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87화 잠 못 이루는 제국
“몽양은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닌지요? 특히 재작년 모스크바 방문으로 소련과 내통했다는 비난까지 받았는데…….”
김옥균은 이선이 여운형을 높이 평가하는 게 의외다 싶었다. 김옥균 자신도 화술이 뛰어나고 친화력 좋았던 정치가 출신이니만큼, 연설 뛰어나고 사교성 좋은 데다 풍채까지 훌륭한 여운형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사회주의라는 ‘잘못된 길’에 접어든 게 더 아쉬울 따름이었다.
“모스크바 방문은 내가 허락한 거고, 소련과 내통했다는 우익의 비난은 한심하기 짝이 없소. 물론 소련이 우리와 적대적인 관계이긴 하지만, 필요하다면 적하고도 대화는 해야지. 모스크바 회의에 참석한 덕에 코민테른의 아시아 전략에 대해 들어 볼 수 있었던 거 아니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아니겠소?”
“과연 그렇습니다.”
대한제국은 소련을 이념적·지정학적인 적으로 여기고 있지만, 막후에서 대화의 끊은 놓지 않고 있었다. 이선의 명을 받은 주독대사 조한민은 주독소련대사관과 접촉하며 양국관계가 파탄에 이르지 않도록 하고, 정보를 취득했다.
“내가 몽양에게 잠재력이 있다고 보는 건, 사고방식이 유연하기 때문이오. 꽉 막힌 이념 원리주의자들하고는 다르지. 대전쟁과 러시아혁명 이후, 사회주의 세력의 확산은 피할 수 없게 됐소. 당장 독일도 사회민주당이 제1당이고, 저 영국에서도 노동당이 집권했소.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이제 현실이오.”
10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을 변화였다. 10년 전에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독일과 영국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집권했다고 예측할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익에서 흔히 하는 실수인데, 한국어로는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라고 번역되는 세력을 다 하나로 묶어서 좌익 빨갱이라고 지칭하오. 뭘 모르는 소리! 주류 사민주의자들과 코민테른 노선을 따르는 공산주의자들의 차이는 크오. 독일 사민당이 우익과 연정하고, 영국 노동당이 자유당과 손을 잡고 정권을 획득했듯이, 사민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손을 잡는 걸 거리끼지 않소.”
1923년에 출범한 노동사회주의 인터내셔널(LSI, 제2인터내셔널의 후신)에 속한 사민주의 정당들이 파트너로 공산당보다 자유주의 정당을 더 선호한다는 현실이 드러났다. 코민테른은 LSI를 배신자라고 비난했고, LSI는 코민테른을 독재자라고 배격했다.
여운형이 이끄는 대한사회당은 LSI에 가입을 신청했다. 이 또한 우익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됐지만, 코민테른 노선과 달리한다는 걸 분명히 했다.
“산업화가 고도로 진행될수록, 노동계급이 사회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중요한 축이 되리라는 건 피할 수가 없소. 지금은 미미할지라도, 대한도 결국 유럽이나 미국처럼 가게 될 거요. 그러니 노동계급을 체제 내로 끌어들이는 게 중요하지. 사회당이 노동자를 대표해 노동환경의 개선을 이끌고 합법적인 의회투쟁을 한다면, 나는 환영이오.”
“성상께 그런 복안이 있으셨군요.”
김옥균 자신도 프랑스 연대주의를 번역해 국가와 노동계급과의 대타협 가능성을 소개했던 만큼, 다른 개화당 우익처럼 꽉 막힌 사고를 하지 않았다.
“물론 대한의 정치구조상, 사회주의는 독자적 집권이 불가능할 거고,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하겠지. 나쁘지 않소. 앞으로 대위기를 맞아 자본주의는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할 거고, 수정자본주의가 시대적 조류로 떠오를 테니까.”
“대위기라 하오시면, 현재 독일의 경제위기 같은 상황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이선은 대공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지만, 그런 미래를 알지 못하는 김옥균으로서는 최근 유럽의 경제위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으음. 독일 초인플레이션과 유럽의 위기는 당분간 잠잠해지리라 생각하오. 진짜 뇌관은 미국이지. 만약 미국 경제가 흔들린다면, 세계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을 테니까.”
“유럽과 달리 미국은 호황을 누리고 있지 않은지요? 노신이 모르는 위기의 신호라도…….”
“아, 뭐,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오. 아무튼 내가 몽양이 정치가로서 대성할 거라고 하는 건, 지금 당장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한 10년 뒤를 바라보고 하는 말이오. 몽양은 아직 마흔도 안 됐으니까. 젊고 잠재력이 충만하지.”
김옥균의 의문에 이선은 화제를 돌렸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에게 장차 대공황이 만들어 낼 위태로운 세계까지 근심거리로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30대라, 젊군요! 노신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습니다.”
김옥균은 마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듯 기억을 떠올렸다.
“하하, 젊고 활력이 뛰어났지.”
“신과 동지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조선을 뿌리부터 바꾸는 개혁에 돌입했는데, 정력이 넘쳐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암, 남자로서의 정력도 넘쳤지. 그래서 그리도 여러 집 살림을 한 게 아닌가?”
김옥균이 여색을 밝히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본처인 유씨 외에도, 한국인 첩, 주일 공사 시절에 데려온 일본 게이샤까지 세 집 살림을 했다.
본처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외에도, 한국인 첩이 낳은 아들, 일본인이 낳은 1남 1녀가 있었다.
처첩 외에도, 주불공사나 주일공사 시절 내연녀까지 따지면 셀 수 없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이런, 송구하옵니다. 폐하께서 소신의 주책을 용납해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내가 아니라 정경부인에게 송구하고 감읍해야지.”
“부인은 워낙 덕이 지극한 사람이라, 이런 주책을 다 받아 줬지요.”
갑신경장 이후 공식적으로 처첩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관리나 부호들은 첩을 거느리고 살았다. 호적에 올라가지 못한 서자는 본처 자식으로 삼는 형식으로 올렸다.
서재필처럼 미국인 부인과 결혼한 게 아닌 이상, 첩을 두지 않은 고관이 없다시피 했으므로 딱히 흠이 될 게 없는 시대였으나, 김옥균은 유독 복잡한 여자관계로 인해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올랐다.
첩 외에도 주일공사 시절 일본에서 사귀었던 내연녀가 후일 김옥균의 혼외자식이 있다고 소송을 걸어온 적이 있어서, 결국 김옥균이 인정하고 자식을 데려온 적도 있었다.
고위관료로서 처신을 잘못한 국제망신이라고 언론과 야당에서 비난이 쏟아졌지만, 이선은 눈감아 주고 넘어갔다.
「국가를 향한 고균의 공이 크니, 사생활로 탓하고 싶지 않소.」
이선은 사적으로 김옥균을 한 번 질책하였을 뿐, 특별히 문제 삼지 않았다.
김옥균이 여색 밝힌다는 거야 청년 시절부터 유명했고, 그 정도 흠이라면 눈감아 줄 수 있었다.
부정부패나 권력형 성범죄를 저질렀다면 엄단해야 마땅하지만, 자기들끼리 좋다는 건 그러려니 했다.
“의친왕도 여색을 너무 밝혀서 문제야.”
“하하, 의친왕께서도 삶의 활력을 그런 쪽에서 얻으시다 보니.”
의친왕 이강도 어느덧 마흔을 넘어 쉰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정력은 여전하여 이 여인 저 여인에게서 서자를 얻었다. 의친왕비는 분통이 터졌지만, 시대상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이 서자를 다 자신 소생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살았다.
“나이 먹었으면 스스로 자제를 해야지, 제수씨에게 무안해서 말을 못 하겠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옵서 너무 금욕적이신 겁니다.”
김옥균의 말에 이선은 허허 웃었다. 황제에게 이런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김옥균 한 사람뿐이었다.
“허, 내가? 그대들이 욕망을 마음껏 충족하는 게 아니고? 난 늘 황후에게 미안한 감정인데.”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제왕은 수십의 처첩을 거느리는 게 당연한 법도입니다. 하물며 성상과 같이 위대한 업적을…….”
“가당치도 않군. 그게 어느 시대 윤리인가.”
이선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끊었다.
“경도 영국 황태자 건은 알지 않소. 일국의 태자란 사람이 욕망에 따라 추잡하게 굴다가 그 귀결이 뭐요? 나라 망신에 황실 망신이지.”
“아, 그건 좀 심하게 예외적인 경우지요. 국가의 위신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면, 욕망에 충실하다고 무슨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유학에서는 그러한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고 하지 않나? 경이 믿는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하하, 신의 생각은 예전부터 같습니다. 인간이 욕망에 자연스러운 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조선에서 상업을 천대하고 청빈을 절대시한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부를 쌓아 편안함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성인데, 그걸 억눌러 봐야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소신의 집안인 안동 김문도 충신과 학자의 가문이라고 스스로 포장하였지만, 뒤로는 얼마나 탐욕스럽게 재산을 긁어모았습니까. 위선이지요. 신은 젊었을 적부터 모든 제약에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과연 조선의 이단아 김옥균다운 말이었다.
김옥균은 명문가 안동김문 태생에 유학을 익히고 내재화한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위선과 폐단을 통렬히 비판하며 평등과 개화를 주창했다.
유학의 관점에서는 경망스럽기 짝이 없을 정도로 욕망에도 충실했다.
1851년생 김옥균이 17살 아래인, 아니 21세기의 기억도 있는 이선보다 더 파격적인 면모가 있다는 게 역설적이었다.
“신이 감히 아뢰고 싶은 말은, 욕망에 자유로워져라, 뭐 그런 하찮은 말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지난 40년 넘게 이 나라를 위해 신명을 다 바쳐 살아오셨습니다. 신은 폐하의 지근거리에 있었기에 누구보다 잘 압니다.”
김옥균은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께서 촌음(寸陰)을 아껴 가며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지, 나라 걱정에 밤에 잠도 못 이루시는지 압니다. 지금도 그러하시겠지요.”
“경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오. 태자가 대리청정을 한 덕에 일은 확연히 줄어들었소.”
“하오나 여전히 침수(寢睡)에 잘 들지 못하지 않사옵니까?”
이선이 김옥균의 노쇠한 얼굴을 보고 걱정하듯, 김옥균도 이선의 피로한 얼굴을 보고 걱정했다.
“그거야 고질적인 문제지.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 그래도 요새는 예전보다 낫소.”
“과거에는 군주가 잠 못 이룰 정도로 고심해야 백성은 편안히 잠든다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군주도 편안해야 백성도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물은 배를 뒤집기도 한다. 그러므로 군주가 편안하고자 한다면, 정치에 사사로움이 없게 하고 백성을 사랑함보다 나음이 없다.”
이선은 ≪순자(荀子)≫ <왕제편(王制篇)>에 나오는 군주민수(君舟民水)를 인용했다.
“경도 알다시피 나는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지만, 저 구절은 참 좋아하오. 결국 내가 편안하고자 정무에 집중하는 것이오.”
“폐하의 지극하신 마음을 어찌 노신이 모르겠습니까마는…….”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이 구절도 참 좋아하지.”
온몸을 다하여 수고를 다하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멈춘다.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후출사표에 썼다는 구절이다.
“제갈량의 말은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자세이지, 군주가 가질 자세가 아닙니다!”
김옥균이 놀라며 정색했다.
“하하! 청나라 강희제가 저 구절을 인용하자, 신하가 꼭 지금 고균처럼 답했다고 하지. 그래서 강희제가 뭐라 하였는지 아시오?”
“아, 들은 기억이 있사옵니다. 「짐은 하늘을 섬기는 신하니, 어찌 다르겠는가?」”
“그렇소.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며 대제국을 건설한 군주인 강희제조차 그리하였는데, 하물며 약소국의 군주였던 나는 어찌해야겠소?”
김옥균은 새삼 감탄하면서도, 할 말은 해야겠다 싶었다.
“폐하의 업적이 어찌 강희제에 부족하다 하겠습니까? 대청에 강희제가 있다면, 대한에는 광무제가 있다고 역사가 기억할 것입니다.”
“원, 중국사 천고일제(千古一帝, 천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라는 강희제와 나를 어찌 동렬에 비교한단 말이오? 청국에서 들으면 고깝게 생각할걸.”
이선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자신은 ‘미래 지식’을 알기에, 오답을 피하고 정답만을 택할 수 있었기에 이룩한 업적이었다. 그러니 강희제니, 표트르 대제니, 나폴레옹이니 하는 세계사에 길이 남은 명군들과 비견될 때마다 민망했다.
“폐하가 아니었더라면, 이 나라가 단 40년 만에 이 정도로 문명의 진보를 이뤄 낼 수 있었겠습니까? 약소국이었던 나라가 열강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실로 하늘이 내리신 분이십니다!”
“경에게 칭찬받으려고 온 게 아닌데, 자꾸 찬사만 듣는군. 민망하구려.”
김옥균이 아첨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오랜 주군을 향해 진정으로 보내는 찬사임을 알기에 이선의 기분은 유쾌했다.
“신이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지난 40년간의 통치로 조선왕조 500년의 진보에 맞먹는 업적을 이뤄 내셨습니다.”
“그건 선대왕께 공평하지 못한 말이군. 원래 산업화 이후 역사가 빠르게 진보하는 건, 세계사가 증명하는 바이오.”
이선은 역사학도로서 전근대사회의 한계를 인지했고, 전근대의 물적 토대에서 최선을 다한 선조들의 업적을 폄훼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신이 어찌 감히 선대왕의 업적을 폄훼하고자 한 말이겠습니까? 신이 드리고 싶은 말은, 폐하께서는 이미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다대한 업적을 세우셨으니, 마음을 편히 갖고 옥체를 보전하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조선, 아니 한민족 역사상 이렇게 번영했던 시절이 또 어디 있었겠습니까?”
“나도 사람인데, 어찌 내 성과에 만족하며 즐거워하지 않겠소? 어찌 안주하며 쾌락을 즐기고 싶지 않겠소? 하지만 내가 안주하며 하루를 허투루 보내면 국가를 한 발짝 나쁜 방향으로 끌고, 내가 만족하며 쾌락을 충족하면 국민 중 누군가는 불행해질까 봐 두렵소.”
이선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의무감과 두려움이었다. 역사적 사명을 갖고 권력을 잡은 자로서 국가를 부흥하고자 했고,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국가를 위태롭게 할까 봐 두려웠다.
러시아에서 30년 넘게 석유산업에 투자해서 벌어들인 자금을 다시 해외에서 투자하며 벌어들이는 식으로 막대한 내탕금을 굴리고 있지만, 이선이 사사롭게 쓰는 돈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술 마시고, 음악 듣고, 미술품 수집하는데 쓰는 정도였다.
“폐하의 자세는 실로 지극한 성군의 자세와 같습니다. 하오나…….”
김옥균이 자신의 표정을 감추고자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신등은 어리석어 폐하의 넓은 시야를 따라갈 수 없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그렇기 때문에 폐하께옵서도 현명한 후속세대를 양성하여, 그들에게 국가를 맡기고자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김옥균, 아니 그뿐만 아니라 그의 동지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이선이라는 위대한 군주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신하가 아닌지 의심하고 자책했다.
그렇기에 어릴 적부터 근대적 교육을 받은 후속세대에게, 이선 못지않게 김옥균의 기대도 컸다.
“고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나도 알겠소. 오늘날 대한의 번영은, 나 혼자의 업적이 아니라 고균을 포함한 우리 동지들, 우리 국민 모두의 공이오. 그러니 어리석다 말하지 마시오.”
이선은 유일하게 속내를 밝힐 수 있는, 오랜 동지를 향해 말했다.
“나도 언젠가는 경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현명하고 유능한 후계자들을 믿으며 편안히 쉬고 싶구려. 그런데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소. 내가 후속세대를 못 미더워서가 그런 게 아니오. 40년간 노력하며 쌓은 공업인데, 앞으로 10년 더 고생한다면 어떻겠소?”
분명 1924년 현재만 보면, 대한제국은 원역사는 비교대상도 될 수 없고, 세계적으로도 번영하는 위치의 국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선은 마음 편히 잠들 수가 없었다.
이 번영과 호황의 끝에는 대공황이 있고, 대공황의 끝에는 극단주의가 있으며, 극단주의의 끝에는 참혹한 세계대전이 있으리라는 카산드라의 예언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제국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