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203화 유라시아 제국의 꿈
1924년 갑자년. 대몽골 공대(共戴) 13년 5월.
북방의 몽골에서도, 국가의 상징적 인물이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몽골 티베트 불교의 활불(活佛)인 제8대 젭춘담바 후툭투, 재건된 대몽골국의 초대 칸 복드 칸.
몽골의 종교지도자인 동시에 세속지도자인 복드 칸은 죽음, 아니 ‘환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티베트 불교 승려들, 몽골 왕공들, 군사독재자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모두 젬춘담바 후툭투이자 칸의 환생에 대비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몽골의 주군인 대청 황제 외에도, 국경을 접한 중화민국, 소비에트 연방, 그리고 대한제국에서도 몽골 정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몽골국 수도 우르가(후레, 울란바토르).
복드 칸의 어의인 한국인 이태준은 우르가 주재 한국 영사관으로 들어갔다.
우르가에서 무소불위 군사독재를 감행하고 있는 운게른-슈테른베르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구역이었다.
“오셨습니까, 영사님.”
“예, 본국에 전할 소식이 있습니다. 칸께서 위독하십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번 달을 넘기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이태준은 작년에 우르가 주재 영사에 임명됐다. 의사가 외교관직을 맡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이태준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한 대한제국 정부의 방책이었다.
“이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외무협판께서 곧 우르가에 오실 예정입니다. 익문사에서도 작전을 세우는 중입니다.”
“다행입니다. 신속히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이태준은 칸의 어의이자, 한국 영사인 동시에, 제국익문사의 몽골 현지요원이기도 했다.
이제 결단이 필요한 시기였다.
* * *
1921년 운게른의 ‘북벌’, 이른바 ‘반공 성전(聖戰)’이 실패로 끝난 이후에도, 운게른은 성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빼돌린 금괴 10톤을 아낌없이 써 가며 용병들을 대거 고용했고, 돈이라면 어디든 개의치 않는 중국 소(小)군벌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백군 내 권력다툼에서 패배한 잔당들도 몽골로 향해 돈과 모험을 기대했다.
“우리는 위대한 칭기즈칸의 후예, 황금군단이다! 대칸의 황금군단 용사들이여! 그대들은 700년 전 칭기즈칸과 바투칸이 그러하였듯, 서쪽으로 달려가 적들을 짓밟고 베어야 한다. 칭기즈칸의 대몽골을 재건하고, 사악한 범죄자 볼셰비키를 타도하고 로마노프 왕조를 복원해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할 사명이 그대들에게 있다!”
“와아아아아!”
운게른의 아시아 기마사단은 ‘칸의 황금군단’을 자칭하기에 이르렀고, 초원 최강의 무력을 소유했다.
호쇼이 친왕이자 칸의 신하로서 운게른은 복드 칸의 권위를 존중했지만, 실권(實權)은 무력을 가진 운게른과 군대의 몫이었다.
자연히 몽골인들 사이에서 운게른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칸으로부터 호쇼이 친왕의 직함을 받고, 티베트 불교로 개종해 몽골 귀족 행세를 해도, 운게른은 결국 러시아인 군벌일 뿐이었다. 그것도 정신상태가 기이한 군벌이었다.
통치자로서의 운게른은 무엇보다 군사력 강화에 집착했다. 몽골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을 물렸고, 유목민들에게 징병제를 적용해 의무적으로 군대 복무를 강요했다. 군대에 입대하는 기병은 스스로 무장과 말을 확보해야 했다.
“몽골 인민이여! 미치광이 러시아인 압제자를 몰아내고, 진정한 몽골 독립을 이룩하자!”
1922년. 마침내 몽골인들은 불만이 폭발했고, 담딘 수흐바타르가 이끄는 좌익 인민혁명당 적위군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몽골 북부에서 운게른 군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몽골인들은 여전히 복드 칸에게 충성했지만, 민심은 점점 인민혁명당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운게른의 군대를 중국과 청국으로부터의 독립 지렛대라고 생각했던 복드 칸과 왕공들도,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통제되지 않는 군벌 운게른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건, 명목상 주군인 대청국과 청국을 보호하는 대한제국도 마찬가지였다.
1923년 복드 칸은 어의 이태준을 통해 한국과 비밀리에 접촉했고, 왕공들과 함께 운게른을 몰아내는 친위 쿠데타를 기도했다.
운게른을 격파할 무력을 갖춘 만주군이나 주청 한국군의 진주를 청원하는 건 몽골의 독립에 위험부담이 너무 컸으므로 기각되었다.
하지만 칸과 왕공들이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은 한정적이었고, 친위 쿠데타 기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운게른의 군단은 결국 돈으로 모인 용병들이니 매수를 시도해 보았으나, 그 과정에서 정보가 새고 말았던 것이다.
“대칸! 몽골의 왕공이란 자들이, 칸으로부터 친왕 작위를 받고 몽골 독립과 대몽골 재건을 위해 투쟁한 나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보나 마나 외세에 빌붙으려고 한 반역자들이겠지요? 몽골의 반역자, 이 배은망덕한 놈들의 머리를 베어 칸에게 바칩니다!”
운게른은 친위 쿠데타에 가담한 왕공들의 목을 잘라 칸에게 ‘바쳤다.’
복드 칸은 공포와 혐오, 분노와 치욕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운게른이 비록 폭압적인 군벌이라고는 하지만, 외국인이라는 한계는 인지하고 있었다. 결국 그 권력은 칸의 권위로부터 나온 것이니, 겁박하긴 해도 위해는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분노의 광기가 잠잠해진 건 아니었다. 쿠데타 모의에 가담한 왕공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그 일족 중 성년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만들었다.
“칸과 왕공 놈들이 겁도 없이 스스로 일을 꾸몄을 리는 없다. 분명히 뒷배를 두려고 했을 터. 아마도 청국이나 한국이 있겠지.”
운게른은 칸의 어의인 이태준을 의심했고, 그 추측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태준은 칸의 어의일뿐더러, 의료 수준이 열악한 몽골에 와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했기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몽골인의 큰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운게른은 눈엣가시인 이태준을 제거하고 싶어 했다.
쿠데타 실패를 확인한 한국 외무부는 부랴부랴 이태준을 우르가 주재 영사로 임명해 신변보호에 나섰다.
대한제국 외교관을 건드리면 전쟁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분노의 광기를 내뿜던 운게른도 한국 앞에서는 분노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 도대체 어째서냐! 한국 황제는 왜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갖고도 무시하는 거냐! 대러시아의 차르, 몽골의 칸, 만주의 한,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한국의 황제가 힘을 합쳐 유라시아에 위대한 제국을 재건해야 하거늘! 어째서 로마노프 왕조의 정통을 보호하고 있으면서도, 차르 복위를 미적거리는가? 하물며 유라시아 제국의 선봉에 설 나를 왜 제거하려고 든단 말인가?!”
운게른은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망각한 이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노를 참지 못하며 하늘을 향해 권총을 쏘았다.
“그래, 한국도 보통선거를 허용하고 의회제를 실시하지? 그리고 그놈들은 소련과 화해할 생각에 여념이 없고. 역시 민주주의 정부란 빨갱이들이다! 동양까지 빨갱이들이 지배하게 될 줄이야!”
극도의 반공주의자이자 중세적 전제주의자인 운게른에게 있어 보통선거와 의회제는 곧 공산주의나 소비에트와 다를 바 없는 폭거였다.
“콜차크와 브랑겔은 극동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왜 제정복고를 선포하지 않는단 말인가! 차르는 신이 내려 주신 존재인데, 인민의 동의와 추대가 대체 왜 필요해?”
운게른의 분노는 옛 백군 동료들에게도 향했다.
아무르 정부 수반인 콜차크 제독과 총사령관 브랑겔 장군 모두 제정복고에 선을 그었다. 한국 정부의 압력도 있었지만, 아무르 정부 지도부도 제정복고는 시기상조라고 여기고 있었다.
‘전러시아 인민의 동의와 추대’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제정복고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하아, 온 세상이 구역질 나는 빨갱이다…….”
보통선거와 의회제가 유럽에 이어 러시아를 타락시켰고, 마지막 남은 전제군주제의 보루인 동양까지 잠식하려 하고 있었다.
최후의 ‘야만 전사’, 운게른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 *
「우리는 이름,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이름, 사랑스럽고 존경받는 이름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이름은 단 하나뿐입니다 -
러시아의 제위계승자, 전러시아의 정당한 소유자이신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 러시아를 파괴하고 더럽히는 사악한 범죄자들과의 싸움에서, 오직 사형이라는 단 하나의 처벌 수단만이 있습니다.
정의의 오래된 기초는 변경되었습니다. 이제 ‘진리와 자비’는 없습니다. ‘진실과 무자비한 엄격함’만이 존재해야 합니다. 인간 영혼의 신성한 원리를 파괴하기 위해 지상에 온 악은 뿌리째 뽑혀야 합니다.
러시아의 위대한 애국자들, 몽골의 위대한 전사들은 거대한 악과의 성전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성전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분은 오직 한 분,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십니다.
신의 은총을 받아, 전러시아의 차르이신 알렉세이 2세 만세!」
1924년 4월.
운게른은 우르가에서 제멋대로 ‘젬스키 소보르 (Zemsky sobor)’를 소집했다.
젬스키 소보르는 16-17세기 러시아의 전국 신분대표자 회의로, 차르의 자문역과 입법기구를 맡았다. 17세기 초 대동란의 시기에는 차르 선출의 역할도 맡아,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로 선출하였다. 바로 로마노프 왕조의 기원이었다.
중세적 전제주의자인 운게른에게 있어, 만약 차르를 ‘선출’해야 한다면 그건 젬스키 소보르의 방식이어야 했다.
1921년 아무르 반소 쿠데타를 주도했으나, 극렬 왕당파로 찍혀 만주로 추방당한 디테히리스 중장이 운게른의 초청을 받아 젬스키 소보르를 이끌었다.
하지만 운게른의 초청을 받아들인 백계 망명자들은 극히 드물었다. 제정복고를 꿈꾸는 왕당파들이 보기에도, 운게른은 기이한 이질적 분자이자 대표성 없는 군벌일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운게른과 디테히리스는 일방적으로 러시아제국의 복원과 ‘알렉세이 2세’ 즉위를 선포했다.
러시아제국의 복원을 러시아 영토도 아닌 몽골의 한복판에서 선포하는 일도 코미디였지만, 당사자인 운게른은 진지했다.
“태평양에서 카스피해까지, 대몽골제국의 상속자는 하얀 칸, 즉 차르다. 차르는 대칸을 계승하여 유라시아 제민족의 통일을 이끌어 냈다. 재건될 유라시아의 지배자도 오직 차르만이 될 수 있다. 대러시아-몽골 연합제국이 유라시아의 새로운 미래다.”
운게른은 티베트-신강-내외몽골-부랴트-연해주-만주-화북을 잇는,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을 모델로 한 내륙제국을 구상했다.
이를 기반으로 ‘혁명의 원천’인 서방에 대항하여, 전제군주제의 ‘십자군’을 이끄는 꿈을 꿨다.
그 제국의 기초는 군주제를 되찾아야 할 ‘백인’ 유럽인들과 전제군주제의 오래된 전통을 잃지 않은 ‘황인’ 아시아인들의 백황연합이었다.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활력이 있는 아시아인들이야말로 유럽을 영적으로 인도할 의무가 있었고, 유럽인은 군사력으로 아시아인을 원조할 의무가 있었다.
몽골의 친왕이 되어 티베트 불교를 따르면서도, 몽골 장포 위에 러시아 장성 계급장을 달고 카자크 군도와 권총을 찬 운게른의 외관은 이를 상징했다.
로마노프 왕조의 정통 후계자인 알렉세이 2세는 차르이자 하얀 칸으로서 제국을 통치하고, 달라이 라마는 차르를 축성(祝聖)하며, 몽골의 칸과 만주의 한은 차르의 왼팔이자 오른팔이 되며, 차르의 벗이었으며 로마노프 왕조와 혈연으로 연결된 한국 황제는 차르의 보호자이자 전륜성왕이 되어야 한다.
유라시아는 재건된 러시아의 차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몽골의 칸, 만주의 한, 한국의 황제가 연합한 ‘고귀한 제국’이어야 했다.
‘또 너냐…….’
운게른의 제국 재건 선포를 보고받은 이선은 황당하다 못해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 원래 이렇게 광인이었나, 아니면 역사의 변화로 미치광이가 된 건가? 내가 니콜라이에게 속닥거렸던 말들이 도르지예프와 바드마예프를 거쳐 운게른에게까지 전달된 건가?’
이선이 니콜라이를 꼬드기고자 했던 말들, 유라시아의 천명이니 하얀 칸이니 했던 말들을 티베트 승려 도르지예프와 사이비 의사 바드마예프는 진심으로 믿었다.
이들은 백군 내에서도 이질적 분자들이었던 세묘노프와 운게른에게 ‘유라시아의 천명’을 전달했다. 부랴트인 혼혈 카자크 세묘노프는 그렇다 쳐도, 독일계 러시아 귀족인 운게른까지 자신이 천명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운게른에게는 야속하게도 이선은 철저히 그를 무시했지만, 여전히 운게른은 이선이 ‘전륜성왕’임을 깨닫고 그 의무를 다하길 바랐다.
‘이 자식, 안 되겠어.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이선은 가급적 몽골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다. 거리가 너무나 멀고, 교통도 극도로 열악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와는 기나긴 국경을 마주하고, 인구도 희박한 지역에까지 과잉팽창을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광활한 만주와 연해주를 지배하고 관리하기도 버거운데, 몽골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만주군이나 한국군을 몽골까지 파병하는 건 정치적·경제적·군사적으로 모두 부담이 큰 사안이었고, 그렇기에 이선은 몽골의 자체적 안정을 기대해 왔다.
하지만 복드 칸과 왕공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이제 대안을 찾아야 했다.
복드 칸이 서거하면 몽골은 구심점을 잃고, 칸의 권위를 빌려 무력으로 지배하는 섭정 운게른의 통치는 한계에 부딪힐 터였다.
그렇기에 운게른은 최후의 발악으로, 백군의 구심점을 이끌어 보자고 일방적인 제정복고를 선언한 것이었다.
“우사. 경이 이 문제에 대해선 국내에서 가장 전문가라고 생각하는데. 복드 칸 사후에 운게른을 제거하면 대안이 있을까?”
이선은 신임 외무대신 김규식과 의논했다. 김규식은 한동안 우르가 영사로 재임했었고, 주청 판무관으로서 관여했기에 몽골 문제에 가장 정통했다.
“칸의 사후에는 후임자를 선출해야 하는데, 오직 활불의 환생을 통한 계승만이 있기에, 후계가 성인이 되려면 최소 15년에서 20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즉, 몽골인들을 하나로 묶는 종교적 권위는 사라진다는 말이지요.”
달라이 라마와 마찬가지로 젬춘담바 후툭투 역시 ‘환생’을 통해 계승한다. 환생한 소년이 성장할 때까지 섭정위원회가 대리해서 통치하는데, 현재는 운게른이 섭정을 자처하면서 통치를 계속 이어 나갈 가능성이 컸다. 그럼 몽골인은 더욱 반발할 터였다.
“운게른을 제거하더라도, 몽골 왕공들이 인심을 잃었다는 게 문제입니다. 다만 현재 내몽골에는 칭기즈칸의 30대손이자 덕왕(德王)이라 불리는 친왕 데므치그돈로브가 정통 황금씨족을 자처하며 운게른의 통치에 맞서고 있습니다.”
몽골은 현재 크게 보면 세 세력으로 나뉘어, 북부의 몽골 인민혁명당, 중부의 운게른 군벌, 남부 내몽골의 데므치그돈로브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덕왕? 아직 젊지 않나? 올해 나이가 몇 살이지?”
“스물셋입니다.”
“너무 어리군. 나이는 둘째 치고, 외몽골 할하인과 내몽골 차하르인의 반목은 대대로 심하지 않나. 몽골의 통치자로 내세우기엔 적당한 인물이 아니야.”
청나라의 몽골 정복 이래, 아니 그 이전부터 외몽골 할하인과 내몽골 차하르인의 갈등과 반목은 심각했다. 몽골이 독립하고 통일한 현재에도 마찬가지였다. 할하인은 차하르인의 통치를 받느니 차라리 인민혁명당이 집권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그나마 덕왕은 젊어서 좀 낫습니다만, 몽골 왕공들은 대부분 시대착오적인 봉건주의자입니다. 인민혁명당이 민중의 인기를 끄는 건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아뢰건대, 인민혁명당을 이용해 운게른을 제거하는 건 어떨지요?”
김규식의 제안에 이선은 흥미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