 대표할 뿐이지.”
사내는 일본 급진 사상가 기타 잇키(北一輝)를 추종했다.
15년 전,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를 출간하여 사토 히로시 중위의 ‘거사’에 영향력을 미쳤던 것처럼, 사내는 기타 잇키의 신작 ≪일본개조법안대강(日本改造法案大綱)≫을 읽고 심취했다.
“15년 전 사토 지사(志士)가, 3년 전 장 지사가 그러하였듯, 나는 간적을 일도양단으로 베어 버릴 것이다.”
사토 히로시가 러일전쟁의 책임자인 가쓰라와 데라우치를 베어 버린 것처럼, 만주의 아시아주의자 장삼이 이완용과 스톨리핀을 암살한 것처럼, 자신은 일본의 ‘간적’을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사내의 이름은 아사히 헤이고(朝日平吾), 기타 잇키의 사상과 사토 히로시의 ‘의거’를 숭배했다.
「天誅」.
이토 히로부미, 마쓰가타 마사요시, 사이온지 긴모치 등 원로들과,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등 정부 고관들의 집에 ‘천주(天誅)’라고 적힌 협박장이 날아들었다.
천주란 곧 ‘천벌(天罰)’을 의미하고, 일본에서는 하늘을 대신해서 인간이 벌을 대신하겠다는 의미도 있었다.
막부 말기에서는 존황양이파들이 정적들을 암살하면서 천주란 단어를 사용했다.
“천주? 같잖은 놈들. 지금이 아직도 막말인 줄 아나. 그때의 혼란기는 전혀 모르는 애송이들이.”
막부 말기의 동란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토는 코웃음을 쳤다. 이토가 속한 조슈파가 천주라는 이름으로 막부 인사들을 암살했기에, 그 자신이 이런 협박장을 받는 것 자체가 가소로웠다.
“각하, 테러 위협에 대비하여 당분간 거동을 자제하심이······.”
“지금까지 나를 노렸던 암살이 얼마나 많았던 줄 아나? 다리를 잃고도 이 이토는 살아남았네.”
이토는 지팡이를 들어 바닥을 내리쳤다. 비록 오른쪽 다리는 의족으로 대체되었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그럼 경호라도 강화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라 총리와 다카하시 대신은 이미 경호를 엄중히 강화했습니다.”
“어차피 내 나이 여든이 넘었는데, 이런 늙은이를 죽여서 어따 쓰려고? 경호는 알아서 하게. 단, 늙은이 취미생활은 방해하지 말게나.”
“예, 각하.”
다리를 잃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성생활에 약간의 지장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토는 ‘저 호색한이 다리가 없어서 여자를 못 건드릴 테니 어찌할꼬?’라는 반대파의 조롱을 일축했다.
“오른쪽 다리가 없다지만, 가운데 다리는 멀쩡하네. 손과 혀도 멀쩡하고.”
이토는 80이 넘어서도 여전히 왕성한 정력을 발휘하며, 단골 요정(料亭)을 들락거렸다.
정계에서도 뒷방 늙은이 신세,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품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좋은 술을 마시며, 아름다운 여인의 허벅지를 베개로 삼아 누우니, 천당이 또 어디에 있으랴? 젊음의 활력을 되찾는 느낌이구나.”
“아이, 이러시면 안 돼요.”
이토는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시중드는 게이샤를 끌어안았다. 게이샤의 앞섬에 손을 넣고 가슴을 주물럭거리면서도, 머리로는 나라의 일을 생각했다.
‘영미와 국제질서를 협조한 건 잘되었다마는, 조선이 얻은 게 너무 많아. 만주와 연해주의 지배를 공인받은 셈이 아닌가. 나 참, 언제 조선이 이렇게 강성해져 일본을 위협하는 처지가 되었단 말인가.’
이토는 문득 40년 전을 떠올리며 아이러니를 느꼈다. 임오년(1882) 구식군인이 반란을 일으켜 주조선 일본공사관을 불태우고 한양 도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일본은 조선 내정에 개입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완화군 이선. 그 어린아이가 있었기에 역사가 바뀌었구나. 조선의 외교는 참으로 신묘하기 짝이 없으니, 그의 존재가 아니면 뭐겠는가.’
이토가 1885년 천진에서 처음 이선을 대면했을 때, 열여덟 살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약소국의 외교를 이끌어 원하는 바를 쟁취했다.
1891년 오쓰 사건이 터졌을 때 중재를 부탁했던 것도 니콜라이의 ‘친우’ 이선이었고, 조청일전쟁을 마무리하는 시모노세키에서도 이선이 활약했다.
그때만 해도 일본은 조선을 친일 국가로 양성해서 대륙진출의 장기말로 활용하겠다는 정략이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역시 일로전쟁인가. 그래서 내 그리도 개전을 반대했거늘.’
러일전쟁으로 일본의 국력이 깎여 나가는 동안, 한국은 일취월장했다.
한참 뒤떨어졌다고 생각한 한국이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고, 한국은 교묘한 책략으로 만주와 연해주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제 열강의 공인까지 받아 대륙에 확고부동한 세력권을 형성했다.
‘피를 흘리지 않고, 국제정세를 면밀히 살피며, 열강과의 협조를 통해, 교묘한 정략과 외교로 세력권을 확대한다. 이게 바로 내가 추구하던 정치와 외교다. 하지만 멍청한 군바리 놈들이 다 말아먹었지! 그런데 나는 못 한 걸 완화군은 해냈구나.’
이토는 이선이 부러웠다. 자신이 추구하다 실패한 모든 걸, 이선은 이루어 냈다.
세간에서는 이토를 ‘동양의 비스마르크’라고 불렀지만, 이토는 그 호칭을 이선에게 양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선은 비스마르크 못지않은 교묘한 외교로 동양정세, 아니 국제정세를 좌지우지했다.
‘동양의 표트르 대제, 나폴레옹, 비스마르크. 아주 다채로운 인생이구만. 도대체 나와 그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왕의 아들로 태어났고, 나는 비천한 태생이었기 때문인가?’
이토는 막부를 타도한 유신정부 내에서도 신분이 굉장히 비천했다. 유신정부 초기의 1인자, 오쿠보 도시미치 같은 인물은 사쓰마 번주의 직속 가신 출신이었지만, 이토는 평민이나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유신 삼걸, 기도, 사이고, 그리고 오쿠보도 해내지 못한 걸 내가 해냈어. 오쿠보는 백주대낮에 불만세력에게 참살당했지. 메이지 정부의 핵심이었던 오쿠보가 그때 죽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토는 능력으로 출세를 거듭했고, 1878년 오쿠보 사후에는 마침내 일본 정계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를 진두지휘했다.
시대가 지나며 권좌에서 내려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는 근대 일본의 설계자라고 자평했다.
‘나는 지금의 대일본제국을 만들어 냈다. 도대체 내가 완화군만 못한 게 무엇이더냐? 왜 완화군은 전국민의 숭배와 존경을 받는데, 나는 미움과 비난을 받느냐? 왕자와 평민이라는 신분의 벽이란 말이냐? 어리석은 국민들!’
이토는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선이 한국 국민으로부터 숭배받고, 자신이 일본 국민으로부터 미움받는 이유를 타고난 신분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측면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중대한 차이점은, 이선은 국민에게 ‘헌신’했지만, 이토는 ‘군림’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선도 황제로서 군림했지만, 그는 ‘국민의 황제’였다.
이토는 동양 최초의 헌법인 메이지 헌법의 기초자이자 의회내각제를 실시했지만, 동시에 ‘우민’을 경멸했다. 그에게 있어 국민은 천황의 명을 받는 엘리트 관료에 복종해야 하는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민의라는 건 폭주에 불과했다.
‘어리석은 국민에게 정치를 맡긴다고? 아직 100년은 일러. 선택된 엘리트가 정치를 이끌어 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민에게 정치를 맡기면 폭주하고 말겠지. 어림도 없다, 암!’
그렇기에 이토는 영국식 헌정에 반대하고, 프로이센식 군국주의 국가로 가는 길을 열었다. 보통선거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이토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앞날이 걱정이로다. 이대로 가면 일본은 망할 뿐이야.”
“곧 죽을 사람이 앞날을 걱정할 필요야 없지.”
장지문 밖에서 나는 소리에, 이토는 깜짝 놀라 외쳤다.
“웬 놈이냐!”
종업원 옷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수상하기 짝이 없는 사내가 장지문을 벌컥 열어 총구를 이토에게 겨누었다.
“꺄아아악!”
“경호원! 경호원!”
이토는 화들짝 놀라 경호원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의족은 힘을 쓰지 못했다.
“여전히 노동자와 농민은 가난에 허덕이고, 빚을 갚지 못한 농촌의 여자아이들은 기루(妓樓)에 팔려 나간다. 그런데도 원로라는 네놈은 고급요정에서 여자를 끼고 산해진미를 맛보고 있구나!”
“무례한 놈! 네깟 놈이 국가대사에 대해 뭘 안단 말이냐! 국가대사를 논하고 싶으면 총부터 내려라!”
이토는 최후의 위엄을 차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간적 이토 히로부미, 하늘을 대신해 너를 처단한다!”
탕! 탕! 탕!
다이쇼 11년 10월 26일.
세 발의 총성이 도쿄의 하늘을 울렸다.
작가의 말
??? :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변화한 역사에서도 이토는 암살이란 운명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님... 보고 계십니까?)
참고로 사토 히로시와 달리 아사히 헤이고는 실제인물입니다.
일본은 막부 말기부터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암살자에게 ‘지사’라는 호칭을 붙여주고, (국민이 미워하는) 정치가를 죽였다하면 열광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에... 1932년 5.15사건이나 1936년 2.26 사건이나 그렇지요.
이제 일본 역사상 가장 이질적인 이단아 기타 잇키가 본격적으로 등판할 때가 온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