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 3부-183화 (756/812)

3부 179화 도쿄, 불타오르다

“가메이도 경찰서에 수감된 사회주의자들이 불법적으로 군경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기랄, 국가권력이 미쳐 날뛰는군.”

가메이도(亀戸)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던, 일본 공산청년동맹 위원장 가와이 요시토라(川合義虎) 이하 10여 명의 노동운동가가 총검으로 살해당했다.

이들은 지진 당시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조합원들을 이끌고 피해자 구호와 진재 복구를 위해 노력 중이었다. 경찰은 계엄령 예비검속을 내세워 체포한 후, 인근에 주둔하던 기병 13연대를 불러들여 임의로 처형했다.

「비 온 김에 대청소한다.」

군경은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눈엣가시로 여겼던 좌익인사들을 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숙청할 계획을 세웠다. 민간 정치가들이 불법성을 따지기 전에 죽여서 암매장할 계획이었다.

“일단은 살아남는 게 우선입니다. 도쿄를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숨지요.”

아나키스트의 거두인 오스기 사카에도 충분히 목숨에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

비록 오스기는 공산당과 거리를 둔, ‘아나-볼(아나키스트-볼셰비키)논쟁’ 당시 아나키스트의 입장에서 공산당 독재를 격렬히 비판했던 아나키스트였지만, 군경이 보기에는 흑색이든 적색이든 ‘그놈이 그놈’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나키스트가 공산당보다 더 과격하고 급진적이었다.

오스기 사카에는 사토 히로시의 호위를 받아 자택으로 돌아갔다. 동거 중인 애인과 조카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기 위함이었다.

오스기가 막 자택을 나서려는 순간, 헌병들이 군도를 차고 달려왔다.

“오스기 사카에! 치안법 위반 혐의로 헌병대에 임의동행을 요구한다.”

“허, 왜 헌병이 체포하지? 체포영장은 있나?”

“계엄령에 의거, 계엄군 사령부의 명령으로 임의동행을 요구한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정식으로 체포영장 청구해. 갑시다.”

그러자 헌병대원들은 군도를 뽑아 오스기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임의동행하지 않으면 반항으로 간주한다.”

“법적 절차도 무시한다? 본색을 드러내는군.”

“대일본제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빨갱이 주제에 무슨 법 타령이야!”

그 순간, 뒤따라온 사토 히로시가 칼을 뽑아 들었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이만 꺼져 주는 게 좋겠군.”

“건방진 놈. 네놈은 누구냐?”

“지나가는 불자(佛子) 정도로 소개하지.”

“저, 저놈! 사토 히로시다! 가쓰라 총리와 데라우치 대장을 살해한 미치광이!”

히로시는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얼굴을 알아본 헌병 장교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나를 아는가?”

“흥, 네놈을 잘 알지. 미친 상관살해범! 저 미친놈 때문에 육군이 이 모양이 된 거야!”

“천만에,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니까 이 모양이 된 거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네놈 같은 비국민이 황군의 영광을 모욕하느냐! 이제는 빨갱이 호위까지 해? 죽어 마땅하다!”

헌병 중위는 군도를 빼 들고 히로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히로시는 사관학교 한참 후배인 이 애송이가 같잖기 짝이 없었다.

“전쟁터 근처에는 가 본 적도 없는 헌병 놈이, 황군의 영광 타령은…….”

오랫동안 칼을 쓰지 않았지만, 만주에서 수없이 적을 베어 넘겼던 러일전쟁의 베테랑 사토 히로시는 단칼에 헌병 중위를 제압했다.

“그래, 내가 전 육군 중위 사토 히로시다! 가쓰라 총리와 데라우치 대장이 내 칼에 죽었다. 너희도 같은 대열에 서고 싶지 않으면 빨리 꺼져라.”

“히익!”

“중위, 아직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을 애송이라서 살려 준다. 다시는 헌병이라고 거들먹거리지 마라. 군인으로서 본연의 책무나 다해라.”

베테랑의 위압에, 헌병대원들은 칼등에 찍혀 코뼈가 무너진 채 피를 줄줄 흘리는 중위를 부축했다.

헌병대는 오스기 체포를 단념하고 도주했다.

“육군유년학교 중퇴할 때부터 군인이라면 학을 뗐습니다만, 사토 선생은 대단하시군요.”

“호오, 유년학교를 다녔습니까? 의외로군요.”

“부친이 육군 장교셨거든요. 강제로 다녔죠. 지금은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들었습니다만. 아무튼 덕분에 목숨을 건졌군요.”

“할 일을 한 거지요. 자, 빨리 갑시다.”

역사의 변화는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의 수명을 연장했다.

원역사에서, 오스기는 헌병대에 끌려간 후 일가족과 함께 참살당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피살로 일본 아나키즘 운동은 회복하지 못할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역사의 변화로 인해, 극좌파 혁명가 오스기 사카에는 극우 사상가 기타 잇키의 도움을 받아 후일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군경의 살생부 리스트에 올라간 다른 이들이 오스기처럼 운이 좋은 건 아니었다.

중국노동공제회를 이끌던 왕희천(王希天, 왕시티엔)을 비롯한 재일중국인 지도자들은 일본군의 마수로부터 살아남지 못했다.

왕희천은 중국 공산당 창당 멤버인 주은래(周恩來, 저우언라이)와 일본 유학 동기였다. 1919년 5.4운동 이후 주은래는 프랑스로 유학길을 떠났지만 왕희천은 일본에 잔류했다.

일본 최고 엘리트코스인 관립고등학교-제국대학 진학을 이뤘지만, 왕희천은 출세 대신 동포들을 위해 일하는 길을 택했다. 중국노동공제회를 조직해 차별받는 동포들을 돕고 이끌었다.

대지진이 발생하고 중국인 학살의 소문이 들려오자, 친구 집에서 대피하고 있던 왕희천은 직접 현장에 나섰다.

“왕 동지, 일본인들이 미쳐 날뛰고 있네. 이대로 나갔다간 죽을 수가 있네.”

“동포들이 죽어 나가는데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없지 않겠나?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본국에 상황을 알려 주게.”

일본어가 유창한 왕희천은 학살의 현장에서도 살아남아 참상을 목격했다. 하지만 이미 군경의 리스트에 올라가 있던 왕희천은 경찰에 체포되었고, 헌병대가 신병을 인수하여 군부대로 끌려갔다.

병영으로 끌려가던 중, 갑자기 착검한 병사들이 다리 부근에서 왕희천을 멈춰 세웠다.

죽음을 직감한 왕희천은 외쳤다.

“당신들이 벌인 일을 영원히 잊지 말기를 바란다. 당신들이 죽인 그 무수한 목숨은, 당신들이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사라지지 않으리라. 사필귀정, 반드시 당신들의 죗값을 치를 날이 올 것이다!”

“착검! 처형하라!”

병사들은 총검으로 왕희천을 찌르고, 장교가 참수하여 시체를 다리 밑으로 굴러 떨어트렸다.

대학살로 살해당한 수천 명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이 불법적 처형은 향후 중일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사건이 되었다. 사필귀정이었다.

지진과 화재로 불타 버린 도쿄의 땅과 강에는, 학살당한 이들로부터 흘러내린 피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학살당한 중국인 노동자의 수는 물경 수천 명에 달했다. 정확한 집계조차 없지만, 추정 사망자만 3-4천 명이었다.

학살을 조장하고 방조했던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와 계엄군 사령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대장도 깜짝 놀랄 수치였다.

외무성과 사법성을 향해 항의가 쏟아졌고, 총리 사이토 마코토도 당혹감을 느꼈다.

“이거 도를 넘어서지 않았나! 외교문제로 확산된다고 외무성과 사법성에서 난리야. 속히 자경단을 해산시키고 계엄군은 치안유지 본연의 사명으로 돌아간다!”

일본 정부의 당혹감은, 단순히 중국인 수천 명이 죽어서가 아니었다. 문명국을 자처하는 일본제국의 위신 문제였다. 중화민국 대사는 격렬히 항의했고, 대한제국 대사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성화였다.

지금까지 일본을 향해 동정과 구호의 손길을 보내고 있는 서양 열강들까지 비난대열에 들어서기 전에, 빨리 손절을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각고유 제2호.

이번 진재를 틈탄 일부 지나인의 망동이 있다고 하여, 만약 지나인의 행동이 불온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해도 신속히 불령을 단속하는 군대나 경찰에게 통고를 하고 그 처치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민중 스스로가 주제넘게 지나인에게 박해를 가하는 것과 같은 일은, 문명개화의 방침에 어긋나며 또한 외국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어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 우리 국민의 절제와 평화의 정신을 발휘하게끔 하고, 본 대신이 이번에 특별히 바라는 것은 민중이 각자 절제하고 자중을 요하는 바이다.

내각총리대신 사이토 마코토.」

내각의 담화는, 군경의 책임에 대해서는 쏙 빠져 있었고, 요컨대 자경단의 잘못을 꾸짖고 자중하라는 의미였다.

“자경단을 즉각 해산하고, 가장 악질적인 분자 몇 명만 뽑아서 수감해. 면피는 해야지.”

“알겠습니다.”

“군경이 가담한 흔적은 모두 지워 버려. 만약 문제가 된다 해도, 일부 인사들의 일탈로 규정하고.”

“만약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적당한 초급장교나 하사관, 일선 경찰 정도만 직위 해제시키라고.”

“예, 각하!”

내무성과 육군성은 꼬리 자르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학살과 관련된 모든 책임은 자경단에 있었고, 설령 군경 몇 명이 가담했더라도 개인의 일탈이었다.

“불법적으로 자경단을 조직하여 대중을 선동하고, 불특정다수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한다!”

“놔라! 난 지나인의 폭동으로부터 도쿄를 수호한 애국자라고!”

자경단은 계엄군에 의해 해산되고, 앞장서서 살인을 주도했다고 지목된 이들이 체포되었다.

당연한 죗값 치르기였지만, 자경단 입장에서는 명백한 토사구팽이었다.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할 일본 정부는 새로운 시선 돌리기를 기획했다.

“적당히 시선을 돌릴 사건이 필요해. 뭐가 좋겠나?”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시도…….”

“그건 너무 식상하고. 그 명분으로 그 난리를 쳤는데 새삼 상기시킬 생각인가?”

“그렇지요. 그럼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 음모는 어떻습니까?”

“설득력이 있나?”

“이번에 검거된 무정부주의자들 중에, 폭탄제조혐의를 받는 자가 있습니다.”

“누구를 향해 폭탄을 날리려고 했는데?”

“가을로 예정되었던 황태자 전하의 결혼식에 맞춰…….”

황태자 히로히토의 결혼은 가을로 예정되었지만, 대지진으로 인해 이듬해로 연기하였다.

“이런 미친! 그럼 대역사건이잖아? 확실한가?”

“확실하게 만들어야지요.”

“근데 그래 봐야 미치광이 몇 놈의 망상 아닌가?”

“용의자가 무정부주의자들의 우두머리 고토쿠 덴지로, 일명 고토쿠 슈스이와 가깝습니다. 고토쿠를 연루시켜야 합니다.”

“명확한 증거도 없이 자백만으로 대역죄로 기소하면 언론과 사법성에서 난리를 칠 텐데.”

“지금 절차가 중요합니까? 내각, 아니 정부의 신뢰 위기 문제란 말입니다. 황태자 전하를 암살하려 했던 극악무도한 무정부주의자 조직! 서양에서도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자의 테러라면 학을 뗍니다. 미국에서도 무정부주의자들을 작살내려고 하지 않습니까?”

1920년대 미국은, 이른바 ‘사코와 반제티(Sacco and Vanzetti)’ 사건으로 큰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아나키스트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가 살인강도혐의로 체포되었지만, 증거가 불충분했다. 하지만 사법부는 어떻게든 사형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세기의 재판이었다.

“좋아, 일단 추진해 보게. 하지만 확실하게 일을 진행해야 할 거야. 다른 소리 나오지 않게.”

“예, 각하. 확실하게 일을 추진하겠습니다.”

일본 내무성이 기획하는 ‘대역(大逆)사건’의 각본이 맞춰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언제나 권력자의 각본대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었다.

* * *

“일본 땅에서, 무고한 우리 중국 동포 수천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죄도 없었습니다! 단지 일본인들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 잔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이 원한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일본 정부는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억울하게 학살당한 중국인들에게 사과하고 배상하라!”

“사과하고 배상하라!”

대학살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중국에서는 격렬한 반일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의 출신지가 집중된 남중국 민절, 복건과 절강의 분노가 거셌다.

특히 대거 이주하였다가 떼죽음을 당한 절강 온주(溫州, 원저우)에서는, 초상집 분위기가 곧 반일감정으로 전이되어 폭발했다.

“일본에게 복수를!”

“일본을 타도하자!”

“르번구이쯔(日本鬼子, 일본귀자)를 몰아내자!”

분노한 군중은 일본 상점을 공격하고, 일본인들을 린치했다. 역으로 복수의 학살이 벌어질 상황이었다.

“해산! 즉각 해산하라!”

“폭력행위를 중단하지 않으면 발포한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군벌정권의 군경들은 일본인들을 비호한다는 점이었다.

“자국민이 학살당했는데도 일본 눈치나 보는 매국정권 타도하자!”

“군벌정권 타도하자!”

“삼민주의 혁명 만세!”

군중의 분노는 남경의 북양정부를 향했다. 남중국일대에서 시작되어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반일운동은 1919년 산동점령에 항거하는 5.4운동 때보다 더 심각했다.

일본은 워싱턴회의에서 기껏 산동을 반환하고도, 어처구니없는 학살로 대중관계를 파탄 낸 결과를 낳고 말았다.

“정신 나간 소(小)일본 놈들! 이런 미친 짓을 벌여?”

남경의 북양정부 총수, 단기서 역시 분노했다.

비록 일본에 막대한 차관을 빌리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 중국 통일에 나서고 있지만, 내심 일본을 혐오하는 건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미 국민에게 단기서와 안휘군벌은 일본 앞잡이로 찍혀 버린 상황이었고, 관동대학살 사건으로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마침내 경쟁자인 북경의 직례군벌을 패퇴시키고, 국공합작을 체결한 광동의 호법정부(국민당)를 굴복시킬 계획을 세우던 단기서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터져 버린 것이었다.

“일본에 강력히 항의하고, 자체 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전하게! 조사단 파견에 응하지 않으면 중일관계는 파탄 날 거라고 똑똑히 전해!”

격노한 여론에, 단기서도 꼼짝없이 일본에 맞서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중화민국 호법정부는 일본제국의 야만적인 학살행위를 단호하게 규탄한다!”

“동포들이여! 일본의 앞잡이, 안휘파 군벌정권의 실체가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오직 호법정부만이 중국인을 대표하는 정부입니다!”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광동 호법정부는 일본과 북양정부를 싸잡아 비난했다.

호법정부 대원수 손문은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과 오랜 인연이 있기에 일본에 미련이 남아 있었지만, 소련과 국공합작을 체결한 시점에서 피아(彼我)를 분명히 해야 했다.

“일본은 이제 불구대천의 원수다. 중국의 주적은 일본이다. 반드시 힘을 길러 이 원한을 갚겠다.”

고향이 절강인, 장중정(개석)의 분노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강렬했다. 동포이자 고향 사람들의 원통한 죽음을 보고도 복수를 다짐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내대장부가 아니었다.

장중정 그 자신도 일본에서 유학했지만, 이제 일본은 용서할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먼저 중국을 삼민주의의 기치 아래 통일하고, 궁극적으로 일본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 공산당, 그 배후에 있는 소련의 속내가 음흉할지라도, 일본에 맞서 싸우려면 소련과 손잡는 길밖에 없다.”

장중정은 결심했다.

반드시 중국을 통일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원수를 갚겠다고.

동포들의 피로 물든 도쿄를 향해, 복수의 불벼락을 내리겠다고.

단기서의 목표, 범중화주의자들의 목표가 중국 통일 이후 만청과 그 배후에 있는 한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장중정은 명백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셈이었다.

이 또한 역사의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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