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86화 갑자년
광무 28년(1924) 1월 1일.
새해를 맞이하여, 경운궁에서 연례행사인 신년 폐현례(陛見禮)가 있었다.
국무총리대신 박은식이 문무백관을 대표하여 경운궁 중화전에 이르렀다.
지병으로 사직한 이상설을 대신하여 의정대신에서 국무총리서리(署理)에 취임한 박은식은, 머지않아 정식으로 임명되어 제9대 총리가 되었다.
박은식은 최초의 비(非)개화당 출신 정당정치인 총리가 되었다.
임기는 올해 3월로 예정된 총선거까지로, ‘선거 관리 내각’에 가까웠지만, 내각은 무난히 돌아갔다.
“광무 28년 새해를 맞이하여, 신등(臣等)은 대한의 무궁한 번영과 성상의 성수무강하심을 축원하옵니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총리의 선창에 문무백관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이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답했다.
“작년은 대전쟁 이래 세계가 가장 혼란스러운 한 해였소. 그 와중에도 대한은 굳건히 평화와 번영이 지켜져 짐은 바람직하게 생각하오. 실로 경들의 노고가 많았소.”
1923년 계해년은 전 세계가 휘청거렸던 한 해였다. 번영을 누리는 미국을 제외하고, 대부분 국가는 정치경제적 위기에 시달렸다.
유럽은 경제위기에 이어 좌우에 극단주의 세력이 난립하며, 특히 독일을 포함한 중부유럽은 혁명과 내전이 목전에 이르렀었다.
아시아의 일본도 대진재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사회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중국은 여전히 수많은 군벌들로 쪼개져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그나마 후발국가 대한제국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어 나가고 있었으니, 이선으로선 만족스러운 한 해가 아닐 수가 없었다.
“올해는 진정 대한과 세계에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는 한 해가 되길 바라오.”
“성상의 지극한 하교에 신등은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삼가 아뢰옵건대, 금년 광무 28년은 갑자년이오니, 육십갑자가 새로이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낡고 오래됨은 사라지고, 밝고 새로움이 가득할 것이옵니다.”
전통적으로 갑자년은 육십갑자의 시작된 해로서 새로움을 기대하는 해였다.
한국사 최초의 독자적 역법인 칠정산(七政算) 역시 세종 26년, 갑자년을 원년으로 했다.
이선은 육십갑자가 새로 시작함에는 큰 감흥이 없었으나, 문득 옛일이 떠올랐다.
“과연 그렇구려.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에 고종 태황제께서 즉위하시어, 대원왕께서 섭정을 맡아 세도정치의 오랜 폐단을 청산하고 새로운 조선의 기원을 열었소. 실로 그때부터 조선의 변혁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겠소.”
이선은 꼭 한 갑자 전, 1864년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의 집정을 상기시켰다.
엄밀히 말하면 진정한 의미의 변혁은 이선이 주도한 갑신경장부터였지만, 이선은 자신의 직계조상인 대원군의 고종의 공덕을 칭송했다. 고종이 조선의 중시조이자 대한의 태황제가 되었으니, 과는 잊고 공을 내세웠다.
“고균, 구당, 보재의 건강은 좀 어떻다든가?”
하례를 마친 후, 이선은 신년 폐현례에 병으로 불참한 원훈들의 건강을 물었다. 70대의 김옥균과 60대 후반의 유길준은 노환에 지병이 겹쳐 오늘내일하는 처지였고, 50대 초반인 이상설은 과로와 지병 악화로 요양 중이었다.
“이상설 대감은 정양(靜養)한 덕인지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고 하옵니다.”
“잘됐군. 역시 사람은 아프면 쉬어야 해. 보재는 만으로 쉰셋이니 한창 아닌가.”
총리에서 사임할 때 아쉬웠지만, 회복되었다니 다행이었다. 이상설은 벌써 세상을 뜨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였다.
“유길준 대감은 지병인 신장병이 악화되어 자택에서 은거하고 있습니다.”
“저런, 여전히 차도가 없단 말인가. 어의를 보내 진료하도록 하게.”
역사의 변화와 의학의 발달로 유길준은 10년 더 생존해 있었지만, 건강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죽음을 앞둔 유길준은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본인이 주장하고 이끌었던 문명개화와 국민교육은 이제 대한제국에서 완전히 정착되었다.
자식들도 최초의 미국 유학파로, 관료이자 학자였던 부친의 뒤를 이어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장남 유만겸(兪萬兼)은 황성대학 졸업과 미국 유학 후 내무부 관료가 되었고, 차남 유억겸(兪億兼)은 황성대학 졸업과 독일 유학 후 연희대학 법학교수로 임용되었다.
유길준이 양성한 후학과 제자들도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게 되었으니, 그 사상은 한국 사회에 계속 이어질 터였다.
“김옥균 대감은 지병인 폐병과 류마티스 관절염이 악화되어 거동조차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런데 어찌하여 짐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이선은 가장 가까운 신하였던 김옥균의 노쇠를 염려하여 수차례 서한을 주고받았지만, 김옥균은 일부러 자신의 병을 감추고 있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김옥균 대감이 성상께 병세를 아뢰기를 부끄럽게 여겨 꺼려하여…….”
“허어, 결국 세월은 어찌할 수 없는가…….”
오랜 동지 김옥균의 건강이 악화되어 거동조차 어렵다는 말을 듣고, 이선은 비애의 감정을 느꼈다.
“주말에 고균의 집으로 행차하겠네.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비공식적으로 최소한의 인원만 데리고 갈 터이니, 준비하도록.”
“예, 폐하.”
* * *
일요일에 이선은 차를 타고 김옥균의 북한산 별장을 방문했다. 일부러 한적하고 호젓한 곳에 지은 서양식 저택이었다. 경호원과 어의, 시종만을 대동하고 왔기에 황제의 행차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폐, 폐하! 어찌 이리 누추한 곳에 친히 왕림하셨사옵니까?”
황제의 방문에 김옥균이 깜짝 놀라 문으로 나왔다. 주위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겨우 설 수 있는 모습을 보고, 이선은 내심 안타까움을 느꼈다.
“고균의 건강이 안 좋다고 해서 왔소. 일단 편히 앉읍시다.”
김옥균은 황송해하며 황제를 서양식 소파에 모시고, 맞은편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편안한 소파 놔두고 왜 불편하게 앉는 거요? 편안히 앉으시오.”
“어찌 성상과 마주 보며 앉겠습니까? 노신은 이게 편합니다.”
“허, 관절염 있다는 양반이 최대한 편하게 앉아야지. 나도 늙어 가면서 어깨든 허리든 안 아픈 곳이 없는데, 경은 오죽하겠소? 편하게 앉으시오.”
이선도 오랜 정무의 영향으로 쉰을 넘기자 관절통을 안고 살았고, 기존의 좌식(坐式) 대신 푹신하고 편안한 소파에 앉는 걸 선호했다. 이선의 강권에 김옥균도 소파에 앉았다.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어언 42년이거늘, 경은 어찌 병을 감추려 하오?”
“어찌 신하된 도리로 성상께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늙고 둔한 몸이 말을 듣지 않기는 하오나, 성상께서 염려하실 정도는 아니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김옥균의 늙은 얼굴에는 죽음의 흔적이 어려 있었다.
비쩍 마른 몸에 눈빛만이 형형했다. 마치 대원군의 죽기 직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선은 오랜 동지의 죽음을 직감했다.
“알겠소. 그럼 오늘은 병문안이 아니라, 개화당의 옛 동지로서 모처럼 방문했다고 칩시다. 예전처럼 편하게 이야기합시다.”
죽음을 향해 가는 자신의 병을 드러내길 꺼리는 마음을 이해하고, 이선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지엄하신 군주께 어찌…….”
“내가 그러고 싶소. 허허, 명을 받드시오.”
이선과 김옥균은 군신관계 이전에 같은 길을 걷던 동지였다. 이선의 마음을 이해한 김옥균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갑신경장으로부터 꼭 40년이 되었소. 기념적인 해라고 할 수 있지.”
“실로 그렇사옵니다.”
“4기 10년이 끝나는 시기가 오자, 문득 30년 전에 경에게 했던 말이 떠오릅디다.”
“아아…….”
김옥균도 오래된 기억을 되살렸다.
이선이 보빙사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 개화당과 함께 대대적인 개혁에 나선 갑신경장으로부터 꼭 40년 되는 해였다.
1895년 독립전쟁 승전 이후 김옥균에게 말했던 이선의 국가구상, 갑신경장으로부터 시작된 1기 10년씩 변혁의 시대 4기를 마치고 결산에 이르는 해였다.
「4기 10년에 이르러 진정한 국민의 시대가 꽃을 피울 것이오. 그때쯤 되면, 보통선거와 의회제를 통한 민주정치를 실현할 수가 있겠지.」
문명개화, 자주독립, 식산흥업, 부국강병, 열강입국, 국민국가.
이선의 40년 국가구상은 과연 순조롭게 이뤄졌다. 중간에 위기와 난관이 산적하기는 했지만, 이선의 영도와 국민적 노력으로 마침내 쟁취해 냈다.
1910년대 후반부터 민주개혁을 통해 1920년대에는 진정한 국민국가를 완성한다는 구상도 흔들림 없이 착착 진행 중이었다.
“성상의 영도가 아니었더라면, 대한이 어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경과 같은 신료들의 헌신과, 국민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소.”
김옥균의 찬사에 이선이 손을 내저었다. 칭찬을 받자고 한 말이 아니었다.
“경은 기억하시오? 4기를 마치면 현명한 후속세대에게 뒷일을 맡기겠다고.”
「내게 시간이 허용된다면, 3기에서 4기에 이르는 시기까지는 국가의 중대사를 맡고 싶소. 그동안 현명한 후속세대를 양성해 이후는 이들에게 맡겨야지.」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생생히 기억하옵니다.”
“과연 현명한 후속세대가 등장했소. 짐은 기쁘기 그지없소이다.”
이선이 공약했던 4기가 끝날 시기가 오자, 과연 ‘현명한 후속세대’가 등장하게 되었다.
국민교육을 받고 국민개병을 수행한 1세대, 어릴 적부터 근대적 사고방식을 체화할 수 있었던 국민교육 1세대가 마침내 사회의 주류로 떠오른 시기였다.
현재 가장 유망한 지도자 후보군으로 꼽히는 인재들, 이승만(1875년생), 김구(1876년생), 안창호(1878년생), 김규식(1881년생), 박용만(1881년생), 여운형(1886년생)이 바로 이 세대였다.
각자의 영역에서 모두 높은 평을 받다가 정치에 투신한 인재들이었다.
군인이자 농촌운동가 출신인 김구를 제외하면,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유학을 다녀온 당대 최고의 엘리트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 이승만과 김규식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프린스턴 대학 박사학위 소유자였다.
“하오나 폐하. 노신은 이미 늙고 병들어 이 나라에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만, 폐하께서 은퇴하시기에는 너무나도 이릅니다. 대한에는 폐하의 성지(聖旨)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김옥균은 혹여 이선이 선위하고 은퇴하겠다는 말을 할까 우려하였다. 40년 넘게 국가를 위해 매진해 온 주군이 은퇴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선이 없는 대한제국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하! 올해라도 선위하여 은퇴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선위를 위함이 아니오. 장차 국가의 앞날을 이끌어 나갈 동량(棟梁)을 발굴함에 있어, 내가 생각하는 바를 고균과 의논하기 위함이오.”
이선도 당장 은퇴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노쇠와 부재를 대비하여, 국민을 대표해 이진을 보좌할 후속세대를 염두에 두었다.
“그러시군요. 신이야 이미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몸입니다만, 폐하의 고견을 듣고 싶사옵니다.”
이선은 유망한 인재들을 하나하나 짚기 시작했다.
“능력과 경력만 놓고 보면 우남이 뛰어나긴 하오. 외교관으로든 정치가로든, 능력은 빼어나지. 하지만 지나친 권력욕과 편벽한 성품이 문제요. 추종자가 많은 만큼 적도 많지. 1인자가 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니 불화가 끊이지 않을 수밖에. 총리가 되면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소.”
“신도 우남에게 성품을 고쳐 화합하라고 몇 번 권하였으나, 도통 이야기가 안 통하더군요. 하긴, 우남에게 신은 이미 한 세대 전의 사람이니…….”
현재 가장 유력한 총리 후보는 여당 개화당의 당권을 장악한 이승만이었다. 관동대학살 배상 문제도 해결하면서 더욱 주가가 상승한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무난히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하고 권좌에 오를 터였다.
이선은 자신이 이승만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총리가 된 이승만이 폭주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백범은 우직하고 성실한 인재이지만, 지나치게 완고한 면이 있소. 경찰개혁을 이끄는 내무협판으로서 손색이 없었지만, 현시점에서 1인자가 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오.”
“폐하께서 백범을 차기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신민당에서는 다들 도산을 생각하지 않던가요?”
“나는 전시 지도자로서는 백범만 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오. 물론 지금은 평시이기에 전시 지도자가 당장 필요한 건 아니지만.”
김구에게는 다른 엘리트 정치가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대중에 대한 이해력과, 어떠한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호함과 뚝심이 있었다. 유사시 전시지도자로서는 훌륭한 후보였다. 다만 현재는 주목받는 인물이 아니었고, 그 자신도 대권에 도전할 생각이 없었다.
“도산 이야기가 나왔으니, 도산은 현재 가장 뛰어난 연설가이자 중재에 능한 정치가라 할 수 있소. 다만 우남과는 반대로 너무 신사적인 성품이 문제지.”
“도산은 그야말로 신사지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대로 가다간 신민당조차도 우남에게 빼앗길 위기가 아니오. 좀 더 단호함과 책략을 키울 필요가 있는데.”
안창호는 계몽운동가로서의 경력과 탁월한 연설력으로 높은 대중적 인기를 자랑했고, 여러 정치세력을 조정하는 중재자로서도 능했다. 정당정치 하에서 가장 훌륭한 총리 후보감이었다.
하지만 정치 책략에 있어서는 이승만에게 밀렸다. 이승만이 개화당에 신민당 우파를 끌어들여 정계 개편에 나섰지만, 안창호가 추진하는 반(反)개화당 대연합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헌정의 정도(正道)를 지향하는 안창호와 달리, 이승만은 정치적 계산과 야합에도 능했다. 이러니 실속을 빼앗기는 상황이었다.
“확실히 우남은 외교와 책략에 능하지요. 개화당 초기였어도 큰 역할을 했을 겁니다.”
“솔직히 난 외교관으로서의 능력은 우사를 더 높이 평가하오. 우사는 우남보다 침착하고, 더 대국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소. 장차 대한의 외교를 맡기고 싶은 건 단연 우사요.”
“신도 우사를 가까이 두고 일을 맡겨 보니, 참으로 그 능력이 빼어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선은 김규식을 후속세대 외교관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했다.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 대국적인 시야, 실무능력 모두 뛰어났다. 주청 고등판무관으로서 함께 일했던 김옥균 역시 동의했다.
“문제는 우사에겐 권력의지라는 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지. 우남처럼 권력의지가 지나치게 강한 것도 안 좋지만, 우사처럼 없는 것도 곤란하오.”
김규식에게는 이승만이 갖고 있는, 1인자가 되겠다는 욕망이 없었다. 정치적 조직도 없었고, 본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치를 하겠다는 의사도 없어 보였다. 냉철하게 독야청청하는 학자 스타일이라 대중적인 인기도 없었다.
“결국 우남에게 대적할 만한 후속세대의 인재는 없다고 보시는 건지요.”
“혹자는 우성을 꼽기도 하지.”
“우성이 우남의 대항마가 되기에는…….”
“사상이 너무 급진적이지. 나도 알고 있소.”
이승만의 정적으로 떠오르고 있는 박용만에 대해서라면 이선이 김옥균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급진 우익 행보를 펼치는 박용만의 배후에 이선의 조종이 있다는 건, 개화당을 이끌었던 김옥균도 알지 못했다.
“나는 오히려, 앞으로 정치가로서 대성할 이라면 몽양을 꼽고 싶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