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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고 집에 들렀다가 WB래빗에 온 한율은 잠시 문 앞에서 대기해야 했다. 어제는 출입증을 가지고 있던 길우성과 함께여서 무난히 통과했지만, 오늘은 굳게 잠긴 문의 초인종을 눌러야 했다. 그리고 잠깐 기다리라는 응답을 받고 서있는 중.
‘테스트에 합격하려면 저들에게 될성부를 떡잎으로 보여야겠지.’
한율은 문에 달린 작은 창에 비친 제 얼굴을 확인했다.
‘본래 내 얼굴이었다면 더 좋았을 걸.’
사실 이 얼굴도 그의 기준으론 썩 나쁜 편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곧잘 잘생겼다, 예쁘장하게 생겼다라는 말을 들어왔으니. 그러나 사실 그가 선호하는 외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소한 로건 워커 얼굴이었다면.’
짙은 갈색의 턱수염과 구레나룻이 어울리던 로건 워커는 키도 훤칠하게 더 컸으며 근육이나 뼈도 더 튼실했다.
한율은 제 팔의 근육을 만지며 생각했다.
‘이 몸은 아무리 운동을 해도 로건 워커처럼 울퉁불퉁한 근육질 몸으로 키우기가 쉽지 않아 보인단 말이지.’
스륵. 굳게 닫혀있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입구 옆 데스크에 앉아있던 직원이 한율에게 열쇠를 내밀었다.
“서한율 군 맞으시죠? 여기 휴게실에서 사용할 캐비닛 열쇠에요.”
“출입증은요?”
“아··· 그건 안 주셨는데. 카드는 강 팀장님께 직접 따로 말씀하셔야 할 것 같아요.”
테스트를 합격하기 전까진 오늘처럼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오란 소린가.
“네, 감사합니다.”
딱히 섭섭해 할 일도 아니어서 한율은 덤덤히 인사했다. 그리고 남자연습생 휴게실이 있는 지하로 향하려다, 어제 로비 구석에 세워둔 자전거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 어제부터 여기 있었던 자전거 못 보셨어요? 새카만 거.”
“아, 그건 오늘 아침에 강 팀장님께서 사무실로 옮기셨어요. 계속 여기에 두면 문제생길 것 같다고.”
“네에···.”
한율은 대답하곤 재차 목례한 후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로비에 설치된 CCTV를 훑었다.
‘나중에 찾아도 되겠지.’
남자연습생 휴게실엔 연습생 몇 명이 의자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에게 목례하자, 웃으면서 대화하던 그들은 어색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고요해진 휴게실엔 한율이 캐비닛을 여는 소리만 울렸다. 철컥, 끼익. 집에서 챙겨온 옷가지와 물건을 정리하며 한율은 자신에게 박힌 그들의 시선을 느꼈다.
‘같은 회사에 소속된 연습생들이라 할지라도 동료이기 전에 라이벌. 경계하고 탐색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들어온 지 고작 이틀 밖에 안 됐는데 왜?’
아무래도 윗사람들에게 자신의 실력에 대한 언질을 전혀 못 들은 게 아닐까. 춤만 초보인 게 아니라는 걸. 한율은 그리 추측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입을 다물고 한율을 훔쳐보던 연습생들이 슬슬 다시 잡담을 시작했다.
“그나저나 어제 로비에 있던 자전거는 누구 거였대? 검색해보니까 유호 형 말처럼 겁나 비싼 거던데.”
“몰라? 아침엔 있었는데 낮에 다시 보니까 없어졌더라.”
“언이가 쌔벼간 거 아냐?”
“민솔, 입조심해.”
편한 셔츠에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한율은 모친이 챙겨준 보온병을 열었다. 매운 향이 살짝 섞인 새콤달콤한 향기가 올라왔다. 레몬생강차. 모친은 목에 좋은 거니 가져가서 꼭 자주 마시라고 당부했다. 한 모금 마셔보니 정말 목이 뜨뜻하게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맛도 괜찮았다.
“흠.”
한율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르륵 그려지다 사라졌다. 끼익, 툭. 그리고 핸드폰과 보온병만 들고 캐비닛을 닫아 한 걸음 옮기려 할 때였다.
“어, 이름 뭐였더라. 신입아, 저기, 야.”
“저요?”
연습생 중 하나가 휴게실을 나가려던 한율을 급히 불러 세웠다.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그가 한율의 캐비닛을 가리켰다.
“캐비닛 잘 잠가. 그러다 물건 사라진다?”
“아···, 네. 고맙습니다.”
정색하며 말하는 걸 보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닌 듯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누군가 ‘쌔벼간다’라는 말을 했었지.’
어제 길우성도 캐비닛을 잠근 후 잘 잠겼는지 재차 확인했었다.
한율은 캐비닛을 잘 잠그곤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금요일 저녁 시간대 단체레슨은 보컬이 6시, 댄스가 8시로 조정되어 있었다. 현재 시각은 5시 20분. 한율은 어제 있었던 연습실에 들러보았다. 예상대로 길우성이 그곳에서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턴을 하던 길우성과 시선이 마주쳤다. 길우성은 핑그르르 마저 돈 후 손을 들었다.
“왔냐?”
“왔다.”
“너 자전거 없어졌더라?”
“강 팀장님이 아침에 사무실로 옮겼대. 거기 두면 문제 생길 것 같다고.”
“아아.”
연습실 안에는 길우성 외에 아무도 없었다. 길우성은 납득이 간다는 얼굴로 끄덕이곤 화제를 돌렸다.
“어제 기본기 배운 거 생각 나냐? 하룻밤 새에 다 까먹은 건 아니지?”
“내가 멍청해 보이냐? 봐봐.”
한율은 음악에 맞춰 어제 배운 업앤다운 동작을 시작했다. 짝, 짝. 박수로 박자를 맞춰주며 길우성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오오, 몸에 잘 익었네. 앞으로 6개월 더 삭히면 되겠다.”
“······.”
과장이 들어간 감탄사에, 한율은 잠시 ‘내가 왜 이 침략자 앞에서 재롱이나 부리고 있지’ 하며 작금의 상황에 한탄했다.
단체 보컬레슨에 참가하는 연습생들의 숫자는 어제 댄스레슨을 받은 수에 비해 부쩍 적었다. 길우성은 보컬레슨은 댄스에 비해 개별 레슨 비율이 높아 그렇다고 설명해주었다.
“대표님이 아이돌이든 뭐든 가수는 기본적으로 노래가 탄탄해야 한다는 마인드라서, 단체레슨 받는 건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들뿐이라고 보면 돼. 여기에서 제일 오래 된 저 형이 6개월 차.”
그러나 말만 단체레슨이지, 음악수업처럼 다 같이 노래를 부르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트레이너는 연습생 개개인에 맞춰 레슨을 진행했고, 한율은 기초 중의 기초라는 복식호흡과 발성부터 배웠다.
“자, 조금 아플 거야. 내가 꾹 누르는 순간 힘 빡 주면서 그대로 소리내면 돼. 허!”
밥은 먹고 다니냐? (1)
트레이너는 신호에 맞춰 한율의 복부를 힘껏 눌렀고, 처음엔 뭣 모르고 참았던 한율은 두 번째가 되어서야 복부에 힘을 주며 나오는 대로 소리 냈다. 그러곤 쩌렁 울려 퍼지는 제 목소리에 스스로 놀라 움찔거렸다.
“오, 발성 좋은데? 울림통도 크고. 지금 낸 소리가 네가 복식으로 낸 발성이야. 꾸준히 연습하면 나중엔 고음도 예쁘게 잘 뽑겠는데? 나쁜 버릇도 없고, 좋아, 좋아.”
노래 한 소절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쁜 버릇 운운하는 걸 보니 한율의 오디션 영상을 본 모양이었다.
트레이너는 마음껏 색을 칠할 수 있는 새하얀 도화지를 찾은 아이처럼 좋아하다가, 돌연 고개를 홱 돌리며 다른 연습생을 지적했다.
“내가 쓸데없는 밴딩 넣지 말라 그랬지?! 벌써부터 그런 걸로 자꾸 커버하려 들면 나중엔 고치기 어려워진다고! 기본까지 무너지고!”
“죄송합니다!”
보컬레슨에 이어 댄스레슨까지 다 받은 후, 길우성은 당연하다는 듯 자율연습을 위해 연습실에 남았고, 한율도 자리를 지켰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자정이 되어도 연습실엔 두 사람을 포함해 다섯 명이 남았다.
“아···, 더는 배고파서 못 하겠다······.”
빰! 벌러덩. 음악이 끝남과 동시에 길우성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오늘도 꿋꿋이 기본기를 연습하던 한율도 동작을 멈췄다.
“누가 나 좀 이대로 집까지 옮겨다줬으면 좋겠다······.”
진짜 옮겨주면 경악을 넘어 기절하지 않을까. 한율은 길우성을 내려다보면서 타월로 땀을 닦았다. 길우성이 한율의 발을 툭 치며 물었다.
“야, 우리 나가서 김밥 한 줄 먹을까?”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나와서 연습하는 게 컨디션도 안 무너지고 좋지 않아?”
길우성이 바닥에서 사지를 파닥거렸다.
“나 주말마다 알바가거든?! 월세 벌어야 되거든?!”
“알바? 무슨 알바하는데.”
“까아페에.”
축 늘어진 낙지처럼 흐느적거리며 뒹굴거리는 폼이 이대로 연습실 바닥에서 잘 태세다. 한율은 길우성의 다리를 발끝으로 툭툭 걷어찼다.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 네 옷 안 받을 거냐?”
“옷 빌려준 값으로 김밥 하나만 사주라···.”
“너 나한테 빚진 거 있지 않냐?”
“······.”
그제야 길우성이 꾸무럭꾸무럭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남은 연습생들에게 먼저 간다고 인사한 후 연습실을 나왔다.
“고양이들은 어떻게 됐어?”
“누나 친구가 좋은 집을 알아봐줘서, 퇴원하면 바로 그 집으로 보내기로 했어. 어미랑 새끼들 전부.”
“잘 됐네.”
누나 친구가 혹시 미랑은 아닐까. 한율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런데 너 말이다. 왜 어제 오디션 볼 때 그런 춤 춘 거냐? 그거 고래가족 율동 맞지?”
“참 빨리도 묻는다.”
오디션을 볼 때 동요 율동을 선보인 것은, 어설프게 방송안무를 휘적거리는 것보단 유치원생 시절에 확실히 몸에 익혔던 동요 율동을 완벽히 보여주는 게 더 낫겠단 판단에서였다.
한율의 설명을 들은 길우성은 아 하며 수긍했다.
“하긴. 춤을 잘 아는 사람 입장에선, 누가 춤이랍시고, 그것도 잘 아는 춤을 엉성하게 춰대면 더 열 받긴 하지. 아는 만큼 단점이 더 잘 보이니까.”
그렇게 길우성과 소소한 잡담을 툭툭 주고받으며 휴게실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쾅! 휴게실 안에서 돌연 큰소리가 들렸다.
“씨발, 복도 CCTV 까보라고 해볼까, 지금?!”
“야, 진정해! 다치면 어쩌려고!”
무슨 일이지? 한율과 길우성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벌컥! 길우성이 황급히 문을 열어젖히자, 캐비닛에 등을 부딪친 연습생과 그의 멱살을 잡고 있는 연습생, 그들을 말리는 두 명의 연습생, 모두 넷의 시선이 길우성과 한율을 향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요.”
“마침 잘 왔다, 길우성. 하나만 묻자.”
멱살을 잡고 있던 연습생이 거칠게 멱살을 놓으며 길우성에게 다가왔다.
“뭔데요?”
한율은 길우성의 뒤에서 고개를 옆으로 빼며 멱살이 잡혔던 연습생을 살폈다. 그는 흥분해서 벌겋게 된 얼굴로 입술을 콱 깨문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너 댄스레슨 중간에 휴게실 온 적 있냐?”
“아뇨?”
“끝난 후엔?”
“화장실 한 번 갔다 왔죠?”
“휴게실 쪽은 한 번도 안 왔었단 말이지?”
“네. 아, 무슨 일인데요.”
하지만 멱살이 잡혔던 연습생을 흘끗거리는 길우성의 옆모습을 보자, 짐작 가는 바가 있어 보였다.
“뒤에 서한율? 너도 안 왔었고.”
“쟤는 계속 내 시야에 있었다니까?”
대답은 다른 연습생이 했다. 한율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에요.”
길우성이 답답해하며 세 번째로 물어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까닥. 한 연습생이 멱살이 잡혔던 연습생을 고갯짓과 눈짓으로 가리켰다.
길우성이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휘적거렸다.
“어쨌든 나 좀 씻을게요. 나와 주세요.”
멱살이 잡힌 연습생이 부딪힌 캐비닛 바로 옆이 길우성의 것이었다. 길우성이 끼어들기 싫다는 뜻을 내비치자, 그들은 멱살이 잡혔던 연습생을 한 번씩 노려보며 비켜주었다.
한율은 그들과 멀찍이 떨어진 자신의 캐비닛으로 갔다. 아침에 들었던 충고와 현재 분위기로 짐작컨대, 멱살을 잡았던 연습생이 댄스 레슨 시간 이후 뭔가를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잡힌 쪽은 그들이 지목한 유력 용의자일 테고.
멱살을 잡았던 연습생이 다 들으라는 듯 말했다.
“씨발, 어디서 거지같은 새끼가 들어와선 물 흐리고 지랄이야.”
그 순간이었다.
퍼억! 쿵! 멱살이 잡혔던 연습생이 멱살을 잡았던 연습생을 향해 주먹을 날렸고, 휴게실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이 새끼가!”
“저 미친!”
“잡아, 잡아!”
싸움은 거의 일방적이었다. 평소 묵은 감정이 많았었는지, 멱살이 잡혔던 연습생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되는 대로 때렸다. 영어로 욕을 마구 내뱉으며.
소란은 연습실에 있던 다른 연습생들을 비롯해, 연락을 받은 남은 회사 직원까지 달려와 말려서야 가까스로 멈췄다.
그러나 맞은 연습생은 입술이 터지고 부러진 코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경찰을 부르라고, 저 새끼 당장 한국에서 추방시키라며 소리를 질러댔고, 결국 이 사태는 야밤에 기획사 대표까지 달려오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남석이가 휴게실에 잠깐 둔 블루투스 스피커가 사라져서 라이언에게 물었는데, 라이언이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대표는 가장 먼저 두들겨 맞은 연습생을 직원과 함께 병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가해자는 다른 사무실에 두고, 남아있던 다른 연습생들을 모두 대표실로 불렀다.
상세한 정황을 묻고 따진 건 대표와 거의 동시에 소환된 신인개발팀 강무기 팀장이었다. 대표는 그 옆에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서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좌기훈. 과거 가수 겸 프로듀서였지만, 3대 기획사 중 하나라 불리는 스엔 엔터테인먼트의 산하 레이블 대표를 맡았다가 4년 전 완전히 독립한 현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대표. 나이는 40대 중반이지만, 연예인일 적의 자기관리가 습관화되었는지 외적으론 기껏해야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다짜고짜는 아니고···.”
설명하던 연습생이 말을 흐렸다.
분명 라이언의 입장도 들어볼 텐데, 공연히 사실을 날조했다가 신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럼에도 피해자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충돌하는 모양이었다.
길우성이 입을 열었다.
“씨발, 어디서 거지같은 새끼가 들어와선 물 흐리고 지랄이야.”
흠칫. 두 어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길우성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라고 남석이 형이 혼잣말했어요. 그걸 들은 라이언이 빡쳐서 선빵을 날렸고, 남석이 형은 거의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죠. 아니, 멱살 잡았던 걸로 치면 남석이 형이 선빵인가?”
옆에 나란히 서있던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멱살 잡는 것도 폭행죄에 포함된다더라. 그리고 잡은 것뿐만이 아니라 캐비닛 쪽으로 세게 밀치지 않았나? 우리가 갔을 때 분명 그렇게 보였는데, 맞죠?”
한율은 처음 휴게실에 있었던 두 연습생을 향해 패스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대답을 망설였다. 강무기 팀장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두 사람을 다그쳤다.
“대답해. 우성이랑 한율이 말이 사실이야?”
“그게···.”
“친분에 따라 주관적 시점을 객관적 사실인양 왜곡하는 거, 그거 의리도 뭣도 아니다. 지금 너희들 말에 생긴 억울한 피해자가 나중에 같은 팀이 될 수 있어! 그때 너희들, 제대로 떳떳하게 같은 멤버로서 얼굴을 볼 수 있겠어?”
‘팀’과 ‘멤버’란 단어에, 두 사람이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허리를 곧게 세우며 대답했다.
“아니요!”
“우성이랑 한율이 말이 사실입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좌기훈 대표가 입을 열었다.
“그럼 사라진 스피커는? 정말로 라이언이 그런 게 맞아? 확인했어?”
“아뇨···.”
“하지만 대표님, 이참에 라이언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라이언이 온 뒤로—.”
“나는 지금 라이언이 정말 그런 짓을 했는지 묻고 있어.”
“······.”
뭐라 토로하려던 연습생들이 서로 눈치를 힐끔거렸다. 좌기훈 대표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나도 너희들 사이에서 라이언에 대해 어떤 불미스러운 소문이 떠도는 지 잘 알아. 하지만, 소문에 소문, 그리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선입견과 의심만 믿고 한 사람을 몰아세우면 안 되는 거야. 여기에서 누구 한 사람, 라이언의 말을 제대로 들어준 사람 한 명이라도 있었어?”
한율을 제외한 연습생들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입을 다물었다. 한 연습생은 입속으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영어 못하는데···. 다른 연습생도 웅얼거렸다. 걔도 한국말 잘 못하고···.
좌기훈 대표가 재차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오늘은 시간이 늦었고 다들 피곤할 테니 집으로 돌아가. 아니다, 강 팀장님. 남는 차 있죠?”
“네.”
“저는 라이언이랑 얘기 좀 나눌 테니, 강 팀장님이 얘들 좀 집까지 태워다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함구해줬으면 좋겠다. 우리가 사실 확인을 끝낼 때까지. 알았지?”
대표의 당부에 연습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네!”
연습생들은 방향에 따라 차 두 대로 나뉘어 탔다. 한율은 길우성, 다른 연습생 둘과 함께 직원이 모는 차에 함께 타게 되었다.
쏴아아. 낮부터 날이 그렇게 흐리더라니. 밖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 탓인지 차내 대화가 더 웅웅 울렸다.
“아림 엔터에서 왔다고 했을 땐 ‘와, 아림에 합격했으면 진짜 실력 쩔겠다’ 라고 긴장했었는데, 완전 다른 의미로 긴장하게 될 줄이야 어디 상상이나 했겠냐고.”
“야, 내가 말했잖아. 아림에서 3개월 만에 짤린 거 보면 분명 뭔가 있을 거라고. 그리고 봐봐. 한국 온 지 5개월이나 됐는데 한국말은 전혀 늘지도 않고 욕만 귀신같이 알아듣잖아. 형, 진짜 걔는 왜 데려온 거래요? 영어되는 외국인 하나 있어야 뽀대나니까?”
“씨발, 검머외는 믿는 게 아니랬는데.”
“야야, 말조심들 해. 아이돌 되겠다는 애들이.”
길우성은 차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진 터라, 한율은 연습생들과 직원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비오는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라이언이란 연습생이 어떤 인물이든, 진실이 어떻든 간에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다음 날. 주말은 단체 레슨이 하나도 없는 날인데다 감시 대상인 길우성도 알바가 끝난 후에야 나온다고 했지만, 한율은 아침 일찍 WB래빗으로 향했다. 하려는 의지를 내비쳐야 테스트 점수를 조금이나마 더 받을 테니.
출입문은 어제 로비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한율을 알아보고 열어주었다. 한율은 지하로 가지 않고 곧장 2층 사무실로 향했다.
“무슨 일?”
노크 후 문을 열자, 사무실 벽면 한쪽에 부착된 거대한 스케줄표에 뭔가를 적어 넣던 직원이 한율을 돌아보았다. 한율은 사무실 구석에 세워진 자전거를 확인했다. 헬멧도 자물쇠와 함께 잘 걸려 있었다.
“혹시 밤에도 여기에 사람 있을까요?”
“물론? 그런데 왜?”
“저 자전거 찾아가려고요.”
“아아, 네가 자전거 주인이구나. 이름이?”
“서한율입니다.”
직원은 스케줄표 바로 옆 화이트보드 구석에 매직으로 끄적거렸다. [자전거 주인, 서한율]
밥은 먹고 다니냐? (2)
한율은 직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후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막 계단으로 몸을 돌리려 할 때, 사무실 바로 옆 회의실에서 나오던 라이언과 딱 마주쳤다. 부스스한 행색을 보아하니 여기에서 잔 모양이었다.
“······.”
“······.”
라이언이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먼저 시선을 피했다.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데다 어제 싸움이 있었을 땐 말리기는커녕 내내 멀찍이 떨어져 방관만 했지만, 쟤도 날 도둑놈이라 여길 거란 그런 체념어린 표정.
‘얼굴에 다 드러나네.’
그때, 계단 아래 로비에서 올라오는 좌기훈 대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석이는 좀 어때요? 밥은 먹었대?”
“퉁퉁 부어서 조금 힘들어하긴 했지만 먹긴 먹었대요. 오후 늦게 퇴원 가능할 것 같다고.”
“아···, 그때 가봐야겠네.”
딱히 할 말도 없으니 무시하고 그냥 갈까 하던 한율은 단숨에 마음을 바꿨다. 라이언에게 상냥한 미소를 씩 지어주며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었다.
[밥은 먹었어요? 나 아직 여기 구내식당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괜찮으면 같이 갈래요?]
“······!”
머리는 까치집을 해놓고 시무룩하게 서있던 라이언이 놀란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은 등 뒤 쪽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대표의 기척을 느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나랑? 같이?]
[그럼 여기 형 말고 누가 있는데요. 빨리 가서 세수하고 와요. 나 배고파.]
[알았어! 금방 세수하고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카우보이!]
···카우보이?
한율은 순간 멍해졌다.
‘아, 내가 익힌 영어가 텍사스 사투리긴 하지.’
그것도 5,60년대에 익혔던 거라 꽤 구수하게 들렸을 터다.
라이언은 신난 얼굴로 그런 한율의 옆을 지나쳐 계단을 뛰어 내려갔고, 중간에 좌기훈 대표를 향해 ‘대표님, 굿모닝!’ 크게 인사했다.
한율은 표정을 수습한 후, 그제야 대표의 존재를 알아차린 척 뒤를 돌았다. 그러곤 계단을 올라오는 좌기훈 대표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활발하게 뛰어가는 라이언의 뒷모습을 보던 좌기훈 대표가 한율을 바라보았다. 그리 크게 말하진 않았지만 아마 다 들었을 것이다.
좌기훈 대표가 부드럽게 웃으며 한율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 한율아. 오늘도 열심히 하고, 밥 맛있게 먹어.”
“네!”
그가 한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고, 한율은 예의바르게 재차 인사한 후 계단을 내려갔다.
WB래빗 구내식당은 회사 직원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지만, 연습생과 소속 아티스트, 외부 손님들은 이용규정이 제각기 달랐다.
연습생은 매월 1일마다 무형으로 된 구내식당 이용권 30회 분을 받게 되어, 식당 입구에서 연습생 전용 리스트에 이름을 적고 들어가 밥을 먹는 식이었다. 만약 이용권 횟수가 다 소진되면 사무실에 가서 따로 사비로 충전할 수 있고, 남은 이용권은 다음 달로 이월이 되어 차곡차곡 누적된다. 계약이 끝날 때까지 쭉.
처음 WB래빗 구내식당에 들어온 한율은 리스트에 이름을 적으며 생각했다.
‘제대로 기재하는지 지켜보는 사람도 없고. 혹시 일부러 허술하게 만든 건가?’
그러고 보니 일주일 테스트 기간을 준 강 팀장은 아예 한율에게 구내식당 이용가능 횟수가 몇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왠지 알려주는 걸 잊은 것 같지만.’
WB래빗 구내식당 오늘의 아침 메뉴는 순두부 백반. 정해진 아침 식사시간 끝자락인지라 식당 안엔 사람이 얼마 없었다.
[오우, 나 이 몰캉몰캉하면서도 부드러운 순두부 식감 너무 좋아!]
라이언은 굉장히 말이 많았다.
영어를 잘하는 연습생이 한 명도 없진 않을 테지만, 소문이 소문인지라 지금껏 은근히 외면당했었는지 라이언은 한율에게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아버지가 한국인이란 것부터 시작해서 좋아하는 뮤지션이 누군지, 구내식당 메뉴 중 뭐가 제일 맛있었는지, 요즘엔 어떤 핸드폰 게임이 무과금으로 가장 재밌는지 등등. 그럼에도 어제 일에 대해선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하뉼, 너는? 데뷔는 어떤 포지션으로 하고 싶어? 내가 널 봤을 땐 딱 메인보컬 감이던데! 그거 알아? 어제 보컬레슨 때 나 바로 네 뒤에 있었던 거? 네 목소리가 쩌렁 나왔을 때 나 완전 깜짝 놀랐잖아!]
한율은 지금껏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낸 교우관계처럼 라이언도 덤덤하게 대했지만, 라이언은 구내식당을 나와 휴게실, 댄스 연습실에 가서도 한율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걸 본 몇몇 연습생들은 ‘쟤네 언제 친해졌지?’라며 둘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어젯밤 대표에게 함구를 당부 받은 연습생들은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로 힐끔거렸고. 그러나 그런 시선들도 각자 연습에 들어가자 자연스레 떠났다.
하루 종일 한율 근처에서 떨어지지 않던 라이언이 슬쩍 거리를 둔 건 길우성이 오고 나서였다. 정확히는 길우성이 오자마자 한율을 찾는 걸 보고.
“야야야, 그 새끼 풀려났단다?”
“누구?”
호들갑을 떤 길우성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한율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토커.”
“벌써?”
길우성이 와— 하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길우성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 새끼 집이 존나 부자였나 봐. 그놈 변호사가 짠! 하고 나타나니까 우리 쪽 민사 진행하려던 변호사가 아이구 선배님?! 하면서 맥을 못 추더란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을 몇 달 동안 진득하게 괴롭혔는데, 구속은커녕 벌금만 내고 풀려났대. 야, 이게 말이 되냐?”
한율은 그 스토커의 침실에 붙어있던 온갖 적나라하고 외설적인 도촬 사진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스토커의 집을 범죄현장으로 알고 출동한 경찰들도 분명 그 방 꼬락서니를 봤을 텐데. 도촬 당한 피해자가 누구였는지도.
“다른 여죄는?”
“여죄? 여죄가 뭐야?”
“스토킹 말고, 달리 저지른 죄는 없었냐고.”
조금씩 커진 목소리로 인해 이야기가 새어나가자 하나 둘 시선이 이곳으로 모였다. 길우성은 아 하며 한율의 팔을 잡아 아예 구석으로 갔다. 슬쩍 떨어져서 춤 연습을 하던 라이언이 힐끔힐끔 두 사람을 훔쳐보았다.
“그 새끼가 예전에 미랑이 누나 아는 사람 협박한 적 있거든? 나도 그 새끼한테 통수 후려 맞을 뻔한 적 있었고. 그래서 그 사람이랑 나랑 그 건으로 고소하려고 했더니, 증거 불충분으로 까였어.”
“다른 건?”
길우성이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명예훼손을 걸 거라는데,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이것도 뭐···.”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수십 년 동안 지구인의 몸으로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겪어보았지만 역시, 가진 자의 범죄가 가볍게 무마되는 건 고향이나 여기나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한국은 범죄 처벌 수위가 굉장히 낮았다.
“그런 자는 성기를 잘라내고 두 눈을 파버려야 하는데.”
“어···? 아니, 그건 좀···?”
길우성은 스토커가 외설적인 도촬 사진도 상습적이고 집요하게 찍은 걸 전혀 모르는 건가.
한율은 어깨를 으쓱이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나라 법은 법이 아닌 것 같다며 구시렁거리던 길우성도 적당히 빈자리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그제야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나 흘끔거리며 동작이 굼떠졌던 라이언도 본인 연습에 집중했다.
댄스 연습실 공기는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는 연습생들의 열기로 후끈 데워져갔다.
한편 그 시각, 네 명의 연습생이 모인 보컬 연습실은 공기가 싸늘했다.
“서한율 걔야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니 그렇다 쳐도··· 길우성이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의자에 앉은 차남석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의 코와 입엔 반창고로 채 가리지 못한 붓기와 딱지가 벌겋게 일어나 있었다.
“어···.”
“둘이서 그렇게 말을 하니까 우리도 뭐라 할 수가 없겠더라고.”
“하···, 씨······.”
차남석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은 뭐라셔? 아무리 그래도 남석이 네가 육체적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이잖아. 복도 CCTV는 돌려보셨대?”
차남석은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릴 질렀다.
“돌려봤고, 라이언 그 새끼가 쌔빈 거 아니란다!”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댄스레슨 도중에 그 새끼가 휴게실 들어가는 거 똑똑히 본 사람이 있는데.”
차남석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자신을 둘러싸고 선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남석과 가장 친한 친구, 두 명은 어제 휴게실에서 라이언을 추궁할 때 함께 있었던 이들이었다.
“유호 형이 봤다 그랬지?”
“어. ···야, 설마 너 지금 유호 형 의심하는 거 아니지?”
“에이, 유호 형이 왜 그런 거짓말을 해. 그리고 라이언 그 새끼, 한국말 어눌한 척 해도 알아들을 거 다 알아듣잖아. 애초에 휴게실에 안 갔으면 안 갔다고 못 박았겠지, 그렇게 입을 꾹 다물었겠어?”
“가긴 간 게 확실하다니까?”
“하지만 단순히 들어갔다는 게 물건을 훔쳤다는 증거는 아니잖아. 훔치는 걸 직접 본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여태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듣던 차남석의 친구, 박현우가 말했다.
“캐비닛은 잠글 수 있어도 휴게실 문은 안 잠그잖아. 남석이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그런 휴게실에 턱하니 스피커를 놔뒀고.”
“···절도 피해자의 부주의를 탓해줘서 존나 고맙다, 친구야.”
“별 말씀을.”
“아니, 그럼 정말 뭔데. 라이언도 아니면 누가 가져갔다는 거야?”
“대표님도 이상하지 않아? 그냥 그 시간에 누가 휴게실에 들어왔다 나갔는지 말해주면 되는 거잖아.”
“아아아, 짜증 나!”
차남석은 거칠게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서 문을 활짝 열었다. 방음이 잘 되는 보컬 연습실인 만큼 막혔던 외부 소음이 들렸다. 댄스 연습실에서 새어나오는 온갖 음악과 발을 구르는 소리가.
“야, 어디 가?”
“화장실!”
쾅. 그러나 문을 닫고 나간 차남석이 향한 곳은 화장실이 아닌 댄스 연습실이었다. 댄스 연습실은 보컬 연습실과 달리 복도에서 내부가 환히 보였다.
‘길우성, 서한율, 라이언.’
연습실엔 다른 연습생들도 있었지만, 남석의 눈엔 그 셋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게 공교롭게 느껴졌다. 조금 전, 오늘 아침부터 라이언이 내내 서한율에게 친한 척을 했다는 말을 듣자 더더욱.
차남석은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연습실 문을 벌컥 열었다.
“어? 남석! 너 얼굴 왜 그래?”
“형! 누구한테 맞았어요?”
그가 들어가자 어젯밤 일을 전혀 모르는 연습생들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쿵, 쿵. 스텝을 밟던 길우성도 동작을 멈추며 차남석을 바라보았다. 라이언은 차남석을 휙 한 번 볼 뿐 멈추진 않았다.
차남석은 괜찮다고 대충 말하며 곧장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들썩들썩, 기본기를 반복하던 한율은 그제야 움직임을 멈추며 숨을 골랐다. 차남석이 한율 앞에 섰다.
“야.”
“네.”
혹시 어제 나만 안 말렸다고 따지려 그러나? 한율은 의아해하며 담담히 대답했다.
차남석이 한율에게 말했다.
“나랑 같이 편의점 가자.”
“······?”
어제 휴게실에 소란이 벌어졌을 때 한 자리에 있기는 했지만, 차남석과 대화를 나누는 건 그제 처음 인사를 나눈 이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율은 더더욱 의아해졌지만, 딱히 피할 이유도 없기에 그러죠, 하며 타월을 집었다. 우뚝 서서 불안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자신과 차남석을 번갈아보는 라이언이 시야에 스치듯 들어왔다.
연습실을 나서는 한율의 등 뒤에서 길우성이 외쳤다.
“올 때 메로나!”
타월로 땀을 대충 닦고 외투를 입었지만 바깥을 나오니 제법 쌀쌀했다. 차남석은 기획사 바로 앞— 예전에 한율이 길우성을 보기 위해 죽치고 앉았던 맞은편 편의점으로 앞섰다.
현재 WB래빗에서 배출한 유일한 아이돌그룹이 해외 스케줄을 떠나서 그런지, 편의점은 손님 없이 한가했다.
차남석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 명도 없냐.”
없으면 좋은 거 아닌가? 괜히 좁은 데서 부대끼지도 않고.
한율의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가장 먼저 김밥과 도시락 진열대로 가던 차남석이 짧게 한숨 쉬었다.
“다른 데는 연생들도 자주 찍히는데 우린 그런 게 없잖아. 넌 뭐 먹을래?”
“사주시게요?”
“2천원 이내.”
“짜네요.”
“가난해서 미안하다.”
차남석은 무심한 얼굴로 대답하며 두 개가 붙은 삼각김밥과 제일 저렴한 생수를 집었다. 한율은 딸기우유 하나만 집었다.
걔랑 놀지 마
“그거 하나만? 더 골라도 되는데.”
“지금 뭐 먹으면 아침에 얼굴 붓잖아요.”
“아직은 마음껏 먹고 팅팅 부어도 돼. 어차피 내일 죽도록 연습하면 도로 빠지고도 남을 걸.”
한율은 크고 작은 반창고가 붙은 차남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은 당분간 무리하게 움직이면 안 되지 않아요?”
“지금 붓기랑 나중에 같이 빠지겠지.”
계산을 마친 차남석은 그것들을 들고 일자 테이블 앞에 앉았다. 한율은 그 옆에 나란히 앉아 딸기우유를 흔들었다. 그러곤 빨대를 푹 꽂았다.
“할 말이 뭐예요?”
할 말이 있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지만 태도로 여실히 보였기에 물었다. 차남석도 부정하지 않았다.
“너 길우성 통해서 우리 회사 들어왔지?”
“네.”
“길우성이랑도 제일 친하고.”
“그런 편이죠?”
“길우성한테 다른 연생들에 대해 얘기 들은 거 있어? 예를 들면 쟨 뭐에 예민하니 건들지 말라든가, 저 형은 상꼰대니 적당히 상대하라든가, 그런 거 말이야.”
한율은 딸기우유를 쭈욱 흡입하며 창에 비친 차남석을 바라보았다.
“손버릇 나쁜 놈이 있으니 조심해라 라든가, 그런 거요?”
“내 친구 중 하나가 아림 엔터에 있어. 알지? 거긴 항상 연습생이 백 명 안팎 인 거.”
몰랐지만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가 많은 만큼 거긴 연생들 간에 신경전이 장난이 아니야. 그래도 그나마 봐주는 게, 물 건너온 놈들.”
삼각 김밥 포장지를 벗기며 차남석이 말을 이었다.
“요즘엔 그룹에 한두 명씩 집어넣는 게 국룰처럼 번지는 추세잖아. 회사에서도 케어 비용이 더 나가는 만큼 신중히 뽑아 계약서부터 작성하는 경우가 많고. 사고 안치고 실력만 좋으면 웬만해선 데뷔 각인 거지. 그래서 미리 잘해주는 거야, 나중을 위해서. 그런데 라이언 그 새낀 3개월 만에 아림에서 잘렸어. 이유가 뭐였는지 알아?”
딸기 한 알이나 들어갔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밍밍한 딸기우유를 쪽쪽 빨아먹으며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이런 나와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란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흘려보냈다. 어차피 게이트가 열릴 5년 동안은 지난 ‘서한율’의 일상이 그랬듯, 이런 시시한 일들만 이어질 테니.
차남석은 삼각 김밥 하나를 그나마 덜 다친 쪽 뺨을 부풀리면서 먹어치우고 나서야 대답했다.
“다른 연생들한테 너무 빌붙어서.”
“네?”
“그 새끼만큼 잔대가리 잘 굴리는 새낀 아마 없을 걸? 본인이 한국말이 어눌한 것까지 이용하거든. 왜, 말을 제대로 못하는 외국인 관광객을 보면 저 사람 어디 가서 바가지 당하진 않을까 걱정되잖아. 고향에 돌아가면 세 치 혓바닥으로 타인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사기꾼일 지도 모르는데.”
“······.”
한율은 물고 있던 빨대를 툭 놓았다.
딱 차남석이 말한 그대로였다. 고향 마을 사람들도 말을 제대로 못하고 멍청한 얼굴로 손짓발짓하는 길우성을 안쓰럽게 여겨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그놈이 훗날 그 세계에 어떤 재앙을 불러올 지, 전혀 상상도 못한 채.
“그놈도 처음엔 그냥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자기한테 잘해주는 연생들과 어울렸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본색을 드러낸 거지. 회사가 웬만해선 자기를 내치지 않을 걸 아니까, 그 점을 은근슬쩍 어필하면서 다른 연생들한테 달라붙은 거야. 애들도 처음엔 ‘그래, 데뷔할 가능성이 높은 애랑 일찌감치 호흡을 맞추는 게 유리하겠다’ 생각해서 안 밀어냈을 거고.”
“···그런데 그 정도가 심해진 거군요?”
“처음엔 소소하게 물건을 빌려달라고 하다가, 나중엔 음료수나 간식 같은 걸 같이 먹자 조르는 식으로 뜯어먹었다더라. 그러다 눈치 빠른 애들이 슬슬 하나 둘 피하니까, 한국말 못하는 걸 어필하면서 불쌍한 척 시전. 괜히 애 따돌렸다는 소문이 돌면 어떡하나 걱정한 애들은 또 그거에 넘어가고. 그러다 사건이 터진 거야.”
부스럭. 두 번째 삼각 김밥 포장지를 보지 않고 능숙하게 뜯으면서 차남석이 한율을 바라보았다.
“걔랑 제법 친해진 연생이 하루는 걔를 집에 데려가서 재웠나봐. 그런데 그놈이 돌아가고 보니, 어? 우리 집 스팸이 다 어디 갔지?”
“···설마요.”
“그래, 그 설마. 그래서 처음엔 동생 소행인 줄 알았다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하잖아? 훔쳐갈 게 없어서 스팸을 훔치냐, 그건 아니겠지 싶어서.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라이언 가방에서 뜬금없이 스팸 하나가 툭.”
“······.”
“그 사건을 계기로 애들끼리 모여서 라이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놈이랑 어울리고 나서부터 주머니에 무심코 넣었던 천원, 5백 원 같은 자잘한 돈이 사라진 빈도가 높다는 걸 알게 된 거지. 거기에, 더는 과자나 음료수 살 때 그놈 몫까지 사는 거 부담스럽다고 토로하는 말도 나오고.”
“그래서 잘린 거라고요?”
차남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쪽 바닥이 실력보다 얼굴을 더 잘 쳐줘도, 손버릇처럼 구설수 오르기 좋은 행실은 제 아무리 얼굴 천재라 할지라도 떠안기 싫은 폭탄이니까.”
“하지만 대표님은 데려왔잖아요?”
“그게 의문인 거야, 그게! 저쪽에서 계약서까지 썼다면 절대 거저 데려온 것도 아닐 텐데, 진짜···! 후······.”
순간 욱하며 언성을 높였던 차남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생수 뚜껑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요.”
“?”
“왜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건데요?”
“······.”
차남석이 반 남은 생수를 내려놓았다. 물이 거칠게 출렁거렸다.
“우리 회사가 남돌 내보낼 시기로 정한 게 내년이야. 그런데 내가 보기엔 거기에 네가 껴있을 것 같거든?”
큰일 날 소릴.
상상만으로도 싫었다. 예비 침략자들 앞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폴짝폴짝 재롱을 부리다니.
“저 아직 테스트 기간인데요? 그리고 춤도 뭣도 다 안 되는데.”
“테스트? 그거야 그냥 한 말일걸? 우리 회사가 관리할 수 있는 연생 숫자가 지금이 딱 풀 맥시멈인데, 바로 넣기엔 분위기가 안 좋아질 게 뻔하니까 그렇게 둘러댄 거지. 내치자니 네 마스크랑 음색이 아깝기도 하고.”
“얼굴은 그렇다 쳐도, 음색이요?”
“···이래서 지가 잘생긴 거 아는 놈은 짜증난다니까. 들어 봐.”
딸랑. 두 사람이 테이블 앞에 죽치고 앉아 쑥덕쑥덕 얘기만 나누자, 그들을 살피던 편의점 알바생이 문을 활짝 열고 나갔다. 그러곤 두 사람이 보이는 위치에 서서 담배를 폈다.
“춤 같은 경우는 정말 몸치가 아니고서야 몇 달 죽어라 굴리면 다들 어느 정도 춰.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뒤로 빼면서 다른 멤버가 커버치게 둘 수도 있고. 그런데 음치면 아예 무대 자체에 설 수가 없어요. 어느 정도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소질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런데 기획사에 ‘나 노래 좀 부른다’ 자신만만해서 오는 놈들? 대부분 일반인 옆에 있을 때나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 실상은 자기랑 안 맞는 창법 따라하느라 온갖 나쁜 습관으로 물든 케이스가 많아.”
잠시 물 한 모금 마신 차남석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정말 지가 잘 부르는 줄 착각하다가 이 바닥 들어와선 완전 흔해빠진 실력이라 깨닫고 1차 좌절, 지 색깔 찾기 전에 스스로 이것저것 섞어버린 거라 누구한테 화도 못 내서 2차 좌절. 그 얼룩 빼는 게 엄청나게 힘들다는 거 깨닫고 3차 좌절.”
한율은 어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보컬 트레이너에게 들었다는 걸 떠올렸다. 처음 오디션을 봐 준 강 팀장도 밴딩의 밴 자도 안 보인다면서 좋아했고.
‘하지만 어째 말하는 게 꼭 본인 이야기 같은데.’
“물론 노래를 굉장히, 자주 많이 따라 불러서 실력을 키웠다! 라는 가수들이 있기는 하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자기만의 색을 찾아 소화한 극소수거든. 음색도 타고난 경우가 많고.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 노력이 결합한 천재들이니 괜히 비교 대상에 올리는 것도 우습지. 말이 좀 샜는데, 어쨌든 지금의 네가 딱 트레이너들이 좋아할 백지야.”
“······.”
“컨셉을 정하고 설계하면, 그대로 잘 익히며 따라와 줄 수 있는 그런 깨끗한 백지 상태. 사실 열일곱에 연생은 조금 늦은 감이 있는데, 나쁜 버릇은 하나 없고 음색도 좋으니 좋은 거지. 열일곱 살은 또 중딩에 비해 철이 든 나이기도 하고.”
“뭐··· 아무튼 알겠어요.”
더는 ‘넌 충분히 아이돌이 될 수 있어’라는 요지의 말을 듣고 있기가 힘들어져, 한율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라이언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란 소리잖아요. 형이 보기엔 이대로 가면 나랑 라이언 둘 다 데뷔 가능성이 높은데, 내가 라이언이랑 친하게 지내면 그 형한테도 플러스 점수가 가니까. 맞죠?”
“우성이보단 말이 잘 통해서 좋네.”
입가의 반창고 탓에 차남석의 미소는 어딘가 일그러져 보였다. 그러나 이내 아야얏 엄살을 부리며 입가에 생수병을 대는 모습은 조금 한심해보였다.
‘멱살 잡고 윽박질렀던 태도에 비해 싸움실력도 영 형편없었지.’
5년 후 게이트가 열리면, 각성이 되던 안 되던 욱해서 용감하게 싸우다 가장 먼저 죽을 것 같은 인상이다.
어쨌든 용건은 얼추 들은 것 같아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남은 딸기우유를 마저 다 마시고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아, 하며 차남석을 보았다.
“이건 그냥 궁금한 건데.”
“?”
“라이언이 여기 온 뒤로도 돈이나 물건이 사라진 적 있는 건 확실해요?”
차남석의 미간이 오묘하게 구겨졌다.
“길우성이 말 안 했구나, 진짜. 그 새끼 여기로 온 지 정확히 3일째 되던 날에 내가 휴게실에 놔둔 헤어드라이어기, 민솔이 바디워시, 유호 형 반지가 싹 사라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