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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165화 파시즘의 몰락
주이탈리아 영국대사 조지 뷰캐넌은, 한국대사 이위종과 공동으로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알현했다.
의례적인 외교적 수사가 오고간 후, 뷰캐넌이 청했다.
“저는 폐하의 벗이자 이탈리아의 벗으로서, 간곡히 요청하고자 합니다.”
“말씀하시오.”
“폐하께서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운명을 기억하십니까?”
“너그럽고 신사적인 분이었건만, 악독한 볼셰비키에 의해 시해당한 불운하고 불행한 분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본 니콜라이 2세께선 너그럽고 신사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잘못된 판단을 내려 산사태를 촉발시켰습니다.”
1917년 1월, 혁명 직전에 뷰캐넌은 차르에게 정치개혁을 촉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뷰캐넌은 자신이 직접 지켜본 니콜라이 2세의 실책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 설명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갑작스러운 역사 강의에 의구심을 느꼈다.
“굳이 그 이야기를 지금 하는 이유가 뭡니까?”
“폐하! 저는 러시아의 비극에 대해 그 어떤 사람보다 슬퍼하고 있습니다. 제게 러시아는 제2의 고향이었습니다. 지금은 이탈리아가 그렇지요. 이탈리아에서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까 봐 매우 두렵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무솔리니를 코르닐로프와 비교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오. 코르닐로프는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무솔리니는 얻고 있잖소?”
엄밀히 말하면 대중의 지지라기보다는 군부-지주-자본가의 지지였지만, 국왕에게는 그게 곧 ‘대중’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알 바가 아니었다.
“반공을 내세워 불법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잡으려는 건 같습니다. 코르닐로프 쿠데타가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자유주의 정부는 몰락했고 러시아 제정도 영구히 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내전이 발발하여 끔찍한 비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위종이 말을 잇자, 국왕은 불쾌감을 느꼈다.
“대사,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지금 짐을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는 격동기의 러시아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탈리아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곡히 요청 드리는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다.”
이위종은 이선의 친서를 전달했다.
“저희 황제 폐하의 친서입니다.”
「짐의 친애하는 형제 이탈리아 국왕 폐하! 아름다운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폐하를 뵌 게 엊그제 같은데, 근래 정국의 혼란으로 소식을 듣게 되어 짐 역시 고민이 큽니다.
······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짐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오랜 친우였습니다. 니콜라이의 불운한 운명을 생각하며, 더욱 강하게 벗을 설득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늘 내 자신을 사로잡습니다. 차르께서 짐과 뷰캐넌 경의 마지막 조언을 받아들였더라면, 그러한 비극적 상황은 없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세계적으로 군주제가 위기에 처한 지금, 짐은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제가 폐하께 드렸던 말씀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세계적으로 왕조의 존속이 위협받는 현실에서, 군주의 단호한 지도력을 보여야 합니다. 결코 군주의 지도력을 시정잡배들에게 내어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극단주의 세력은 반드시 국가를 무너트립니다. 국민이 선출한 정부, 군주가 재가한 정부를 신뢰하고 극단주의를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만약 한국에서 유사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짐은 직접 수도를 지키며 반란군을 제압할 것입니다. 위대한 사보이 왕가의 계승자인 폐하께서도 단호히 진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정치깡패가 아닌 고귀한 군주의 영도 하에, 군주제와 국가는 영구히 지속되리라 믿습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4년 전 이선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독일 쿠데타가 실패한 직후였다.
여전히 묘하게 가르치려는 태도가 고까운 기분이 들었지만, 머나먼 타국의 일에까지 조언하려는 성의가 대단하긴 했다. 좋은 의미로 오지랖이 대단했다.
무엇보다 그가 신경 쓰이는 건, 차르가 이선과 뷰캐넌의 조언을 거절한 직후에 비참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었다.
‘한국 황제의 정세 판단력은 굉장히 좋다고 유명하다. 니콜라이는 그걸 무시했다가 몰락한 거고. 그리고 영국 대사의 조언은 곧 영국 정부의 조언이나 다름없다. 니콜라이가 영국 정부의 조언을 받아들었다면 혁명은 피했을지도 모르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영국의 조언이 더 신경 쓰였다. 영국 대사가 정부와의 합의도 없이 혼자 움직일 리가 없었다.
내정간섭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대사의 조언’이라는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영국 정부는 파시스트 정권의 출현을 원치 않는다는 의미였다.
이탈리아의 제1우방인 영국의 조언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었다.
“두 분 대사, 두 나라 군주와 정부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했소. 결정에 참고하도록 하리다.”
“감사합니다. 폐하의 현명하신 판단이 이탈리아와 유럽을 번영의 길로 이끌 겁니다.”
이위종은 국왕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확신했다.
이선의 조언만으로는 움직이지 않았을 터였다. 머나먼 타국 황제의 설득이 영향력을 미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영국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뷰캐넌에게 공작을 한건 이위종 자신이었지만, 영국 정부를 움직이도록 판을 짠 건 이선일 터였다.
이위종은 새삼 황제의 ‘넓은 팔’에 감탄했다.
* * *
운명의 날, 1923년 9월 28일.
“내각에서 결의한 계엄령 선포를 재가하겠소. 참모총장은 계엄군 사령관이 되어, 신속히 반란을 진압하시오. 가능한 유혈은 줄이면 좋겠소.”
“예, 폐하! 지엄한 왕명을 받듭니다!”
계엄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육군참모총장 바돌리오 대장이 국왕을 향해 거수경례했다.
졸리티 총리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우유부단하고 귀 얇은 국왕이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 걱정했는데, 영국과 한국 대사를 만난 직후에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졸리티는 영국 대사의 조언이 결정적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영국에 단단히 신세를 졌군. 공짜는 아닐 거고, 청구서가 날라 올 터이니 대비해야겠군.’
이탈리아는 영국의 청구서를 기다려야 하지만, 영국은 한국의 청구서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물론 알지 못했다.
“계엄령이 내려졌다. 알피니 여단은 신속히 반란 세력을 진압하라!”
“예!”
국왕의 군사보좌관으로 능력과 충성심이 검증된, 조반니 메세(Giovanni Messe) 대령이 알피니 산악여단의 지휘를 맡아 ‘로마 진군’을 저지할 임무를 맡았다.
메세는 대전쟁기에 정예 보병부대인 아르디티(Arditi)대대를 이끌며 전공을 세웠다.
고지전의 명수인 정예 산악부대인 알피니 9개 연대에서 반란 진압을 목적으로 차출한 6개 대대 병력으로 구성된 특수임시여단은, 이탈리아군 정예 중의 정예라고 할 수 있었다.
“용맹한 이탈리아의 병사들이여! 피아베와 비토리오 베네토의 영웅들이여! 군의 사명은 국왕 폐하와 정부를 수호하는 것이다. 국왕 폐하의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신속히 반란을 진압한다!”
“Lunga vita al Re! Viva Italia! (국왕 폐하 만세! 이탈리아 만세!)”
계엄군 사령관 바돌리오의 연설에 산악여단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파시스트에 동조하는 상당수 정치군인들과 달리, 최전선에서 싸워 온 알피니는 오직 국왕과 정부만을 위해 충성했다.
메세 대령은 5천여 명의 산악여단 병력을 셋으로 나눴다. 파시스트와 대치하고 있는 로마의 세 대로(大路)의 검문소, 치비타 베키아, 오르테, 아베차노에 배치했다. 정부 방위와 요인 수호 등은 헌병과 경찰에 맡기고, 산악여단은 온전히 진압에 나섰다.
검은 셔츠단은 1만에서 2만으로 추정되었지만, 오합지졸이 정예 병력과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알피니다!”
“산악부대라고?”
경찰이 아니라 정규군이 나타나자,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검은 셔츠단은 당황했다. 이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검은 셔츠도 가을비에 맞아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메세는 반란군의 꼴이, 아니 이탈리아군의 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불량배들이 로마를 정복하려 했다고? 군부 윗대가리들은 이런 놈들에게 겁을 먹고 정권을 넘겨주려했단 말인가? 아니, 겁을 먹은 게 아니라 군사정권으로 가기 위한 지름길이라고 생각했겠지. 어느 쪽이든 한심한 노릇이다. 이탈리아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반란군을 확실히 진압해야 한다.’
메세는 진압 의사를 굳히고, 검은 셔츠단을 향해 외쳤다.
“들으라! 국왕 폐하의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본관은 알피니 특수임시여단장 조반니 메세 대령이다. 계엄사령관 바돌리오 대장의 명령을 받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왔다.”
“뭐, 뭐야? 계엄령?”
“우리가 로마로 가기만 하면 정부 놈들이 겁을 먹고 정권을 내놓을 거라며!”
검은 셔츠단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무솔리니는 로마로 진격만 하면, 국왕과 정부가 겁을 먹고 정권을 내놓으리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계엄령이라니?
“국왕 폐하의 관대한 명을 받들어, 너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즉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그렇다면 관대한 처분이 내려질 것이다. 만약 끝까지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면, 그때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테다.”
여단장의 최후통첩에, 검은 셔츠단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동안 그들이 곤봉과 채찍으로 신나게 때려 부수던 노동조합이나 사회주의자들과 차원이 달랐다.
정규군, 그중에서도 정예로 소문이 자자한 알피니 산악연대였다. 퇴역군인이 다수인 검은 셔츠단도 모를 수가 없었다.
로마 진군을 주도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예비역 군인이었다. 여기서 기세가 밀리면 끝장이라는 걸 직감했다. 구호와 함께 지휘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Viva Il Duce!”
“이탈리아의 형제들이여! 피아베와 비토리오 베네토의 영웅들이여! 나는 육군 중장 에밀리오 데 보노다. 나는 9군단 사령관으로서 피아베와 비토리오 베네토의 승리에 일익을 담당했다. 전우들이여, 나를 모르겠는가?”
파시스트당에서 가장 저명한 군인인 예비역 육군 중장 에밀리오 데 보노(Emilio De Bono)가 진압군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피아베 전투와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 참전했던 메세 대령이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 휘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검은 셔츠 위에 훈장을 주렁주렁 단 노장이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자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옛 전우이자 전쟁영웅에게 총을 쏜다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장병 여러분!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며, 오직 국왕 폐하와 국민의 대표자인 정부만을 위해 충성해야 한다. 반란군이 참전용사를 자처하고는 있으나, 저들은 국왕과 정부를 향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반란군은 우리의 전우가 아니라 적이다!”
휘하 병사들의 동요를 직감한 메세가 재빠르게 연설로 기선제압에 나섰다.
여단장의 외침을 들은 병사들은 정신을 차렸다.
군인은 오직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집단이었다.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은 군인이 아니었다.
“Lunga vita al Re! Viva Italia!”
산악여단은 국왕과 이탈리아 만세를 외쳤다.
검은 셔츠단이 외치는 로마식 경례와 두체 만세는 정규군의 외침 앞에 기세를 잃고 말았다.
“항복하지 않으면 발포한다! 부대, 거총!”
여단장의 명령에 산악여단 병사들이 일제히 총구를 검은 셔츠단에 겨누었다.
에밀리아 데 보노는 패배를 직감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상태였다.
‘대체 두체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야속하게도, 정부와 협상을 하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할 무솔리니는 연락두절 상태였다.
“······파시스트 동지들이여, 무기를 버려라. 이탈리아의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는 불상사는 없어야 한다.”
보노는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 명령을 내렸다. 검은 셔츠단 대부분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쁘게 무기를 내려놓았다.
“저항하는 자는 쏜다! 발포!”
타다다다당!
다른 검문소에서는,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광적인 파시스트들이 저항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알피니 산악여단은 가차 없이 발포하여 반란군의 전열을 무너트렸다.
한 차례 발포만으로, 검은 셔츠단은 전의를 상실하고 백기를 들었다.
2만여 반란군 중, 사상자는 단 수십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정규군의 사상자는 진압과 체포 과정에서 발생한 부상자 몇 명이 전부였다.
‘로마 진군’, 역사상 가장 어설픈 로마 정복 시도는 단기간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두고두고 역사의 조롱거리로 남을 실패였다.
“반란 주모자 무솔리니는 어디에 있나?”
로마 진군을 이끌었던 파시스트 4인방, 에밀리오 데 보노, 이탈로 발보, 미카엘레 비앙키(Michele Bianchi), 데 베키(C.M. De Vecchi)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모두 체포되었다.
그나마 노장 보노와 젊은 발보는 기개있게 저항했지만, 데 베키는 패배를 빠르게 인정하고 불었다.
“두체, 아니 무솔리니는 밀라노 신문사에 있습니다.”
“파시스트 기관지?”
“예. 성공하면 로마로 정복자로서 왔겠지만, 아마 실패하면 스위스로 도주할 목적이었겠죠.”
“뭐야? 빨리 내무부에 전화 걸어. 즉시 스위스 국경 봉쇄해!”
무솔리니의 도주는 진군보다 훨씬 빠르고 성공적이었다.
밀라노 파시스트당 기관지 사무실에서 성패를 기다리던 무솔리니는, 계엄령이 반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실패를 감지했다.
체포 명령이 들이닥치기 전에, 재빠르게 차량에 몸을 싣고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도주했다.
이미 젊은 사회주의자 시절에 병역을 회피할 목적으로 스위스로 망명한 적 있었던 무솔리니에게, 스위스 도주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실패가 한스러울 뿐이었다.
“어리석은 국왕과 정부 놈들. 이탈리아를 위대하게 만들 영도자는 나밖에 없는데, 졸리티 같은 노추에게 속다니!”
무솔리니는 이를 뿌득 갈았다.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무모한 도박이었지만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에, 모든 판돈을 걸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하지만 참담한 실패였다. 정권 장악에 도움을 주기로 했던 군부와 자본가는 대체 무슨 역할을 했단 말인가?
상황의 변화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무솔리니는, 이게 다 늙은 총리 졸리티의 수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국왕의 결단의 배후에 영국 외무부가 있고, 영국 외무부의 배후에 한국 황제의 책략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무솔리니는 기절초풍할 터였다.
도대체 왜, 라는 말만 반복할 터였다.
* * *
“무솔리니의 공격은 이탈리아 산악여단에 막힙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보고를 받은 이선은, 상쾌한 표정으로 이탈리아산 와인을 높이 들었다.
“파시즘의 패배를 축하하며!”
“축하드립니다, 폐하.”
제국익문사 독리 이회영이 고개를 숙이며 술잔을 부딪혔다.
“폐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 말해 보게.”
“이탈리아는 머나먼 나라입니다만, 어찌하여 그 나라의 정변까지 개입하신 건지요? 물론 폐하의 혜안은 전 세계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만······.”
이회영은 의아했다.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공작을 하는 황제이지만, 이탈리아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적었다.
“아, 난 원래 파시스트가 싫었어.”
“예?”
이선은 빙긋 웃으면서 술잔을 비웠다.
“알다시피 난 공산주의도 싫어하네.”
“예, 군주제와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없지요.”
이회영은 여전히 의아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국경을 접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파시즘은 한국에 영향을 미치기엔 너무 멀지 않은가?
“파시즘이 반공의 선봉이라는 명목으로 나와 같은 대열에 서는 건 사양이야. 난 저런 야만적인 놈들과 절대로 같이 묶이고 싶지 않거든. 그리고.”
이선은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공산주의는 이념상의 적이지만, 파시즘은 인류의 적이거든. 내가 군주이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혐오하지만, 인류이기 때문에 파시즘을 증오하네.”
지금은 작은 폭풍에 지나지 않지만, 21세기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이선은 파시즘이 불러일으킬 참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파시즘은 전간기 극단주의의 발흥과 확산, 나치즘의 집권과 승리, 2차 세계대전과 전쟁범죄, 대량학살과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하고 끔찍한 범죄를 일으키는 태풍의 눈이었다.
파시즘은 인류의 적이었다. 가급적 한국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에 개입을 피하려고 했던 이선이지만, 도저히 파시즘-나치즘이 성공하는 꼴은 볼 수가 없었다.
이로써 역사는, 분명히 변화했다.
이선은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역사가 바뀌었으리라 확신했다.
작가의 말
나레이션 : 무솔리니의 공격은 이탈리아 산악여단에 막힙니다.
역사상 로마를 정복하려는 시도는 무수히 많았지만, 무솔리니의 로마진군만큼 어설프고 허접한 계획도 드물었습니다.
파시즘 집권기에 로마 진군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지만, 실상은 개판 그 자체였습니다. 정작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기다리며 언제든지 Run할 준비가 되어있었죠. 경찰로만으로도 진입 실패했으니, 계엄령 선포되어 군대가 투입되었으면 오죽했을까요.
그럼에도 무솔리니의 도박이 성공한건, 군부와 지배계층의 암묵적인 지지와 국왕의 트롤링이 있었기 때문... 파시즘 정권 수립에 국왕이 차지하는 지분이 상당합니다.
나치 정권 수립과정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요. 군부와 융커의 야합...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조종 가능한 광대라고 우습게 여겼다가 완전히 굴종하게 되는 것도 비슷합니다.
무솔리니의 성공은 세계의 파시스트들 특히 히틀러를 자극했고,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숭배하며 행보를 따라하게 됩니다.
이 세계에서는 참담하게 실패했으니, 역사의 중대한 분수령이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