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새벽 3시 30분.
“얼굴··· 팅팅 부은 것 같은데······.”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차남석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에 반해 그의 얼굴을 만지는 샵 직원들은 쌩쌩했다.
“안 부었으니 걱정 말고, 좀 걸리니까 자도 돼요.”
“와, 평소 피부 관리 어떻게 해요? 너무 깨끗한데? 여드름 난 적 한 번도 없나보다.”
한율 또한 본래 수면리듬에서 크게 어긋난 시간에 다시 눈을 떴더니 정신이 멍했다. 한율은 비몽사몽 상태로 솔직히 대답했다.
“마나 유동······.”
“응? 우동이요? 아, 튀긴 거 말고 생면 먹는구나?”
“그게 아니라···. 음······, 네, 튀긴 거 덜 먹어요.”
사실은 마력으로 만들 마나를 유동시키며 정제하는 과정에서 육체 내의 안 좋은 탁기가 마나에 섞인 불순물과 함께 쓸려 나가고, 심장에 저장한 마력을 한 번씩 체내 구석구석으로 돌리며 어루만질 때에도 절로 걸러 준다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한율은 가까스로 이성을 다잡고 입을 다물었다.
이곳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우리 애들, 한 듯 안 한듯 자연스럽지만 아주 살짝 어른스러워 보이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매니지먼트팀 유 팀장이 샵 직원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본래 그는 크리스탈 래빗 담당이었지만, 이번에 대표의 지시로 특별히 한율과 차남석의 촬영에 동행하기로 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둘 다 너무 잘생겨서 우리가 손 볼 곳이 별로 없는데요?”
“하하, 감사합니다. 아, 여기 따뜻한 음료수 몇 잔 사왔으니 이것도 좀 마시면서 하세요. 새벽부터 수고가 많으시네요.”
깜빡 다시 잠들었다가 다 되었다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한율은 눈썹이 살짝 다듬어지고 눈매가 더 또렷하게 보인다는 것 외에 대체 뭐가 달라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전 인터뷰하기 전에 받은 거랑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머리? 이것도 아주 가볍게만 만진 것 같···.’
“어어, 아직 머리 만지면 안 돼요!”
샵 직원의 외침에, 거울을 보며 앞머리를 만지려던 한율의 손이 뚝 멈췄다. 그때 WB래빗의 스타일리스트가 큼지막한 종이가방 여러 개를 든 채 샵 안으로 들어왔다.
유 팀장은 어느새 잠든 차남석을 깨워 피팅룸 안으로 집어넣었다. 한율은 샵 직원에게 OK 사인을 받고 나서야 피팅룸 안으로 들어가, 스타일리스트가 준비해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둘 다 화려하지 않은 깔끔한 캐주얼 스타일의 옷이었지만 신발만은 브랜드 로고가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색은 달랐다.
“이 신발 한정판 아니에요? 이거 꽤 비쌀 텐데··· 협찬일 리는 없겠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잠에서 완전히 깼는지, 피팅룸에서 나가며 차남석이 유 팀장에게 물었다. 밖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기획홍보팀 직원이 열심히 두 사람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유 팀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표님이 너희 두 사람에게 잘하라고 주신 선물이야. 아껴 신어. 나중에 감사하다고 꼭 인사드리고.”
“오오, 네!”
뮤닷 방송국으로 향하는 동안엔 차 안에서 유 팀장이 준비해준 도시락을 먹었다.
“팀장님, 혹시 다른 참가자 리스트 떴어요?”
“어. 한 시간 전에야 보내주더라. ···자.”
한율은 도시락을 먹으며 아직 새카만 어둠에 잠긴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트에 편히 머리를 기대고 싶었지만 절대 눌리면 안 된다는 스타일리스트의 말 때문에 등은 꼿꼿이 세웠다.
‘난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한율은 문득 자신이 어쩌다 이런 꼴로 방송국에 가게 되었는지 천천히 과정을 되짚어보다, 짧게 한숨 쉬었다.
‘그래도 나름, 지루하진 않았지.’
특히 연습을 거듭할수록 노래와 댄스 실력이 느는 게 스스로도 체감될 때 오는 작은 쾌감. 그건,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마나의 양이 늘어가는 걸 본인 눈으로 직접 보며 뿌듯했던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어차피 5년 후면 지금처럼 마음 편히 춤과 노래를 즐길 수 있는 세상도 끝이겠지만···.’
“아, 미친.”
“······?”
돌연 차남석의 목소리가 깊게 파고들어가던 한율의 상념을 깼다.
“너 가면 이 새끼 조심해.”
차남석이 유 팀장의 핸드폰을 한율에게 넘겼다. 핸드폰엔 누군가의 사진 한 장이 떠있었다.
“아니, 아예 마주치지 않게 피해 다니다가, 어쩌다 마주치면 완전 큰 목소리로 인사해. 사람들 시선 다 집중되게.”
“왜 그러는데요. 이 사람이 누군데.”
서글서글하게 웃는 모양새가 인상이 참 좋아 보인다. 그러나 차남석은 질색하며 그 얼굴에다 삿대질했다.
“안인섭. 소매만 살짝 스쳐도, 자기가 작은 회사 소속이라 개무시한다며 상대방을 오히려 개쓰레기로 만드는 존나 상또라이 양아치 새끼야. 소문으론 예전 기획사에 있을 때 스폰 받다가 걸려서 계약위반으로 쫓겨났는데, 최근엔 기획사 그만두고 나온 연습생들 꼬드겨서 업소에 소개시켜주는 브로커 짓도 한다더라.”
“업소?”
차남석이 한율의 귓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10프로나 호빠 같은데.”
“10프로가 뭐예요?”
호빠는 알지만 10프로는 처음 듣는다. 한율이 되묻자, 차남석은 그것도 모르냐란 표정을 짓더니 다시 소곤거렸다. 그러나 유 팀장에게도 다 들리는지, 그는 룸미러로 두 사람을 살피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술집을 빙자한 성 접대 업소.”
“쓰레기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괜히 얽히지 않게 조심해. 혼자 절대 나다니지 말고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한 살 연상이랍시고 형처럼 구는 차남석을 보며 한율은 지난 번, 라이언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참 믿음직스럽네.’
우리 이름은
WB래빗 엔터테인먼트는 내세울 수 있는 게 ‘크리스탈 래빗’이 유일한 중소 기획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동종업계에서는 그렇게 무시당하는 곳이 아니었다.
우선 대표인 좌기훈은 3대 기획사 중 하나인 스엔 엔터테인먼트 산하 레이블 대표 출신이었고, 독립 또한 스엔과 트러블이 생겨 쫓겨난 게 아닌, 인정을 받아 우호적인 관계로 작별한 사이인 까닭이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WB래빗 초기 자본에 스엔 대표가 적잖이 보태주었다는 소문은 이미 업계에 공공연한 비밀처럼 퍼져 있었다.
그리고 회사 시스템.
WB래빗은 직원들의 복지는 물론, 여타 다른 중소 기획사와 달리 연습생들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걸 우선으로 맞춰주고 있었다. 레슨 커리큘럼도 중소치곤 풍부했고, 특히 연습생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숙식 문제 또한 연습생 본인이 열심히만 하면 문제없었다. 특히 식권 시스템은 일부러 퍼주려는 것처럼 엉성하고 허술했다.
“그렇게 좋은데 왜 연습생 수가 적어요?”
다른 중소기획사 이야기에서 자연스레 WB래빗과의 비교로 넘어가자 한율은 차남석에게 물었다.
“그럼 지원하는 숫자가 더 많아야 하지 않나?”
“알아야 지원을 하지. 우리 회사 좋다는 얘기를 흘리면 괜히 라이벌만 더 끌어들이는 셈인데, 애들이 소문내겠냐? 그리고 내가 전에 말했잖아. 지금 있는 연생 숫자가 우리 회사에서 관리할 수 있는 풀맥시멈이라고. 당분간은 아예 지원조차 안 받을 걸?”
차남석이 핸드폰으로 WB래빗 홈피로 들어가더니 이내 한율에게 보여주었다.
“봐. 우리 회사 홈피 오디션 페이지도 마감으로 닫혀 있잖아.”
“아.”
“네가 우리 회사가 처음이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원래 우리 회사가 아무나 잘 받아주지도 않아. 한 놈만 빼고.”
한율은 그 한 놈이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묻지 않아도 잘 알 것 같았다.
<보컬리스트 시즌3>가 진행될 스튜디오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기실. 대기실 안에는 WB래빗말고도 다른 기획사 세 팀이 더 있었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등 기획사 직원들까지 들어와 있어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보컬리스트 스태프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와 외쳤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나 촬영 스포는 본방 나가기 전까지 외부 유출 절대 안 됩니다! 기획사에서 나오신 분들은 애들 SNS 단속도 시켜주세요! 불미스러운 일 생기면 본인들 책임입니다! 명심하세요!”
“···꼭 유치원생들 잘 단속하라는 것처럼 들리네요.”
“방송국 놈들이 원래 그래. 데뷔해도 인기가 없으면 눈앞에서 욕하고 개무시하는데, 작은 회사 연습생들이 눈에 들어오겠냐?”
“형은 참 이런 거 잘 아네요. 다른 기획사 사정도 그렇고.”
새벽 6시까지 오라 그래놓고 어느새 7시가 될 동안 대기 중이었다. 핸드폰으로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차남석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너도 연생 3년 해봐라. 듣기 싫어도 이 바닥 얘기가 다 귀에 들어와. ···그나저나 사전 리허설도 없이 바로 예선 촬영이라니. 이 프로그램, 뮤닷에서도 완전 계륵 취급인가 보다. 이러면 처음부터 NG 장난 아니게 나올 텐데.”
차남석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보컬리스트 측은 임의로 각 열 팀씩 A, B로 나눠 A부터 스튜디오 무대 뒤쪽에 대기시키다가 무대로 올렸는데, 가장 처음 올라간 팀이 바닥에 붙은 표식은 찾았지만 정작 카메라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한 탓에 처음부터 NG가 났다.
“어디에요! JZ?! 애들 여기에 처음 내보내요? —야! 동선 플롯 전달 안 했어?!”
무대와 떨어진 곳에 마련된 간이의자에 앉아 그 광경을 보던 한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주먹구구식이 따로 없었다.
‘그러면서 첫 팀을 본보기 희생양으로 삼은거로군. 앞으로 통제하기 쉽게.’
눈앞에서 다른 팀이 망신당하고 혼나는 모습을 보여주며, 알아서들 잘하라고. 그리고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참가자들은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까지 대본과 플롯을 다시 들여다보며 눈을 감고 입속으로 중얼중얼 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너무 딱딱하네요. 다시 갈게요!”
“자기소개를 씹으면 어떡해요! 다시 갈게요!”
“표정이 왜 이렇게 얼었어요! 다시 갈게요! ···다시!”
“거기 아니고, —빨강머리! 지금 어딜 봐요! 카메라 봅시다, 카메라!”
“다시 갈게요!”
어쩔 땐 아예 뭐가 문젠지 말해주지도 않았다. 그 덕에 참가자들은 무대 계단을 수십 번씩 오르락내리락 하고, 무대 위에 올라가서도 내내 서서 방긋방긋 웃어야 했다.
한율의 옆에서 함께 지켜보던 차남석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등장 순서, 무작위가 아니었어.”
“그래요?”
“제일 처음 올라간 사람들이 JZ엔터인데, 한눈에 봐도 잘생겼잖아? 그래서 가장 먼저 카메라에 잡으려고 올린 것 같은데··· 작년에 생긴 소속사라 힘이 전혀 없어. 대표 이름도 생소하고. 그리고 우리랑 같이 앉은 사람들 봐. 한 두 팀 빼고 회사가 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들이지 않아? A는 그 반대고.”
WB래빗을 제외한 다른 연예기획사는 전혀 관심 밖이었기에 한율은 몰랐지만, 대충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A가 다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 촬영이 시작된 두 시간 만에 한율과 차남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씨, 그거 꼭 해야 되나.”
“유 팀장님이 꼭 하라 그랬잖아요. 대표님 지시라고.”
사실 한율도 정말 하기 싫었다. 그러나 괜히 싫은 티내며 어설프게 했다간 오히려 더 하기 싫은 걸 반복하게 될 뿐이다.
‘한 번에 끝낸다.’
두 사람의 등장은 끝에서 두 번째로, 무대 뒤에서도 대기한지 한참이 지나서야 계단 앞까지 올 수 있었다.
“올라갈게요.”
목이 쉰 스태프가 두 사람에게 마이크를 건네주며 신호했다. 한율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앞서 계단을 올라갔다. 두 사람은 곧 테이프로 표시된 자리에 서서 카메라를 향해 인사했다.
오른손으로 마이크를 잡은 한율이 선창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WB래빗의!”
왼손으로 마이크를 쥔 차남석이 턱 선과 목이 도드라지도록 고개를 45도 각도로 세우며 옷깃을 들었다. 옷깃엔 꽃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꽃을 단!”
한율은 차남석과 동시에 옆머리를 대고 머리 위로 왼손을 세웠다. 차남석도 머리 위로 오른손을 세웠다. 두 사람의 손이 토끼 귀처럼 앞뒤로 까딱거렸다. 방긋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토! 끼!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강원PD가 신나게 외쳤다.
“아주 좋아요! 한 번 더 갈게요!”
한율은 속으로 PD를 향해 쌍욕을 던졌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참가자의 등장과 자기소개가 끝났다. 40명의 참가자는 무대를 가득 채운 뒤에도 10여 분 동안 PD의 OK소리가 날 때까지 카메라를 향해 내내 웃어야 했다. 한율과 차남석은 그나마 끝에서 두 번째였으나, 제일 처음 올라온 JZ엔터 팀은 대략 세 시간 가까이 서서 웃은 셈이었다.
드디어 MC가 올라와 보컬리스트 시즌3 시작을 알리는 멘트를 쳤다. 참가자들은 물개처럼 5분 내내 박수 쳤다. 무대 양사이드에 설치된 계단형 객석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촬영하는 데에도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그런 후엔 다시 내려가서 마이크를 찬 뒤 또 올라갔다.
스태프가 무대 위로 올라와 외쳤다.
“이제부터 아주 작은 소리도 오디오에 다 잡히니까 주의하시고, 리액션은 크게 부탁드릴게요!”
내려갔던 MC가 다시 무대 위로 올라왔다. 곧 그의 소개에 따라 예선을 심사할 이들이 차례차례 무대 위로 등장했다. 참가자들은 그때마다 또 웃고 환호하며 물개박수를 쳐야 했다.
“죽겠다, 진짜···.”
점심시간 겸 휴식시간은 촬영이 시작된 지 7시간 만에 주어졌다. 단 20분. 대기실에서 방송국에서 돌린 협찬 도시락을 맛없게 먹으며 차남석이 중얼거렸고,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으로 밥을 휘적거렸다.
“반찬이 짜네요.”
“······.”
그때, 불시에 카메라맨과 함께 스태프가 들이닥쳤다.
“먹는 모습 촬영할게요! 맛있게 먹어요, 다들!”
“······.”
“······.”
10분 만에 도시락을 먹은 뒤엔 양치를 하고 돌아와 스타일리스에게 메이크업 보완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와, 여러분! 느껴지십니까? 이 파릇파릇한 공기! 미래에 K-POP을 이끌어갈 주역들의 패기가!”
와아아!
“그럼 예선 순서를 뽑도록 하겠습니다. 참, 그전에 전달사항이 있습니다.”
함성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웅성거리는 참가자들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 설치된 카메라가 담았다. 이동식 카메라가 앞으로 다가오자, 차남석이 교묘한 타이밍에 한율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율은 얘가 왜 이러나 싶어 마주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
“시즌1, 2는 심사위원 분들에게 과반수의 찬성표를 받으면 무조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시즌3는!”
MC가 무대 뒤에 설치된 거대한 모니터를 가리켰다. 둥둥 떠다니던 보컬리스트 로고가 사라지고 대진표가 나타났다.
허억! 웁쓰! 참가자들이 경악어린 신음을 뱉어냈다.
“맞붙은 상대팀보다 점수를 잘 받아야지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컬리스트는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통상적인 대진표의 윗부분이 잘려나가며 10개의 빈칸만 남았다.
“본선에 진출하면 심사위원 분들의 의견은 거들 뿐! 방청객들의 투표 100%, 6강까지 올라가면 시청자분들의 투표까지 합산되어 결정이 되죠? 그러니 여러분, 본선에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상대팀부터 이겨야 한다!”
잔인해···! 누군가 징징거리는 소리를 쭉 뱉어내자 근처에 있던 카메라가 즉각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대에 수많은 공이 빼곡하게 담긴 투명 상자가 설치되었다.
“자, 그럼 각 팀 리더 분들 내려와 주세요!”
“갔다 올게.”
차남석이 결연한 태도로 한율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율은 얼추 다른 참가자들의 행동을 참고삼아, 차남석의 손을 꽉 잡아 흔들었다. 이쪽보다 잘하는 팀을 만나면 지금껏 연습에 퍼부은 시간과 노력이 허무하게 날아가게 생겼다. 아무리 패자부활전 시스템이 있다 하더라도, 초장부터 떨어지는 건 마음 상하는 일이므로.
“잘 뽑아요.”
카메라 한 대가 두 사람의 모습을 집요하게 찍다가 내려가는 차남석을 좇아 회전했다.
* * *
본격적인 예선무대가 시작되자 촬영은 늘어짐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른 실수는 몰라도, 참가자의 무대 실수엔 절대 NG를 외치지 않는 까닭이었다.
“심사위원 분들의 진심어린 조언, 잘 들었습니다.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과연 14번 반짝이는 성대, 줄여서 반성팀이 13번 흥보이즈팀의 402점을 누를 수 있을 것인가···!”
탈락한 팀은 그 즉시 스튜디오를 떠난 터라, 계단형 객석은 어느새 듬성듬성 비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남은 참가자들의 얼굴이 눈에 잘 들어왔다.
“결과! 보여주세요!”
차남석이 조심하라고 경고했던 안인섭은 맞은편 객석에 앉아, 세상 순진하고 여린 사람처럼 두 손을 꼭 모아 안타까운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남석의 들려준 그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연기자가 아닐 수 없었다.
“반짝이는 성대 398점으로, 402점 획득한 고동 엔터의 흥보이즈가 본선에 진출합니다!”
와아아! 짝짝짝!
승자와 패자가 서로에게 수고했다며 가볍게 포옹한 뒤 발끝을 달리 했다. 승자는 인사 후 다시 객석 위로, 패자는 무대 아래로 쓸쓸히 퇴장했다. 속상해서 눈물을 흘리는 패자에게 카메라 한 대가 바짝 붙어 따라갔다.
“너무 무리하게 연습하다가 목이 상해서 제대로 소리를 못 뽑은 것 같은데···, 아쉽네.”
“고음 부르신 분이요?”
“둘 다.”
스태프가 조용히 두 사람을 향해 내려갈 준비를 하라고 손짓했다.
“자, 이번 참가팀은···, 눈썰미가 좋으신 분은 알아보실 수도 있겠네요. —3년 전!”
‘3년 전’이란 단어에 참가자들이 일제히 차남석을 바라보았다.
“K본부 노래 프로그램에서 뛰어난 가창력을 뽐내며 당시 심사위원들에게 인정받았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이 어느새··· 어후, 너무 잘 자라줬어요, 훤칠하게!”
역시 외모지상주의가 기본 마인드로 박힌 바닥답게 MC의 말이 길어졌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참가자들의 시선에 부러움 비슷한 게 깃들었다.
“WB래빗의 차남석! 서한율! 꽃을 단 토끼팀!”
카메라에 담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행이 너무 올드한 방식인 것 같지 않아요? 애들 등장할 때까진 밝고 활기찬 느낌이 가득 나서 좋았는데, MC가 내내 가운데 서서 저러니까 텐션이 처지는 것 같아.”
멀리서 촬영을 지켜보던 한 여성이 일행을 향해 속닥거렸다.
“무슨 아침방송 노래자랑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봐요, 애들도 지루해 죽겠다는 게 멀리서도 눈에 딱 보이잖아.”
일행은 핸드폰으로 무대를 줌인해서 찍고 있었다.
“그래도 나중에 방송 나가면 시청자들은 잘 못 느낄걸요? 애들 리액션이 중간 중간 들어가고, 인터뷰나 연습 장면 영상도 들어갈 테니까.”
“예선만 거의 3주 나올 삘인데···.”
“음. 첫 화는 MC랑 심사위원들이 이번 시즌은 어쩌고저쩌고 이렇게 합시다 하는 회의 모습에, MC가 나와서 설명, 단체 컷 이어붙이고, 그 다음부터 첫 팀 등장부터 각 팀 소개, 연습 영상, 쭉쭉 나오다가 애들 일상 모습을 쫙 이어붙이고, 단체 등장 씬으로 마지막을 딱! 장식! 예선은 2, 3화로 나누면 딱이겠네요.”
“훤하시네요. 그나저나 하루 스튜디오 녹화하고 3주라. ···하하.”
여성이 우려되는 얼굴로 쓴웃음 지었다.
“에이, 예선 본 뒤 후기 인터뷰까지 따려면 하루는 더 해야죠.”
무대 조명이 어두워지며 노래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입을 다물고 스튜디오에 울려 퍼지는 노래를 조용히 들었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다시 속닥거렸다.
“노래 제법 하네요? 남석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 옆의 애도.”
“화면도 잘 받아요. 보세요.”
일행이 핸드폰 카메라를 더욱 확대시키자 초점이 크게 흔들렸다. 이내 ‘꽃을 단 토끼’의 서한율이 잡혔다.
여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역시 걔구나? 티저 영상 인터뷰.”
“부장님 눈썰미 대박. 어떻게 알았대?”
“목소리가 똑같아서 긴가민가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확실하네요. 방송 나가면 팬 좀 생기겠는데요?”
“김PD는 떠비에 고맙다고 절해야 돼요, 진짜. 차남석만 나왔어도 화제성이 있었겠지만 같이 내보낸 애도 인물이 좋아.”
“그··· JZ? 거기서 나온 걔네도 좋던데요? 나 정말 아까 걔네 탈락되는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노래 연습 좀 더 하고 나오지···.”
이윽고 ‘꽃을 단 토끼’에게 맞서는 16번 팀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노래가 중반으로 흘러갈 무렵, 여성은 일행의 팔을 두드리며 인사했다. 다 듣지 않아도 어떤 팀이 올라갈 지 다 아는 사람처럼 여유로운 얼굴로.
“그럼 나 먼저 사무실로 올라갈게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주고.”
“넵, 부장님.”
*
촬영은 새벽 2시가 훌쩍 넘어서야 간신히 끝났다. 몇 십분만 더 지나면 어제 일어난 시간이었다.
끼익. 차에 타자마자 한율은 시트를 뒤로 완전히 젖히고 눈을 감았다. 그건 바로 옆에 탄 차남석도 마찬가지였다.
유 팀장은 5초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곯아떨어진 걸 확인하곤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운전석에 앉은 부하 직원에게 살살 운전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네, 대표님. 애들 촬영 끝내고 숙소로 데려다주는 길입니다. ···네, 당연히 붙었죠. 둘 다 카메라 잘 받는다고 좋아하던데요. 실수도 적었고.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고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꿈도 꾸지 않고 잠들었던 한율이 눈을 뜬 건, 차가운 무언가가 얼굴을 문지르는 느낌을 받으면서였다. 스타일리스트가 클렌징티슈로 메이크업을 지워주고 있었다.
“둘 다 자기 전에 따뜻한 물에 세수하고 머리 감는 거 잊지 말아요.”
“아침엔 특별히 학교까지 태워다 줄 테니까 전화하면 바로 일어나고.”
차는 어느새 임시숙소 앞에 세워져 있었다. 유 팀장의 말에 차남석이 입속으로 뭐라 웅얼웅얼 대답하며 차에서 내렸다. 한율도 그를 따라 내린 후 굳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기지개 켰다.
“뭐 잊은 거 없지? 핸드폰이랑 열쇠는 다 있고?”
“네에···.”
“그래, 들어가서 씻고 바로 자. 오늘 수고했다. 참, 한율이 넌 내일부터 중간고사지? 오늘부터 시험 다 끝날 때까진 회사 나오지 마. 대표님 지시야.”
“네, 수고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직원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한 후 비틀거리며 빌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스타일리스트가 작게 외쳤다.
“옷은 구겨지지 않게 옷걸이에 잘 걸어놨다가 회사로 가져와요!”
원룸 침실 안에는 길우성이 구석에 이불을 돌돌 만 채 세상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피곤에 찌든 졸린 눈으로 길우성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한율은 차남석을 바라보았다.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퍽.
“···악!”
유 팀장의 말대로 한율은 중간고사 기간 내내 레슨을 쉬었다. 그것도 임시숙소가 아닌 집에 들어가서 편히. 방송 녹화까지 했으니 연습생 생활을 조금 느슨하게 해도 되지 않나란 생각보단, 그동안 댄스연습이다 노래연습이다 하면서 누적된 피로를 풀기 위해서였다.
“우승하면 락뮤닷 스페셜 무대에 서는 거 맞지?”
닷새 만에 WB래빗에 출근한 한율은, 단체레슨을 받은 후 간만에 길우성과 함께 댄스 연습실에 눌러 앉았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강 팀장이 사다 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럴 걸?”
“크으, 미리 사인 받아두면 되는 거냐?”
“아니, 우승까지는 힘들어. 노래 잘 부르는 팀이 최소 셋이야. 그런데 길우성.”
“응?”
“너희 학교 좋냐?”
길우성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펴닙(편입)하게?”
“옮기는 게 좋지 않겠냐 하더라고.”
짝. 아이스크림을 입에서 떼며 길우성이 박수쳤다. 그러곤 한율을 향해 총 쏘는 시늉을 했다.
“회사랑 정식으로 계약했구나?”
바로 어제였다. 좌기훈 대표가 차남석과 한율을 불러 정말 수고했다고 치하하며 비싼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사주었다. 그리고 한율에게 조심스레 계약 얘기를 꺼냈다. 알고 보니 차남석은 이미 3년 전, 좌기훈 대표가 WB래빗으로 직접 데려오면서 일찌감치 계약한 상태였다.
계약서는 두 종류였다. 하나는 대중문화예술분야 연습생 표준계약서, 다른 하나는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표준 부속합의서.
“아직. 아버지가 도장을 안 찍었거든.”
“부모님 입장에선 신중하실 법도 하지. 우리 엄빠는 사기 당하는 거 아니냐 여기저기 변호사 사무실 찾아 들락거렸다더라.”
“너도 여기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길우성이 턱을 치켜세우며 오만하게 웃었다.
“후하하. 입성과 동시에 계약서를 받은 몸이로다.”
“그래, 잘났다.”
“그나저나 방송은 두 달 후라며? 그럼 다음 무대는 언제 하는 거야? 그때는 방청객들 데려다 놓고 하지 않아?”
“한 달 후에 한다더라. 방청 신청은 다다음 주부터 받고.”
“그럼 집은? 방송 끝날 때까지 또 남석이 형이랑 원룸에서 지내는 거야?”
길우성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대로 계속 집에 있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당연했다. 잠을 자기에도 한율의 집이 더욱 편하고, 한율의 모친은 늘 맛있는 것을 챙겨주었으니.
“이만하면 됐다고 각자 집이랑 숙소로 돌아가라던데.”
“앗싸아!”
속이 환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좋아하는 길우성의 모습에, 한율은 저도 모르게 울컥하여 길우성을 퍽 차버렸다.
“왜 네가 더 좋아하냐, 새꺄.”
“으하하?”
“···하아.”
한율은 길우성의 얼굴에다 대놓고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땀이 제법 식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사람 수가 적은 것 같던데?”
사실은 단체레슨을 받기 전부터 한율은 연습생들 간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느꼈다. 다들 한율에게 본선 진출 축하한다며 부러움이 잔뜩 담긴 인사를 건네 왔지만, 무언가 한바탕 지나간 사건을 언급하기 싫어 덩달아 입을 다무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남석이 형이 얘기 안 해줬어?”
“아니?”
차남석과도 어제 저녁 대표와의 식사자리에서 본 뒤 바로 헤어져 이야기를 나눌 짬이 없었다.
부스럭. 길우성이 빈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봉투 안에 넣으며 말했다.
“누가 유호 형 음해하는 소문을 퍼뜨렸거든.”
“음해?”
그러고 보니 월말평가가 있던 날, 유호는 핸드폰으로 온 연락을 받고 난 뒤부터 평가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강무기 팀장에게 불려가기 까지.
“그것 때문에 분위기가 좀 작살났었어. 유호 형도 상처 많이 받았는지 애들이 덜한 이른 오후까지만 레슨 받고.”
대체 뭐라 소문이 났기에 그렇게까지? 한율은 의아했지만 자세히 묻진 않았다. 어차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남의 일이므로.
길우성도 그에 대해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주말이 되자 한율은 차남석과 함께 <보컬리스트 시즌3> 공식홈페이지에 실릴 개인 프로필 촬영을 위해 회사 측에서 예약한 샵을 찾았다. 그 후 보컬리스트 측에서 지정한 프로필촬영 전문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도착했을 땐 다른 팀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그 외에도 세 팀이 더 대기 중이었다.
오늘도 특별히 동행한 유 팀장의 리드에 따라 둘은 스튜디오 메인 작가를 비롯한 스태프와 보컬리스트 측에서 나온 이들, 그리고 대기 중인 다른 팀 일행에게 일일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앞으로 두 시간 정돈 기다려야 한다는데요?”
스튜디오 스태프와 얘기를 나눈 매니지먼트팀 직원이 와서 알렸다. 유 팀장이 조용히 미간을 찡그렸다가 폈다.
“우리 측에 알린 촬영 예상시간은 한 시간 훈데···, 어쩔 수 없지. 여기 있으면 괜히 복잡하니까 너흰 차에서 대기하고 있는 게 낫겠···.”
“어? 유 팀장님 아니세요?”
그때 스튜디오로 들어오던 한 남자가 유 팀장에게 손을 번쩍 들며 알은 체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아아, 네! 오랜만입니다, 김 대표님. 여기에서 뵙네요, 하하.”
대표? 대표가 직접 케어하러 나온 건가? 스튜디오를 나갈 타이밍을 놓친 한율과 차남석은 유 팀장과 악수를 나누는 남자를 바라보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고개를 꾸벅였다. 사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너희들이 꽃토끼구나! 애들한테 얘기 들었어. 노래 엄청 잘한다며? 그런데 실제로 보니, 와, 인물도 좋은데?”
“감사합니다.”
“유 팀장님, 얘들한테 내 명함주면 화내실 거죠?”
“하하하하하.”
농담인지 모를 말을 해대는 게 퍽 능청스러운 남자였다. 대표 신분으로 다른 기획사의 팀장을 대하는 태도 또한. 본래 친한 사이였다면 모르겠지만, 유 팀장의 말이나 미소를 보면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김 대표가 한쪽 구석에 따로 떨어져 있던 두 명의 참가자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너희도 인사드려. 크리스탈 래빗 알지? 크래스탈 래빗을 업어 키운 거나 다름없는 WB래빗의 유재용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스튜디오 스태프들이 놀라 돌아볼 정도로 우렁찬 인사였다. 허리까지 90도로 꺾어, 조금 전 김 대표에게 고개만 숙였던 한율과 차남석의 인사가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
“크레용박스 엔터테인먼트 이문점!”
“장현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기소개 후 다시 허리 90도 인사, 꾸벅.
유 팀장은 당황하여 손을 들었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네, 만나서 반가워요.”
“친구들끼리는 인사했어? 말은 나눠봤나?”
크레용박스 연습생들과 한율과 차남석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색한 미소가 그려졌다. 조금 전 들어와 인사 순회할 때 인사 대상에 끼어있긴 했지만, 사실 예선 녹화 당시에도 멀찍이서 본 게 다였다. 대기실도 달랐고, 앉았던 위치나 순서도 떨어져 있었다.
“이참에 인사하고 친해지면 되겠네. 유 팀장님, 애들 촬영 지켜보실 거죠?”
“네.”
“저도 그런데. 하지만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 괜찮으시면 잠깐 저기 가서 얘기 좀 나눌까요? 사실은 유 팀장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든요.”
용건이 급한 건지, 아니면 거절할 틈조차 주기 싫다는 것인지 김 대표는 대답도 듣지 않고 유 팀장을 구석으로 끌고 가버렸다. 멀어져가는 유 팀장이 함께 온 직원에게 외쳤다.
“가지고 온 거 나눠드려···!”
“네, 팀장님! ···너희들 잠깐 여기 있어.”
직원이 잰걸음으로 스튜디오를 나갔다. 순식간에 보호자들을 잃은 참가자 네 명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어색하게 쳐다보다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던졌다. 아무리 같은 연습생 신분으로 같은 방송에 출연한다지만, 전혀 모르는 사이나 다름없었다.
“어···, 저기.”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먼저 깬 건 장현우였다. 장현우가 한율과 차남석을 번갈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크리스탈 래빗, 실제로 자주 봐요···?”
내가 이러려고
“아뇨. 선배님들 사용하는 연습실이 완전히 따로 분리되다시피 해서 자주는 못 봐요.”
“와, 선배님들이래···.”
“부럽다···.”
WB래빗 직원이 커다란 박스를 들고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그는 스튜디오 스태프, 보컬리스트 측에서 나온 사람들과 다른 기획사 직원들에게까지 정중히 인사하며 홍삼 스틱을 두 포씩 돌렸다.
“안녕하세요, WB래빗에서 나왔습니다. ···수고하십니다, 작가님.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수고하십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여기···. 힘드시죠?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안녕하세요, WB래빗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애들 잘 부탁드립니다···.”
크레용박스 엔터에서 나온 연습생들은 그 모습마저 부럽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우린 그냥 음료수 돌렸는데······.”
“그런데 두 분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이문점이 조심스레 물었다. 차남석이 열여덟, 열일곱이라고 소개하자 두 사람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우린 둘 다 스무 살이에요.”
“진짜요? 두 분 다 우리 또랜 줄 알았는데.”
“하하···.”
두 사람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때 직원이 그들에게도 다가와 홍삼을 돌렸다.
“자, 너희들도 먹고. 두 분도 이거 먹어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좀 무리하시는 거 아닌가?”
차남석이 한율에게 속닥거리듯 동의를 구했다. 한율은 어깨를 으쓱이며 홍삼 스틱을 쭉 뜯어 입에 가져갔다. 그러곤 홍삼 특유의 맛을 천천히 입안에서 굴리며 음미했다. 반면에 차남석은 입에 무는 순간부터 미간을 찡그렸다.
“···어우, 넌 이게 맛있냐?”
“맛만 좋은데 왜요.”
“넌 가만 보면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더라?”
“나이 들었다고 다 이 맛을 좋아하진 않을 텐데요.”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애늙은이 같아.”
한율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사실이므로.
“그런데 저건 그냥 먹어도 되는 거예요?”
촬영이 한창인 스튜디오를 눈으로 쭉 훑다가, 한율은 조금 전부터 눈에 띄던 긴 테이블을 가리키며 물었다. 테이블 위에는 샌드위치나 쿠키 같은 손으로 간단히 집어먹을 수 있는 음식이 세팅되어 있었다.
차남석이 입가만 슥 올렸다.
“케이터링? 응, 안 돼.”
“먹으라고 둔 거 아니에요?”
“응, 안 돼. 부어. 카메라에 잡혀.”
단호히 말한 차남석이 미심쩍은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설마 어제 저녁부터 금식하란 유 팀장님 말씀 어긴 건 아니지?”
“안 어겼으니 먹고 싶은 거죠.”
“촬영 끝나면 마음껏 먹어도 돼.”
언제 돌아왔는지 유 팀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대신에 더 맛있는 저녁을 먹는 게 힘들어지겠지만.”
“물도 안 돼요? 목마른데.”
“조금만 더 참자, 한율아?”
아니, 물도 안 되는 건가. 한율은 애꿎은 빈 홍삼 스틱 봉지만 잘근잘근 씹었다. ‘서한율’이 된 이후 이렇게 장시간 굶는 건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럼 차에···.”
“생각해 보니까 그냥 여기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의자 갖다 줄 테니까 편히 앉아있어. 머리 안 망가지게 조심하고, 얼굴에 손대지 말고.”
“······.”
전혀 편하지 않은 대기시간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한율과 차남석은 피팅룸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첫 번째 옷은 보컬리스트 측에서 지정한 스타일로, 하얀색 셔츠에 새카만 슬랙스, 검은색 구두 차림이었다.
“자, 시선 자연스럽게 올리고 미소. ···네, 좋아요. 이번엔 둘이 등 비스듬하게 맞대고 카메라 볼까? ···윤주 씨, 발 위치 잡아주세요. ···어우, 잘하네~.”
공식적으론 첫 프로필 사진촬영이었지만 잘하는 게 당연했다. 사흘 전부터 회사에서 카메라를 세워두고 몇 번이나 예행연습을 시켜준 덕분이었다.
더구나 차남석은 예전에 방송출연 경험이 있어 카메라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고, 한율 또한 ‘이전’부터 수많은 군중이나 부대 앞에 나섰던 일이 많아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짓는 것 또한 쉬웠다.
연기는 지구인들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 위장 잠입했을 때부터, ‘로건 워커’를 거쳐 ‘서한율’로 살아가는 내내 한 것과 다름없으니.
‘어쩔 땐 겉으로 내보이는 감정이 스스로도 진심인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지만···.’
“어? 한율아, 잘 하다가 왜 눈이 슬퍼지지? 웃자~.”
“······.”
찰칵.
두 번째 의상은 보컬리스트 측으로 들어온 협찬 의상이었다. 거기에 맞춰 스타일리스트가 빠르지만 능숙한 손길로 머리 스타일을 살짝 바꿔 주었다. 그 후엔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모를 시계와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 끈까지 다 묶어준 후 마지막으로 새하얀 꽃 한 송이씩 쥐어주었다.
‘꽃을 단 토끼’는 이번엔 진짜 꽃을 들고 토끼 포즈를 취해야했다.
“자, 이번엔 귀에 꽂아볼까? 서비스 컷으로~.”
수십 명의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율은 정말 머리에 꽃을 단 미친 토끼가 되는 거냐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자괴감이 들었다.
녹화할 땐 빨리 끝내기 위해 해냈지만, 한 번 했더니 계속해서 더한 걸 시키려는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망가질수록 유 팀장의 미소가 만개한 꽃처럼 활짝 피다 못해 꽃가루가 날릴 것 같았다.
‘이번 방송만 넘기고 그만 두자···.’
길우성과도 얼추 연습생 생활을 공유한 ‘친구’로 연락할 수 있는 사이도 된 것 같으니,
이만하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