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66화 역사의 수레바퀴
실로 1923년은 대전쟁의 유산이 폭발한 해였다.
1914-18년 대전쟁기 동안 누적된 피해와 분노는,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만들어 낸 새로운 세계를 뒤흔들었다. 실낱같이 유지되던 불완전한 평화는 1923년에 굉음을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근본적인 요인은 경제였다.
유럽 대륙에서 가장 튼튼한 경제를 자랑했던 독일은, 이미 대전쟁기 막대한 전비 투입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비 조달을 위해 유산계급에 대한 소득세를 부과한 라이벌 프랑스와 달리, 독일제국은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전액 국채와 차입금으로 전비를 마련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채무국이 될지언정 팽창하는 미국 자본의 힘을 빌릴 수 있었으나, 독일은 돈을 빌릴 수 있는 열강도 없었다. 대부분 내국채였다.
전쟁의 장기화로 채무가 눈덩이처럼 쌓이는 동안, 독일이 생각한 해결책은 간단했다.
“1871년 전쟁의 승리로 프랑스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아 냈지. 전쟁에서 승리하면, 패전국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려 빚을 갚을 수 있다.”
독일은 이미 1871년 보불전쟁의 승리로 받은 배상금 50억 프랑을 토대로 금본위제를 확립한 경험이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유구한 전통, ‘따서 갚으면 돼!’라는 발상은 독일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연합국도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독일이 패전하자, 프랑스와 영국은 패전국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려 자국이 입은 피해와 미국에 진 채무를 갚고자 했다.
독일은 파산했다. ‘따서 갚지 못한’ 제국은 문자 그대로 파산했다.
금 보유고는 텅 비었고, 막대한 부채만이 남았다. 화폐 가치는 폭락했다. 국민은 실업과 궁핍에 시달렸다.
케인스와 같은 선견지명 있는 학자들은 과도한 전쟁배상금이 독일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리라 경고했지만, 당장 유권자의 압박을 받고 있는 연합국 ‘빅3’은 물러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국민들에게 승전만을 위해 참고 견디라고 했는데, 관대한 조약을 내민다고? 독일에서 배상금을 받아 내지 못하면 우리가 죽는다.”
“미국이 채무를 탕감해 주면 모를까, 배상금 감소는 있을 수가 없다.”
“채무 탕감? 그거 다 국민의 세금이오. 채무를 탕감해 주는 순간 미국민은 연방 정부를 습격할 거요.”
1,320억 금 마르크(330억 달러)가 배상금으로 확정되었다. 경제 사정을 호소하며 최대한 지불을 미루려 했던 독일은 1921년 6월 연합국의 최후통첩을 받은 후에야 배상금 지불을 시작했다.
1922년 말이 되자 독일은 배상금 지불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국내외의 압박을 받아 진퇴양난이던 사회민주당 정부는 퇴진했다. 새로 수립된 중도파 거국내각은 비상해결책을 내놨다.
“독일 공화국은 채무불이행을 선언한다.”
인플레이션과 과도한 배상금 압박에 시달리던 독일은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
“금은 물론이고, 현물 지불도 중단한다고?”
프랑스는 독일의 디폴트가 연합국을 떠보기 위한 고의적 채무불이행이 아닌지 의심했다. 독일이 배상으로 지불할 석탄과 목재까지 연속으로 공급을 중단하자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 버렸다.
“독일은 정말로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경제가 화복되면 배상금 지불을 재개하겠습니다. 귀국의 관대한 이해를 바랍니다.”
“1871년, 독일은 프랑스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소. 배상금을 갚을 때까지 프랑스에 독일군을 무기한 주둔시킨다고 했지. 프랑스 국민은 전국민이 단결하여, 시골 노파들까지 주머니를 털어 단기간에 배상금을 갚았지. 그런데 왜 당신들은 그렇게 못 하는 거요?”
파산 직전의 독일은 정말로 지불능력이 없는 상태였지만, 프랑스는 독일의 해명을 믿지 않았다.
대전쟁기 서부전선은 대부분 프랑스 북동부와 벨기에서 벌어졌고, 독일은 4년간 프랑스 공업지대와 벨기에를 파괴하고 수탈했다.
프랑스는 강렬한 보복의식으로 불타올랐다. 현실적으로도 배상금을 받아 내지 않으면, 미국에 진 채무와 심각한 재정적자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겠다면 강제로라도 받아 내겠다.”
독일의 채무불이행은 1923년 1월 프랑스-벨기에 연합군의 루르 점령으로 이어졌다.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하여 독일 서부 라인란트는 비무장 상태였고, 독일은 프랑스-벨기에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독일 최대의 석탄·철강 생산지이자 공업지대인 루르는 프랑스군의 군정하에 놓이게 되었다.
「총파업! 프랑스 제국주의 타도!」
「독일 국민이여, 프랑스 침략자에 협력하지 말라! 프랑스에 협력하는 자는 민족반역자다!」
좌우를 막론하고, 루르 점령에 독일 전역의 여론은 격분했다.
독일은 군사력 대신 시민불복종을 선언했다. 루르 지방의 독일인들은 파업과 사보타주로 맞섰다. 독일 정부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사보타주를 지시했다.
사회주의 세력이 강했던 루르 지방에, 민족주의적 분노가 함께 폭발했다. 루르 지방의 철도, 광산, 공장이 일제히 멈췄다.
프랑스-벨기에는 파업을 가혹히 진압하는 한편, 광산을 접수해 자국 노동자들을 이주시켜 석탄 채굴에 나섰다.
“오늘날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건,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다!”
영국은 프랑스의 루르 점령에 반대했고, 독일인을 프랑스의 복수심에 희생된 피해자라고 인식했다. 특히 야당인 노동당과 자유당은 더욱 강경한 어조로 ‘프랑스 제국주의’를 비난했다.
“하, 영국 놈들은 자기 땅에서 전쟁을 안 해 봐서 배부른 소리를 하지.”
하지만 프랑스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9월 말까지 프랑스가 군비로 투입한 비용은 7억 프랑이었지만, 루르에서 거둔 수입은 10억 프랑이었다. 경제적 이익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프랑스 국민은 대독 보복에 열광했다.
“도저히 해결책이 없습니다. 백약이 무효입니다.”
루르 점령의 여파로 독일 경제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해졌다. 공황, 배상금, 디폴트, 루르 상실, 총파업이 겹치면서 독일의 경제는 역대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다.
금과 외환 보유고가 바닥난 독일은, 당장 노동자들에게 지불할 임금조차 없었다. 독일 정부는 화폐를 무제한으로 찍어 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으로 이어졌다.
마르크화의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무너졌다. 1월에 달러-마르크 환율은 1:7,260이었으나, 루르 점령 이후 1달러는 5만 마르크에 교환됐다.
둑이 무너져 내렸다. 6월이 되면 달러당 15만 마르크, 8월 초에는 100만 마르크까지 치솟았다. 불과 한 달 사이에, 1달러는 600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가을이 되자 무너진 둑은 대홍수로 변했다. 이제 마르크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졌다. 그냥 종잇조각, 아니 종이만도 가치가 없었다. 1달러는 1억, 10억, 100억 마르크까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빵! 빵을 달라!”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한때 세계 2위의 공업국에서, 산업 지대의 주민들은 거대한 제강소와 공장의 한복판에 있음에도 굶주렸다.
농민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화폐를 받고 곡물을 팔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화폐경제가 무너지고 현물경제로 후퇴했다. 화폐가 아무런 가치가 없었기에, 지폐로 도배를 하고 땔감을 때웠다. 장작보다도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4분의 1이 해고되거나 단축된 시간 동안만 일했다. 그나마도 화폐는 가치가 없었으므로, 노동자는 임금을 받자마자 바로 구매에 나섰다. 하루, 아니 단 몇 시간 뒤에 돈의 가치가 얼마나 떨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정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정부? 아직도 그런 게 존재하고 있었나?”
“달러 갖고 있는 자본가들은 이때가 기회랍시고 한몫 크게 벌고 있다던데.”
“제길, 때려죽여도 시원찮은 놈들.”
“이게 다 프랑스 놈들 때문이야. 그놈들이 독일을 영원히 노예로 만들려 하고 있어!”
“쓰레기 같은 베르사유 조약! 조약부터 박살 내야 해!”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독일은 극심한 혼란을 겪었고, 극좌와 극우가 성장하는 토양이 되었다.
극좌는 인플레이션을 이용해 오히려 자산을 늘리는 자본가의 탐욕을 비난했고, 극우는 베르사유 체제의 부당함과 프랑스군의 점령을 비난했다.
국가의 궁핍과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각종 준군사 조직이 비밀리에 반란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극좌는 사회주의 혁명의 기회를, 극우는 제정 복고와 군부 독재의 기회를 탐지했다.
1923년 가을, 신생 독일 공화국의 운명은 불투명해 보였다.
* * *
독일의 정치경제적 혼란은 이웃나라인 도나우 연방, 즉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연방국으로 전이되었다.
헝가리는 옛 종주국 오스트리아보다 국토를 분할하려는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더 두려워했고,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도 오스트리아보다 유고슬라비아를 외치는 세르비아의 야심을 더 두려워했기에 도나우 연방은 유지될 수 있었다.
이탈리아는 아드리아해의 라이벌이 될 유고슬라비아의 탄생을 방해했고, 윌슨이 도나우 연방의 개혁에 만족을 표했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연방국은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문제는 경제였다. 이미 대전쟁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동맹인 독일에게 군사적·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처지가 되었다.
패전으로 주요 산업지대를 상실한 도나우 연방은, 독일에 비해 비교적 적은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지만, 전쟁으로 무너진 경제는 되살아나지 못했다.
주변국인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세르비아-루마니아는 모두 도나우 연방을 옛 합스부르크 제국의 후계자로 인식해 증오했고, 반(反)도나우 적대적 연합을 맺어 금수(禁輸)조치를 가했다.
생제르망 조약의 결과로 독일과의 합병이나 동맹은 절대 금지됐지만, 도나우는 전후에도 독일에 경제를 상당 부분 의존했다.
“대대적인 개혁만이 살길이다.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영구히 신분제를 폐지하여 귀족의 특권을 없앤다. 유산계급에 세금을 증세하여 재원을 마련한다. 대대적인 복지 정책으로 노동자 계급의 충성을 확보한다.”
새 황제 카를 1세와 신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SDAP) 정부, 헝가리 자유당 정부, 크로아티아 연방당 정부는 경제 회복과 국민 안정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오스트리아의 귀족과 헝가리의 지주들은 개혁에 저항했지만,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특히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빈에서는 ‘붉은 빈(Rotes Wien)’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사회민주주의 개혁이 진행되어, 8시간 노동·사회보험 확대·실업급여·노동자 주택 보급 등 혁신적인 정책이 이뤄졌다.
“개혁은 불가피하다. 1914년 이전의 세계는 더 이상 없다.”
폐위된 카이저 빌헬름과 달리, 카를 1세는 사회민주당의 개혁에 반대하지 않았다.
멸망한 로마노프·호엔촐레른·오스만 왕조와 달리 합스부르크 왕조는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명민한 젊은 황제는 합스부르크 제정을 지키려면 무엇이든 받아들여야 했다.
카를 1세는 막대한 황실 소유지를 정부에 기증함으로써 개혁의 모범을 보였다. 귀족·자본가·지주는 카를을 ‘붉은 황제’라고 비난했지만, 노동자와 농민은 찬사를 보냈다.
‘붉은 빈’은 자본주의 서유럽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연방주의의 가능성을 탐지했다. 사회민주주의 연방을 설립해 민족 평등과 계급 평등을 동시에 주장했던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Austromarxismus)’의 이상이 실천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23년의 재앙이 도나우를 덮쳤다.
독일의 초인플레이션과 경제적 위기는 가뜩이나 산업기반이 취약한 도나우 연방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빈의 은행들이 연쇄적으로 도산했고, 실업률은 급등했다. 사회민주당 정부에 반감을 갖고 있는 지주와 자본가들은 경제 위기를 맹공격했다.
결국 사회민주당은 실각하였고, 새로 집권한 우익 기독교사회당은 비상대책에 나섰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도 여당은 실각하였다. 특히 헝가리에서는 빈과 합스부르크에 대한 오랜 반감이 폭발했다.
“전쟁을 일으킨 건 빈이지 부다페스트가 아니다! 헝가리는 전쟁에 반대했다! 그런데 왜 패전의 대가는 우리가 더 가혹하게 치러야 하는 건가?!”
패전으로 인해 헝가리는 막대한 영토를 상실했다. 슬로바키아는 독립하여 신생 체코슬로바키아로 편입됐고, 보이보디나는 세르비아에 할양되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건 고토 트란실바니아의 상실로, 루마니아인이 다수인 대부분의 지역은 루마니아에 할양되었다.
그나마 도나우 연방의 개혁 조치와 빠른 항복으로 인해, 원 역사보다 조약이 관대하게 체결되었다. 원 역사에서 루마니아에 넘겨진, 헝가리인이 다수인 북부 트란실바니아는 헝가리 왕국에 잔류하여, 상당한 영토를 지켜 낼 수 있었다.
“75년 전, 헝가리는 민주공화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세를 끌어들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진압으로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1867년의 타협은 1918년의 재앙으로 이어졌다!”
1848년 혁명 75주년을 맞이하여, 마자르 민족주의가 다시 폭발했다.
1848년 헝가리 혁명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 성공 직전까지 전개됐고, 만약 반동의 보루였던 러시아제국이 대군을 파병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독립을 쟁취할 수도 있었다.
헝가리 혁명의 실패는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립이라는 ‘대타협’으로 이어졌지만, 헝가리 좌익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반감을 유지했다.
그나마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정부가 집권 중에는 연방의 유지가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이 실각하고 새로 집권한 기독사회당이 독일과의 통합을 주장하는 범게르만주의 대독일인민당과 연정을 하자, 헝가리 좌익은 연방의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우리는 이미 5년 전 합스부르크와 결별할 기회를 얻었으나, 어설픈 타협을 이어 나갔을 뿐이다. 마자르 민주공화국은 1848년 혁명을 계승하여 합스부르크와 영원히 결별해야 한다!”
헝가리는 공공연히 분리 독립을 외쳤고, 기존의 미진한 토지개혁에 반발하여 급진개혁을 외치는 사회당-공산당 연립정부가 부다페스트를 지배했다.
1848년과 다른 점은, 반동의 보루이자 헝가리 혁명을 짓밟았던 동방의 적 러시아가, 지금은 혁명의 기수가 되었다는 정반대의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헝가리가 분리독립하면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가 있어 분리를 자제해 왔지만, 소비에트 러시아의 존재가 헝가리의 독립을 보장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서방 연합국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도, 바로 지척에 소비에트 러시아가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다.
“소비에트 인민은 민족 해방과 노동자-농민 계급의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맞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유럽 혁명의 가능성이 부활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지연되어 보였던, 궁극적인 ‘세계 혁명’으로 가는 길이 다시 열렸다.
부다페스트는 빈과 베를린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 될 수 있었다. 독일 혁명이야말로 소비에트 러시아가 가장 열망해 마지않는 변화였다.
“무능하고 허약한 바이마르 정부는 더 이상 독일을 통치할 자격이 없다. 때려 부숴야 한다.”
무솔리니가 좀 더 차분히 기다렸더라면, 중부 유럽의 상황에 겁이 난 이탈리아 우익이 파시즘 정권 수립에 더 협조적으로 나설 수도 있었지만, 무솔리니는 섣불리 도박에 나섰다가 실패하여 가능성을 걷어 찬 셈이 되어 버렸다.
‘로마 진군’과 파시즘의 실패를 목도한 독일 극우 세력은, 대중의 협력을 얻기보다는 더 고전적인 방법 – 즉 군부 쿠데타를 모의했다.
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에 이르기까지, 중부유럽 전역에 경제 공황과 정치적 위기가 닥쳤다.
혁명 혹은 쿠데타가 목전까지 닥쳐왔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눈사태를 맞이한 눈덩이처럼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작가의 말
지난주에 독일 극우파가 무려 제3제국도 아니고 제2제국으로 복고를 희망하는 군사쿠데타를 계획하다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습니다.
자칭 왕족과 전직 군인이 주도한 반란군이 의회를 습격해 총리를 처형하고, 제정복고를 선포하려했다니... 아니 이게 정말 2022년에 벌어지는 일이란 말인가? 1923년이 아니고? 하필 내가 바이마르공화국의 혼란을 다루려는 순간에 이런 일이?!
전세계적 팬데믹, 러시아의 침략과 졸전, 일본 총리 암살, 영국 국왕 서거, 인플레이션과 세계 경제 위기, 이탈리아 극우 총리 집권, 폴란드 국방력 강화, 독일 쿠데타 음모에 이르기까지... 이게 전간기인지 2020년대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걸 이미 썼거나 쓸 예정인 조혁시야말로 미래 예지물이 아닐까요?
- 사실 지구작가의 집필능력에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절대 소설은 역사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현실 국제정세하고 너무 비슷해질까봐 스토리라인 재검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