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75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1923년 11월, 소비에트 러시아 모스크바.
최근에 개최된 제4차 국제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은 ‘일시적으로 지연되었던’ 세계혁명의 가능성을 다시 탐지하기 시작했다.
“동지들! 세계혁명의 가능성에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전례 없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베를린, 빈, 부다페스트에서 자본주의는 최후의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3년 전 바르샤바 문턱에서 세계혁명의 수출이 저지되었을 때만 해도, 유럽에서 혁명의 불씨가 쉽게 다시 일어날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1923년 독일 하이퍼인플레이션과 중부유럽의 경제위기는 좌익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코민테른의 새로운 전략, 즉 ‘통일전선(United front)’ 전술은 효과를 발휘했다.
공산당은 분열되어 있던 옛 동지들, 여전히 노동계급의 다수를 대표하는 사회민주주의를 향해 연합을 제안했다.
러시아 공산당의 라이벌, 독일 사회민주당·프랑스 사회당·영국 노동당의 주류는 공산당과의 제휴를 완강히 거부하고, 오히려 우측의 자유주의자들과 손을 잡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경제 붕괴, 노동 계급의 생존 위기, 점증하는 파시즘, 우익 쿠데타의 위협 속에서 사회민주당의 좌익블록이 공산당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 정부는 헝가리에서 온 동지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통일전선이 가장 먼저 성공을 거둔 곳은 헝가리였다. 도나우 연방의 취약한 경제는 1923년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부다페스트는 빈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거르버이 샨도르(Garbai Sándor)와 쿤 벨러(Kun Béla)가 이끄는 사회당-공산당 연합정부는 헝가리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토지개혁과 사회화 정책을 추진했다.
오스트리아 정부와 헝가리의 귀족-지주들은 격렬하게 반발했고, 해군 중장 호르티 미클로시(Horthy Miklós) 제독이 이끄는 반혁명군이 크로아티아에서 헝가리를 향해 진격을 준비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이른바 ‘소(小)협상국’도 헝가리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생 제르망 조약에서 미처 분할하지 못한 헝가리 영토를 추가로 빼앗을 구상을 했다. 특히 역사의 변화로 트란실바니아를 절반만 차지한 루마니아가 가장 성화였다.
동서남북으로 포위된 헝가리 정부는 당연히 소비에트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파리 코뮌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수립된 사회주의 정권을 기꺼이 돕기로 했다.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루마니아군이 헝가리 영토를 한 발짝이라도 넘을 경우 …… 노동자·농민의 붉은 군대가 드네스테르 강을 건너 베사라비아를 몰다비아를 수복할 권리가 있음을 명백히 알린다.」
루마니아가 트란실바니아 영유권을 주장하며 헝가리를 공격한다면, 소비에트도 루마니아가 차지한 옛 러시아제국 영토인 베사라비아와 몰도바의 영유권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선포하겠다는 통첩이었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루마니아 국경을 향해 군대를 전개했다. 내전에서 승리한 소비에트 러시아를 루마니아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적군이 카르파티아 산맥을 돌파하여 헝가리와 연결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최후통첩을 받은 루마니아는 후원국인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루르-라인란트 문제로 제 코가 석 자인 프랑스가 루마니아를 도울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협에 루마니아는 굴복했고, 세르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도 헝가리 문제에 개입하는 걸 포기했다.
“마자르 민족은 마침내 합스부르크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다! 헝가리 인민공화국 만세!”
헝가리를 분할하겠다는 외세의 위협은 오히려 헝가리군 병사들을 인민공화국에 협조하게 했고, 새로 편성된 적위군은 백위군을 격파하고 헝가리 국경 밖으로 밀어냈다.
호르티 제독은 오스트리아로 퇴각하여 권토중래를 기해야 했다. 그나마 오스트리아가 달마티아를 통하여 아드리아해로 나가는 길만 있다면, 해군제독으로서의 지위는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한 축이었고, 도나우 연방의 중요한 축인 헝가리의 분리독립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운명은 몰락으로 향하게 되었다.
* * *
로마노프 왕조, 호엔촐레른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의 몰락을 대신해 떠오른 유라시아 제국은, 역설적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였다.
1923년 11월 7일.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 우크라이나 SSR, 벨라루스 SSR, 자캅카스(조지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SSR 4개국 대표가 모스크바에 모여 연방 창설 조약에 서명했다.
극동의 완충국가인 극동 공화국은 서방, 특히 미국과의 교섭 창구로 남겨 두고자 연방에 가입하지 않았다.
러시아령 중앙아시아의 신생국가들(부하라·호라즘·키르기스·투르크멘 SSR)은 국경이 불확실한 상황이었으므로, 국경이 확립될 때까지 가입이 보류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 -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수립을 선포합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동양에서는 약칭 소련(蘇聯)이라고 불리게 될 나라였다.
유라시아의 거대한 공간에, 사회주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붉은 제국이 탄생한 것이었다.
“연방의 구성국은 모두 동등하며, 별도의 정부기관과 입법기관을 가진다. 구성국은 러시아인이 아닌, 각 민족이 대표해야 한다. 한다. 공화국 내의 자치공화국 역시 토착화 정책을 통하여 소수민족의 권리와 대표성을 보장한다. 연방은 민족의 평등을 지향하며, 대러시아 국수주의는 철저하게 지양되어야 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초대 정부수반을 맡게 된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는, 러시아인이라는 출신성분이 무색하게도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다.
러시아제국이 철저하게 무시했던 소수민족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체제를 확립했고, 각 연방 구성국은 독자적인 정부와 형식적으로라도 연방을 탈퇴할 권리조차 부여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정말로 ‘약소 민족의 벗이자 해방자’라서가 아니었다.
“연방에 어떠한 민족도 우선권을 가질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은 구 러시아제국이 아닌, 유라시아 전체 인민의 연방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연방의 중심지는 모스크바뿐만 아니라 베를린과 파리가 될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은 궁극적으로 러시아를 넘어 세계혁명을 이끌어야 할 선도국가로서, 러시아인들의 민족국가로 남겨 두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소련 지도부에게도 현실감각이 존재했으므로, 모든 독자적 민족국가를 깡그리 무시하고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소비에트 연방을 모델로, 세계에 여러 사회주의 연방을 수립하는 게 목표였다.
“선제조건은 반드시 독일 혁명이 완수되어야 한다. 독일 공산당의 동지들에게 권력을 잡을 기회가 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조국, 선진적인 산업국가, 강력한 노동 계급을 보유한 독일 혁명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열망은 집착에 가까웠다.
특히 ‘연속혁명’ 이론을 정립한 트로츠키는 강력하게 독일 혁명 개입을 주장했다.
“동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독일 공산당은 혁명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모스크바와 베를린을 연결하는 독일 공산당의 대표 하인리히 브란틀러는 혁명 성공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이는 소련 공산당과 독일 공산당의 노선 차이를 의미하기도 했다.
독일 공산당을 이끄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볼셰비키의 통치에 비판적이었다. 특히 룩셈부르크는 옛 동지인 울리야노프와 트로츠키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볼셰비키가 내전 중에 보인 잔혹함과 일당독재로 귀결된 러시아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공산주의는 사랑과 우정이 넘치는 학교가 아니오! 권력을 잡고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를 이룩하려면, 유혈은 불가피했단 말이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란 노동자가 직장과 사회에서 민주적인 직접 투표를 하는, 일당제가 아닌 자유로운 다당제의 공산주의 체제를 의미합니다!”
“그게 마르크스주의라고요? 아나르코-생디칼리즘과 다를 바가 뭡니까?”
“마르크스를 오독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고 당신들입니다! 당신들은 차르와 다를 바가 없어요! 차르의 비민주적이고 절대주의적인 민족 분류를 볼셰비키가 똑같이 자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이 되는 소릴! 차르의 억압은 볼셰비키의 혁명으로 인해 해방되었고, 강압적 민족 자결과 프롤레타리아의 자결권 해방은 다른 겁니다!”
“민족은 인민을 정체성 혼란에 빠트리기 위한 지배 계급의 전략에 지나지 않습니다.”
“허! 동지야말로 민족 허무주의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지 않습니까?”
울리야노프-트로츠키와 룩셈부르크는 코민테른에서도 신랄한 논쟁을 쏟아 냈다.
“우리는 볼셰비키가 저지른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 원, 권력을 잡아 보고서 그런 말을 하시오. 반혁명 세력의 준동에 맞서 총알을 날리지 못하면 그 정권이나 며칠이나 유지가 될지.”
울리야노프-트로츠키와 룩셈부르크의 불화가 표면에 이르자, 각국 공산당에게 지도력을 행사하는 모스크바의 권위가 흔들렸다.
결국 사회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독일 공산당이 친소 공산당과 비소 공산당으로 다시 둘로 쪼개질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일 사회주의 운동에서 룩셈부르크가 지닌 상징성은 무시할 수 없었고, 리프크네히트의 중재로 독일 공산당은 재통합되었다.
1923년 11월, 소련 공산당은 정세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독일 공산당에 봉기를 거듭 촉구했다.
“룩셈부르크 동지는 봉기 계획이 노동 계급을 자살행위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 계급은 전례 없는 인플레이션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분명 세상의 변혁을 바라고는 있지만, 독일 지배 계급의 동맹은 아직 굳건합니다.”
“룩셈부르크주의 편향이 또 나왔군!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독일 혁명과 유럽 혁명의 기회가 언제 다시 오겠소?”
브란틀러가 역으로 제안했다.
“그럼 내전을 승리로 이끈 트로츠키 동지가 독일에 와서 혁명을 지도해 주십시오. 우리에게는 적위대를 이끌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뜻밖의 제안에, 트로츠키는 잠시 휴회를 요청했다.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한 차례 격렬한 토의를 거친 후, 무장봉기 계획을 진행하기로 했다.
“봉기에 동원할 수 있는 노동자 적위대가 얼마나 됩니까?”
“전국적으로 따지면, 약 11만 명은 됩니다.”
“무장 상태는?”
“빈약합니다. 무기가 많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국가방위군과 우익 준군사단체가 독점하고 있어서, 소화기를 제외한 무기를 확보하긴 어렵습니다.”
“좋습니다. 붉은 군대의 군사고문관들과 무기를 보내지요. 함부르크항으로 진입합시다.”
“국가방위군을 이길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작센에서 얼마나 버텨 주느냐에 따라 달렸지요. 독일 혁명의 교두보인 작센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으로 사회민주당이 지배하는 프로이센을 장악해야 합니다. 베를린과 함부르크, 루르의 노동계급이 일제히 봉기하는 겁니다. 프로이센을 장악하면, 독일 혁명은 가능합니다.”
트로츠키는 지도에서 독일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분명히 해 둡시다. 공산당의 단일대오가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독일 공산당은 봉기를 지지합니까?”
“리프크네히트 동지와 당 지도부의 다수는 봉기를 지지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먼저, 당의 단일대오를 확실히 확립하시오. 룩셈부르크 동지와 절친한 라데크 동지를 독일로 보내 설득하도록 하지요.”
“즉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나도 준비가 되는 대로 독일에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트로츠키 동지!”
트로츠키는 독일 혁명의 가능성에 전율을 느꼈다.
세계혁명을 열망하던 소련 공산당에, 연속혁명을 주장하던 트로츠키에게 이보다 더 가슴 떨리는 순간이 없었다.
* * *
「국가방위군이 작센에 진입하여, 저항하는 노동자 적위대를 무자비하게 사살하고 작센 주정부를 해산했습니다. 공산당은 총파업을 선언하고 의회에서 철수했습니다. 노동조합 3분의 1가량이 총파업에 응했습니다. 사회민주당도 항의의 뜻으로 내각에서 사임했고, 슈트레제만 총리는 사임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정부에 슈트레제만을 대체할 인사가 없으므로, 내각은 유지되리라 전망합니다.
…… 공산당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러시아식으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독일 공산당에 참여하고 있는 익문사 요원의 정보에 따르면, 머지않아 봉기를 일으킨다든가 하는 소문이 당내에 떠돈다고 합니다.」
주독대사 조한민이 보내온 보고를 읽던 이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근래 소비에트가 보이는 확장주의적 행보는, 베를린에서도 감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약칭 소련. 소비에트의 확장주의적 행보, 약칭 소확행인가.’
이선은 집무실에 걸려있는 지도를 보았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붉은색이 칠해져 있는 소비에트 연방에 시선이 갔다.
‘뭐, 현재로선 소련이 존재하는 게 대한에 도움이 되지. 소련과는 적대적 공생관계니까. 미국이나 영국에 있어, 대한의 가치는 소련의 남하를 막는 아시아의 보루이자 방파제.’
대한제국에게 소비에트 연방은 필요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존재가, 대한제국의 북방 진출, 만주-연해주 지배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소련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열강은 한국의 만주-연해주 지배를 용인하지 않을 터였다.
‘소련이 아시아에 관심을 거두고, 그토록 원하는 유럽 혁명에 정신이 팔린다면 나쁘지 않겠지.’
완충국인 극동 공화국이 소련에 합류하지 않은 것도, 아시아에서 급진적인 조치를 취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였다.
‘통일전선’ 전술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을 맺었지만, 당장 정세를 뒤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독일에서 혁명이 성공한다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러시아와 독일은 상황이 다르다. 결국 혁명의 핵심은 민중이 얼마나 지지하느냐, 그리고 군대가 혁명에 가담하느냐이다. 독일에서 전자는 불확실하고, 후자는 절대 그럴 리가 없지. 베를린에서는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한계일 거다. 사민당이 공산당 편에 선다면 모를까, 노동 계급조차 분열해 있는데, 무슨 수로 군대를 무너트리겠나?’
공산당이 섣불리 봉기를 일으켰다간, 오히려 국가방위군에게 철퇴를 맞을 가능성이 더 컸다.
‘만에 하나라도 독일에 혁명이 성공한다면, 폴란드에겐 지정학적 재앙이나 다름없군. 동서로 적대적인 사회주의 국가에 포위되게 되니. 그 상황이 되면 프랑스는 몰라도, 폴란드는 필히 군사개입을 하려고 들겠지.’
모스크바-베를린 동맹은 폴란드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이선의 폴란드 방문 이후, 폴란드는 대한제국의 신생 우방이 되었다.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의 존재로 인해 폴란드인들은 한국에 막연한 우호를 갖고 있는 데다, 폴란드와 대한제국은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공동의 적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나라였다.
한국은 폴란드를 유럽의 교두보로 삼아 투자를 늘리는 한편, 군사협력관계를 강화했다.
대전쟁 이후 한국의 잉여 군수생산품은 대양을 통해 군비 확충에 시급한 폴란드로 향했다. 양국 공동으로 군사무기 개발에 나서기도 했다. 한국과 폴란드 양국 모두 전차와 전투기에 관심이 많았다.
‘혹시 모르니, 폴란드를 통해서 움직여 볼까…….’
이선은 가만히 관망만 할까 하다가, 역사의 변화에 대비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