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37화 10.26 사건
“어, 어리석은 놈······.”
세 발의 총탄이 명중된 이토는 피를 내뿜으며 마지막 유언을 뇌까렸다. 평생을 일본의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위해 바쳤건만, 같은 일본인의 손에 살해당하니 원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히젠(肥前)사람 아사히 헤이고, 간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천주(천벌)이자 민중의 처벌이다! 대일본제국 만세! 다이쇼 유신 혁명 만세!”
계단 밑에 있다가 총소리에 놀란 경호원들이 뒤늦게 암살자를 잡으려고 달려오자, 아사히는 단도를 빼 들어 자신의 목을 베었다. 암살자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거센 피가 옷을 적시며 쓰러졌다.
‘히젠 놈인가······.’
이토는 죽어 가면서 암살자의 유언을 들었다.
히젠(사가현)은 메이지 정부 초기 막부를 타도하고 권좌에 오른 4대 파벌(사쓰마·조슈·도사·히젠)의 일원이었다.
히젠파는 삿쵸파(사쓰마-조슈)의 정치 공세에 실각했고, 권력에서 밀려난 히젠파는 사법경(법무장관) 에토 신페이(江藤新平)의 주도로 ‘제2의 유신’을 부르짖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메이지 7년(1874) 사가의 난’은 정부군에게 강력히 진압되었고, 참수된 에토의 목은 반란 수괴로 효수(梟首)되었다. 일본 사법의 근대화를 추진했던 에토가 금지했던 참수와 효수였다.
강경 진압과 주모자 효수를 명령했던 건 메이지 정부 1인자 오쿠보 도시미치였지만, 이토도 적극 찬성했다. 대외온건파로 알려져 있는 이토지만, 반대파를 강경히 탄압하는 데는 거리낌이 없었다.
이후 사가는 ‘반역향’으로 찍혔고, 사가의 난에 연루된 이들은 1919년에야 특별 사면령을 받았다.
‘업보로군······.’
이토의 의식은 영원히 멀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 자신도 막부 말기와 유신기에 정적들을 처단했던 업보일 수 있었다.
히젠 출신 급진파들이 자연히 삿쵸번벌에 불만을 품게 되는 건 당연했다.
오쿠보가 사무라이 계급의 몰락을 확정 지은 세이난전쟁(1877) 이후 불평 사무라이에게 암살당했듯, 메이지 정부의 업보는 돌고 돌아 이토를 저격했다.
하지만 단순히 히젠의 조슈에 대한 옛 원한이 암살의 원인은 아니었다. 아사히 헤이고는 국수주의자이자 기타 잇키의 영향을 받은 혁명론자였다.
암살자는 도쿄를 울린 세 발의 총성이 일본 혁명의 서막이 되기를 바라며 쏘았다.
그 증거로, 아사히는 암살의 정당성을 알리는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죽은 터였다.
“호외요! 호외! 이토 히로부미 공작 저격!”
“호외요! 이토 공작 암살! 요정에서 저격당하다!”
10월 27일 새벽, 이토의 암살을 알리는 호외가 전국적으로 뿌려졌다.
전 내각 총리대신,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했다. 향년 82세. 자연사할 나이에 맞이한 뜻밖의 죽음이었다.
총리 취임 3일 만에 이토 암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게 된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황망할 따름이었다.
“갑자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범인은 대체 누군가?”
“총격 직후 자살했습니다. 현재로선 단독범으로 추정됩니다.”
“혹여 배후가 있는지 확실히 밝혀내시오. 군부나 극우 단체의 조종이 있었을지도 모르오.”
“예, 각하!”
범인은 이미 죽었지만, 어떻게든 암살의 진상을 밝혀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내각은 이토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러야 한다고 황실에 건의하여 승인받았다.
「전 내각총리대신,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 공작은 제국의 백년대계를 설계한 공로자이자 선황 폐하의 충신이다. 어일신(메이지유신)이래 제국에 그만한 공로자가 또 어디 있었는가? 짐은 이토 공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슬픔을 금할 길이 없도다. 이에 공에게 종1위를 추증하며, 장례는 국장으로 엄수하라. 전국에 7일간 애도의 기간을 선포하는 바이니, 모든 신민은 슬픔을 함께하라. ······」
다이쇼 천황의 명의로 이토의 죽음을 추모하는 조서가 발표되었다.
7일간의 애도 기간을 거쳐, 11월 2일 히비야 공원에서 노제를 치르고 성대한 국장이 엄수됐다.
황실 인사들, 원로와 정치인 등 국내 요인들 외에도, 각국 사절도 참석하였다. 대한제국도 전 총리 김옥균과 유길준을 특사로 보냈다.
“이토 공작은 유신의 원훈으로서, 동양 최초로 헌법을 제정하였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헌정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불철주야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일본의 백년대계를 설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뜻밖에도 폭한(暴漢)의 흉탄에 순국하셨단 말입니까······.”
“아아, 이토 공이시여! 공은 진실로 근대 일본의 설계자이셨습니다. 하늘에서 일본의 앞날을 지켜봐 주십시오! 우리 후배들은 공의 정신을 이어 나가, 일본을 세계 제일의 부강한 문명국으로 만들겠습니다!”
정계에서도 추모사가 쏟아졌다. 특히 이토가 창당한 집권여당인 입헌정우회에서는 이토의 죽음을 ‘순국’이라고 끌어올렸다.
생전에 이토와 정치적 관계가 좋았다고 말할 수 없었던 사이온지나 하라도 전임 총리이자 입헌정우회 총재로서 절절한 추모사를 낭독했다.
어찌 됐건, 이들의 말처럼 이토 히로부미는 근대 일본의 설계자였다. 헌법을 제정하고, 내각제를 실시하여 입헌군주제를 확립했다. 문명개화와 부국강병 정책을 이끌어 일본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닦았다.
총리로서 조청일전쟁의 승리를 이끌었고, 러일전쟁에 반대하여 만주의 참사를 예견했다. 국제정세를 읽는 눈이나 외교 정략에 있어서는 일본에서 이토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동시에, 이토는 비정한 정치가이자 제국주의자였다. 상대적 온건파라고는 하지만, 그건 군부가 지나치게 강경했을 뿐 이토의 본질도 제국주의자였다.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강경하게 진압했고, 조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잔혹한 여순 학살에도 눈을 감았다. 대만 점령 후 대만인의 독립운동을 가혹하게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역사의 변화로 조선을 식민화하고 저항하는 조선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는 없었지만, 변화한 역사도 이토를 제국주의 정치가로 기억할 터였다.
“흥, 늙은 퇴물이 마지막까지 추하게 가는군.”
“요정에서 게이샤 끼고 음탕하게 놀다 죽는 게 무슨 순국이냐? 음탕한 호색한 같으니.”
“국장이랍시고 쓰는 돈이 아깝다!”
“국장은 런던에서 치러져야 하는 거 아닌가? 이토는 서양의 이익을 위해 일했으니.”
정계의 절절한 추모와 달리, 국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여론을 주도하는 양대 세력, 진보적 지식인-노동조합에는 마지막까지 막후 정치를 하다 죽은 ‘퇴물’이요, 호전적 지식인-군부에게는 러시아와 영미 제국주의의 대변인 노릇을 하던 ‘새가슴’이었다.
정치적 견해가 없는 일반인들에게도, 이토는 유명한 ‘호색한’이었다. 하필 죽은 장소도 고급요정이었고, 게이샤를 끼고 술 마시던 중에 암살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추하게 느껴졌다.
어떤 신문 만평에는, 이토가 죽으면서 쓰러지는 모습을 ‘女’자 모양으로 형상화하며 ‘호색한의 최후’라고 빈정거릴 정도였다.
“이 아사히란 사람, 얼마나 대단한가. 자신의 뜻을 알리고 깨끗이 죽었네. 참으로 지사야!”
오히려 암살자에 대한 동정적 여론이 치솟았다.
아사히가 생전에 산동전역 참전용사였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구빈(救貧) 활동을 이끌던 과거사가 밝혀지면서, 여론은 더욱 동정적으로 변했다.
자신을 ‘협객’으로 생각했던 아사히는 재벌들을 무작정 찾아가, 자신의 청을 안 들어주면 할복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기부금’을 강제로 뜯어내 빈민구제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사업수단이 없었던 아사히는 손을 대는 사업마다 번번이 실패했고, 세상에 대한 불만을 더해 오던 끝에 ‘원흉’인 이토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아사히는 범행 전 장문의 ‘참간장(斬奸状)’을 작성했고, 고향의 부친 외에도 기타 잇키와 사토 히로시에게 보내는 유언장을 품에 안고 죽었다. 생전 아사히는 기타나 히로시와 일면식도 없었지만,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거사’를 단행했다.
참간장을 공개하지 않으려는 정부의 지침에도, 급진 국수주의자들이 내용을 입수하여 ‘찌라시’를 뿌렸다.
「······ 일시동인(一視同仁)은 실로 우리 신국의 대정신이다. 그런데 군주 측근에 있는 간신들은 폐하의 성덕을 가리고 자파(自派)의 권력을 키우기 위해 파벌을 만들고 당을 결성하며, 자금을 얻기 위해 간악한 부자와 결탁하고, 간악한 부자는 이권을 독점하기 위해 이에 응한다.」
「그 결과 이유 없는 차별이 나타나 상후하박의 현상이 두드러졌으며, 가난한 자와 정직한 자와 약한 자를 위협하고 학대하기에 이르렀다. 역대의 내각이 모두 그러하지 않은 예가 없으며, 원로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정계의 거물들도 마찬가지로 원흉이다!」
「천황 폐하의 마음이 일부 권력자들에게 농단당하여 자비심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은덕이 한쪽에 국한되는 기현상이 초래된 것은 과연 누구의 죄인가?」
「대죄를 범하고서도 법률을 좌지우지하여 면죄부를 받는 고위 관리가 있다. 귀족과 고위관리의 병사(病死)는 호외로 기리면서도, 국가의 공사 때문에 참담하게 죽은 철도 노동자의 명예로운 죽음은 경칭도 붙이지 않고 보도한다.」
「지금의 사회 조직은 국가 생활의 근본인 폐하와 신민을 멀리 격리함으로써 군민일체의 성려를 모독하고 있다. 그 하수인은 원로와 정치가와 화족과 고위관료이다. 따라서 군주의 측근에 있는 간신들을 정화하고 간악한 부자를 죽이는 것은 일본의 융성을 위한 수단이며, 국민 대다수의 행복임과 동시에 일본인인 우리의 당연한 요구이자 권리이다.」
「이에 나는, 간적이자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다. 귀족, 원로, 부호, 그 파수견인 정치가들은 보라! 이토의 사후에도 반성하고 개심하지 않는다면, 나의 청년 동지들이 궐기하여 곳곳에서 암살이 일어나고 남김없이 칼날과 폭탄의 세례를 받을 것으로 알라!」
아사히의 참간장은 삽시간에 자신을 피의자가 아닌 원고, 이토와 정치가들을 역사의 피고의 자리에 놓아 버렸다.
당국의 검열로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찌라시도 수거되었지만, 참간장의 내용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다.
“참으로 우국지사가 아닌가!”
“신념을 가진 지사의 의거로군.”
“틀린 말이 뭐가 있나? 구구절절 옳은 말이지.”
“요정에서 여자 끼고 놀다 뒈진 이토는 국장으로 기리지만, 노동자들의 죽음은 개죽음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지.”
“전부 다 폭탄으로 날려 버려야 해!”
“부패한 정치가 놈들, 지들 배만 채우는 재벌 놈들의 간담이 서늘하겠군.”
전시 대호황은 분명 일본의 부를 급격히 증가시켰지만, 그 수혜의 대부분은 소수의 재벌과 상류층이 누렸다. ‘일확천금’을 누린 졸부가 요정에서 지폐로 불을 켰다는 소문이 돌면서,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대호황이 끝나고 1920년대 디플레이션이 오면서 빈부격차는 더욱 격심해졌고, 번영하는 도시의 뒷골목에는 파산한 농촌에서 상경한 노동자들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갔다.
1년 예산의 절반을 군비에 쏟아붓는 일본 정부는 국민 복지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 일본 국민을 단결시켰던 내셔널리즘과 군국주의는, 커져 가는 빈부격차 앞에서 무의미해져 갔다.
이러한 현실은 급진 좌익의 성장으로 이어졌고, 또한 급진 우익의 방향성 전환으로 이어졌다.
그 선봉에는 좌우익을 모두 아우르는 파천황적 사상가 기타 잇키가 있었다.
아사히 헤이고의 장례식에는 당국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좌우익의 급진파들이 대거 참석하여 고인의 ‘의거’를 기렸다. 기타 잇키와 같은 급진 우익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노동자들도 함께 자리를 지켰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현재의 일본을 무력을 통해서라도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토 암살 사건, 이른바 ‘10.26 사건’은 단순히 한 불평분자에 의한 정치인 암살이 아니었다.
암살자는 국수주의자인 동시에 민중 봉기와 기득권 처단을 부르짖는 급진 혁명을 지향했다.
일본이 1917년 이후 세계를 뒤덮고 있는 혁명의 무풍지대가 아님을, 10.26 사건은 예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암살’이라는 형태로 드러나고, 암살자가 ‘지사’로 숭배 받는 건, 지극히 일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막부 말기의 암살자들이 ‘유신지사’로 숭배 받으며 사토 히로시에게 영향을 미치고, 히로시가 ‘전쟁영웅’으로 숭배 받으며 아사히 헤이고에게 영향을 미치고, 아사히가 ‘우국지사’로 숭배 받으며 젊은 세대에 영향을 미쳤다.
암살자가 예언장에서 예고하였듯, 그의 영향을 받은 테러리스트가 일본 사회에서 자생하고 있었다.
* * *
워싱턴 조약의 결과가 처음 전해졌을 때만 해도, 이선은 이렇게 생각했다.
“일본 문민정부가 성과를 거두도록 해야지. 대한의 국익에도 도움이 될 터이니.”
이선은 교묘하게 일본의 퇴로를 열어 주었다.
만약 일본이 워싱턴에서 완전히 외교적 굴욕을 당했다면, 이야말로 일본 문민정부의 실패와 군부의 호전성을 높일 수 있었다.
다나카 상주문을 흘려 ‘일본 군부의 위협적인 야욕’을 미국에 경고하고, 주력함 비율 동의를 흘려 ‘군부의 야욕에 맞서 국제협조를 추구하는 문민정부’라는 인상을 미국에 심어 주었다.
미국이 일본의 정보를 파악해서 조약을 압박했다는 사실, 그 정보의 출처가 바로 한국이라는 사실을 일본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이득을 챙겼고, 새로운 국제질서에 확고하게 올라탈 수 있었다.
한국은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과 함께 세계질서를 책임지는 6대 강국으로 공인받았고, 아시아 대륙에서 확고한 세력권을 공인받았다.
한국의 확실한 외교적 승리였다. 이선은 워싱턴 회의의 성과에 만족했다.
‘일본도 이쯤에서 만족하고, 태평양의 2인자가 되는 길을 택하는 게 자신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겠나? 영국의 길을 가라고.’
이선은 일본이 진정으로 ‘동양의 영국’이 되길 바랐다.
하라-다카하시 등 문민세력이 구상했던 정당정치 확립, 군부의 문민통제, 영미와의 협조외교, 군사력이 아닌 경제력으로의 열강.
설령 군사력을 추구하더라도, 지금처럼 북수남진, 해주육종, ‘섬 제국주의’, 세계 3위의 해군에 만족한다면 한국의 국익과 충돌할 여지가 적었다.
‘일본 정치가들이 건함경쟁, 과도한 군비투자, 대륙침략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으면 좋겠군. 끝없이 폭주하다가 원자폭탄 맞는 결말보다야.’
근대국가는 합리성을 추구한다. 이선은 근대국가를 자처하는 일본의 ‘합리성’을 기대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했다고?”
“예, 폐하. 일본에서 온 급보이옵니다.”
전문을 읽던 이선은 엄청난 아이러니를 느꼈다.
‘1922년 10월 26일, 하필 10월 26일이라. 이게 역사의 억지력인가? 13년 세월의 차이를 두고도, 결국 이토는 암살이란 운명을 피하지 못하는군.’
후속 정보들이 계속 들어오면서, 이선은 범인이 단순한 불평분자가 아닌 확신범임을 알게 되었다.
‘근대 일본에 이토만큼 합리적인 인물이 없었지. 그렇기에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고.’
이선은 원역사의 ‘원죄’를 생각하면 이토 히로부미가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역설적으로 일본 정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인사가 이토이기도 했다.
일본 군부에 비하면 이토는 대화가 가능한 인물이었고, 실제로 이선은 이토와 몇 차례 협력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만약 실제로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지 못했더라면, 이토가 계속 야마가타와 군부의 견제자로 남았더라면, 일본이 폭주했을 가능성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에는 가장 끔찍한 시나리오지.’
대륙 침략과 광적인 정신주의에 빠진 군부와 달리 이토는 ‘근대적 합리성’을 추구했고, 대외정책에 반영했다.
‘결국 일본의 폭주는 피할 길이 없단 말인가? 육군의 힘을 빼고,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정당 정치가 정착되면 안정성을 확보하리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세상은 절대 ‘합리적’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근대 일본처럼 철저한 천황제 군국화 교육을 받은 나라에서는, 국가를 이끄는 정치가와 지식인 몇몇이 합리적이라고 해서 국가 전체의 체질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뭐, 일본이 계속 안정을 누리든, 폭주를 하든, 그에 대한 대책은 마련해야지.’
물론 일본 역사의 물줄기는 크게 바뀐 터였다.
현재 일본 정계를 이끌고 있는 사이온지-하라-다카하시 라인은 원로 이토를 정계에서 은퇴시키긴 했지만, 대외정책은 이토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했다.
만악의 근원인 육군의 폭주도 없었고,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원역사보다 빠르게 보통선거도 통과시키며 진행 중이었다.
이는 다분히 한국의 영향으로, 이선이 짜 놓은 판이 역사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선은 언제나 이웃나라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정세 변화에 따른 대안을 준비했다.
작가의 말
??? : 이토 너 이새끼 건방져!
실제 아사히 헤이고는 야스다 재벌의 총수 야스다 젠지로를 암살해서 명성(?)을 떨친 인물입니다. 야스다는 매점매석으로 부를 늘렸기에 지탄을 받았고, 아사히는 지사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 세계관에선 더 유명해지겠지만...
일본 역사상 유구한 정치인 암살의 전통과, 암살의 행위를 지사로 칭송하는 문화를 보면, 이것도 참 메이지유신의 업보가 아닌듯 싶습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전직) 총리를 암살하는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베가 워낙 비호감인데다, 피의자도 특정종교 피해자라 동정을 받고 있는 상황도 묘하고...
조슈(야마구치) 출신 우익 총리를 암살하는 자생적 우익 테러리스트... 이게 도대체 1922년인가 2022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