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 3부-148화 (721/812)

3부 144화 제국의 종말

대한제국, 황성.

이선은 주한영국대사 램프슨으로부터 로이드조지의 친서를 받았다.

「······ 소위 앙카라 정부는 대전쟁의 결과를 부정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확립한 국제질서를 파괴하려 합니다. 앙카라 정부의 배후에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있습니다. 소비에트는 세계혁명이란 야욕을 저버리지 않고 있으며, 터키는 그 시작에 불과합니다. 세계를 정복하려던 독일 군국주의에 맞섰던 모든 국가가 단결하여 붉은 위협에 맞서야 합니다.」

“도대체 영국 정부는 일관성이란 게 존재하오? 1919년에는 볼셰비키를 인정할 수 없다고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더니, 올해에는 소비에트와 화해하여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일원으로 끌어들이겠다고 호언장담했소. 그런데 이제는 또다시 전쟁이라고?”

친서를 읽은 이선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노망이 들었나? 케말이 러시아 스파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어? 케말은 철저한 민족주의자인데.’

이선이 40년 전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건, 본질적으로 친러파라서가 아니었다. 당시 국제질서에서 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있는 조선을 도울 만한 유일한 위치의 나라가 러시아였기 때문이었다. 이선의 최우선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이익이었다.

케말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국제질서에서 튀르키예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위치의 나라가 소비에트 러시아였다. 케말은 결코 친소파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최우선은 어디까지나 그 조국의 이익이었다.

러시아의 세계정복 위협이라는, 실체도 불분명한 유령에 놀란 영국은, 이선을 친러파로 의심하고 경계했듯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영국의 루소포비아는 ‘그레이트 게임’으로 100년간 누적된 것이었다. 직접적인 충돌만 해도 1853년 크림전쟁, 전쟁 직전까지 간 것도 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1885년 아프가니스탄 위기, 1905년에는 일본을 이용해서 대리전에 나섰다. 최근에도 백군 지원을 통해 내전에 개입한 바 있었다.

“대사, 한국에서 콘스탄티노플은 너무나도 먼 남의 나라 일이오. 설령 우리가 돕고 싶다고 해도, 무슨 수로 돕는단 말이오?”

이선은 영국을 도울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거리상 돕고 싶어도 못 돕겠다는 외교적인 답변을 했다.

“한국은 연합국 최고위원회의 일원이자, 해협통제위원회의 일원이기도 하며, 영국의 오랜 동맹입니다. 영국은 동맹의 공동대응을 희망합니다.”

불과 몇 달 전, 황제의 진노를 경험했던 대사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콘스탄티노플에는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연합군이 영국군과 공동으로 대응해서 적군에 맞서기를 바랍니다.”

현재 콘스탄티노플과 해협에 주둔하는 병력은 영국군 여단, 프랑스군 연대, 이탈리아군 대대, 그리스군 중대, 한국군 소대였다. 전부 다 합쳐 봐야 1만 명이 안 되었다.

“현재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는 터키군은 얼마나 되오?”

“기병 1개 사단, 보병 2개 사단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병력 규모에서 상대가 안 되지 않소?”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에 그리스군 사단이 주둔하고 있으니, 그들과 연합하면 됩니다.”

“그리스군은 연패하고 있는 상황이잖소. 이제 터키군에겐 콘스탄티노플만 남은 상황인데, 앞으로 전력을 투입하지 않겠소?”

“영국 본국에서 즉각 2개 사단을 파병할 예정이며, 선전포고 이후에는 자치령의 군대도 집결할 겁니다. 대영제국이 나서면, 터키 따위는 상대가 안 됩니다.”

“동원에 적잖은 시일이 소요될 텐데, 그동안 해협에 주둔하는 병력은 전멸해도 상관없단 말이오?”

“······ 최선을 다해서 방어할 예정입니다.”

이선은 헛웃음을 흘렸다.

요컨대, 당장의 전투에서는 전력 격차가 있기에 패배를 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파병으로 전세를 뒤엎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군을 포함한 연합군이 인계철선이 되어 달란 말이었다. 피를 흘리게 되면, 각국도 증원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국 정부는, 한국이 소비에트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을 차단한 걸 매우 높이 평가합니다. 마찬가지로 지중해로 나가는 길도 차단해야 한다는 게 영국의 방침입니다. 연합국의 단결로 러시아가 흑해에서 타격을 입는다면, 장차 태평양으로의 진출도 엄두를 내지 못할 겁니다.”

한국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해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막고 있듯, 콘스탄티노플을 통제해 지중해 진출을 막을 터이니 도와달라는 말이었다.

‘케말이 집권해도 러시아의 남하는 봉쇄할 텐데. 민족주의자는 집권하는 순간부터 외세는 남이지.’

이선은 케말이 장차 소비에트에 등을 돌리리라 확신했지만, 영국의 의심은 피해망상 수준이었다.

“알겠소. 대신들과 의논해 보고 답을 드리지요.”

“예,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이선은 당장 딱 부러지게 거절은 하지 않았다.

“외무는 어찌 생각하나? 개입해야 하겠나?”

“영국은 우리의 오랜 동맹으로, 동맹의 위급을 외면할 수는 없겠습니다마는······.”

외무대신 이승만은 내각에서도 가장 강력한 친미, 친영파에다 반소파였다. 평상시 같으면 강력하게 개입을 지지했겠지만, 이승만은 말을 흐렸다.

“콘스탄티노플은 너무나도 멀고, 대한에 실익은 없습니다.”

“옳은 말일세.”

“다만 노골적인 거절은 할 필요가 없고, 답변을 미루시지요. 그 사이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문제해결이라면?”

“자치령도 파병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자연히 평화적으로 위기가 해결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 사이에 해협에서 충돌이라도 발생한다면, 콘스탄티노플에 주둔하는 아군은 어찌한단 말인가?”

이선은 군무대신 이동휘를 바라보았다.

“교전 금지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아니, 아예 우발적 교전에 휘말리는 일 자체가 없도록 철수하는 게 좋겠군.”

“그럼 영국이 당혹해하지 않겠습니까?”

이승만의 우려에,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저들이 둔 무리수야. 무리수에 우리 병사들의 피 한 방울도 흘릴 생각 없네. 그건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일 거고. 외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전문을 보내게. 공동대응에 나서자고.”

* * *

4세기 로마제국의 천도 이래 오랫동안 제국의 수도로 군림해 왔던 ‘그 도시’ 콘스탄티노플.

15세기 동로마제국에서 오스만제국으로 주인이 바뀐 이래, 처음으로 서양 기독교 세력의 점령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연합국에 힘없이 굴복한 오스만제국 정부에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반감을 느끼고 있었고, 앙카라 정부의 군대가 진주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도시 인구의 3할 이상을 차지하는 그리스계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스미르나 참사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콘스탄티노플에도 번졌다. 지난 3년간 그리스군이 고토 수복을 명분으로 무슬림들을 상대로 저지른 전쟁범죄를, 고스란히 현지 그리스인들이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기독교도 주민의 안전을 명분으로 주둔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일선 병사들과 달리 총사령관 케말은 피에 굶주린 복수귀가 아니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전쟁불사를 외치는 영국과 달리 앙카라 정부와 은밀히 접촉하였다. 케말은 콘스탄티노플과 트라키아의 기독교도들을 보호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절대로 영국의 요청에 응하지 말고, 프랑스 군함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떠날 것.」

군무대신의 명령을 받은 해협통제위원 안중근은 한국 영사관을 호위하고 있는 해병대 소대를 향해 외쳤다.

“친애하는 장병 여러분! 부대의 임무는 종료되었다. 제군은 이제 본국으로 귀환한다.”

“와아아아!”

병사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교전이 눈앞으로 임박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들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예병들이었지만, 한국과 전혀 무관한 지구 반대편에서 피를 흘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동맹을 저버리는 겁니까?”

“본국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철수합니다.”

영국군 사령관이 항구로 달려와 만류했지만, 이미 프랑스·이탈리아·한국 ‘커피클럽’ 3개국은 공동으로 철수를 단행하기로 결정한 터였다.

프랑스 군함이 3개국 군을 중간기착지인 이탈리아까지 수송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진입했다.

안중근은 해병대원의 승선을 지켜본 후, 마지막으로 올라탔다.

화려한 돌마바흐체 궁전 앞에 휘날리는 연합국의 깃발을 보면서, 안중근은 거수경례했다.

‘이제 점령의 시대는 끝났다. 터키는 시작에 불과하다. 중동과 인도에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겠지. 아시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가게 될 것이다.’

안중근은 한국군이 터키군과 교전하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한국 병사들이 영국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시아주의자인 안중근은 심정적으로 ‘제국주의에 분연히 맞서는’ 투쟁에 공감했고, 과거의 낡은 이슬람 제국이 아닌 근대적·세속적 국민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케말의 구상을 높이 평가했다.

‘대한도 서양 제국주의 국가의 일원이 아니라, 아시아 국가의 일원으로서 아시아 식민지 해방의 선봉에 서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대한이 먼저 만주와 몽골에 지배자로 군림할 게 아니라, 저들을 동등한 형제로 대해 줘야겠지.’

한국이나 일본의 대륙침략을 ‘해방’으로 포장하는 위선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시아의 해방과 단결을 꿈꾸는 진정한 아시아주의자들도 있었다.

안중근은 단연코 후자였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이상이 이뤄지는 날을 열망했다.

* * *

“영국은 프랑스의 전쟁에 기꺼이 병력을 지원했건만, 어찌 이리 외면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지금 이게 독일의 침략과 같은 상황으로 보입니까? 프랑스는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겁니다.”

영국 외무장관 커즌이 파리를 찾아 지원을 호소했지만, 프랑스 총리 푸앵카레와 최고사령관 포슈 원수는 개입을 거부했다.

프랑스는 늘 그렇듯 독일이 최대 문제였지, 콘스탄티노플과 해협은 지엽적인 문제였다.

커즌과 푸앵카레는 격렬한 언쟁을 쏟아 냈지만, 결국 영국은 프랑스의 외면만 받았을 뿐이었다.

이탈리아·세르비아·루마니아 모두 중립을 지키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캐나다 자치령 정부는 런던의 군사적 모험에 동참할 생각이 없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자치령 정부는 제2의 갈리폴리를 원치 않습니다.」

영국에 보다 더 큰 충격은, 영연방의 일원인 자치령의 참전 거부였다.

1914년 대전쟁 때와 달리, 자치령은 본국의 참전 명령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남아프리카 연방은 아예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캐나다와 호주는 지난 전쟁에서 적잖은 피를 흘렸고, 특히 안작(ANZAC, 호주-뉴질랜드 연합군)에게 갈리폴리는 수많은 청년의 피를 흘리게 한 재앙과도 같은 장소였다.

자치령이 본국의 요청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갈리폴리 위기는 자치령이 영국을 따라 자동으로 전쟁에 임할 것이라는 가정에 근본적으로 도전했다.

대영제국의 역학관계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전쟁 반대! 우리는 또다시 갈리폴리에서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

“로이드조지 내각은 총사퇴하라!”

노동당이 주도하는 반전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당장 12월 총선을 눈앞에 두고 있는 보수당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이대로 로이드조지와 함께하다가는 우리까지 위험해지겠소.”

“가뜩이나 노동당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대로 가다간 자유당 표를 저들이 다 가져가 버릴 겁니다.”

1918년 12월, 종전 직후에 치러진 ‘군복선거’에 서 자유당 주류와 결별한 로이드조지는, 독자적인 국민자유당을 창당해 숙적이었던 보수당과 손을 잡았다. 제1당으로 올라선 보수당은 로이드조지에게 계속 총리직을 맡기고, 연립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전쟁은 없습니다. 속히 휴전을 체결하지요.”

내각에서 보수당을 대표하는 외무장관 커즌 경은 독단적으로 휴전을 결심했다. 위기의 책임은 로이드조지와 처칠에게 있었고, 보수당은 침몰하는 배와 함께 죽을 생각이 없었다.

11월 10일, 공교롭게도 대전쟁 종전 4주년이 되는 날,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과 그리스는 콘스탄티노플과 동트라키아의 양도를 인정했다. 대신 에게해의 섬들은 그리스에 보장될 터였다.

그리스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얻은 성과를 모두 상실했고, 동로마제국의 재건이라는 야망은 비참한 파국으로 종료되었다.

“국가의 주권은 오스만의 남계 후손들이 아니라, 모든 인민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공화국 만세!”

콘스탄티노플에 진주한 케말의 군대는 오스만제국 정부와 술탄을 외세에 부역한 반역자로 규정하였고, 앙카라 의회는 메흐메트 6세의 퇴위를 의결하였다.

마지막 술탄 메흐메트 6세는 영국 군함을 타고 몰타로 망명했다. 소수의 왕당파를 제외하면, 아무도 술탄의 퇴위와 망명을 슬퍼하지 않았다.

이로써 600년 오스만제국도 종말을 고했다.

로마노프 왕조와 호엔촐레른 왕조에 이어, 오스만 왕조도 기나긴 역사의 종말을 맞이했다.

“만약 보수당 지도부가 로이드조지와 연립정부를 계속 이어 나간다면, 나와 동지들은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할 겁니다.”

“연립정부 해체! 로이드조지 사퇴!”

보수당 의원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이 로이드조지의 대항마로 등장했다.

11월 19일, 보수당 긴급총회에서 의원들은 187 대 88로 연립정부의 종료를 의결했다.

“배신자들! 기회주의자들! 영국을 승리로 이끈 나를 이렇게 배신하다니!”

다수의 지지를 상실한 로이드조지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당일에 조지 5세를 알현하여 퇴임을 알렸다.

1916년부터 6년 간 총리로 재임하며 영국의 전쟁승리와 국제질서 재편을 이끌었던 로이드조지의 권력도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1922년 12월 14일. 4년 만에 치러진 영국 총선의 결과는 놀라웠다.

「전체의석 615석 중 보수당 258석, 노동당 191석, 자유당 105석, 국민자유당 53석.」

역사의 미세한 변화로 인해, 보수당과 국민자유당은 원역사보다 더 큰 참패를 당했다.

보수당은 이전 선거보다 121석이나 상실했고, 로이드조지의 국민자유당은 74석을 상실해 군소정당으로 추락했다.

승전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고, 전후 디플레이션과 불황, 아일랜드 내전에 이어 전쟁 위기에 직면한 영국 국민은 보수당-국민자유당 연립정부를 심판했다.

“노동당 대약진! 토리(보수당)에 이어 제2당 등극!”

무엇보다 놀라운 건, 노동당이 역사상 최초로 자유당을 대신하여 제1야당으로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노동당은 57석에서 의석수를 대거 늘려 최대의 승리자가 되었다.

“노동당에 이대로 정권을 넘겨줄 수야 없는 일 아닙니까?”

“보수당 소수정부라도 출범시켜야 합니다.”

보수당은 자유당의 암묵적인 지지를 얻어, 가까스로 과반을 넘겨 소수파 정부를 구성했다.

노동당은 제1야당으로서 보수당의 왼쪽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 제국의 위신을 되찾겠다고 섣불리 전쟁을 획책하다, 오히려 연합국과 자치령의 이탈을 불러일으켜 위신을 깎아 먹고, 노동당의 약진만 이끌어 냈군.’

이 모든 상황을 영국에서 지켜보던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위대한 영국이 아니군.’

이제 영국은 과거의 팍스 브리타니아, 대영제국이 아니었다. 열강들조차 굴복시키던 대영제국은 어디로 가고, 신생 공화국에까지 패퇴하는 상황이었다.

가까운 동맹조차 영국과 뜻을 같이하지 않았다.

아니, 대영제국의 일원으로 여겨졌던 자치령조차 더 이상 영국과 한 몸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했다.

대영제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제 정말 미국의 시대가 오는가? 부황께서는 이미 예측하고 계셨던 건가.’

“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즐거운 크리스마스인데, 심각한 표정 그만 지으라고요.”

“······ 여대공 전하, 정교회의 크리스마스는 1월 7일 아니었습니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영국에 왔으니 12월 25일을 즐기고, 1월 7일에 또 기념하면 되죠.”

아나스타샤 로마노바는 배시시 웃었다.

아나스타샤는 루이 마운트배튼과 결혼이 예정된 마리야를 따라 영국에 왔다.

표면적인 이유는 언니의 들러리 자격으로 온 것이었지만, 그녀의 목표는 따로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다사다난한 1922년을 보내며, 내년에는 평화롭고 행복한 해가 되기를!”

“메리 크리스마스. 평화롭고 행복한 해가 되기를.”

이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면서 아나스타샤에게 답례했다.

정말로, 내년만큼은 평화롭고 행복한 해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유럽은, 아니 역사는 1923년을 대전쟁의 뒤를 잇는 대격변의 해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작가의 말

??? : Remove kebab, Remove kebab!

??? : 상관없다. 별로 위대한 영국이 아니다.

??? : 이 사람들은 잘 화합을 한 거다.

전세계에 혐성의 방식을 강요하던 대영제국이 별로 위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실제 차낙칼레 위기는 캐나다와 호주 등 영연방에서 중대한 변곡점으로 평가받습니다.

더이상 대영제국의 일부가 아닌 독자적인 국가라는걸 공개적으로 표명한 사건이라.

자유당은 저때 이후 두번 다시 집권하지 못하고, 노동당이 약진하여 지금까지도 보수-노동 양당체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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