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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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를 맴돌며 감시하는 것보단 차라리 옆에 붙어있는 게 낫겠다. 

며칠 동안 길우성의 처리를 두고 고민한 한율의 결론이었다. 

물론 한율은 아이돌이 되어 지구인들에게 재롱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옆에 붙어있어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관계, ‘친구’가 되는 게 목적이므로. 

‘언젠가 길우성의 ‘코팅’ 능력이 필요할 때가 올 수도 있어.’

차원이동 마법은 시간마법보다 더 큰 마력을 필요로 한다. ‘서한율’의 육체가 게이트가 열린 후 게이트를 오갈 수 있는 능력자로 각성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인간은 당장 피부로 느껴지는 억압과 폭력적인 처사에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언젠가 길우성의 능력이 필요한 상황이 왔을 때, 그의 마음속에 한율에 대한 악감정이 가득하다면 어떻겠는가. 

“후우···.”

고향을 쑥대밭으로 만든 지구인들. 그들과 무기를 모조리 끌고 올 수 있도록 한 단초 제공자이자 재앙을 친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구역질날 만큼 싫지만, 고향의 미래가 더욱 중요하기에 비위가 상하는 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제일 자신 있는 노래 한 곡 불러볼래요? 카메라 보면서.”

본래라면 오디션을 보기 위해선 응시하는 부문 파일을 첨부한 서류부터 통과되어야 하지만, 길우성이 직접 사무실로 연락하자 한 사람이 내려왔다.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그는 한율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연습실로 데려가 노래를 시켰다. 이름도 묻지 않았다. 

한율은 턱수염 남자가 설치한 카메라를 보며 미리 준비한 대중적인 발라드를 불렀다. 거울이 부착된 벽에 몸을 기댄 채 박자에 맞춰 까딱까딱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남자는 1절이 끝나기 무섭게 손을 들었다. 한율은 입을 다물었다. 

“원래 보컬 지망 아니지? 밴딩의 밴 자도 안 보이네.”

“불합격인가요?”

“왜 이렇게 성미가 급해? 이번엔 음이 어디까지 올라가나 한 번 볼까? 도레미부터 시작.”

길우성은 연습실 구석에 놓인 의자를 반대로 놓고 앉은 채 한율의 테스트를 구경했다. 한율은 속으로 내가 여기에서 뭘 하는 거지 자조하며 하나씩 음을 높여갔다. 그러곤 악을 쓰는 마지막 단계에 부딪혔을 땐, 얼굴에 열이 번진 거울 속 제 모습을 보곤 현타를 맞고 말았다. 

“오, 그만하면 잘 올라가네. 목소리도 깨끗하고, 나쁜 버릇도 없고···. 이번엔 춤 볼까? 뭐가 제일 자신 있어? 스트릿? 아니면 일반 안무? 빠른 걸로 줄까?”

“아무 거나 주세요.”

“오올, 자신감!”

가만히 있던 길우성이 까불거리며 외쳤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공간 전체를 쿵쿵 울리자, 길우성은 손을 뻗고 팔을 빙빙 돌리려던 자세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턱수염 남자도 입을 벌린 채 눈만 끔뻑거렸다. 

헛둘 헛둘.

한율은 3군 연습생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일념 하에, 신나는 팝에 맞춰 열심히 동요 댄스를 췄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와, 어떻게 이러지? 와—, 쓰블.”

모든 테스트를 마치고 나올 때였다. 길우성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한율을 휙 돌아보더니 한율을 뜯어먹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야, 좋겠다?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데 합격해서?”

“얼굴이랑 비율 좋은 건 안 쳐주냐? 그리고 아직 합격한 거 아닌데?”

랩을 했을 때 심각해졌던 턱수염 남자의 표정은, 한율이 대본을 읽고 카메라 테스트를 받는 동안 만개하는 꽃처럼 활짝 피었다. 그리고 한율에게 일주일만 이곳에 나와 레슨을 받으며 테스트 기간을 가져보자고 말했다. 

하지만 길우성은 그마저도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뭔가 단단히 자신 있는 구석이 있어서 오고 싶어 하는 줄 알았더니···, 씨발, 개나 소나 아이돌하겠다고 지랄이야.”

한율은 속으로 되받아쳤다. 

진짜 개랑 소보다 못한 침략자가 하는 말치곤 우습네. 

“턱수염 선생 말대로 안내나 해. 교복 입고 레슨 갈까?”

“턱수염 선생 아니고 강무기 팀장님!”

“소릴 지를 거면 병원비나 갚고 질러라?”

“······하, 짜증나.”

길우성이 휘적휘적 앞서 걸으며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것처럼 헝클어뜨렸다. 한율은 이번엔 속에서 우러나온 화를 그대로 입 밖으로 꺼냈다. 

“각질 날려, 얌전히 걸어.”

“······.”

잡아야 하는 놈이 있거든요

WB래빗 남자연습생 휴게실에 부착된 레슨 스케줄 표는 간단명료했다. 보컬레슨은 월수금, 댄스레슨은 화목금. 시간은 9시/14시/18시. 보컬과 댄스가 겹치는 금요일만 시간이 조정되어 있었다. 랩/작곡/연기/외국어는 개별. 

“스케줄이 대충이네.”

“그건 단체레슨 스케줄이고, 개별이랑 주말레슨은 사람에 따라 다 달라. 여기 안 적힌 과목들도 있고.”

그럼 목요일인 오늘은 댄스레슨뿐인가. 

“자, 오늘은 이거 입고 내일부턴 네 옷 가져와.”

길우성이 자신의 캐비닛에서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 신발까지 꺼내 한율에게 내밀었다. 한율은 받자마자 킁킁 냄새를 맡았다. 길우성이 욱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어제 빨고 놔둔 거거든? 어쨌든 넌 캐비닛 열쇠 안 받았으니까 오늘은 내 거에 같이 넣어.”

한율은 군말 없이 옷을 갈아입고 교복과 가방을 길우성의 캐비닛에 넣었다. 끼익, 철컹. 소리 내어 캐비닛을 닫은 길우성은 열쇠로 캐비닛을 잠근 후 잘 잠겼는지 2차 확인까지 했다. 덜컹덜컹. 

“따라 와. 아직 레슨 시작 전이지만, 미리 애들이랑 형들한테 인사하는 게 좋아.”

길우성을 따라 간 곳은 조금 전 테스트를 본 곳보다 더욱 넓었다. 그러나 열댓 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 좁아 보이기도 했다. 외적 연령대는 초등학생 고학년부터 20대 초반까지 다양했다. 성별은 모두 남자. 

길우성은 마치 자신이 한율의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한율을 데리고 다니며 인사시켰다. 

“얘는 일주일만 시험 삼아 있기로 한 서한율. 인사해.”

“안녕하세요.”

대부분의 연습생은 한율의 인사를 어색하게 받았다. 두 명 정도만 반갑기 그지없는 반응을 보였고, 어떤 이는 대놓고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길우성, 네 친구냐?”

“동갑이긴 해요.”

“친구가 아니란 거야? 그런데 얘가 입고 있는 거 네 옷 아냐?”

“나중에 얘기할게요. 몸부터 풀고.”

길우성은 적당히 빈 공간에 한율을 세워놓고 저 혼자 옆에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한율은 멀뚱히 서서 거울에 비친 길우성과 기타 등등 인원을 보다가, 도장에서 수련을 받기 전 늘 했던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장난스런 감탄이 날아왔다. 

“오, 유연성 좋은데?”

6시가 되자 안색이 창백한 여성이 연습실에 들어왔다. 흩어져 있던 연습생들이 일사분란하게 줄을 서는 와중, 길우성이 한율을 가장 마지막 줄로 끌었다. 

“오늘 단체레슨은 렛잇고드림 커버야. 그냥 대충 따라 춰. 어차피 오늘은 첫날이라 웬만하면 넌 지적 안 할 거야.”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이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스트레칭은 다 했죠? 지난 시간에 배웠던 렛잇고드림 바로 갈게요!”

쿵, 쿵, 쿵. 강렬한 비트가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허억, 허억···.”

수영을 배우고 도장을 다니며 체력은 적당히 좋다 자부했건만, 레슨이 끝난 뒤 한율은 한동안 바닥에 대자로 뻗어 일어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무술 수련과는 완전히 궤가 달랐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도 모자라 완급 조절, 사소한 동작 디테일까지 꼬투리 잡아 반복에 반복···. 체력을 한계까지 갈아버리는 느낌이었다. 

한율은 아주, 아주아주 잠깐이지만, ‘재롱 잘 부리네.’라고 슥 보고 넘긴 TV 속 아이돌에 대한 존경심이 솟았다.

재롱이라 무시해서 미안하다!

“이름이?”

한율의 시야에 트레이너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한율은 상체를 일으켰다. 

“서한율입니다.”

“댄스는 완전 처음?”

“네.”

“연습생 생활도 처음?”

고개를 끄덕이자, 트레이너는 덤덤한 얼굴로 그렇구나 대답하곤 한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율이 눈치껏 몸을 완전히 일으켜 똑바로 서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율에게 기본기 업앤다운을 가르쳐 주었다. 

“운동 좀 했던 것 같은데, 뭐 했어요?”

“수영이랑 호신술 조금이요.”

“그래서 기본자세가 곧고 몸도 잘 움직이는 구나. 아, 가슴 더 올리고. ···허리를 뒤로 빼면 안 되죠? 다쳐요, 조심.”

트레이너는 10분 정도 한율을 지도해주다가 다른 연습생에게 향했다. 정해진 단체레슨 시간은 끝났지만 자발적으로 연습생들을 봐주는 듯했다. 다른 연습생들은 귀에 이어폰을 꽂거나 작은 스피커를 앞에 두고 자율연습에 들어갔다. 

길우성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길우성은 음악을 켠 핸드폰을 거울 앞에 세워두곤 그 앞에서 춤을 췄다. 한율은 잠시 숨을 고르며 길우성이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곧잘 하네. 짜증나게.’

‘친구’가 되기 전에 데뷔라도 하면 여러모로 귀찮아지는데. 

한율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땀 냄새로 텁텁해진 연습실 공기를 이질적인 향기로 가르며 누군가 한율에게 다가왔다. 

“오늘 비공 오디션 보신 분?”

“네, 그런데요.”

사무직원인 듯한 사람이 서류와 볼펜이 끼워진 바인더를 내밀었다. 

“여기 연필로 동그라미 친 부분만 작성해서 2층 사무실로 가져와주세요. 아홉 시까지.”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요구하는 서류였다. 한율은 순순히 바인더를 받았다. 일주일 테스트 기간을 둔다고 해도, 이름도 주소도 모르는 사람을 기획사에 드나들게 할 순 없을 테니 마땅한 절차였다. 

“네.”

길우성은 옆에서 한율이 무언가를 끄적거리든, 2층 사무실을 다녀오든,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배운 기본기를 들썩거리든 내내 본인 연습에만 집중했다. 

시간이 흐르며 연습실엔 연습생들의 숫자가 하나 둘 줄었다. 나갔다가 다시 온 연습생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밤이 깊어가자 자리를 떴다. 밤 11시가 되었을 무렵엔 길우성과 한율 그리고 머리카락이 샛노란 연습생까지 단 세 명만 남았다. 

“나 먼저 간다!”

이윽고 노랑머리 연습생이 퇴장했다. 그제야 길우성이 핸드폰 음악을 껐다. 뚝. 연습실에 흐르던 유일한 음악이 끊기자 몇 시간째 반복되던 한율의 바운스도 멈췄다.

길우성이 황당한 눈으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너 설마 내내 그것만 추고 있었냐?”

“이것부터 완전히 익혀야 한다더라?”

계속 옆에서 추고 있었는데 이제야 알아차린 건가.

집중력과 끈기만 놓고 보면 마탑에 들어가기 위해 함께 수련했던 동료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지도.

“그리고 내 물건 다 네 캐비닛에 있잖아. 잊었냐?”

“아. 그냥 열쇠 달라 그러지.”

한율과 길우성은 마지막으로 연습실을 정리하고 나왔다. 흐느적흐느적. 한율은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서한율’이 된 이래 이렇게까지 몸을 쓴 건 처음이었다. 

“너도 씻고 갈래?”

남자연습생 휴게실로 들어온 후 길우성이 안쪽에 있는 샤워실을 가리키며 물었다. 

“됐어, 집에 가서 씻을 거야.”

“내일도 나오려면 잘 챙겨서 와. 연습할 때 입을 옷이나 신발, 수건, 목욕용품 같은 거. 아, 될 수 있으면 드라이어기도 챙겨오는 게 좋을 걸? 여기에 있는 건 구려서 머릿결 다 상하거든. 내일은 사무실에 가서 빈 캐비닛 열쇠 달라고 하고.”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놈이 아이돌 한답시고 왔다며 노려보던 몇 시간 전과는 사뭇 달라진 태도였다. 한율은 그의 태도 변화에 의아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선 핸드폰에 남은 모친의 부재중전화 표시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1초도 안 되어, 

-[서한율! 너 왜 연락이 안 돼! 어디야!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핸드폰에서 잔뜩 화가 난 모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새어나왔다. 이렇게 화가 난 목소리는 한율이 일곱 살 때 자전거를 타다 실수로 넘어진 이후 처음인지라, 한율은 잠시 당황하여 입술을 뻐끔거렸다. 길우성도 당황한 얼굴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죄송··· 합니다?”

-[대체 어디야!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지?!]

아니다. 화가 아니라 걱정이 절절하다. 

“미리 연락드린다는 걸 깜빡했어요. 죄송합니다. 곧 들어갈게요.”

-[아냐. 엄마가 데리러 갈 테니까 주소 불러. 이 밤에 자전거 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자전거는 놔두고 택시 타고 갈게요. 근처니까 오래 안 걸려요. 끊을게요.”

한율은 황급히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곤 한숨을 쉬었다. 고작 몇 시간 연락이 안 닿았다고 이렇게 걱정할 줄이야. 땅 속을 기어 다니는 마물이 예고 없이 튀어나와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도 아니건만. 

“택시타고 가게?”

“어. 네 옷은 빨아서 가져다줄게.”

한율은 가방에다 오늘 입었던 길우성의 옷을 개켜서 담았다. 

“집이 어딘데?”

“서초동.”

타악! 대답을 들은 길우성이 황급히 캐비닛에 걸어놓은 교복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나 가는 데까지만 태워다 주라.”

한율은 순간 반짝거리는 길우성의 두 눈을 손으로 콕 찌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꾹 참았다. 

아무리 친구사이가 되어야 한들, 같은 남자가 집앞까지 바래다주며 잘해주면 불쾌한 오해를 살 수 있음이다. 한율은 정말로 겹치는 곳까지만 길우성을 태워다주었다. 길우성은 고맙다는 해맑은 인사를 남기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 뒤 집으로 들어간 한율은 처음으로 모친에게 등짝을 수차례 얻어맞았다. 옆에서 말리던 부친은, 연예기획사에 오디션을 보러갔다가 레슨까지 받고 왔다는 한율의 말을 듣곤 입을 꾹 다문 채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자리는 여느 때보다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뉴스가 틀어진 TV 볼륨도 모기소리만큼 작았다. 

“한율아.”

묵묵히 식사하던 부친이 한율을 불렀다. 

“네, 아버지.”

“왜 하필 WB래빗이냐.”

부친의 얼굴엔 걱정과 섭섭함이 가득했다. 걱정은 그가 방송계와 연예계 생태에 아주 잘 아는 까닭일 것이고, 섭섭함은 미리 그에게 상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데서 기인했을 것이다. 

“WB래빗의 좌 대표가 그 바닥에선 드물게 성실하고 올곧은 사람이란 건 안다. 하지만 솔직히 그런 성향은 그 바닥과 안 맞아. 대표가 안 맞으니 밑에 애들이 더 죽어라 발로 뛰어야 해. 그런데 그렇게 뛰게 할 정도로 회사 자금 사정이 넉넉하냐면, 그것도 아냐.”

“이이도 참. 일주일 테스트 기간부터 갖고 있다잖아요. 뭐 벌써 그런 얘기로 애 기를 죽이고 그래요? 한율이가 하고 싶어서, 스스로 원해서 간 곳이라잖아요.”

“하지만 당신도 잘 알잖아. 그쪽 바닥···.”

“한율아, 아빠 말 신경 쓰지 말고 밥 먹어.”

모친이 부친의 팔을 찰싹 때리며 더 이상의 잔소리를 막았다. 한율은 슬쩍 부친에게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지어주곤 수저를 움직였다. 

부친은 그런 한율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날 닮아 인물이 훤한 게 죄지, 죄. 후······.”

“이이가 뭐래, 진짜.”

등교할 땐 자전거를 애용했던 한율이지만, 자전거를 WB래빗 안에 세워두고 온 탓에 오늘은 부친의 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사실은 간만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려 했으나, 부친이 한율을 잡아 조수석에 태웠다. 

“한율아, 엄마 아빠가 지금까지 한율이 하고 싶은 거, 배우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줬던 거 알지?”

“네.”

집에선 못 다했던 이야기의 후속인가. 

“그건 엄마 아빠가 너 밖에 몰라서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그건 네가 원했던 것들을 늘 올바르게 사용하고 배웠기 때문이다. 비싼 물건을 샀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하지도 않고, 게임만 하지도 않고, 공부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거나 말썽을 피우지도 않고. 그래서 엄마 아빠도 계속 한율이 널 믿고 계속 지지해주려 노력할 수 있는 거야.”

“네, 잘 알고 있어요.”

부친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마침 신호에 걸린 차를 부드럽게 멈추곤, 한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친이 물었다. 

“아이돌, 정말 하고 싶은 거냐?”

다른 열일곱 살 아이들. 특히 남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모친과는 친해도 부친과는 어색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얼추 남들을 따라할 필요가 있었던 시기는 지나도 한참 지났기에, 한율은 순순히 머리를 내어준 채 대답했다. 

“네, 꼭 잡아야 하는 놈이 있거든요.”

얼굴 확인

툭. 복도를 걷던 길우성의 어깨를 누군가 쳤다. 이어폰이 귀에서 쑥 빠지며 음악이 멀어지고, 대신 짜증난 목소리가 침투했다. 

“와씨, 네가 잘못 본 거라니까? 그만 좀 해라, 쫌! ···길우성, 미안, 미안.”

김유일이었다. 김유일을 쫓아오던 여학생이 버럭 화를 냈다. 

“말해주기 싫으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되지, 왜 계속 거짓말 하냐고!”

“아놔, 진짜 나 그때 고양이만 봤다니까?!”

“넌 고양이랑 대화 하냐?! 왜 자꾸 멀쩡한 사람이랑 얘기해놓고 고양이래!”

“와, 끈질겨, 끈질겨! 와, 미친! 네 말이 사실이래도 내가 이런 널 소개 시켜 주냐 미쳤다고?!”

대체 뭔 소리들인지. 길우성은 내용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들의 언성을 듣다가 다른 쪽 이어폰을 마저 빼며 교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김유일이 한숨을 푹 내쉬며 길우성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진짜 미쳐서 돌아가시겠네.”

“뭔 일인데?”

김유일이 기다렸다는 듯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길우성에게 하소연했다. 

“아니, 내가 저번 주 목요일에 학교 끝나고 교문을 나왔는데, 웬 못생긴 떼껄룩 하나가 내 앞을 턱하니 막는 거야. 그래서 신기해서 그냥 봤거든? 그런데 바로 다음 날에 쟤가 어제 나랑 학교 앞에서 얘기했던 애 누구냐고 묻는 거야? 친구면 소개시켜 달라고, 다 봤다고. 그래서 나는, 뭔 소리야 난 고양이만 봤는데. —했더니 그때부터 내가 거짓말한다고, 남소 시켜주기 싫어서 같잖은 수작 부린다고 지랄하잖아!”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김유일은 그 뒤로 한참동안 씩씩거리고 나서야, 조금 전에 자신이 친 길우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무튼 아깐 미안했다. 넌 몸이 재산인데.”

“얼굴도 재산이라고 해주라.”

“크큭?”

김유일은 고개를 기울이며 한 번 웃곤 자기 자리로 갔다.

농담이라도 동의는 해주고 가면 안 되나. 길우성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핸드폰을 들었다. 새카만 액정을 거울삼아 앞머리를 정돈했다. 

‘나 정도면 잘생긴 얼굴 아닌가? 역시 안경이 문젠가?’

그러면서 길우성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춤, 노래 무엇 하나 잘 하지 못하면서 아주 쉽게 강무기 팀장에게 OK 사인을 받은 서한율을. 

어떻게 그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딱 알맞게 배치되어 있을 수 있지? 피부는 왜 그렇게 좋아? 역시 금수저라 먹는 게 달라서 그런 건가? 비율도—. 

길우성은 자신의 옷을 입었던 서한율, 특히 바지 무릎 위치를 떠올렸다.

‘키는 분명 내가 더 큰데, 다리 길이는 그놈이 더···.’

길우성은 왠지 모를 울컥함을 느끼며 책상에 이마를 댔다.

“세상은 역시 불공평해···.”

아이돌로서 능력치는 자신이 더 높지만, 그 바닥은 곧 망해도 얼굴만은 둥둥 뜬다는 설이 있다.

“쓰블···.”

띠링. 그때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누나 친구이자 소속사 선배인 미랑이었다. 

-[나 스토커 잡혔대ㅠㅠ]

[ㅇㅇ 어제 이 팀장님한테 들었어요. 축하해요 누나.]

길우성의 머릿속에 어제 일이 떠올랐다. 

서한율이 잠시 2층 사무실로 서류를 주기 위해 갔을 때, 길우성은 매니지먼트팀에 연락해 미랑의 스토커가 잡혔냐고 물었다. 팀장은 어떻게 바로 어제 잡힌 걸 아는 사람처럼 딱 맞춰서 물어보냐고 놀라워했다. 

-[그래서 말인데, 너도 그 스토커한테 협박당했다고 변호사 쌤한테 말했더니 네 피해사실도 같이 엮으면 어떻겠냐고, 너한테 물어보래.]

-[근데 그렇게 하려면 너도 경찰서 와야 돼ㅠㅠ]

[난 괜찮아요. 내 협박죄까지 추가해서 그 새끼 형량 더 받게 하죠, 뭐ㅋ 면상도 보고ㅋ]

미랑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길우성은 어제도 들었던 의문을 떠올렸다. 

‘대체 무슨 수로 회사에서도 몇 달 동안 잡지 못했던 그 스토커를 잡은 거지?’

당장 서한율에게 묻고 싶었지만, 길우성은 일단 입을 다물고 서한율을 두고 보기로 했다. 다른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작 열일곱 살이 무슨 대단한 음모라도 꾸민다는 것처럼 오버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서한율이 수상쩍게 느껴졌다. 아이돌이 하고 싶다고 찾아온 거에 비해, 노래와 춤을 한 번도 안 해 본 것 같은 면도 그렇고. 

‘우리 기획사가 소형이라 만만해보여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그런데 그런 것치곤 레슨은 열심히 따라왔단 말이지? 아무리 기본기라도 몇 시간 내내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이상한 놈이야.

길우성은 그렇게 결론 내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

‘아무리 생각해도 6일은 너무 짧아.’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한율은 다른 생각에 잠겼다. 턱을 괸 채 펼쳐놓은 노트를 펜으로 콕콕 찌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후에 비가 오려는지 날이 잔뜩 흐렸다. 

‘어떻게든 테스트 기간을 통과하고 WB래빗에 붙어있으면서 친분을 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냥 위기에 빠뜨린 후 구해주는 식으로 신뢰도를 쌓아?’

갈등이 또 스멀거린다.

한율은 속으로 작게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 세계, 이 시대는 곳곳에 숨어있는 카메라가 너무 많다. 

‘자칫 일이 잘못되면 괜히 힘을 낭비하는 건 차치하고, ‘서한율’로서 지금껏 누렸던 것들을 이용하는 데에 제약이 걸릴 지도 몰라. 내 타깃이 길우성 그 한 놈 뿐도 아니고.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안전하게 가자, 안전하게. 아직 게이트가 열리려면 5년 남았어.’

그러나 한율의 걱정은 이미 작게 터지고 있었다. 

한 웹툰 작가 지망생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 그곳 익명 자유게시판에 동영상이 첨부된 한 게시글이 올라왔다. 

[님들, 이거 사람 맞죠??]

동영상 속엔 새카만 옷과 모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인영이 아주 빠르게 건물 위를 내달리다가 멀찍한 건물 사이를 사뿐히 뛰어 넘고 있었다. 

-영화? 그래픽? 잘 모르겠지만 빨간 십자가들이 띄엄띄엄 서있는 걸로 봐선 우리나라가 확실하다!

ㄴㅁㅊ ㅋㅋㅋㅋㅋㅋ ㅇㅈ한닼ㅋㅋㅋ

ㄴ우리나라가! 맞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뛰어? 100m 5초 각인데? 그것도 건물마다 높낮이가 다른데, 완전 날아다니는 수준 아니냐??

ㄴ사람일 리가 있겠어요? 게임 트레일러겠죠.

그러나 영상 속 인물의 움직임이 그들의 상식으론 너무 비현실적인 탓에, 반향은 소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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