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427)

*

“옜다, 메로나.”

딱. 

“아! 너 일부러 통수 노렸지?!”

한창 춤을 추던 길우성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한율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떨어진 메로나를 집었다. 한율은 다른 연습생들을 향해 봉투를 들어 올렸다. 

“와서 먹고 싶은 거 먹어요.”

“오! 네가 쏘는 거야?”

“쌩유!”

늘 배가 고픈 연습생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까먹으며 잠시 쉬었다. 길우성도 메로나를 입에 문 채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돼지바 하나를 쏙 빼갔다. 

한율은 저 혼자 떨어져 머뭇거리는 라이언을 불렀다. 

[뭐해요? 형도 와서 골라요.]

“나···도?”

“네, 형도.”

어설픈 발음으로 자신을 가리킨 라이언은 잠시 눈치를 살피다 쭈뼛쭈뼛 다가왔다. 

“남는 건 냉동실에 둬요. 내일 온 사람 아무나 먹으라 하고.”

“가게?”

메로나와 돼지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번갈아 먹으며 길우성이 물었다. 한율은 잠시 그런 길우성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자전거 가져가야 해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려고.”

“잠깐. 뭐지, 서한율? 방금 날 완전히 ‘어휴, 돼지새끼, 쯔쯔.’이런 시선으로 본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눈치는 참 좋아?”

“와오! 한 대 때리고 싶다, 빚쟁이!”

한율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다른 연습생들의 잘 가란 인사를 받으며 연습실을 나온 한율은 휴게실에서 가방을 챙긴 후 곧장 2층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엔 아침의 직원이 말한 대로 사람이 있었다. 

“누구?”

노크 후 들어가자, 아주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만 돌리며 물었다. 그러나 그 옆 의자에 편히 앉아있던 사람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자전거 주인이요.”

“아, 네가 서한율? 참 빨리도 찾아간다. 그거 비싼 거 아냐? 부모님이 화 안 내?”

처음 보는 사이인데 오지랖이 넓다. 한율은 적당히 혼났다고 대답하면서 자전거 자물쇠를 풀었다. 하하하! TV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직원도 그걸 보며 낄낄거렸다. 

“그럼 수고하세요.”

“어, 조심히 들어가.”

한율은 엉거주춤 서있는 유호에게도 고개를 꾸벅이곤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다른 녀석들은 주말 밤이라고 땀에 절어가면서 연습하는데, 자기는 직원과 나란히 앉아 TV시청이라. 여유롭네.’

우리 식구가 된 걸 환영한다

일요일은 별 다른 사건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한율은 어제도 그랬듯 댄스연습실에서 기본기를 연습했고, 라이언은 그런 한율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연습생들은 한율에게 아이스크림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 후 연습에 들어갔다. 자율연습에 나온 건 유호도 마찬가지였지만, 딱히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밥 먹으러 가자!”

점심시간이 되자 누군가 외쳤고, 한율은 어슬렁어슬렁 연습실을 나가는 무리에 섞여 움직였다. 

“하뉼.”

식당에 들어온 뒤 라이언이 슬그머니 한율에게 다가왔다. 

“옆, 갠차나?”

한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라이언은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 남은 얼굴로 슬쩍 웃으며 한율의 옆에 앉았다. 그러곤 무슨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눈치를 살피며 수차례 머뭇거렸지만, 결국엔 별 다른 말없이 시무룩한 얼굴로 밥을 먹었다. 

*

WB래빗을 다닌 지 정확히 여드렛날. 

“오늘이 결과 나오는 날이지? 괜찮아? 어떨 것 같아?”

아침 식사를 할 때 모친이 물었다.

기획사를 다닌 뒤로 매일 밤늦게 들어오는 한율을 맞이하고 나서야 잠드는 나날을 보냈는데도, 그녀는 한율이 테스트에서 떨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우리 아들이 떨어질 리가 있겠어? 만약 떨어뜨리면 내가 좌 대표를 만나서 확—.”

“당신은 주책부리지 말고요. 이럴 때 부모가 나서면 애만 욕먹는 거 몰라요?”

“아니, 확! 가서 이유만 확! 물어보고 온다고···.”

“떨어지면 가능성이 없다는 거겠죠. 괜찮아요, 저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한율이 차분히 대답하자 부친은 ‘크흠’하며 머쓱해했다. 모친은 푸근하고 따뜻한 미소로 한율을 바라보곤 고기반찬을 밥 위에 올려주었다.

“정말 누구 아들인지, 부모보다 더 의젓하다니까?”

“커, 흠!”

한율이 다니는 학교는 집을 기준으로 동쪽에, WB래빗은 북서 방향에 위치하고 있었다. 완전히 정반대 방향이라, 학교는 자전거로 통학하고 집에 들러 밥을 먹은 뒤 버스를 타고 기획사로 향했다. 밤에는 자전거를 타면 위험하다고, 모친이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 까닭이었다. 

학교에서 바로 기획사로 버스를 이용하면 시간이 많이 절약되기는 하겠지만, 한율은 자전거를 타는 게 좋았다. 정확히는 바람을 가르는 그 특유의 감각이 좋았다.

거센 마나를 다룰 때의 감촉과 비슷해서. 

‘처음 익힌 게 바람 계열 마법이라서 그럴지도.’

마나를 정제해 자신의 마력으로 만드는 작업은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기획사를 다니고 나서부턴 그럴 여력이 나질 않아, 이렇게나마 바람을 가르며 비슷한 기분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한율은 WB래빗까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5분 정도 걸었을까. 

‘어째 계속 날 따라오는 것 같은데.’

사실 뒤에서 따라오는 그 기척은 정류장에 내릴 때부터 느꼈지만, 5분씩이나 길이 겹치는 건 우연으로 보기 힘들었다. 

슬슬 그 기척이 신경에 거슬려, 한율은 우뚝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휙. 동시에 일정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두 명의 여학생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으로 얼굴까지 가리며. 

“······.”

한율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힐끗, 벌린 손가락 틈으로 한율을 훔쳐 본 여학생이 아예 등을 보이고 섰다. 옆의 친구도 따라 나란히. 나이는 중학생 정도일까. 

“···하.”

‘서한율’로 살아오면서 또래의 이성에게 적잖은 호감표시를 받아왔던 터라, 한율은 짧은 한숨만 흘리곤 다시 길을 재촉했다. 두 여학생은 서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고 꺄르륵 웃더니 다시 한율 뒤를 졸졸 쫓아왔다. 

“한율 군, 축하드려요.”

WB래빗 초인종을 누르자, 곧바로 문이 열리며 데스크 직원이 한율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에서 스륵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직원이 활짝 웃으며 한율에게 출입증을 내밀었다. 카드엔 지난 주 오디션을 봤을 때 카메라 테스트를 받으며 찍었던 사진이 들어있었다. 

“진짜 우리 식구가 된 걸 환영해요.”

생각했던 것에 비해 아주 간결한 합격 고지였다. 정말 차남석의 말대로 애초부터 말뿐인 테스트 기간이었던 걸까. 

한율은 조금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입가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어쨌든 길우성 옆에 붙어있을 시간은 번 셈. 

현재 길우성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꽤 단순한 편이었다. 기획사 바깥에선 어떻게 생활하는지 몰라도 그동안 길우성을 지켜본 바, 그는 연습에 진지하게 임하는 동료에게 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대로 열심히, 아이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적당히 친분을 쌓은 뒤에 나가자. 그 후 길우성이 데뷔라도 하게 되면 모종의 사고라도 일으켜서 발목이라도 분질러 놓고···.’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을 골똘히 생각하며 휴게실로 향할 때였다. 누군가 뒤로 바짝 다가오더니 한율의 팔을 휙 잡아당겼다. 

“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사람이 몇 번씩이나 불러도 못 듣냐?”

며칠 쉬라는 권고를 받아 그동안 회사를 나오지 않았던 차남석이었다. 토요일 밤에 봤을 때보다 붓기가 많이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비록 왼쪽 눈에 아직 다 가시지 않은 멍의 얼룩이 흐릿하게 남아있었지만. 

“나오셨어요.”

“너 왜 내 말 안 들어.”

“······?”

“너 그때 내 말 충분히 알아들었잖아. 그런데 듣자하니 계속 그 새끼 옆에 달고 다녔다며?”

“알아듣는 거랑 따르는 거랑은 다른 문제죠.”

차남석이 잡고 있던 팔을 놓으며 대놓고 한숨 쉬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통수도 맞아봐야 아픈 걸 알지, 진짜.”

통수라면 이미 예전에 거하게 맞아봤다. 세상이 박살나는 수준으로. 

그러나 한율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차남석도 별 말 없이 함께 걸었다. 

“둘이 같이 왔네?”

휴게실에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박현우가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 캐비닛 앞에서 옷을 갈아입던 라이언은 충격 받은 표정으로 한율을 바라보다, 차남석과 시선이 마주치자 입을 일자로 다물며 휙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복도에서 만났어. 야, 그런데 넌 잠깐 기다려달라는 그걸 못 참고 의리 없이 먼저 가냐?”

“애는 강하게 키워야지.”

“내가 언제부터 네 애였는데.”

차남석도 라이언을 무시하며 박현우와 투닥거렸다. 그러다 라이언이 쌩하니 휴게실을 나가자, 차남석은 닫힌 문을 보며 툭 뱉었다. 

“개새끼.”

한율은 그걸 보며 ‘만약 저 둘이 같은 팀으로 데뷔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보았다. 

‘망하겠네, 100%. 아, 길우성이 거기에 껴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아무리 입단속을 해도 관련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소문은 어디선가 새기 마련이다. 차남석이 레슨에 복귀하자, 절도와 폭행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어야 할 연습생들의 시선이 연신 차남석과 라이언을 오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도록 슬쩍 끼어드는 연습생도 있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불편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기류였다. 물론, 알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연습생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론 길우성이 그랬다.

“오늘도 왔냐. 하, 지긋지긋한 빚쟁이.”

길우성도 한율에게 주어졌던 일주일 테스트가 말뿐이란 것을 진작 알고 있었는지, 한율을 보자마자 별 감흥 없는 농담이나 지껄였다. 

“닥쳐, 빚꾸러기.”

“비꾸러기가 뭐야?”

“······.”

한율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무심코 다른 연습생과 대화를 나누던 유호와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간격을 두고 한율의 시선을 피했다. 

“······?”

“아, 그러고 보니 강 팀장님이 너 보면 사무실로 보내라고 그랬는데.”

“참 빨리도 말한다.”

레슨 시작 20분 전이었다. 한율은 유호에게서 신경을 거두고 연습실을 나섰다. 

“오, 한율아. 이리 와.”

사무실로 가자 신인개발팀 데스크가 모인 곳에서 직원과 대화를 나누던 강무기 팀장이 한율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한율을 데리고 사무실 내부에 있는 작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올 때 출입증은 잘 받았어?”

“네.”

한율은 그의 손짓에 따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강 팀장 맞은편에 착석했다. 강 팀장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씩 웃었다. 

“그래. 어때, 우리 진짜 식구로 인정받은 기분이?”

“좋아요.”

“침착해서 좋네. 음···, 이제 곧 레슨 시간이니 빨리 끝낼게.”

강 팀장이 들고 있던 바인더를 펼쳤다. 예전에 한율이 작성했던 서류가 가장 첫 장에 끼워져 있었다. 강 팀장은 그 아래에 둔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자, 우선 이것부터 받고.”

미성년 연습생을 위한 부모님 동의서였다.

“성인이면 몰라도 미성년자의 경우엔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잖아. 연습하다보면 밤 열 시, 자정까지 되는 경우도 잦고. 그래서 회사 입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어디까지 케어할 수 있는지 부모님께 알려드려야 할 의무가 있거든. 가서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사인이나 도장 받아서 월요일에 가져오면 돼.”

눈으로 대충 훑어보니 딱히 문제될 만한 부분은 없어보였다.

“네.”

“그리고 네가 작성한 자기소개서랑 일주일 동안 녹화된 레슨 영상, 트레이너 쌤들의 의견을 다 들어봤는데···.”

팔랑팔랑 바인더 안 서류를 넘겨보던 강 팀장이 팔꿈치를 세우며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이 너, 연기도 배우자.”

“연기요?”

“음, 보컬트레이너 쌤이 말하길 네가 타고난 발성도 괜찮고 딕션도 좋다고 하더라고. 어디서 체계적으로 교정 받은 게 아니라, 집에서부터 교육을 잘 받은 것 같다고.”

“······.”

한율은 모친에게 글공부를 배울 때를 떠올렸다. 

『율아, 동물 말은 ‘말’, 말한다 할 때 말은 ‘말’.』

『말, ···말.』

『으응, 반대. 이건 단음이니 ‘말’, 이건 장음이니 ‘말’. 발음 정확히 해야지?』

‘대체 무슨 차이야···?!’ 했던 기억과, 밤마다 동화책을 읽어주며 시끄럽게 굴던 부친의 모습도. 로건 워커 때 얼추 익혔던 한국어를 그들을 통해, 특히 발음을 제대로 배우긴 했다. 

부친의 경우엔 전직 아나운서였고, 모친도 한때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했었다고 하니. 

‘나도 모르게 그들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구나.’

“라이언한테 들어보니 영어도 굉장히 잘한다며?”

“아뇨, 그렇게 잘하는 수준은 아니에요.”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기에 한율은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연기에도 관심 없구요.”

“아니, 관심 없어도 해야 돼.”

“······.”

“아이돌도 일종의 무대 위 연기자라서 이건 필수야. 다만, 내가 조금 전 말한 연기는 정극이란 거? 어쨌든 배워.”

“우성이는 안 배우는 것 같던데요. 라이언도.”

“아··· 우성이. 우성이도 배우게 하고 싶은데 당분간 주말알바 때문에 힘들 것 같다 그러더라고. 연기 레슨이 주말에만 있거든. 라이언은 한국말부터 배워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고.”

그리고 한율은 잠시 연기 레슨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WB래빗에서는 일단 데뷔조에 들어가면 연기레슨도 필수로 듣게 되지만, 연습생 신분은 희망자에 한해 기본 테스트를 통과해야지만 레슨에 참여할 수 있다고. 

“카메라도 잘 받고 딕션도 좋은데, 이 좋은 재능들을 썩히면 아깝잖아. 우성이도 너도.”

“···네.”

“그리고 영어랑 일본어 레슨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눠봐야 하는데, 한율이 넌 이미 영어를 잘하니까 패스해도 되겠지?”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영어를 잘하면 일본어도 자동 패스인가?

“우성이는 영어도 패스에요?”

“음? 당연히 아니지. 우성이한테 못 들었어? 우성이 아침 일곱 시에 나와서 한 시간씩 영어강의 듣고 밥 먹은 후에 학교 가. 피곤할 것 같으니 오후 단체레슨 끝나고 받는 거 어떠냐고 했지만, 그러면 흐름이 끊겨서 싫다고 하더라고.”

처음 안 정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잘 안 는단 말이지···.”

강 팀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자, 그리고 이건 네가 일지를 쓸 다이어리. 쓰는 방법은 우성이한테 물어보고.”

강 팀장과의 면담은 레슨이 시작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끝났다. 휴게실에 잠깐 들러 보호자동의서와 WB래빗 토끼가 그려진 다이어리를 캐비닛에 넣은 후 보컬 연습실로 향하는데, 뒤에서 불쑥 나타난 트레이너가 한율을 향해 활짝 웃었다. 

“오, 나보다 한 걸음만 늦어도 지각이네?”

“하···.”

한율은 그에게 어설픈 웃음을 짓다말고 보컬연습실로 달음박질했다.

예상치 못한 조력 - feat. 바 선생

단체 보컬레슨이 끝난 후, 연습생들은 댄스레슨이 있을 연습실이 아닌 휴게실로 왔다. 이유인즉슨, 사용할 연습실에서 아직 여자연습생들이 퇴장하지 않아서. 그렇게 청소시간까지 감안해 20분이 붕 뜨게 되었다. 

“간단해.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뭘 했는지, 무슨 레슨을 받았는지, 숙제 받은 거 있으면 했는지 안 했는지 적고, 하루 느낀 점이나 반성할 점 각기 두 줄 이상씩 쓰고. 일주일 끝에도 일주일 총평 최소 세 줄. 한 달 총평 열 줄. 그리고 맨 뒤쪽 유선노트 페이지엔 한 달에 한 권 독서한 거 독후감 쓰고. 이건 한 페이지 가득 채워야 돼.”

그래서 이참에 길우성에게 WB래빗 다이어리 사용방법을 물었더니, 길우성은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설명을 줄줄 읊었다. 

“꼭 써야 돼?”

아이돌이 되고픈 마음이 전혀 없는 한율로선 굉장히 귀찮은 숙제였다.

“틈날 때마다 쓰고 캐비닛에 넣고 다니는 게 좋아. 한 달에 한두 번 불시에 검사하거든. 제대로 안 쓰면 엄청 혼나.”

한율은 음각으로 새겨진 WB래빗 마스코트 토끼 그림을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보들보들했다. 

“레슨은 뭐뭐 받으래? 단체 빼고.”

숨길 것도 아니다 싶어 한율은 솔직히 대답했다. 

“댄스, 보컬, 연기, 기타, 중국어.”

그 순간이었다.

···타악. 누군가 캐비닛을 닫는 소리와 함께 휴게실엔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가라앉는 분위기에 고개를 돌려보니, 다른 연습생들이 모두 한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

한율은 이것들이 왜 이러나 싶어 그대로 길우성을 쳐다보았다. 길우성만 속이 편해보였다. 해괴한 웃음을 흘리는 걸 보니.

“큭큭, 너 엄청 부려먹으려나 보다. 연기까진 몰라도 기타라니, 축하한다?”

“그게 뭐 이상한 거야?”

“곧 <보컬리스트 시즌2> 끝나잖아. 시즌3에 맞춰서 내보내려나 보다, 너.”

대답은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박현우의 입에서 나왔다. 

보컬리스트? 시즌 자가 붙은 걸로 봐선 프로그램 이름인 것 같긴 하지만, 한율은 처음 듣는 프로그램이었다. 

“그게 뭔데요?”

“뭐야? 몰라?”

한율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살며시 화가 섞였다. 박현우는 여전히 핸드폰에 시선을 둔 채 대답해주었다. 

“뮤닷에서 하는 방송인데, 데뷔 안 한 연습생들만 나갈 수 있는 노래 경연 프로그램이야. 대형 3사는 알아서 빠져줘서 중소형 기획사 소속 연습생들이 조금이나마 얼굴을 내비칠 수 있는, 아주 좋지만 독이 될 수도 있는, 뭐 그런?”

“밤늦게 하는데다 시청률도 바닥이라, 기획사 입장에선 홍보 차원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많아.”

“시즌1에 그 누구였지? 버디? 버미? 그놈은 노래 완전 구렸는데 얼굴 완전 반반한 걸로 도장 찍어서 끝나자마자 바로 웹드라마 캐스팅 됐잖아. 지금은 다시 그룹으로 데뷔 준비하고.”

“아···, 그놈 원래 데뷔조에 낄 실력 전혀 아닌데, 조금이라도 인지도 높이려고 억지로 꽂았다더라. 대신에 확정되다시피 했던 7년 차 형이 빠지고.”

“와, 그 형 존나 빡치겠다. 나라면 회사 화분 하나 박살낼 듯?”

“역시 얼굴이야! 얼굴이 최고야! 연습 따위 때려치워!”

대화에 끼어드는 목소리가 점점 많아졌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시기가 슬쩍슬쩍 섞인 게 느껴졌다. 들어온 지 고작 열흘도 안 된 연습생이 자신보다 더 많은 기대를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한 서글픈 부러움도.  

떠들썩해진 휴게실을 슥 둘러보며 길우성이 한율을 툭 쳤다. 

“너 그거 아냐?”

“뭘.”

“연기 레슨은 남녀합동이다?”

“어쩌라고.”

“부럽다고.”

“너도 레슨 받으라고 들었다며.”

“그럼 집세는 누가 버냐?”

WB래빗에서는 연습생에게도 숙소를 제공해주지만,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까다로운 편이었다. 

본가가 회사와 먼 지역이어야 하며, 연습생 기간은 최소 3개월. 월말평가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고 3개월 이상은 유지해야 한다. 들어가고 나서도 단체생활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선을 넘는 문제행위를 일으켰을 땐 바로 강제 퇴소였다. 

“앞으로 최소 두 달은 더 버텨야 돼···.”

“······.”

한율은 깊게 한숨을 내쉬는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면 이 제안을 꺼내도 되지 않을까. 아니면 아직은 조금 이른가?

“슬슬 시간 되지 않았냐? 누가 연습실 좀 보고 와.”

“그러다 마주치면! 어! 나중에! 어! 강 팀장님이, 어! ‘누가 그런 핑계로 여자애 보러 가래!’ 이러고! 어! 혼나고! 어!”

“야, 병신 같아. 그만 해.”

“어!”

박가람이란 연습생의 바보 같은 행동 덕분인지 날카로웠던 분위기가 부쩍 흐려졌다. 한율은 일단 모친에게 오늘도 연습 때문에 늦는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합격 여부 통지 삼아. 

곧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엄마는 우리 한율이가 합격할 줄 알았어! 화이팅! 올 때 위험하지 않게 꼭 택시타고!]

메시지 끝에는 언제나처럼 하트 여러 개가 붙어 있었다. 

길우성은 오늘도 단체레슨이 끝난 이후 자정이 되도록 자율연습에 매진했다. 박자가 빠른 팝에 맞춰 했던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한율의 눈엔 굉장히 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길우성은 녹화한 자신의 모습을 보곤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노트에다 끄적거렸다. 그리고 바로 동작을 수정하기도 했다. 

그렇게 새벽 1시가 되어서야 길우성은 땀으로 축축해진 타월로 재차 이마와 목을 닦곤 핸드폰을 들었다. 

“너 지금 사는 집까지 걸어서 가지? 몇 분 걸리냐?”

한율과 길우성이 연습실 마지막 지킴이였다. 정리하고 불까지 소등한 후 나올 때 묻자, 길우성이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40분 정도?”

“몸이 버티냐?”

“어쩔 수 없어. 돈 아껴야 하~ 아암.”

길우성은 말을 하다말고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그러곤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더니 휘적거렸다. 

“너 그거 아냐. 우리 학교 학비 존나 비싸다?”

“우리 학교도 비싸.”

“내가 사는 집 보증금도 비싸다?”

“······.”

“그래서 아껴야 돼. 우리 집 곰순이도 내년이면 대학 들어가는데, 엄빠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줘야지.”

“그럼 숙소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 집에서 지내든가.”

“······?”

길우성의 반응은 느렸다. 자기가 뭐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 한율은 피곤한 눈을 끔뻑거리며 덧붙였다. 

“대신 나 춤 좀 가르쳐주라.”

“······.”

휘적거리던 두 팔을 그대로 멈추며 길우성이 왈칵 미간을 구겼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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