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427)

지구를 멸망시키러 왔단다

아기는 필사적으로 기었다. 팔을 앞으로 쭉 뻗고 오므렸던 다리를 뒤로 차며 힘차게 나아갔다. 새카만 두 눈으로 제 모습이 투영된 창을 노려보며. 

창밖엔 똑같이 생긴 고층 건물이 마주보며 서있었다. 그 너머론 흐릿한 안개가 낀 강과 대교가 보였다. 하늘은 잿빛 먹구름으로 뒤덮였으나, 먼 곳에선 희미한 빛줄기가 지상으로 내리박히고 있었다. 

툭. 아기는 창에 이마까지 대고 달라붙었다. 개미보다 작아 보이는 사람들과 잽싸게 달리는 차. 그 어디에도 광폭하거나 야만적인 혼돈은 없었다. 

아기는 상체를 바짝 든 채 창에 대고 있던 손바닥을 콱 움켜쥐었다. 

‘이번엔 적절한 시대로 온 거야. 확실해···!’

그 순간 위에서 두 손이 내려와 아기를 안아 들었다. 따스한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우리 율이 창 밖 구경하고 있었쪄요?”

쪽. 창에 비친 여성이 아기를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뺨에 입을 맞췄다. 

“······.”

그 순간 아기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지만, 여성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기를 한참이나 안아 토닥거렸다. 

“하지만 불안하니까 엄마 요리 할 동안 여기에 조금만 있자?”

여성이 아기를 아기 침대에 내려놓았다. 높이 솟은 원목 울타리에 푹신한 쿠션 범퍼가 둘러진 아기 침대는, 이제 겨우 기어 다니는 게 고작인 아기를 철저히 고립시켰다. 

아기는 항의했다. 

“와앙!”

‘당장 날 꺼내지 못해?!’

“그래, 그래, 미안해?”

말로만 사과를 건넨 여성은 등을 돌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아기는 주저앉은 채 주먹으로 쿠션을 때렸다. 답답했다. 

‘왜 하필 이런 아기 몸에 들어와선!’

그러나 육체의 힘이 약해 타격음도 작았다. 

탁탁.

“······?”

여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보았다. 

그젯밤, 아이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다급히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결혼 10년 만에 수차례의 시험관 시술로 겨우 얻은 귀한 아이였다. 여성은 밤새 끔찍하고 불길한 상상과 싸우며 아이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다행히 오늘 아침 겨우 열이 내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우리 율이가 원래 저랬던가?’

다른 아이들보다 예민해 자주 보채고 울던 아이가, 한숨 푹 자고 일어난 후엔 언제 열이 났었냐는 듯 팔팔하게 기어서 집안을 누볐다. 배가 고플 텐데 울지도 않고, 지금도 건강함을 자랑하듯 쿠션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타닥, 탕.

“와왕!”

쿠션을 두드린 후 내지르는 소리가 마치,

“난타···?”

여성은 살금살금 다가가 살펴볼까 하다, 고개를 저으며 냄비를 꺼냈다. 우선 아이의 이유식을 만드는 게 급선무였다. 

“후우···.”

한참 화풀이를 하던 아기는 한숨을 내쉬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침대 구석진 쿠션에 몸을 비스듬히 묻고 눈을 감았다. 

이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콰앙! 막 눈을 뜬 그의 신경이 폭음과 함께 쏟아지는 흙비로 일순 마비되었다. 퍽. 사지가 찢긴 채 날아온 시신의 철모와 그의 어깨가 부딪쳤다. 

‘서기 1950년대 대한민국.’

하필이면 전쟁이 한창이던 곳에, 그것도 대한민국이 아닌 외국 군인의 몸으로 들어가 눈을 뜨는 바람에 처음엔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 덕에 그는 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아 대부분의 상황을 유야무야 넘길 수 있었다.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던 것 또한. 

‘하물며 시간 오차가 그리 크게 났을 줄은.’

상황파악을 했을 땐 절망했었다. 그대로 지구에 게이트가 열리길 기다리려면 최소 70여 년이었으므로. 

그가 들어간 몸은 미국 국적의 참전군인 ‘로건 워커’. 당시 만21세였지만 70년 뒤엔 관 짝에 드러누워 있을 가능성이 높은 나이였다. 

‘이리저리 감시 속에 움직이다가 얼결에 배까지 타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그 몸의 가족에게 붙잡혀 병원과 상담센터를 전전하고, 왜 이렇게 말랐냐고 매일매일 폭식을 강요당하기 까지···!’

그래도 지구에서 가장 강한 대국의 시민이었다. 시대는 크게 어긋났어도 이왕 들어간 김에 여러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다보니, 다시 한국의 시간마법 포인트를 찾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 강제로 맺어진 인연들은 그의 마음을 적잖이 어지럽혔다. 특히나 로건 워커의 약혼자였던 크리스티나를 떠올리면 살짝 우울해졌다. 

『미안해, 크리스티나. 나 고자가 됐어.』

-『···오, 신이시여. 우리 귀여운 늑대에게 무슨 이런 끔찍한 형벌을···!』

크리스티나는 언어도 잃고 기억상실까지 하고 돌아온 약혼자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었다. 한 ‘목적’을 가지고 지구로 온 그조차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그래서 쓸데없이 정드는 일을 피하기 위해 거짓을 말했지만, 고자 선언의 파장은 예상보다 커서 그의 마음에도 상처를 입혔다.

상념에 잠겼던 그는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그들이 우리 고향을 침략한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상이지. 야만적인 침략자들의 조상, 후손 교육을 잘못 시킨 자들.’

스륵. 열리는 눈꺼풀 아래로 일렁거리던 푸른빛이 검은색 눈동자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어쨌든 좌표는 그대로니 그때의 포인트와 멀어봤자 50펄긘 안팎. 그리고 하늘이 깨끗했던 걸로 봐선 아직 게이트가 열리기 전 시대.’

지구인들의 침략은 지구에 게이트가 열린 지 5년째가 되던 해에 벌어졌다.

‘게이트가 열린 건 서기 2021년. ‘지금’은 몇 년 도지?’

그때 마침 여성이 켠 TV 소리가 들려왔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01년 설은 잘 쇠셨는지요.]

그는 계산에 들어갔다. 예정대로라면 침략이 일어나기까지 앞으로 25년. 이 육체는 어림잡아 돌이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의 설이란 명절은 음력으로 쇠니 작년 2000년생일 터. 

‘지루한 기다림이 되겠는 걸.’

그러나 시간마법을 다시 쓰자니 알맞은 시간대와 몸으로 떨어지리란 보장이 없다. 자칫 고향이 침략당한 이후 시간대로 갈 수 있음이다. 그러면 이 일을 위해 희생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리고 ‘영혼의 눈’에 남은 마력으로 시간마법을 쓸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 단 한 번.’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역시 최후의 카드 한 장은 남겨둬야지. 만에 하나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20년쯤은 얌전히 기다릴 수 있다. 

겨울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따뜻한 바닥에 깔린 카펫에 드러누워 TV를 보다가, 하릴없이 창에 달라붙어 도시의 야경을 보다가 하며 시간을 보내던 아기는 아침에 잠깐 보았던 남자를 맞이했다. 

“서한율! 몸은 어때? 괜찮아?”

남자에게 들린 몸이 번쩍 천장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희미한 담배 냄새가 로건 워커로 지냈던 생의 추억을 자극한다. 

“열은 완전히 내렸고, 하루 종일 울지 않고 얌전히 있었어요. 다행히 밥도 잘 먹고.”

“그래? 정말 다행이네.”

쪽. 남자의 입술이 아기의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

“···율아? 왜 그런 눈으로 아빠를 보는 거야?”

여성이 남자의 품에서 아기를 데려갔다. 그러곤 소매로 아기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씻지 않고 뽀뽀하니까 그렇죠. 얼른 씻고 와요.”

“어···, 음.”

남자는 상처받은 얼굴로 슈트를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여성은 아기의 등을 토닥거리다 카펫 위로 내려놓곤 개키던 빨래를 마저 집었다. 

아기는 이 몸의 부모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도 워낙 어린 몸이라 좋은 점도 있네.’

전혀 다른 영혼이 몸을 차지했음에도 부모조차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이들 자식의 몸을 차지했다는 사실이 미안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 육체는 오늘 새벽에 명을 달리했을 테니. 그랬다면 지금쯤 이런 따뜻한 방안이 아닌, 차가운 곳에 주저앉아 울부짖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50년대였다면 몰라도 ‘현재’를 사는 자들은 우리 세계의 원수가 된 자들. 동정할 필요는 없어.’

“응?”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을까. 아기의 모친이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사르륵 미소 짓는다. 

“율아, 왜? 엄마 빨래 개키는 거 신기해?”

“······.”

“우리 율이도 해볼까? 자, 엄마 무릎에 앉아서—.”

그녀가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 두 손을 잡았다. 자칫 어디가 부러질까 염려하는 사람처럼, 아주 약한 힘으로 아기의 두 손목을 잡아 빨래를 집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이렇게, 짠! 우리 율이 잘하네?”

본인이 남은 손가락으로 개켜놓곤 잘했다고 웃는다. 따스한 행복이 넘치는 얼굴로. 

“······.”

아기는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푹 시선을 내렸다. 

*

‘서한율’이 된 그는 또래에 비해 유별나게 어른스럽다는 주변의 평을 받으며 성장했다. 부모는 가끔 애가 너무 무뚝뚝하다며 서운해 하는 기색을 비쳤지만, 그래도 힘들게 얻은 자식이라 그런지 웬만하면 다 오냐오냐 해주는 식이었다. 

수영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다음 날 수영교실로 데려가주었고, 호신술을 배우고 싶다 했더니 더 좋아하며 도장에 등록해주었다. 비싼 자전거도, 핸드폰도, 노트북도 모두 사달라는 대로 다 사주었다. 

단 하나, 먹는 것을 제외하곤. 

특히나 모친은 한율이 군것질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하루는 호기심에 핫도그를 사먹고 집에 들어갔더니 그게 몸에 얼마나 해로운지 아냐며, 영양소 어쩌고저쩌고 열변을 한 시간가량 토해냈다. 그 뒤로 한율은 군것질을 하면 아파트 놀이터 수돗가에서 양치를 하고 집에 들어갔다.  

학교생활이나 교우관계도 무난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를 호의적으로 대했다. 가끔 뜬금없이 열등감을 드러내는 못난이들도 있었지만, 그래봤자 철부지 어린아이여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2016년. 서한율 만15세.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이틀째 되던 날, 한 손으로 자전거를 끌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한율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떴다···!”

돌연 큰소리를 내자 행인들의 시선이 모두 한율에게 꽂혔다. 한율은 그에 아랑곳없이 핸드폰을 보며 활짝 웃었다. 

‘드디어!’

“하하···!”

시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부모가 봤다면 쟤가 우리 아들이 맞나? 큰 눈을 끔뻑이다가 비빌 그런 모습이었다.

한참을 웃던 한율은 웃음의 잔향을 입가에 머금은 채 어깨를 떨었다. 심장이 흥분으로 쿵쿵 뛰었다.

핸드폰에는 누군가의 SNS 계정이 떠있었다. 오늘 막 만든 계정엔 길 가던 고양이를 찍은 사진 한 장만 달랑 업로드 되어 있었다. 

[새 폰 개시 후 첫 사진. 화질 괜찮은 듯. #모르는고냥, #떼껄룩]

한율은 고양이 사진이 아닌 계정주인 프로필 사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 본래 세상의 고향에서 만났을 때에 비해 많이 앳되고 안경까지 쓰고 있지만, 분명 그 자였다. 오른쪽 눈 아래의 눈물점도 그렇고, 흔치 않은 성씨가 결정적 증거였다. 

한율이 굳이 대한민국을 차원이동, 시간마법 포인트로 잡은 이유. 

‘길우성. 이 사지를 쫙쫙 찢어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

그의 세상과 연결된 지구의 게이트는, 본래라면 소수의 능력자들이 완벽한 나체 상태가 되어야 드나들 수 있었다. 길우성은 그 게이트를 평범한 인간과 지구의 물질까지 드나들 수 있게 ‘코팅’시킨 능력자. 

한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말초엘 같은 놈. 너만 아니었다면···.”

이 세계로 치면 모기와 버금가는 해충에 비유하며, 한율은 곧바로 길우성이 걸친 교복이 어디 것인지 검색에 들어갔다. 

스스로 자초한 멸망을 피하기 위해 평화롭던 남의 세상을 짓밟은 침략자들. 길우성만 통제할 수 있다면, 고향에 닥칠 미래의 위험은 대폭 감소할 것이다. 

한율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지구 따위, 혼자 멸망해버리라지.”

길우성

길우성을 처음 본 건, 막 수습 딱지를 떼고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고향으로 달려갔을 때였다.

정식 마법사가 되어 마탑에 들어가게 되면 족히 10년은 그 안에서 썩어야 된다는 선배들의 무시무시한 엄포 뒤에 주어진 귀한 휴가였다. 하늘은 열흘 내내 먹구름이 잔뜩 끼어, 수도든 시골길이든 어디서건 음습한 냄새가 감도는 듯했다.

마나의 흐름에 예민한 그는 고향에 다다를수록 대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오래 전 용족이 살았다던 호수가 때때로 이상 현상을 일으켰기에 그때도 그런가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날 밤, 기이한 옷차림을 한 길우성이 마을을 찾아오기 전까지. 

‘대한 예술 고등학교···.’

한율은 길우성이 걸친 교복과 마크를 교문에서 나오는 학생들의 것과 비교한 뒤 현판을 보았다.

‘맞게 찾아왔네.’

길우성의 SNS는 계정이 만들어진 그제 이후 딱 세 번 업데이트되었다. 다른 길고양이 사진, 고양이를 닮은 구름을 찍은 사진, 한밤중에 담벼락 위에서 녹색 안광을 빛내는 고양이 사진. 

순 고양이 뿐인 이런 길우성의 SNS에 댓글을 단 이는 한 명으로, 길우성과 같은 교복을 걸친 김유일이란 남학생이었다. 맞팔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해서 김유일의 SNS를 가봤더니, 거긴 더 황량하여 SNS 상으론 더 이상의 정보를 얻기가 힘들었다.

한율은 교문 맞은편 길에 자전거를 세워둔 채 길우성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인간관계가 얄팍해도 이렇게 타인의 관심이 제로일 수가 있나? 요즘엔 학교폭력 피해자도 담당 일진과 맞팔을 한다던데.’

학폭 피해자와 가해자의 그런 건 대개 가해자의 강요 때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친구가 없나? 아니면 중학교와 동 떨어진 학교에 입학해서? 폰 번호를 바꿔서 과거 인연 차단?’

차원이동과 시간마법을 쓰기 전, 길우성에 대해 수집한 정보는 그의 입으로 직접 들은 것뿐이었다. 이름, 능력, 국적. 그리고 벌레를 질색한다는 것 정도. 나이는 현재 ‘서한율’과 동갑. 

‘나와 처음 만났을 땐 뻔뻔하기 그지없던 밥도둑이었는데. 뭐, 그땐 지구에 게이트가 열리고 5년의 난리를 겪은 뒤였으니 성격이나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180도 바뀔 만도 하긴 하다만.’

“야, 저거 존나 비싼 자전거 아니냐?”

“몰라, 새꺄. 얼만데?”

횡단보도를 건너오던 몇몇 학생이 한율과 한율의 자전거를 힐끔거리며 쑥덕거렸다.

“3백인가 4백인가.”

“씨발, 그렇게 비싸지도 않네. 우리 아빠 차에 비하면.”

“왜 슬프게 아버지 차랑 비교하고 그러냐···.”

한율은 자전거 손잡이를 초조하게 두드렸다. 행여 하교 시간을 놓칠까 마지막 수업까지 제끼고 왔건만. 하교하는 학생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데 여전히 길우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후문으로 나갔나? 생각하던 그때. 

한율의 눈에 김유일이 들어왔다. 

“길우성이랑 초딩 때 친구라고? 근데 왜 걔한테 전화 안 하고?”

“와서 전화하려고 했는데, 오다가 폰을 떨궜어.”

한율은 액정이 리얼하게 깨진 이미지를 띄운 핸드폰을 휙 들었다가 내렸다. 눈썰미가 나쁜지 김유일은 단박에 속은 눈치였다. 완전 박살났네, 하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그런데 이놈이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는 거야. 그래서 걔 SNS에 뜬 너 보고 말 건 거거든.”

“와, 너 눈 대박 좋다? 그런데 나 걔 번호 모르는데.”

“길우성, 이미 집에 갔겠지?”

“아닐걸?”

김유일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되레 뭘 묻냐는 듯한 투로 대답했다. 

“기획사 연습실로 튀어갔겠지. 넌 친구면서 그런 것도 모르냐?”

기획사? 연습실?

한율은 순간 당황했지만 최대한 동요를 감추며 입가를 올렸다. 

“아아···, 스엔은 떨어진 줄 알았는데?”

혹시 몰라 대충 3대 기획사 중 하나를 입에 올렸다. 김유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걔가 거기 오디션도 봤었구나. 하긴, 그렇게 춤을 잘 추니.”

“그럼 어디로 간 거야? 이놈이 정작 중요한 건 말을 안 해주더라고. 나도 같이 좀 보자 그랬더니.”

너무 오버해서 흘렸나. 능청을 떨면서도 한율은 김유일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에도 이 순진한 친구는 의심 없이 홀라당 넘어왔다.

김유일이 한율의 얼굴을 쳐다보며 툭 내뱉듯 말했다. 

“어쩐지. 아무튼 걔가 간 기획사는···.”

WB래빗 엔터테인먼트. 

한율은 하얀색과 검은색 반으로 된 토끼 얼굴이 그려진 간판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연습실과 춤이란 말을 들었을 때 예상하긴 했지만, 정말 연예기획사란 걸 확인하니 살짝 불쾌해졌다.

빌어먹을 침략자. 그런 인간의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순수한 단면과 닿는 것 같아서. 

‘그나저나 간만에 마법을 써서 그런가. 아니면 지구의 마나가 나랑 안 맞아서 그런가···. 아직도 머리가 아프네.’

마지막 시간마법을 쓸 정도의 마력은 영혼의 눈에 저장한 상태. 그러나 한율은 만에 하나를 대비해 틈이 날 때마다 이곳 마나를 정제하여 제 심장에 쌓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마력이 쌓이는 속도는 고향에 있을 때에 비해 아주 더뎠다. 지구의 마나에 불순물이 많이 섞인 탓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엔 시험 삼아, 지구의 마나로만 쌓은 마력으로 김유일의 기억에 환영을 덧씌우는 마법을 써봤다. 그때부터 쭉 미미한 두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여기까지 온 지 한 시간 째.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젠 두통이 아주 미세하게 거슬리는 정도로 약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기억에 환영을 덧씌우는 마법 자체가 마력 소모가 심하긴 하지만, 더 큰 영향력을 발하는 마법을 쓸 땐 적잖이 각오해야겠는걸.’

한율은 검은색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를 썼다. 그러곤 인근의 CCTV 위치를 확인한 뒤 WB래빗 입구가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편의점에는 카메라를 소지한 두 명의 남성이 앞서 자리 잡고 있었다. 빈 컵라면 용기만 달랑 앞에 둔 채. 

한율은 도시락과 차를 산 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이 한율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잠시 뿐이었다. 그들은 곧 저들끼리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어젠 두 시에 나왔다면서요?”

“이번 앨범은 정말 이를 갈고 준비 중인 것 같은데··· 이러다 애들 몸 상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WB래빗 소속 걸그룹 ‘크리스탈 래빗’의 팬들인 모양. 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중박 정도 친 그룹이라, 한율도 언젠가 스치듯 노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나저나 그 사생 새낀 어떻게 됐대요? 요즘은 잠잠한 것 같던데.”

“어제 공카에 잠깐 이상한 글이 올라왔다가 내려갔는데, 친구가 캡처해놨더라구요. 보실래요?”

데뷔를 한 아이돌도 새벽 두 시까지 연습한다면, 한낱 연습생은 어떻겠는가. 한율은 기다림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을 받으며 무심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율도 같은 크래 팬이라 여겼는지, 핸드폰을 내민 사람이 손을 더 뻗어주었다. 

한율은 목을 빼고 캡쳐된 게시글을 읽었다. 

[제목 : ㅁㄹ ㅌㅌ ㅈㅂ]

[ㅁㄹ. 검은색 ㅋㅍ남과 ㅋㅅ 컷. 존말로 할 때 ㅌㅌ바람.]

게시글엔 멀리서 카메라를 확대하고 찍은 듯 흐릿한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목구비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둑한 차내에서 고개가 가까워진 두 인영의 사진이었다. 

“이거 미랑이 말하는 거예요? 와, 이 미친 새끼가 진짜.”

“1분도 안 돼서 내려가긴 했는데, 하···.”

분개한 그들은 한참동안 사생을 욕했다. 사생은 팬이 아닌 범죄자 새끼라고 온갖 험한 욕을 쏟아냈다. 미랑이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확신도 덧붙였다. 만에 만에 만에 하나 본인이 맞다고 해도 본인 입으로 털어놓아야 하는 거지, 도촬로 까발려지는 건 가엾기 그지없다고. 

어쨌든 그들 덕분에 한율은 심심하지 않았다. 전혀 쓸모없는 정보와 잡담의 나열이었지만, 눈을 한곳에 두어야 할 땐 귀가 지루한 법이었으니.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은영이, 은영이!”

“어? 뒤에 라나···!”

차라라라락. 기획사에서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가녀린 체구의 소녀들이 나오자, 그들이 호들갑을 떨며 거대한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한율은 황당한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지들도 도촬하는 구만. 이 새끼들이 사생 아니야?

그들의 이런 행동은 두 번 더 반복되었고, 크리스탈 래빗 멤버를 모두 도촬하고 난 뒤엔 말없이 자리를 털고 떠났다. 일자 테이블 앞엔 한율만 덩그러니 남았다. 

우웅. 한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어머니.”

-[아무리 오늘 늦을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너무 늦는 거 아니니, 율아? 엄마가 데리러 갈까? 어디야?]

어느덧 밤11시. 

“괜찮아요, 저도 이제 고등학생인 걸요. 곧 들어갈 테니 먼저 주무세요.”

-[···그래. 괜히 으슥한 길로 다니지 말고,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택시 타고 와. 알았지?]

“네.”

짧은 통화를 끝내고 다시 10여 분. 조금 전 10시에 교대로 들어온 알바생이 대놓고 한율의 뒤통수를 노려보기 시작할 때 즈음이었다. 한율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빛과 같은 속도로 쓰레기를 분리수거했다. 

길우성이 흐느적흐느적 기획사를 나오고 있었다. 

‘죽여선 안 되지만.’

길우성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가며 한율은 주먹이 근질거리는 걸 느꼈다. 악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뒤통수 한 대 치고 싶다.’

길우성은 특이 능력자였다. 쓸 수 있는 데가 한정되어 있는, 조건이 맞지 않으면 있으나 마나한 그런 능력 말이다. 길우성의 ‘코팅’ 능력은 게이트에 한해서만 발휘가 되었다. 그래서 침략이 있기까지 게이트가 열리고 난 후 5년씩이나 걸렸던 건지도 모른다.

게이트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최초로 능력이 발동되었을 테니. 

그럼 지금 없애면 되지 않느냐, 하면 다른 변수가 튀어나올 위험성 탓에 저어되었다. 

‘모든 영장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특이 능력자가 죽었더니, 3개월도 안 되어 똑같은 능력을 지닌 자가 예고 없이 각성되었다고 했지.’

사례가 하나뿐이면 몰라도, 그 외에도 다른 특이 능력자가 죽었을 때에 비슷한 일이 세 차례 더 벌어졌다. 그 말인즉슨, 지금 길우성을 죽이면 더 빨리 게이트에 접근하는 ‘코팅’ 능력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소리. 그렇게 되면 한율은 꼼짝없이 게이트 앞에 죽치는,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짓을 감행해야 한다. 게이트가 열리면 온갖 국가의 군대가 그 앞에 포진될 테니. 

‘앞으로 5년. 저놈을 잘 감시하다가 적절한 때에 납치해서 외딴 곳에 감금. 관리가 쉽도록 척추 신경을 박살내서 아예 불구로 만들어버리는 게 나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살아보니, 한 사람을 감금시키고 돌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최우선 목표는 길우성이 맞지만, 그가 유일한 목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나와 같은 편은 아무도 없어.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거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는 명백하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쫓아다니고 훔쳐보다간 언젠가 들킬···.’

그 순간이었다. 길우성이 돌연 우뚝 멈춰서더니 왼쪽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당황한 한율도 덩달아 골목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길우성은 고장 나서 끔뻑거리는 가로등을 등진 채 전봇대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괜찮아? 하··· 어떤 인간 말종 새끼가 이딴 짓을.”

그 앞에 놓인 무언가를 살피며 중얼거리더니 핸드폰을 꺼낸다. 한율은 주차된 차량 뒤에 숨어 길우성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네, 24시간 동물병원···, 어, 진료 안 받는다고요? 24시간 아니에요?”

아무래도 다친 동물을 발견한 모양. 

길우성이 다른 곳에다 전화를 걸었다. 

“태어난 지 일주일? 그 정도 밖에 안 된 것 같은 고양이 세 마리에 어미 고양이 하난데, 어미 고양이가 많이 다쳤어요. ···병원비요? 아니, 그것부터 물어보시는 거예요? ······아, 알겠어요. 금방 갈게요. 문 닫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금방 갈 테니까!”

지켜보던 한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길우성은 걸치고 있던 후드 재킷을 벗어 거기에 고양이를 올려 감쌌다. 그러곤 일어나려다가, 머뭇머뭇 다시 내려놓았다. 

“이러면 새끼들한테 상처가 눌릴 텐데···, 감염 위험도 있고······.”

그러더니 고양이들을 놔둔 채 제 몸만 일으켰다. 

“저기요.”

“······?”

근처에 다른 사람이 있나? 한율은 의아해져서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그때 길우성이 정확히 한율이 숨은 차 쪽을 돌아보았다. 

발성 좋은 목소리가 골목길에 또렷이 울렸다. 

“거기 있는 거 다 알거든요? 보지만 말고 좀 도와주시겠어요?”

“······!”

차라리 옆에 붙어있는 게 낫겠다

“사람 손을 탄 흔적이 없는 걸로 봐선, 얘들이 지내던 곳 근처에 사는 사람이 이 상태 그대로 갖다버린 것 같네요. 자기네 집 주변에서 죽으면 골치 아프니까. 새끼들도 있고.”

다친 어미 고양이를 살핀 수의사의 말에, 길우성의 주먹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소리 없이 달싹거리는 입은 욕을 내뱉는 듯했다. 

한율은 방관자처럼 길우성과 다섯 걸음 정도 거리를 둔 채 그 모습을 살폈다. 길우성에게 들켰을 때 냅다 줄행랑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건, 괜히 도망쳐서 경계심을 강하게 일깨우면 앞으로의 감시에 차질을 빚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수술하면 살 수는 있는 거죠?”

“글쎄요···. 아무래도 길고양이들은 이런저런 병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서, 정확한 건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은데······.”

말을 흐리는 수의사의 눈치를 보아하니, 교복을 걸치고 있는 길우성이 적잖은 병원비를 부담할 수 있는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병원비는 걱정하지 마세요. 저 사람이 다 낼 거거든요.”

“뭐? 내가 왜?”

돌연 화살이 자신에게로 날아오자, 멀뚱히 서있던 한율은 놀라 되물었다. 길우성이 단 두 걸음으로 성큼 거리를 좁히며 한율의 귓가에 속삭였다. 

“경찰서 갈까? 가서 그 동네 CCTV 쫙 돌려 까볼까 이 스토커 새끼야?”

“······?”

난 널 찾은 게 오늘이 처음인데?

잘 모르겠지만 뭔가 불쾌한 오해를 산 모양이었다. 한율은 뭐라 맞받아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이 기회를 잘 이용할 수 있을지도.’

한율은 쓰고 있던 검은색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렸다. 아슬아슬하게 길우성의 어깨를 치며 앞으로 나섰다. 

“병원비 걱정 마시고 당장 검사부터 진행해주세요. 수술비, 입원비를 포함한 모든 병원비를 지금 드리겠습니다.”

한율은 당당히 부친의 신용카드, 일명 아카를 수의사에게 내밀었다. 

“일시불로 끊어주세요.”

-[아들. 혹시 아빠 카드 잃어버린 건 아니지?]

[제가 썼어요, 안심하세요.]

-[그 말 들으니 더 걱정되는데; 아무튼 빨리 들어와라, 내 와이프 그만 걱정시키고. 그리고 당부하는데, 상의 없이 집에 동물 데려오면 절대 안 된다.]

한율은 부친과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옆을 보았다.

어미 고양이가 수술실에, 새끼 고양이들이 입원실에 들어간 후 길우성은 핸드폰의 안무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옆에 있는 한율을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하며. 

실제로 길우성은 한율이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로 향해도 돌아보지 않았다. 영상에 집중해서 모르는 게 아니라, 아예 주의에서 배제하고 있었다.

마치, 스토커 같은 범죄자와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한율은 그런 길우성을 일별하곤 동물병원을 나섰다. 

‘좋아, 나중에 두고 보자.’

다니는 학교와 기획사를 안 이상, 당분간은 길우성을 직접 쫓아다니며 감시할 필요는 없다. 없지만, 한율은 일주일 뒤 다시 길우성의 학교로 찾아갔다. 

지난번에 왔을 땐 단순히 시야에서 놓쳤던 걸까. 이번엔 정문으로 나오는 길우성과 무난히 만날 수 있었다.

“뭐냐?”

먼저 길우성이 한율을 알아보곤 곧장 횡단보도를 건너와 다짜고짜 물었다. 한율이 걸친 교복과 자전거를 노골적으로 훑으며. 

“왜 왔어?”

“고양이들은.”

“약값도 내주게? 고맙다?”

길우성이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한율은 한숨을 쉬며 길우성의 손에 턱하니 무언가를 건넸다. 

“뭐야, 이건?”

“미랑인지 호랑인지 걔 진짜 스토커.”

“?!”

길우성이 놀라 부릅뜬 눈으로 한율이 건넨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경찰에게 잡혀 경찰서로 들어가는 사진이었다. 

“어제 잡혔는데, 호랑이한테 못 들었냐?”

“어··· 그럼······.”

사진과 한율을 번갈아보는 길우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미랑이 누나 스토커가 아니었어···?”

한율은 기고만장한 시선으로 그런 길우성을 내려다보았다. 사실상 키는 길우성이 조금 더 컸지만. 

“그렇다만?”

한율은 지난 일주일을 떠올렸다. 

길우성의 눈치가 대단히 좋아서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걸 알았다 쳐도, 다짜고짜 스토커라고 욕한 걸 보면 예전에 그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는 소리였다. 얼굴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그에 한율은 크리스탈 래빗 도촬범들 대화에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려, 해당 그룹 공카와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해보았다. 그 과정에서 예전에 미랑과 같은 학교, 같은 반 남사친이 괴한으로부터 미랑에게 접근하지 말라며 협박을 받았던 사건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랑에 대해 더 깊게 파보니, 같은 소속사에 고향 친구의 동생이 있다는 정보가 나왔다. 

그게 바로 길우성. 

길우성도 예전에 미랑의 스토커에게 협박을 받은 전적이 있다면, 그런 오해를 한 것도 얼추 이해가 되었다.

‘동물병원에서 잡지 않은 것은 얼굴을 보기도 했고, 무엇보다 신용카드를 사용해서 흔적이 남았기 때문이겠지. 언제라도 신고할 수 있다 자신이 들었을 테니.’

크리스탈 래빗 멤버가 아닌 길우성에게 붙은 스토커가 있을 지도 모른단 가정도 하긴 했지만, 아닐 거라 믿고 집어 치웠다. 

그리고 한율은 손수 스토커를 잡았다.

잡는 건 쉬웠다. 주변의 마나를 가벼운 바람 계열 마법으로 다스려 건물 위를 통해 미랑의 뒤를 밟다보니, 계속 비슷하게 움직이는 차량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토커 차량이었다. 한율은 해당 차량에 추적 마법을 새겼고, 바로 어제 아침엔 직접 스토커의 집을 살폈다. 

스토커의 집안 곳곳, 특히나 침실에는 말로 설명하기 민망한 온갖 도촬 사진이 붙어있었다. 한율은 즉시 음성 변조 앱과 공중전화를 이용해 스토커의 집주소를 부르고 이곳에 여자가 감금된 것 같다고 신고했다. 

“스토커라는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뒤집어 쓴 게 너어무우 억울해서 직접 잡아버렸지 뭐야?”

“···이 사람이 진짜 범인 맞아? 네가 스토커가 아니면 왜 그때 날 쫓아온 건데?”

착각으로 엄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지, 한율에게 따지는 길우성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한율은 길우성의 손에서 사진을 빼가며 대답했다. 

“내가 쑥스러움이 많아.”

“뭐?”

“WB래빗이 어떤 곳인지, 선생들은 괜찮은지, 레슨은 어떤지 묻고 싶은데 말을 못 걸겠어서 그냥 따라갔던 거야.”

한율을 바라보는 길우성의 미간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이게 뭔 개소리지? 하는 표정. 

“그럼 왜 그때 아니라고 말 안 하고 병원비까지 계산한 건데?”

“그래야 네가 나한테 존나게 미안해 할 테니까?”

“와······.”

길우성이 입을 벌리며 멍하니 한율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이 새끼 대체 뭐지?’ 라는 눈으로. 그러다 아차 하며 표정을 수습했다. 

“그럼 그··· 어쨌든 결론은 너도 우리 기획사 들어오고 싶다는 거지?”

“사과하면.”

“아니, 그건 뭔가 이상하잖아.”

“뭐가.”

“꼭 내가 사과를 해야 우리 기획사에 들어와 준다는 식으로···. 아니, 너님 정체가 뭐세요? 우리 학교는 어떻게 알았어? 그 스토커는 어떻게 알고 잡은 건데?”

한율은 말없이 길우성의 교복에 박힌 명찰과 학교명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길우성이 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흘끔흘끔 한율의 눈치를 살폈다.

“아, 알았어. ···죄송합니다?”

풀리지 않은 의문 두 개가 더 있을 테지만 길우성은 사과부터 던졌다. 한율은 덤덤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럼 안내해, WB래빗으로. 내가 호랑이 스토커를 잡은 은인이란 말은 절대 입도 뻥긋 하지 말고.”

“으음···.”

“그리고 너 폰 번호 내놔.”

“내 번혼 왜?”

“병원비, 안 갚을 거냐?”

“······.”

길우성이 울상을 지으며 한율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번호를 교환하면서도 한율을 굉장히 수상쩍다는 눈으로 힐끔거리다,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쑥스러움이 많긴 개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