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201화 비상한 시대를 만나
광무 28년 갑자년 4월 초.
대한제국 3대 총리대신 김옥균은 인천의 별장에서 생애 마지막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저 멀리 제물포항으로 들어오는 선박을 보면서, 김옥균은 곧 손님이 도착하리라 짐작했다.
몇 시간 후, 김옥균을 찾아온 손님은 제5대 총리대신 박영효였다.
“대감, 금릉위 대감께서 오셨습니다.”
“시간 맞춰 오는군. 너무 늦게 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김옥균은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섰다. 약속시간을 맞춰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전에 도착해서 다행이라는 의미라는 건 본인만이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고균 형. 아프다는 소식 듣고 진작 오고 싶었소이다만 이제야 오는구려.”
“춘고 자네는 더 좋아 보이는군. 해외 생활이 체질에 맞나봐?”
5년 만에 만난 두 원로는 반갑게 악수했다.
“하이고, 체질에 맞기는. 다 늙어서 미국 생활하는데 양키들이 퍽이나 반겨 주겠구려. 그나마 자식놈이 있어서 산 거지, 언어부터 음식까지 맞는 건 하나도 없소. 그 망할 금주법 때문에 술도 못 마시고. 차라리 상해가 훨씬 낫더이다.”
“금주법은 웃기긴 하군. 근데 자네 영어 좀 하지 않나? 한때 주영 공사도 지냈으면서.”
“그게 언제적 일이오? 내 나이도 예순넷이오. 젊은 시절하고 같나. 머리고 몸이고 혀고 다 굳었어.”
“하긴, 이래서 늙으면 은퇴해야 해.”
비록 현재는 방향이 달라지긴 했지만, 두 사람은 무려 50년 친구였다.
철종의 사위인 금릉위 박영효가 어린 시절 형 영교를 따라 반남 박문의 어른인 환재 박규수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때, 막 과거에 급제한 김옥균도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당의 시초가 탄생했으니, 실로 오랜 인연이었다.
“정부가 어찌 내 입국을 허락했나 싶었는데, 고균 형이 손을 써 준 거요?”
광무 23년 박영효가 미국으로 쫓겨나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망명자가 아니었기에 출입국에 제한이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상의 국외추방이기에 눈치껏 출입국을 못 하는 것이었다.
다 늙어서 시작된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박영효는, 도쿄와 상해 등지를 떠돌면서 지냈다.
이재에 밝아 모아 둔 재산이 상당했기에 해외에서도 불편함 없이 지냈지만, 늙을수록 고국이 그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침 자네가 상해에 체류 중이기도 해서, 성상께 잘 말씀드렸네. 이제 개화당 창립 동지들도 다 죽고 없지 않나. 죽기 전에 옛 벗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 하니 허락하셨지. 단 정치활동은 일체금지야. 이제 원훈의 시대는 끝났네.”
김옥균의 마지막 부탁을 이선도 흔쾌히 허락했다.
박영효의 정치적 명운은 이미 끝났고, 개화당도 물갈이 된 시점에서 배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여지도 없었다.
하물며 이제 개화당 40년 집권도 끝나 신진정부가 들어선 이상, 박영효가 할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도 없었다.
“이젠 정치는 잊기로 했소. 나를 따르던 이들이 그렇게 죽었는데 무슨 염치로 더 정치판을 기웃거리겠소? 한때는 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렇게 줄을 서던 놈들이 모두 안면몰수 하는 걸 보니 인생무상이지.”
박영효는 권력의 정점에서 실각하면서 인생무상을 느꼈다. 지나간 일이 다 허망할 따름이었다.
“잘 생각했네. 그래도 자넨 아직 한창 아닌가. 인생무상만 곱씹지 말고 긍정적인 일을 찾아보게.”
“가산을 풀어 학교를 창립해 후학을 양성하고 싶구려. 50년 전 환재 대감이 그러셨던 것처럼, 후학 양성을 마지막 사명으로 삼고 싶소.”
“좋은 생각이야. 교육은 언제나 중요하지. 학무대신과 의논해 보게.”
“학무대신이면 위창(葦滄, 오세창의 호)……, 아, 정부가 바뀌었지.”
“지금은 이종일이 학무대신일세.”
“이종일은 진작 개화당을 떠나 진보당으로 갔었지. 그런데 얼마 전에 위창도 진보당으로 갔다면서요? 내 참.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개화당 창설자 죽매 선생의 장남이.”
개화당의 비조(鼻祖) 오경석의 장남이자 학무대신을 역임한 오세창은 얼마 전 개화당을 탈당해 진보당에 입당했다. 여당을 쫓아서가 아니라, 이승만 계파의 독선적인 당 운영방식에 반발하여 탈당했다.
“위창이 개화당에 실망을 많이 했더군. 어차피 정부도 바뀌었는데, 위창이 진보당에 감으로써 과반을 달성했으니 차라리 안정을 위해선 그게 낫네.”
손병희의 설득을 받은 오세창은 진보당에 입당하여 신진정부에 힘을 실어 주었다. 오세창과 그의 계파 의원들이 진보당에 입당하면서 신진정부는 사회당을 포함해 과반을 달성할 수 있었다.
“개화당이 야당이고 전봉준이 총리라. 심지어 사회당이 연립정부와 연대하고. 참 세상이 바뀌어도 크게 바뀌었구려.”
박영효는 혀를 끌끌 찼다. 정치에 관심을 끊으려고 해도, 자신이 만들다시피 한 개화당이 권력을 상실하고 야당이 되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물며 전봉준이 총리고, 그토록 경계했던 사회주의자들이 연립정부와 정견을 함께한다니.
“그게 금번 총선에서 드러난 민의 아니겠나. 그리고 난 새 정부가 전 정부를 계승해서 잘 해내리라고 생각하네. 전봉준이나 안창호나 능력도 있고 충심도 있네.”
“뭐, 미국에서 한 가지 배운 점은 있소. 정부가 주기적으로 교체되어도 국가는 잘 굴러간다는 거지. 우드가 윌슨과 소속 정당은 달라도 대외정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 우드가 아니었더라면 고립주의 성향이 강한 공화당이 국제연맹에나 가입했을지 의문이긴 하오만.”
“그렇지.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윌슨이 별세했다면서.”
“2월이었나. 알고 보니 대통령 임기 중에도 뇌졸중이 심했다더군.”
2월 3일, 미합중국 28대 대통령 윌슨이 뇌졸중으로 별세했다. 향년 67세. 장례는 성대하게 엄수되어,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래, 갈 때가 되면 가는 법이지. 이제 나도 얼마 남지 않았네.”
“그 무슨 소리요. 그리 안 좋소?”
“사실 지금도 기침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다네. 폐가 다 망가졌나 봐. 어의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게 기적이라는 투로 말하더군.”
김옥균은 이선 앞에서는 어떻게든 버텨 냈지만, 폐렴이 악화되어 기침과 호흡곤란에 시달렸다. 말기에 접어들어 오늘내일하는 처지였다.
“아니, 난 그것도 모르고. 그럼 어서 쉬시오. 난 이만 물러나리다.”
“아냐, 내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불렀네. 개화당 동지들 중에선 정말 몇 명 남지 않았지 않나.”
오랜 벗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에, 박영효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오.”
“자네가 내 장례위원장을 맡아 주게. 구당(유길준)에게 묘비명을 부탁했네만, 구당도 오늘내일하는 처지라 큰일은 못 맡겨.”
“고균 형의 마지막 부탁이 장례라니, 이거 참……. 알겠소.”
박영효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장례는 성대하게 할 필요 없네. 무덤도 쓸 필요 없고.”
“아니, 무덤을 안 쓴다면 대체 어쩌시려고?”
박영효가 깜짝 놀라 물었다. 장례는 조선의 전통에서 중요한 풍습이었고, 토장(土葬)은 지극히 당연한 전통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가면 무덤 자리를 두고 산송(山訟)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성상께서 오랫동안 공들여서 산림녹화정책을 하고 있지 않나. 그 성과로 마침내 민둥산이 아닌 푸르른 산천초목을 보게 됐네.”
온돌용 장작으로 쓰기 위한 오랜 목재 남벌(濫伐), 빈농의 화전(火田) 등으로 인해 조선의 산천은 민둥산 천지였다.
이선은 20세기부터 본격적인 산림녹화정책을 실시, 토지개혁으로 화전 빈민들을 산 아래로 보내고, 나무장작을 대신할 석탄개발과 공급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관리와 벌목업자가 결탁한 도벌(盜伐)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1920년대에 이르자, 오랫동안 민둥산이었던 서울과 그 주변에도 산천초목이 푸르게 자라기 시작했다.
“토장은 산림자원을 낭비하고, 산송의 근원이야. 허례허식을 없앨 필요가 있네. 먼저 나부터 모범을 보이겠네. 내 시신은 해부용으로 황성의과대학에 기증할 생각이야.”
“그 무슨……! 총리대신까지 지낸 원훈의 시신을 해부용으로 쓴다고?”
급진 문명개화파였던 박영효조차도 김옥균의 선택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차피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게 육신인데, 후학들 교육용으로 쓴다면 합리적 선택 아닌가. 늙고 병든 몸이라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네만, 허허.”
“그래도 그렇지…….”
“이미 황성대학에 기증을 약속했네. 아들놈 반발이 하도 커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야. 내가 죽고 나면 영진이 그놈이 부친 제대로 모시겠다고 토장할 것 같네. 가뜩이나 서자가 대를 잇는다고 김문에서 쑥덕거릴 터이니, 영진이 입장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네. 그래도 내 오랜 벗에다 총리까지 지낸 자네가 집행한다면 누가 뭐라 하겠나.”
서얼에 대한 신분차별은 일찌감치 폐지되었고, 서자도 가문을 승계하였다.
그럼에도 전통적으로 서자를 대신해 양자를 들여 가문을 계승하게 하는 관습이 남아 있어, 안동김문에서도 김옥균에게 양자들일 것을 권했으나 단칼에 거절했다.
김옥균의 가문은 서자인 영진(英鎭)이 계승할 예정이었다. 김영진은 부친을 따라 정계에 입문하여 민의원 3선 의원이 되었으나, 부친과도 같은 정치적 수완은 없어 평범하게 의정 활동을 했다.
“알겠소……. 형의 뜻이 그렇다면 그리 하리다.”
“해부학교육이 끝나면 불교식으로 화장(火葬)해서, 남은 뼈는 고향 공주의 생가, 북촌 본가, 이 별장에 나눠서 안치하게. 사당을 지을 필요도 없네. 묘비나 하나 세우면 족하네. 묘비명은 구당에게 부탁했으니 이를 토대로 세우면 될 거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시신까지도 ‘합리적’으로 사용하여 새로운 시대에 기여하려는 동지의 선택에 박영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허허, 자네도 눈물이 잦아지는 거 보니 늙긴 늙었군.”
“흥, 늙으면 어쩔 수가 없지.”
“그래도 자넨 오래 살 거야. 살아서 성상께서 만드시는 좋은 세상 끝까지 보고 가게.”
김옥균은 아직 수명이 남은 오랜 벗에게 말했다.
“기억하나? 성상은 하늘이 내리신 분이고, 석조전에 앉아 삼라만상을 다 꿰뚫는 분이라고 했던걸.”
박영효는 20년 전 김옥균이 술에 취해 절규처럼 했던 말을 기억했다.
「성상은 하늘이 내린 분이야. 그건 틀림없네. 석조전 집무실에 앉아서 세상만사를 다 내다보시네. 가끔은 이 세상이 아니라 딴 세상에서 온 사람 같다니까.
……지난 20년간 고민해 봤네만, 이제는 이해하길 포기했네. 아, 그냥 성상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분이구나, 이렇게 생각해야지. 그러니 모든 사안에 있어 저렇게 정확한 예측을 하고, 저 대국의 황제들조차 손바닥 안에 놓고 계산하는구나.」
“기억하지. 그 티베트 승려가 전륜성왕 운운했던 것도 기억나고.”
“근데 참말이네. 성상은 하늘이 내리신 분이야. 정말로 하늘이 내리셨다고. 천명, 부처님의 가피, 신의 섭리. 아무래도 좋네. 정녕 하늘이 이 나라와 만백성을 구원하라고 보내신 분이야!”
김옥균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박영효는 영문을 알지 못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흐흐, 나도 죽음을 앞두고 깨닫게 되었으니, 춘고 자네가 깨닫기엔 너무 일러. 자네도 죽음을 앞에 두면 알게 될 수도 있네. 콜록, 콜록!”
김옥균은 갑자기 모든 힘을 다 쓴 듯, 참아 왔던 기침이 쏟아졌다. 기침에서 피가 섞여져 나오는 걸 보고, 박영효는 깜짝 놀라 의원을 불렀다.
“의원, 지금 당장 의원을 부르게!”
한달음에 달려온 의원은 기침을 쏟아 내는 김옥균에게 모르핀을 놓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었으므로, 고통을 줄여 주는 게 최선이었다.
김옥균은 갑자기 밀려오는 피로에 눈을 감았다.
* * *
기나긴 잠에서 깬 김옥균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별장이었다. 벽면에 걸려 있는 달력은 광무 28년 4월 11일을 가리켰다.
‘그런가. 역시 꿈인가.’
김옥균은 오래전, 나룻배를 타고 제물포에 밀입국하던 시절의 꿈을 꾸었다.
42년 전, 제물포가 작은 포구였던 시절.
한창 세상을 변혁하겠다는 청운의 꿈을 꾸던 젊은 시절.
「어찌하면 구조선을 파괴하고, 신조선을 만들꼬?」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 조선은 적어도 동방의 법국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입버릇처럼 동지들에게 말했으나, 구체적인 해결책은 알지 못했던 시절.
그때, 마치 하늘이 내린 구원자처럼 완화군 이선이 나타났다.
“영진이 게 있느냐?”
“예 아버님.”
김옥균의 아들 김영진이 부친의 병세를 듣고 속히 황성에서 달려와 대기했다.
“날 좀 부축해다오. 의관을 정제하고 싶다.”
“아버님, 이 몸으로 어딜 나가십니까?”
“오늘이 계천기원절 아니냐. 참석은 못 할지언정, 신하된 도리로 행사는 들어야 할 게 아니냐? 마땅히 의관을 갖춰야지.”
“예 알겠습니다.”
별장에는 대례복이 없어, 양복 정장으로 갈아입은 김옥균은 발코니에 앉았다.
“대감, 봄이라지만 아직 바람이 찹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김옥균의 부인 유씨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김옥균은 젊은 시절 첩을 여럿 두었고, 자식 넷이 어머니가 모두 다를 정도였다.
본처 소생의 딸, 첩 소생의 아들, 일본인 첩 소생의 딸, 일본인 내연녀 소생의 아들까지.
사랑 없이 가문에서 정해 준 결혼이오, 첩과 서자를 두는 게 흠이 되지 않는 시대의 사람이라, 유씨 부인은 서자들도 모두 자신 소생으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생애 마지막 순간에, 남편의 곁을 지키는 건 조강지처였다.
“아니오, 부인. 조금 더 있고 싶구려. 곧 손님이 올 예정이오.”
“손님이라니요? 금릉위 대감 오십니까?”
“아니……, 다른 이라오.”
김옥균은 희미한 웃음을 흘리더니, 부인에게 생전에 없던 말을 했다.
“그동안 미안했소, 부인. 가장이랍시고 집에는 없고 허구한 날 밖에만 돌아다니면서 사고만 치고 다녔으니.”
“허 참! 그런 말씀하시는 걸 보니, 늙긴 늙으셨군요.”
“나를 용서해 주시구려, 부인.”
“용서라니요, 대감이 그런 분이라는 건 젊을 때부터 진작 알고 있었지요. 피부는 남자답지 않게 백옥 같고, 말은 청산유수요, 시서예화에 모두 능하니 어찌 여인네가 안 따르겠습니까?”
김옥균의 이름부터가 피부가 옥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화술과 사교력은 조선에서 으뜸간다 하였으며, 시서예화에 능해 김옥균의 글이나 그림을 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허다했다.
바둑 실력도 수준급이라 일본의 바둑 명인 혼인보 슈에이도 감탄할 정도였고, 도박 실력도 뛰어나 외국인들과의 카드 판도 휩쓸 정도였다.
외국에서 공사로 재임할 때에는 현지 여성들과 염문이 뒤따랐으니, 김옥균의 여성편력은 그만큼 복잡했다.
“저도 압니다. 대감은 평범한 사내가 아니고, 비범한 사내라는 걸. 이 나라를 위해 사신 분이라는 걸. 그러니 비범한 삶을 산 것도 받아들여야지요.”
“고맙소, 부인.”
김옥균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행사 시간 동안에는 잠시 혼자 있게 해 주시오.”
“예, 대감. 중계 끝나면 부르십시오.”
「국가의 경축일, 광무 28년 계천기원절 행사를 맞이하여, 황성방송국에서 전합니다. 전국의 국민 여러분 기립해 주십시오.」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김옥균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애국가를 조용히 흥얼거리던 김옥균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정말로, 우리의 황제는 하늘이 보낸 사람이 아니던가!’
「황공하옵게도 황제 폐하께옵서 계천기원절을 맞이하여 지금 환구단에 친림하시고 있습니다. ……」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라디오 중계를 듣던 김옥균은, 그 광경이 훤하게 그려졌다.
비록 그 자리에 없어도,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전파가 되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그런데 앞으로는 화면을 통해 볼 수 있고, 심지어 손안에 작은 화면을 두고 세상만사와 소통한다니.
‘죽어서 혼백이 되어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시대를 보지 못하고 가는 게 한스럽긴 하지만, 이미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룩한 김옥균은 여한이 없었다.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하게 공을 이뤘도다. 더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만세 소리를 들으며, 김옥균은 따라 중얼거렸다.
‘아, 나의 조국 대조선, 대한국이여. 나의 주군이시여. 만세, 만세에 걸쳐 번영하고 성수무강하시라!’
김옥균의 눈에, 27년 전 황제 즉위식이 선하게 떠올랐다. 황제 이선의 곁에 대례복을 입고 서 있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인가!
생애 절정의 순간을 떠올리며, 김옥균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