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51화 통합과 분열
이승만은 옛 동료 박용만을 이념적으로 설득할 생각을 포기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권력을 위해서 얼마든지 실용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좋네. 방향은 다르더라도, 우리의 충성 대상은 대한이지.”
“대한이지요.”
“그래, 우성 자네가 근래 인기가 있다는 건 인정하지. 차기 개화당 총재 선거에 출마할 생각인가?”
이승만은 박용만의 총재 출마를 용납할 수 없었다.
박용만이 부상하기 전까지, 유력한 차기 총재 후보는 이시영과 이승만 둘로 압축되는 상황이었다.
초대 총리 김홍집의 사위라는 후광, 오랜 관직 경험, 선비다운 성품, 온건한 이념으로 개화당 주류의 지지를 얻고 받고 있었다. 현 총재 이상설은 물론이고, 원훈 김옥균과 유길준도 이시영을 선호했다.
“불초소생을 믿고 따라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도전해 봐야죠.”
“이봐, 그렇게 되면 이시영 대감을 총재로 만들어 주는 셈이잖아! 나와 자네는 소장파, 우파에서 지지기반이 겹친다고!”
이승만은 주류의 선택은 받지 못해도, 원훈 서재필의 지지도 받고 있었고, 당내 소장파와 우파의 지지를 두루 받고 있었다. 점잖은 선비인 이시영과 달리, 정치공작에 능수능란한 이승만은 여러 파벌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차기 총재에 도전했다.
그러니 민족주의 우파 청년들을 조직해서 급부상 중인 박용만도 설득해야 했다. 가만 내버려 두면, 박용만이 이승만의 지지를 갉아먹을 터였다.
“흠, 그래서요?”
“나랑 힘을 합치세. 내가 차기 총재가 되고, 자네가 부총재가 되는 거야. 총선에서 승리해서 내가 총리가 되면, 자네에게는 군무부를 맡기겠네.”
“현 대신인 이동휘 장군이나, 차기 대신으로 유력한 노백린 장군은 어쩌고요?”
“물러나야지. 이제 대한도 문관이 군부를 이끌 때가 되지 않았나? 자네가 군무부를 맡아서, 새로운 뜻을 펼쳐 보라고. 아니면 내가 맡고 있는 외무부도 좋네. 외무대신이 차기 총리로 가는 가장 가까운 자리라는 거 알지?”
이승만은 은근한 어조로 설득했다.
박용만의 이념은 마음에 안 들지만, 정치공학으로 손잡고 2인자 자리는 내줄 수 있었다.
‘총리라고? 10년이 지나도 어림도 없다, 암!’
물론 거기까지였다. 이승만은 말만 차기를 운운할 뿐, 결코 박용만에게 권력을 양도할 생각이 없었다.
박용만의 우파 청년 조직을 자신의 기반으로 흡수하고, 팽(烹)할 계산까지 이미 다 세워져 있었다.
“거절하죠.”
“뭐? 이유가 뭔가!”
계산이 엇나간 이승만이 목소리를 높이니, 박용만은 피식 웃었다.
“외무대신이 차기 총리로 가는 가장 가까운 자리라고요? 바로 갈 수도 있는데, 왜 굳이 그래야 하죠?”
“이봐, 정치에는 관록이란 게 있어. 자넨 아직 경륜이 부족해. 내 밑에서 조금만 더 경력을 쌓으라니까. 우남 다음에는 우성이 되는 거야.”
“우남 형, 미국 시절 생각 안 납니까? 나와 도산 형이 주도해서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했을 때 말입니다. 프린스턴에 있던 형을 대표로 추대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됐지요?”
미국 유학 시절, 박용만은 안창호와 함께 재미한인들을 결속시켜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했다. 박용만은 당시 막 프린스턴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아 명망을 누리던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그런데 안창호가 신민당 활동을 위해 귀국하고, 박용만이 대전쟁 참전을 위해 떠난 사이, 이승만이 추종자들을 앞세워 대한인국민회를 장악했다.
윌슨 대통령의 제자를 자처하고 있는 데다, 주미대사인 이승만의 미국 내 힘은 막강했다. 국내 정치 입문을 준비하고 있던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를 개인 사조직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던 이승만과 박용만의 관계는,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멀어졌다.
“그거야 도산과 자네가 부재하고 있으니,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 잠시 내가 맡은 게 아닌가. 나와 윌슨 대통령의 특별한 관계 덕에 한미관계는 더욱 증진되고, 재미한인들도 미국 사회에서의 위치가 올라갔지.”
“참 우남 형다운 말이오.”
박용만은 실소를 흘렸다.
“우사(김규식)는 또 어떻소? 우남 형과 우사는 황성 시절부터 프린스턴에 이르기까지 오랜 동문이지. 외교관 동료이기도 하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형이 우사를 그리 비난하더라고. 요샌 우사를 용공(容共)주의자라고 비난한다면서요?”
“그야 우사가 소비에트 공산당에게 너무 관대하니까, 우려 되서 그러는 거지.”
“물론 그런 점도 있겠지. 하지만 형은 우사가 외무부 내에서 경쟁자로 떠오르는 게 싫은 거야. 우남 형. 내가 형을 소싯적부터 아는데, 1인자는 반드시 자신만 해야 한다는 거, 그거 나쁜 버릇입니다.”
박용만이 이승만의 속내를 눈치채고 아픈 곳을 계속 찌르자, 이승만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시라? 이 사람이 하는 말 하고는······!”
“나를 설득하려고 불렀다면 잘못 계산한 겁니다. 우남 다음에 우성이라고? 내가 형의 속내를 모를 것 같소? 형은 결코 동등한 동지를 용납 못 해. 추종자 아니면 적일 뿐이지. 난 더는 형의 추종자 할 생각 없으니까, 결국 적이겠지.”
박용만의 거듭된 도발에, 이승만이 마침내 벌컥 소리를 내질렀다.
“어이, 박용만!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하하! 미국식 자유와 평등 외치면서, 이럴 땐 또 연장자 예의 타령이지. 내가 섬길 분은 위로는 황제 폐하고, 아래로는 국민입니다. 형이 아니고요. 그럼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가야 하고말고! 썩 돌아가! 도무지 상종할 사람이 못 되는구만! 괘씸한 사람 같으니라고!”
박용만은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이승만은 3년 전 소비에트 특사 박진순을 만났을 때 못지않게 분노를 느꼈다. 아니, 그때는 어느 정도 계산된 분노였다면, 이번엔 진심이었다.
“괘씸한 놈! 어디 두고 보자.”
안창호나 김규식이 아직 ‘라이벌’ 정도였다면, 박용만은 본인 말대로 ‘적’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이 ‘적’으로 찍은 사람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박용만을 반드시 개화당에서, 아니 정계에서 제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승만과 박용만의 불화가 표면에 떠오르면서, 개화당 소장파는 분열되었다.
인간관계도 문제였지만, ‘정통 우익’을 표방하는 이승만과 ‘급진 우익’을 표방하는 박용만은 이념적으로도 한배를 타기가 어려웠다.
“근래 되도 않는 헛소리로 대중을 속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근거 없는 선동으로 국내정치를 뒤흔들고, 국제질서를 망가트리려 합니다! 일본의 과격 아시아주의자들, 이탈리아 파시스트나 소련 공산주의자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무리입니다! 그런 자들이 집권 여당, 명예로운 우리 개화당에 기생하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안 됩니다!”
“우리 개화당은! 갑신경장 이래 대한을 이끌어온 유일한 정당입니다. 대저 개화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성과 계몽입니다! 그런데 사기와 선동으로 개화당을 장악하려는 자들을 용납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 극좌와 극우가 모두 미쳐 날뛰는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아시아에서 오직 대한만이 자유의 등대이자 민본의 장성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저, 우남 이승만은 자유의 등대와 민본의 장성을 반드시 지켜 낼 것입니다!”
“우남! 이승만! 우남! 이승만!”
이승만은 반대자도 많았지만, 특유의 카리스마로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
‘박용만 추종자들은 개화당에서 출당시키고, 나를 중심으로 정계를 개편해야겠어. 우익 일부의 지지를 잃는 건, 개화당 중도파와 신민당 우파, 가능하면 진보당 우파와의 연합으로 보상하면 돼. 그렇다면 역시 답은 반공 반소 반일이다. 좌익은 용공으로, 우익은 친일로 몰아야 해.’
이승만은 전략을 수정해, 우익과 손을 잡는 대신 자신을 ‘자유와 이성의 상징’으로 포장했다.
현재의 정당 구조를 깨고, 이승만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정계 개편의 판을 짜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박용만을 친일 아시아주의자로, 여운형과 안창호는 친소 용공주의자로 몰아 공격할 준비를 세웠다.
* * *
개화당이 노선 분열을 겪는 것처럼, 광무 28년 총선을 앞둔 신민당과 진보당에서도 노선 논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핵심은 연립정부 문제, 세계적으로 크나큰 진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사회주의 문제였다.
여운형이 유럽과 러시아를 방문하고 귀국하자, 우익을 중심으로 격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분명 국가의 허가를 받고 다녀왔고, 황제가 이 사안으로 정치적 문제를 불러일으키지 말라고 하였는데도, 우익은 여운형을 ‘친소 용공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대체 사회주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노동자, 농민, 일반 대중을 위하는 것이 사회주의란 말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사회주의자가 되겠습니다. 나는 노동 대중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사람입니다!”
의회에서 여운형이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발언을 하자, 우익에서 더욱 더 격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역시 골수 빨갱이로군!”
“빨갱이는 모스크바로 꺼져라!”
“여러분과 달리, 나는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습니다! 나는 급진 좌익 이론을 정당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나는 본래 기독교인이고, 인본주의자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적 열정에 불타오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혁명의 이름으로 유혈을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공산당이건 사회민주당이건 노동당이건 좌익에 서 있으면 무조건 ‘빨갱이’라고 여기는 보수 우익과 달리, 여운형은 혁명이 아닌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목표로 했다.
유럽에 이어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문한 여운형의 생각은 더욱 강고해졌다. 여운형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한계를 인지했다.
“새로운 유토피아를 향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열정은 존중해 줄 만하지만, 그들은 지나치게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앞으로도 거듭 피를 흘리겠지요. 그건 우리가 택할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영국 노동당을 모범으로 삼아, 노동대중을 조직하여 선거를 통한 집권으로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
“10석짜리 군소정당이 꿈도 크군!”
“지금은 집권당이 된 사민당도, 제1야당이 된 노동당도, 소수의 정당으로 출발했습니다!”
여운형과 대한사회당의 모범은 코민테른이 아닌 서유럽 사회민주당이었다.
세 인터내셔널이 결정적으로 분열하자, 베른 인터내셔널(제2인터내셔널)과 빈 인터내셔널(2.5인터내셔널)은 코민테른과 결별하고 1923년 ≪노동 사회주의 인터내셔널(Labour and Socialist International, LSI)≫을 통합 결성했다.
사회당은 코민테른이 아닌 신생 노사 인터내셔널에 가입 신청서를 냄으로써, 공산당과는 노선이 다르다는 걸 분명히 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생존권은 신성합니다. 이 시대의 조류는, 조만간 인간 세계의 여러 모순을 그대로 두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러시아의 사례를 보십시오! 만일 우익이 반동적 탄압을 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뿐입니다. 서둘러 이 과거의 껍데기를 벗지 못하면, 국가도 개인도 이내 망하고 말 겁니다!”
여운형의 지론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선제적 개혁으로 혁명을 예방한다.’였다.
20세기 시대의 조류는 분명히 피압박 계급·민족의 각성과 해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반동적 탄압은 오히려 혁명을 촉진시키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대한이 러시아처럼 된다고 저주를 퍼붓는 건가!”
“망하라고 협박하는 거냐!”
우익이 본질을 보지 않고 말꼬리나 잡고 늘어지자, 보다 못한 안창호가 여운형을 옹호했다.
“여운형 의원의 말은 원칙적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정부는 여운형 의원의 모스크바 방문을 허가했고, 합법적으로 방문한 겁니다. 이 사안으로 황제 폐하께서 문제 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만, 어째서 계속 문제를 삼는 겁니까?”
“성상께서는 어질고 관대하시지만, 정부의 입장은 단호해야지요!”
“도대체 내무부는 뭐 하고 있는 겁니까? 급진 분자들을 때려잡는 게 내무부의 책무 아닙니까?”
“애초에 내무대신이 용공 아니오?”
“용공? 말 삼가시오!”
개화당 우익은 애초에 안창호가 내무대신인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극언이 쏟아지자, 안창호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본인은 황제 폐하께서 임명하신 내무대신이자, 국민의 대표로 뽑힌 민의원입니다! 나를 용공 운운하는 발언은 황제 폐하와 국민을 모욕하는 겁니다! 당장 취소하시오!”
늘 점잖은 안창호가 버럭 화를 내자, 장내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결국 우익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는 박용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리에 나섰다.
“의원 동지 여러분. 비록 방향은 다르더라도, 우리는 모두 황제 폐하의 신하이자 대한의 국민입니다. 개화당, 신민당, 진보당, 사회당 모두 이념은 다를지라도, 대한을 위해 헌신하는 정당입니다. 우리는 모두 애국자이자 동지입니다. 서로 간에 지나친 극언은 피합시다.”
박용만은 우익의 용공몰이가 못마땅했다. 그 자신도 반공 반소였지만, 신민당과 진보당은 물론이고 사회당도 용공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좌익과 우익의 싸움을 붙이려 하고 있다.’
만약 좌우익 갈등이 일정 이상 심화되면, 황제가 결코 용인하지 않을 터였다.
이선은 극좌 못지않게 극우도 경계했고, 이를 인지하고 있는 박용만도 추종자들이 선을 넘지 않으려고 완급을 조절했다.
‘우남인가? 우익과 좌익이 싸움을 벌이면 이득 볼 사람은 역시 우남이겠지?’
갈등이 격화되면 우익의 총아로 떠오른 박용만과 좌익의 대표주자인 여운형이 모든 비난을 받게 될 것이고, 중도를 자처하는 자가 이득을 볼 터였다.
여전히 이승만은 개화당 우파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 자신이 아니라면, 이승만이 배후조종에 나서고 있을 터였다.
“도산은 여전히 사회당을 신민당과 합치겠다는 계산을 버리지 못한 건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진보당이라면 모를까, 사회당이라니?”
서북지방, 자유주의 지식인, 상공인, 개신유림의 느슨한 연합이었던 신민당의 노선 갈등도 점차 확연해졌다.
석오 이동녕으로 대표되는 개신유림-신민당 우파는 사회주의에 반대했고, 연립정부를 계기로 이상설·이시영 등 개화당 주류와 가까이 밀착했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개혁의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소비에트와 공산주의는 절대 용납하면 안 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제 조국과 민족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신민당내 소장파를 대표하던 백범 김구도 유럽과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고 점차 우경화되어, 동지이자 직속상관인 안창호보다 반공 반소를 내세우는 이승만과 더 가까워질 정도였다.
“동지 여러분, 작금 신민당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연립정부에 참여한 이래, 우리는 개화당과 차별성이 사라졌습니다. 개화당이 왼쪽으로 나가는 동안, 우리는 오른쪽으로 회전했고, 이제 유권자들은 개화당과 신민당의 차이를 구분 못 합니다. 이럼 내년 총선에서 어찌 되겠습니까? 좌우 양측에서 지지를 갉아먹히고 소수정당으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지식인-신민당 좌파는 현 상태에 우려를 표했다.
이상설이 개화당의 개혁을 이끄는 동안, 정부에 참여한 신민당은 자연히 우경화됐다.
이제 개화당과 신민당은 지역기반이 기호냐 서북이냐가 되었을 뿐, 이념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는 정당이 되었다.
이리되면 신민당은 개화당의 하위 파트너로 남는 운명을 받아들여야할 판이었다.
“좌익들과 손을 잡느니, 개화당과 계속 연립정부를 운영하는 게 낫소.”
“아무렴. 현 상태가 유지된다면 나쁘지 않지.”
안창호와 당내 좌파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진보당, 더 나아가 사회당과의 연대도 추구했다. 하지만 당내 우파가 여지없이 제동을 걸었다.
‘만약 우남이 정권을 잡으면, 이상설 총리 시절하고 다르겠지. 우남은 이상설 대감과 달리, 권력을 공유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는 사람이니.’
안창호는 박용만 못지않게 이승만의 야심을 불신했다.
‘이대로 가다간 신민당은 완전히 개화당에 종속된 처지가 될 거야. 역시 진보당, 사회당과도 접촉해봐야겠어.’
안창호는 이승만이 은밀히 주도하고 있는 정계 개편에 끌려갈 생각이 없었다.
정계가 개편된다면, 안창호는 이승만의 대항마로서 새로운 판을 짤 생각이었다.
작가의 말
??? : 좌익이라고? 파쇼라고? 어림도 없다, 암! 아아아아암!!
??? : 19XX년 11월 21일, 이승만은 오렌지병인 품성 문제로 권좌를 눈앞에 두고 쓰러졌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대한제국도 개화당 일당우위 체제에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어느쪽이 됐건 이승만은 태풍의 눈이나 다름없군요. 미국으로 밀려난 박영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인가...
총선을 앞두고 정계개편, 마치 현실정치와 오버랩된다면 우연의 일치입니다. 정치의 속성 같은거죠. 오히려 당대 유럽-일본 정치를 더 참고하고 있지. 21세기 현실정치와는 아무련 관련이 없다는걸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