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 3부-144화 (792/812)

3부 140화 아시아, 혁명의 시대

1922년 가을, 독일 베를린.

대한사회당(大韓社會黨, Korean Socialist Party) 대표, 몽양 여운형은 국제회의 참석을 위해 유럽을 방문 중이었다.

여운형과 조소앙이 주도하여 창당한 신한청년당은 광무 24년(1920) 최초의 보통선거에서 원내 입성에 성공했고, 올해 당명을 보다 확고한 사회민주주의 색채를 드러내는 사회당으로 변경했다.

아시아 좌익 정당의 선구는 일본 사회민주당이었지만, 일본 정부의 제약으로 원외 재야정당이었다.

원내에 10석의 의원을 배출한 대한사회당은 단숨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동아시아를 주목하게 된 유럽 사회민주당의 초청을 받게 되었다.

“대한사회당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간 건 좋은 일이지만······.”

국제사회주의노동자연합, 즉 제2인터내셔널은 세계대전으로 분열하여 붕괴하였다. 유럽의 노동자 정당들은 세계평화와 국제연대라는 대의를 저버리고, 자국의 방위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파국적인 대전쟁의 종결 이후,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으로 유럽 각지에서 사회주의 세력은 크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단일한 사회주의 세력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집권정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과 바이마르 집권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은 서로를 ‘개량주의자’, ‘독재자’라고 비난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국제사회당의 분열이 이렇게 심각할 줄이야.”

1922년 현재, 국제사회주의 조직은 크게 3개로 분열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과 영국 노동당이 주도, 제2인터내셔널의 재건을 외치는 통칭 ‘베른 인터내셔널’.

소비에트 러시아가 주도하여 각국 급진파가 따르는, 세계혁명을 부르짖는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양측 모두를 우익개량주의와 좌익모험주의라고 비판하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프랑스 사회당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주의정당협력체(IASP), 통칭 ‘빈 인터내셔널’ 혹은 ‘2.5인터내셔널’.

1922년 가을. 점증하는 파시즘의 위험과 옛 동지들 간의 오랜 반목을 끝내기 위해, 베를린에서 세 인터내셔널은 만나 통합을 논의했다.

일본 대표 가타야마 센(片山潛)과 한국 대표 여운형은 아시아를 대표해 옵서버로 참여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세계혁명을 외치기 전에 야당에 대한 탄압부터 중지하시오! 사회혁명당의 옛 동지들마저 반혁명분자로 몰아 탄압하다니!”

“사회민주당이 통치하는 조지아 민주공화국을 침공하여 병합한 소비에트가 말하는 세계혁명이란 대체 무엇이오? 붉은 제국주의가 아닌가!”

“제국주의? 당신네 노동당은 식민지를 착취하는 영국 제국주의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소? 제국주의자들이 인도와 아일랜드를 짓밟고 있을 때, 당신들은 대체 뭘 했소?”

“군부, 융커, 부르주아지와 손잡고 인민의 열망을 짓밟은 당신네 사회민주당이 무슨 자격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는 거요?”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대표는 격렬한 비난을 주고받았다. 양측은 대전쟁으로부터 비롯된 뿌리 깊은 반목과 상호의심이 있었다.

이를 상징하듯 1921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과도 결별하여, 당명을 전러시아 공산당으로 변경했다. 러시아의 선례를 따라 각국에 속속 ‘공산당(Communist Party)’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대립은, 세 인터내셔널의 통합을 외친 2.5인터내셔널 측이 아무리 중재를 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도대체 난 여길 왜 온 거지?’

회의가 상호 비난의 장으로 가게 되면서, 여운형은 점점 회의감(懷疑感)을 느끼고 있었다.

러일전쟁 시기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해외로 망명한 가타야마가 코민테른에 기울어진 것과 달리, 여운형은 정치적 성향상 베른 인터내셔널이나 2.5인터내셔널의 입장에 더 가까웠다.

여운형은 급진적인 세계혁명을 원치 않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처럼 민의를 대표해 합법적인 의회 투쟁을 통해 권좌로 나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아시아인으로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유럽중심주의와 식민지 문제에 대한 냉소적 태도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제국주의는 물론 사악하지만, 불가피한 측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서양 자본주의는 후진적인 동양과 아프리카에 문명의 진보를 이끌어 내고 있으며······.”

“집어치우쇼! 그게 국제사회주의자가 할 말인가?”

“물적 진보가 있어야만 혁명의 토대가 마련되는 거고, 지금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중대한 진보의 단계에 있단 말이오!”

“그래서 식민지를 포기 못하겠단 말이오? 제국주의 군대가 독립을 외치는 원주민들을 학살하는 게 진보란 말인가?”

영국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은 식민지 문제를 자치로 개선하겠다는 주장을 했지만, 식민제국의 해체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를 약한 고리로 여기고 있는 소비에트 러시아는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위선을 조롱했다.

유럽은 ‘진보’와 ‘문명’의 상징이고, 아시아는 ‘문명화의 지도가 필요한 후진지역’으로 분류하는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시각에, 여운형은 실망감을 느꼈다.

식민지 문제에 대해선 소비에트 러시아가 훨씬 진보적이었고, 정치적 성향을 떠나 여운형은 심정적으로 코민테른의 주장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동지도 아시다시피, 10월 말에 모스크바에서 극동민족대표자대회가 있습니다. 코민테른은 한국의 혁신세력을 대표하여, 동지가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코민테른을 대표해 베를린 회의에 참석한 니콜라이 부하린이 여운형에게 초청장을 전달했다.

5년 전, 미국에 망명 중이던 부하린이 러시아 혁명 소식을 듣고 한국을 경유했을 때, 러시아에 특사로 파견되던 여운형이 동행하여 친분을 맺은 바가 있었다.

여운형은 ‘혁명의 총아’ 부하린의 책을 번역해서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고, 두 사람의 친분은 대한제국과 소비에트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초청은 감사합니다만, 아시다시피 현재 한국과 소비에트는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사회당을 대표하는 본인이 모스크바 회의에 참석하면······.”

여운형은 난색을 표했다.

그 자신의 속내로 말할 것 같으면, 혁명으로 변화한 러시아를 방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한국과 소비에트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당 대표인 자신이 모스크바 회의에 참석한다면, ‘사회당 무리는 모스크바의 간첩’이라는 우익의 정치적 공세를 받기 십상이었다.

“극동민족대표자대회는 코민테른처럼 국제공산주의자만 참여하는 회의가 아닙니다. 동양의 여러 혁신적 정당 대표자들이 참여합니다. 일본 사회민주당은 물론이고, 쑨얏센(손문)의 국민당도 중국을 대표하여 참석합니다.”

“광동정부(호법정부)에서 대표를 파견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코민테른은 유럽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외쳤지만, 아시아에서는 사회주의자가 ‘혁명적 민족주의자·진보적 부르주아지’와 연합하기를 촉구했다.

중국에서 코민테른의 합작대상은 국민당이었다. 비록 이념은 다르지만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갖고 있는 양측은 협력에 동의했다. 국민당은 모스크바에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일은 본인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본국의 동지들과 의논해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좋은 답변을 기다리지요.”

대한사회당 중앙위원회는 여운형의 모스크바 방문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 제2인터내셔널과 2.5인터내셔널의 초청을 받아들인 사회당이, 코민테른의 초청이라고 못 받아들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변화상은 그들 모두가 궁금해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입장이었다. 한국 정부가 불허한다면, 밀입국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독일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정치적 후폭풍이었다.

여운형은 주독한국대사 조한민을 만나 의논했다. 조한민은 대한제국 외교관 중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해 가장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여운형 대표의 러시아 방문을 특별히 승인하셨습니다.”

“예?”

여운형은 깜짝 놀랐다. 조한민이 본국과 의논하겠다고 한지 단 며칠 만에, 그것도 황제가 직접 허락했다니.

“괜찮겠습니까? 정치적 입장이······.”

“황제 폐하께서는 진작부터 모스크바에 특사를 파견할 의사가 있었습니다. 다만 흑하참변과 아무르 정부 수립 이후 공식적으로 서로 비난을 이어가고 있으니, 외교관을 보내긴 어렵지요. 하지만 5년 전 특사로 방문한 적 있었던 여운형 선생이라면 우리와 소비에트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인사지요.”

“물론 대한의 정치인으로서 국익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만, 저는 야당 대표입니다. 야당 대표가 정부의 특사를 맡는 건 곤란한 일 아니겠습니까?”

여운형이 난색을 표하자, 조한민이 빙긋 웃었다.

“우리 정부를 대리해서 소비에트와 협상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선생은 사회당을 대표해 회의에 참석하고 원하는 대로 활동하면 됩니다.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게 특별히 맡기는 일은 없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또한 선생의 방문으로 정치적 문제가 발생할 일은 없으리라고 약속합니다.”

“대사, 아니 황제 폐하의 관대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방문뿐만 아니라, 방문 후에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문제에도 배려하겠다는 말에 여운형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여운형이 조한민을 통해 모스크바 방문을 요청했을 때, 주무부처 장관인 이승만은 펄펄 뛰었다.

“여운형 이자가 미쳤단 말입니까? 소비에트 정권은 우리의 적인데, 적이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해요? 대체 저 극동민족대표대회라는 게 뭡니까? 대놓고 워싱턴 회의를 부정하는 좌익들의 연합입니다. 세계혁명, 동양혁명 운운하면서 국제질서의 전복을 꾀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이런 회의에 참석하는 자들은 전부 매국노입니다! 절대 불허!”

이승만의 격렬한 반발에, 총리 이상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설이 온건파라고는 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반공 반소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황제가 찬성했다.

“모스크바 방문을 허락한다고 전하시오.”

“폐, 폐하! 안 됩니다!”

이승만이 즉각 반대의사를 드러냈다.

“지피지기는 백전불태.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국인이 직접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왜 버린단 말이오?”

“폐하, 극동민족대표대회는 동양의 공산화를 부르짖는 자들의 회동입니다! 저들이 겨냥하는 적에는 바로 대한이 있습니다!”

“중국 국민당이 언제부터 동양의 공산화를 부르짖었소? 그럼 우리 정부가 지금껏 중국을 공산화하라고 국민당을 지원해 줬단 말인가?”

“국민당과 대한의 입장은 다릅니다. 저들은 변혁을 원하는 입장이기에 소비에트와 손잡을 수 있지만, 러시아는 대한의 적입니다!”

“적이라 해도, 설령 전쟁 중에라도 접촉은 있어야 하오. 좋든 싫든, 지금 정세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만큼 중요한 나라라면 더욱 그렇지. 정부가 공식적으로 외교관을 보내긴 어려운 상황이니, 민간 차원에서 저들이 뭐라는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소.”

“알겠습니다. 그럼 베를린에 러시아 입국을 허가한다는 전문을 보내겠습니다.”

황제의 뜻이 확고하였으므로, 총리 이상설은 황명을 받아들였다. 이승만은 못마땅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아니지. 어쩌면 잘될 수도 있어. 여운형뿐만 아니라, 사회당과 통합하길 바라는 진보당 무리도 모스크바와의 관계를 엮을 수 있지 않나. 저들이 다음 총선에서 약진할 수 있는 상황을 원천차단 해야지.’

이번에는 외무대신이 아닌 개화당 지도자로서 정치적 계산을 하던 이승만의 속내를 들여다본 듯, 이선은 쐐기를 박았다.

“짐과 정부가 허락한 사안이오. 몽양의 모스크바 방문을 가지고 국내에 반소 여론을 조성한다든가 하는 상황은, 짐의 결정을 비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소.”

* * *

정부의 공식적 허가를 받고 러시아로 출국한 여운형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였다.

한국·일본·중국·만주·몽골·안남(베트남)·시암(태국)·자바(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각국 대표단은 비공식적 루트로 러시아로 속속 입국했다.

대한제국은 농본주의 성향의 진보당과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사회당이 농민과 노동자 계급을 대표했고, ‘볼셰비키’에 해당되는 급진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는 학문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고, 사회당도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라 보기가 어려웠다.

한국 우파들은 사회당을 향해 극좌파, 혁명주의자라고 비난을 퍼부었지만, 기실 사회당은 유럽으로 가면 온건한 개량주의 중도좌파 정당이었다.

그건 아시아의 여타 다른 정당들도 마찬가지였다.

고토쿠 슈스이가 이끄는 일본 사회민주당도 정통 마르크스주의라기보다, 이념적 라이벌인 아나르코-생디칼리즘(anarcho-syndicalisme)에 더 가까웠다.

손문의 중국 국민당은 아예 삼민주의를 내세운 정당이었고, 마르크스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신생 공산당은 소수 지식인의 당에 불과했다.

다른 나라 대표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대개 진보적인 민족주의자였다.

그런데 이들은, 왜 온갖 난관을 뚫고 모스크바로 향하게 되었는가?

1922년 10월 21일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표대회(Congress of the Nations of the Far East).

“과거 파리와 워싱턴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번영을 대표했습니다. 반대로 모스크바는 차르 전제군주정과 제국주의적 팽창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정반대로 역전되었습니다! 모스크바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운동의 중심지로서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대표자를 환영하는데, 파리와 워싱턴은 세계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으로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개막식 단상에서 젊은 동양 청년이 힘찬 어조로 모스크바와 파리-워싱턴을 대비시켰다.

“우리, 아시아 대표단은 어찌하여 머나먼 길을 넘어 모스크바까지 왔습니까? 우리에겐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불씨, 세계 제국주의 체제를 재로 만들어 버릴 불씨를 얻으리라고!”

“와아아아아!”

왜소한 체격과 달리 불을 내뿜는듯한 청년의 연설은 회의 대표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방청객의 열렬한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올해 32세의 청년은 본래 유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영어와 프랑스가 유창했고, 코민테른의 공용어인 독일어와 러시아어도 읽을 수 있는 인텔리였다.

청년은 한때 시민혁명의 모국이었던 프랑스와 미국에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파리로 가서 고국과 동포의 자유·평등·민주적 권리를 외쳤다.

호텔에서 요리사로 일하며 경비를 모으고, 턱시도와 중산모를 빌려 베르사유의 윌슨과 미국 대표단을 찾아갔다.

하지만 청년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가 작성한 ≪안남 인민의 요구서≫는 무시당했고, 그는 회담장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복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나마 청년에게 개인적인 지지와 동정을 보낸 건 한국 대표 김규식 정도였다. 그러나 김규식이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한국 유학 권유 외엔 없었다.

청년은 자신이 입당한 프랑스 사회당에도 호소했지만, 사회당은 프랑스의 변화를 참고 기다리라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을 뿐이었다.

절망에 빠진 청년에게, 1920년 코민테른의 테제, 울리야노프가 발표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가 복음처럼 다가왔다.

식민제국의 즉각적인 해체와 약소민족해방을 천명하는 코민테른의 테제에, 파리와 워싱턴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은 열광했다.

청년은 새로운 사조인 공산주의에 열광하긴 했지만, 그를 추동하는 원동력은 여타 식민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와 애국심이었다.

청년의 가명은 ‘애국’을 의미하는 응우옌아이꾸옥(阮愛國), 또 다른 가명은 호치민이다.

1920년대, 제국주의에 억눌려있던 아시아에 혁명의 불씨가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세계혁명이 아닌, 민족해방의 기치였다.

작가의 말

작중에서 호치민의 연설은 실제로는 김규식 선생이 한 연설입니다.

실제 극동민족대회 대표 중 3분의 1이 조선인일 정도로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그분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냐고 하면 절대 아니고, 상당수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당장 김규식 선생만 봐도, 언더우드 제자에 미국 유학파고, 이때를 제외하면 쭉 중도우파 쪽에서 활동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당시 모스크바를 택한건, 파리와 워싱턴에서는 철저하게 외면받았지만 소련은 (저의가 무엇이든간에) 유일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해줬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 열강이 조금만 유연했더라면 아시아 민족운동의 태반이 공산주의가 되지 않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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