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213화 왕도의 간성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집필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실로 오래전의 일이었다.
광무 4년(1900) 의화단전쟁 당시, 안중근은 주청 공사관의 무관으로서 의화단 폭도들로부터 공사관 구역을 방어했다.
9개국 연합군의 진격으로 공사관 구역은 해방되었고, 의화단은 범죄의 대가를 치렀다.
의화단전쟁은 한국인들에게 있어, 과거에 ‘문명의 근원’으로 숭상했던 나라가 얼마나 밑바닥까지 떨어졌는지 보여 주는 계기였다.
인식의 대전환이 일어났다. 이제 중국은 문명의 근원이 아니라 미개한 야만의 나라였다.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안중근은 중국의 몰락을 지켜보며 반면교사로 삼았다. 어쩌다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물론 의화단 같은 사이비집단과 손을 잡고 서양인에 대한 공격을 묵인한 청조의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서양은 잘못이 없었단 말인가?
북경에는 ‘해방군’의 약탈과 난행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명색이 정규군이라는 데도 그러했다.
근본적으로, 서양 제국주의는 아편전쟁 이래 청국에 부당한 불평등조약을 강요해 왔다. 애초에 아편 밀매를 자유무역의 명분으로 삼는 추악한 전쟁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타국의 백성들을 아편중독자로 만들어 버린 전쟁에 무슨 정당성이 있는가? 조계지에서 원주민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다.
중국인들이 반(反)서양으로 기울어지는 건, 서양의 자업자득이다.
안중근은 가톨릭 신자로서, 의화단이 기독교인들에게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인들이 중국, 아니 세계만방에서 저지른 각종 패악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럽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자신이 겪은 인종차별은 차치하고, 유럽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저지른 만행을 듣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특히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질렀다는 끔찍한 만행은 유럽인들조차 경악했으니, 안중근이 받은 충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군인이기에 정치적 신념을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니진 않았지만, 안중근은 확고한 반(反)제국주의자가 되었다. 아시아인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영웅이 되면서, 안중근은 언젠가 동양이 단결하여 서양을 앞지르는 날을 상상했다.
파병군 사령관으로서 러시아혁명의 현장에 있었고, 페트로그라드 전투에서 분전해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민족자결주의를 외친 파리강화회의의 현장에도 있었고, 강화조약의 후속처리를 위한 위원도 역임하면서 안중근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서양 제국주의자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민족자결주의는 순전히 유럽인들만을 위한 정치적 수사가 아닌가! 승전국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치도 없고, 오히려 패전국의 식민지만 위임통치령이랍시고 갈라 먹지 않는가. 국제연맹의 인종평등규약에 대해서는 반대하면서, 무슨 세계평화를 운운한단 말이냐?’
기실 대한제국도 서양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질서에서 이익을 누리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안중근은 그 모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직은 대한의 힘이 미약하기에, 서양 열강이 주도하는 질서를 거역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양의 주구가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 우리 또한 자주독립을 위해 분투하던 약소국이 아니었던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힘이 강해졌다고 약소민족의 위에서 군림하려 든다면 패망의 지름길이다.’
안중근은 김옥균이 주창하던 삼화주의나 신채호가 주창하는 북방주의에 공감했다. 동양의 평화와 단결을 원했다.
이제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 안중근은, 25년간 복무했던 군직에서 전역할 의사를 드러냈다. 남은 생애는 한국이 약소국에서 열강이 된 것처럼, 동양의 약소민족들을 한국처럼 이끄는 데 보태야겠다고 결심했다.
안중근과 부쩍 가깝게 된 신채호 역시 전역과 정계 진출을 권했다. 딱히 권력에 야심이 없는 안중근이었지만, 군인으로서 정치적 발언을 할 수는 없으니,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려면 정치보다 좋은 수단이 없었다.
“경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짐도 짐작하네. 짐은 경의 사상을 존중하고. 하지만 경이 계속 국가를 위해서 일을 해 줬으면 좋겠군. 경이 구상하는 동양의 미래에 대해서 작성해서 제출하게.”
이선은 친히 안중근의 전역원을 반려하고, 동양평화론에 대한 구상을 독려했다.
“위국헌신은 군인의 본분이니, 마땅히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고자 합니다. 하오나 신이 무관의 신분으로 어찌 국가대사에 관여하겠습니까?”
“구상은 누구든 자유지. 경의 구상을 논의하고 채택하는 건 정부가 할 일이고. 근래 유럽의 사례를 참조하여 경의 구상을 밝혀 보도록.”
그리하여, 안중근은 자신의 구상을 현실적으로 변주한 광무 28년 판 동양평화론을 황제에게 바쳤다.
한국이 주도하는 연합에 청국과 아무르 정부가 합류한 형태였으나,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 전역에 연합을 확대하는 게 목표였다.
“경의 제안은 매우 흥미롭군. 차분히 검토해 보겠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 구상이 밝혀지면 단연 관심을 보일 이는 광동의 손문이겠군. 손문은 진작부터 아시아의 단결을 촉구하고 있으니.”
현실적인 문제로 국공합작과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손문의 정치적 목표는 삼민주의와 아시아주의 실현이었다.
“손문이 올해 안에 방한할 예정이야. 손문에게 이 구상을 전달하지.”
“황공하옵니다, 폐하!”
안중근은 이선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선은 내심 가슴이 뭉클했다.
‘안중근이 살아남아 동양평화론의 구상을 펼칠 수 있다니. 대한이 살아남았기에 가능한 일이로군.’
이상을 추구하려면, 결국 현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새로운 대한제국은 변화한 현실 위에 굳건히 존재했다.
* * *
기실 이선은 아시아주의나 ‘아시아의 단결’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하물며 중국이 단결해서는 더욱 곤란했다.
하지만 정치적 명분으로는 얼마든지 써먹을 생각이 있었다. 정치에서 명분은 중요하고, 특히 중국은 예로부터 대의명분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국민당의 군사력은 군벌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도, 손문은 ‘걸어 다니는 대의명분’ 그 자체였기에 여러 세력이 제휴를 원하는 게 아니겠는가.
“광동의 손문과 북경의 오패부가 단기서 타도를 목표로 손을 잡으려 하고 있네. 그렇다면 소련이 나서기 전에 우리가 주선을 해 주는 게 좋겠지.”
“오패부가 공산당을 싫어하는 건 명확해 보입니다. 하지만 서로 손을 잡지 않으면 안휘군벌을 무찌를 수 없을 테니까요. 우리의 제안에 응할 겁니다.”
김규식은 손문과 오패부 사이에서 줄을 놓고 있었다. 국민당이 소련의 후원을 받고, 안휘군벌은 일본의 후원을 받는 상황이라, 오패부는 결국 한국의 후원을 받는 게 유일한 선택지라는 걸 자각했다.
“단기서가 대한을 주적으로 여기는 이상, 권좌에서 끌어내릴 필요가 있네. 오패부가 청조에 대한 생각을 유연하게 바꾼다면, 단기서보단 낫겠지.”
오패부(우페이푸)는 청조 시기 과거에 급제한 수재 출신의 군벌로, 이로 인해 ‘유장(儒將)’이라고 불렸다.
철저한 애국주의자에, 중국 군벌들 사이에 흔해빠진 사치·여자·아편을 일체 하지 않는 청렴한 군인이라 오히려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오패부가 자금성 점령을 주도한 것도 청 황실 복고 시도에 대한 반감의 표시였지, 다른 군벌들이 약탈을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동안 오패부는 중요한 보물들을 확보하여 국고에 환수했다.
개인적으로는 청렴한 단기서는, 안직전쟁 승리 후에 다른 직계군벌들에게는 처벌과 은퇴를 강요했지만 오패부만큼은 높이 평가해 사령관직을 유지하게 한 것이었다.
오패부를 높이 평가하는 건 손문과 국민당, 심지어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이 국공합작을 시도하기 전 손문과 오패부의 합작을 시도한 이유였다.
중화민국 13년 가을.
한국의 주선으로 손문과 오패부 사이에서 서한이 오고 가던 끝에 마침내 손-오동맹이 성사되었다.
손문은 단순히 단기서와 안휘군벌 타도가 목적이 아니라, 향후 중국을 삼민주의 원칙에 충실한 민주공화국으로 만들자고 주장했다.
오패부는 구체적인 정치협상을 하고 싶다면서, 손문을 직접 북경으로 초대했다.
“대원수! 이건 함정입니다! 군벌을 어찌 믿고 북경까지 간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오패부더러 광동으로 오라고 하십시오!”
국민당 지도부는 손문의 북상을 반대했다.
하지만 손문의 뜻은 확고했다. 근래 건강이 악화된 손문은 생애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고 있었다. 국공합작에 이어 직례군벌까지 끌어들여 안휘군벌에 맞선 포위망을 건설한 후, 북벌에 나설 계획이었다.
“오패부는 명예를 중시하니, 협잡이나 부릴 위인이 아니오. 한국이 나를 국빈으로 초청하였으니, 오패부가 판을 엎어 버리면 한국까지 적으로 돌리는 셈이니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없소. 한국과도 논의할 사항이 있으니, 먼저 한국을 방문한 후에 북경으로 갈 것이오.”
* * *
광무 28년, 민국 13년 11월. 대한제국 인천.
중화민국 호법정부 육해군 대원수 겸 국무총리 손문은 상해를 거쳐 대한제국을 방문했다.
대한제국은 손문을 국빈으로 초청했고, 북경에서 실시될 정치협상의 안전을 보장했다.
“어서 오십시오, 총리. 대한은 총리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접반사를 맡은 외무대신 김규식과 해군 정장 안중근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태극기와 청천백일기가 게양된 항구에서, 대한제국 해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은 손문은 기뻐하며 화답했다.
“귀국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계 각국은 남경의 북양정부를 정통으로 인정했기에 호법정부는 국제적 승인을 받은 바가 없었지만, 한국은 손문을 국가원수의 예우로 맞이했다.
한국도 공식적으로는 북양정부를 인정하나, 실질적으로는 호법정부가 중화민국의 정통을 대표하는 정부라고 알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4월에 김옥균이 별세하였을 때, 주변국에서는 즉시 조문단을 보내 조의를 표했다.
북양정부와 호법정부에서도 경쟁적으로 조문단을 보냈는데, 호법정부는 2인자인 송교인이 직접 조문을 왔다. 신해혁명 이전, 송교인이 김옥균에게 혁명의 지원을 받은 대신 중국과 청국을 분리한다는 밀약을 맺은 당사자라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비록 근래에는 소련과 더 가까워졌다곤 하지만, 본래 국민당의 최대 후원자는 한국이었다.
손문과 송교인을 비롯한 신해혁명 1세대는 어려울 때 도와주었던 한국의 호의를 잊지 않고 있었다. 손문은 한국의 호의를 믿고 싶었다.
“안중근 장군이 집필한 동양평화론을 읽어 봤습니다. 참으로 훌륭하고 장대한 구상이더군요. 나 역시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 구상대로 된다면, 동양 인민에 크나큰 복이 될 겁니다.”
“중국 인민의 대표자인 총리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소관 역시 기쁩니다.”
손문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호평했다. 안중근의 구상은 한국적 아시아주의의 진일보였고, 아시아주의자인 손문에게 자극을 주었다.
손문은 황성에서 이선과의 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회담이 있기 전, 손문은 인천상공회의소의 주최로 연설을 부탁받았다.
인천은 대중(對中)무역의 거점이고,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의 중심지인 만큼, 손문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중화민국 만세!”
“손 총리 만세!”
“한중우호 만세!”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는 지리적 이유로 대개 산동 출신이고, 일본의 산동 점령 야욕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관동대지진이 중국인 학살로 번지면서 화교들의 반일 감정은 더욱 커졌고, 일본과 야합하고 있는 남경 북양정부보다 선명한 노선을 채택한 호법정부 지지로 돌아섰다.
기실 손문도 한때는 일본을 혁명의 모델로 삼을 만큼 친일적 경향이 있었으나, 역사의 변화로 한국의 후원을 받은 데다 관동대학살을 겪으면서 반일로 돌아선 상태였다.
“동양의 위대한 혁명가, 손문 총리를 이 자리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박수로 총리를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짝짝짝!
민간 차원에서 손문 방한 환영단장을 맡은 신대한당 총재 박용만이 환영사를 했다. 신대한당은 신채호가 주창하는 북방주의를 외치면서도, 아시아주의를 지향했기에 중국 문제에 있어서는 국민당을 지지했다.
“친애하는 한국 정부와 국민 여러분. 본인을 환영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손문의 연설은 통역을 통해 장내의 한국인들에게 전해졌다.
“오늘 나는 이 자리에서 대아시아주의에 대해 연설하고자 합니다. 한국에 입국하기 전, 안중근 장군이 집필한 동양평화론을 읽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읽을수록 장군의 구상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또한 한국이란 나라의 왕도(王道)적 전통에 대해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서양의 군인은 전쟁에 대해 논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군인은 평화에 대해 논합니다. 군인이 이토록 깊이 있는 사유를 하는 근원을 생각해 보니, 실로 유서 깊은 선비의 나라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손문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찬사를 보내며, 동시에 한국의 ‘왕도’에 경의를 표했다.
“우리 아시아는 가장 오래된 문화의 발상지입니다. 수천 년 전부터 아시아는 매우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유럽 최고(最古)의 국가, 그리스-로마와 같은 나라의 문화는 모두 아시아로부터 전해진 것입니다. 현재 세계의 가장 새로운 문화는 모두 우리의 옛 문화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손문은 한껏 아시아의 역사적 위업을 치켜세웠다. 화자와 청자가 모두 동양인이기에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이어질 말을 위한 빌드업이었다.
“그런데 근래 수백 년 동안 아시아의 민족은 점차 위축되고 국가는 점차 쇠퇴해 왔습니다. 한편 유럽의 민족은 점차 발전하고 국가는 강대해졌습니다. 그 결과 서양의 세력은 동양을 침입하여, 우리 아시아의 민족과 국가는 점차 멸망하거나 압제하에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좌중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대전쟁은 세계의 명운을 건 싸움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한국은 세계최강이라는 독일군을 격파하고 전쟁기계를 멈추게 했습니다. 한국의 승리는 전 아시아에 영향을 미쳤고, 아시아 전 민족은 매우 고무되어 큰 희망을 품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번에는 좌중이 만족감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의 자랑스러운 승리였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와 한국의 승리에 고무된 아시아인들은 자유와 정의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서양 열강은 여전히 패권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시아인의 외침을 짓밟고, 무시했습니다.”
다시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내가 지금 대아시아주의에 대해 강연하는 걸 간단히 정리하면,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의 비교와 충돌의 문제입니다. 동양 문화는 왕도이며, 서양의 문화는 패도(覇道)입니다. 왕도는 인의와 도덕을 주장하고, 패도는 강권(强權)을 주장합니다.”
서양과 동양을 대비한 손문은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패도를 행하는 국가는 다른 민족을 압박할 뿐 아니라, 자국 내 민족 역시 압박합니다. 대아시아주의가 왕도를 기초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민족해방과 불평등을 철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불평등 배제의 문화는 곧 패도에 반대하는 문화이며, 민중의 평등과 해방을 원하는 문화입니다.”
기실 손문 역시 중화사상을 따르는 민족주의자로, 과거 중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나라들은 모두 중국의 영향권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역사의 변화로 제후국이었던 한국의 국력이 중국을 능가하고, 중국과 청국이 분리되어 주변민족들이 모두 독립하였으며,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고, 그 자신이 한국과 소련의 지원을 차례로 받게 되면서 손문의 생각은 점차 바뀌게 되었다.
중국 내의 삼민주의 혁명과 아시아의 민족해방이 함께 가야 한다는, ‘대아시아주의’를 진심으로 믿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한민족은 이미 서양 문화의 패도를 택함과 동시에, 아시아 왕도정치의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향후 한국이 세계문화에 대해 서양 패도의 주구(走狗)가 될지, 동양 왕도의 간성(干城)이 될지는 한국인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