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207화 붉은 황녀
광무 28년 봄. 대한제국 예성공주 이라는 생애 첫 유럽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어머니 마르가리타와 함께 오라비 이안을 만날 목적으로 간 유럽이었지만, 이라에게는 황궁을 떠나 유럽에 방문한 그 자체로 기뻤다.
마르가리타가 은밀히 외교적 임무를 병행하는 동안, 이라는 크리스마스 방학을 맞이한 이안과 함께 유럽을 여행 다녔다.
하얀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 백인의 유전자가 더 많이 발현되어 혼혈이 드문 한국에서는 이질적인 존재였지만, 유럽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동양의 공주’로 알려진 이라의 신분은 유럽 상류사회에서 환영받았고, 특히 젊은 남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공주님, 함께 춤을 추는 영광을 누려도 되겠습니까?”
“저는 춤을 잘 못 춰서…….”
“괜찮습니다. 제가 가르쳐 드리지요.”
“미안해요. 제 조국의 예법은 엄격해서, 미혼 여성이 초면의 남성과 춤을 추는 건 용인하기 어려운 일이랍니다.”
이라는 들뜨는 기분을 가라앉히고, 처신을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자신은 대한제국 황제의 여식이었다. 혹여 본국에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은 피해야 했다.
더욱이 서녀에 혼혈인 자신을 마뜩잖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이라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 처신을 똑바로 못하면, 어머니 마르가리타와 오라비 이안에게 대신 비난이 쏟아질 터였다.
“이봐, 동양에서는 함부로 황실 여인을 건드렸다가 목이 날아갈 수가 있어. 조심하라고.”
“에이, 설마…….”
“오리엔탈 스캔들을 벌써 잊었어? 웨일스 공이 한국 친왕비를 잘못 건드렸다가 난리가 났었잖아.”
“그건 유부녀라서 문제가 된 거 아닌가?”
“결혼 안 했어도 문제지. 하물며 황제의 딸이라고. 조심해.”
동양의 엄격하고 보수적인 예법에 대해선 서양에서도 소문이 퍼져 있었으므로, 이라에게 감히 구애하는 청년은 없었다.
“네가 처신을 잘 하고 있구나. 지구 반대편에도 눈과 귀가 달려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해.”
“설마 부황께서 우리를 감시한단 말이야?”
“부황은 그럴 분이 아니시지만, 여기에도 대한의 외교관과 정보원, 유학생과 교민들이 있어. 우린 어딜 가나 주목받는 존재잖아. 처신을 조심할 수밖에.”
이안은 좋든 싫든 황위계승서열 3위이니, 더욱더 처신을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오라버니에게 여기 사람들 관심이 많이 쏟아졌을 텐데.”
“그래서 더 조심하고 있다.”
이안에게도 영국 귀족과 상류층, 특히 결혼 연령대의 여식을 둔 이들의 관심이 쏟아졌지만, 오리엔탈 스캔들이 터진 이후로는 더욱 교류를 자제했다.
오직 케임브리지에서 학업에 집중하며, 종종 주말을 맞아 런던에 있는 마리야-아나스타샤 자매의 집을 방문하는 게 전부였다.
“오라버니, 이제 스물셋이잖아. 결혼은 어떻게 생각해?”
여동생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안은 마시던 차를 쏟을 뻔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나야 학업 마치기 전에는 전혀 생각 없지.”
“아나스타샤가 계속 영국에 머무는 건, 마리야가 아니라 오라버니 때문이라고 생각해.”
이라는 진작부터 아나스타샤가 오라비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나도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왜? 뭐가 문제인데?”
“타티야나 여대공이 황태자비가 된 시점에서, 나와 아나스타샤가 이어질 수는 없는 거야.”
겹사돈의 문제를 떠나서, 자신이 황태자비의 여동생과 결혼하려 한다면, 가뜩이나 황실의 국제결혼과 혼혈을 마뜩잖게 여기는 이들이 어떻게 여기겠는가?
설령 자신이나 아나스타샤는 영국에서 돌아가지 않는다고 쳐도, 계속 한국에서 살아가야 할 타티야나와 그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태도를 확실하게 해. 오라버니가 확답을 안 주니까 아나스타샤도 계속 기다리는 거잖아.”
“언젠가는 그래야지.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너무 여리고 감정 기복이 심해서, 크게 상처받을까 봐 말을 못 하겠어.”
인간관계에 있어 맺고 끊음이 단호한 이안도, 아나스타샤에게는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었다.
사랑을 거절하기는 해야겠지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너도 이제 나이 스물 아니냐. 남자인 나보단 네가 더 결혼 압박이 더 강할 텐데, 너야말로 어떡할 거야?”
이안은 화제를 동생에게 돌렸다. 이라의 나이 만 18세이자 세는 나이로 스물, 당대의 결혼 적령기가 지나고 있었다.
“아직 기다려도 돼. 예경 언니도 스물넷에 결혼했는걸.”
“예경공주는 황태자의 국혼 후에 혼례를 치르겠다는 특별한 경우였고. 넌 그럴 명분도 없어.”
“나도 오라버니 결혼한 다음에 한다고 하면 되잖아.”
“그건 이유가 안 돼. 내가 황태자 전하랑 같아?”
“아니, 내 결혼에 부황도 아니고 왜 오라버니가 성화야?”
“어머니에게 들었어. 알렉세이 대공하고 청나라 황제가 연적이 됐다면서.”
이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곧 평정을 되찾았다.
“알료샤는 좋은 사람이야. 정말로 안타깝고 동정심이 들어. 그가 아프지 않고 오래 살았으면 하고, 언제나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나스타샤와 알렉세이의 공통점은, 혁명 이후에 고립되어 이성이라고는 보지 못하다가 몇 년을 함께 지낸 이안-이라 남매에게서 호감과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더욱이 이들은 생명의 은인이자 ‘구원자’였으니, 감정이 특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라버니와 같은 이유로 안 돼.”
“그래, 잘 생각했다.”
역시 평생 이성이라고는 제대로 만나 본 적 없는 이라도 알렉세이를 특별하게 여기기는 했으나, 불치병인 혈우병 환자인 알렉세이와 결혼한다는 건 부황이 허락할 일이 아니었다.
아니, 알렉세이 스스로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래 살지 못하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결혼을 청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청나라 황제는, 부황께서는 사위로 삼고 싶으신 모양인데……. 이미 만주 귀족 여인과 약혼을 했어. 그쪽 황실이 얼마나 보수적인데, 황제의 뜻대로 해 주게 할 거 같아?”
서구식 교육을 받은 선통제 부의는 상당히 진보적이고 개방적이었으나, 아직 어린 부의로서는 황실 어른들의 뜻을 거역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황실의 뜻대로 만주 고위귀족인 곽포라(郭布羅) 가문의 여식인 완용(婉容, 완룽)과 약혼했다.
완용도 미국 여성 가정 교사를 통해 영어와 신식학문을 익혔으므로 새 황후로서 부족함이 없었지만, 부의로서는 못내 아쉬움이 남는 결정이었다.
“무엇보다 나도 사양이야. 케케묵은 황실에 내 인생을 바치고 싶진 않아.”
“나도 네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면 좋겠어. 황실이 아니면 어때?”
“응, 오라버니도.”
자유로운 성격의 이라로서는, 청나라 궁중으로 들어가 장식품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대청국 황후라는 지위가, 자신의 인생을 바쳐 가며 얻고 싶은 지위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라는 모르고 있었다.
한국 황제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 일로 혹여 불이익을 당할까 우려하고 있는 만주 황실이, 부의 대신 아우 부걸(溥傑, 푸제)의 한국 유학과 공주와의 약혼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열여덟 살인 부걸과 국혼 대상이 될 수 있는 건, 스물인 이라와 갓 열세 살이 된 이금이었다.
* * *
이라는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어머니와 오라비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했다.
1924년 현재, 도나우 연방은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으로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다.
대(大)합스부르크제국은 알프스의 소국으로 전락했지만, 빈의 사회적 활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노동계급의 압도적인 지지로 빈 시정을 장악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의욕을 갖고 추진하는, ‘붉은 빈(Rotes Wien)’ 프로젝트가 한창이었다.
모스크바와는 다른 방향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추진하는 빈은, 그동안 억압받고 천대받던 노동계급을 위하여 다양한 시정개선을 추구했다.
공공주택을 대거 건설하여 노동자들에게 안정적인 주거공간을 제공하였고, 불결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던 노동자들의 생활 여건은 확연히 개선되었다.
사회부조와 복지가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어린이에 대한 교육, 급식, 보건, 의료 시스템을 확립하여, 대전쟁 전과 비교하면 영아사망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성과를 이뤄 냈다.
정치경제적 위기 속에서 이러한 성과를 얻어 낸 건, 물론 귀족과 유산계급에 대한 대대적인 증세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러시아식 재산몰수는 없었지만, 기존 토지에 대한 토지세와 부동산세를 크게 올리고, 사치세와 소득 누진세를 올려 재원을 확보했다.
당연히 귀족과 유산계급은 반발했지만, 민주선거를 통해 다수당을 유지하는 사민당은 확고하게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이러한 정책을 뒷받침하는 건, 참으로 놀랍게도 합스부르크 황실의 일원이자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장손녀인 엘리자베트 마리아(Elisabeth Maria) 여대공이었다.
“어서 오세요. 화제의 동양 왕자님과 공주님이 내 저택을 방문해 주어 영광입니다.”
아름다운 귀부인이 마르가리타와 이안, 이라 남매를 맞이했다. 바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손녀, 비운의 황태자 루돌프의 외동딸인 엘리자베트였다.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엘리자베트 황후의 이름을 딴 손녀답게,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했다.
“저희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여대공 전하.”
“아, 전하라는 호칭은 안 붙여도 돼요. 얼마 전에 황족 신분을 공식적으로 포기했거든요.”
“그, 그렇다고 저희가 부인이라고 호칭할 수는…….”
이안이 당혹스러워하자, 엘리자베트는 빙긋 웃으면서 마르가리타에게 말했다.
“얀코프스카 여사, 나를 페츠넥 여사라고 부르세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페츠넥 동지로부터 여사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 그이가요? 별로 좋은 소리는 안 했을 거 같은데. 아직 황족의 허영심을 버리지 못한 사이비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지 않던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여사에 대한 진심 어린 존경과 사랑을 느꼈습니다.”
엘리자베트는 1921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여 세간을 경악시켰다. 황실, 그것도 황제의 직계 황족이 사회주의자가 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세상은 엘리자베트를 ‘붉은 황녀(Rote Erzherzogin)’라고 불렀다.
1883년생인 엘리자베트는 본래 독일 카이저의 황태자 빌헬름과 국혼이 논의되었으나, 1902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뜻을 거스르고 오스트리아 귀족인 오토 추 빈디시-그래츠(Otto zu Windisch-Graetz)와 결혼했다.
오토는 황족이 아니라 엄격한 보수주의자인 프란츠 요제프는 반대했지만, 결국 손녀의 뜻을 꺾지 못하고 결혼을 허락했다.
부부는 네 자식을 두었으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멀어졌고, 상호불륜과 질투로 점철되었다. 성격이 만만찮은 엘리자베트는 남편의 불륜 상대였던 오페라 가수를 공개적으로 뺨을 때린 적도 있었다.
파국에 이른 부부 관계는, 이혼에 결사반대하던 프란츠 요제프 사후에 별거로 귀결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빈에는 가난하고 굶주린 아이들이 넘쳐났어요. 제국정부는 속수무책이었죠. 카를 황제께서 황실 토지를 기부한다고 선언할 때, 나 역시 저택을 제외한 모든 토지를 내놓았어요. 아이들이 채소와 과일을 심어서 수확하도록 했죠. 그러다 자연히 사회민주당 어린이 구호조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거기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됐죠.”
전후의 참혹한 현실과 빈부격차에 충격을 받은 엘리자베트는, 확신에 찬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사회민주당 조직에서 레오폴드 페츠넥(Leopold Petznek)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 또한 세간의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페츠넥은 주의회 의원이긴 하지만 평민, 그것도 자수성가한 고아 출신이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결혼에서 알 수 있듯이 자국 귀족조차도 신분이 낮다고 여기는 합스부르크 황실에서, 황녀와 사회주의자 평민의 결혼은 경악 그 자체였다.
허울뿐인 남편과 이혼을 결심한 엘리자베트는 황실에 이혼을 청원했지만, 이혼을 엄금한 가톨릭교회의 압력을 받은 카를 1세는 육촌누이의 청원을 거부했다.
결국 자식 양육권을 두고 법정 공방이 이어졌고, 법원은 부친의 손을 들어 주었으나 네 자식들은 모두 어머니와 함께 살기를 희망했다.
마침내 법원 집행인과 경찰들이 저택에 들어섰을 때, 사회민주당 노동자들이 집행을 가로막았다. 결국 판사도 강제집행을 철회하고, 자식들은 원하는 대로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었다.
“이제는 황제의 손녀란 허울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아요. 난 오스트리아 시민 엘리자베트지, 합스부르크 여대공이 아닙니다.”
1924년 법원은 법적 별거를 승인했다. 하지만 교회의 결사적인 반대로 재혼은 불가능했다. 그러자 엘리자베트는 공식적으로 황족 지위를 포기하는 걸로 응수했다. 황족 지위를 포기하면, 교회법이 아니라 세속법이 우선이었다.
가톨릭과 보수우익은 엘리자베트에게 온갖 비난을 쏟아 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엘리자베트는 사회민주당 집회와 행진에서 언제나 페츠넥과 함께했고, 노동자들로부터 크나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특히 엘리자베트가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여성과 아이들 사이에서 ‘붉은 황녀’는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다.
“훌륭하십니다, 여사. 여사는 여성 동지들의 모범이세요.”
“모범이라고 할 게 뭐가 있나요. 옛 계급의 마지막 세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그동안 내가 누렸던 부와 특권이 모두 인민의 희생 위에서 만들어진 건데. 진작 깨닫지 못한 게 부끄러울 따름이죠.”
본래 폴란드 사회당 출신인 전직 사회주의자 마르가리타는 엘리자베트에게 경의를 표하자, 전직 황녀는 겸연쩍은 듯 웃었다.
“정말 멋지세요, 전하! 아니, 여사!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사는 여사가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사회주의나 정치에 대해 전혀 관심 없었던 이라도, 엘리자베트의 인생 역정에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 이라는 동경의 눈빛으로 엘리자베트를 바라보았다.
“하하, 이국의 공주님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쁘네요.”
“저도 황제의 딸이기 전에 한 명의 사람입니다. 이번에 처음 황궁을 벗어나 유럽에 오면서, 시야가 크게 넓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의 경험은 여사를 뵙고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황실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정해진 틀에서 살라는 법은 없죠.”
이안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이라를 쳐다보았다.
‘쟤가 설마……?’
“지금은 돌아가야 하지만, 언젠가 빈으로 다시 돌아와 여사를 돕고 싶습니다.”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그런데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든 허락을 받아 낼 거예요!”
“하긴, 딸 이기는 부친은 없죠. 난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기억에도 없지만……. 할아버지도 내 뜻을 이긴 적이 없었죠.”
엘리자베트가 황실의 이단아가 된 건,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한 아버지 루돌프의 영향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엘리자베트는, 아버지를 우울증과 자살로 몰아넣은 합스부르크 황실과 귀족사회의 시대착오적인 보수성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 라 좀 말려 보세요. 쟨 지금 자기가 뭔 이야기 하는 걸지도 모를걸요!”
“놔두려무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이야기는 하겠다마는, 모든 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 거야. 라의 인생은 라가 사는 거니까.”
전직 혁명가의 피를 타고 흘러서인가, 갑작스러운 여동생의 돌변에 이안은 놀랐다.
이안이 어머니를 향해 빠르게 속삭였지만, 마르가리타는 미소를 짓고 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어머니는 원래 자신에게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유럽을 방문한 이후의 이라는, 예전의 이라하고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