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 3부-181화 (754/812)

3부 177화 관동대지진

이선이 우려를 표명한, 이웃나라 일본의 폭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선의 우려를 안다면, 과민반응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일본은 아시아 최초의 헌법을 제정한 입헌군주제 국가가 아닌가? 한국보다 한발 늦기는 했지만, 보통선거도 실시할 예정이 아닌가?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민의를 반영한 정당정치가 확립되고 있지 않은가?」

원역사와 비교해도, 원로의 권한이 약화되어 정당정치의 힘이 강해졌고, 육해군대신 현역무관제의 폐지로 일본군의 문민통제가 수월해졌으며, 특히 육군의 힘이 크게 빠지면서 군국주의로 폭주할 가능성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대로 역사가 진행된다면, 일본은 정말로 ‘동양의 영국’이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역사의 경로에는 필연이 존재했다.

1868년 보신(戊辰,무진)전쟁, 1877년 세이난(西南,서남)전쟁, 1894년 조청일전쟁, 1898년 미서일전쟁, 1900년 의화단전쟁, 1905년 러일전쟁, 그리고 대전쟁에 이르기까지.

태초부터 숱한 전쟁과 유혈로 단련된 호전적인 국가 대일본제국의 본질은 사라지지 않았다.

황민화교육과 군국주의 병영을 체험한 일본인들의 본성은, 거대한 위기 앞에서 속내를 드러냈다.

그 계기는,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내재적인 공포 – 예고 없는 자연의 기습, 즉 지진이었다.

“호외요! 호외! 내각 총사퇴!”

다이쇼 12년(1923) 8월 하순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 다카하시 고레키요 입헌정우회 내각이 무너졌다.

다카하시는 대장대신(재무장관)을 수차례 역임하며 경제발전을 견인한 유능한 경제관료였지만, 정치인으로서는 부족했다. 전임자 하라와 달리 당내 장악력은 현저히 떨어졌고, 심지어 내각 내에서도 갈등이 발생했다.

강력한 군축정책 추진으로 군부와도 갈등을 빚었고, 그나마 정부와 군부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던 가토 도모사부로 해군대신이 8월 24일에 암으로 사망하면서 내각은 위기를 맞이했다.

다카하시는 여당의 재신임을 받고 내각 내 반대파를 몰아낼 목적으로 총리 사퇴라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계산과는 달리 내각은 무너지고 말았다.

정우회의 계파갈등은 생각보다 심각했고, 후임 총리를 선출하는 문제를 놓고 지지부진한 갈등을 겪었다. 정우회에 반대하는 세력이 총결집하여 총리 선출에 어깃장을 놓고 있었다.

권력 공백상태에서 외무대신이 총리 대행을 맡아 정부를 이끌었다. 일본에서는 흔한 내각 분규(紛糾)였으나,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가 터졌다.

9월 1일 토요일, 도쿄 주둔 제1사단 제1연대.

대대장을 맡고 있는 가나야 분지(金屋文治) 중좌는 오늘도 변함없이 정시출근을 했다.

가나야 분지 중좌, 37세.

부친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군인 집안 태생에, 본인도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청도(칭다오) 전투에서 공훈을 세워 20대의 젊은 나이에 소좌로 진급했으며, 근래에는 육군 최초의 연대로 상징성이 높은 1사단 1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앞으로 장성 진급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대대장님, 곧 점심시간인데 한 대 피우시지요.”

“으음.”

중좌는 부하들에게도 신망이 높아, 휘하 장교들과 허물없이 맞담배를 피우며 농담을 나누곤 했다.

“대대장님, 신혼 생활은 어떠십니까? 오래토록 고대하던 결혼 아닙니까.”

“한창 깨가 쏟아질 시기지, 흐흐.”

“대대장님 닮은 아들 빨리 낳으셔야죠.”

“그러니 어서 힘 좀 쓰십쇼, 흐흐흐.”

“어허, 상관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다!”

중좌는 당대로는 늦은 나이에, 한참 나이 차가 나는 어린 부인을 맞이했다. 동료들로부터 질시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흠흠, 부인은 이미 임신했어. 내년 벚꽃이 필 때면 새 생명이 태어나겠지.”

“오오, 축하드립니다!”

“아드님일 겁니다! 자제분은 3대에 걸친 군인 명문의 대를 이을 겁니다!”

“아들인지 딸인지 어떻게 아나. 건강하게 태어나면 그만일세.”

말은 그렇게 해도, 가나야 자신도 은근히 아들을 기대했다. 군인 집안에서는 대를 이을 아들이 필요했다.

“다카하시 총리가 밀려나니까 속이 시원하군.”

“군축귀신 같으니. 육군에서 더 군축할 게 뭐 있다고.”

“후임 총리는 누가 될까요?”

“해군에서는 사이토 마코토 대장을 밀고 있다던데.”

“아니, 군부에서 총리를 배출하면 늘 해군만 맡으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다나카 대장님은요?”

“그 다나카 상주서니 뭐니 하는 위서 건이 보도되면서 대미외교가 흔들렸다고 골치 아프네.”

“다나카 상주서? 그거 미국 놈들이 만든 위서 아닙니까! 군축을 강요하려고!”

“어쩌면 문민정치인 놈들이 만들어 미국에 넘긴 위작일지도 모릅니다. 미국 놈들이 일본의 내밀한 사정을 어찌 그리 잘 안단 말입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육군과 해군에 모두 재갈을 물리려고.”

일명 다나카 상주서로 불리는 일본의 팽창계획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본 군부에 불똥이 튀겼다. 다나카 기이치 자신은 조작된 위서라고 절대 부정했으나, 이로 인해 육군의 거두인 다나카의 신망이 크게 떨어지고 말았다.

일본 육군은 조작의 배후에 한국 황제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하고, 문민세력이 군축을 목적으로 위서를 만든 게 아니냐고 의심하며 이를 갈았다.

“제군, 정치에 관심을 갖는 건 유권자의 의무이긴 하네만, 지나치게 열을 올리진 말게. 우린 군인이야. 정치적 중립을 지킬 의무가 있네. 야마가타 원수의 말로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어.”

중좌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며 부하들의 말을 막았다.

일본 군부와 정치는 창군 시절부터 불가분의 관계였지만, 정치군인의 대명사들이 1907년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몰락하면서 힘이 꺾이고야 말았다.

가쓰라와 데라우치는 즉사했고, 육군의 우두머리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오랜 연금생활 끝에 올해 초에 병사했다. 유신 원훈임을 감안하여 장례는 국장에 준하여 치러졌으나, 과거 누렸던 권력에 비하면 쓸쓸한 최후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 유신 1세대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제군, 곧 정오인데 점심이나 먹으러 가지.”

“예!”

그 순간이었다. 가나야 중좌는 지축이 흔들리고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포격……? 도쿄에 누가 포격을?’

군인인 중좌는 본능적으로 포격을 의심했다. 청도 전투에서 일본군 대형 중포가 독일군 요새를 포격할 때, 지축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지 않았던가.

‘아니, 포격 따위가 아냐! 지진이다!’

이토록 거대한 지축의 흔들림은, 인간이 만들어 낸 야포 따위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직 자연, 지구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대한 분노 – 지진이었다.

9월 1일 11시 58분.

일본 수도권인 간토(關東,관동)에 대지진이 덮쳤다.

“지진이오! 지진! 어서 대피하시오!”

“도망쳐! 어서!”

“불이야! 불!”

“사람 살려!!”

“우리 아이 못 보셨나요?!”

“하나코, 어딨니! 하나코!!”

“아이들! 아이들이 집 안에 있어요!”

“부인, 늦었소! 이러다 부인까지 죽어요!”

“안 돼!!”

도쿄와 요코하마 등 간토 일대는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거대한 본진(本震)과 여진이 잇달아 도쿄를 덮쳤다. 산업화가 진행 중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도쿄 가옥의 절대 다수는 목조건축이었다. 무수히 많은 집이 지진을 견디지 못해 무너져 내리고, 박살 났다.

하필이면 정오 직전, 대부분의 식당과 가정에서는 점심 식사를 위하여 불을 피우고 있었고, 지진이 닥치면서 불꽃은 거대한 화마(火魔)가 되고야 말았다.

특히 육군 피복창에서 일어난 대형화재가 화재선풍을 일으키면서, 화마는 목조건물로 이뤄진 도쿄를 깡그리 태우고야 말았다.

도쿄는 지진과 불로 끓어오르는 인세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도쿄 전체가 불바다로 변하다!」

「니혼바시, 교바시, 시타야, 아사쿠사, 혼조, 후카가와, 간다 거의 전멸! 사상자 10만 명 이상!」

「전신, 전화, 전차, 가스, 철도 전선 모두 단절!」

유일한 정보통 역할을 하는 언론사 사옥들도 모두 소실되어, 그나마 살아남은 신문사가 급하게 호외를 찍어내어 참상을 전달했다.

호외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 생존자의 눈에 도쿄의 참상이 드러났다.

토요일 낮에 수도권을 강타한 대지진에, 10만 이상의 주민이 사망하고 30만 채 이상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재산적 피해는 셀 수 없이 어마어마했다.

가옥의 대다수가 파괴되고 불에 타,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피난민이 되었다. 지진으로 인한 피난민은 200만에 달했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사찰, 학교, 공원 등이 임시피난소로 쓰였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무정부 상태였던 일본 정부는, 부랴부랴 전 해군대신 사이토 마코토를 총리로 하는 거국내각이 임명되어 안정과 복구를 책임지도록 했다.

“유신 이래, 아니 지난 수 세기 동안 가장 위태로운 순간이오. 사회안정과 주민보호, 진재복구를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사이토 총리는 취임일성으로 진재(震災)복구를 외쳤지만, 현재로선 요원해 보였다.

정치, 경제, 사회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무수히 많은 사상자에, 도쿄와 간토 일대는 마치 대폭격이라도 맞은 양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다. 당장의 피난민 관리와 치안유지가 심각했다.

“내각은 9월 2일 자로 계엄령을 선포한다.”

사이토 내각은 첫 조치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치안유지에 나섰다.

사태는 전례 없이 위중했다.

* * *

대한제국, 황성.

일본 간토에 대지진이 일어났다는 보고는, 그날 심야에 이르러서야 황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도쿄의 각국 외교공관도 대지진에 직면하여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 그나마 주일한국대사관은 지진에 대비하기 위한 매뉴얼이 준비되어 있어, 빠르게 대처에 나설 수 있었다.

“주일대사관은 재외국민의 안전을 위하여 즉시 조치를 취하도록 하라. 재일한인이 가능한 도쿄에서 벗어나 요코하마로 이동시켜 퇴거할 수 있도록 만반의 조치를 다하라.”

대지진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선은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지진이 9월 1일이었나. 1923년이었던 건 기억했는데. 9월 1일은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일로만 기억하고 있었으니.’

이선은 웬만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연·월·일 단위로 기억했지만, 인간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었다.

손녀의 탄생과 데일리 메일 스캔들, 국내 여론의 격화가 맞물리면서 이선의 기억에서 일본이 우선순위에서 빠져나간 상태였다.

관동대지진이 정확히 언제 일어나리라곤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대략 이 시기에 일어날 거라곤 추측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외무부에 ≪일본 수도권 지진 발생 시 외무부 대응요람≫이라는 매뉴얼을 미리 작성해 준비해 두도록 했었다.

“폐하께서는 실로 천리안을 갖고 계십니다! 어찌 일본 관동에서 지진이 발생하리라고 예견하셨습니까?”

외무대신 이승만은 놀라워하며 물었다. 당사자인 일본 정부도 예측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호들갑 떨 거 없네. 일본은 지진이 잦지 않은가? 작년에도 지진이 있었고, 대지진의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하네. 일본은 대한의 중요한 이웃나라이자, 다수의 재외국민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네. 미리 대비책을 세워 놔야지. 물론 짐도 이렇게 빨리 대지진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 못 했네.”

이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뭐라고 하든, 대신들은 황제의 예측력과 준비성에 새삼 감탄할 뿐이었다.

“군무, 우리 해군의 계백함이 일본에 있지?”

“예, 한영일동맹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순양함계백이 규슈 사세보를 방문 중입니다. 다음 일정은 고베 방문이었습니다만…….”

한영일동맹은 공식적으로 만료되었지만, 20주년 기념행사는 진행될 예정이었다. 결국 대지진으로 취소되겠지만.

“일본 해군에 양해를 구하고, 계백함을 즉시 요코하마에 파견하여 재일한인의 구호와 퇴거를 맡도록 하게. 아, 가능한 많은 구호물품을 선적해서 요코하마로 싣고 가면 좋겠군.”

“삼가 명을 받듭니다, 폐하!”

이선의 명을 받은 이동휘는 즉각 해군에 조치를 취하기 위해 달려갔다.

“내일 일본대사를 경운궁으로 부르도록.”

“예, 폐하.”

다음날 오전, 경운궁.

주한일본대사 요시자와 겐키치(芳澤謙吉)는 본국에서 들려온 소식에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입궐했다.

“대사. 짐은 귀국에서 발생한 대진재에, 짐의 정부와 국민을 대표하여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

“일본 정부를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폐하.”

“현재 귀국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도쿄는 현재…….”

대사는 최대한 완곡한 어조로 설명했지만, 그 자신도 전보로만 들었으니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어쩌면 이선이 상황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대사의 빙장(聘丈)께서는 평안하십니까?”

“예, 다행히도 평안하십니다. 오늘 자로 체신대신으로 입각하셨습니다.”

요시자와는 차기 총리로 하마평에 오르는, 자유민권운동의 거물이자 현 체신대신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의 사위였다.

“장차 빙장께서 일본의 미래를 위해 큰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대사가 가교 역할을 해 주길 바랍니다.”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이누카이는 일본의 문민정치인을 대표하여 군부를 억제하고자 했고, 김옥균과도 관계가 절친하여 지한파로 꼽히는 정치인이 되었다. 이 또한 역사의 변화였다.

“짐은 근린이자 동맹이었던 일본의 불행을 보며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급히 20만 달러를 구호금으로 쾌차하겠으니, 귀국민의 구호를 위해 쓰이길 바랍니다.”

“폐, 폐하! 감사드립니다.”

“20만 달러는 짐의 내탕금에서 기부하는 거고, 정부 차원에서도 의료품을 비롯한 구호물품을 보낼 겁니다. 현재 우리 순양함이 귀국의 사세보를 방문 중인데, 즉시 요코하마로 보내 구호를 돕도록 하고 싶습니다만.”

흔쾌히 20만 달러라는 거액을 구호금을 내탕금에서 내놓겠다는 말에, 대사는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의 지극한 배려에 어찌 답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본국 정부 역시 기꺼이 수락할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자세한 사항은 외무대신과 논의하도록 하고, 짐은 귀국 천황 폐하께 애도의 조전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선은 가능한 최상의 호의를 보이도록 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연합국 모두가 일본에 구호를 보낼 터이니, 가장 먼저 은혜를 베풀어 머리를 숙이게 할 생각이었다.

‘원역사에서 일본이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지만, 역사의 변화로 조선인 학살도 없을 터이니…….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셈이지.’

한일병합이 없는 역사의 변화로 인해, 조선인의 일본 대량 이주는 발생하지 않았다.

일본으로 갈 노동력의 다수가 산업화된 대한제국의 도시와, 만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재일한국인들의 다수는 상인과 유학생이고, 소수의 임노동자가 존재했다. 그마저도 도쿄보다는 한국과 가까운 규슈와 간사이(關西,관서) 일대에 주로 거주했다.

이선은 빠른 조치로 도쿄와 간토의 재일한국인들을 구호하도록 했다.

역사는 변화했지만, 미증유의 대지진과 아비규환이 만들어 낸 증오의 칼날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단지 칼날이 향하는 방향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공포와 대혼란 속에서, 패닉에 빠진 일본인들은 만만한 이웃을 향해 증오를 퍼부었다.

도쿄에는 조선인을 대신하여, 식민지 대만인, 일본의 세력권인 복건과 절강 일대의 중국인들이 저임금 노동자로 대거 이주해 왔다.

일본인이 아니고, 일본 사회에 동화되지도 않으며, 일본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지만, 이질적인 복장과 언어를 쓰며 다수 거주하는 외국인.

이들이 바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실로, 증오의 시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