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427)

* * *

7시간 후. 한 네티즌의 블로그에 보컬리스트 시즌3 첫 본선 방청 후기가 올라왔다.

뮤닷 방송국 앞에 <보컬리스트 시즌3>를 방청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과, [스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사전에 단단히 하고 들어가 차마 1차 본선 결과는 말할 순 없지만···.]으로 시작된 글은 오프닝무대와 각 팀이 노래하는 모습에서 느낀 감상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오늘 이 무대들을 두 달 후에나 TV로 보게 될 당신들이 너무 불쌍해ㅠㅠ...

특히 얼굴만 반반한 아이돌 연습생이라고 무시했던 내 머리를 깡! 세게 후려친 ‘꽃을 단 토끼’팀!!!!! 와나 진짜 레알 미안하다!!! 사랑한다!!! 계속 이렇게 곱게만 자라다오!!! 흐어어엉ㅇ어엉;ㅂ;]

글은 본인 눈만 검은색 막대기 처리한 블로거가 두 소년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마무리되었다. 뮤닷 로비를 배경으로, 사진 속 세 사람은 두 손을 토끼 귀처럼 머리 위로 올린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남석이랑 한율이 아버님, 어머님. 이리 멋진 아드님들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ㅂ;... WB래빗도 파이팅♡

-후기로 시작하여 덕심으로 끝났지만 후회는 없다.]

결심

한 고기 집에선 회식이 한창이었다. 

회식엔 오늘 뮤닷으로 응원을 갔던 연습생 다섯 명과 스타일리스트, 매니저 조유찬, 뒤늦게 보컬 트레이너와 좌기훈 대표까지 합류해 열 한 명이 참석했다. 

길우성이 상추에 고기를 네 점 올리며 말했다. 

“지인석이 한 팀당 다섯 명 제한 아니었으면 더 많이 가서 투표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치익. 유호가 웃으며 불판 위의 고기를 뒤집었다. 

“그래도 2차 올라갔으니 됐잖아. 정말 축하해, 남석아. 한율아.”

“귀에 딱지 앉겠어요, 형. 그만해요. 저놈 진짜 지가 잘해서 올라간 줄 착각하니까.”

“둘이 무대 엄청 잘했는데, 왜.”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뒤 지금껏 굶은 탓에 정신없이 고기를 집어먹던 차남석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박현우에게 손을 까딱거렸다. 

“이리 나와, 박현우. 싸우자.”

“대표님! 차남석이 저 때리려고 해요!”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와, 주둥이에 고기 처넣어 줄게.”

“필요 없어!”

차남석은 막 불판에서 달궈진 고기를 집었고, 박현우는 상추를 부채처럼 흔들어 차남석에게 연기를 보냈다.

“어우씨, 야! ···콜록.”

“······.”

차남석의 옆에 앉아 밥을 먹다 졸지에 연기를 뒤집어쓴 한율은 눈을 찡그렸다. 테이블 반대편 끝자락에 앉은 좌기훈 대표가 하하 웃었다. 

“얘들아, 밥상 앞에선 장난치는 거 아니다?”

연기가 다시 환풍구로 빠져나가고, 연습생들이 앉은 자리엔 시시한 잡담이나 다른 팀 무대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넌 어째 기분이 안 좋은 것 같다?”

맞은편에서 쌈을 싸며 길우성이 한율에게 물었다. 한율은 현재 이 자리에 자신을 있게 만든 원인 제공자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번엔 고기를 여섯 점이나 올리고 있었다. 

“그냥, 별로.”

그때였다. 좌 대표 옆에 앉아있던 조유찬이 진동하는 핸드폰을 들었다. 

“어? 김PD님 전화 왔는데요?”

“받고 와요.”

“네. ···네, PD님. 오늘 수고많으셨···.”

조유찬이 전화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테이블에서 채 몇 발자국 멀어지지 못하고 우뚝 멈췄다. 

“—네?!”

“······?”

식당에서 켠 TV소리나 다른 테이블의 말소리,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 사이로도 PD에게 전화가 걸려왔다는 말이 들렸기에, 조유찬의 크게 되묻는 소리에 모두 동작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 당연하죠. ···아······. 네. 어···, 그래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무슨 일이에요?”

조유찬이 전화를 끊기 무섭게 좌기훈 대표가 물었다. 조유찬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남석이랑 한율이가 부른 곡이요, 원작자나 그 회사에 허락받고 편곡해서 부른 거냐고 묻던데요. 그래서 당연히 그렇다고 했더니 안심하더라고요.”

“이제 와서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는데? 이상하네요.”

“그리고 이건 아직 확정된 사안이 아닌데, 첫방이 나가서 반응이 좋으면 본선 진출 여섯 팀 멤버 다 같이 광고를 찍을 수도 있다네요?”

“오오.”

연습생들이 일제히 한율과 차남석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차남석은 ‘아직 확정된 거 아니래잖아’ 정색하면서도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아래로 잡았다. 한율은 컵 가득 사이다를 따라 원샷했다. 

“반응이 좋으면 좋겠네요. 참, 남석이랑 한율이 너희 둘 내일 월말평가인 건 알고 있지?”

WB래빗의 월말평가는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로 정해져 있지만,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기에 두 사람만 특별히 미뤄진 상태였다. 

차남석이 고기를 집다말고 소심하게 항의했다. 

“촬영 때 한 걸로 치면 안 되나요, 대표님?”

좌기훈 대표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안 돼.”

회식이 끝난 후 한율은 길우성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길우성은 마치 제 일인 것처럼 한율의 부모에게 결과를 떠들었고, 직접 응원을 가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그들은 한율을 와락 끌어안으며 기뻐했다. 

“아들, 방송국 인간 중 아무라도 누가 네게 갑질을 하려하거든, 주저하지 말고 이 아버지한테 다 말해라. 내가 가서 확—.”

“당신은 가만히 있으랬죠? 한율아, 그런 일 생기면 아빠한텐 절대 말하지 말고 엄마한테만 살짝 알려줘. 알았지?”

한율은 두 사람을 보며 슬쩍 웃기만 하곤 대답하지 않았다. 

“길우성.”

“응?”

자기 전, 씻고 나온 후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한율은 길우성의 방을 찾았다. 길우성은 바닥 소음이 일어나지 않을 법한 댄스를 꿀렁꿀렁 추고 있다가 한율을 돌아봤다.  

한율은 뒤로 닫은 문에 등을 기댔다. 

“너 정말 데뷔가 하고 싶어?”

“당연하지. 안 그러면 내가 기획사 들어가겠다고, 집이랑 머언 서울 학교에 입학하고, 이 시간에, 이렇게 열심히 연습할 리 있겠어?”

“다른 길은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단 거네?”

“그렇다니까? 뭘 새삼스레 물으시나.”

처음엔 신뢰를 어느 정도 쌓은 후 다리나 신경이라도 박살내 어디 가둬두고 통제할 생각도 했다. 길우성은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았지만, 자꾸 ‘본래’의 그가 저지른 짓이 떠올라 폭력적인 충동이 든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도 같이 하자. 데뷔.”

길우성이 눈을 깜빡거리더니 한율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데뷔는 네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어? 오늘 무대 반응 좋았다고, 인기 좀 얻었다고 벌써부터 그러면 안 돼, 인마! 자식이 벌써부터 빠져가지곤.”

“그러니까 열심히 해. 네가 더 잘해야 같이 데뷔조에 들어갈 거 아냐.”

“야, 허, 참. 너 꼭 네가 뭐라도 된 것처럼 말한다? 어? 열심히 하기는 네가 더 열심히 해야지!”

“그럴 거야.”

“어···?”

한율은 길우성의 눈을 직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열심히 하고, 열심히 살 거야.”

한율은 결심했다. 

어떤 끝이 다가오는지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사는 이곳 사람들처럼, 자신 또한 ‘서한율’의 삶을 살겠다고. 

이건, ‘그날’을 맞이하기 전 스스로에게 주는, 가식으로 둘러싼 휴식이자 유희였다. 

멍하니 한율을 바라보던 길우성의 귀가 벌겋게 익었다. 

“아, 오글거려! 나도 청춘드라마 대사를 읊어야 되는 타이밍인 거냐?!”

한율은 혼자 손목을 꼬면서 난리치는 길우성을 두고 방을 나섰다. 툭. 닫은 문 너머에서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우, 왜 저래, 써한율. 아, 닭살.”

그러나 그 목소리엔 서서히 기분 좋은 웃음이 스며들고 있었다. 진정으로 같은 길을 함께 걸어줄 친구를 찾은 게 기쁘다는 듯이.

“······.”

한율은 한참을 가만히 서서 혼자 큭큭거리는 길우성의 웃음소리를 듣다가, 다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기척을 느끼고 나서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어느덧 6월에 접어들었지만 비가 내려서인지 날씨는 무척 쌀쌀했다. 한율은 모친이 챙겨준 따뜻한 레몬생강차를 한 모금 마신 후 핸드폰으로 검색한 걸 읽었다. 

[감성(x) 인성소녀 인성 모음집]

음악방송 촬영 전 신인 걸그룹이 인사하러 갔더니 대놓고 외모 품평에 소속사도 듣보라고 무시했다더라, 멤버 누구누구는 학교 다닐 때 쌍욕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TV에선 세상 순진한 척 가식 떨더라, 잘생긴 남돌만 보면 어떻게든 폰번을 따서 자기들끼리 돌려 까며 논다더라, 멤버들 간에도 사이가 좋지 않아 어쩔 땐 숙소 밖으로 ‘이 미친년아!’ 꺅꺅 고성이 나온다더라, 예능프로그램 녹화에 지각해놓고 오히려 막내 작가한테 갑질했다더라, 하도 지랄 맞고 까다로워서 매니저가 두세 달에 한 명씩 교체된다더라, 누구는 팬싸인회 전에 명품 뭐뭐 갖고싶다~란 말 흘리면서 조공 유도를 한다더라, 방송국 특히 예능국에서 얘네 쌍욕하는 거 한 번도 안 들어본 이가 없다더라 등등. 

‘별 거 없네.’

썰도 수집 출처도 정말 다양했지만, 한율은 3분 정도 훑다가 곧 흥미를 잃고 차창 밖을 보았다. 하늘에 잔뜩 낀 먹구름 아래로 푸른빛을 띤 논밭이 보였다. 창을 살짝 열자 시원하다 못해 찬 공기가 훅 들어왔다. 

‘도시와 멀어져서 그런가, 마나가 그나마 깨끗하네.’

“춥다. 문 닫아라.”

옆자리에서 핸드폰을 거울삼아 여러 가지 표정 연습을 하던 길우성이 말했다. 한율은 오히려 창을 더 활짝 열었다. 쌩하고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휘날렸다. 

“춥다고오!”

“가면 너희들 인사 잘해야 돼. 알았지?”

운전석에서 조유찬이 룸미러로 그들을 보며 당부했다. 

“촬영할 때 아니면 절대 말 걸거나 눈도 마주치지 말고. 그래야 할 일이 생기면 꼭 다른 스태프들 다 있는 데서 예의바르게 하고! 한 마디 하면 백 마디가 돼서 떠도는 게 이 바닥이니까 잡담도 조심하고!”

길우성이 조유찬의 잔소리에 편승하여 외쳤다. 

“서한율은 창문 닫고!”

팔락팔락. 조수석에 앉아 콘티를 살피던 차남석도 한 마디 할 기세로 돌아보아, 한율은 창을 도로 닫았다. 

현재 그들은 감성소녀의 뮤직비디오가 촬영될 경기도의 한 스튜디오로 이동 중이었다. 출발할 땐 정말 밤처럼 캄캄했지만 한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어둠과 먹구름이 구분될 정도로 사위가 밝아졌다.

“혹시 저기에요? 스튜디오?”

저 멀리 세워진 거대한 창고 같은 건물이 보였다. 휑뎅그렁한 논밭 사이에 서있어 한 눈에 들어왔다. 

“맞아. 세워진 차들 보니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온 것 같다.”

“억, 저 차는 어느 회사 건지 딱 알 것 같다. 봐봐, 소라고동 그려짐. 크큭.”

남의 뮤직비디오라도 촬영을 한다는 생각에 잔뜩 들떴는지, 길우성이 신난 얼굴로 한 검은색 차량을 가리켰다. 차문에 귀엽게 생긴 소라고둥 캐릭터 스티커가 부착되어 있었다.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소라고동이 아니라 소라고둥 아니었나?”

“어? 그래?”

“고둥이 표준어고 고동은 방언이래.”

뒷자리에 앉은 스타일리스트가 말했다. 길우성이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차는 고동 엔터 차 옆에 나란히 멈췄다. 

“일찍 오셨네요?”

조유찬이 내리자마자 바깥에 서있던 한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막 담배를 꺼내려던 남자가 도로 담배를 집어넣으며 화답했다. 

“아뇨, 저희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안녕하세요.”

차남석이 먼저 그에게 고개를 숙였고, 한율과 길우성도 반 박자 늦게 인사했다. 남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네, 안녕하세요’ 대답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그러곤 활짝 열린 스튜디오 입구를 흘깃거리며 그들과 거리를 좁혔다. 

“안에 들어가면.”

조심스럽게 건네는 목소리에 절로 집중하게 된다. 

“더 큰 목소리로 인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네?”

“아니, 방금 우리 애가 들어가서 인사를 했는데···, 들은 체 만 체 하면서 무시하더라구요.”

“프로덕션이나 회사 관계자들이 그렇진 않을 거고, 감소 멤버들이요?”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안에서 다이아필름 프로덕션의 강은혜 대표가 나와 밝게 인사를 건넸다. 이른 아침임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활기찼다. 

“WB래빗! 오셨어요?!”

거대한 스튜디오 안에는 여러 개의 세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앞서 뮤닷에서 방송국 스튜디오를 경험하긴 했지만, 진짜 방 한 칸, 교실, 카페 공간, 미술관 내부, 거리를 실감나게 구현한 세트를 직접 보자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찰칵. 

“······?”

돌연 들리는 카메라 앱 소리에 세 사람이 동시에 조유찬을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그들에게 겨눈 채 조유찬이 설명했다. 

“대표님이 하나도 놓치지 말고 다 찍으라셨어. 나중에 홍보팀에 넘긴다고. 아, 너희들. 세트 벽에는 절대 기대면 안 된다?”

“네···.”

“지금 감소 멤버들도 준비에 들어가서 인사는 나중에 나누면 될 것 같고, 래빗 분들 대기실은 이쪽이에요.” 

웃으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은혜 대표가 스튜디오 한쪽에 설치된 간이 공간을 가리켰다. 세 사람은 조유찬이 단단히 일렀던 것처럼 지나가다 눈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하며 대기실로 들어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야외와 세트장 퍼포먼스 촬영은 모두 끝낸 상태였다. 강은혜 대표가 데려온 배우는 고동 엔터 연습생과 WB래빗의 연습생 촬영분이 다 끝난 후 순서이며, 감소 멤버들과 남자 배우들이 모두 모여야 하는 마지막 씬 역시 그때 촬영할 거라고. 

“우리야 마지막에 헤어 한 번 수정하는 걸로 끝이지만, 감소 멤버들은 수시로 옷 갈아입고 머리도 수정해야하더라.”

“으아, 그거 기다리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 같네요.”

“제일 첫 타자가 너라 그랬지?”

“으윽, 왜 하필 전가요···. 왜 하필 쌩초보인 내가······!”

스타일리스트와 샵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 메이크업 박스를 들고 길우성의 양쪽에 포진했다. 스타일리스트는 길우성이 징징거리든가 말든가 길우성의 안경을 벗겼다.

“메이크업 들어가기 전에 렌즈부터 끼자.”

“아··· 결국 이 날이 오고 말았어. 눈에 본격적으로 뭔가를 넣는 날이······!”

“거 참 더럽게 시끄럽네.”

길우성은 1회용 소프트렌즈를 꺼냈다. 눈을 크게 뜬 채 거울을 보며, 소프트렌즈를 올린 손가락을 부들부들 떠는 모양새가 가관이었다. 그러다 과감히 눈으로 푹 갖다 댄다.

내가 보니 요즘 애들은 친구끼리 이러더라

길우성이 고개를 수그렸다. 

“악! 마이 아이즈!”

“그렇게 찌르듯 넣으면 어떡해! 안 다쳤어?”

샵 직원과 스타일리스트가 놀라 동시에 길우성의 얼굴을 살폈다. 한율과 차남석은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찰칵찰칵. 조유찬은 그 모습조차 카메라에 열심히 담았다. 

우여곡절 끝에 양쪽 눈에 무사히 렌즈를 낀 길우성은 그 뒤 얌전히 눈과 입을 닫은 채 꽃단장을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에서 불거졌다. 

“한율이부터요?”

“네. 원래 우성 군 차례가 맞긴 한데··· 순형이가 준비에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네요. 죄송합니다.”

강은혜 대표의 사과에 조유찬은 당황해하며 손을 저었다. 

“아뇨, 대표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뮤비 촬영을 의뢰한 게 감성소녀 측이라 하더라도 현장을 지휘하고 책임지는 건 프로덕션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아티스트 사정으로 촬영 순서가 꼬인다면 이건 그 아티스트 문제다. 

조유찬이 한율을 돌아보았다.

“한율아, 괜찮겠어?”

“네.”

한율은 덤덤히 대답했다. 어차피 길우성 바로 다음으로 헤어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터라, 곧 준비가 끝날 참이었다. 

한율이 맡은 캐릭터는 감성소녀 멤버 둘 사이에서 헤매는 연하남이었다. 본래는 첫사랑인 아는 누나를 쫓아다녔지만, 어느 날 자기에게 화사한 미소를 지어주는 카페의 알바생을 보고 크게 마음이 흔들리는, 그런 역할. 

처음 콘티를 받고 자신의 역할을 깨달았을 때 한율은 소소한 충격을 받았다. 

‘이 사람들 눈엔 내가 이런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이미지로 보인 건가?’

아직 열일곱 살에 불과한 ‘서한율’이 선이 가는 예쁘장한 얼굴이란 것은 그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겉모습을 의식하고 행동한 건 미성년자로서 지켜야 할 선을 지킬 때 외엔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함부로 겉모습을 기준으로 이미지프레임을 씌워 요구할 때마다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내 성향과는 정반대인 이런 캐릭터가 나올 수도 있는 거겠지.’

본래 세상과 로건 워커의 삶, 현재까지 통틀어 그가 사랑했던 여성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 사랑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헤집어 놓을 때에도 다른 누군가에게 시선이 빼앗긴 적은 결코 없었다. 

‘그래도.’

몇 번이고 살펴본 콘티에 현재 스튜디오에 무한 반복으로 나오는 노래를 곁들이자, 어떤 캐릭터를 요구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한율은 촬영 세팅이 끝난 세트로 걸어가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연기쯤이야 얼마든 가능하지.’

그리고 스태프들과 그 사이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감성소녀 멤버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서한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빨리 끝내고 가서 쉬자.’

그러나 촬영은 한율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컷. 미미 씨, 표정 조금 더 새침하게 할게요~.”

“컷. 미미 씨, 노란 선 바깥으로요, 표정 상큼하게~.”

“컷. 미미 씨, 한 번 더 걸을게요~.”

“컷. 미미 씨, 꽃다발 다시 받을게요~.”

혼자만 잘 하면 뭘 하는가. 함께 촬영하는 상대방이 전혀 협조를 안 해주는데. 더구나 지적받을수록 더 NG를 내면서 되레 입을 삐죽삐죽 내밀기까지. 

“감정 잡기 힘드니까 내 차례는 뒤로 미뤄달라고 했잖아요!”

잠깐의 휴식시간. 급기야 미미가 매니저에게 버럭 짜증을 냈다. 그러나 프로덕션 측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못 들은 척 세트나 촬영 장비를 점검했다. 

미미가 발을 쾅쾅 구르며 울먹거렸다. 대기실에 있는 다른 감성소녀 멤버들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아, 진짜···, 짜증나아···!”

“미미야? 메이크업 망가져. 그만, 그만.”

하릴없이 촬영을 구경나왔던 길우성이 한율에게 속닥거렸다. 

“보기보단 성격이···.”

“우성아?”

그러나 길우성의 말은 조유찬에 의해 끝을 맺지 못했다. 조유찬이 길우성을 대기실 쪽으로 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기실에 들어가 있어. 부를 때까지 나오지 말고.”

“심심한데···.”

“남석이 있잖아. 가.”

“남석이 형 영어 공부하느라 나랑 안 놀아주는데.”

“그럼 너도 같이 해. 빨리 가.”

조유찬이 길우성을 대기실에 가두는 동안, 감성소녀 매니저는 난감한 얼굴로 강은혜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곤 처음부터 나와 내내 지켜보던 감성소녀 리더, 제유에게 다가갔다. 

이야기를 들은 제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덕션 대표이자 감독인 강은혜가 외쳤다. 

“5-A부터 촬영할게요!”

결국 촬영 순서가 또 바뀌었다. 

한율이 카페 안으로 들어가다 넘어지고, 그걸 일으켜주는 제유에게 반하는 씬.

같은 장면을 여러 각도로 찍어야 하기에, 한율은 몇 번이고 넘어지고, 제유를 멍하니 쳐다보며 일어나야 했다. 

정말 한 사람밖에 모르던 열일곱 소년이, 새로이 나타난 사랑에 마음이 흔들리는 표정은 이런 발랄한 뮤비에 맞게 적당히 과장되었고, 화사했다. 

카메라에 잡혀 클로즈업되는 한율의 얼굴을 보며 프로덕션 직원들이 낮게 속닥거렸다. 

“와···, 얘 마스크 진짜 좋다. 표정 연기도 좋은데?”

“피부 봐. 얼굴에서 빛이 나네.”

“내가 초등학생 때도 저 정돈 아니었는데···. 역시 아이돌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감성소녀 리더인 제유는 이전에 드라마 조연과 웹드라마 주연을 맡았던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NG는 거의 내지 않았다. 그 덕에 한 시간이나 지난했던 미미와의 촬영과는 정반대로, 제유와의 씬은 30분도 안 되어 다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강 감독의 OK사인이 크게 울리자마자 한율은 제유를 향해 크게 인사하며 꾸벅였다. 제유가 활짝 웃어주며 화답해주었다. 같은 멤버인 미미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미소였다. 

“남은 촬영도 잘 부탁해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미미 씨, 준비됐어요?”

이 기세를 몰아 미미와 한율의 씬을 재촬영하려는지 강 감독이 미미를 찾았다. 곧 대기실에서 미미가 나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매니저를 찾는데, 벌써 끝났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곤 이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다가 애써 웃으며 세트로 복귀했다. 

“4-B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미미 씨?”

“네, 물론이죠.”

제유가 30분 만에 끝낸 이상, 이 이상 자신 때문에 촬영이 딜레이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미미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한율에게는 스타일리스트가 다급히 메이크업을 수정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 조유찬은 빨대를 꽂은 생수를 내밀었다. 

“목마르지? 물 좀 마셔.”

“감사합니다.”

“다리는 괜찮아?”

“괜찮아요.”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언제 나왔는지 차남석이 끼어들었다. 조유찬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제유 씨랑은 끝났고, 미미 씨랑 나머지 씬 마저 찍은 후에 세 사람이 같이 나오는 것만 더 찍으면 돼.”

“오래 걸리겠네요.”

한율은 흘끔 미미와 제유가 있는 쪽을 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있었지만 서로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콘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금방 끝날 것 같은데요.”

“그래?”

오기에 발동이 걸린 것 같으니. 

한율의 예상대로, 미미는 정신을 완전히 차린 것처럼 촬영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래도 여전히 NG는 냈지만, 극중 한율을 외면한 채 퍼포먼스를 하는 씬에선 괜히 다년차 아이돌이 아니란 걸 몸소 증명했다. 

세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씬의 촬영도 수월했다. 끝날 무렵 세트 밖에는 대기실에 꽁꽁 처박혀 있던 고동 엔터의 연습생과 다른 감성소녀 멤버 몇몇이 나와 구경하고 있었다. 

“수고했다, 서한율. 선수 교체!”

모든 배우들이 모이는 마지막 씬만 남겨두고 한율의 차례가 끝났다. 길우성이 오른발을 뒤로 쭉 빼고 왼쪽 무릎을 굽힌 상태로 한율에게 왼손을 내밀며 하이파이브를 유도했다. 

한율은 길우성에게 시선 한 번만 던져주고 옆을 지나쳤다. 길우성이 똑바로 서며 툴툴거렸다. 

“아 진짜. 눈치 드럽게 없는 써한율. 너 방송만 나가봐, 그냥. 내가 아주 서한율 저거 가식 엄청 쩐다고 막, 어? 막 다 까발려버릴 테다.”

“그러든가.”

“유찬이 형, 들었죠? 형이 증인···은.”

길우성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으며 조유찬을 돌아보았다가, 핸드폰 너머로 자신을 조용히 노려보는 그를 보곤 스스로 납득했다. 

“안 해주시겠구나. 네, 그렇죠. 그러시겠죠.”

“적당히 까불고 준비하시죠, 길우성 씨.”

“넵.”

한동안 쉬어도 되지만 한율은 대기실로 들어가지 않고 길우성이 촬영하는 걸 구경했다. 요 며칠 회사에서 단기간 집중연습을 시켜놔서 그런지, 길우성은 카메라가 돌아가자 콘티에 나온 그대로 움직였다. 

정극 연기를 배운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춤을 출 때에도 중시되는 게 바로 무대 연기였다. 그래서인지 대사 없이 과장되게 움직이고 표정을 지어야 하는 이런 종류의 연기는 제법 잘하는 것처럼 보였다. 

길우성 다음엔 고동 엔터 연습생과 감성소녀의 촬영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형은 심심해서 어떡해요? 순서가 한참 뒤네.”

대기실로 돌아와 홀가분해진 얼굴로 음료수를 마시며 길우성이 차남석에게 말했다. 핸드폰으로 보던 영어동영상 강의를 일시 정지시키며 차남석이 고개를 들었다. 

“얘 끝나면 바로 다음인데, 뭘.”

“얘 끝나면 점심 먹는다는데요? 그리고 얘 아니고 형이래요. 스물두 살.”

“점심은 뭐가 나오려나.”

“맛있는 거 주면 좋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열일곱, 열여덟 살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화는 이내 먹는 걸로 갔다가, 학교 행사 얘기로 갔다가, 기말고사 얘기로 갔다가, 다시 먹는 얘기로 돌아갔다. 

“라떼리아에 신제품으로 나온 그거 한 번 먹어보고 싶던데.”

“그거 엄청 비싸지 않아요? 칼로리도··· 히익, 세트 다 먹으면 천이 훌쩍!”

길우성이 핸드폰으로 라떼리아 메뉴를 띄웠고, 한율은 그 아래 있는 애플파이를 가리켰다. 

“이거 맛있어?”

“안 먹어봤어?”

“가 본 적 자체가 없는데.”

“······?!”

“서한율···, 너 설마 친구 없는 거 아니지?”

“그러고 보니 나 얘한테 학교 친구 얘기 들어본 적 없어요, 형···! 어떡해요? 써한율 왕따인가 봐···!”

길우성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다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한율의 표정을 보곤 차남석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며 한율에게 삿대질했다. 

“이 봐, 이 봐,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니까 라떼리아 같이 갈 친구도 없는 거···, 아악!”

퍽. ···털썩. 

찰칵찰칵. 조유찬은 길우성이 한율에게 한 대 맞고 과장되게 쓰러지는 장면까지 놓치지 않았다. 

WB래빗 연습생들과 고동 연습생의 촬영은 오후 다섯 시쯤 되었을 때 마무리되었다. 강은혜 감독이 데려온 배우와 감성소녀 멤버 한 명의 씬을 맨 뒤로 빼고, 감성소녀 전 멤버와 모든 배우들이 나오는 걸 먼저 촬영한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전 출연자 씬이 끝나자 서로에게 수고했다고 인사하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인사 무시했다는 고동 엔터 아저씨 말 듣고 내심 무시무시한 갑질을 당하는 걸까 겁먹었었는데. 딱히 별 일은 안 일어났네요?”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 길우성이 안경을 닦으며 말했고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자기들끼리 무슨 일 있었던 것 같았지. 아, 어쨌든 끝내니까 마음은 편하네.”

“그런데 형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영어 공부에 열심이에요?”

“난 공부하면 안 되냐?”

차 안에서도 영어동영상 강의를 보던 차남석이 발끈하며 되묻자, 길우성이 안경을 쓰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정색을 하고···.”

조유찬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남석이 너 혹시 그 댓글 본 거야?”

“······.”

“댓글? 무슨 댓글이요?”

“있어, 그런 게.”

“시간이 걸리는 한이 있어도 어차피 찾아낼 텐데 지금 말씀해주시죠.”

“본선무대 본 방청객이.”

차남석이 핸드폰 전원 버튼을 가볍게 누르며 직접 대답했다. 시트에 편히 머리를 기대고 차창 밖을 보는 한율을 가리키며. 

“나랑 쟤, 발음 비교된단다. 나는 한국식 굴림영어, 쟤는 본토발음.”

“난 잘 모르겠던데.”

“2차 본선 촬영은 1차가 방송을 탄 뒤니까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느긋하게 준비해도 돼, 남석아.”

“아뇨, 이건 제 자존심이 걸린 문제에요.”

“노래는 본인이 훨씬 잘 부르면서.”

한창 성장 중

“그거야 당연한 거고.”

차남석은 다시 자세를 바로 한 뒤 핸드폰 전원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영어 동영상강의를 재생시키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발음을 소리 없이 따라했다. 

한율은 작게 한숨 쉬며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투둑, 툭. 이른 아침에 이 길을 달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둑했던 하늘이 비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비는 다음날까지도 이어졌다.

“아, 이것 때문에 어제 분위기가 안 좋았던 거구나.”

“······?”

지하에선 빗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제습기가 켜져 있음에도 공기 자체가 축축하고 싸늘했다. 소리도 더 잘 울렸다.

레슨시간이 되기 전, 휴게실 의자에 앉아있던 길우성이 한율에게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감소 순형이 열애설 터짐. 실검 난리 났는데?”

“실검까지 오를 정도로 인기가 많았었나?”

“상대가 유명한 축구선수에···, 새벽에 상대방 집에서 같이 나오는 사진이 찍혀서 그런 듯. 그런데···.”

“또 뭐가 있어?”

딱히 다른 사람이 연애를 하든 불륜을 하든 별 관심은 없지만, 한율은 적당히 상대해주는 척 옆으로 갔다. 

“감소 측에선 은근슬쩍 인정하는 뉘앙스를 흘렸는데, 축구선수 쪽에선 변호사까지 불러서 허위사실 유포하면 법적 처벌하겠다고 극구 부인하고 있어. 이러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부인당한 쪽에 동정여론이 일겠지.”

“어휴, 이래서 남자도 여자도 상대방을 잘 알아보고 만나야 된다니까?”

근처에서 조용히 핸드폰게임을 하던 박현우가 끼어들었다. 

“—이상, 모솔 길우성 님의 말씀이셨습니다.”

“형! 17년 인생에 모솔이란 단어는 일러도 한참 이르죠!”

“그럼 연애하겠다고? 언제?”

“데뷔하고! 군대 다녀오고!”

“그래, 서른 넘어서 하겠네. 그래서 미리 모솔이라 불러주는 거야. 인정할 건 빠르게 인정해야지?”

“···어? 듣고 보니 그러네?”

바본가. 한율은 길우성을 보며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벌컥. 그때 휴게실 문이 열리며 유호가 들어왔다. 

“우성아, 강 팀장님이 너 찾으시던데?”

한율과 차남석의 1차 본선 응원을 온 후, 유호는 예전처럼 오후 늦은 레슨시간에도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여전히 몇몇 연습생들이 유호를 향해 묘한 시선을 보내거나 슬쩍 피하기는 하지만, 유호는 더 이상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저요? 왜 부르시지?”

“숙소 때문 아냐?”

“헉! 잊고 있었다!”

WB래빗 연습생들은 본가가 멀고, 연습생 생활이 최소 3개월이며 월말평가도 3개월 이상 좋은 성적을 유지하면 회사에서 마련해준 연습생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길우성은 마냥 기뻐하는 내색이 아니었다. 

“숙소···.”

길우성이 슬그머니 한율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아니, 어···, 갔다 올게······.”

길우성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휴게실을 나갔다. 한율은 길우성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속으로 웃었다.

현재 연습생 숙소에 사는 차남석의 말에 따르면, 연습생 숙소는 한 방을 네댓 명씩 쓸 정도로 좁다고 했다. 화장실도 하나뿐이라 아침엔 정말 전쟁이라 회사에서 씻는 게 더 편할 정도라고. 그리고 단체생활 시 지켜야 하는 규칙도 있으니, 가정집에서 편히 지내다가 들어갈 걸 생각하면 불편한 단점들만 걱정으로 다가올 것이다. 

‘뭐, 이젠 굳이 나서서 챙겨줄 생각은 없지만.’

한율은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5년은 생각보다 기므로. 

“어제 촬영은 잘 하고 왔어?”

길우성이 앉았던 의자에 유호가 앉으며 물었다. 

“네, 괜찮았던 것 같아요. NG도 거의 안 냈고.”

“다행이다. 자.”

“이게 뭐예요?”

한율은 유호가 내미는 종이가방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유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 잠깐 편의점 갔다 오는데, 어떤 애가 너랑 남석이 전해달라고 주더라.”

“혹시 후드 뒤집어쓰고 끈을 바짝 조였어요?”

“응. 아네?”

그 애다. 자칭 1호팬. 

강무기 팀장과 조유찬의 말에 따르면, 한율과 차남석이 나오는 영상마다 ‘악플을 달면 캡처하겠노라’ 엄포를 놓는 네티즌이 있는데, 한율은 그 네티즌이 후드티 소녀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다. 예전에 받은 선물 속 쪽지처럼 ‘1호팬☆’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똑같고. 

‘역시.’

종이가방 속 상자를 꺼내 열어보자, 이번에도 쪽지에 스스로를 ‘1호팬☆’이라고 적어놓았다. 

한율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유호에게 물었다. 

“남석이 형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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