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에서 한율의 이미지는 고고한 모범생이었다. 특별히 친한 무리를 만들어 어울리진 않지만, 그럼에도 누구 앞에서건 주눅 들지 않고 할 말 다 하는 마이페이스.
거기에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하고 하얀 피부에 새카만 두 눈이 인상적인 단정한 외모. 가방이나 신발은 고가의 브랜드, 자전거도 학생이 몰기엔 비싼 것이다 보니 주목받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간혹 일부러 한율을 보려고 기웃거리는 다른 반 학생까지 있을 정도였다.
“야, 써한~율! 오늘도 수업 끝나고 바로 째냐?”
“어.”
관심이 고픈 아이들에겐 그야말로 친구라는 이름의 훌륭한 장식품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 학교에선 한율을 보면 친한 척 해대는 아이들이 많았다.
“너 진짜 어디 다니는데? 좋은 데면 나도 좀 데리고 가주라. 어? 우리 친구 아니냐?”
“너랑 친구 먹은 기억 없는데?”
“와—, 이 새끼 또 튕겨!”
“난 서한율이 진지하게 아니라고 저 새끼 내칠 때마다 존나 사이다 마시는 기분. 크큭. 야, 친한 척 하지 마, 새꺄. 흙 떨어져!”
“그래! 우리 한율이한테 흙 묻히지 마라, 생퀴야!”
“이 새끼들이?!”
오늘따라 유독 바보들이 시끄럽다. 한율은 어느새 완연한 봄의 풍경으로 물든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랐다.
각기 다른 기기에서 흘러나와 뒤섞이는 여러 음악과 발 구르는 소리가 쿵쿵, 공기를 잘게 난도질하는 지하 연습실 특유의 흥취.
한율은 자신도 모르게 그곳과 이곳을 비교하며 머릿속으로 음률을 떠올렸다. 얼마 전부터 차남석과 연습 중인 곡을.
*
“오늘도 레슨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나가기 전에 월말평가 팀과 곡부터 알려드릴게요.”
드디어 그날인가. 두 시간에 걸친 댄스레슨을 끝내고 거친 숨을 헉헉 몰아쉬던 연습생들이 입을 다물고 트레이너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앉은 채 타월로 땀을 닦던 한율은 그나마 사람을 덜 귀찮게 하는 팀이 되기를 바랐다.
“우선 팀은 셋으로 나눴고요. A팀 노래부터.”
트레이너가 연습실 한 편에 설치된 TV를 핸드폰과 연결했다. 곧 한국 보이그룹 무대 영상이 나왔다. 굉장히 파워풀하고 빠른 음악에 절도 있는 칼군무가 펼쳐졌다.
“아···, 저거 엄청 빡센데.”
“다음 B팀.”
B팀이 할 안무 역시 한국 보이그룹의 것으로, 조금 전 곡보단 약간 느리지만, 그만큼 섬세한 동작과 고도의 표정 연기를 요구하는 섹시한 컨셉의 안무였다.
가장 나이가 어린 박고영이 중얼거렸다.
“난 저거 하면 바로 점수 깎일 것 같은데···.”
“으른미 장착! 할 수 있어!”
C팀 역시 한국 보이그룹의 것으로, 굉장히 밝고 경쾌한 음악이었다. 안무 난이도는 가장 무난해 보였지만, 무난하다는 건 실력이 향상됐는지 제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주 잘해야 본전, 실수 하나라도 하면 이런 것도 틀리냐며 더 깎일 수도 있음이다.
“자, 그럼 바로 팀 발표할게요.”
트레이너는 창백한 안색에 더 도드라져 보이는 퀭한 눈을 들어 연습생들을 죽 둘러보았다. 웅성거리던 연습생들이 입을 다물었다. 곧 보름 후 함께 월말평가를 받을 팀과 이름이 호명되었다.
차남석이 기가 막힌 얼굴로 중얼거렸다.
“와. 이거 일부러인가?”
차남석의 날이 선 시선에 라이언도 눈을 부라렸다가 이내 휙 고개를 돌렸다. 중간에 앉은 유호는 하하··· 어설픈 웃음을 흘렸고, 임승준은 보이지 않는 먼 산을 찾아 헤맸으며, 한율은 차남석이 같은 팀이 되었으니 노래 연습시간을 맞출 수고를 덜었다고 생각했다.
“원래 일곱 명이 추는 안무니까 동선도 수정해야 할 것 같아.”
유호가 나서서 사과패드에 영상을 띄웠다.
검붉은 조명 아래 드라이아이스가 천천히 바닥에 깔린다. 그리고 시작되는 강렬한 사운드와 파워풀하게 시작되는 안무.
그들은 A팀이었다.
“······.”
영상을 끝까지 다 보고 난 뒤 그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승준이 같은 팀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남석, 유호, 라이언, 한율 순으로.
“포지션 보컬, 보컬, 래퍼, 보컬, ···나 래퍼.”
“댄서가 전멸이네.”
“와, 황 쌤 진짜 너무하네. 최소한 B였으면 괜···.”
“응, 안 돼.”
지나가던 박현우가 끼어들었다. 한율은 고개를 돌려 길우성이 있는 C팀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춤을 잘 추는 연습생들만 모여 있었다. B팀은 밸런스가 골고루 잡힌 연습생들만.
확실히, 트레이너의 고의성이 다분해 보이는 조합이었다.
“아···, 난감하네.”
“그래도 다행히 댄스만 보는 거니까, 일단 돌아가면서 누구 파트를 하고 싶은지 말해보자.”
“우리 중에서 유호 형 피지컬이 제일 좋잖아요. 형이 센터를 맡고···.”
“그건 좀 뻔해 보이지 않냐?”
“그럼 남석이 네가 서게?”
“네가 서는 건?”
“나눈?”
네 명이 머리를 맞대고 숙덕거렸다. 한율은 편히 앉은 채 남의 일처럼 방관했다. 이들 중 연습생 생활이 제일 짧고 실력도 떨어지므로, 그들도 은연중에 한율이 가장 쉬운 파트를 맡아야 한다 여기는 듯했다. 한율도 불만은 없었다. 정말 아이돌 데뷔가 목표는 아니므로, 월말평가 같은 건 적당히 넘기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야, 멍 때리지 말고 너도 말 좀 해.”
돌연 차남석이 한율을 타박했다.
“그룹댄스는 아예 처음이라 전 아무 것도 모르는데요.”
“자랑이다. 에휴.”
“너희 둘 오늘도 연습하러 가?”
“아···, 네. 30분에 쌤 오기로 하셨어요.”
한율과 차남석이 <보컬리스트 시즌3>에 나간다는 소식은 바로 이틀 전 입이 싼 직원을 통해 쫙 퍼져,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은 얼마 전부터 두 사람이 함께 보컬 연습실에 들어가 따로 트레이너의 레슨을 받는 모습이 목격되면서 둘이 뭔가 준비하는 거 아니냐란 추측성 소문이 돌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 파트만 우선 정하자. 동선은 내가 짜볼게.”
“죄송해요, 형.”
“아냐. 너랑 한율이 방송이 더 중요하잖아.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나가는 건데.”
그렇게 얼추 각자 파트를 정한 후, 유호는 격려하는 눈빛으로 팀원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럼 연습은 내일부터 단체레슨 시간 전후로 모이는 걸로. 오늘은 이만 해산.”
*
한율의 방 의자에 걸터앉은 채 에너지 바를 먹으며 길우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국 A팀 리더는 유호 형이 됐구만.”
한율은 침대에 앉아 A팀이 추게 될 곡의 무대영상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이 격한 춤을 추면서 노래까지 라이브로 소화하다니. 괴물들인가.’
“하긴. 춤 실력과 리드 실력은 다르니까.”
“···유호가 우리 팀에서 실력이 제일 나은 거 아니었어?”
“야, 사람 없다고 이름을 그렇게 막 부르냐? 우리보다 다섯 살 위다, 인마. 연습생으로 치면 6년 차 대선배시고.”
“그럼 누가 제일 잘하는데?”
길우성이 단호히 말했다.
“남석이 형.”
“차남석?”
“또또. 아무리 남석이 형이 우리랑 꼴랑 한 살 차이래도 그렇게 막 부르면 쓰나. 저번 달에 남석이 형 춤추는 거 못 봤냐? 보기엔 쉽게 추는 것 같아도 막상 따라하려면 개 어려운 춤이야. 반면에 유호 형은 팔다리가 길고 빨라서 조금만 동작 크게 해도 시원하게 보이는 것뿐이고.”
그런가.
부스럭부스럭. 길우성이 남은 에너지 바를 마저 입안에 넣고 포장지를 고이 접었다. 견과류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길우성이 그 부스러기를 황급히 주워 먹었다.
“아, 아깝.”
그 모습을 가만히 노려보던 한율은 길우성에게 서늘한 목소리를 날렸다.
“나가.”
다음 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집에 들렀다가 WB래빗으로 출근한 한율은, 연습실에 들어서자마자 싸늘한 기류를 느꼈다.
처음엔 연습실에 우두커니 마주보고 서있는 차남석과 라이언을 보고 ‘둘이 또 싸우는 구나’했지만 아니었다. 이번엔 차남석이 라이언과 누군가의 사이를 막고 있었다.
춤을 연습하던 와중이었는지,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임승준이 라이언에게 외쳤다.
“이딴 식으로 할 거면 나가, 이 새끼야!”
“내가 왜?!”
라이언이 한국말로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잔뜩 흥분한 채 유호를 가리키며 빠른 영어로 말했다.
[돋보이는 파트를 전부 한두 명만 독식하고 있잖아! 아무리 리더라도 이건 월권행위야! 말이 팀플레이지, 점수는 개개인마다 다르잖아? 불공평하다고!]
그 말에 정황이 모두 담겨 있었다.
어느새 성실한 연습생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싶으면 한국말로 해, 새꺄!”
그러나 임승준의 표정을 보아하니, 언어불통 문제로 라이언의 불만이 뭔지 정말 몰라서 저러는 건 아닌 듯 했다. 한율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씩씩거리던 라이언이 구세주를 만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뉼!”
그리고 조금 전 내뱉은 것과 같은 요지로 한율에게 하소연했다. 연습생 중에서 라이언과 그나마 가까운 게 한율이라 그런지, 라이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임승준의 표정은 살며시 일그러졌다.
다른 팀 연습생들은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하······.”
차남석은 난감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며 동선 플롯을 복사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대충 라이언의 이야기를 들은 한율이 그에게 손을 내밀자, 차남석이 순순히 넘겨주었다.
유호가 라이언을 달랬다.
“아까 내가 말했잖아, 라이언. 이건 내가 생각한 베스트일 뿐, 너희들 의견도 받아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고.”
“그런데 의견은 내지 않고 무조건 싫다고 떽떽거리기나 하고.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네가 짜오면 될 거 아냐, 새꺄!”
[욕하지 마! 누군 욕 쓸 줄 몰라서 안 쓰는 줄 알아?!]
“그만해, 승준아. 라이언 너도 진정해. 진정하고, 차분하게 얘기 하자. 응?”
유호가 짜온 동선은 라이언의 말 그대로였다. 돋보이는 파트는 거의 임승준과 유호가 가져갔다. 차남석도 그걸 알지만 자신은 곧 방송 출연을 하게 됐으니 이 정도 양보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금 라이언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편을 들어주고 싶진 않아 그냥 입을 다무는 거고.
[하뉼, 너도 말 좀 해 봐! 분량으로 치면 네가 제일 적단 말이야! 화 안 나?]
“안 나는데.”
“······!”
라이언이 충격 받은 얼굴로 한율을 보았다. 그러곤 이유는 모르겠지만 차남석과 한율을 번갈아 보더니, 설움으로 가득 찬 시선을 푹 내렸다.
한율은 유호에게 동선이 그려진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수정은 필요해 보이네요. 이대로 가면 라이언이 너무 죽어요. 앞으로 치고 나오는 안무 외엔 내내 정면 시야에서 가려져서.”
“알아. 그래서 의견조율해서 수정하겠다고 형이 몇 번이나 말했는데 라이언 저게—.”
“쉿, 그만. 다른 팀 연습에 방해되겠다. 우리 일단 다른 데서 동선 새로 짜보자. 응? 라이언.”
유호가 라이언의 등을 살며시 토닥이며 재차 달랬다. 한율의 말을 대강 알아들었는지, 다시 고개를 들었던 라이언은 한층 누그러진 기색으로 끄덕였다. 그리고 의견조율과 동선 수정 결과, 돋보이는 분량은 유호와 임승준, 라이언 셋이서 사이좋게 나눠가졌다.
“그런데 넌 진짜 괜찮냐?”
단체레슨이 끝난 후, 방송에 나가 부를 곡 연습을 위해 한율과 차남석은 월말평가 댄스 연습을 뒤로 미루고 녹음실로 향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수시로 녹음하면서 세밀한 점검을 진행한다고 했다.
“별로?”
“가만히 보면 너도 참 욕심이 없어?”
“형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솔직히 양보하기 싫지 않았어요?”
“싫어도 별 수 있냐. 방송 끈을 한 번이라도 잡아본 내가 월평에서도 아득바득 자리 차지하면 나중에 나만 욕 처먹을 게 뻔한데. 저 새끼 욕심 많고 인성 존나 더럽더라, 이 말 한 마디 새어나가면 기껏 데뷔해도 이미지 작살나는 건 시간문제야.”
“아아, 그래서 라이언의 멱살을 그렇게.”
“닥쳐. 그리고 내가 더 처맞았거든?”
녹음실에는 두 사람이 부를 기성곡의 편곡을 맡은 편곡가와 A&R팀 팀장, 스튜디오 엔지니어와 보컬 트레이너가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준비해준 곡은 총 네 곡. 상황에 따라 곡 선정을 언제든 바꾸기 위해 두루두루 연습하고 있었다.
“와, 들을 때마다 놀라는 건데 너네 진짜 화음 쌓을 때 서로한테 전혀 안 휘말리는 구나. 남석이야 짬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햐, 이건 쉽지가 않은데.”
“조금 전 ‘너에게’ 부분부터 다시 갈게요. 지금 둘이 안 친한 거 너무 티나거든요?”
“한율아, 파트너 호흡 좀 잘 들어줘.”
“가사 좀 생각해서 몰입해주지 않으련, 얘들아? 이 노래, 한 여자를 동시에 좋아하게 된 두 친구 얘기야. 지금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 좋아하는 것 같거든?”
그렇게 좁은 녹음실 부스에 갇히다시피 한 채 지시받은 대로 부르기를 반복. 두 시간이 지나서야 해방이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댄스 연습실로 돌아간 뒤엔 월말평가 때 출 그룹댄스 커버안무를 연습했다.
새벽 2시. 누군가 먼저 그만하자는 말을 꺼낼 때까지 연습하다 보니 이 시각이었다.
사실 한율은 자정이 넘어간 뒤 몇 번이나 먼저 말하려 했지만, 결국엔 입을 꾹 다물었다. 안무 숙지가 제일 안 된 주제에 가장 먼저 백기를 드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 까닭이었다.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몸에도 슬슬 화가 나 오기까지 생겼다. 특히나 군무에서 저 혼자만 0.3초 동작이 늦다는 것에.
그리고 이런 일정을 며칠 째 반복하자, 매일 새벽 늦게 들어오는 한율과 길우성을 보다 못한 모친이 급기야 한 마디 했다.
“한율아, 연습도 좋지만 몸은 챙겨가면서 해야지. 우성이 너도.”
‘서한율’이 되어 이렇게까지 집중력을 쏟아 부으며 몸을 혹사한 건 처음이라, 한율은 어제 처음 학교 수업시간에 졸기까지 했다.
“그러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 쓰러지면 너희들만 손해란 거 모르겠니?”
“···죄송합니다.”
“내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사과해야지.”
그러면서 모친은 한율과 길우성의 손에 홍삼 엑기스를 하나씩 쥐어주었다.
그렇게 4월 월말평가를 일주일을 앞둔 날.
한율은 차남석과 함께 대표실로 불려갔다.
대표실에는 좌기훈 대표는 물론이고 신인개발팀과 A&R팀, 매니지먼트팀, 기획홍보팀 팀장까지 있었다. WB래빗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다 모여 있자, 차남석은 한 대 툭 치면 곧바로 쓰러질 것처럼 꼿꼿하게 얼었다.
“너희 두 사람이 노래 부르는 걸 쭉 듣고, 봤는데 말이다.”
“네, 넷!”
“케미가 별로야.”
“···네?”
대표의 말에, 차남석의 얼굴이 하늘이 무너지는 걸 본 사람처럼 하얗게 질렸다. 한율은 ‘얘가 왜 이러나’ 차남석을 흘깃하곤 이어지는 대표의 말을 들었다.
“목소리만 놓고 보면 어울려. 그런데, 너희들이 나갈 건 TV프로그램이야. 화면에 너희 두 사람을 집어넣으면 호흡도 감정도 교류되는 거 전혀 없이 따로 노는 게 눈에 뻔히 보인다고. 화음만 조화롭게 쌓으면 뭐 해. 너희가 노래 부르는 기계야?”
“······.”
“그나마 요즘 둘 사이의 호흡이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맞아서 이유가 뭘까 분석해봤더니··· 너희들. 이번 월말평가 같은 팀이 되었더라.”
대체 무슨 소릴 하려고 이러나.
마냥 혼을 내려 부르는 건 아닌 것 같아 보이자, 얼어있던 차남석이 눈을 깜빡거리며 조금씩 생체반응을 보였다.
좌기훈 대표가 한율과 차남석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예선까지 앞으로 8일 남았지?”
“네.”
“사전 인터뷰 날짜는 내일모레로, 짧게나마 너희 연습하는 모습도 찍을 거야. 그래서 지금도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유 팀장님.”
“네.”
매니지먼트팀의 유 팀장이 나서서 차남석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열쇠였다.
“······?”
의아해하는 한율과 차남석에게 좌기훈 대표는 마치 군대 조교와 같은 말투로 고지했다. 뒷짐을 지고 선 모양새도 딱 그와 같았다.
“내일부터 너희 둘은 한 집에서 같이 살면서, 회사에 나와서도 같이 움직이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퇴근하면서 친해지는 시간을 갖는다. 알았나?”
“······.”
“······.”
“알았니?”
대표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그제야 대표의 지시를 액면 그대로 이해한 두 사람은 서로를 흘끗 보고선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알고 보니 대표는 두 사람에게 고지하기에 앞서 부모의 동의를 구한 상태였다. 그렇게 한율은 단체레슨을 받자마자 매니지먼트팀 직원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서 짐을 싸게 되었다. 나중에 혼자 한율의 집으로 들어갈 길우성의 당황해할 꼴이 눈에 선하지만, 오늘부터 당장 같이 살라고 하니 별 수 있나.
모친은 당신의 귀한 아들을 당분간이나마 독립시키게 되자 퍽 불안해했지만, 한율은 그런 그녀를 안심시킨 후 대충 짐을 싸서 나왔다.
WB래빗에서 마련해준 임시숙소는 회사에서 불과 2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낡은 빌라로, 거실과 침실이 분리된 원룸이었다.
매니지먼트팀 직원 현장전이 말했다.
“바로 어제까지 매니저 중 한 명이 살았던 곳이고, 오늘 아침엔 청소업체까지 불러서 깨끗하게 청소했으니 괜찮을 거야. 2층 침대 매트리스랑 이불, 베개도 다 새 거니까 안심하고.”
“냉장고에 소주 있는데, 마셔도 돼요?”
남자 셋이 들어오니 집이 퍽 좁다. 냉장고를 열어본 차남석이 묻자, 현장전이 기겁을 하며 성큼 다가갔다.
“당연히 안 되지! 아, 이건 왜 안 가져간 거야, 진짜.”
화장실 겸 욕실로 들어간 한율은 선반을 열어보았다. 그러곤 그 안에 처박힌 작은 종이상자를 집었다.
“여기 있는 담배는 피워도 돼요?”
현장전이 소주병을 끌어안은 채 달려왔다.
“안 돼!”
그리고 현장전은 괜히 자신을 놀리지 말라며 한율과 차남석에게 잔소리를 퍼붓곤, 문단속 잘 하란 말을 남기고 떠났다. 소주와 담배를 챙겨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차피 잠만 자는 곳인데 굳이 같이 살 필요까지 있나?”
차남석이 구시렁거리며 짐을 풀었다. 그가 가장 먼저 꺼내 옷걸이에 건 것은 교복. 길우성과 같은 학교 교복이었다.
“야, 그런데 벽에서 담배 쩐내 나는 것 같지 않냐?”
“방향제 하나 사와야겠어요. 냄새가 심하네.”
“옷에 냄새 배면 안 되는데. 괜히 오해 사잖아.”
결국 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다말고 근처 마트로 향했다. 그리고 방향제와 섬유탈취제 및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샀다.
“영수증 줘. 이런 건 회사에 청구할 수 있으면 다 해야 돼.”
그래도 한 살 연상이랍시고 나서서 챙기네. 한율은 기꺼이 영수증을 차남석에게 넘겼다. 덤으로 쇼핑한 물건 봉투도 넘기려 했지만 그건 받지 않았다.
짐을 간단하게 정리한 후엔 다시 회사로 재출근했다. 밤 10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
사전 인터뷰는 WB래빗의 보컬 연습실에서 진행되었다. 신인개발팀의 강 팀장과 카메라를 든 기획홍보팀 직원, 뮤닷의 보컬리스트 측 카메라맨과 조명 스태프, PD까지 다 들어오자 가뜩이나 좁은 연습실이 답답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한율은 사전 인터뷰가 시작되기 직전에야 TV출연에 대한 경각심을 깨쳤다.
전날에 차남석이 화장이 잘 먹어야 한다며 한율의 얼굴에다가도 차가운 마스크 팩을 찰싹 붙인 것까진 참았다. 평소 걸치던 비싼 트레이닝복과 신발은 시청자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급히 길우성의 것을 빌리기까지 했다. 가벼운 메이크업과 헤어 손질을 받고, 마지막으로 회사에서 준비해준 오글거리는 대본을 외우는 것까지도 별 문제없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수업 받는 걸 촬영한다고요?”
“네. 아직 학교를 다니는 미성년 참가자들의 소개 영상엔 일상적인 학교생활부터 짤막하게 집어넣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한율 군 학교 측에 촬영허락도 받았는데, 아직 못 들었어요?”
못 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촬영할 땐 학교홍보영상 촬영이라 둘러대기로 말을 맞췄고, 방송에 나갈 땐 다른 친구들 얼굴은 다 모자이크 처리할 거예요. 교장 선생님은 우리 연락 받고 엄청 좋아하시던데요?”
전체조례시간 10분 내내 혼자 떠드는 대머리 교장이야 좋아하든 말든.
“그런데 한율 군 다니는 학교 알아보니 공부 잘하는 인문계던데, 평소 성적은 어때요? 아, 요즘 중간고사 기간 아니에요? 어때요? 연습하느라 시험성적 잘 안 나오는 거 아니에요?”
인터뷰란 게 이렇게 느닷없이 시작되는 건가. 질문 역시 사전에 건네받은 대본엔 없던 것이었다. 한율은 슬쩍 강 팀장을 살폈다. 강 팀장이 알아서 대답하라는 듯 손을 빙빙 돌렸다.
한율은 PD가 아닌 카메라를 보며 대답했다. 회사에서 카메라에 익숙해져야 한답시고 며칠 내내 수시로 카메라를 들이댄 덕분이었다.
“성적은 평범해요. 중간고사는 1차 예선 다음날인데···.”
5년 후 게이트가 열리면 지구의 사회시스템 절반 이상이 붕괴될 것이다. 인류는 그 해만 10%를 잃을 것이며, 사람은 각성자와 비각성자로 나뉘게 되고, 각성자들 또한 능력에 따라 가축처럼 등급이 매겨진다. 그러니 지금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코피 쏟으며 열심히 공부해봤자 다 부질없는 짓이다.
예견된 미래.
그리고 이 미래를 아는 게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순간, 한율의 가슴엔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의 지구인을 기만한다는 짜릿함이 스쳤다.
입만 웃던 한율의 미소가 눈까지 화사하게 피었다.
“아예 생각을 안 하려고요.”
꽃을 단 토끼
“가뜩이나 좁은데 왜 너까지 끼고 난리냐, 진짜.”
“형은 원래 숙소에서 살았으니까 좁은 데서 북적거리는 거 익숙하잖아요.”
“익숙한 거랑은 다른 문제지, 인마!”
“뭘. 숙소에선 한 방에 네 명씩 잤다드만.”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각. 원룸 안은 차남석과 길우성의 투닥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한율이 없는 한율의 집에서 먹고 자는 건 정말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길우성이 다짜고짜 짐을 싸들고 들이닥친 탓이었다.
“안 되겠다. 이 새끼, 내일 대표님한테 말해서 내쫓아달라고 하자.”
“아, 형. 나 그냥 바닥 구석에서 얌전히 잔다니까요?”
“야! 월말평가까지 3일 밖에 안 남았어! 또 바로 다음 날엔 예선 촬영이고! 꼭 이렇게 사람 피곤하게 들러붙어야겠냐?”
길우성은 찡긋 윙크하는 눈에다 대고 손으로 브이 자를 그렸다.
“헤헷?”
제 딴엔 귀여운 척이었다.
“···야, 서한율. 이 새끼 잡아봐. 명치 한 대 치게.”
며칠 동안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고된 연습에 피곤한 건 한율도 마찬가지였다. 한율은 말없이 길우성을 뒤에서 단단히 붙들었다.
퍽.
“악!”
소란은 길우성의 엄살 가득한 비명을 끝으로 잠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