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 3부-152화 (725/812)

3부 148화 군주제의 운명

「오직 군주제만이 야만적인 공산주의, 미국의 기계문명, 깨어나고 있는 아시아 민족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유럽을 지킬 수 있다.

······유럽은 멸망할 것인가, 아니면 군주제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놓여 있다.」

- 제네바, ≪퇴위한 군주들의 회의(Congress of dethroned monarchs)≫

1923년 현재, 군주제는 유럽에서 명백히 퇴조하는 체제였다.

대전쟁은 유서 깊은 왕조들 – 로마노프, 호엔촐레른, 비텔스바흐, 오스만 왕조의 지배를 종식시켰다.

오랫동안 제국에 군림하던 황제와 황족들은 처형되거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전제군주였던 차르 니콜라이는 비참하게 처형되었고, 카이저 빌헬름은 네덜란드에 망명하여 패배를 곱씹어야 했다. 독일제국의 무수히 많았던 왕과 공작들도 모두 작위를 박탈당했다.

예외적으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선제적 개혁으로 ‘도나우 연방’으로 변화,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동군연합국으로 살아남았지만, 옛 합스부르크 제국의 주요 산업지대와 농경지대를 상실한 연방의 체제는 근본적으로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1923년에 독일과 중부유럽에 닥친 경제위기는 연방의 존속 가능성마저 뒤흔들고 있었다.

물론, 굳건히 살아남은 왕조들도 있었다. 승전국인 영국의 윈저 왕조와 이탈리아의 사보이 왕조 외에도, 일찌감치 권력을 내려놓은 베네룩스와 북유럽의 왕조들, 중립을 지킨 스페인은 살아남았다.

발칸의 외국인 왕조들, 그리스의 글뤽스부르크 왕조, 불가리아의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루마니아의 호엔촐레른 왕조는 살아남기는 했지만, 불가리아와 그리스에서는 패전의 여파로 군주가 퇴위해야 했다.

하지만 영국과 북유럽 몇 나라들을 제외하면, 군주제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유럽 각지에서 분출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18년 독일 혁명은 군주는 신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통치자라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었고, 군주주권은 인민주권(Popular sovereignty)으로 대체되었다.

왕정복고를 외치는 망명 귀족들의 외침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낡은 유산으로 비난받았다.

제네바 ‘퇴위한 군주들의 회의’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건이 아니라,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폴란드 작가가 군주제를 조롱하면서 쓴 가상의 소설 속 사건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시아의 군주제는 여전히 굳건했다.

서양의 식민지 신세를 피하고 살아남은 아시아 주권국가들은 대부분 군주국이었다.

1923년 현재 독립국으로 분류되는 아시아 국가는 대한제국, 일본제국, 대청국, 중화민국, 시암 왕국(태국), 필리핀 공화국이 전부였다.

그나마 진정한 주권국가로서 국제연맹에 가입한 국가는 한국, 일본, 중국, 시암 4개국이 전부였다.

비록 중국에서는 혁명으로 2천 년 황제 제도는 사라졌지만, 만주로 이전한 아이신기오로 왕가는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했다.

일본 천황과 시암 국왕은, 자국에서 신이나 다름없는 절대적인 권위를 누렸다.

시암 국왕은 문자 그대로 절대군주였고, 일본 천황은 ‘살아 있는 신’이었다.

대한제국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황제에 대한 숭배는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단순히 유교적 충성의 대상을 넘어, 쇠망의 위기에서 중흥의 시대를 연 군주요, 무수히 많은 업적을 남긴 지도자에 대한 숭배였다.

통치와는 거리가 먼 병약한 요시히토(다이쇼)가 천황 숭배 덕에 ‘현인신’으로 숭배받는다면, 광무제 이선은 그 자신이 이뤄 낸 업적으로 전 국민의 진정 어린 존경을 받는 군주라고 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 황제의 권위와 대중적 인기는, 외국인 관찰자들이 볼 때 놀라울 정도였다.

「일본의 미카도(천황), 한국의 황제는 그 나라에서 진정 하늘의 아들이다. 군주는 국가 그 자체이며, 국민은 군주를 절대적으로 숭배한다. 우리 시대에 이와 비견될 만한 군주는 없다.」

유럽의 군주제 지지자들이 볼 때, 한국과 일본이야말로 진정한 군주제의 천국이었다.

* * *

광무 27년 5월 31일.

황제의 탄일인 건원경절을 맞이하여, 전국에서 축하행사가 개최되었다.

국가에서 주도하는 차원을 넘어, 민간에서도 자발적으로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고종 태황제의 공식적인 삼년상도 끝났으므로, 올해 행사는 더욱 성대하게 치러졌다.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도 황제의 성수무강(聖壽無彊)을 기원하는 축제가 열리곤 했다.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성수무강하시옵소서!”

국민들은 진심으로 황제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했다.

황제의 보령(寶齡) 어느덧 쉰여섯이었다. 군주로서는 평균수명을 한참 넘어섰고, 이 시대 기준에서는 장수라고 할 수 있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옆 동네 김영감이 환갑잔치 하고 가셨다는구만.”

“오래 사셨네, 호상이야.”

의학의 발전으로 수명이 크게 늘어났음에도, 기대수명은 여전히 낮았다. 만 60세 환갑이 인생의 경사이자 장수의 상징이었다.

물론 이 시대에도, 70대에서 80대까지 사는 이들도 적잖이 있었었다. 얼마 전 별세한 원로대신 운양 김윤식(金允植)처럼 89세까지 산 사람도 있었다.

“한 해만 더 사셨으면 구순을 보고 가시는 건데.”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영예에 올랐고, 엄청나게 장수하셨는데 더 바랄 게 뭐가 있겠나. 고인도 여한이 없었을걸.”

비록 총리대신까지 오르진 못했지만 바로 그 아래인 참정대신까지 역임했고, 1세대 개화파(동도서기파) 동료였던 김홍집·어윤중·박정양보다 훨씬 장수하며 오랫동안 국가원로 대접을 받았다.

「고 참정대신 김윤식 공에게 총리대신을 추증하고, 충헌(忠憲)의 시호를 내린다. 충헌공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엄수하라.」

김윤식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지지는 않았지만, 전 총리대신 유길준이 장례위원장을 맡아 국민장으로 성대히 엄수되었다.

원역사에서 ‘불가불가(不可不可)’로 대표되는, 친일과 독립 사이에서 애매한 입장을 보였던 김윤식의 죽음을 사회장으로 치르는 문제로 인해 좌우익 간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끝에 무산된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의 호상(好喪)이었다.

김윤식이 이례적으로 장수하긴 했으나, 이는 정말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 자신이 타고난 건강도 있겠지만, 2대 총리 박정양이 사직할 때 함께 은퇴하여 20년을 한가로이 노년을 보낸 덕도 컸을 터였다.

대개 50대 중반을 넘어서면 슬슬 죽음을 염두에 두는 시기였다.

그러니 국민은, 어느덧 나이 60을 바라보는 황제가 만수무강하기를 바랐다.

“김윤식 대감은 실로 호상이야. 성상께서도 이처럼 구순까지 만수무강하셨으면 좋겠네.”

“구순이 뭔가, 상수(上壽, 100세)까지는 보셔야지.”

황제도 사람이기에 언젠가는 죽겠지만, 광무제 이 선은 곧 대한제국 그 자체였다.

대한제국이 영원불멸하듯, 황제도 영원불멸해야 하리라.

‘······ 고맙긴 한데, 진짜 부담스럽네.’

이선은 전국적으로 쏟아지는 숭배의 물결에 고마움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꼈다.

건원절은 매년 돌아오기에 익숙한 일이었지만, 올해는 더욱 성수무강을 외치는 목소리가 컸다.

고종의 삼년상이 끝나고 처음 돌아오는 건원절이기에 더욱 그러할 터였다.

이미 퇴위하여 잊혀진 군주였다고는 하지만, 고종의 붕어(崩御)는 국민으로 하여금 새삼 황제의 죽음을 상기시켰으리라.

‘국가는 불멸일지어도 군주는 필멸이지. 나도 결국 언젠가 죽는 유한의 존재인데.’

사회 풍토에 비해 지나치게 진보적인 황제의 행보, 즉 러시아인 황태자비나 만주인 부마와 같은 사안으로 대중이 경악한 적은 있었지만, 그게 곧 황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황제를 곧 국가와 동일시하고, 황제를 열렬히 숭배하는 건,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 궁극적으로 국민주권으로 이양하길 바라는 이선으로선 바람직하지 못한 풍토였다.

주권이 군주에게 있다고 천명한 대한국 헌법 1조는 그 생전에 손을 볼 생각이었고, 유럽식 국민군주제(國民君主制, Popular monarchy)로 전환할 생각이었다.

‘원래 내 계획대로라면 이쯤에서 선위했어야 했는데.’

이선은 즉위 전 김옥균과 나눴던 ‘40년 구상’을 떠올렸다.

갑신경장 이래 40년, 한 갑자가 끝이 나는 계해년에 새로운 세대에 권력을 이양하고, 갑자년에는 새로운 연호와 함께 새 시대를 맞이할 생각이었다.

올해가 바로 계해년이었고, 이선은 만 55세가 되는 건원절에 선위를 발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국제정세의 급박함에 미뤄야 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선위할 수는 없지. 진에게 즉위 초부터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

1923년 유럽에서 전해지는 소식은 하나같이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유럽은 대전쟁 못지않은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식민지 곳곳에서 벌어진 독립투쟁과 갈리폴리 위기로 제국의 위신을 상실하고 후퇴하는 영국, 독일의 배상금을 받아 내지 않으면 미국에 진 막대한 전쟁채무를 갚을 수 없어 파산위기에 놓인 프랑스.

배상금을 받아 내기 위한 프랑스-벨기에군의 루르 점령으로 촉발된 초인플레이션 사태로 인해, 경제 붕괴 위기 속에 극좌와 극우가 급성장하는 독일.

민족과 정파 간의 대립으로 붕괴 위기에 놓인 도나우 연방, 비록 역사의 변화로 집권은 못 했지만 점증하는 파시즘의 위협에 직면한 이탈리아.

내전 종결 이후 신경제정책을 내세우며 경제의 안정을 꾀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세계혁명의 야욕을 저버리지 못한 소비에트 러시아.

대전쟁의 여파는 종전 5년 후인 1923년에 정점에 달했고, 언제 유럽에 혁명과 내전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시아는 안정적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중국의 군벌항쟁은 갈수록 가관이 되어 가고 있었다. 북방에서는 안휘군벌 단기서에 맞서 직례군벌 오패부(吳佩孚, 우페이푸)가 2차전을 벌였고, 남방에서는 국민당과 광동군벌 간에 호법정부의 주도권을 놓고 분쟁이 발발했고, 각 성의 군벌들은 중앙정부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지배권을 구축했다.

이름만 중화민국으로 합쳐져 있을 뿐, 10여 개의 독자정권으로 쪼개진 것과 다름없었다.

청나라도 분열 직전이었다. 거리가 멀어 사실상 독립국인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는 근대화 개혁에 나서며 독립할 의사를 천명했고, 신강군벌 양증신은 명목상만 청나라의 신하일 뿐이었고, 몽골의 군벌 운게른은 복드칸을 내세워 대몽골의 재건을 외치며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만약 한국의 중재가 아니었다면, 티베트-신강-몽골은 모두 청국에서 분리하여 독립국이 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그나마 안정적인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누리며 정당정치 입헌군주제를 확립해 가고 있던 일본도, 지배자들이 상상하지 못하고 있던 위협이 목전에까지 닥쳐 있었다.

‘한국이 무풍지대인 거냐, 아니면 태풍의 눈에 있는 거냐.’

현재 세계 10대 주요국가, 미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도나우·이탈리아·중국·일본·한국 중에서, 유일하게 정치경제적 안정을 누리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극좌 공산주의자와 극우 파시스트도, 한국에서는 존재감이 없었다.

근대화 후발주자로서 사회의 모순이 늦게 드러난 점도 있겠지만, 그만큼 지난 40년간 이선과 개화당이 구축한 체제가 안정적이고 튼튼하다는 의미였다.

전시 대호황의 종식과 전후 버블 붕괴는 잠시 금융위기를 촉발하기도 했지만, 이선과 이상설 내각의 선제적인 개혁조치로 큰 위기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폐하, 신의 사직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총리, 내년 총선까지만 자리를 맡아 줄 수 없겠는가? 경이 아니면 누가 연립정부를 이끈단 말인가?”

총리 이상설이 건강 문제로 사임의사를 밝혔다.

이선은 그가 아직 필요했다. 이상설은 행정력과 정치력, 인품을 두루 갖춘 인사였다. 초대 총리 김홍집에 비견할 만했다.

“경의 공백을 메울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야.”

“제 후임으로는 외무대신이나 탁지대신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성재(이시영)는 청렴하고 인품이 훌륭하지만 정치 감각이 부족하고, 우남(이승만)의 정치 감각은 대한에서 손꼽을 정도로 뛰어나지만 편벽한 인품이 문제일세.”

이상설이 사임하면, 후임 총리는 제1여당인 개화당에서 나와야 했다.

현 개화당의 2인자인 이시영은 김홍집의 사위답게 행정력과 인품이 모두 훌륭했지만, 정치가의 덕목인 정치 감각이 부족했다. 뛰어난 행정가이지만, 여러 정파를 아우르는 정무직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개화당의 3인자인 이승만은 국제정세를 읽는 눈이나 정치 감각은 한국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고, 외부 인사였던 이승만이 단숨에 개화당의 실력자로 자리 잡은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능란한 정치공작으로 세력을 형성하는데도 뛰어났다.

‘우남 같은 인사는 한번 권좌에 오르면 절대로 내려오지 않으려고 하는 유형이다.’

문제는 이승만의 편벽한 인품과 권력욕이었다.

물론 정치가에게 권력의지는 어느 정도 덕목이었다. 이상설은 유능했지만 권력의지가 부족했고, 개화당 총재로서 당을 휘어잡지 못해 결국 외부 인사였던 이승만이 개화당의 실력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권력의지가 지나치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1인자가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유형의 사람이었고, 라이벌로 인식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규식과, 이동휘와, 박용만과, 안창호와 갈등을 빚고 대립했다.

한때 김규식과 안창호는 미국 유학을 같이한 절친한 사이요, 박용만과는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는데도 그러했다.

그나마 이상설이 총리로 있을 때는 이들 모두를 조율할 수 있었지만, 점잖은 선비인 이시영이 그런 역할을 해 주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물론 내가 직접 나서서 정리하면 간단하겠지만, 황제가 내각과 정당까지 모두 관여한다면 도대체 모양새가 뭐가 되겠나? 다시 전제군주제로 돌아가자는 소린데.’

황제가 개화당 내부의 일까지 관여한다면, 대한제국 초기로 회귀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선은 일단 내년으로 예정된 총선까지 이상설이 버텨 주고, 선거 결과에 따라 새로운 정부의 구성을 기대했다.

그렇기에 총리의 사직을 거듭 만류했지만, 이상설의 건강이 나쁘다는 게 눈으로도 빤히 보였기에 무작정 만류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상설도 황제의 뜻을 알고 있기에 의무감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지병인 협심증이 악화되어 쓰러져 주치의가 절대안정을 권유하자 한계를 느꼈다.

“신하된 도리로 성상의 뜻을 받들어 죽음으로써 그 직을 지켜야 마땅한 도리이오나······.”

“짐은 신하가 직위에 있다가 죽기를 바라는 군주가 아닐세. 충헌공(김윤식)이나 고균처럼 은퇴해서 편히 장수하길 바라지.”

이선은 아끼는 신하가 50대 초반이라는 한창 나이에 죽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알겠네. 일단 의정대신 박은식으로 하여금 총리직을 대행하라고 하지. 경은 그동안 정양(靜養)에 힘쓰도록 하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선은 이상설의 사직을 받는 대신, 신민당을 대표해 내각의 2인자를 맡고 있는 박은식에게 총리대행을 맡도록 했다.

의정대신이 명예직이라고는 하지만, 총리 유고 시 대행할 권한이 있었으므로 적절한 인선이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현 내각이 다음 총선까지 무난히 이끌어나가길 바랐다.

작가의 말

??? : 세계가 개판이야, 개판 5분전이라고!

그나마 대한제국이 안정적인건 불행 중 다행인걸까요.

실제 김윤식은 1922년 향년 88세로 별세했는데, 김윤식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하느냐의 여부를 두고 좌우간의 대립이 발생합니다.

김윤식은 경술국치 때 ‘불가불가不可不可(해석하기에 따라 절대반대/불가피하게 찬성)’의 일화에서 볼수 있듯이, 일제의 자작 작위를 받는가하면 3.1운동 당시에는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작위를 반납하는 행보를 보였으므로, 친일파냐 민족주의자냐 논쟁이 컸었죠.

그 나이와 행보를 보면 시대에 순응한 쪽에 더 가깝긴 합니다만...

이 세계관에선 1세대 개화파이자 존경받는 원로대신으로 장수하다 갔으니 수혜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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