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너답지 않게 웬 약한 소리야···!”
상대방이 불끈 쥔 두 주먹을 아래로 내리며 외쳤다. 한율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맞받아쳤다.
“나다운 거? 나다운 게 대체 뭔데!”
“컷. 보람아, 잠깐 와 봐.”
일요일 아침. WB래빗 연기 연습실에선 레슨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강사가 조금 전 녹화한 영상을 한율의 상대역에게 보여주었다.
“네가 봤을 때 문제가 뭐인 것 같아?”
“···다요.”
“그래, 시선처리부터 발끝까지 다 엉망이고 과장됐지? 이게 대본이 유치찬란하긴 하지만 정극이야. 시트콤이 아니라고. 그리고 목소리. 나중에 노래 안 할 거야? 이렇게 목을 막 쓰면 어떡해. 첫 수업 때 배운 거 다 까먹은 거야?”
바닥에 앉아서 지켜보던 길우성이 멀뚱히 서있는 한율의 다리를 툭 쳤다.
“너 발성 더 좋아졌다? 연극해도 되겠는데?”
한율의 집에서 머물게 되며 길우성은 주말에 다니던 알바를 그만 두었다. 그리고 대신 연기레슨에 나오고 있었다.
“그러냐.”
“하, 근데 난 진지한 건 정말 안 되겠단 말이지···. 자꾸 손발이 오그라들···.”
“누가 잡담하지?”
수정 보완할 점을 하나하나 지적해주던 강사가 눈을 부라리며 길우성을 노려보았다. 길우성이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한율은 그 모습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다가 대본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지난 달, 월말평가 때 손을 들어 인사했던 여자연습생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생긋 웃더니, 옆자리의 동료에게 대본에 대한 의견을 구한다.
“······?”
연기레슨이 끝난 후 한율은 길우성과 함께 곧장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손에는 숙제로 받은 대본을 꼭 쥔 채.
“TV에서 배우 소재 드라마 보면 대본에 막 뭐라뭐라 메모되어 있고 그러던데, 그런 거 하면서 연습해오라는 거 맞지? 대사만 줄줄 외우는 게 아니라.”
“너희 학교에도 연기하는 애들 있지 않아? 걔네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아···, 좀 그래.”
“뭐가.”
일요일이었지만 구내식당엔 대기 줄이 길었다. 대부분 연습생들이었다.
“알잖냐. 진성 배우 지망생들 대부분이 아이돌 싫어하는 거. 정확히는 아이돌 코스에서 편~하게 연기로 슬쩍 넘어가는 케이스를 싫어하지만. 사실 그게 편하게 넘어가는 것도 아니잖아? 편하게 넘어갈라치면 이 굇수들이 득시글거리는 아이돌 판에서부터 살아남아야 한단 말이다···!”
“잘해서 넘어간 거면 몰라도, 인기를 등에 업고 넘어가서 발연기하는 사례가 많으니까 싫은 게 당연하지.”
“슬프지만 인정···. 어쨌든! 아이돌 연습생이 가서 ‘나··· 연기 레슨 받는 중인데 이것 좀 봐줄래···?’ 하는 순간! 걔네들이 날 어떻게 보겠냐?”
“뻔뻔한 새끼로 보겠지. 그런데 너 원래 뻔뻔하잖아.”
차츰 한 걸음씩 옆으로 이동하던 길우성이 입을 쩍 벌리며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한율은 식판을 들며 마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두 달이 지나도록 백 원도 안 갚는 거고.”
“한 마디도 안 꺼내기에 또 잊은 줄 알았는데!”
“그때 긁은 카드 명세서 내 책장 옆에 붙여놨는데. 못 봤냐?”
“못 봤다!”
하아. 한율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길우성은 주눅 든 표정을 과장되게 지으며 밥을 펐다. 그러다 한율의 뒤에 서는 사람을 보곤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 유호 형, 오랜만!”
“안녕하세요.”
한율도 고개를 돌려 뒤에 선 유호를 향해 인사했다. 월말평가 이후로 처음이었다. 유호가 빙긋 미소 지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 둘 다 오랜만이네. 레슨 받았어? 연기?”
“네. 형은요? 작곡?”
유호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 선생님이 돌아오셔서.”
“아아, 드디어 돌아오셨구나. 서한율 넌 아직 본 적 없지? A&R팀의 장 쌤. 작곡가 겸 프로듀서 쌤인데, 이번에 크래 선배님들 메인 타이틀곡 만든 분이야. 작곡도 가르쳐주심.”
한율은 그렇구나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기에.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한 테이블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주로 길우성이 떠들고 유호가 받아주는 식이었다. 내용은 최근에 데뷔한 아이돌에 관한 이야기나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방송가 소문이었다.
“아, 그 얘기 들었어요? 고동 엔터 있죠? 블블 소속사.”
길우성이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현우 형이 거기 다니는 친구한테 들었는데···.”
그러곤 두 사람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닥거리듯 말했다.
“그저께 블블 멤버 한 명이 고음 연습하려고, 새벽에 혼자 빈 녹음실에 들어갔대요. 그런데···.”
“아아아아아.”
상체까지 숙이며 길우성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유호가 돌연 휙 떨어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질색하는 얼굴로 길우성에게 단호히 말했다.
“하지 마. 그 얘기 하지 마.”
길우성이 히죽거렸다.
“무슨 얘긴 줄 알고 그래요. 형은 처음 듣는 얘기 같은데.”
“아, 싫어. 어쨌든 하지 마. 하고 싶으면 나 없는데서 해.”
이야기가 흘러가는 모양새가 딱 공포 실화라, 한율은 평소완 전혀 다른 유호의 표정을 보며 그가 이런 류의 이야기를 굉장히 무서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예계 쪽은 귀신 관련 괴담이 굉장히 많다고 들었는데.’
특히 사방이 거울과 통유리로 된 연습실이나, 밀폐된 녹음실을 배경으로 한 괴담이. 그리고 이런 장소들은 아이돌 연습생이라면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곳 아닌가.
“형이 생각하는 그런 얘기 아니에요, 안심하세요.”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얼굴로 방긋 웃으며 길우성이 두 팔을 활짝 벌리···려다가 한율에게 딱 맞고 수그렸다. 그러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툭 뱉었다.
“스토커가 있었대요.”
“···어?”
유호가 멍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한율은 실시간으로 하얗게 질리는 그의 얼굴을 구경했다.
“녹음실 구석에, 스토커가 웅크리고 있었대요.”
“—더 무섭잖아!”
구내식당에 유호의 질색하는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성량이 풍부했다.
그 후 유호는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배를 채우는 게 목적인 사람처럼 빠르게 음식을 해치우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우성에게 두고 보자는 눈빛을 마지막으로 날린 채.
“크으, 역시 난 유호 형 놀리는 게 재밌더라.”
“언제는 다섯 살 연상에 대선배니 이름 막 부르지 말라며?”
“그거랑은 다른 문제지. 난 유호 형을 애정하니까!”
예전에 유호를 음해하는 소문이 돌았다더니, 길우성은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은 듯했다.
‘정확히 어떤 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율은 조금 전, 유호가 식당에서 나갔을 때 몇몇 연습생들이 묘한 시선으로 그 뒷모습으로 좇던 걸 떠올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응?”
“아까 그 블블 스토커. 어떻게 됐냐고.”
하지만 지금은 새벽에 녹음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스토커와 맞닥뜨린 사람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트레일러가 떴다
<보컬리스트 시즌3> 본선 무대를 2주 앞두고 공식 홈페이지가 열렸다. 그러나 아직 열린 페이지는 단 두 개. 프로그램 소개와 티저와 정식 트레일러 영상이 올라온 페이지뿐으로, 참가자 소개, 방청 신청, 게시판 페이지는 여전히 닫혀 있었다. 그 상태에서 정식 트레일러가 뮤닷 채널뿐만이 아니라 너튜브에도 올라갔다.
트레일러는 티저 때와 달리 참가자들의 사진이 또렷하게 떴다. 가장 먼저 뜬 사진은 누가 봐도 잘생긴 소년이었다. 차차차착. 수십 장의 사진이 겹겹이 쌓이듯 멀어지고, 40명 혹은 20팀의 연습 영상이 아주 빠르게 교차되며 흘렀다.
한 연습생의 인터뷰 음성이 흘러나왔다.
[노래를 부르고 싶단 마음 하나만 갖고 이 길을 걸었어요. 조금이라도 좋으니, 제 노래를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요. 제가 계속 이 길을 걸어도 괜찮은 건지··· 용기를 얻고 싶어요.]
진심이 담긴 간절한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별이 흐릿하게 반짝이는 밤하늘 배경에 커다란 하얀색 글자가 적혔다.
[무대의 별, 보컬]
[그러나]
그리고 한 팀의 무대 영상 일부. 갓 성인이 된 것 같은 앳된 청년 둘이서 서로를 바라보며 엄청난 고음의 바이브레이션을 섞는 강렬한 모습이었다.
다시 밤하늘 배경에 하얀색 글자.
[보컬리스트는 혼자가 아니다!]
둥둥둥. 긴장감 넘치는 빠른 BGM이 흐르며 무대 아래에서 서로의 손을 꽉 잡으며 기도하는 참가자들의 모습, 나란히 객석에 앉아 장난치듯 투닥거리는 모습. 꼭 잡았다가 떨어지는 손의 짧은 영상이 흐르고, 그 위로 40명의 사진이 차례대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영상을 멈춰 확대하지 않는 한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두둥. 반투명한 커다란 글자가 올라왔다.
[보컬리스트 시즌3]
사진이 사라지고 새카만 배경에 반투명했던 글자가 선명한 하얀색이 되었다.
[보컬리스트 시즌3 -함께 부르는 노래]
정적 1초 후, 글자가 사르륵 사라지며 PD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걱정되진 않아요?]
티저 말미에 나왔던 영상이 이어졌다. 그러나 입술 위가 잘렸던 티저 때와 달리 이번엔 카메라 초점이 부드럽게 올라가며 참가자의 모습을 온전히 담았다.
아무리 봐도 성인이 되지 않은,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와 새카만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선이 가는 앳된 얼굴과 달리, 무릎에 자연스레 올려놓은 두 손은 손가락이 길고 컸다.
소년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예 생각을 안 하려고요.]
쿵. 강한 효과음과 함께 이번엔 조금 더 별이 또렷이 빛나는 밤하늘 배경으로 돌아갔다. 큼지막한 알림과 함께.
[7월 2일 토요일 00시 30분 첫 방송]
트레일러 영상 아래로 실시간 댓글이 달렸다.
-티저 때 꽃돌이라 확신했던 내 촉이 맞았다. 내 심장도 화살촉에 맞았다. 크윽...ㅇ<-<
-간다. 방청. 한다. 신청.
ㄴ네, 신청 페이지는 내일 열리구요^^
-이거 또 하냐? 이번엔 듀엣?
-여자애들이나 내보내지, 시청률 또 개망삘? 기록갱신 노림? ㅋㅋㅋ
ㄴ내가 본다. 그럴 리 없다.
ㄴ니들 그거 아냐? 니들이 백날 말로만 여돌여돌 외쳐대도 걔네한테 하나도 도움 안돼ㅋ 돈을 써야 도움이 되지 ㅅ발.
ㄴ하긴. 남돌 팬덤이 몇 천씩 기부할 때 여돌 팬덤이 돈 모아 기부하는 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ㄴ있거든?!! 봉사활동도 가거든?!
-They all look the same. I can't tell who's who.
ㄴㅇㅇ우리도 헷갈림.
-미친;; 나만 방금 남석이 본 거 아니지?
ㄴ그게 누군데
ㄴ차남석!!! 3년 전 K본부 노래 프로그램에 나왔던
ㄴ남서기 삑사리 또 보나요
-내가 서한율, 차남석 1호팬이다. 악플은 모조리 PDF따서 WB래빗에 보낼 준비가 되어있다. 덤벼라☆
*
한편, 트레일러 영상이 오늘부터 나간다는 얘기를 듣고도 별 생각이 없었던 한율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방송의 파장이 얼마나 큰 지 체감할 수 있었다. 누군가 한율을 가리키며 ‘쟤 맞아, 쟤! 서한율!’ 이렇게 외치자, 순식간에 아이들이 몰려와 질문을 퍼부었다.
언제부터 연습생이 되었냐부터 시작해서, 직접 아이돌을 본 적이 있는지, 어떻게 오디션을 봤고 통과했는지, 피부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어디까지 촬영이 진행되었는지 등등.
한율은 입을 다물고 멀뚱히 쏟아지는 질문을 가만히 들었다. 그러다 슬슬 아이들이 질문 공세를 멈추고 나서야 대답했다.
“방송에 다 나오지만 안 보는 걸 추천할게.”
그리고 예고 편입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볼까 생각해봤지만, 어차피 곧 그만둘 텐데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하며 접었다.
“야, 너 카메라 진짜 잘 받더라?”
WB래빗으로 출근하자마자 만난 한 연습생이 한율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재차 방송 출연 축하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율은 고맙다고 인사한 후 사전에 연락받은 대로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신인개발팀 직원이 한율을 향해 안쪽 회의실을 가리켰다. 반쯤 쳐진 블라인드 사이로 회의실 안에 있는 차남석과 강무기 팀장, 그리고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율아, 왔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강무기 팀장이 활짝 웃으며 한율을 반겼다. 한율은 고개를 꾸벅이곤, 조금 전 등만 보였던 사람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여성이 일어나며 한율을 빠르게 위아래로 훑으며 미소를 지었다.
“인사 드려. 다이아필름 프로덕션의 강은혜 대표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한율과 악수하면서도 강은혜는 집요한 시선으로 한율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었다.
“그럼 얼굴도 봤으니 이만 가볼게요.”
“네, 살펴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다른 두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곧 강은혜가 나가고 회의실 문이 닫혔다.
대체 뭐지. 의아해하던 한율이 자리에 앉고 나서야 강 팀장이 설명해주었다.
“뮤비 촬영 전문 프로덕션 감독님이자 대표님이신데, 찍기 전에 너희들 얼굴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야.”
“뭘 찍어요?”
음반 준비를 일절 안한 연습생이 뮤비부터 찍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강 팀장은 들어놓고 왜 묻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뮤비.”
“······?”
“고양고양 엔터에서 이번 ‘감성소녀’ 뮤비를 다이아필름에 제작 의뢰했는데, 그 준비 중에 갑자기 오늘 고양고양에서 너희들을 조연으로 출연시키고 싶다고 연락 했다더라. 그래서 미리 너희들 얼굴 보러 오신 거야.”
“그 핑계로 우리 회사에도 명함 돌리고.”
“남석아?”
강 팀장이 괜한 말을 덧붙이지 말라는 듯 차남석에게 눈을 흘겼다. 한율이 물었다.
“꼭 찍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라고 한 거야. 당사자 의사가 가장 중요하니까.”
“그런데 얼굴부터 보고 갔잖아요···?”
WB래빗에서 거절하지 않으리라 확신하기에 저렇게 찾아온 거 아닌가?
“거절하든 안 하든 명함 돌릴 수 있는 기회란 건 변치않—.”
“차남석. 왜 그래, 아까부터? 태도 안 좋다?”
“왜 그러긴요. 다이아필름이라면 예전에 성추행 사건이 일어난 곳이잖아요. 거기 스태프가 그때 엑스트라로 나온 여자애한테 껄떡거리면서···.”
“그 직후 들켜서 바로 쫓겨났으니 됐잖아.”
“그래도요.”
“그럼 안 찍겠다고?”
차남석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건 아니고···.”
“콘티는 아직 안 나왔지만, 대충 발랄한 배경에서 감성소녀 멤버들에게 수줍게 다가가거나 꽃을 전해주고, 뭐 그런 캐릭일 거야. 앨범 발매 날짜가 한창 보컬리스트가 방영될 때라 시기도 적당하고.”
“연습생이라 출연료도 저렴하게 먹히고, 음음.”
“차남석. 홍보라고 치면 무료봉사해도 모자라거든? 아직 너 데뷔한 거 아니다? 그리고, 감성소녀 안 보고 싶어?”
“별로?”
“······.”
“전 안 할게요.”
“뭐?!”
탁구공처럼 툭툭 오가는 대화 사이에 의사를 밀어 넣자, 강무기 팀장이 한율을 휙 돌아보았다. 뚜둑. 동시에 그의 목에서 미약한 소리가 났다.
“아, 뒷목···.”
“당사자 의사가 중요하다 해놓고 정작 그렇게 놀라시니 제가 더 당혹스럽네요, 팀장님.”
“그렇게 상큼하게 말하지 말고 한율아. 이건 너한테도 좋은 기회야. 보컬리스트에 나가라고 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도 될 거고.”
예전에 보컬리스트에 나가라고 했을 때에도 한율이 싫다고 거절했던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강 팀장은 부드럽게 한율을 달랬다.
“많아봤자 서너 컷, 거기에 애정 씬은 저언혀 없을 테니 정말 부담가질 필요 없어. 조금 전에 남석이한테 무료 봉사 운운하긴 했지만, 용돈 정돈 나올 거고.”
“우성이도 하면 생각해볼게요.”
“여기에서 우성이 이름이 왜 나와?”
당사자의 의사가 중요하다곤 했지만 강 팀장은 전혀 거부의 뜻을 받아들일 마음 자체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한율은 둘러대기가 귀찮아져 ‘친구’를 팔았다.
“제가 우성이 소개로 여기 들어온 거 아시잖아요. 그런데 걔를 제쳐두고 저만 계속 좋은 기회를 잡는 것 같아서 싫어요. 저희 우정에 금가면 팀장님이 책임져주실 거예요?”
“아니 뭐 이런 일로 그렇게까지···. 그리고 고양고양에서 먼저 제안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쪽에 뭔가를 더 요구할 수 있는 위치는 절대 아니야, 한율아.”
그래서 그렇다. 이 조건을 수락해주지 않을 게 뻔해서.
“아무튼 싫어요.”
“서한율. 우성이한테 미안해서 이러는 건 알겠는데···.”
강 팀장의 톤이 낮아지고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차남석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괸 채 강 팀장의 설득을 빙자한 잔소리와, 그 잔소리를 덤덤히 들으며 한결같이 거절하는 한율을 구경했다.
“너 솔직히 말해. 그냥 하기 싫으니까 길우성 판 거지?”
티가 났나? 단체레슨 시간이 되어서야 풀려난 한율은 차남석의 물음에 눈을 깜빡거렸다.
“하긴. 솔직히 나도 싫다. 그런 인성 바닥인 것들 좋아하는 척 연기하라니.”
아아, 뭔가 또 비하인드스토리가 있구나. 그 이전에 한율도 자신처럼 감성소녀를 싫어해 거절한다고 오해하는 듯 했지만, 한율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차남석이 한숨에 푸념을 섞었다.
“찍는 회사도 마음에 안 들고, 주연들도 마음에 안 들고, 그래도 이 바닥 생활하려면 싫어도 해야 하고.”
“토끼 귀 할 때처럼요?”
“으··· 간신히 잊고 있었는데.”
그러나 다음 날, 한율은 전혀 예상치 못한 환영을 받았다.
바로 길우성에게.
“써한율!”
길우성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무섭게 다다다 달려오더니 한율을 그대로 와락 끌어안았다.
“싸랑한다, 친구야···!”
“···?!”
하하하하하. 귓가를 때리는 길우성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한율은 깨달았다. 전혀 성사되지 않으리라 여기고 내걸었던 조건을, 고양고양에서 수락했다는 걸.
“네가 나랑 같이 아니면 안 찍겠다고 세게 나갔다며? 야, 난 네가 나한테 그렇게 미안해하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는데 진짜···, 아, 왜 말 안 했어!”
“······하···하.”
한율을 놓은 길우성은 미친 자처럼 웃어젖히며 제자리서 빙글빙글 돌았다.
“나도 뮤비 찍는다아! 뮤비로 데뷔한다아! 하하하하하!”
“······하.”
문이 활짝 열린 휴게실 안쪽에서 차남석이 한율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율은 손으로 눈을 덮었다. 좋아죽겠다는 길우성의 면상이 꼴 보기 싫어서.
“하하하하하!”
“······.”
*
사정은 이랬다. 고양고양 측에선 원래 뮤비에 감성소녀 멤버들을 쫓아다니는 소년 배우들의 수가 더 많았으면 했는데, WB래빗 측에서 신선한 뉴페이스 한 명 더 필요 없냐고, 한 명 분의 출연료는 받지 않을 테니 어떠냐 물어보자 OK를 외친 거라고.
강무기 팀장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출연료는 걱정하지 마. 대신 우리가 지급해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네 춤추는 영상이랑 사진 보내니까 더 좋다고 하더라, 우성아.”
“헤헷?”
팔랑팔랑. 한율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우고 이마에 손을 댄 채 괜히 눈앞의 종이를 들췄다. 조금 전 다이아필름 프로덕션 측에서 보내온 콘티였다.
감성소녀 멤버 수는 모두 일곱. 섭외된 남자 배우는 그들 셋까지 포함해 다섯으로, 멤버 한두 명씩을 두고 갈팡질팡 혹은 삼각관계 혹은 짝사랑하면서 쫓아다니는 역할이었다.
“우리 말고 섭외된 다른 두 명은 누구래요?”
“한 명은 고동 연습생이고, 한 명은··· 모르겠다? 강은혜 대표 추천으로 섭외된 애라고만 들었어.”
“그런데 고양고양에도 남자연습생들 있지 않아요? 왜 굳이 다른 소속사 애들을 쓰는 거지?”
새삼스런 길우성의 물음에 강 팀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모르지?”
차남석이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역시 걔네도 감소가 싫은 거야···.”
방송국이 구르라면 굴러야지
4백 명의 방청객 앞에서 열리는 <보컬리스트 시즌3> 첫 본선 촬영날짜가 일주일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WB래빗에서는 한율과 차남석이 보컬리스트 관련 스케줄을 소화할 때 함께 해줄 매니저 조유찬을 붙여주었다. WB래빗에 입사한지 3년차인 그는 유 팀장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탈 래빗 담당이었다.
“시즌 1, 2엔 이런 코너들 없지 않았어요?”
이동하는 차 안에서 얇은 대본을 넘기며 차남석이 물었다. 대본엔 ‘보컬리스트 미니게임’이라고 적혀있었다.
조유찬이 운전하며 대답했다.
“들어보니, 김PD 윗선에서 아무리 그래도 남돌 데뷔 전인 애들인데, 그런 애들 데려다가 정말 노래만 주야장천 부르게 할 거냐고 뭐라 그랬다더라. 시청자들이 정말 노래만 기대하고 볼 줄 아냐고. 그래서 급히 구성된 거야.”
“누군지는 몰라도 잘 짚었네요.”
“아니지, 서한율. 아니죠, 형. 참가자 모두 연예기획사 소속 연습생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 아이돌 지망생은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한텐 완전 날벼락 같은 이야기라고요, 이거.”
보컬리스트 측에서 급히 짠 코너 중 하나는 본선에 진출한 열 팀의 멤버를 갈라놓아 열 명씩 그룹무대를 꾸미는 것이었다. 그것도 본선 시작 전에 오프닝 무대로 올리겠다고.
“거기에 경연 순서 정하는 미니 게임 촬영까지···. 아무리 뮤닷이 갑이래도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촬영 일주일 전에 이렇게 갑자기?”
“대스타가 되기 전까진 평생 겪을 일이란다. 미리 경험해보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잘 알려줘.”
“뭐 좋은 거라고 알려줘요.”
“나쁜 거니까 더 잘 알려줘야지. 자, 한율이 넌 여기에서 내리면 돼.”
조유찬이 한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이 건물 3층 댄스 아카데미 보이지? 들어가서, ‘보컬리스트 참가 중인 WB래빗 엔터의 서한율입니다’라고 하면 연습실로 안내해 줄 거야.”
그나마 다행인 건 뮤닷에서 춰야하는 곡과 그걸 가르쳐줄 트레이너, 연습 장소까지 다 준비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너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조심해!”
가방을 챙기고 내리는 한율에게 차남석이 신신당부했다.
“나중에 봐요.”
타악. 한율은 차 문을 닫고 댄스 아카데미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보컬리스트 본선 촬영은 다음 주 토요일. 그러나 참가자들은 애초에 노래를 부르기 위해 나간 것이기 때문에, 노래보다 오프닝무대 연습에 전념한다면 본말전도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오프닝무대 연습은 토일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이후엔 자율적으로 댄스 아카데미에 찾아와 연습하거나 하다가 수요일엔 해당 곡 녹음. 목요일 저녁에 다 같이 합을 맞추고, 촬영 당일 새벽에 마지막으로 리허설을 하기로 했다.
참가 순서를 정하는 미니 게임 촬영은 일요일인 내일 오후로 잡혔지만, 이건 팀의 한 명씩만 나오라고 하여 차남석이 나가기로 했다.
“저쪽의 A-2 클래스로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댄스 아카데미로 들어가자 입구 맞은편 데스크에 앉아있던 직원이 한율에게 왼편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군지 말 안했는데도 아네. 한율은 고맙다고 꾸벅인 후 A-2 클래스를 찾았다. 예정된 연습시간 9시가 되기 20분 전인데도 연습실엔 이미 참가자가 여섯 명이나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왔어요?”
지난 번 프로필 촬영 때 몇 마디 나눴던 크레용박스 엔터의 장현우가 유독 반가워하며 한율에게 다가왔다.
“연습용 신발은 가져왔어요? 소지품이랑 옷은 저기 선반이랑 옷걸이에 걸면 된대요. 밥은 먹었어요?”
한율은 대외적인 미소를 지으며 문간 턱에 앉아 가방에서 신발을 꺼냈다.
“가져왔어요. 밥은 먹었고. 형은 드셨어요?”
“간단히요.”
“예고 봤어요.”
그때 한 사람이 더 다가와 불쑥 말을 걸었다.
“마지막에 화면에 정말 잘 나오시던데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모양새는 인상이 좋아 보였지만, 그가 다가오자 장현우가 작게 흠칫하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아, 이 사람도 소문을 아는 거구나.
한율은 덤덤히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끼어든 이는 차남석이 조심하라고 그렇게 당부했던 안인섭이었다. 안인섭이 생글생글 웃었다.
“열일곱 맞죠? 그럼 내가 형이니까 편하게 말 놔도 될까? 바로 다음 주에 탈락돼서 굿바이할 지도 모르지만. 물론 내가. 하하하.”
신발을 갈아 신고 올라간 한율은 가방과 기존의 신발을 들었다. 그리고 성큼 선을 넘고 달라붙으려는 안인섭을 쳐냈다.
“아뇨, 죄송하지만 제가 낯을 많이 가려서요. 현우 형, 저기 빈 칸 아무데나 두면 되는 거예요?”
“어? 아, 네.”
“······와.”
딱 선을 강하게 긋고 돌아서자 안인섭이 어이없는 감탄사를 짧게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율은 덩달아 선반까지 안내해주는 장현우에게 말했다.
“우리 회사에 형이랑 같은 이름 가진 연습생 형 있어요. 박현우라고.”
“어, 그래요? 하하, 괜히 반갑네. 그 친구는 몇 살이에요?”
“열여덟이요.”
“잘생겼어요?”
한율은 잠시 박현우를 떠올렸다. 어릴 때 아역 배우를 했었다던 그는 WB래빗 연습생 중에서 방송물을 가장 먼저 먹어본 선배로,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차남석과 친해진 뒤 WB래빗으로 들어온 인물이었다. 생긴 건···.
“평범한 편이에요.”
곧 나머지 참가자들도 연습실로 들어왔다. 춤을 가르쳐줄 트레이너는 9시 정각이 됨과 동시에 다른 안무가들과 우르르 등장했다. 그들은 참가자들이 춰야 하는 댄스를 몸소 시범으로 보여준 뒤 한 명만 빼고 다시 우르르 빠져나갔다.
“원 앤 투 앤 쓰리, 앤 포. 내가 제일 잘났다란 표정으로 씩 웃어주세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짧게 원! 외치고 왼쪽 발끝 주의.”
참가자들은 트레이너의 지시에 따라 간단히 스트레칭을 한 후, 대형 거울에 비치는 트레이너와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했다. 곡은 예전에 포인트 안무가 대중의 기억에 새겨질 정도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던 보이그룹의 노래였다. 춤은 단순하고 쉬운 편이었다.
아이돌 연습생 입장에서는.
“자, 병준 씨. 더 자신 있게 쭉. 아뇨, 더 뒤로.”
한율도 이제 겨우 연습생 3개월 차에 접어든 처지였지만, 그런 한율의 눈에도 간단한 동작조차 헤매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옆이라, 한율은 직접 그의 팔을 잡아 교정해주었다.
예선 무대 당시, 가장 노래를 잘 불러 최상위 점수를 받았던 팀 멤버였다.
“이렇게요. 허리 세우고, 발끝은 10도 더 우측으로.”
“고마워요···.”
“자, 다음 동작. 이 상태로 왼쪽으로 상체를 비틀면서···, 따단.”
연습은 중간에 10분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예정된 연습시간 끝인 12시가 되자, 트레이너는 미리 고지한 대로 따로 남아 연습하고 싶은 사람은 남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남는 분은 점심시간이 끝난 한 시 이후부터 봐드리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한율은 곧바로 갈 준비를 했다. 오프닝무대 연습이야 따로 시간이 날 때 혼자 영상을 보며 연습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길우성 찬스도 있고.’
이외에도 월말평가 댄스도 따로 준비해야 하며, 3시 보컬 개별레슨시간을 포함해 2시부턴 차남석과 노래연습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4시엔 중국어, 7시엔 기타레슨.
방송 촬영을 하는 몸이라 하여도 정식으론 데뷔 전인 연습생이므로, 오늘처럼 스케줄 관련 일 혹은 불가피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레슨은 성실히 받는 게 WB래빗의 규칙이었다.
‘곧 그만둘 거긴 하지만, 그만 두긴 두더라도 좋은 인상으로 그만 두는 게 여러모로 나을 테니.’
“어···, 한율 씨도 그냥 가요?”
가방에서 신발을 꺼내는데 장현우가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그 뒤로 문간으로도, 선반 쪽으로도 가지 않고 머뭇머뭇 서있는 강병준이 보였다.
“네, 두 시까지 회사에 들어가야 해서요.”
“그럼, 시간 괜찮으면 같이 점심 먹을래요? 내가 살게요.”
한율은 오늘의 구내식당 메뉴를 떠올렸다. 일주일에 세 번은 꼭 나오는 순두부 백반. 회사 윗선에 순두부를 굉장히 좋아하는 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네. 그런데 이 근처 잘 아세요?”
“이 근처 해장국집 맛있는 곳 아는데. 하핫···.”
강병준이 슬그머니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와 끼어들었다. 여기에 또 한 사람 더.
“점심 먹으러 가세요···?”
고동 엔터의 흥보이즈팀 멤버였다. 한율은 혹시 이렇게 계속 사람이 늘어나는 건가 싶어 문 쪽을 흘끔 보았다. 안인섭이 JZ엔터 연습생인 이해원과 어깨동무를 하며 나가고 있었다. 이해원이 얼결에 끌려가는 인상이기는 했지만.
“네, 전 해장국 괜찮아요.”
“병준이 형만 믿고 갈게요.”
“갑시다, 갑시다.”
처음 한율에게 자기가 사겠다고 말을 꺼냈던 장현우의 얼굴에 어떡하지란 난감한 기색이 스치긴 했지만, 그들 넷은 함께 댄스 아카데미를 나왔다.
이제 막 12시가 되었건만, 강병준의 안내로 간 뼈다귀해장국 집에는 손님들이 많았다. 다행히 빈 테이블이 있어 그들은 그곳에 자리 잡았다. 흥보이즈의 안세현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와, 그런데 저 뼈다귀해장국 처음 먹어봐요.”
“······?!”
“저도.”
안세현의 말에 놀랐던 강병준과 장현우가 한율의 대답에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이거 나이 차이 때문인가······?”
“학생들이야 일부러 해장국을 사먹을 일이 거의 없으니···, 어, 나이 차이 맞는 듯요? 세현 씨가 올해 몇 살 이랬죠?”
“열여덟입니다.”
“내후년부터 찾게 될 거에요. 한율 씨는 3년 후?”
“그냥 편하게 한율이라고 부르세요.”
“그래, 한율아.”
“말은 놓지 마시고.”
“억.”
“농담이에요.”
점심을 먹는 동안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다.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것과 조금 전 세 시간 내내 함께 춤 연습을 해서 통하는 유대감도 있지만, 그들의 행태가 대체로 순하고 둥글둥글한 덕이 컸다.
“세 사람은 내일 게임 참가해요? 대체 무슨 게임으로 순서를 정할지 감이 안 잡히는데···.”
“방송에 나갈 거니까 좀 재밌는 게임으로 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난 안 나가서 잘 모르겠지만.”
“어? 나도 안 나가는데.”
“나도.”
“저도요.”
“뭐지, 이 조합. 중요한 건 팀원에게 미루는 사람들만 모인 건가?”
심심한 잡담을 나누며 점심을 먹은 후 계산은 강병준이 했다. 장현우가 당황해하는 가운데 한율과 안세현은 더치페이하자고 했지만, 강병준은 자기가 제일 춤을 못 추는데다 형이고 하니, 잘 부탁한다는 뇌물이라면서 카드를 긁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럼 내일 봐요.”
“바이!”
“조심히 들어가세요.”
“잘 먹었습니다!”
강병준과 장현우는 다시 댄스 아카데미로 향했고, 한율은 안세현과 함께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둘만 남게 되자 안세현이 기다렸다는 듯 한율에게 물었다.
“한율아, 떠비래빗 좋아?”
“글쎄요. 기획사는 여기가 처음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나름 괜찮은 것 같아요.”
“연습생 몇 명 정도 돼? 분위기는? 좋아?”
가끔 차남석이 들려주는 얘기를 보면 이쪽 바닥은 비밀이란 게 전혀 없었다. 어떻게든 다 새어나가 쉬쉬하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을 뿐. 그리고 이런 건 딱히 숨길 것도 아니다 싶어 한율은 솔직히 대답해주었다.
“남자연습생 수는 저까지 딱 열여섯 명이에요. 분위기도··· 나름 괜찮은 것 같고.”
차남석과 라이언이 여전히 서로를 무시하고, 유호에게 이상한 소문이 돈 이후로 유호가 늦은 오후 시간대를 피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 외에 드러나는 문제는 없으니.
“진짜? 고나리질하는 애들 없어?”
고나리질? ···아아, 관리질.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노골적으로 마음에 안 든다는 시선을 보내거나 들으라는 듯 비꼬는 혼잣말을 하는 연습생이 있기는 하지만, 신경에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므로.
안세현이 눈썹 끝을 내리며 입가를 올렸다.
“그렇구나···. 좋겠다.”
“형네는 살벌한가 봐요.”
“그렇지, 뭐. 연생 숫자가 너희 딱 두 배인데, 뭐가 이렇게 매일 시끄러운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이번에 출연하고 싶어서 출연한 게 아니거든? 원래 잘하는 포지션도 노래가 아닌 랩이고.”
교류할 일이 거의 없는 다른 소속사라 안심이라도 한 것인지, 안세현은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았다. 정류장에 도착하기 5분 여 동안.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야 한율은 안세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런 얘길 저한테 해도 돼요?”
문제가 생겼다
“내가 보기엔 네가 그냥 막 떠벌리고 다닐 타입 같진 않아서. 어, 설마 우리 회사에 아는 사람 있어?”
사람을 너무 잘 믿네.
‘아니면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크니, 스스로 믿는 척하는 건가.’
두 달 넘게 연습생으로 생활하며, 한율은 이 바닥 연습생들이 보통 학생들에 비해 얼마나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은지, 얼마나 한쪽으로 매몰되어 있는지 적잖이 느꼈다.
친구로 삼을 만한 주변의 또래는 모두 좁은 등용문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 주변 어른 대부분은 외모지상주의를 기본 마인드로 삼고, 아이들을 미래의 상품으로 여긴다.
트레이너들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가차 없이 독설도 퍼부었고, 독설을 맞은 연습생들은 대역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자괴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본인 또한 주변 어른들의 마인드에 물들어가며 성인이 된다. 이 좁은 바닥을 세상의 전부로만 안 채.
전부 그러지는 않겠지만, 대다수가 그래보였다.
마음을 둬야 하는 자리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어린애들. 곁에서 올바르게 가르쳐주는 어른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아직 아는 사람은 없는데, 다음 주엔 한 명 생길 것 같기도 하고.”
“뭐? 우리 팀원 말하는 건 아닐 거고···.”
그때 한율이 탈 버스가 왔다.
“아무튼 오늘 얘긴 아무한테도 안 할 테니 안심해요. 저 먼저 갈게요.”
“어, 그래. 내일 보자.”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을 때까지 안세현은 한율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율도 슥 손을 올려주었다가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