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427)

*

“끄응······.”

40여 분을 걸어 간신히 집에 도착한 길우성은 철퍼덕 힘없이 방바닥에 고꾸라졌다가 매트리스를 향해 기어갔다. 그러곤 그대로 이불 속으로 꿈지럭꿈지럭 들어갔다. 

‘수상한데···, 진짜 수상한데······, 서한율······.’

피곤에 쩔어 생각도 느려졌다. 그러나 길우성은 수면에 빠지기 직전까지 조금 전 한율에게 들은 제안을 떠올렸다. WB래빗 연습생 숙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기 집에 들어와 지내며 춤을 가르쳐 달라는 말. 

계산기를 대충 두드려도 자신에게 굉장히 좋은 조건이었다. 당장 보증금만 빼도 부모님의 부담이 확 줄어드는 것도 모자라, 혼자 사는 아들 걱정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나한테만 너무 좋은 조건이란 말이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인데.’

춤을 가르쳐달라고는 했지만, 길우성이 보기에 서한율은 춤에 대한 센스도 나쁜 편이 아니었다. 도장을 다닌 적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하루 몇 시간씩 기본기를 추는 걸 보면 다른 쌩초보 입문자에 비해 자세 무너지는 빈도도 낮았다.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거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시크하기 그지없는데, 가만히 또 생각해보니 서한율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연습생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오는 걸 내치는 것도 아니었다. 라이언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걸 보면. 

『내가 쑥스러움이 많아.』

···진짜 그런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든 길우성은 곧바로 베개에다 고개를 묻은 채 흔들었다. 

아냐. 피곤해서 나온 헛생각이야. 

“푸우······.”

그리고 그 상태로 잠에 들었다가, 숨 쉬는 게 괴로워져 본능적으로 몸을 뒹굴 굴렸다. 그러다 길우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신경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다. 

이불 밖에. 

‘······뭐지?’

등골이 서늘해지며 잠이 확 달아났다. 길우성은 눈을 완전히 뜬 채 숨을 죽이고 청각에 집중했다. 

이불 밖에서 놈이 움직였다. 

사사사삭. 사삭. 

“끄으으으······.”

길우성은 낮은 비명을 지르며 이불로 제 몸을 꽁꽁 싸맸다. 

“바퀴 생퀴 진짜 싫어어······, 흑.”

그리고 아침. 

길우성은 서한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희 집에 바퀴벌레 있냐?]

*

[네가 오면 한 마리는 생기겠지.]

한율은 솔직하게 적으려다, 톡톡톡 백스페이스를 눌러 지웠다. 

[없어.]

조금 전까지 한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부친이 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허락하마. 열심히 하는 친구가 옆에 있으면 좋은 자극이 되겠지.”

모친도 흔쾌히 동의했다. 

“엄마도 좋아.”

어젯밤, 길우성은 한율의 제안에 생각해보겠다 한 발 물러섰지만, 한율은 확신했다. 길우성이 곧 짐을 쌀 거라는 걸. 

‘밥이나 훔쳐 먹던 뻔뻔함이 갑자기 생긴 건 아니었을 테니.’

부모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기 싫다면서, 본인이 하고 싶은 것 또한 놓지 못하는 욕심쟁이. 더 나아가 자신이 속한 지구를 위해 거리낌 없이 다른 세상을 짓밟는 포석을 세운 자였다. 그렇기에 이렇게 좋은 제안을 걷어찰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직 길우성의 대답을 듣기 전이었지만 한율은 부모에게 동의를 구했다. 먼 지방에서 올라와 혼자 자취를 하면서도 매일 회사에 끝까지 남아 연습하는 친구가 있는데, 당분간 함께 지내도 괜찮겠냐고. 

한율은 부친이 시원하게 도장을 찍어준 보호자동의서를 챙기며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토일 10시엔 연기, 3시엔 보컬, 4시엔 중국어, 7시엔 기타레슨이 잡혔다. 자전거를 타고 WB래빗으로 향하던 한율은 레슨 일정을 떠올리곤 한숨을 쉬었다. 자꾸 마음이 조급해졌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할는지.’

맞는 방향을 가고 있긴 한 걸까. 

“오빠! 저기요, 율이 오빠!”

“······?”

어느덧 WB래빗 간판이 보일 무렵이었다. 천천히 지나친 한 골목길 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한율을 불렀다. 브레이크를 잡으며 돌아보자, 후드 티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끈을 바짝 잡아당겨 눈코입만 간신히 보이는 여자애가 종종 달려왔다. 그러곤 품에 안고 있던 종이가방을 한율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거요!”

“누구세요?”

“누구긴 누구예요! 오빠 주식 산 사람이지!”

주식? 난 상장을 한 기억이 없는데. 

“반응 보니까 내가 1호구만? 엣헴!”

“······.”

“뭐해요, 오빠! 빨리 받아요. 그리고, 남석이 오빠랑 꼭 사이좋게 나눠먹어요! 알았죠?”

“차남석?”

“넵! 제 두 번째 주식이거든요! 그럼 수고!”

후드티 눈코입 소녀는 그렇게 일방적인 인사를 던지곤 쌩하니 골목길 안으로 도망쳤다. 한율은 잠시 의아해하다가 핸들에 종이가방을 걸고 다시 페달을 밟았다. 

회사에 들어가 차남석을 찾아보니, 차남석은 보컬연습실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헤드셋을 쓰고 얼마나 집중하면서 부르는지 그는 한율이 들어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부르는 발라드는 제법 듣기 좋았다. 

한율은 차남석의 눈앞에 종이가방을 불쑥 내밀었다. 

“—깜짝이야!”

놀란 고양이가 펄쩍 뛰어오르는 것처럼 차남석이 펄쩍 뛰며 한율을 돌아보았다. 그가 헤드셋을 거칠게 벗으며 버럭 화냈다. 

“놀랐잖아! 노크 좀 해!”

“했는데요.”

“후우···.”

차남석이 제 가슴팍을 누르며 세차게 뛴 심장을 진정했다. 그러고 나서야 한율이 흔드는 종이가방을 보았다. 

“뭔데, 그건.”

“어떤 애가 형이랑 나눠먹으라고 주던데요.”

“뭐?”

구겨졌던 차남석의 미간이 활짝 펴졌다. 그러나 그는 당장 종이가방을 받지 않고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기다려, 사진부터 찍고.”

찰칵, 찰칵. 

“······.”

“꺼내 봐.”

한율은 군말 없이 내용물을 꺼냈다. 핑크색 바탕에 베이지색 곰이 그려진 상자가 나왔다.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엔 여러 종류의 에너지바와 쿠키가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찰칵. 

“쪽지 있네. 펼쳐봐.”

[To. 율이 오빵, 남석 오빵.

맛나게 먹고 힘내세요 >_<)♡ 

-1호팬 자리는 내 거☆]

찰칵. 

“야, 상자 이렇게 들고 있어봐.”

대체 뭐하는 짓이야, 이게.

그러면서 한율은 차남석이 시키는 대로 상자를 비스듬히 들었다. 차남석은 한율과 얼굴을 나란히 하고, 한 손으로 쪽지 내용이 잘 보이도록 펼쳤다. 

“웃어.”

“······.”

찰칵.

월말평가

“넌 월말평가 때 뭐 할 거야? 생각해 둔 거 있냐?”

길우성이 귤을 까먹으며 물었다. 장소는 한율의 집. 

자취방과 알바를 정리하고 캐리어 가방과 백팩, 귤 박스를 들고 한율의 집에 온 게 바로 어제, 제안을 한 지 여드레 만의 일이었다. 방은 평소 잡동사니를 넣어두던 곳으로, 지금은 길우성의 짐만 놓였다. 

“아직.”

“노래는 어차피 한국 건 금지니까, 대충 외국차트 들어보고 너한테 제일 잘 맞겠다 싶은 걸로 골라. 댄스는···.”

길우성은 티슈로 손을 닦은 뒤 핸드폰으로 너튜브 앱을 켰다. 미리 찾아두었는지, 이내 한 동영상을 재생한 후 한율에게 넘겼다. 

“이걸로 해. 난이도는 지금 네 수준보다 살짝 위.”

“춤이 좀 느린데.”

“지금 네 수준에 괜히 조금이라도 빠른 거 선택했다간 박자 하나만 놓쳐도 다 무너져. 그리고 네가 박력은 좀 부족한데, 뭐라 해야 되나. 춤선이 섬세하다고 해야 되나? 특히 손끝 디테일이랑 시선 처리가.”

“······.”

마나를 유동시킬 때 손가락 끝 마디마디까지 세밀하게 움직이던 가락이 있어 그런 걸지도. 

“그리고 중요한 포인트에서 파-밧, 원, 투! 그루~브. 이렇게 네 유일한 장점인 유연성을 살리는 거지.”

조금 전 섬세하다는 건 장점이 아니었나? 한율은 핸드폰을 길우성에게 돌려주었다. 

“주소 보내봐.”

“오키. 아, 그리고 월말평가 연습은 되도록 남한테 보여주지 마. 트레이너 쌤들 외엔.”

“왜?”

“괜히 이것저것 귀찮아질 테니까.”

모호한 설명이었지만, 한율은 그런가 보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한율은 기획사에선 레슨을 받는 시간 외에 자율연습을 하다가, 최소 30분씩은 길우성에게 춤 과외를 받았다. 노래는 자주 들으며 흥얼거렸던 것으로 때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월 마지막 주 토요일. 

WB래빗 엔터테인먼트의 월말평가일이 되었다. 

평가는 회사 내 가장 넓은 연습실에서 여자연습생들을 포함한 모든 연습생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일자로 데스크 앞에 쭉 앉은 WB래빗 트레이너들과 대표, 직원들 앞에서 진행되었다. 설치된 카메라는 정면 하나, 대각선 둘. 평가 항목은 노래부터

순서는 달마다 이름의 정순과 역순으로 바뀌는데, 이번엔 역순인지라 한율이 길우성보다 먼저였다. 

한율은 잔뜩 긴장하여 처음부터 실수를 저지르는 앞 연습생을 보며 생각했다. 

‘의도적으로 압박감을 주는 배치야.’

이 압박감부터가 테스트의 일부,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선이었다. 아이돌을 비롯한 수많은 연예인이 그렇듯, 데뷔를 하게 되면 가장 많이 견뎌야 하는 게 온갖 시선과 카메라 렌즈일 테니. 

한율의 차례가 되었다. 바닥에 작은 테이프가 붙여진 중앙에 서자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율은 전혀 압박감을 받지 않았다. 이래봬도 한때 한 부대를 지휘 통솔했던 경험이 있는 몸.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번뜩이는 시선도, 흉포한 마물을 상대할 때 받았던 끈적끈적한 살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반주 주세요.”

직원이 한율이 미리 건네준 반주 파일을 재생했다. 

한율은 덤덤한 표정으로 가벼이 닫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예상보다 굉장히 올드한 전주에 당황한 연습생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노래가 시작되자 다시 한율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I was born by the river in a little tent.”

한율이 선택한 노래는 샘 쿡(Sam Cooke)의 ‘A Change Is Gonna Come’이었다. 로건 워커 시절, 우연히 한 번 듣고 마음에 들어 ‘서한율’이 되어서도 이따금씩 듣던 노래. 

원곡과 달리 한율은 기교를 완전히 빼고 그저 곧은 목소리로 음을 탔다. 본래 화려한 기교를 요구하는 노래도 아니었지만. 

“···But I know, a change gonna come, oh yes, it will.”

한율의 노래가 끝나자 짧은 정적이 흘렀다. 트레이너들은 서로와 대표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평가서에 점수와 의견을 적었다. 돌연 라이언이 크게 박수치며 외쳤다. 

“하뉼, 굿, 굿!”

그제야 연습생들이 작게 수군거렸다. 

“발음 엄청 좋은데? 원어민인 줄?”

“근데 뭔가 좀 많이 심심하지 않았어?”

“목소리 좋다. 완전 깨끗해.”

“조용조용! 잘 들었어요.”

한율은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명의 연습생 차례가 지나고 길우성이 중앙에 섰다.

‘그러고 보니 저놈이 보컬레슨 시간 외에 노래 부르는 걸 본 적이 없네.’

아아. 길우성이 잠시 목을 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뻔뻔한 성격답게 긴장하는 기색은 없었다. 

“반주 주세요.”

길우성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한율은 길우성의 뒤통수를 보며 생각했다. 

‘···넌 그냥 춤이나 열심히 춰라.’

댄스 평가는 노래 평가가 끝난 후 점심시간을 사이에 두고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몸을 움직이다보니 연습생 대부분은 노래를 부를 때에 비해 긴장을 덜한 듯 보였다. 

되레 한율은 두 번의 실수를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유나 반성은 굳이 하지 않았다. 지구인들 앞에서 춤추는 이 상황이 너무나 싫다는 본심이 툭 튀어나와 벌어진 일이라. 

“춤에서 조금 실수한 게 아깝긴 한데, 그만하면 잘한 것 같다, 야.”

월말평가가 끝난 건 오후 4시가 될 무렵이었다. 평가 결과는 개별 통지이므로, 연습생들은 트레이너와 대표, 직원들이 모두 나간 뒤 어슬렁어슬렁 흩어졌다. 

길우성의 말에 두 사람 뒤를 바짝 좇아 걷던 라이언이 동의했다. 

[음, 특히 노래가 좋았어. 그런데 누구 노래였더라?]

“샘 쿡.”

“오오.”

휴게실로 들어간 한율은 캐비닛을 열었다. 월말평가가 있는 날이었지만 4시 중국어레슨은 그대로 잡혀 있었다. 교재와 필기구를 챙기는데, 한 연습생이 모두를 향해 외쳤다. 

“야, 이따 여섯 시에 고기 먹으러 갈 사람! 유호 형이 쏜댄다!”

“오오! 진짜요?”

월말평가에 대해 아쉬움 가득한 우울한 목소리로 웅성거리던 연습생들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끼익, 툭. 한율은 캐비닛 문을 닫으며 유호를 바라보았다. 월말평가가 막 끝난 참이라 현재 휴게실엔 남자연습생 전원이 다 들어와 있었다.

이중 반만 참석해도 밥값이 굉장히 많이 나올 텐데. 돈이 많은가?

“갈 사람 손!”

유호는 참석희망자를 체크하는 연습생 옆에 앉아 조용히 입가를 올리며 웃고 있었다. 라이언이 ‘저요!’ 하며 번쩍 손을 든 가운데, 길우성이 한율의 발을 툭 찼다. 

“갈래?”

“넌?”

“공짜 밥인데 당연히 가야지.”

“그래, 많이 먹고 와라.”

“안 간다고?”

“얻어먹는 거 싫어해.”

저들과 친분을 쌓을 필욘 없으니. 

“그래, 금수저라 좋겠다. —형! 저도 가요!”

순식간에 유호가 있는 곳으로 연습생들이 몰렸다. 한율은 그 모습을 일별하곤 떠들썩한 휴게실을 나왔다. 

중국어레슨을 받는 사무실 옆 회의실에 들어가자, 지난주 첫 수업에 안면을 튼 여자연습생들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한율도 그들에게 꾸벅이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았다. 

“너 그거 들었어? 라나 언니 얘기?”

“라나 언니? 언니가 왜?”

여자연습생들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러나 굉장히 조용해서 듣고 싶지 않아도 다 들렸다. 

“저번에 음방 촬영 태국에서 했잖아. 그때 어떤 새끼가 라나 언니 힙 만졌대.”

“미친 거 아냐?! 와씨, 그 변태 새끼 누군데?”

“몰라, 중간에 대형 그룹 때문에 순서가 꼬였는데 그것 때문에 정신없이 이동하는 중에 어떤 새끼가 만졌대. 은영 언니가 누가 킥킥대면서 웃는 거 들었다더라.”

“ㅆ··· 이 바닥에 별 거지 같은 양아치들도 많이 들어온다더니.”

쌍욕을 내뱉으려던 연습생이 황급히 한율의 눈치를 살피곤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도 그때 누가 지나갔는지는 알 수 있지 않아?”

“스태프들이랑···.”

벌컥. 그때 중국어 강사가 들어왔다. 중국어레슨을 함께 받는 남자연습생 두 명도 함께. 붙어서 소곤거리던 두 여자연습생이 휙 떨어졌다. 

중국어 강사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오늘 월말평가 받는 날이었죠? 다들 수고 많았어요.”

*

치이익. 두툼하게 썰린 오겹살이 불판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갔다. 세 개의 테이블을 이어붙인 자리에 앉은 연습생들은 연신 유호에게 고맙다고 외치며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와, 이 자리에 빠진 배부른 놈들은 누구냐?”

“차남석, 박현우, 서한율. 권이랑 승준이는 학원 끝나고 온대요.”

“현우도 연기학원 갔을 걸? 남석이는 원래 오늘 약속 있다 그랬어.”

“그럼 서한율은? 기타 레슨은 일곱 시에나 있던데.”

연습생들이 시선이 자연스레 서한율과 가장 친한 길우성을 향했다. 길우성은 상추쌈을 입안에 욱여넣다가 모르겠단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정민솔이 픽 웃었다. 

“걔 하는 거 보면 우리랑 선 긋는 거 보이지 않아?”

“왜, 그래도 이것저것 열심히 하드만. 매일 우성이랑 밤늦게까지 연습실에 있고.”

“회사에서 그렇게 밀어준다 티를 내는데, 지가 열심히 해야지. 당연한 거 아니에요?”

“넌 또 왜 그러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애한테.”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딴 식으로 구니까 그렇죠. 형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거 아냐. 오늘도 별 일 없는데 나오지도 않고.”

한참동안 말없이 고기를 집어먹던 라이언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유호가 살며시 웃으면서 불만을 토로한 정민솔을 달랬다. 

“나도 조금 서운하긴 한데, 다른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오늘 한율이 한 거 생각해봐. 엄청 열심히 준비한 게 눈에 딱 보이더라. 난 정말 걔가 춤 노래 배운지 한 달도 안 된 애라는 게 안 믿겨지던데?”

“그래, 내가 보기엔 걔 그냥 사교성이랑 눈치가 좀 없는 거야. 아, 너 전에 그거 안 봤냐? 차남석 SNS?”

“뭐 올라왔었는데요?”

“차남석이랑 서한율 어색함 폭발 팬 선물 인증샷. 크큭.”

그리고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팬’으로 넘어갔다. 

데뷔를 하지 않은 연습생에게도 팬이 생기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WB래빗은 크리스탈 래빗을 제외하곤 명성이 적다보니 주시하는 눈도 퍽 적었다. 

“남석이가 잘생기긴 했지. 노래 잘하는 성당 오빠. 큭큭.”

“난 그놈이 일요일 새벽마다 미사 가는 거 생각하면 빵 터짐. 선물 준 거 혹시 성당 동생 아니냐?”

“야, 그런데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차남석 중2때 KBC 노래 프로 본선까지 올라갔었잖아. 왜 보컬리스트엔 안 나간대?”

“몰라. 아, 나도 선물 받고 싶다. 아니, 선물은 안 줘도 좋으니까 응원한다는 말 한 마디라도.”

“울지 말고 천천히 고기나 먹어, 친구야. 입 벌려, 고기 들어간다.”

우걱우걱 고기를 쌈에 싸먹느라 여념이 없던 길우성은 뒤늦게야 차남석의 SNS를 확인했다. 그리고 차남석과 서한율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놈 책상 구석에 있던 상자가 이거였구나! 아니, 선물 받은 게 언젠데 아직도 있어?! 나중에 몇 개만 달라 그래야지.’

한편 그 시각, 한율은 보컬연습실에 앉아 기타를 띵가띵가 치고 있었다. 조금 전 구내식당에서 마주친 좌기훈 대표의 말을 떠올리며. 

『다음 보컬리스트에 남석이랑 같이 나가자.』

연예기획사 소속 연습생들만이 나갈 수 있는 노래 경연 프로그램, <보컬리스트>. 바로 얼마 전에야 시즌2가 끝났지만, 좌기훈 대표는 시즌3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었다. 

『시즌3은 개인이 아닌 듀엣 참가거든. 오늘 보니 너랑 남석이 목소리가 잘 어울릴 것 같더라. 아직 남석이한텐 얘기 전이니 다른 애들한테도 비밀로 하고. 그런데··· 다른 애들은 다 어디 가고 한율이 너 혼자 있어?』

길우성을 향한 포석을 깔기 위해 WB래빗에 들어와 아이돌 지망생 짓거릴 하고 있다. 매일 노래를 부르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춤 연습에, 다른 여러 레슨까지. 그런데 이번엔 TV프로그램에 출연?

···딩. 

‘거기까지 할 필요가 있나?’

아무리 계산기를 두들겨 봐도 득이 될 게 없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길우성에게 ‘아, 저놈은 보컬로 가려나 보다’란 가벼운 감상 한 줄 얹어주는 정도?

생각을 마친 한율은 기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3층에 있는 대표실로 향했다. 하지만 곧 허탕을 치고 내려왔다. 이미 퇴근하고 없었다. 한율은 대신 사무실에 있는 강무기 팀장을 찾았다.

나가

강 팀장은 한율의 고사에 손사래를 쳤다. 

“아직 예선이 한 달이나 남았으니까 벌써 부담을 느낄 필욘 없어, 한율아.”

강 팀장은 좌 대표가 한율에게 말할 때 바로 옆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옆에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하지만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다른 선배 연습생들을 제치면서까지 나가고 싶진 않아요.”

“왜. 너 기타 레슨 받는 거 보고 뭐라 그래?”

강 팀장의 목소리가 어둡게 내리깔렸다. 괜히 신인개발팀 팀장이 아닌 모양이었다. 눈치가 굉장히 빠르다. 

“그리고 대표님이 말씀하셨잖아. 너랑 남석이 목소리가 잘 어울린다고. 그게 이유야. 연습생 연차 그런 거 상관없이, 보컬리스트 다음 컨셉이랑 딱 맞는 듀엣을 찾다보니 너랑 남석이란 결론이 나온 거라고. 이건 대표님과 나만이 아니라 다른 트레이너 쌤들 의견이기도 해.”

길게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턱수염이 빼곡하게 난 얼굴도 험상궂어서, 다른 연습생이었다면 바로 꼬리를 내릴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한율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그래도 나가고 싶지 않다면요?”

“······한율아.”

드륵. 의자에 앉아있던 강 팀장이 일어났다. 한율의 고개가 눈높이에 맞춰 절로 올라갔다. 턱. 강 팀장이 한율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얼굴을 바짝 가까이 댄 채, 한율의 두 눈을 직시하며 한 글자씩 뚝뚝 끊어 내뱉었다. 

“나가.”

“······.”

싫으면 나가라는 협박을 내포한 중의성 띤 명령이었다. 

“레슨 받을 때 혼났냐? 기분 안 좋아 보인다?”

기타레슨을 받고 댄스연습실로 가자, 오늘은 제법 많은 연습생들이 남아있었다. 몸에 짙게 밴 고기 냄새를 풍기며. 

내가 먹었다면 몰라도 남이 먹은 음식 냄새는 향기롭지 못한 법이다. 한율은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냄새에 질색하며 도로 연습실을 나갔다. 길우성이 따라 나왔다. 

“왜. 진짜 뭔 일 있었어?”

“별로. 나 오늘은 먼저 갈 테니까 나중에 알아서 와.”

“헉!”

“···택시비 주랴?”

“에이, 내가 그것까지 받으면 완전 염치없는 새끼지. 같이 가자!”

“······.”

밤 9시를 조금 넘긴 시각. 이것도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평소엔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나와서 그럴까. 밖으로 나왔을 때의 거리는 환하게 느껴졌다. 

“오오, 간만에 대중교통을 이용해보는 건가!”

“너 학교 갈 때 버스타고 다니지 않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여기 온 뒤로 늘 퇴근할 땐 걷거나 너한테 빌붙어서 택시 타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하··· 그나저나 시간 참 빠르다.”

쌀쌀한 밤공기를 훅 들이마신 길우성이 씩 웃었다. 

“너 스토커로 알고 돈 뜯은 게 바로 어제 일 같은데.”

“아, 맞다. 너 병원비 언제 갚을래?”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한율이 그제야 생각나 되묻자, 길우성은 ‘아씨 괜히 말했어’라고 혼자 구시렁거리다가 싹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너 다른 사람들이랑 트러블 없지?”

“생길 짬이 있어 보이냐?”

“짝수 달 월말평가 댄스는 팀플이니까 싫어도 부딪칠 수밖에 없을걸?”

“팀플?”

“어. 팀은 트레이너 쌤이 노래랑 같이 정해줘. 한 중순 쯤?”

혼자면 몰라도 팀이라. 여러모로 굉장히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물며 그때쯤이면 차남석과도 한창 노래 호흡을 맞추고 있어야 할 터. 

하아. 한율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길우성.”

“응?”

그리고 아주 가느다란 희망을 섞어 길우성에게 물었다. 

“너 만약에 누가 의식주, 인터넷 등등 편의 다 제공해 줄 테니 평생 집에만 갇혀 살라고 하면 들을래?”

길우성이 진저리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으어, 상상만 해도 싫어! 답답해!”

“그러냐···. ···쳇.”

“···음? 방금 혹시 혀 찼어?”

한율은 시치미 뗐다. 

“뭘 차?”

“혀.”

“그걸 왜 차.”

“나야 모르지? ···응?”

한율은 어리둥절해하는 길우성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평소 회사에서 나올 땐 항상 불이 꺼져 있던 분식집 간판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한율은 그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야, 핫도그 하나 먹고 갈래?”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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