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 3부-158화 (731/812)

3부 154화 연해주

함경북도 경흥군 나진(羅津).

두만강에서 가까운 한반도 최북단 항구인 나진은, 불과 몇 년 전까지는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다.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가깝고, 극동러시아의 무역은 대한(對韓)의존도가 높다고는 하지만, 양국의 무역은 원산-블라디보스토크 항로나 남만주철도-동청철도를 통한 육로 연결로 이뤄졌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점은 블라디보스토크요, 두만강 러시아 국경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철도는 없었기에,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대한제국 입장에서도, 남만주철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함경도와 연해주를 직접 연결하는 철도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다.

한국에 중요한 건 연해주보다 만주였고, 경의선과 연결되는 남만주철도 외에도 함경북도 회령에서 길림(지린)을 잇는 길회선 철도를 부설하여 남만주철도 본선을 보조했다.

그런데, 러시아 내전 발발이 상황을 변화시켰다.

한국은 러시아 내전에 개입했고, 연해주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완충국을 형성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함경도와 연해주를 직접 잇는 철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유사시 연해주에 개입하려면, 기존의 남만주철도와 동청철도를 이용하는 방법은 시일이 오래 걸립니다. 관북과 연해주를 직접 연결해야 합니다.”

“두만강 하류의 항만도 확장해야 합니다. 앞으로 동해 항로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터인데, 현재 원산항과 청진항은 포화 상태입니다.”

“청진항이 제일 가깝기는 합니다만, 만이 작아 규모 확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청진까지 부설된 함경선을 북쪽으로 확장하고, 회령까지 부설된 길회선을 동쪽으로 확장하여 두만강까지 연결하는 방안이 좋겠습니다.”

“이를 연결할 최적의 후보지는······.”

천혜의 항만이 있는 경흥군 신안면 나진만이 종착지로 지목되었다. 나진 북쪽의 웅기만도 최종 후보에 올랐지만, 나진만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다.

나진만은 항만 자체가 매우 넓고, 나진반도와 두 섬이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해서 민항이자 군항으로도 최적의 후보지였다.

“나진의 지형과 전략적 가치는 요동반도의 대련과 여순을 떠올리게 하는군. 좋소. 속히 개발을 추진하시오.”

“예, 폐하!”

교통부에서 나진항 개발계획과 철도 연장에 대해 발표하자, 삽시간에 황성 일대가 들썩거렸다.

안목 좋은 부자들은 연해주 개입의 여파를 보고 이미 나진 주변의 토지들을 매입해둔 상태였다.

“여러분, 주목! 종단항이 나진이래, 나진!”

“나진이 떴다아아아아아아!”

“흐흐, 내 이럴 줄 알고 나진에 투자했지!”

“내가 뭐랬나. 이제 두만강이 주목받을 거라니까. 벽촌에 투자한다고 비웃던 놈들 낯짝이 선하구만.”

“아뿔싸! 난 웅기에 투자했는데!”

“걱정 말게. 나진에서 웅기는 지척이야. 웅기도 함께 개발될 테니 두고 보라고.”

“지금도 늦지 않았네! 당장 나진으로 달려가라고!”

대전쟁기 호황을 타고 전국적으로 투자의 바람이 불었다. 평안도 일대에는 금광 열풍이 불었고, 전라도 일대에는 수출 상업용 농지 구매가 급증했다.

토지소유권이 확립되면서, 토지에 대한 전통적 관념도 완전히 바뀌고 있었다. 공업의 발달로 전통적인 한성부 주변에 인구가 급증했고, 정부에서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면서 토지 값이 급등했다.

삼남에서 황성으로 이주하는 인구가 급증하면서 경부선과 호남선 축선을 따라 한강 이남에까지 도시가 확장되었고, 모래밭에 불과했던 여의도에는 한국 최초의 공항이 들어서면서 환골탈태했다.

제1도시 황성과 제2도시 평양을 잇는 경의선 축선을 따라 서대문-마포-고양 일대가 신도시로 개발되어 주거지구가 형성되었다.

“은평에서 농사짓던 김 영감이 토지보상금으로 돈 엄청 벌었다더군.”

“제길, 나도 그쪽에서 농지나 사 두는 건데.”

“난 좀 투자해 뒀지. 요새 돈 있는 사람들 전부 평양으로 몰리지 않나. 서울과 평양을 잇는 서북이 발전할 줄 알았어.”

“그럼 다음은 파주나 장단 아닌가?”

“이미 개성 부자들은 다 그쪽으로 노리고 있다더군.”

“벌써? 하여튼 개성상인들 지독하다니까.”

“아직 땅 많이 남았네. 슬슬 봐 두자고.”

1920년대 초에는 부동산 투자 열풍이 불었고, 토지 매입으로 일확천금을 버는 이들이 등장했다. 평생 농사를 짓거나 어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이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하던 큰돈을 벌고 인생역전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진에 토지 브로커가 득실거린다더군.”

“나진에 땅 있던 사람들은 대박 났겠군.”

“어떤 어부 노인네는 생전 처음 떼돈 벌고 너무 좋다 못해 실성했다던데.”

“돈이 그렇게 흔하다며?”

“나진에는 개도 지폐를 물고 다닌다더라.”

“제길, 난 개만도 못하군.”

“그리 자책하지 말게. 작금의 대한은 기회의 땅이라고. 언제 또 기회가 올 줄 알겠나?”

인구 200여 명의 작은 어촌이었던 나진에 새로운 항구를 개발하고, 함경선과 길회선의 종단항으로 지정되면서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가 불어 닥쳤다.

각지에서 노무자들이 몰려오고, 토사와 시멘트가 산처럼 쌓였다.

바둑판식으로 신도시가 형성되고, 항구가 건설되고, 육군과 해군 부대가 주둔했다.

장차 나진 개발계획이 완료되면, 대륙진출의 선봉이요 극동의 관문이 될 터였다.

* * *

1923년 8월, 두만강.

영친왕 이영과 영친왕비 이서아는 고려인 이주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길에 올랐다.

함경선은 나진까지 확장되어 철도를 이용해 올 수 있었고, 얼마 전에는 나진 북쪽의 두만강까지 기차가 통과할 수 있는 다리가 부설되었다.

급박한 필요성으로 인해 일단 간이형 목조교로 건설되었지만, 장차 압록강처럼 철교로 대체될 예정이었다.

“두만강을 기차로 건너가는 날이 올 줄이야.”

16년 전, 이선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처음 유럽에 갔던 이영은 감개무량한 듯 탄성을 흘렸다.

그때만 해도, 남만주철도를 통해 러시아가 관리하는 하르빈(하얼빈)으로 가서 동청철도로 갈아타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접속하는 게 유일한 길이었다.

“이렇게 러시아에 돌아올 줄 몰랐네요.”

오랜만에 러시아 땅을 밟은 이서아도 밝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지신허(地新墟) 혹은 티진헤란 마을이 있어요.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조선인이 최초로 이주했던 지역이죠. 충무공 이순신이 복무했던 녹둔도 역시 이 근처에 있고. 40년 전 황형께서 처음 대업의 꿈을 품은 곳이기도 하지요.”

고려인 이주 기념행사에 황제의 아우를 파견한 건, 단순히 고려인(재러시아 한인)이 연해주 제3의 민족이라서가 아니었다.

1882년, 이선은 연해주 고려인을 기반으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이선은 조선으로 돌아간 후에도 연해주를 잊지 않았고, 대리인을 맡긴 최재형을 통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국익의 차원이든, 역사적 연원이든, 동포를 보호하려는 마음이든, 나는 연해주를 포기할 수 없다.’

이선은 연해주를 지렛대로 삼아 조선의 권력을 쟁취했다. 대업의 시작이 연해주에서 시작되었으니, 심리적인 요인으로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비유하자면, 함흥이 태조 이성계의 풍패지향(豐沛之鄕)이라면, 연해주는 광무제 이선의 파촉(巴蜀)과도 같은 곳이었다.

두만강 건너편 하산(Khasan)과 크라스키노(Kraskino)는 옛 발해의 염주(鹽州)가 있었던 곳이었다. 염주성으로 추정되는 크라키스키노성은 근래 한국-러시아 공동조사단에 의해 발굴조사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염주는 발해 시기 일본으로 연결되는 항로의 출발지점이었다.

1920년대의 이곳은 한국과 연해주를 연결하는 철도의 출발 지점이었다.

하산에서 240km를 달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사이에 있는 바라놉스키(Baranovsky)역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바라놉스키-하산 철도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던지라, 영친왕 일행은 마차를 타고 중간중간 고려인 마을들을 들리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고려인들은 태극기와 러시아 삼색기를 들고 영친왕 일행을 환영했다.

이들의 국적은 러시아였지만, 부모의 나라인 조선을, 부모들이 숭배했던 ‘완화군 대감’을 잊지 않았다.

고려인 보호를 명분으로 한국군이 연해주에 개입한 후에는, 한국과 고려인은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 버렸다.

블라디보스토크, 아무르 임시정부의 수도.

고려인 이주 60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한국 대표만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민족대표, 퉁구스계 민족대표, 아무르 정부의 당국자들도 대거 참석했다.

아무르 정부의 재무장관과 교통장관을 고려인의 대표인 최재형과 문창범이 맡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구 20만으로 연해주 제3의 민족인 고려인은 아무르 정부의 중요한 민족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친왕 전하, 친왕비 전하. 자리를 빛내 주셔서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를 대리하여 이 역사적인 자리에 오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최재형은 나이로 치면 자식뻘인 이영과 이서아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환영했다.

“오늘은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고려인 이주 60주년을 맞이하여, 연해주의 여러 민족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13가구가 두만강을 넘어 새로운 터전을 찾아 연해주에 이르렀습니다. 단 13가구에서, 60년 만에 20만의 인구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60년간 부지런히 개척하고, 노동하고,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허허벌판이었던 땅에 마을이, 농장이, 학교가, 도로가 들어섰습니다. ······”

최재형이 20만 고려인을 대표해 연설하자, 기념식장에서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최재형의 뒤를 이어 아무르 정부와 대한제국 정부 대표가 잇달아 축사를 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연해주의 우리 동포들을 두 나라를 잇는 가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만강에 새로 놓인 다리처럼 말입니다. 양국의 우호는 영원하리라 확신합니다. ······”

대한제국 정부는 외무협판 현순(玄楯)과 군무협판 박용만을 파견하였다. 단순히 기념식 참석이 목적이 아니라, 아무르 정부와 제반사항을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제헌의회 선거는 예정대로 9월에 실시되어야 합니다.”

“예, 민의가 완전히 반영될 수 있는 민주적 선거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각료회의 의장(총리)을 맡고 있는 입헌민주당원 스트루베가 민주적인 선거를 약속했다.

군부독재를 원하는 백군 장성들은 선거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여러 정당은 민주적으로 제헌의회를 선출하기로 합의한 터였다.

국가섭정 콜차크는 제헌의회 선거를 최대한 미루려 했지만, 한국의 압력에 결국 1923년 9월에 제헌의회 선거에 동의했다.

자유주의 입헌민주당, 인민주의 사회혁명당, 연해주 농민당 외에도 백군 출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러시아 전군연합, 사빈코프가 새로 창당한 국가인민당이 주요 정당으로 자리 잡았다.

민족정당도 중요한 축이었다. 젤레나(녹색) 우크라이나당과 고려 민족당도 결성되어 우크라이나인과 고려인을 대변했다.

“연해주는 러시아인만의 땅이 아닙니다. 퉁구스인의 땅이고, 고려인의 땅이기도 하며, 우크라이나인의 땅입니다.”

젤레나 우크라이나 대표 유리 홀류슈코(Yurii Hlushko)는 이영을 만나 대한제국의 지지를 요청했다.

스톨리핀이 추진했던 극동 이주 정책으로 우크라이나의 소작농들이 대거 연해주로 이주했고, 그 결과 1920년대에는 아무르강 이남의 연해주에 40만 명이 거주하는 제2의 민족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자기들이 정책한 지역을 ‘녹색 우크라이나’라고 부르며, 별도의 자치를 요구했다.

문제는 아무르 정부 당국자들이 고려인은 독자적인 민족으로 인정했지만, 우크라이나인은 독자적인 민족이 아닌 러시아인으로 분류한다는 것이었다.

“말로로시야(소러시아)가 있을 뿐, 우크라이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인은 남부에 정착한 루스인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백군은 대러시아주의자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울리야노프의 주도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러시아와 별개의 동슬라브 민족으로 인정하였지만, 백군은 완고하기 짝이 없었다.

“우크라이나를 별도의 민족으로 분류하는 건, 소비에트 볼셰비키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백군의 이런 완고한 태도가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패배를 불러일으켰음에도, 극동으로 이전한 후에도 여전했다.

비교적 유화적인 브랑겔은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콜차크와 백군 절대다수는 우크라이나의 민족성을 부정했다.

백군뿐만 아니라, 민간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비에트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별도의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을 수립하여 토착화 정책을 펼치자, 백군은 격렬히 반발했다.

러시아 우파들은 ‘우크라이나 분리는 대러시아의 붕괴를 획책하는 유대인과 볼셰비키의 책략’으로 치부했다.

‘하, 대러시아가 망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집착하고 있는 거야. 극동까지 밀려와서도 대장 노릇 하고 싶은 건가.’

이영은 백군의 완고함에 기가 막혔지만, 러시아에서 오래 살았기에 그들의 사고를 알고는 있었다.

당장 장인인 브론스키 장군만 해도, 사랑하는 딸을 동양인에게 시집보낼 정도로 민족적 편견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우크라이나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실체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대한제국 정부는 기본적으로 아무르 국내 사정에 개입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만, 아무르가 민의가 반영되는 다원적이고 세속적인 국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영은 원칙적인 답변을 하며 회피했다.

개입하더라도 황제가 결정할 사항이었고, 황형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영은 아내와 함께 연해주에 정착한 올가 여대공을 만나러 갔다.

올해는 로마노프 왕조 수립 310주년이기도 하였으므로, 기념행사도 ‘제4의 로마’를 자처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되었다.

10년 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 전역에서 개최된 성대한 행사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각지에 망명해 있던 로마노프 왕족들도 310주년 행사를 위해 속속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올가도 약혼자인 5촌 드미트리 대공과 함께, 니콜라이 2세의 자녀를 대표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친왕 전하.”

“간만에 뵙습니다, 여대공 전하.”

서로 간에 안부를 물은 후, 올가는 가장 궁금해 하는 소식을 물었다.

“타냐, 아니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강녕하신지요?”

“예, 강녕하십니다.”

“황태자비께서도 오셨으면 좋을 터인데, 회임 중이니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지요.”

“후후,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제가 곧 서울로 찾아봐야겠네요.”

올가와 이서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이진과 타티야나, 이왕가와 로마노프왕가, 한국과 러시아, 동양과 서양의 결합을 상징할 운명의 아이가 곧 태어날 예정이었다.

작가의 말

??? : 나진 코인 가즈아아아아!!!

??? : 두만강 수온 아직 따뜻하냐? 거긴 북쪽이라 춥겠지?

나진 투기 열풍은 실제 1932년 조선에 있었던 일입니다. 시대를 앞선 땅투기 열풍... 어마어마한 차익을 남긴 사람도 실제 있습니다. 청진에 투자한 사람들은 대동단결해서 종단항 바꿔달라고 총독부에 시위했다고 하죠. 돈 앞에선 내선일체가 따로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작중 부동산 투자 양상은 1970-80년대 한국 고도성장기에 더 가까워보입니다.

고려인 연해주 이주는 1863년/64년 두 설이 있는데, 실제 고려인들은 64년설을 따라 1914년에 50주년 행사를 개최하려 했습니다만 세계대전 발발로 무산됐습니다. 현대 연구결과를 보면 63년이 맞는걸로 보여서 작중 60주년은 1923년에 열었습니다.

이번 감기 좀 오래 가네요. 오늘은 겨우 완성할 수 있었는데 열이 심해서 내일이 걱정입니다. 우루과이 이기고 기분 좋게 잠들면 낫지 않을까요?!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