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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 3부-216화 (773/812)

3부 212화 동양평화론

운게른이 자신만의 전쟁과 모험을 벌이는 동안, 몽골에는 체제 변혁이 이루어졌다.

왕공과 승려들로 구성된 섭정위원회가 신정부를 구성해 인민혁명당과 교섭에 나섰지만, 섭정위원회를 진심으로 따르는 몽골인은 거의 없었다.

“그동안 미치광이 러시아 놈과 한패가 돼서 착취한 놈들이…….”

“인민혁명군이 어서 우르가로 와서 저놈들도 날려 버렸으면 좋겠네.”

7월말, 인민혁명군의 선발부대가 우르가에 당도했다.

군사력과 민심을 모두 얻지 못한 섭정위원회는 저항을 포기하고, 젬춘담바 후툭투의 ‘환생’과 자신들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항복 의사를 타진했다.

수흐바타르는 몽골인의 종교인 티베트 불교의 종교적 상징성을 인정하고, 왕공과 승려들의 안전을 보전해 주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들였다.

더욱이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왕공과 승려들에게는 새 인민정부에서 직책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몽골 인민혁명군 만세!”

“수흐바타르 장군 만세!”

인민혁명군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유유히 우르가에 입성했다.

우르가의 해방자, 32세의 청년 지도자 담딘 수흐바타르가 몽골의 최고 권력에 도달했다.

약탈행위는 엄금되었고, 특히 우르가에 주재하는 외교공관에 대한 존중이 이뤄졌다.

“임시인민정부는 몽골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선언하며, 세계의 주권국들과 동등한 외교관계를 맺기 희망합니다.”

“몽골 독립 만세!”

새 인민정부가 코민테른의 도움을 크게 받은 이상 친소 사회주의 정부가 되리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으나, 소련에 종속된 위성국이 되지 않으리라는 의사 표현이었다.

17세기 청나라의 정복 이래, 오랫동안 사라졌던 몽골인의 독립국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대한제국은 몽골의 자주독립과 신정부 수립을 축하합니다.”

임시 우르가 주재 영사를 맡고 있는 외무협판 이위종이 수흐바타르를 만나 축하를 전했다.

수흐바타르는 임시정부의 국방인민위원을 맡아 군권만 장악하고, 의외로 수상과 주요 각료들은 운게른에 부역하지 않은 민족주의 성향의 왕공과 승려들로 구성했다.

당대 몽골의 문해율은 절망적인 수준이라, 귀족과 승려가 아니면 복잡한 몽골 문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렇기에 몽골 문자를 로마자로 개혁하려는 주장이 이어졌다.

행정은 기존 지배층을 재활용했지만, 군권과 핵심 요직은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했다. 코민테른의 아시아 전략에 따른 ‘사회주의와 진보적 민족주의의 동맹인 인민민주주의’ 단계였다.

“감사합니다. 몽골은 귀국뿐만 아니라 청국과도 외교관계를 계속 이어 나가길 바랍니다. 몽골인의 벗인 이태준 의사를 다시 파견해 주길 희망합니다.”

수흐바타르는 옛 종주국인 청국과, 소련의 적대국인 한국과도 좋은 관계를 맺기를 희망했다.

신생 몽골이 자주독립을 유지하는 길은 소련과 한국 사이의 완충국이었다. 지나치게 소련에 기울어지면 위성국으로 전락할 것이니, 적당한 균형을 필요로 했다.

소련은 인민혁명당이 권력을 잡도록 원조하면서도, 유목국가인 몽골보다는 ‘중국 혁명’으로 향하는 기지를 건설하길 원했다. 그러므로 몽골 내정에는 지나치게 간섭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입니다. 양국 관계는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이태준 의사는 언제든 다시 파견하겠습니다.”

한국도 외몽골이 완충국으로서 균형을 유지하길 바랐다. 극동 공화국은 명목만 완충국이지 소련의 위성국이었지만, 몽골은 소련과 한국 간의 완충국이 될 수 있었다.

20세기의 냉철한 국제정치를 이해하지 못한, 아니 이해할 생각도 없었던 중세전사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은 티베트를 향한 최후의 모험에 나섰다.

하지만 애초에 그건 불가능한 망상이었다. 몽골-러시아 국경에서 투바와 신강을 넘어 티베트까지 단기필마로 간다는 건 너무나 멀고 험난한 길이었다.

변변찮은 물과 식량도 챙기지 못한 운게른은 눈에 보이는 부랴트 유목민의 게르를 약탈해 가며, 대책 없이 서쪽으로 나아갔다.

분노한 유목민들은 추격대를 조직했고, 극동 인민혁명군 기병대와 함께 추격에 나섰다.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던 9월의 어느 날, 마침내 추격대는 미치광이 남작을 따라잡았다.

“볼셰비키 앞잡이들이 왔느냐! 오냐, 전사의 싸움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로만 표도로비치 운게른! 반드시 재판에 세워야 한다는 명령이다! 생포하라!”

“운게른-슈테른베르크다! 천한 것들, 귀족의 성은 똑바로 불러라! 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 러시아 육군 중장, 몽골 호쇼이 친왕은 독일기사단의 후예이자, 바투칸의 후예다!”

작위와 명예에 대한 집착에, 추격대는 같잖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외세의 후원을 받아 소비에트에 대한 침략을 저지른 죄, 전시 민간인에 대한 잔인한 학살을 저지른 죄, 정착지를 파괴하고 약탈, 방화, 강간을 저지른 죄로 인민혁명군은 너를 체포한다!”

정치장교의 외침에 운게른이 코웃음을 쳤다.

“우리 가문에서 72명의 선조가 러시아를 위해 전장에서 싸우다 죽었다! 재판? 같잖은 소리! 너희 천한 노동자, 농민, 목동 따위가 감히 귀족을 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빨갱이 1천 명을 죽인 게 죄라고? 100만 명을 죽이지 못한 게 유감이다! 네놈들이라도 모조리 죽여 주마!”

부상을 제대로 치료조차 못 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초췌한 꼴인데도, 운게른은 광신적인 용력을 보이며 추격대를 베어 넘겼다. 사브르를 휘두를 때마다 피와 살점이 튀겼다.

“저, 저 미친 반동 놈. 생포는 포기한다! 인민의 적 운게른을 사살한다!”

탕! 탕! 탕!

아무리 검술에 능해도, 근거리에서 쏟아지는 총알을 피할 수 있는 장사는 없었다. 운게른은 총탄을 맞고 말 위에서 떨어졌다.

“더, 더러운 빨갱이 새끼들……. 천하고 무식한 반역자 놈들이 세상을 찬탈해……. 네놈들의 씨를 말려 세상을 정화해야 하는데…….”

운게른은 피를 토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하늘의 뜻이라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찌하여 위대한 차르와 용맹스러운 전사들의 시대는 사라지고, 천하고 무식한 노동자와 농민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천명을 받은 동양의 군주는 세계의 붕괴에도 어찌하여 비겁하게 숨어 있는가? 반역자 빨갱이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 세상을 정화해야 하지 않는가? 위대한 군주들의 세계를 다시 재건해야 하지 않는가?

“인민의 적을 처단한다.”

탕!

최후의 총성 한 발과 함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은 모험의 종지부를 찍었다. 나이 겨우 38세였다.

13세기 칭기즈칸의 시대, 아니 16세기 이반 4세의 시대만 되어도 용맹을 떨쳤을 전사가 되었을지도 몰랐으나, 중세의 정신을 갖고 20세기를 살려고 했던 시대착오적 인간이었다.

전장에서 광신적 용기를 보이기는 했으나 현대전에 대한 이해는 없었고,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해가 없었다.

운게른에게 인민이란 고귀한 혈통을 타고 난 주인의 명령을 받아 복종해야 할 노예, 언제든지 죽어도 아깝지 않을 소모적 존재였다.

그러니 20세기에 어찌 시대착오적인 모험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 * *

대한제국 서경 평양부.

새 몽골 정부의 수립과 운게른의 죽음은 멀리 이선에게도 보고되었다.

“눈치 없는 놈. 완충국 역할을 이해했다면 계속 권좌에 앉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승전 가망성도 없는 전쟁을 계속 도발하니 내버려 둘 수가 있나.”

이선은 운게른의 몽골이 소련을 막는 방벽이자 완충국 역할에 만족한다면, 정통성 없는 군사독재라고 해도 내버려 둘 용의가 있었다.

아무르의 콜차크와 브랑겔도 소련과 일전을 벌이고 싶지만, 자신들의 한계를 인지하고 반소 완충국 역할에 만족하지 않는가.

하지만 운게른은 시대착오적 망상에 빠져 끊임없이 전쟁을 도발했고, 그 전쟁에 전륜성왕의 의무랍시고 한국을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소련과 적대할지언정 전쟁을 할 생각이 없는 이선으로선 혀를 찰 일이었다.

“꼴 보기 싫은 놈들하고도 겉으로는 웃으면서 이익을 논하는 게 근대국가인데, 그걸 이해 못 하면 죽어야지.”

이선의 대소 정책은 ‘적대적 공생’이었다. 소련의 존재와 위협이 한국의 북방 진출과 세력권 확대를 정당화했지만, 그렇다고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약 ‘붉은 위협’이 없었다면, 열강은 한국의 북방 진출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적잖은 대가를 요구했을 것이다. 소련 덕에 만주 장악, 연해주 개입, 위성 정권 수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납득시킬 수 있었다.

만약 러시아제국이 살아남았더라도, 한국이 아무리 우호국이라 할지라도 내몽골-만주-연해주 장악을 용인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소련의 존재가 어찌 기특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혁명과 전쟁만 도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남의 방책이 유효했네. 앞으로 만몽 문제에 대해서 경의 지모를 믿지.”

“황공하옵니다, 폐하!”

간만에 황제로부터 칭찬을 받은 이승만은, 기쁨을 느끼며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에게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권좌로 복귀할 지름길이었다.

“청 황실과 조정은 몽골의 독립과 인민정부 수립에 불만을 갖고 있지만, 구태여 소련과 대립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가 분명합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역적 중화민국을 주적으로 여기고 있으니까요.”

“자금성과 황릉 관할권만 되찾아오면, 청 황실은 만족하겠지?”

“청 황실의 최우선 목표지요.”

“북경을 통치하고 있는 오패부를 설득하고 있네. 오패부는 부패한 군벌들과 달라 설득하기 쉽지 않지만, 적어도 남경의 단기서를 격파해야겠다는 일념은 있으니.”

이선은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우리가 몽골에서 운게른을 저버리고 인민정부 수립을 용인한 건, 현지 민의에 충실하다는 명분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네. 몽골은 중요한 선례가 될 걸세.”

“실로 그렇습니다.”

“작금은 이념의 시대. 우리도 아시아 친구들을 설득할 적당한 이념을 개발할 필요가 있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모두 훌륭하지만 동양인들은 서방의 유산이라고 생각하니까. 윌슨식 민족자결주의만으로는 코민테른을 상대하기가 어려워. 파리 강화조약에서 윌슨주의 한계가 명백히 드러났으니. 아시아 약소국과 식민지 인민들 입장에선 코민테른의 민족자결주의가 훨씬 솔깃하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대한은 명분싸움에서 계속 코민테른에게 밀릴 걸세.”

이선의 지적에 김규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윌슨의 충실한 제자를 자처하는 이승만도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시아주의를 내세우자니, 일본색이 너무 많이 묻었어. 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색이 너무 강하네. 대한에서는 고균의 삼화주의가 있었지만, 이제는 의미가 없어졌고. 단재가 주창하는 대발해주의는 어떨까.”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건 망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주인과 몽골인은 차치하고, 대한인들이 어찌 받아들이겠습니까? 서양 열강도 팽창을 정당화하는 범국민주의의 아류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승만은 신채호가 주창하는 대발해주의에 반감을 드러냈다.

“음. 짐은 단재의 진심을 믿지만, 일리가 있는 지적이야.”

신채호는 진정한 의미의 ‘북방 민족의 평등과 협화’를 주창했지만, 팽창주의자들에게 악용될 여지가 충분했다.

“짐은 안중근 정장에게 유럽의 최근 통합 구상을 조사하고 연구해 보라고 했네.”

“폐하, 군인보다는 외교관이 맡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승만의 우려에 이선이 씩 웃었다.

“아니, 안 정장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야. 젊었을 때부터 이 문제에 매우 관심이 많았거든. 의화단 전쟁과 북경 전투 시절부터 말이야. 아무튼 올해 귀국하여 보고서를 올렸네.”

대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소비에트 연방과 코민테른의 위협 속에서 ‘유럽의 단결’을 촉구하는 이념이 등장했다.

그 동기는 반공·반소적 측면이 강했지만, 동시에 반군국주의적이자 평화주의이기도 했다. 대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국가 간의 단결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스트리아의 리하르트 폰 쿠덴호베-칼레르기(Richard von Coudenhove-Kalergi) 백작이었다.

오스트리아 외교관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쿠덴호베-칼레르기는 인종차별에 반대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다문화적 분위기에서 자라 배타적 정신도 없었다. 그의 아내는 유대인이었다.

쿠덴호베-칼레르기는 1923년 ≪범유럽(Pan-Europa) 선언≫을 발표하고, 국제시민조직 범유럽연합(Paneuropean Union)을 결성했다. 범유럽연합의 4대 가치는 ‘자유주의, 기독교, 사회적 책임, 범유럽주의’였다.

범유럽주의는 유럽의 진보적인 자유주의자와 평화주의자들 사이에서 호응을 받아, 프랑스 총리 아리스타드 브리앙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저명한 학자와 예술가들에게도 지지를 받아,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토마스 만 등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범유럽연합 구상은 대전쟁의 상흔과 상호증오가 남은 유럽에서 조소를 받기 일쑤였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선은 그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최초의 유럽연합 운동이지. 유럽이 정말로 통합될 줄 누가 알았겠나. 뭐, 2차 세계대전이라는 또 한 번의 참사를 저지른 뒤에야 현실화되지만…….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례지.’

폴란드에서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동유럽판 연방 계획이라 할 수 있는 ‘미엔지모제(Międzymorze, Intermarium)’, 즉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연방을 주창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세르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대연합.

서쪽의 독일과 동쪽의 러시아에 맞서, 중동부유럽의 여러 약소민족이 단결하여 ‘제3의 유럽’이자 유럽의 균형추가 되자는 구상이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진지하게 미엔지모제 구상을 추진했지만, 폴란드의 팽창주의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다 보니 주변국의 불신이 강했고, 무엇보다 각국 간의 갈등과 영토분쟁이 워낙 심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구상이었다.

이선은 안중근이 오랫동안 고심하여 작성한 동양 평화론과 동아연합 구상을 검토하였다.

대한제국이 주도하는 동아연합의 첫 구성원은 대청국, 아무르 정부, 내몽골 자치정부가 될 것이다.

1. 청국령이나 대한제국이 조차하고 있는 여순에 연합기구를 설치한다.

2. 대한제국, 대청국, 아무르는 국제연맹의 보증을 받아, 상호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 관계를 맺는다.

3. 대한제국, 대청국, 아무르는 외국의 침략에 맞서 공동으로 안보를 협력한다.

4. 대한제국, 대청국, 아무르는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동화폐를 사용한다.

5. 대청국과 아무르는 대한제국의 지도 아래 경제개발에 힘쓴다.

연합에는 동아시아 모든 국가에 문호가 개방되어 있으며, 기존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가입할 수 있다. 즉, 중국과 일본도 가입 가능하다.

안중근의 구상은 실로 장대하고 이상적이었다.

주권존중, 국제기구를 통한 협력, 집단안보와 경제적 통합.

후대의 역사를 알고 있는 이선은 이와 매우 유사한 유럽연합(EU)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등장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러한 미래지식이 없는 안중근이 이러한 구상을 그렸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만 대한이 통합을 주창하면, 범유럽보다는 미엔지모제에 더 가까워야지. 소련과 중국,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아시아의 균형추. 몽골이나 신강은 받아 줄 여지가 있지. 일본이나 중국은 가입을 원치도 않겠지만, 가입하는 순간 균형이 깨지는 거야.’

이선은 범아시아주의의 이상보다는 대한제국의 국익을 위한 블록 형성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한국 3천만, 만주 2천만, 연해주와 내몽골을 합쳐서 250만.

근래 급증하는 인구 증가율을 따져 보면, 1930년대 후반에는 약 7천만의 통합 정치·경제권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일본의 해양제국을 능가하는 아시아 최강의 블록을 구축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동양평화론 구상 자체는 채택과 발전 여지를 두었다.

제국주의적 영토 침탈과 이권 강탈이 아닌, 대전쟁 이후의 새로운 트렌드인 범국가연합의 형태로 간다면, 훨씬 세련된 형태로 국익을 추구할 수 있다.

이선은 이를 어떻게 하면 현지인에게 더 솔깃한 이념으로 추구할 수 있을지, 연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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