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80화 군자의 복수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 국내의 대진재- 지진, 폭풍, 해일, 대화재)가 병기(竝起)하여 전 시가 초토화함!」
관동 대진재(大震災) 초기에는 이웃나라의 비극에 동정과 위로를 표하는 여론이 다수였다.
한영일동맹이 만료되었다고는 하지만 20년간 동맹국으로 양국의 관계가 좋았고, 민간 차원에서도 큰 갈등을 빚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40년 전 임오군란 당시 터졌던 반일감정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황제 폐하께서 일본에 구호금을 쾌차하셨다더군.”
“역시 우리 황제 폐하는 인자하시군. 이웃나라의 불행도 쉬이 넘어가지 않으시니.”
“폐하께서 모범을 보이셨으니, 우리도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나?”
주한일본대사관, 일본인 거류지, 일본 무역회사 등에는 성금과 구호물품을 보내는 행렬이 이어졌다.
다이쇼 천황의 명의로 이선에게 감사 친서가 오고, 일본대사가 한국인들에게 사의(謝儀)를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진재 초기 양국의 관계는 훈훈했다.
하지만 관동대지진에 이은 대학살의 소문은, 머지않아 대한제국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일본 관동의 비극! 배외주의로 무장한 일본인 자경단, 중국인 노동자 수천여 명을 살해 추정!」
「소위 자경단을 자처하는 폭도들의 잔혹한 학살은, 눈을 뜨고 귀를 열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다. 칼로 베어 죽이고,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불로 태워 죽이고, 물에 빠트려 죽이고…….」
「일부 지역에서는 일본 군경이 학살에 가담한 정황도 있어, 군경이 중국인들을 집단 처형했다는 추정도 있다.」
“세상에 이렇게 잔혹할 수가.”
“지진이 사람 본성을 사악하게 만든 건가, 일본인이 원래 사악한 건가?”
“중국인들이 안 됐군.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이때만 해도, 한국인들은 일본인의 잔혹함과 중국인의 불쌍한 처지에 혀를 차는 정도였다.
반중 감정이라면 한국도 일본 못지않았고,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충격! 일본 관동 일대에서 한인 수십여 명 피살 추정!」
「주일한국대사관의 추산에 따르면, 진재로 인한 한인 사망자와 실종자는 약 3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에서 일부는 지진 이후 폭도들에 의해 학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지진 직후의 혼란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진재로 사망했는지 정확한 추산이 불가능했다. 일본 자체 조사도 대략 10만여 명 사망에 4만여 명 실종으로 추정할 정도였다.
한국대사관이 파악한 사망자 및 실종자는 약 300에서 400여 명, 이들 대부분은 지진과 화재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수십여 명은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대한국 순양함 계백, 요코하마에서 진재 생존자들을 구호하고 귀국 준비!」
「폭도들의 살육으로부터 살아남아 간신히 주일대사관으로 피신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장한 폭도들은,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보면 여부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특정 단어를 발음하게 시킨 후, 발음을 하지 못하면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일본어가 유창한 이들 중에는 한인이라는 신분을 밝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살육으로 눈깔이 뒤집힌 폭도들은 국적 여부를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대진재로부터 살아남은 한국인들의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한국의 여론도 급변했다.
「한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자, 일본 군대가 호위하여 대사관으로 인도한 사례도 있다.」
「무역상 이씨는 폭도들에게 학살당할 뻔했으나, 때마침 순찰하던 경찰이 그를 적극 보호한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중국인으로 오인받아 살해당할 뻔했던 사무원 김씨는, 일본인 동료의 필사적인 변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증언 중에는 미담도 적잖이 있었으나, 여론은 이미 재일한인들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압도된 뒤였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있나? 우리 동포들을 죽였다고?”
“미친 쪽발이 새끼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도 정도가 있지!”
한국의 여론은 당연히 격앙했다. 이웃나라의 비극에 동정과 위로를 표하며 구호성금까지 보냈는데, 돌아온 게 동포들의 살해라니 웃는 낯으로 뺨을 맞은 기분이었다.
“우리 동포들을 살려 내라!”
“일본의 학살을 규탄한다!”
“학살의 진상을 밝혀라!”
“책임자를 처벌하라!”
“일본을 몰아내자!”
자연발생적인 반일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는 황성 용산, 인천 제물포, 부산, 원산 등지에서는 반일 시위대의 서슬 퍼런 분노 앞에 일본인들은 철시(撤市)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남산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는 반일 시위대가 격렬하게 규탄시위를 벌였다. 급히 경무청이 출동하여 대사관을 보호하며 만약의 불상사를 막으려고 했다.
그 순간, 안도의 한숨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주한영국대사관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데일리 메일 스캔들로 인해 발생했던 반영 시위는 빠르게 수그러들고, 모든 분노가 일본에 집중되었다.
일개 언론의 비방과 재외한인의 학살은 차원이 다른 사건이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 * *
“도대체 이 무슨 폭거란 말이오! 귀국의 지진 소식을 듣고, 짐은 누구보다 먼저 일본의 비극을 애도하였소. 귀국 천황께 조의의 친서를 보내고, 구호금을 쾌척했소. 우리 국민 역시 이웃나라의 비극을 위로하고 성금을 보냈단 말이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소? 불과 얼마 전까지 동맹이었던 국가의 국민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대체 짐과 대한을 얼마나 능멸하는 거요!”
이선은 일본대사 요시자와 겐기치를 초치(招致)하여 강력히 분노를 터트렸다.
웨일스 공의 ‘그 사건’ 당시 영국대사를 초치하여 쏟아 낸 분노가 위장된 분노였다면, 이번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격노였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제 버릇 개 주지 못하고 이따위 학살극을 벌여? 역사가 바뀌어도 본성은 어쩔 수 없단 말인가?’
원역사의 일제는 단지 조선인만 학대하지 않았다. 먼저 아이누인과 류큐인을 학대하였고, 그다음에는 대만인을, 그다음에는 조선인을, 그다음에는 만주인을, 그다음에는 중국인, 그다음에는 동남아인을 학대했다.
일제는 점점 거대한 괴물로 변해 갔다. 그 결과가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끔찍한 참상이었다.
하기야 ‘다이쇼 데모크라시’ 와중에도 조선인을 학살하였으니, 이미 싹이 노란 나라였다.
이선은 역사가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했고, 일본의 ‘데모크라시’도 원역사에 비해 훨씬 진척이 있었으므로, 관동대학살과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일본제국은 여전히 일제다웠다.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박해는 변하지 않았다.
‘조센징’, ‘요보’에 대한 경멸과 증오가 ‘시나징’, ‘챵코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폐, 폐하. 진노를 거두시옵소서. 일부 폭도들이 이성을 잃고 망동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 정부와 무관한 일입니다. 일본 정부와 국민은 황제 폐하와 한국민의 호의에 감사하고 있으며…….”
요시자와는 필사적으로 일본 정부와 무관함을 강조했지만, 이선은 탁자를 쾅 하고 내려쳤다.
“그 무슨 소리요! 입장 바꿔서 한국에서 무장한 폭도들이 재한일본인들을 살해했다고 칩시다. 그럼 한국 정부의 책임이 없소? 치안을 다스리지 못하고 폭도들이 날뛰게 놔둔 한국 정부의 책임이오! 그럼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책임을 묻지 않을 거요?”
유구무언, 할 말이 없는 대사는 고개를 숙였다.
“40년 전, 임오년의 군란을 기억하시오? 대사는 기억할 나이가 아닐지라도, 짐은 아주 생생하오. 당시 일부 폭도들이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소. 그때 일본 정부와 민간의 반응은 어땠소? 당장이라도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난리였소! 그리고 실제로 총칼을 들이밀고 협상을 강요했었지! 짐이 그 당시 조선의 협상 책임자였으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일본공사관을 불태우려다 이선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군사교관 이하 여러 일본인을 살해했다.
일본 정부는 이를 명분으로 삼아, 임오군란으로 교체된 정권을 압박할 목적으로 군함과 병력을 파병해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하지만 새로 정권을 잡은 이는 바로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그 손자 완화군 이선이었다.
이선은 어린 나이에도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일본의 압박을 회피했고, 사과와 위로금 5만 엔을 지불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 와중에 이선이 ‘통석의 염’을 운운하여 하나부사 공사의 뒷목을 잡게 한 건 덤이었다.
이 사건은 이선의 공식적인 외교무대 데뷔였다. 일본의 과중한 요구를 꺾고, 신정권의 국제적 인정을 얻어 냈으니, 조선과 이선에게 있어서 외교적 승리였다.
“하물며 40년 전의 조선은 개화를 시도하기도 전인 후진국이었소. 그런데 현재의 일본은 세계의 열강이오, 아시아의 문명개화를 선도한다고 자처하는 소위 문명국이 아니오! 어찌 문명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단 말이오?”
이선은 41년 만에 일본에 똑같이 돌려줄 날을 맞이한 셈이었다.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지.’
어느새 분노를 가라앉힌 이선은, 다시 냉정한 계산으로 돌아왔다. 마침 한영일동맹이 만료된 시점, 엄청난 과오를 저지른 일본에 단단히 약점을 잡은 셈이었다. 이선은 최대한 대가를 받아 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려면, 최대한의 분노를 보여 줘야 했다.
“일본 정부에 전하시오. 일본에서 살해당한 대한국민은, 짐의 적자(赤子)나 다름없소. 당신네 폭도들이 살해한 적자들의 한을 반드시 풀고 말 것이오!”
전에 없는 한국 황제의 분노에, 일본 대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떨었다.
근대적 한일관계 48년, 일본은 한국에 최악의 약점을 잡힌 상황이었다.
“외무대신 각하. 황제 폐하의 진노를 풀 방법이 없겠습니까? 각하께서 중재를…….”
“대사, 그 무슨 말입니까? 귀국에서 벌어진 참사에 황제 폐하만 진노했다고 생각합니까? 나 역시 분노하였고, 우리 국민 모두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중재라고요? 어림도 없소! 암!”
요시자와는 외무부를 찾아 이승만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이승만도 외교적 수사를 던져 버리고 분노를 표명했다.
“대진재의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일부 폭도가 이성을 잃고 벌인 일이지, 고의로 벌어진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본국에 사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전하겠습니다.”
“허, 그런 말로 우리 국민의 분노가 진정될지 모르겠군요.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후속조치가 있어야만 할 겁니다. 그럼 어서 도쿄에 전하십시오.”
이승만은 명백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외무부도 협상 같은 건 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대한국민이여! 우리 동포 300여 명이 이국에서 불귀(不歸)의 혼이 되었습니다. 먼저, 이국땅에서 떠난 동포들을 위하여 조의를 표합니다.”
박용만은 시위 군중 앞에서 엄숙한 어조로 조의를 표명했다. 군중들도 숙연한 자세로 묵념했다.
“대지진은,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하늘의 뜻이기에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 의한 범죄는 인간이 예방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무장한 폭도들이 외국인들을 학살하도록 내버려 뒀습니다. 중국인 수천 명이 학살된 것으로도 모자라, 우리 동포들까지 잔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대한국민 여러분! 이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오!”
“일본을 규탄한다!”
“2년 전, 저 흑룡강(아무르) 일대에서 러시아 극좌 빨치산들이 우리 동포들을 살육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어찌하였습니까?”
“국군을 동원하여 연해주를 토벌하였소!”
“그렇습니다! 이처럼 범죄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물론 일본은 우리 동맹이었고, 소위 문명국…….”
“문명국은 무슨 문명국!”
“일본은 우리 동맹이 아니다!”
군중 사이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자, 박용만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한국민 여러분! 제 말을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일본은 소위 문명국을 자처하는 나라이자, 한때 우리와 동맹이었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우리 동포들을 살육한 적입니다! 우리 동포들을 살육한 적에게 마땅히 징벌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소!”
“천벌을 내려야 한다!”
박용만은 강경하게 반일 언설을 했다.
평양 영국 영사관 시위 사건으로 군무협판에서 사임하고 개화당에서 출당당한 박용만은, 독자 정당 수립에 나선 터였다.
자신을 ‘친일 아시아주의자’라고 모략하는 이승만 일당에게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때마침 발생한 관동대학살에 그 누구보다 강경한 입장으로 나왔다.
“대한국민 여러분!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올시다. 여기서 ‘아’란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사회와 우리 민족이오, ‘비아’는 나와 대칭되는 존재를 이름이외다. 돌이켜 보면,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숙적이 누구였소이까?”
“왜국! 일본이오!”
박용만에 이어 단상에 오른 신채호는 더욱 강경하게 일본을 누대의 숙적으로 지목했다.
“그렇소이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 전국토를 황폐화한 임진년의 왜란! 바로 일본이었소이다. 나는 역사가로서 일본의 역사관에 대해 연구하였소. 저들은 소위 신공황후의 조선정벌,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워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방을 다스렸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소. 고구려가 천하에 웅비하던 바로 그 시기에, 일본이 백제와 가야를 속국으로 거느렸다고 억지를 부린단 말이외다!”
근대 일본 역사학은 임나일본부설을 마치 정설처럼 다루고 있어, 한국 역사학계의 반발을 받았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는 결국 대한을 침략하려는 저들의 검은 속내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소! 비록 지금은 대한의 국력이 강해져 존중하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저들의 검은 속내는 우리를 언제나 얕잡아 보고 헐뜯고 있소. 동맹이 마침 만료된 시점에서, 우리에게 그 어두운 적의를 드러내었단 말이외다!”
공교롭게도 한영일동맹이 만료된 시점에, 일본인에 의한 한인학살이 발생하였으니, 이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오랜 적의를 단적으로 드러낸 게 아닌가?
박용만과 신채호는 그렇게 생각했고, 군중은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다.
“대한국민 여러분! 일본이 우리에게 비열한 적의를 보였으니, 우리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복수하자! 복수하자!”
“대한에서 쪽발이들을 몰아내자!”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불태우자!”
분노한 군중은 당장이라도 일본대사관을 향해 쳐들어갈 기세였다. 마치 40년 전 임오군란처럼.
“여러분! 우리가 일본과 똑같은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황제 폐하의 개화를 받은 우리 국민은, 문명국민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폭력은 황제 폐하를 곤란하게 하는 일입니다. 문명인답게 행동하는 것, 그게 바로 황제 폐하의 지극한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폭력이 아닌 도덕적인 대한인의 힘을 보여 줍시다! 살해당한 동포들의 원한을 풀고, 일본이 책임 있는 사죄와 보상을 하도록! 일본이 굴복하는 그 날까지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멈추지 맙시다!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에는 대사관 앞으로 모입시다!”
“와아아아아!”
박용만과 신채호의 당부에 군중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황제 폐하께서 무분별한 폭력과 유혈사태를 혐오하고, 대화와 합리성을 중시한다는 건 대한국민 된 자로서 몰라서는 안 될 일이지.”
“암, 우리는 일본인과 다르다는 걸 보여 주세.”
“대한이야말로 아시아의 문명국가니까!”
국민이 존경하는 황제를 내건 연설은 효과적이었다. 당장이라도 폭동을 일으킬 것 같았던 군중은 대중시위를 통해 압박하는 전략에 동의했다.
시위 전날 밤, 경운궁.
“우성에게 이르게. 군중을 움직여 일본을 압박하되, 선은 넘지 말도록 하라고.”
“예, 폐하.”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내 이름 팔라고 하게.”
“황공하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사실 박용만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 이선이었다.
일본을 압박하려면 단순히 황제의 진노, 정부의 항의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국민적 여론, 국민적 분노가 일본을 향해 폭발해야 했다.
1882년 일본이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강경한 어조로.
‘군자보구 십년불만(君子報仇 十年不晩)이라.’
군자의 복수는, 10년을 참고 기다려도 늦지 않은 법이었다.
복수를 위해서 적절한 때를 기다리며, 은인자중 절치부심하며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다.
하물며, 40년은 어떻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