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89화 외교 문제
“갑자년 원단을 맞이하여, 태후 폐하께 문안 올리옵니다. 만수무강하시옵소서.”
“고맙소, 황상. 새해에도 평안하시고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공식적인 새해 폐현례는 양력 1월 1일에 치렀지만, 음력 설날에도 이선은 황태후를 모시고 가족들과 축연을 열었다.
애초에 이선은 양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되, 음력을 개인적으로 써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고종의 삼년상을 완전히 마치고 맞이하는 첫 설날이니만큼, 분위기는 밝고 화기애애했다.
“올해는 증손녀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게 되니 더욱 기쁘기 한량없는 마음이외다. 태자와 태자비가 노고가 많았소.”
황태후 김씨는 아직 58세에 불과했지만, 법적으로는 증손녀까지 보게 된 증조할머니였다.
제위를 계승할 황실 적통에 혼혈아가 태어났다는 건 여전히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인 황태후는 증손녀의 탄생을 축하했다.
“황공하옵니다, 태후 폐하.”
이진과 타티야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순친왕이 병석에 누웠다던데, 건강은 좀 어떻다고 합니까?”
“날이 춥다 보니 고뿔이 심해졌다 합니다. 그래도 태후께 문안 올리겠다는 걸 소자가 말렸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순친왕은 병치레가 많으니. 나이도 쉰이 넘었으니 더욱 조심해야지요.”
순친왕 이척은 고종의 삼년상을 심상(心喪)으로라도 의무를 마쳤다. 원래도 병약하던 이척은 심상을 치르면서 건강을 해쳤고, 나이 쉰을 넘기면서 자주 병석에 누웠다.
이선은 딱하게 여겨 어의를 창경궁에 보내 이척의 건강을 돌봤다. 다행히도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건강관리를 할 필요는 있었다.
“갑자년 원단을 맞이하여, 태후 폐하께 문안 올리옵니다. 만수무강하시옵소서.”
“고맙네, 의친왕. 그대도 평안하고 강녕하길 바라네.”
의친왕 이강의 문안을 받은 황태후는 문득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의 자식이 몇이지?”
“8남 4녀이옵니다.”
“황실이 번성해서 좋기는 하네만…….”
어쨌든 이강이 서자를 많이 둔 덕에, 손이 귀하던 황실은 뜻밖에도 번성하게 되었다. 이강의 아들들은 대가 끊긴 황실 여러 가문의 양자나 사손(嗣孫)으로 출계(出系)했다. 대표적으로 이우는 흥친왕 이준용의 양자가 되어 운현궁을 계승할 예정이었다.
“친왕으로서의 품위는 지키도록 하게.”
황태후는 에둘러서 이강의 거조를 비판했다. 이강의 나이 어느덧 마흔여덟, 쉰을 바라보는 데도 주색잡기에 능한 한량 생활은 끊이지가 않았다.
“황공하옵니다. 거동에 유의하겠사옵니다.”
의친왕비 김씨는 남편을 흘겼다. 말이라도 못하면 모를까, 예의범절은 깍듯한 신사 그 자체였다.
‘으음, 역시 대사직이라도 내줘야 하나. 할 일이 없으니 더 시일을 낭비하는 거 같군.’
궁내부대신에서 물러난 후, 이강은 명예직인 대한적십자사 회장직을 제외하곤 공식적인 직함 없이 유유자적 시간을 보냈다.
이선은 이강의 주색잡기를 질책하지 않았다.
능력도 충분하고,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여 진보적이며,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해 보겠다는 야망도 있었지만, 황제의 이복동생이라는 이유로 대신들의 견제를 받아 중책은 한 번도 맡지 못했다.
아우의 능력과 충심을 아는 이선으로선 딱하게 여기면서도, 가까운 직계 황족이 정치에 개입하길 원치 않는 대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는 정통성의 문제이자, 근대국가의 원칙 문제였다.
그 타협책이 실권 없는 명예직, 황실 얼굴마담이었다. 광무 23년(1919)까지는 여러 자유주의자·진보주의자들과 교류하기도 하였으나, 흥친왕 이준용이 극우세력의 배후 노릇을 하다 실각한 이후로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교류도 중단했다.
이강은 황형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좌절된 야망은 내심 울분이 되었고, 울분은 주색잡기로 해소했다.
이선은 아우의 울분이 계속 엇나가기 전에, 의미 있는 자리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갑자년 원단을 맞이하여, 태후 폐하께 문안 올리옵니다. 만수무강하시옵소서.”
“고맙네, 영친왕. 그대도 평안하고 강녕하길 바라네.”
친아들의 문안을 받은 황태후는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왕비도 간만이로구나.”
이영 부부는 웨일스공 스캔들이 공개적으로 터지는 바람에, 한동안 연해주에서 계속 머무르다 작년 말에야 귀국했다.
황손의 탄생을 누구보다 고대하던 이서아는 타티야나를 찾아 경하를 올렸다.
“송구하옵니다, 태후 폐하. 제가 부족하여…….”
“영국인들이 무도하였지. 네가 마음고생이 많았겠다.
이서아는 뜻밖이다 싶었다.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넨 건 처음이었다.
‘그 사건’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자, 이서아는 수치심에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남편이 늘 함께 곁에 있으며 사랑하고, 올가 여대공과 유수포프 공작이 친구로서 어울리며 위로했기에 울적한 마음을 풀 수 있었다.
“황공하옵니다.”
“영국인들의 무도함은 잊고, 마음 편히 갖도록 하여라. 여기가 네 새로운 집이 아니더냐.”
“태후 폐하…….”
이서아는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이황가의 완전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느낌이었다.
이영은 어머니의 변화에 기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일전에 태후께 말씀을 올리길 잘했군.’
황태후의 심적 변화는, 이선이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라고 권한 측면도 있었다.
황태후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결국 며느리도, 손자며느리도 모두 아들과 손자가 좋다고 결혼한 여인들이었다. 이제 와서 어깃장을 부려 봐야 속만 좁아 보였고, 머나먼 타국에 와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며느리와 손자며느리에 대해서도 딱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영이야말로 대사로 다시 임명해야겠다. 아무래도 영과 제수씨가 눈치 보지 않고 생활하기에는 서양이 나을 터.’
‘그 사건’이 공개적으로 터지는 바람에, 태자비와 친왕비가 서양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숙덕거리고 있었다.
남녀 간의 문제가 발생하면 무조건 여자의 처신 탓으로 여기는 수구적인 관점도 적잖았고, 귀국한 이서아에게 부담스러운 시선이 쏟아질 터였다.
이선은 막냇동생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영이야말로 능력과 충심이 충분한데, 고종의 적자라는 이유로 대신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10년 넘게 해외에서 머물러야 했고, 오랜만에 돌아온 후에도 자기 잘못도 아닌 스캔들이 터지는 바람에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이영은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충분히 쌓았기에,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외교를 수행할 자격이 충분했다. 이선은 올해 인사이동 때 유럽 대사직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황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기란 쉽지 않구나. 지금 이 자리에도 안은 없으니. 원체 총명하니 공부는 잘하고 있겠지만, 건강히 잘 있겠지.’
이선은 유일하게 이 자리에 없는, 영국에 있는 차남을 생각했다.
이안이야말로 당분간 한국에 돌아오기 어려운 처지였다. 이영처럼 학업을 마치고도 10년 넘게 해외를 떠돌아다녀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되면 얼굴조차 보기 어려워지겠지만, 어쩌면 그게 그 아이에겐 마음 편한 일일지도 모르지.’
차남에게 어울리는 건 한국이 아니라 세계일 수 있었다.
학업을 마친 이안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선은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 * *
대한제국 정친왕 이안은 작년 가을 예정대로 케임브리지대학 킹스칼리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숙부인 이영이 재학했던 곳이자, 현재 영국 정부의 비공식 경제자문을 맡고 있는 케인스의 모교였다.
이안은 킹스칼리지에 진학하여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대학의 열정적인 학구열에 감탄했고, 장차 영국 사회를 이끌어 나갈 엘리트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학생들 상당수가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좌파였다는 점에 놀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왕의 학교’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킹스칼리지는 좌익세가 강했다. 특히 사회과학계열 학과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본산이었다.
과거에 고전철학이 누렸던 권위를 마르크스가 누렸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식과 열정이 교양인의 척도였다.
“가장 선도적인 자본주의 국가이자, 가장 선진적인 노동계급을 보유한 영국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토양이다.”
“옳소!”
1920년대 마르크스주의는 세계적 유행이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식민지 지식인뿐만 아니라, 엘리트 교육을 받은 유럽의 ‘도련님’들에게도 혁명적 열정을 불어넣었다.
이는 대전쟁과 러시아 혁명, 경제위기가 만들어 낸 변화한 사회상의 한 단면이었다.
대전쟁으로 1914년 이전의 세계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무수히 많은 청년이 제국주의 야욕에 죽고, 파괴된 땅과 붕괴한 경제를 물려받았다.
새로운 청년세대는 파국을 자초한 기존 질서에 크나큰 반감을 품고 있었고, 기존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아닌 두 이념에 끌렸다.
바로 왼쪽의 사회주의, 오른쪽의 파시즘이었다.
1924년 영국에도 파시즘 운동은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맹아(萌芽) 단계에 머물러 있는 만큼, 변혁을 원하는 청년들의 관심사는 사회주의에 쏠렸다.
때마침 영국에는 최초의 노동자 정부를 표방하는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만큼,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가 터져 나왔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선포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국가를 해체하지 않는다. 국유화, 자본 과세, 대규모 공공사업은 없다. 우리는 유권자에게 신뢰받는 정당으로서 의무를 다할 것이다.」
다분히 노동당과 손잡은 자유당을 배려한 램지 맥도널드 총리의 발표에, 위기감을 느끼던 우파는 안도감을 느꼈지만 좌파 상당수는 실망감을 느꼈다.
현실적으로 노동당은 제2당이었고, 제3당 자유당의 지지를 얻어 간신히 소수파 정부를 구성한 만큼 온건한 조치는 피할 수가 없었다.
노동당은 조심스럽게 저임금 노동자를 위한 주택법, 연금 수급자와 실업자를 위한 혜택 증가, 교육에 대한 국가보조 확대, 의료 복지제도 확대 등을 추진해 나갔다.
“쳇, 부르주아지 눈치 보느라 게걸음마냥 옆 눈질하며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걸어가는구만.”
급진좌파에서는 맥도널드 내각의 ‘소심함’을 비판하고, 소련에서는 지배계급에 ‘항복’했다고 노골적으로 조롱했지만, 노동당 정부는 권한이 주어진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말세야, 말세. 빨갱이들이 대영제국을 통치하는 날이 오다니.”
“고등교육도 안 받은 사생아가 총리라니! 세계가 비웃을 일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우파는 노동당 정부에 크나큰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귀족과 상류층들은 빈농의 사생아로 태어나 주경야독하며 자수성가한 맥도널드의 신분을 헐뜯었다.
우익 언론 데일리 메일은 매일 노동당과 맥도널드를 비방하는 언설을 쏟아 냈다.
하지만 웨일스공 스캔들 보도로 왕실과 정치권의 큰 분노를 산 상황이라 여론을 선동할 수는 있어도, 현실정치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맥도널드가 온건하다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나? 이게 본심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1924년 2월 1일. 영국 정부는 주요 연합국 중 최초로, 소비에트 연방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고 수교에 나섰다.
보수당은 승인 자체를 격렬히 반대했고, 소비에트 정부와의 무역협상에는 동의했던 자유당도 수교까지는 너무 나가는 것이라고 노동당을 압박했다.
“이게 자유당의 대의라면, 나는 자유당을 탈당하겠소!”
자유당 좌파 일부가 탈당하고 노동당에 합류했듯이, 자유당 우파 중에는 보수당에 합류한 이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로이드조지 내각에서 여러 중책을 맡았던 윈스턴 처칠이 있었다. 강경한 반공주의자인 처칠은 노동당 정부를 추인한 자유당의 당론과 소련 승인에 반발하여 탈당, 보수당에 입당했다.
원래 보수당 출신이었던 처칠은, 자유당을 거쳐 다시 보수당으로 복귀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는 영국 노동당만의 결단이 아니었다.
2월 10일에는 이탈리아 우파 정부도 소비에트 연방을 승인했고, 제정 러시아가 진 막대한 외채를 돌려받지 못한 프랑스조차도 승인 검토에 나섰다.
소비에트 연방의 통치를 무너트리지 못할 바에야, 현실을 인정하고 대화에 나서기 위함이었다.
주요 국가 중 가장 먼저 소련과 수교한 독일이 소련에 밀착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소련과 대화의 여지는 이어 나갈 필요가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 독일과 유럽의 급진화를 막는 게 대영제국 정부의 사명입니다.”
노동당 정부는 프랑스의 루르 점령에 반대하여 조속한 철군과 평화를 촉구했고, 독일의 급진화를 저지하기 위해 배상금 감액을 검토했다.
맥도널드 총리는 미국에 중재자 역할을 부탁했고, 유럽 문제에 개입하길 원하지만 고립주의 여론에 막혀 기회를 노리던 우드 대통령은 중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미 국무부에서는 독일의 배상액을 감소하고, 프랑스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며, 유럽의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을 계획했다.
이처럼, 노동당 정부는 유럽의 평화와 세력균형이라는 19세기 영국의 외교정책을 의외로 충실히 답습하고 있었다.
대영제국, 런던.
정친왕 이안은 주말을 맞아 기차를 타고 런던을 방문, 루이 마운트배튼의 저택에 체류했다.
“안!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죠?”
“잘 지냅니다. 여대공께서도 잘 지내죠?”
“덕분에요.”
루이는 지중해함대로 부임하였고, 임신한 마리야는 런던에 남았다. 아나스타샤는 홀로 남은 언니를 살핀다는 명목으로 계속 런던에 머물렀다.
“아직 부활절 방학도 아닌데, 어쩐 일로 런던에 왔어요?”
크리스마스 방학을 마치고 2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런던에 다시 돌아왔으니, 아나스타샤는 반가우면서도 궁금했다.
‘설마 내가 보고 싶어서?’
“아, 내일 한영친선회 환영회가 있어요. 한국에서 특사가 왔거든요. 그러니 나도 와야죠.”
빈말이라도, ‘보고 싶어서’ 말 같은 건 하지 않는 이안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토라졌지만, 저런 모습도 이안답다 싶어서 금세 마음을 풀었다.
“그래요. 대신 오늘은 우리와 함께 시간 보내는 거예요.”
“아, 저녁에 대사관에서 만찬이 있는데…….”
“그럼 그전까지만 함께해요!”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요. 만찬 같이해요. 대사관에서도 두 분 여대공께서 오시면 좋아할 겁니다.”
“정말요?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마리야와 아나스타샤는 기뻐하며 초대를 받아들였다.
사실 두 자매는 황태자의 처제니, 대사관에서도 귀빈으로 모심이 당연했다.
금년 대한제국 구주특사로 파견된 이는 풍계군의 양자 완평군의 아들인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오랜만에 뵙습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영국은 언제 와도 좋군요.”
대한제국 황족 이재각은 영국에서 공작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이재각은 이선보다 6살 어렸지만, 족보상으로는 고종의 8촌이자 이선의 9촌 아재비였다.
고종의 재종숙(再從叔)인 완평군은 황실 종친의 큰 어른으로서 처신을 잘해 이선에게 존중받았다.
완평군은 3남 재각을 일찌감치 영국으로 유학 보냈고, 이영보다 먼저 황실에서는 최초로 영국 유학생이 되었다.
귀국한 후에는 이선이 발탁하여, 궁내부 종정원경·장례원경·예식원경·시종원경 등을 역임한 끝에 얼마 전 궁내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이재각도 황족이긴 하지만 워낙 촌수가 멀었고, 영국 유학파에 개화당에 친화적이라 별 견제 없이 관료로서 승승장구해 왔다.
데일리메일의 스캔들 보도로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자, 영국 왕실에서는 한국에 비공식적으로 사과를 표명하며 특사를 초청했다.
본래라면 왕실 외교를 담당하는 이영이 유력했겠지만, 스캔들의 당사자이니만큼 갈 수가 없었다.
외무대신 이승만은 궁내대신 이재각을 특사로 적극 추천했다.
영국 유학파인 만큼 친영파였고,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특사로 방문한 이강을 보좌하였고, 조지 5세의 대관식에 특사였던 이영을 보좌했던 만큼 대영외교에는 특화된 인재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황제와 정부의 기대를 받아 영국을 방문한 이재각은, 뜻밖에도 외교 문제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