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43화 갈리폴리 위기
대한제국, 황성.
이선은 주독대사 조한민이 보낸 전문, 주영대사 이한응이 보낸 전문, 주이대사 이위종이 보낸 전문, 유럽 주재무관 안중근이 보낸 전문, 그리고 정친왕 이안이 보낸 편지를 차분히 읽고 있었다.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폐막.
한국인 참여자 면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운형, 37세. 대한사회당 대표.
장건상, 41세. 대한사회당 부대표.
조동호, 31세. 대한사회당 선전부장.
······
임용풍, 일명 임원근. 24세. 한국사회주의청년단.
김태연, 일명 김단야. 22세. 한국사회주의청년단.
조봉암, 일명 박철환. 25세. 한국사회주의연구회.
박헌영, 일명 박건일. 23세. 한국사회주의연구회.」
참여자 면면을 읽던 이선은, 조봉암과 박헌영이란 이름에 시선이 갔다.
회의 참가자 상당수가 가명을 사용했지만, 조한민은 본명과 소속단체, 나이와 직업까지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한국 대표단 중에 충실한 사회주의자로 위장한 제국익문사 요원이 암약해 있었고, 요원은 참가자의 발언 내용까지 모두 정리하여 보고했다.
「상임의장단에 피선된 여운형은 대회 개막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역시 몽양이 합리적이야. 몽양은 군소정당 대표로 있기에는 아까워. 신민당에 입당했다면 바로 정계의 총아로 떠올랐을 텐데,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건설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으니······. 아무튼 앞으로 한국 정치에 이런 사람이 필요하지.’
이선은 여운형을 높이 평가했다.
부국강병과 승전으로 열강의 지위에 올랐고, 식산흥업과 산업입국으로 공업화를 이룩했으며, 헌정수립과 보통선거권으로 정치적 평등을 이뤄 냈다.
아직 부족한 점이 있다면, 사회경제적 평등이었다. 개화 이후 40년, 부의 절대적 성장에 집중해 있었기에 사회적 평등은 상대적으로 미진했다.
아니, 대전쟁과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는 서양 열강에서도 사회경제적 평등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왼쪽으로부터의 강력한 위협이 있었기에, 각국은 부랴부랴 수정자본주의적 개혁을 채택해야 했다.
한국의 우파들은 여운형과 사회당을 극렬 좌익분자라고 비난했지만, 이선이 보기에 이들은 합리적인 중도좌파였다. 왼쪽에서 사회적 평등을 견인할 소금 같은 존재였다.
‘진짜 극좌파는 여기에 있지. 현실정치에선 한 줌도 안 되지만.’
「박헌영. 광무 4년 충남 대흥 출생. 23년 황성 학생시위 지도부의 일원. 24년 황성대학교 중퇴. 25년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로 유학.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입당.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급진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추정. 코민테른 추종자이기는 하나, 볼셰비키보다는 룩셈부르크주의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임. 계속 동향 파악하겠음.」
주독대사이자 제국익문사 유럽 지부장인 조한민은 진작부터 유럽의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선은 박헌영의 연설 내용을 읽었다. 정치적 타협을 배신과 개량주의로 치부하는 전형적인 극좌파 논리였다. 아직 설익은 책상물림 이론가의 망상에 가까웠다.
‘스물셋의 대학생? 아직은 백면서생이로군. 현실정치의 쓴맛을 보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 이완용도 역사의 변화로 애국자가 되었는데, 박헌영이라고 어떻게 변할지 아나. 실제 급진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도 해방 후에는 전향하여 대한민국 수립에 혁혁한 기여를 했는데.’
이선은 조봉암이란 이름도 눈에 띄었다.
원역사에서, 청년기의 조봉암은 조선공산당 창당멤버이자 소비에트 공화국을 지향하던 급진 공산주의자였다. 하지만 해방 후에는 사회민주주의로 전향,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이끌어 신생국가의 안정에 지대한 기여를 한 바 있었다.
‘일단 계속 지켜보고 있어야겠군. 소비에트의 혁명 전략도 수정된 것으로 보이니.’
역사의 변화로 인해, 볼셰비키 ‘레닌’이 아닌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는 훨씬 합리적인 정치가로 변모했다.
아시아는 유럽과 달리 즉각적인 혁명이 아닌, 중국 국민당과 같은 진보적 민족주의 정당과 손을 잡겠다는 ‘통일전선’ 전략을 취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섣불리 공산혁명을 기도하기보다는 사회당과 같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하기를 바라고 있을 터였다.
‘지금 한국은 한줌도 안 되는 극좌보다는 극우가 더 문제야. 민족주의와 팽창주의를 부르짖는 세력이 판을 치니. 지금은 재야에서 통제 가능한 수준에 있지만, 파시즘과 같은 대중 동원력이 가능한 정당이 등장한다면 그쪽이 더 위협적이겠지.’
이선은 현재의 대한제국에서는 공산주의보다 파시즘이 더 가능성이 커 보였다.
거듭된 승전으로 대한제국의 국력이 실제 이상으로 강하다 착각하고, 장차 무력으로 동양의 패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떠벌리는 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내 생전에 충분히 억제 가능하겠지만, 파시즘이 승리하는 선례가 나온다면 곤란하지. 이탈리아든, 독일이든, 일본이든.’
원역사에서는 1922년 10월의 ‘로마 진군’으로 무솔리니가 총리에 오를 시기였다.
그렇기에 이선이 주의 깊게 살피고 있던 이탈리아에선, 아직 파시스트의 권력 장악은 없었다.
이탈리아의 고질적인 지역·계급 갈등이 대전쟁 이후 폭발적으로 분출하여, 좌익의 대항마로 파시스트가 득세하고 있기는 했지만, 피우메(리예카) 합병으로 ‘불구의 승리’는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기에 우익이 파시즘으로 대동단결하는 일은 없었다.
‘근데 하필 이 시기에 영국이 말썽이냐? 전쟁이라니, 이 무슨 미친 짓이야?’
뜻밖에도 모스크바나 로마가 문제가 아니라, 런던과 콘스탄티노플이 문제였다.
이한응과 안중근이 보내 온 전문에는, 공통적으로 영국 정부가 전쟁을 결의했다는 급보가 쏟아졌다.
차남 이안이 개인적으로 보내온 편지에도, 전쟁 위기에 대한 우려가 적혀 있었다.
바로 1922년의 ‘갈리폴리 위기’였다.
* * *
영국, 런던.
로이드조지 내각은 일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이끄는 튀르키예 대국민의회(앙카라 정부), 아니 그 배후에 있다고 의심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경고를 보낼 일전이었다.
“틀림없소. 앙카라의 배후에는 모스크바가 있소. 만약 이대로 콘스탄티노플과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겨준다면, 소비에트 잠수함이 지중해를 제멋대로 드나드는 상황을 보게 될 것이오.”
한때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던 진보적인 정치가, 영국을 대전쟁 승리로 이끈 총리 로이드조지는 피해망상에 빠져 있었다.
러시아는 언제나 남하를 시도한다는 영국의 전통적인 루소포비아(러시아공포증)에, 소비에트가 세계혁명을 획책하여 뻗어 나가리라는 이념적인 혐오.
로이드조지는 일련의 사태가 소비에트의 세계혁명을 향해 착착 나아간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1922년 9월. 미국이 주최한 워싱턴 회의에 이어 영국은 제노바 국제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때만 해도 로이드조지의 구상은 다음과 같았다.
「태평양을 미국에 양보하는 대신, 유럽에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한다.
소비에트 정권을 승인하고 폐허가 된 러시아에 수억 파운드를 투입해, 러시아를 다시 자본주의의 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신경제정책으로 경제 부흥에 나선 러시아를 자본주의 질서에 다시 끌어들이면, 독일은 러시아와의 교역으로 안정적인 외화를 얻고, 영국과 프랑스에 정기적으로 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되면 공산주의 유령의 위협은 사라지고, 프랑스와 독일은 화해한다. 유라시아 질서는 영국의 주도로, 다시 팍스 브리타니카가 부활한다.」
영국-프랑스-독일이 연합하여 재정적으로 러시아를 지배한다는 로이드조지의 웅대한 구상은, 서방과 타협할 의지가 있는 소비에트 외교관들조차도 코웃음 칠 일이었다.
제노바에 초청된 소비에트 대표단은, 파리강화회의 이후 최초로 서방 국가들과 대면했다.
“러시아는 전쟁 이전 차르 체제의 채무 의무를 인정하고, 이를 채권자에게 갚아야만 국제질서에 복귀할 수 있습니다. 지연된 이자에 대한 지급이 먼저 이뤄져야 합니다.”
“그 의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의 내전에 개입하여 끼친 막대한 손해도 논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500억 금 루블(36억 달러)의 배상을 요구합니다.”
“하! 대체 무슨 근거로 산출한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대전쟁기에 러시아를 공격하고 점령한 독일에 배상을 먼저 요구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러시아는 독일에 모든 전쟁책임을 넘기는 연합국의 발상을 거부합니다. 제국주의 국가 공통의 책임입니다.”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소비에트는 독일에 단독 접근을 취했다.
배상금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비타협적인 태도,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로 하여금 독일에 배상금을 요구해 차르의 채무를 상환하라 권유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와 화해하여 전쟁 전 삼국협상 구도가 부활해 반독 포위망이 재결성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독일 대표단을 지배했다.
“전후 국제질서에 배제된 두 나라, 독일과 러시아가 손을 잡아야 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노바 인근 라팔로에서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단독 조약 체결이 임박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로이드조지는 부랴부랴 독일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에 회담을 제의했다.
“Le vin est tiré. Il faut le boire(와인 병을 열었으면, 잔에 따르는 수밖에).”
라테나우는 영국의 회담제의를 거절하고, 독소조약에 서명했다.
대자본가 출신인 라테나우는 대전쟁기 독일의 전시경제를 책임졌던 우익인사였으나, 이념적 차이를 넘어 소련과 손잡는 길을 택했다.
“독일 공화국과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간에 조약이 체결되었음을 알립니다.”
라팔로 조약은 독소 상호 간에 국가로 승인하고, 대전쟁의 배상금과 영유권을 포기하며, 무역협정을 체결해 최혜국 대우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공개되지 않은 비밀 협정에서는, 독일과 러시아가 군사적 협력도 맺는다는 극비 조항도 있었다.
패전과 혁명으로 국제질서에서 고립되었던 두 강국이 전격적으로 체결한 조약은 전 유럽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특히 제노바 회의를 소집하여 독일과 러시아를 초청한 장본인이었던 로이드조지의 충격은 더욱 컸다.
“도합 인구 2억이 넘는 두 나라의 결합, 독일의 기술과 러시아의 원자재와 인적자원이 합쳐진다면, 이는 유럽의 평화에 끔찍한 위협을 의미한다!”
로이드조지가 구상했던 웅대한 유럽 신질서는, 독소의 결합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라팔로 조약, 튀르키예군의 승리, 극동민족대회에서 논의된 소비에트와 국민당의 합작, 제3회 코민테른의 혁명적 테제는 베르사유 체제를 뒤흔들려는 ‘패배자의 동맹’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독일과 소비에트 일각에서는, 진지하게 독일-소비에트-튀르키예-중화민국(호법정부)의 4각 동맹을 체결해야 한다는 논의까지 이루어졌다.
‘패배자의 동맹’은 단순히 베르사유 체제에 반대한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어 현실성이 떨어졌지만, 영국이 피해망상에 빠지기에 충분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튀르키예 대국민의회는 결코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와 동트라키아를 포기할 수 없으며, 우리 군대는 진격을 멈추지 않으리라!」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진격 명령이 떨어지자, 로이드조지는 ‘패배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로 결심했다.
“앙카라에 최후통첩을 보내겠소. 해협 중립지대에서 72시간 이내로 철수하지 않는다면, 영국은 선전포고하겠다고.”
“총리, 그 끔찍했던 대전쟁이 끝난 지 이제 겨우 4년입니다. 국민은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건 일관된 영국의 대외정책이었소! 그래서 우리는 1853년에도, 1878년에도 오스만을 도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했소. 이제 차르보다 더 지독한 볼셰비키가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해협을 넘으려 하는데, 어찌 지켜만 본단 말이오?”
“총리의 말이 맞습니다. 볼셰비키는 세계혁명을 운운하며 대영제국의 해체를 원합니다! 제국은 이미 아일랜드, 인도, 이집트에서 위기를 겪었습니다. 케말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연합군을 축출한다면, 모든 이슬람 국가에서 광범위한 반응을 일으키고 말 겁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제국은 돌이킬 수 없는 위신의 타격을 입을 겁니다!”
식민부장관(Secretary of State for the Colonies)으로 보직을 옮긴 처칠이 로이드조지를 지지했다.
열렬한 친그리스파인 로이드조지와 달리, 처칠은 딱히 그리스를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강경한 반공주의자로서, 소비에트의 남하를 용인할 수 없었다.
“갈리폴리에 주둔하는 영국군은 겨우 1개 여단 5천 명입니다. 콘스탄티노플에 접근하고 있는 터키군은 최소 3개 사단으로 추정됩니다! 대체 무슨 수로 막을 생각입니까?”
“그러니 영국 본토의 병력을 파병해야지요!”
“또다시 전쟁이라니, 국민이 퍽이나 동의하겠습니다!”
“우리에겐 영연방도 있습니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에도 동원령을 내리면 됩니다.”
“아니, 영연방이 독일도 아니고 터키 임시정부를 상대로 한 전쟁에 병력을 파병할 리가 있겠습니까?”
로이드조지 연립내각의 보수당 소속 장관들은 난색을 표했다. 영국 본토는 물론이고, 영연방 자치령들이 전쟁에 동의할 가능성은 얼마 없었다.
“터키가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볼셰비키가 문제라니까요!”
“앙카라 정부의 배후에 소비에트가 있다는 건 근거 없는 주장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 보십시오, 처칠 장관. 콘스탄티노플과 해협이 문제가 아니라, 갈리폴리에 집착하는 거 아닙니까?”
“뭐, 뭐요! 어찌 그따위 망발을! 당장 그 말 취소하시오!”
정곡을 찔린 처칠이 벌컥 화를 냈다.
영국군이 해협 방위를 위해 주둔하고 있는 갈리폴리는 처칠에게 있어 트라우마와도 같은 장소였다. 처칠은 결코 콘스탄티노플과 해협, 아니 갈리폴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
“뭐가 어찌 됐건, 우리는 결코 소비에트 러시아의 남하를 용인할 수 없소! 외무장관은 파리에 가서 프랑스의 지지를 얻어 내시오. 갈리폴리 주둔군과 지중해함대에는 특별경계령을 내리겠소.”
로이드조지는 단호한 어조로 전쟁을 결의했다. 처칠은 총리의 결단에 손뼉을 쳤지만, 보수당 각료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의 뜻을 보였다.
「케말의 군대가 해협 중립지대에 한 발짝이라도 넘어오면, 즉시 발포하라! 소비에트 잠수함의 흔적이 보이면, 즉시 격침하라! 육군은 동원을 준비하라!」
총리의 명령이 육해군에 하달되었다. 영국은 4년 만에 다시 전쟁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영연방 자치령- 캐나다, 남아프리카, 호주, 뉴질랜드에도 참전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동시에 연합국인 프랑스, 이탈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전쟁이라니. 믿을 수가 없어요.”
영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정친왕 이안은 갑작스러운 전쟁 분위기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 자신이 위기의 현장을 둘러보고 왔지만, 영국이 전쟁까지 뛰어들 만한 사안인지 의문이었다.
“육해군에 특별경계령이 떨어졌습니다. 만약 우발적 총격이라도 벌어진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어느새 이안의 친구가 된 루이 마운트배튼이 군부의 분위기를 전했다.
영국 귀국 후 조지 5세에게 단단히 혼찌검이 난 에드워드는 한국 쪽을 쳐다보기도 두려워해 이안과 만나기를 꺼렸지만, 한국에 마음의 빚이 있는 루이는 이안에게 친절히 대했다.
“아시다시피, 콘스탄티노플에는 연합군도 존재합니다. 이들이 과연 영국을 지지하겠습니까?”
영국군 여단 외에도, 해협통제위원회에 속한 국가에서 파병한 소규모 부대들이 있었다. 대한제국도 해병대 1개 소대가 주둔 중이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릴 입장은 아닙니다만, 이건 우리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안의 조심스러운 말에, 루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겠지요. 영연방 국민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하물며 다른 나라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이안은 생각에 잠겼다. 아마 영국 정부는 한국에도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을 터였다.
‘부황께서 현명히 대처하시겠지.’
이안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연합국이자 해협통제위원회의 일원인 대한제국에도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작가의 말
??? : 영국의 루소포비아가 또!
주데텐 위기를 제외하고, 전간기 영국이 가장 전쟁에 가까웠던 차낙칼레(갈리폴리) 위기 개막입니다.
저때 로이드조지와 처칠은 진지하게 전쟁할 의사가 있었습니다.
워싱턴조약과 라팔로조약이 원역사보다 조금 늦어지면서 해협 위기와 맞물리고, 터키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는 의심에 영국의 루소포비아가 폭발하려는 순간...!
과연 영국이 한국에게는 뭘 바라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