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4화 처음은 오프닝무대로 열기를 띄우고, MC 등장, 팀 소개, 경연 순서 정하는 미니 게임 영상, 그렇게 본격적인 본선 시작···.”
“중간중간 각 팀마다 따로 촬영한 에피를 집어넣고 하다보면.”
“5화까지 이어지겠지. 그리고 후반부에는 패자부활전 무대. 어쩌면 이들이 주인공처럼 여겨질 지도 몰라. 실력이 좋은데 곡 선정을 잘못했거나, 상대팀을 잘못 만나 운 나쁘게 떨어진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 본선에 있던 팀을 무너뜨리는 데서, 시청자들에게 9회 말 역전승을 거두는 팀을 보는 것 같은 쾌감을 줄 수 있으니까.”
패자부활전으로 올라오는 팀은 떨어진 열 팀 중 심사위원들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1, 2위 팀. 그들은 본선 무대가 다 끝난 후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현장투표 수에 따라 진 팀은 본선 팀들의 투표 점수와 관계없이 완전히 떨어지고, 이긴 팀은 그대로 1차 본선 팀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본선은 예선처럼 1:1 대결이 아닌 현장투표수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므로, 패자부활전으로 올라와 바로 1차 본선의 1위를 먹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넌 우리가 6위 안에 들 수 있을 거라고 보냐?”
2차 본선으로 진출하는 팀은 6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한율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힘들 것 같은데요. 실력만 놓고 봐도.”
패자부활전에서 올라온 팀은 6위 안에 들어올 게 분명했다. 그리고 한율의 눈으로 봤을 때 현재 본선 팀 중에서도 잘하는 팀이 셋. 그럼 두 자리가 남지만, 한율은 자신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음색과 발성이 좋다고 칭찬받긴 하지만 아직 그뿐이다.
차남석이 노래를 굉장히 잘 부르긴 하지만, 솔로가 아닌 듀엣 포맷아닌가.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그래서 쌤이 이걸 부르라고 한 거겠지? 떨어지더라도 사람들 뇌리에 뭔가는 새겨놓고 떨어지라고.”
“······.”
‘보컬리스트’는 AR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 게 시즌1때부터의 원칙이었다. 그 탓에 역대 참가자들은 예선에선 가창력만 뽐낼 수 있는 곡을 선택하고, 본선에선 떨어질 것을 각오하면서도 호흡이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는 댄스를 추는 경우도 있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한율은 편곡된 MR을 틀었다.
원곡은 The Script의 .
“그냥 불러도 힘든 걸 연주까지 하면서 부르라니···.”
“그만 징징거리고 연습이나 하죠. 정작 대충 해서 떨어지는 꼴은 본인이 못 견딜 거면서.”
디리링. 한율은 통기타를 안아 피크로 줄을 쓸었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MR 중간에 끼어들어 연주를 시작했다. 간소하고 잔잔하게 편곡된 거라 한율의 연주는 떨어지지도 튀지도 않았다.
“사돈 남 말 하기는. 길우성한테 들어보니 집에서도 내내 기타 친다며? 쌤한테 이대로 가면 힘들 것 같다란 말 들은 직후부터.”
“······.”
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나쁜 짓하는 것도 아닌데 오기를 부리지 않을 이유는 뭔가.
그런 한율을 보며 쯧쯧 혀를 찬 차남석도 이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한율과 차남석이 잡담하며 쉬는 동안, 잠시 없는 사람취급을 받은 트레이너는 황당한 시선으로 둘을 번갈아보다 실소했다.
‘왜 대표님이 이 둘을 붙여놨는지 잘 알겠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목요일 밤.
단체레슨이 끝난 뒤 한율은 조유찬의 차를 타고 댄스 아카데미로 향했다. 토요일 본선 촬영 시작 전 리허설이 오프닝무대 최종 점검이기는 하지만, 그 전에 전체적인 합을 맞추는 날이었다.
“형도 올라가요?”
조유찬이 주차장에다 차를 세우자 한율이 물었다.
“나도 관계자니까 봐도 되잖아? 그리고 간만에 여기 선생님들께 인사도 드릴 겸.”
조유찬은 차에서 무언가를 잔뜩 챙겨 내렸다.
함께 댄스아카데미로 들어가자 지나가던 트레이너 중 한 명이 무척 반가워하며 조유찬에게 인사를 건넸다. 복도에 그녀의 밝은 웃음소리가 퍼지고, 조유찬은 짧은 안부 인사를 몇 마디 나눈 후 먼저 연습실로 들어서는 한율의 뒤를 좇아왔다.
시간에 맞춰 와서 그런지 연습실에는 함께 오프닝무대를 꾸밀 참가자들과 트레이너가 모두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한율과 조유찬이 들어가며 인사하자, 트레이너가 가장 반갑게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정확히는 조유찬을.
“어서 오세요. 조 매니저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이 선생님?”
“네. 조 매니저님이 한율이 담당이셨구나. 어? 담당 맞죠?”
“일단 이번 보컬리스트 촬영 끝날 때까진 제가 맡기로 했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 지 잘 모르겠네요. 아, 이거. 다 같이 나눠드세요.”
조유찬이 차에서 챙기고 온 종이가방의 내용물을 꺼냈다. 한율은 그걸 보며 한 쪽 눈썹을 찡그렸다. 프로필 촬영 때도 보았던 홍삼 스틱이었다.
‘회사 내부에 홍삼 회사와 관련된 사람이 있나?’
“와,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오오, 떠비 좋네요!”
참가자들이 한 두 마디씩 하며 홍삼을 받았다. 잠시 홍삼을 쪽쪽 빠는 소리만 들리던 연습실에선 이내 트레이너의 힘 찬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나흘 만에 뵌 분도 있고, 오늘 낮에도 연습하러 오신 분들도 계신데, 다들 연습 많이 하셨나요?”
“네!”
“···니요.”
“누가 슬쩍 ‘아니요’라고 하신 것 같은데···. 그럼 일단 춰볼까요?”
노래가 흘러나왔다. 본래 원곡 가수의 곡이 아닌, 어제까지 한 사람씩 따로 녹음한 걸 합쳐서 완성한 보컬리스트 버전이었다.
아무리 짧은 유흥을 위해 마련한 오프닝무대라 할지라도 준비에 너무 성의가 없다 느껴지면 본선 투표에까지 영향이 갈 수 있음이다. 그래서인지 나흘 만에 합을 맞춰보는데도, 주말에 연습했을 때보다 전체적으로 훨씬 나아져 있었다.
“이대로 오프닝무대에 서도 되겠어요!”
연습은 예정되었던 한 시간 만에 딱 끝났다. 프로댄서의 눈엔 여전히 미흡하겠지만, 그래도 망신당하진 않을 정도라 느꼈는지 트레이너는 흡족한 미소로 참가자 한 명 한 명을 응원했다.
“정말 수고했어요. 노래도 부르느라 힘들 텐데, 춤 연습까지 열심히 해줘서 고마워요. 무대 응원할게요. 파이팅!”
한율에게는 나흘 만에 동작은물론 표정도 굉장히 좋아졌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봐, 한율아.”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한율은 다른 참가자들과도 토요일에 보자는 인사를 나눈 후 조유찬과 함께 댄스 아카데미를 나왔다. 그리고 차에 올라탔을 때였다.
“한율아, 너 안인섭하고 뭐 있었어?”
조유찬이 시동을 걸려다 말고 욱하는 얼굴로 한율을 돌아봤다.
“아뇨?”
“가끔씩 너 쳐다보는 시선이 이상하던데?”
“별 거 아니에요. 편히 말 놔도 되겠냐는 거 딱 거절하고 다른 사람한텐 괜찮다고 했더니 혼자 꿍해진 거예요.”
“으음···, 걔랑 거리 두는 건 잘하는 게 맞긴 한데, 너 그러다 뒷말 나온다?”
나오든가 말든가. 한율은 멀뚱히 조유찬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그나저나 홍삼은 대체 어디에서 자꾸 나오는 거예요? 프로필 촬영 때도 수십 명에게 두 포씩 돌리던데.”
“어디에서 나오긴, 다 영업용으로 회사에서 직접 구매한 거지. 이게 다 너희 잘 되라는 투자야, 투자.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 돼.”
한율은 괜히 물었다고 생각하며 말없이 안전벨트를 맸다.
철컥.
* * *
정식 트레일러 영상이 나가고, 본선 공개촬영 날짜가 성큼 다가오는 동안 <보컬리스트 시즌3>에선 이렇다 할 이슈가 터지지 않았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리고 드디어 본선 촬영 바로 전 날인 금요일. 2차 트레일러 영상이 나갔다. 기본적인 소개나 다름없던 1차와 달리, 예선 촬영 당시 찍힌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이나 표정만 쏙쏙 골라 편집되어 나갔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2주 전 방청신청 페이지가 열린 것에 뒤이어, 참가자 프로필과 자유게시판 페이지가 마지막으로 열렸다. 자유게시판엔 참가자에 대한 질문이나 정보 공유가 느린 속도로 하나씩 올라왔다. 누가 봐도 참가자의 소속사 직원이 올린 응원 글도 있었다.
“게시판 지분이 가장 높은 건 역시 잘생긴 애들이네요.”
밤. 며칠째 방송국에서 숙식하며 후줄근해진 <보컬리스트 시즌3> 스태프들은 공홈과 너튜브 보컬리스트 채널, 인터넷기사 댓글로 반응을 살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송 나가면 슬슬 실력파 참가자들에 대한 이야기 비중이 높아지겠지. 예선이 너무 불공정하다, 쟤네가 아니라 얘네가 떨어졌어야 했다, 아이돌 연습생들은 왜 끼워 넣었냐 어쩌고저쩌고.”
“일부러 아이돌 연습생 비중을 7로 넣은 건데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일반인 오디션 프로보다도 안 볼 거면서···, 어?”
“왜 그러세요?”
투덜거리면서 마우스 휠을 휙휙 굴리던 한 스태프가 한 곳에 시선을 멈췄다. 조금 전 너뷰트 영상에 새로 달린 댓글이었다.
“뭐야 이건···?”
[1:13 빨강머리 하ㅅㅎ 이 ㅆㄹㄱ일진ㅅㄲㅑ 잘 지내나보다?]
댓글 자세히 보기를 누른 스태프는 곧 심각한 표정으로 김강원PD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문제가 생겼다고요? 무슨 문제요?”
이른 새벽에 일어나 뮤닷에 온 한율과 차남석은 조유찬의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얼굴에 붙인 마스크 팩 탓에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옆에선 WB래빗의 요청에 이곳까지 출장 나온 샵 직원이 두 사람을 한껏 꾸며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기실은 지난번에 사용했던 곳과 달리 퍽 좁았지만, 이번엔 서너 팀이 아닌 한 팀씩 배정받은 터라 오히려 아늑했다.
“콩콩 엔터 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그래서 지금 제작진들이 그 팀을 빼니 마니 심각하게 회의 중이라더라.”
“대체 무슨 문젠데 갑자기 빼요? 범죄? 과거?”
“과거. 그 팀의 하승헌이 중학생 때 학폭 일진이었다는 글이 올라왔다나봐.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거짓 모함이라고 극구부인하고 있다는데···.”
한율은 함께 오프닝무대를 준비하던 빨강머리를 떠올렸다. 겉으론 강한 인상이었지만, 자잘한 실수를 저지르고 그럴 때마다 부끄럽다는 듯 슬쩍 웃던 조용한 인물.
“하지만 형이 보기엔 뺄 가능성이 높다는 거네요?”
“지금 오프닝무대 담당했던 안무가들도 급히 방송국으로 오고 있다더라. 왜 불렀겠어?”
차남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프닝무대 노래야 립싱크긴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동선을 수정해야 한다.
“그래도 전 일단 넣고 시작할 것 같은데요. 오늘 촬영분이 방송에 나가려면 두 달 정도 남았고, 그동안 사실 여부 확인하고 사실로 드러날 시 편집으로 빼도 늦진 않을 테니.”
“그럼 한율이 넌 그 팀이 계속 있어도 괜찮다는 거지?”
조유찬이 그렇게 묻는 건 큰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콩콩 엔터 팀은 예선 당시 심사위원 점수가 2위였다. 만약 그들이 오늘 이대로 빠지면, 꽃을 단 토끼가 2차 본선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
한율은 흘끔 차남석을 보았다. 허연 마스크 팩이 붙여져 있지만 뚫린 구멍 사이로 드러난 눈은 이 상황자체가 탐탁지 않아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역시나. 차남석이 마스크 팩을 벗으며 한율 대신 대답했다.
“치졸하게 굴진 말죠, 우리.”
한율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이상해
조유찬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에서 가장 어린 너희들이 어른스럽네.”
“다른 팀들은 어떤데요?”
“애들은 모르겠고, 회사 관계자들은 그런 위험부담을 안고 촬영 진행할 수 있겠냐고 술렁거리고 있어. 다들 내가 한 계산처럼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긴 하지만.”
똑똑. 보컬리스트 스태프가 노크 후 문을 열었다.
“매니저님, 잠시만.”
“네. ···너희들은 보온병에 담긴 차라도 마시고 있어. 아직 목 잠겼으니까 말 많이 하지 말고.”
조유찬의 말대로 한율과 차남석은 별다른 대화 없이 조용히 차를 마시고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차남석은 귀에 핸드폰 이어폰을 꽂은 채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고개를 까딱거렸고, 한율은 본선에서 선보일 기타 연주를 연습을 했다. 샵 직원이나 스타일리스트도 무슨 이야기가 오갔든, 두 사람이 뭘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각자 할 일을 했다.
그렇게 30여 분. 돌아온 조유찬은 리허설이 곧 시작이니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별 말하지 않는 걸로 보아 어떤 결론이 나왔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나 스무 명의 참가자가 모인 스튜디오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몇 명은 노골적으로 콩콩 엔터의 두 사람을 피하기도 했다. 특히 안인섭은 JZ엔터의 이해원이 하승헌에게 인사하려고 하자 노골적으로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막기도 했다.
‘나야 동선이 수정되는 귀찮은 상황이 안 일어나서 다행이지만.’
“‘미안해’ 팀 대기!”
스태프의 외침에 따라 한율은 무대 위로 올라갔다.
리허설은 정말 큐시트대로 진행되었다.
오프닝무대를 꾸민 뒤엔 MC와 함께 텅 빈 관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뒤에 있는 커다란 모니터에 실제 방송에 나갈 미니 게임 촬영 영상이 흐르는 동안 아주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카메라가 설치된 방송용 대기실 의자에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았다.
경연 순서에 따라 정말 본선에서 할 것처럼 노래까지 불렀는데, 참가자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가볍게 불렀다. 텅 빈 관객석을 향해 노래를 마친 소감까지.
패자부활전을 치르게 될 두 팀의 무대까지 이어질 때, 대기실엔 한 차례 긴장감이 돌았다.
“어, 어, 오신다···.”
대기실에 설치된 두 대의 TV 중 한 대에, <보컬리스트 시즌3> 방청을 하러 온 사람들의 모습이 잡힌 까닭이었다.
“아직 입장 두 시간 전 아니야?”
“야, 서한율. 저것 좀 봐봐.”
차남석이 한율의 팔을 툭 치곤 TV를 가리켰다. 손가락 스트레칭을 하던 한율은 무심코 차남석의 손끝을 좇았다가 미간을 구겼다.
[피부미남 서한율♡], [꿀보이스 차남석♡]이란 문구로 된 머리띠를 한 길우성과 박현우가 카메라에다 대놓고 윙크과 손하트를 날려대고 있었다. 다행히 뭐라 지껄이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박현우 무표정한 얼굴로 저러는 거 봐라. 크.”
“어······.”
그때 장현우가 입을 뻐끔거리며 한율과 TV속 박현우를 번갈아보았다. 그러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평범한 얼굴이 아닌데···.”
길우성과 박현우의 뒤로는 머리에 꽃을 단 토끼가 귀엽게 그려진 미니 현수막을 팔랑팔랑 흔드는 유호가 있었다. 머리 위로 크게 하트를 그리거나 까불대는 다른 연습생들의 모습도.
차남석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저것들 우리 팀명 알고 있었어······. 으, 알고 지들끼리 얼마나 놀려댔을까······.”
“···어?”
“왜?”
한율은 그들 뒤로 이리 휙, 저리 휙 상체를 움직이는 한 소녀를 발견했다. 그때처럼 후드를 뒤집어쓰고 끈을 꽉 잡아당겨 눈코입만 보였다.
“쟤에요. 전에 형이랑 나눠먹으라고 선물 준 애. 빨간색 후드티.”
울상이었던 차남석의 얼굴이 환해졌다.
“와, 정말? 아이씨, 길우성 좀 비켜 봐.”
전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차남석은 TV 속 길우성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투덜거렸다.
스태프가 들어와 참가자들에게 고했다.
“마지막 무대 인사 갈게요!”
참가자들은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 빈 방청석을 향해 MC와 함께 인사한 뒤 본래의 진짜 대기실로 흩어졌다. 현장투표 집계에 따른 순위 발표식은 리허설에 포함되지 않았다.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보컬리스트 측은 협찬으로 들어온 도시락과 음료를 나눠주었다. 한율은 테이블에 도시락과 음료를 세팅하는 조유찬에게 물었다.
“전처럼 이거 먹는 것도 촬영해요?”
“당연하지, 협찬인데.”
거울에 비친 한율의 머리 여기저기엔 핀이 꽂혀 있었다. 조유찬은 직접 음료에 빨대까지 꽂아주며 말을 이었다.
“밖에서 카메라 오는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그때까진 편히 있어.”
“네에.”
본래 걸그룹을 담당하다 온 사람이라 그런지 조유찬은 참 세심했다. 이 와중에 도시락에 먼지가 들어갈까, 포장 비닐을 뜯은 뚜껑을 다시 가볍게 덮어놓고 나갔다.
“누가 자극적인 제목으로 기사 뽑았어. 댓글 난리 났다.”
한율과 마찬가지로 머리 여기저기 핀을 꽂은 차남석이 한율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차남석의 말처럼 기사 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보컬리스트3, 학폭 가해자 안고 가나?!]
기사엔 보컬리스트 예고 영상 댓글에 ‘참가자 H군은 과거 학교폭력 가해자’라고 주장하는 네티즌이 등장했다는 내용이 짤막하게 실려 있었다.
“기사를 쓰려거든 적어도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적어야 하는 거 아냐? 이러니 기레기 소리나 듣지.”
기사 댓글엔 H군이 누군지 밝히라는 것부터 시작해, 무작정 욕하는 댓글, 프로그램을 싸잡아 비난하는 댓글, 일진 짓이나 하던 쓰레기가 아이돌로 데뷔하며 신분 세탁하는 경우가 많다는 식의 비아냥거림까지 다양했다.
엉뚱한 댓글도 있었다.
-JZWB만 아니라고 해줘요ㅠㅠ
ㄴ이 와중에 잘생긴 놈들만 챙기는 꼴 봐라ㅉㅉ
ㄴ바보냐; 걔네 넷 중 H로 시작되는 애 없어. 저건 팬코야 이 멍청아
ㄴ아 없군요. 감사합니다ㅠㅠ
ㄴ······?!
4백 명의 방청객 중 50명은 참가자의 지인 혹은 같은 회사 연습생들이었다. 눈에 띄는 응원도구를 장착한 그들은 무대의 좌측과 우측 앞쪽에 따로 자리가 마련되었다. 카메라에 자주 잡히는 위치였다.
방청객 중에도 간혹 참가자의 이름과 사진이 붙은 플래카드를 든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프닝무대를 위해 스튜디오 뒤에 대기한 참가자들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공개무대네요. 아, 떨려···.”
“실수하면 어떡하지······.”
먼저 오프닝무대에 서게 된 열 명의 참가자들이 낮게 웅성거렸다. 리허설 때와 달리 꽃단장을 한 그들의 얼굴은 간헐적으로 설치된 약한 조명 탓에 창백해보였다. 한율은 그 중 유독 입술이 빨갛게 보이는 강병준을 보며 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화면에 웃기게 나올 것 같은데···. 이미 늦었나.’
하루아침에 과거 학교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하승헌은 리허설 때도 그랬듯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거리상 함께 뭉쳐있었지만 그 혼자 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스태프가 그들에게 신호했다.
“‘미안해’팀 올라갈게요.”
“마지막으로 홧팅 한 번 하고···.”
“올라갈게요. 어두우니 발 밑 조심하세요.”
“홧팅···.”
누군가 뒤늦게 의견을 냈다가 도로 주워 먹었다.
‘어쩌면 오늘로 연습생 생활이 끝날지도.’
그만 둘 땐 그만 두더라도, 지금껏 힘들게 익힌 걸 스스로 망치고 싶진 않다. 그럴 필요도 없고.
‘···아, 뮤비 촬영 한 건이 남아있었지?’
뒤늦게 상기하며 한율은 같은 오프닝무대 팀원들이 다 올라가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계단을 올랐다. 바닥에 아주 작게 부착된 야광색 표시를 따라 무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리허설 땐 텅 비어있었던 객석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
한율의 몸에 전율이 퍼졌다.
꺼진 조명 아래로 4백 여 명의 그림자가 운집해있었다. 그 위로 둥둥 뜬 각양각색의 슬로건.
[서한율 사랑해♡], [너는 생각하지 마, 내가 널 생각할게♡서한율♡], [내가 서한율 1호팬이다☆]
속이 울렁거렸다.
사전 인터뷰를 할 때,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을 기만한다는 생각에 짜릿함을 느꼈던 때완 정반대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대체 언제부터 날 봤다고 사랑 타령인지.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내가, 무슨 목적으로—.
···꾸욱. 한율은 생각을 멈추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일순 그의 눈에 일렁거린 약한 푸른빛이 고였던 눈물을 삼키며 사라졌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 * *
훗날 길우성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서고자 WB래빗에 들어갔다. 번거로운 수고가 될지라도, 부정적 반향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보단 훨씬 나을 것이란 판단 하에.
언젠가, 길우성의 ‘코팅’능력이 필요할 때가 올 수도 있으므로.
“아···, 나 두 번 틀린 것 같아요. 어떡하지?”
“괜찮을 거예요. 본선 무대를 더 잘하면 되죠.”
오프닝무대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참가자들과, 각자 맡은 일에 따라 정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스태프들, 스튜디오 전체를 쿵쿵 울리는 신나는 음악소리와 방청객들의 환호 소리, 한율을 보자마자 다급히 대기실로 끌고 가는 조유찬의 억센 손길까지.
한율에겐 이 모든 게 색이 선명한 꿈처럼 느껴졌다.
“너도 이제야 실감 나냐?”
옷을 갈아입고 카메라가 설치된 방송용 대기실에 앉아있자, 곧 차남석이 옆자리에 앉았다.
“직접 눈으로 방청객 분들 보니까?”
한율은 차남석의 시선을 좇아 대기실에 설치된 TV를 바라보았다. 리허설 때와 마찬가지로 한쪽엔 무대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 음소거가 된 TV에선 객석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잡혔다.
‘서한율’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
자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겉모습만 보고, 꾸며낸 모습만 보고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데에 죄책감을 느낄 여유는 없다.
느끼고 싶지도 않다.
느끼지 않는다.
그러다 한율은 한 사람을 보았다.
너무 긴장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같은 팀 멤버와 두 손을 꽉 맞잡고 있는 안세현을.
“···하.”
그 순간 한율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를 두고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상대방을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 마음이 크니 스스로 믿는 척 한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는 안세현을 보며, 대다수의 연습생들이 그러하듯 시야가 좁아서, 어디에 마음을 둬야할 지 몰라서 그런다고 재단했다.
‘내가 할 말이 아니잖아.’
사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지구인들 또한 살기 위해 그의 세상으로 도망쳐온 거라는 걸. 그 과정이 야만적이기는 했으나, ‘현재’의 이들은 그의 고향에 있어 침략자도 뭣도 아니며, 이후 이들의 생존 구멍을 틀어막게 되는 건 오히려 자신이라는 걸.
그래서 이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자신의 일에 부여한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방청객들을 본 순간 울렁거린 건 바로 그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이었다.
한율은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니, 덮으려 했다.
“—야, 얼굴 만지지 마! 메이크업 망가져!”
차남석이 덥석 한율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벌어진 손가락 틈 사이로, 메이크업이 망가지는 게 정말 큰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차남석이 보였다. 그러자 이번엔 더 큰 웃음이 나왔다.
“···하하.”
비록 제 귀에 들리는 웃음소리엔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담겨 있었지만.
차남석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한율의 얼굴을 살폈다.
“···서한율? 너 눈 색이······.”
한율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손을 내렸다.
“눈이 왜요?”
“아니···, 순간 파란색으로 보여서···.”
모두 각오하고 넘어왔다.
길우성을 통제하고, 게이트를 건너가 고향을 위협할 수 있는 각성자를 찾아내 처단하며 그렇게,
차남석이 목 뒤를 긁으며 머쓱하게 말했다.
“내가 잘못 봤나 보다.”
나도 이들과 함께 멸망을 맞이할 지구에서 죽겠노라고.
한율은 무덤덤한 미소를 지어냈다.
“싱겁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