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69화 국제 배후자본
“역제안이라, 말씀해 보십시오.”
“지금 독일의 당면한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하이퍼인플레이션?”
현재 가장 심각한 문제이긴 하지만, 슈티네스는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이득을 보는 극소수의 독일인이었다.
“아, 그건 당연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 말입니다. 독일의 정치적 취약성입니다. 우리 같은 자본가에게 최악의 상황이 뭐겠습니까?”
“러시아처럼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러시아 자본가들, 아니 러시아에 투자한 외국 자본가들까지 모두 망했습니다. 한 푼도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미치광이 극우파들은 국제 유대인 배후자본이 러시아 혁명을 조종했다고 선동합니다만, 논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독일 극우파들은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국제 유대인 배후자본’이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선동했다.
가장 큰 이득을 보고 있는 건 우익에게 정치자금을 대 주고 있는 슈티네스라는 게 아이러니였다.
“독일 정치상황이 심각하다는 말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함부르크에 오니까 심각성을 느끼겠더군요. 공산주의자들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난번에 올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대도시에 공산당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정부는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으면 공권력을 사용해야지.”
좌익이 강력히 비판하는, ‘모두가 고통을 받을 때 재산을 불리는 탐욕스러운 대자본가’의 상징인 슈티네스는 당연히 공산당의 득세가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렇게 걱정된다면, SEB가 독일 산업에 투자하지는 않았겠지요?”
‘큰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만, 만약 러시아처럼 독일에서 공산혁명이라도 일어난다면, 슈티네스가 세운 부의 제국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입니다. 우리는 독일의 안정 회복에 배팅했지요. 그게 고귀한 투자자의 뜻이기도 하고.”
“발렌베리 가문이 스웨덴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습니다. 특히 외무부와 재무부는 발렌베리 가문의 영역이라 들었는데, 참 부럽습니다.”
발렌베리 가문이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정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과장입니다. 우리 가문은 공과 사를 분명히 합니다. 백부님께서 외무장관을 역임하고, 제 부친께서 재무부에서 활동하셨다지만, 입각하는 그 순간 기업과는 관계를 끊으셨습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독일 정치까지 관여할 줄은 몰랐군요.”
“하인리히 대공은 정치와는 크게 관계가 없으신 분입니다만.”
“하지만 독일 해군의 상징이시지요. 지금도 독일 함대협회 명예회장이시고.”
독일 함대협회(Deutscher Flottenverein)는 카이저의 건함정책을 지지하는 민간단체로, 건함뿐만 아니라 세계 패권에 뛰어드는 확장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했다.
1898년에 설립된 함대협회는 전국적으로 수백만이 넘는 회원과 수천 개의 지부를 거느린 거대 단체로 성장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던 프로이센 융커 중심의 육군과 달리, 해군은 신흥 부르주아지와 중산층을 상징했다.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으로 건함에 제약을 받으면서 해양협회(Seeverein)로 이름을 변경하긴 했지만, 아직도 적잖은 부르주아지는 함대에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내 생각에, 독일에 민주주의는 불가능합니다. 독일인들은 민주주의가 서방이 강요한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호엔촐레른 왕가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재작년 황후의 장례식에 얼마나 많은 독일인이 슬퍼했습니까.”
대자본가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독일인은 민주공화국이 패전으로 인해 강요된 체제라고 생각했다. 우익은 대부분 제국 시절을 그리워했다.
“패전 책임이 있는 카이저나 황태자는 지탄을 받을지 몰라도, 하인리히 대공이라면 다르지요. 만약 대공께서 정치를 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협력하지요.”
슈티네스는 발렌베리의 ‘제안’을 어림짐작하고 먼저 역제안을 했다.
함대협회는 독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단체이자, 부르주아지와 중산층의 노스탤지어였다.
호엔촐레른 황실의 일원이자 해군을 대표하는 하인리히 대공은 융커와 부르주아지를 연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발렌베리의 대답은 달랐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하인리히 대공께선 정치를 할 생각이 없으십니다. 황실 전체의 생각이 같지요. 민주공화국의 정치판에 끼어드는 건 용납하지 못할 일입니다.”
우익이 호엔촐레른 황실에 대한 향수가 있는 만큼, 좌익은 황실을 혐오했다.
네덜란드로 망명한 카이저 빌헬름은, 공화국 체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화국의 정치에 끼어드는 황족은 황실에서 파문하겠다고 선언한 터였다.
“아니, 실컷 정치 이야기 하더니만. 그럼 제안하고 싶은 게 뭡니까?”
“오늘 우리가 나눈 대화는 모두 극비라는 걸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허허, 여부가 있겠습니까.”
“회장님께선 루덴도르프 장군에게 적잖은 정치자금을 후원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스웨덴 망명에서 돌아온 전 참모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패전의 원인이 배후의 사회주의 혁명에 있다는 ‘배후비수론(Dolchstosslegende)’을 주장하며, 극우파들의 영수로 떠올랐다.
“독일의 애국자로서, 독일의 승리를 위해 분투한 장군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게 아쉽더군요.”
“자금 지원을 중단하는 게 좋을 겁니다. 루덴도르프 장군이 군부 내 협력자들과 함께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루덴도르프의 정치자금을 후원하는 슈티네스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나는 금시초문이오만. 어디서 들으셨소?”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만, 쿠데타 계획이 진행 중인 건 분명합니다. 이들은 내각을 체포하고,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해 군부독재를 실시할 생각입니다.”
“흐음. 군부가 시대착오적이긴 하지만, 공산혁명보다야 군부독재가 낫지 않겠소?”
대자본가는 거들먹거리는 융커와 군부를 아니꼽게 생각했지만, 공산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보다는 훨씬 믿을 만한 동지였다.
“아니, 회장님은 슈트레제만 총리와 같은 여당이 아닙니까? 총리에게 쿠데타를 알려야지요.”
“물론 나는 그의 동지이긴 하지만, 근래 총리의 결정이 전국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잖습니까.”
슈트레제만은 오랜 고심 끝에 루르에서의 저항을 포기했다. 루르 탄광을 프랑스에 인도하여 배상금을 갚아나갈 생각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거, 회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지금 우린 현실적으로 프랑스를 이길 능력이 없어요. 타협은 불가피하지요. 프랑스와 전쟁이 아닌 협력을 택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핵심은 루르입니다. 루르 문제를 해결하면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갈등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근데 총리는 내 말을 듣지 않더군요.”
슈티네스는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슈트레제만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루르의 광산과 철강업을 독점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동의하지 않는 게 문제였다.
독일 대자본은, 필연적으로 정치와 깊숙한 연관이 있었다.
1914년 9월, 대전 발발 직후.
당시 독일 총리 베트만-홀베크는 프로이센 군부와 독일 산업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른바 ‘9월 계획(Septemberprogramm)’을 수립했다.
1. 프랑스는 북부 영토 일부, 특히 철광산이 있는 지역을 할양해야 한다.
2. 프랑스는 1백억 금 마르크 이상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독일이 지고 있는 모든 국채를 청산한다. 이는 프랑스의 재무장을 방지하고, 경제를 독일에 종속시킬 것이다.
3.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독일의 지배를 받는다.
4. 러시아제국의 서부 영토, 즉 폴란드와 발트연안, 우크라이나를 분리하여 완충국을 건설한다.
5. 표면적으로는 평등하나, 실제로는 독일이 지배하는 “미텔오이로파(Mitteleuropa, 중부유럽)” 경제연합을 건설한다.
융커의 군국주의적 야망과 부르주아지의 자본주의적 야망이 결합하여, 9월 계획이 탄생했다.
‘따서 갚으면 돼’라는 발상은 장기전에 허우적거리고 있던 전쟁 후반이 아니라, 단기전을 예상하고 있던 전쟁 초반부터 등장한 것이었다.
설령 단기전으로 전쟁이 끝나더라도, 라이벌 프랑스에 막대한 배상금과 산업기반을 빼앗아 경제를 파괴하여 독일에 종속시킬 계획이었다.
러시아로부터 분리한 국가들은, 표면적으로는 독립국이나 실질적으로는 ‘미텔오이로파’의 영구한 지배를 받을 것이다.
9월 계획을 열렬히 지지했던 대자본가, 라테나우- 슈티네스-슈트레제만의 구상은 이른바 제2제국판 ‘유럽연합’ 혹은 ‘유럽공영권’계획이었다.
라테나우와 슈트레제만은 미국 자본주의의 급부상을 보면서 경각심을 느꼈다. 독일이 중부유럽에서 대규모 경제공동체를 건설해야, 미국에 맞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굴욕적인 패전 후, 융커는 여전히 패전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자본가들은 오히려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미국의 힘을 절감했다.
독일 제국주의 이데올로그였던 대자본가들은 제국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노선을 전환했다.
미국 자본주의가 독일의 영역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소비에트와 손을 잡든지, 아니면 미국 패권을 인정하고 머리를 숙여 미국의 소중한 시장이자 투자대상으로서 자리 잡든지.
라테나우는 전자를 택하다 암살당했고, 슈트레제만은 후자를 구상했다.
‘새로운 카이저’ 슈티네스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미국이나 영국이 우릴 지원해줄 생각은 없다. 국제자본주의는 독일의 등골을 빼먹을 생각밖에 없어. 그렇다고 공산주의자에게 손을 내미는 건 말도 안 되지. 차라리 프랑스를 움직여 루르와 라인란트에 토대를 둔 경제공동체를 건설해, 앵글로색슨 패권주의와 슬라브 공산주의에 맞서야 한다.”
슈티네스의 새로운 구상은 9월 계획의 변형이었다. 단지 주체가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프랑스는 독일의 군사적 위협에 민감하지만, 대륙의 경제패권에 대해서는 오히려 영국보다 둔감했다.
프랑스와 독일이 힘을 합쳐 경제공동체를 건설하고, 루르-라인란트의 석탄과 철강은 양국의 연합을 상징한다. 루르-라인란트는 유럽공동체의 중심지가 되고, 자신이 그 중심지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구상이었다.
“문제는 독일과 프랑스의 상호적대감을 어떻게 없애냐는 건데…….”
이건 자본이나 로비의 힘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대전쟁과 인플레이션으로 부를 늘린 자본가야 아무런 원한이 없겠지만, 상호 간에 수백만이 피를 흘렸다. 지금도 서로를 증오하고 있다.
프랑스와 타협에 나선 슈트레제만은 슈티네스의 구상을 흥미롭게 듣기는 했지만, 계획의 주체가 대자본가가 되는 건 단호히 거부했다.
그나마 슈트레제만은 말이라도 통하지, 독일 우익들은 프랑스와의 협력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남은 건 프랑스의 승인과 지원이었다.
슈티네스는 중립국 스웨덴을 대표하는 발렌베리에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
슈티네스의 구상을 들은 발렌베리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표면적으로만 들으면 유럽의 평화로운 신질서를 구축하겠다는 말로 들리지만, 본질은 자신의 산업제국을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참으로 장대한 구상입니다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독일은 결코 루르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프랑스는 독일과 협력하느니, 루르와 라인란트의 분리를 추구할 겁니다. 이미 분리주의 시동을 걸고 있지 않습니까?”
프랑스는 은근히, 아니 근래에는 거의 대놓고 라인란트 분리주의를 후원했다.
“설마, 분리주의 운동에도 자금을 후원하고 계십니까?”
“보험이지요. 나는 모든 정치적 변동의 가능성에 대비합니다. 딱 하나, 공산주의 혁명만 빼고요.”
루덴도르프의 프로이센 재건운동에 자금을 대는 대자본가가, 동시에 프로이센에서 독립하려는 라인란트의 분리주의도 후원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독일의 ‘배후자본’ 그 자체였다.
굳이 발렌베리에게 이 말을 하는 건, 야콥의 부친이자 전대 회장인 마르쿠스가 국제연맹 재정위원장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를 중재하는 데 적극적이기 때문일 터였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완충지대가 형성된다면, 유럽의 평화에도 바람직한 일일 겁니다.”
“좋습니다. 그건 차분히 생각해 보고, 당면한 건 쿠데타입니다. 러시아의 경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실패하면 그 반동으로 공산당과 좌익이 득세할 겁니다. 쿠데타가 성공한다 해도, 연합국은 전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프로이센 군부가 재집권하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상황이 된다면, 어느 쪽이든 프랑스군은 라인란트로 진격하겠군요.”
“독일의 내전과 분할이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슈티네스는 계산기를 돌렸다. 어느 쪽이 산업제국을 지키고,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조언 감사합니다. 베를린으로 가서 총리를 만나 봐야겠습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저도 베를린에서 볼일이 있으니, 곧 다시 뵙지요.”
두 자본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했다.
* * *
유럽의 ‘배후자본’, 스웨덴 엔스킬다 은행(SEB)의 배후에 있는 장본인은 지구 반대편에서 ‘투자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킬 조선소의 인수는 대한의 해군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걸세.”
“예, 폐하.”
해군부장 안중근은 HAG를 인수한 마이어 무역회사의 대주주인 SEB의 배후가 바로 이선임을 아는 극소수의 인원 중 한 사람이었다.
안중근은 유럽 체류 당시 스톡홀름을 종종 들렸고, 보스포루스 해협통제위원에서 물러난 후에도 ‘개인적으로’ 스톡홀름을 방문했다.
스톡홀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안중근이 자신의 명성을 널리 떨친 그 도시를 방문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목적은 발렌베리와의 접촉이었다. 안중근은 주독대사 조한민과 함께 이선의 대리인으로서 막후에서 HAG 인수를 감독했다.
“HAG는 최신 전함과 잠수함 건함 기술을 갖고 있으나, 베르사유 조약의 제약으로 위기에 처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자금을 대 주고, 그들은 우리에게 기술을 제공해 줄 겁니다. 해군에서 선별된 장교들이 유럽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독일 정부의 의심을 피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제약을 피하려면 적절한 장소가 필요하지. 중립국 스웨덴이 딱 적당하네. 다른 독일 군수기업들은 중립국 네덜란드를 통해 회피하고 있으니까.”
HAG는 독일제국 최후의 전함 바이에른급 전함을 건조하고, 다수의 U-보트(잠수함)를 건조한 경험이 있었다.
“특히 잠수함 기술자들을 비밀리에 대한에 초빙하도록. 비용 지불은 달러로, 기존 연봉의 몇 배를 줘도 상관없으니.”
“삼가 지엄한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안중근은 감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륙으로 확장하는 대한제국의 특성상 육군 중심은 피할 길이 없었지만, 황제는 해군을 방기할 생각이 없었다.
대전쟁기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던 독일 대양함대와 달리, U-보트는 전황을 뒤바꿀 수 있었던 비장의 무기였다. 이선은 한국판 U-보트를 구상하고 있었다.
‘초인플레이션은 역사대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변수는 반드시 있기 마련이지.’
이선은 독일의 패전 직후부터 여러 알짜기업을 노렸지만, 일부러 1923년까지 기다렸다.
패전하자마자 덤벼들었다간 주목을 받을 게 분명했고, 독일도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이선은 막대한 러시아 투자금을 SEB로 옮겨서 분산투자하며 차분히 기다리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맞이하자 독일을 향해 넓은 팔을 뻗었다.
발렌베리와 마이어는 충실한 대리인이 되어, ‘배후자본’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도 상당한 이익을 얻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였다.
‘프랑스가 소원대로 라인란트를 점령하든 말든, 그건 상관없어. 문제는 군부 쿠데타든, 공산혁명이든 독일의 체제변동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체제보다는 안정적인 공화국이 낫다.’
이선은 다음 구상에 나섰다. 독일에 빨대를 꽂은 이상, 통째로 엎어지는 상황은 없어야 했다.
정치와 자본의 결합은,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없는 지구 반대편에서 효과적인 개입수단이 될 터였다.
그야말로, 유대인이 아닌 한국인 ‘국제 배후자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