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220화 생(生)의 찬미
태시 원년(1926) 5월.
황자 탄생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에서는 새 황제의 대관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30년 만의 즉위식이니만큼, 국민의 기대도 높았다. 보통 선왕의 서거 후에 즉위하기에 애도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즉위하지만, 현재의 선황은 건재했기에 국민적 축제가 될 수 있었다.
“황제 폐하, 아니 태상황 폐하께서 칭제건원을 선포하고 대한의 황위에 오르신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이리 지나다니.”
“우리가 그만큼 늙었다는 거겠지.”
“대한도 그만큼 발전했고 말이야.”
“30년 전만 해도 참 가난했지. 그때 생각하면 지금은 완전히 별천지라니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세 번이나 변하지 않았나.”
“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30년이었지.”
대한제국 선포와 이선의 즉위를 기억하는 중장노년세대는 새삼 추억에 잠겼다.
독립전쟁(조청일전쟁)의 승전으로 자주독립과 칭제건원을 이뤄 냈다지만, 광무 원년의 대한제국은 아직 한참 갈 길이 먼 나라였다.
그런데 그 30년 사이에, 얼마나 많은 발전이 있었던가?
이제 막 자립한 약소국에서, 국제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열강으로 떠올랐다.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활력 넘치는 신흥공업국가로 올라섰다.
신분제의 잔재가 남아 있던 전제국가에서, 보통선거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헌정국가가 되었다.
국토를 방위하기에도 급급했던 군사력은, 동양의 패권을 다투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군대가 되었다.
국민교육의 힘으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문자를 읽고 쓰게 되었으며, 지식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인프라가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서울과 주요도시만을 연결하던 철도망은, 이제 사통팔달로 지방 곳곳을 연결했다.
근대 도시의 상징인 상하수도와 전기도, 서울과 주요 대도시를 넘어 지방 도시에까지 설치되었다.
낮은 건물 일색이던 도시도, 점차 높은 빌딩이 들어서 스카이라인의 변화가 왔다.
도시민은 다양한 신문물과 문화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광무 원년생, 대한제국과 나이가 같은 30세 청년 김우진(金祐鎭)의 사례로 보자.
김우진의 부친 김성규는 전형적인 신흥 엘리트로, 프랑스에서 수학과 농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했다. 양무감리로 전라남도의 양전을 성공적으로 진행해, 황제에게 발탁되어 농림협판으로서 전봉준과 함께 광무 초기의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김성규의 직위는 농림대신에 이르렀고, 부도 축적하여 성공적인 관료의 삶을 살았다. 은퇴 후에는 자신이 양무감리와 관찰사를 역임했던 전라남도 목포에 정착하여 무역회사 회장이 되었다.
김성규는 아들이 대를 이어 관료, 특히 농업 전문 분야의 관료로 성공하길 바랐지만,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우진은 연희대학 영문과에 진학하였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부친의 강권으로 무역회사 사장이 되어 사업가로서도 꽤 성공했지만, 나이 서른이 되자 김우진은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로의 길을 걸었다.
사실, 김우진은 이미 필명으로 꽤 유명한 희곡작가이자 시인이자 소설가였다. 영국 유학 당시 조지 버나드 쇼(G.B. Shaw)에 심취한 김우진은, 신파극이 주류였던 한국에서 근대적이고 전위적인 연극을 내놓았다.
“우진! 이번 주말에는 뭘 할 건가?”
“글쎄, 모처럼 문화생활이나 즐길까 하네.”
“자네 일이 곧 문화인데 그게 뭔 소리인가?”
“하하, 일하고는 다른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시점이니까.”
청년 김우진은 주말이 되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집에서 라디오를 듣고, 축음기로 음악을 감상하고,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고, 잘 가꾸어진 공원에서 산책하고, 전차나 택시를 타고 공립도서관에 가서 도서를 읽고, 국립박물관을 방문하여 정부가 새로 발굴하고 수집한 유물과 문화재를 관람했다.
이번 주말은 황실, 특히 태상황이 수집한 서양 근대 미술품들을 토대로 새로 확장한 정동 황립미술관을 찾았다.
“우진 씨! 여긴 어쩐 일로?”
“새 전시회가 있다고 해서 왔지요.”
“역시, 작가는 주말에도 문화와 함께하는군요.”
“하하, 그건 심덕 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김우진의 동료이자 동갑내기 벗인 윤심덕(尹心德)은 전형적인 신여성이었다. 황성여고를 졸업 후 관비유학생으로 발탁되어 일본 도쿄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고, 귀국해서는 소프라노 성악가이자 음악교사로 활동했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문화계에서 가까운 친구였다. 윤심덕의 남동생이 연희대학 문과를 다닌 김우진의 후배라 처음 안면을 트게 되었다가, 의기투합하여 문학과 음악을 함께 공유하는 친구가 되었다.
“이 그림이 그 유명한 프랑스 화가 르누아르의 작품이라지요.”
“아, 태상황 폐하의 어진을 그린. 참 아름답네요.”
“황립미술관이 동양 최고의 컬렉션이라고 합니다. 태상황께서 미술에 안목과 조예가 깊으신 덕에, 우리까지 덕을 보는군요.”
이선은 자신이 수집한 미술품들을 국민이 함께 감상하길 원했고, 김우진과 윤심덕처럼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젊은 부부가 함께 그림 감상을 온 건가요? 보기 좋군요.”
홀로 온 중년남성이 부럽다는 듯이 말하자, 김우진과 윤심덕은 즉각 손을 내저었다.
“직장동료이자 친구입니다.”
“아, 그래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김우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당신이 화제의 가수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군요.”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알지 얼굴을 아는 건 아니니까요.”
올해 윤심덕은 <도나우 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사의 찬미>를 레코드로 발매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920년대 축음기와 SP가 중상류층 사이에서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국내 가수들의 음반 취입과 히트가 늘어났다.
특히 <사의 찬미>는 단기간에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면서, 음악계에서나 알던 성악가 윤심덕은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래도 화면이 익숙한 시대가 아니다 보니 얼굴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하긴 부부라고 생각해도 이상할 나이는 아니죠. 안 그래도 집안에서 얼른 결혼하라고 성화인데.”
조혼을 금지해도 스물만 되면 결혼하여 20대 초반만 해도 노처녀로 불리는 시대에, 서른까지 결혼하지 않고 직업 활동을 하는 윤심덕을 흉보는 이도 적잖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문화계 일각에서는 윤심덕이 유부남인 김우진을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는다는 풍문도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이 들으면 손사래를 칠 일이었다.
미술 감상을 끝낸 김우진과 윤심덕은 인근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새 유행하는 서양식 ‘카페’였다. 커피애호가인 이선의 영향으로, 중상류층들 사이에서 커피가 유행하면서 정동에는 서양식 카페들이 들어섰다.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데, 때마침 축음기에서 <사의 찬미>가 흘러나왔다. 김우진은 껄껄 웃었고, 윤심덕은 부끄러운 듯 미소를 흘렸다.
“장안의 화제라더니, 과연 그렇군요.”
“솔직히 말해서, 저 노래가 저렇게 성공할 줄 몰랐어요.”
“음반도 많이 팔렸는데, 그 돈으로 뭘 하고 싶은가요?”
“어머, 문화 하신다는 분이 돈타령은.”
“하하, 난 사업가이기도 했지요. 돈이 있어야 문화생활도 영위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이에요. 문화가 돈과 거리가 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바보들 생각이죠.”
태생적으로 엘리트 출신이자 부자인 김우진과 달리, 자수성가한 윤심덕은 오히려 더 꼼꼼하게 수입을 따졌다.
“여동생이 미국 유학을 갈 예정이요. 근데 학비가 좀 많이 들여야지요. 보태 주려고요.”
여성의 중등교육 진학률도 낮은 시대에, 평양의 근대화된 가정인 윤심덕 가문은 아들딸 가리지 않고 모두 대학까지 공부했다.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었다.
“훌륭하십니다. 근데 자신을 위해서는 쓸 생각이 없는 건가요?”
“왜 없겠어요. 유학까지는 아니지만, 동생 따라 같이 미국 가려고 해요. 다양하게 구경도 해 보고 싶지만, 미국은 지금 재즈라는 음악이 한창 열풍이라는데 직접 들어 보고 싶어요.”
“호오, 재즈라면 나도 궁금합니다. 요새 그렇게 인기라면서요?”
“일각에선 천박한 흑인 음악이라고 폄하한다는데, 바보 같은 소리죠. 음악에 인종 구분이 어디 있어요?”
‘광란의 20년대’ 호황을 누리고 있던 미국에서는, 남부에서 기원한 재즈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재즈 시대(Jazz Age)’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서양음악이 클래식에만 편중되어 있어서, 재즈에 대한 인지도가 매우 낮았다.
서양의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떠드는 대로 재즈를 ‘천박한 흑인 음악’이라고 폄하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막상 대한제국 최초의 재즈 음반 수입자가 이선이라는 걸 알면 기겁할 터였다.
“우진 씨도 올해 계획이 있죠? 회사 그만둔 데에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원래 서른이 되면 그만두려고 했어요. 필요한 재정적 여유도 충분히 확보했고.”
“어디에 필요한 재정적 여유요?”
“독일로 갈 생각이에요. 근래 세계 문화계의 진보는 독일이 이끌더군요. 베를린이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에요. 박사과정에 등록하고, 문학과 예술을 더 심도 있게 공부할 생각입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정치·경제적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베를린은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요소의 신문화가 독일에서 열풍을 불면서, 베를린은 파리와 함께 세계의 예술을 선도하는 도시가 되었다.
김우진은 자신의 우상인 조지 버나드 쇼의 영향을 받아 급진적인 근대주의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였고, 마르크스의 고향이자 사회민주당이 1당인 독일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전봉준과 함께 토지개혁을 이끈 진보적 관료이지만, 유교적 왕도정치를 중시하는 부친 김성규와는 모든 면에서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또한 개화 1세대 엘리트와 2세대 엘리트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집안에서 반대 안 해요?”
“부친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회사 그만둔 시점에서 사실상 절연한 셈이죠. 처와 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더 늦기 전에 내 인생을 살아야겠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독일 유학을 선언하면서, 김우진은 부친 김성규에게 사실상 절연을 당했다.
“이, 이놈이 문학에 미치더니 결국 집안까지 말아먹겠구나. 내가 어찌 성공했는지 아느냐? 폐하의 지극한 황은으로 일개 주사에서 대신의 자리까지 올랐다! 내가 유학하고 일함은 오직 군주와 나라를 위함이었어. 그리고 가문을 위해서였고! 근데 네놈은 문학에 미쳐 회사 경영도 못 하겠단 말이냐? 가문까지 저버리겠다는 거냐?”
“아버지, 저는 훌륭한 관리이자 애국자였던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께서 원하는 삶을 살 순 없습니다. 제 길은 제가 개척하고 싶습니다.”
“오냐, 그렇다면 썩 나가라! 불초자식 죽었다고 생각할 터이니, 어디서 객사를 하건 말건 이 집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라!”
부친이 일방적으로 정해준 혼처인 아내와는 아무런 애정도 없었고, 그나마 아들은 아끼고 사랑했지만 가정에서 기쁨과 안식을 얻지 못했다.
“여보, 함께 독일로 가겠소? 모아 둔 돈이면 우리 세 식구가 몇 년간 생활할 여건은 충분히 될 수 있소.”
“시부모님을 두고 어떻게 떠나나요? 애는 독일인으로 키울 생각인가요? 당신 마음은 이미 떠났으니 붙잡지 않겠지만, 전 가지 않겠어요. 혼자 가세요.”
전형적인 ‘조선 여자’인 아내는 독일로 같이 가겠느냐는 제안을 시부모를 모셔야 한다고 거절했고, 김우진은 홀로 독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어찌 보면 가문의 장남이자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선택이었지만, 이대로 인생을 부친의 뜻대로만 살면서 늙고 싶지 않았다.
“그렇군요……. 난 8월에 동생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요. 우진 씨는요?”
“지금 하는 연극만 마무리 짓고, 비슷한 시기에 떠날 것 같네요.”
“여름에는 지구 반대편에 있겠군요. 피차 조국을 떠나 멀리 가는데, 행운을 빌어요.”
“고맙습니다. 당신도요.”
장도(長途)를 결심한 두 남녀는 서로의 앞날에 행운을 축원했다.
“떠나기 전에 벗들 다 같이 모여서 한잔해야죠?”
“물론이죠. 종로에 좋은 술집 통째로 대관할 테니까 문 닫고 밤새 마십시다.”
“하여튼 문학하는 사람들은 왜 그리 술 좋아하는지, 못 말린다니까! 그럼 다시 만나요.”
김우진과 윤심덕은 악수하며 재회를 기원했다.
역사의 변화는, 두 젊은 남녀의 운명도 바꾸었다.
원역사에서 김우진과 윤심덕은 1920년대, 아니 그 이후까지 전설이 될 ‘정사(情死)’의 주인공이 되었다.
정말로 두 사람이 사랑 때문에 자살한 건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지만, 함께 부관연락선에 올랐다가 부산에서 내리지는 않았다는 건 분명했다. 두 남녀는 현해탄 어딘가에서 사라졌으며, 아마도 정사가 아니었겠냐는 추측이 대중적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신교육을 받았으나 부모의 강요로 조혼을 한 청춘남녀 간의 불륜이 잦았고, 대부분 이혼과 재혼을 택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굳이 자살할 필요가 있겠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만약 동반자살이 맞다면, 좌절된 사랑 때문이라기보다는, 당대 기준으로는 굉장히 급진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김우진과 윤심덕이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상을 극복하지 못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 있느냐.”
서울의 밤거리를 걸어가며 사의 찬미를 흥얼거리던 김우진은, 문득 가사와는 정반대로 삶의 활력을 느꼈다.
그가 태어난 광무 원년 이래, 대한제국은 기회와 가능성의 나라였다. 아니, 그의 부친 김성규부터 기회와 가능성을 잡아 한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가.
부친이 정치경제에서 이름을 남겼듯이, 김우진은 문화예술에서 기억되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 자신만의 문학적 세계관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나, 한번 그 세계에 빠져든 사람은 헤어 나오지 못한다.
김우진은 바로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부모 잘 만난 한량이 좋은 교육 받고도 자신의 취미생활에 심취해서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것처럼 보이겠지만, 한 번뿐인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고 싶을 뿐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서울의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5월 따뜻한 봄의 날씨를 맞이하고 있는 서울 황성부는 오늘도 평온했다.
일본 도쿄, 중국 상해와 함께 동양 3대 도시로 꼽히는 서울의 밤은 아름다웠다.
방사선으로 잘 뻗은 도로, 도심을 누비는 전차, 환하게 빛나는 불빛, 한옥 기와집과 새로 올라선 양옥들, 인공적인 미를 갖춘 고전과 근대의 조화.
40년 전 비좁고 더러웠던 한성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오늘날의 황성은 그야말로 별천지일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서울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대한제국을 상징했다.
“인생은 아름답구나, 생을 찬미하자.”
광무 원년생, 대한제국과 동갑인 서른 살 청년 김우진은 삶에 대한 새로운 기대와 애정으로 가득 찼다.
변화한 역사의 대한제국에는, 수많은 ‘광무 연생’들이 ‘태시’라는 새로운 시대를 만나 변화한 운명의 삶을 살고 있다.
꼭 김우진처럼 운 좋게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더라도, 어느 시골 농가에 태어나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였다.
백정의 자식으로 태어나더라도, 물론 운도 따라야겠지만, 본인의 재능과 노력으로 의사가 될 수 있는 시대였다. 아비는 동물 살을 째고 자르며 사회적 천시를 받았지만, 자식은 사람의 살을 째고 꿰매며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광무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시골 빈농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까지 오른 전봉준도, 광무 시대의 한 상징이 아니겠는가?
조선 500년, 아니 한민족 수천 년 역사에 걸쳐 이토록 사회적 유동성이 높은 시대가 없었다.
일제강점기라는 ‘이 풍진 세상’을 만나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라고 암울한 시대상의 노래를 부르던 청춘들이, 가능성과 희망을 품고 생을 찬미하며 시대를 살아간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선과 조선-한국인이 지난 세월 동안 분투하며 역사를 바꾼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