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427)

* * *

7월 2일로 넘어가는 새벽. 

<보컬리스트 시즌3> 첫 방송이 나갔다. 

좌기훈 대표와 강무기 팀장, 그리고 매니저 조유찬은 새벽 3시가 되도록 퇴근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 앉아 방송 반응을 살폈다. 그들은 눈에 필터가 장착된 것처럼 서한율과 차남석 관련 댓글만 귀신같이 찾아냈다. 

-열일곱 살 너무 애긔애긔한 거 아니냐···. 

-피부 부럽···. 오죽하면 PD도 피부 관리비결이 뭐냐고 묻냐곸ㅋㅋㅋ큐ㅠㅠ

-크리스탈 래빗 소속사가 그렇게 인물이 없음? 고작 3개월인 애를 내보내냐;

ㄴ남석이 무시하냐?

ㄴ아니 다른 애는 없었냐고

ㄴ한율이 무시하지 마세요. 

ㄴ보면 모르냐; 얼굴이요ㅇㅇ아

-ㅅ·········야아아아아 팀명이 저게 뭐얔ㅋㅋㅋㅋㅋㅋ꽃을단톸낔ㅋㅋㅋ 누가 애들을 저리 만들어놨엌ㅋㅋㅋㅋㅋㅋ 사전 인터뷰 때랑 온도차이가 너무 나잖앜ㅋㅋㅋㅋㅋ

ㄴㄹㅇ인터뷰나 연습장면땐 완전 진지하고 차분한데ㅅㅂㅋㅋㅋㅋ대표나왘ㅋㅋㅋ

“······.”

좌기훈 대표는 입가를 올린 채 노트북을 툭 덮었다. 그리고 이마에 손을 올리며 후우,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열었다. 

-후욱후욱···. 그나마 얼굴 되고 나이가 어리니까 형이 봐준다.

ㄴ빌어먹을 외모지상ㅈ의.

야심한 새벽의 실시간 검색어엔 잠깐 [보컬리스트 꽃을 단 토끼]가 20위권에 슬쩍 올라왔다가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좌기훈 대표는 새벽 5시가 되어서야 피곤한 눈을 끔뻑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이 되자 시청률 집계가 나왔다. 0.7%. 시즌2 1화보다 0.1%나 높은 수치였다. 반응은 아직 아리송했다. 1화 내용 대부분이 출연 팀 소개로 채워진 탓이었다. 

참가자 중 한 명이 과거 학폭 가해자란 인터넷 기사가 다시 떠오르기는 했지만, 해당 원문 댓글이 현재 삭제된 상태인데다 그 이상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거나 또 다른 피해자가 나타난 것도 아니라서 금세 수그러들었다.

집요한 네티즌 몇 명만 <보컬리스트 시즌3> 관련 기사마다 해당 내용을 복붙하며 돌아다니고 있긴 하지만, 그뿐이었다.

토요일 낮. 1화 재방송이 나가자 실시간 검색어 말미에 차남석의 이름이 올라왔다. 

[보컬리스트 차남석]. 연관 검색어엔 [차남석 K노래열전], [차남석 과거], [차남석 삑사리], [보컬리스트 꽃을 단 토끼], [꽃을 단 토끼 서한율]이 줄줄이 떴다. 

참가자가 속한 기획사보다 첫 방송 반응에 예민한 건 역시 프로그램을 제작한 방송국 측이었다. 김강원PD는 실시간검색어에 보컬리스트 출연자가 오르자 실실 웃었다. 

“역시 외모가 돼야 한다니까. 한 번 봤던 애가 잘 자라주니 알아서 관심을 주시네.” 

차남석에 대해 몰라도, 예전에 TV에 나왔다는 정보를 접하면 굳이 과거 모습을 찾아보는 게 네티즌들의 심리다. 그리고 다행히 WB래빗에서 관리를 잘 하고 있는 건지, 차남석과 관련된 이슈는 이슈랄 것도 없이 깔끔했다. 같은 팀으로 나온 서한율도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얘네 집 부자임. 어릴 때부터 핸드폰이랑 좋은 자전거 타고 다니고, 아파트도 비싼 데 살았음. 공부도 잘함. 초딩 때부터 개시크하기로 유명했는데 어제 티비서 보고 완전 놀람ㅇㅇ 쟤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봄ㅇㅇ

ㄴ헐; 현재 ㅅㅎㅇ이랑 같은 학교 다니는데, 나도 쟤 저렇게 웃는 거 ㄹㅇ처음 봄; 이게 진정한 자본주의 미소!!

이 정도가 다였다. 

WB래빗은 이 기세를 몰아 보컬리스트 측에 허락받은 사진 몇 컷을 공식 홈피와 SNS계정에 올렸다. 서한율과 차남석이 사전 인터뷰를 찍을 때의 사진과, 예선 무대가 있기 전 대기실에서 메이크업을 받기 전과 후 사진이었다. 그 아래로 댓글이 하나 둘 달리고, 팔로워 숫자도 빠르게 올라갔다. 

“다른 참가자들 반응이랑 비교하면 JZ랑 고동 엔터랑 비슷비슷한 것 같아요.”

“나쁘진 않네요. 이대로 3화까지 잘 봐주셔야 할 텐데···.”

“감성소녀 컴백은 다다음 주라고 했죠? 그때 맞춰서···.”

좌기훈 대표는 강무기 팀장과 유재용 팀장, 조유찬 매니저, 기획홍보팀 팀장을 다 불러놓고 숙덕숙덕 회의를 진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주말에도 일하는 바쁜 어른들과 달리, 한율은 첫 방송 기념으로 선물 받은 주말의 휴일을 산에서 보내고 있었다. 

“하······, 좋다.”

한율은 등산모를 벗으며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온몸을 휘감는 바람의 감촉이 너무 좋았다. 사람이 없다면 이대로 산 아래로 몸을 날려 마음껏 만끽하고 싶을 정도. 

‘5년 후면 각성자인 척, 눈치 보지 않고 편히 날아다닐 수 있겠지.’

아쉬운 대로 지나가는 바람에 실린 마나를 손끝으로 휘휘 감았다. 마나는 부드럽게 요동치다 스르륵 빠져나간다. 그 간지러운 감촉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불순물이 그나마 적어서 좋았다. 

예전엔 주말마다 집 근처의 산에 자주 오르곤 했지만, 기획사에 들어간 뒤부턴 이렇게 산을 오를 여유가 좀처럼 나지 않았었다. 

한율은 ‘대청봉’이 적힌 커다란 비석 뒤 바위에 기대어 앉아 한참동안 바람을 맞았다. 온 시야가 푸르러 눈도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모처럼 자연 속에 둘러싸여 마나를 유동시키는 것도 즐거웠다. 

‘아, 사진.’

그러다 문득 모친의 당부를 떠올리곤 핸드폰을 꺼냈다. 

어제, 설악산에 혼자 등산을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모친은 처음엔 위험하다고 펄쩍 뛰며 말렸지만, 곧 직접 호텔을 예약하고 선크림도 잔뜩 챙겨주었다. 그리고 장소를 옮길 때마다 꼭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당부했다. 

한율은 핸드폰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라, 그렇잖아도 하얗던 얼굴이 더 하얗게 떠있었다. 

찰칵. 한율은 대청봉 비석과 한 컷, 아찔한 산 아래를 배경으로 두고 다시 한 컷 셀카를 찍었다. 회사에서 어떻게 하면 셀카를 예술적으로 잘 찍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쳐준 덕에, 결과물은 무난했다.

배낭에서 양산을 꺼내 쓴 뒤 다시 한 컷을 찍고 난 후, 한율은 한 시간 가량 더 설악산 대청봉에서 바람을 만끽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했다. 대피소로 내려가야 사진을 보낼 수 있었다. 

등산스틱으로 조심조심 내려가던 한 등산객이 빠르게 옆을 지나쳐 멀어지는 한율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햐, 젊음이 좋긴 좋구만. 어려 보이는데 아주 날아다니네.”

다음 날. 한율은 설악산의 다른 경치 좋은 곳에서 실컷 바람을 맞은 후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미리 몇 시에 오는지 연락을 받은 모친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율을 맞이했고, 한율은 간만에 두 사람과 함께 오붓한 저녁식사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월요일. 

“와, 진짜 실물 쩔어···! 피부 완전 깨끗해!”

“방송에 나왔을 때보다 키 더 큰 거 맞지? 꺄아, 어떡해!”

한율은 자전거로 교문을 통과하자마자 자신을 향한 수많은 목소리를 들었다. 예전에 트레일러 영상만 나갔을 때보다 더 격해진 반응이었다. 

‘편입하기로 하길 잘했지.’

얼마 전 길우성이 다니는 예고 측에서 편입 허가가 나왔다. 그래도 1학기는 마치고 옮기는 게 좋겠다 싶어 아직은 유예 상태. 그나마 방송이 기말고사가 끝난 다음 나간 데다 방학도 얼마 남지 않아 다행이었다. 

“한율아! 토! 끼! 해봐!”

“한 번만! 응? 방송에서처럼! 응?”

“꽃을 단, 꽃···, 야, 이거 발음 한 번 잘못하면—.”

“네, 성희롱 신고 들어갑니다. 뿌뿌!”

쉬는 시간마다 어찌나 찾아와 떠들어대는지,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것도 태반이 지금껏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방송보고 느낀 건데, 너 요새 키 좀 큰 것 같다? 야, 서 봐봐.”

그러나 한율은 오랫동안 단련된 인내심을 발휘해 덤덤히 아이들을 대했다. 

“오, 진짜 컸어. 한 175 된 것 같은데? 전에 신체검사 때 몇 나왔었냐?”

“171.”

“3개월 만에 4센티면···.”

“춤 연습 너무 하지 마. 그대로 키 멈춘다?”

한율은 비슷한 이야기를 WB래빗에 출근한 후에도 듣게 되었다. 매일 얼굴을 보다시피 하는 차남석에게서. 

“그러고 보니 눈높이가 줄어든 것 같기도?”

그러나 한율은 로건 워커와 비교하면 아직 한창 부족하다 여기고 있던 터라, 별 감흥이 없었다. 

“그보다 형은 괜찮아요? 실검에도 이름이 오르던데. 차남석 삑사리라고.”

“···왜 하고 많은 연관검색어 중에 그걸 입에 올리는 건데.”

CF 촬영

“제일 인상 깊어서?”

차남석의 고민이 얼굴에 드러났다. 이걸 한 대 칠까, 말까. 그러나 장난스럽게라도 칠 만큼 막역한 사이는 아니라서 그런지 이내 단념했다. 

“연습이나 하자.”

원래 한율은 월수금 6시엔 보컬 단체레슨을 받았었지만, 2차 본선 진출이 확정된 후엔 개별로 빠지게 되었다. 

두 사람은 30분 정도 함께 노래를 연습한 후, 각자의 보컬 트레이너가 기다리고 있는 연습실로 찢어졌다.

댄스 자율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율의 집을 나가 숙소에 들어간 뒤에도 길우성은 계속해서 30분씩 춤을 가르쳐주었다. 인기 아이돌그룹의 커버댄스를.

“원, 투, 팔꿈치 조심! —굿! 이 정도면 방송에서 갑자기 시켜도 창피하진 않겠다. 음, 내가 제자하난 잘 키웠군.”

“······.”

한율과 차남석이 방송에 나가고 길우성도 다른 아이돌의 뮤비에 출연하는 등, 언뜻 보면 그들만 수면 밖으로 나가는 걸로 보일 수 있지만, 그동안 다른 연습생들도 마냥 연습과 레슨만 반복한 건 아니었다. 

“야, 현우랑 승준이 오디션 합격했대!”

박현우가 월화드라마 주연의 아역 역할로 오디션 합격, 임승준은 케이블 드라마에서 한 작은 역을 따는데 성공했다.

같은 아이돌 연습생으로 시작해 하나 둘 방송에 이름을 올리게 되자, 그에 자극을 받았는지 다른 연습생들의 자발적인 연습 참여 빈도가 부쩍 늘어났다. 

“현우야 원래 아역배우 출신이고···, 유호 형도 지난 번 선배님들 곡 중 하나 작사 맡았었지? 다음 앨범 작업도 공부 겸 조금이나마 참여한다고 들었는데.”

“사람 수 적은데서 하나 둘 이렇게 빠지면, 끝까지 남는 자는 뭐가 된다?”

“루저?”

“으윽···.”

박현우가 거만한 표정으로 연습생들을 내려다보았다. 

“세금 바치는 것 외에 쓸모라곤 하나도 없는 서민들 주제에, 어딜 기어오르려고 하지?”

“야이 박현우 이 ㅆ···.”

“란 대사가 있더라, 내 대본에.”

“······.”

남자연습생들이 티격태격하면서도 평화로운 지하 연습실과 달리, 2층 사무실에선 직원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손님을 맞이하고 회의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와중에 매니지먼트팀 유재용 팀장은 보컬리스트 측의 연락을 받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유찬 씨!”

“네, 팀장님!”

“보컬 출연자들 광고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거에 대해 논의할 게 있다니까, 유찬 씨가 여기 전화해서 자세히 들어봐. 나는 지금 바로 출국해야 해서.”

“네! ···아, 그런데 내일 오후에 새 매니저들 면접 보러 오기로 했는데, 어떡해요?”

“스타일리스트팀도 신입 면접보기로 했으니, 김 팀장님이랑 잘!”

그렇게 각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다시 토요일 새벽.

<보컬리스트 시즌3> 2화가 방영되었다. 다음 날 집계된 시청률은 지난주보다 소폭 상승한 0.9%. 실검엔 JZ엔터 연습생들과 노래를 굉장히 잘 부른 팀이 올라갔다 사라졌다. 

어쨌든 서서히 반응이 올라오자, 보컬리스트 참가자들을 CF에 기용할까 망설이던 클라이언트 측에서 OK사인을 내렸다. 그러나 2차 본선에 오른 참가자들만 출연시키자고 했던 기존의 말은 번복했다. 

“JZ엔터 애들도 넣자고 했다더라.”

“1차에서 떨어졌는데도요? 뮤닷이랑 같은 그룹 계열사라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월요일. 한율과 차남석을 사무실 내 회의실로 부른 조유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만큼 인당 분량이 줄어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좋은 기회니까, 괜찮지?”

조유찬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강무기 팀장으로부터 한율이 매번 거부부터 한다는 언질을 들은 모양.

한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 그럼 이것부터 가볍게 살펴보고.”

조유찬이 두 사람에게 해당 회사와 광고할 제품에 대한 간략한 자료를 나눠주었다. 

“촬영은 늦어도 다음 주부터 진행하길 원한다고 하는데, 평일에 촬영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결석이나 조퇴를 해야 할 거야. 그땐 회사에서 학교로 직접 연락할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말고. 그리고 이번 주말엔 피부 관리 한 번 받으러 가자.”

“그런 것도 받아요? 전문적인 곳에서 받으려면 비싸지 않나?”

“그러니까 한 번. 음··· 어쩌면 한 번 더 받을 수도 있고?”

그러면서 조유찬은 또 다른 바인더를 내밀었다. 

“뭐예요, 이게?”

“너희 둘한테 따로 들어온 광고제의.”

“와우.”

차남석이 다급히 바인더를 펼쳤다. 첫 장부터 사진이 나왔다. 

“화장품이네요?”

“10대 남학생들 겨냥한 기초 화장품 광고. 중소 업체라 TV까진 힘들고 SNS나 인터넷 위주로 광고를 띄울 계획이라 하더라. 그리고 이쪽도 최대한 빨리 진행하고 싶어 하는 눈치야. 그래야 방송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

“아직 데뷔도 안 했는데 뭔가 많이 들어오네요. 시청률 바닥이라고 무시당하던데.”

“곧 죽어도 이게 다 방송의 힘이란다.”

“어째 이건 서한율 피부가 너무 좋은 덕에 들어온 것 같은데···.”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며 차남석이 중얼거렸다. 앞서 보컬리스트를 통해 들어온 음료 CF에 비해 화장품 쪽은 이미 콘티까지 다 나온 상태였다. 

한율도 옆에서 함께 자료를 보다가 물었다. 

“혹시 예선이랑 1차 결과 다 퍼진 거 아니에요? 우리가 2차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지 않고서야 이렇게 밀어붙일 리가 없을 것 같은데.”

“듣고 보니 그러네? 앞의 음료광고야 그러려니 했지만··· 진짜 그래요, 형?”

조유찬이 테이블에 올린 두 손을 깍지 끼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쪽에선 일단 아니라고 하는데··· 음. 솔직히 1차 본선 본 사람이 4백 명인데, 아무리 스포하지 말라 부탁했어도 전혀 안 퍼질 수가 없잖아. 방송 관계자까지 다 합하면 5백 명이 넘는데.”

“하긴···.”

“그리고 강 팀장님 말론 오늘 여덟 시에 너희들 특강있다던데. 중요한 거라니까 빠지지 말고 꼭 참석하고.”

“네에.”

8시에 잡힌 특별강의는 월말평가가 진행되던 가장 넓은 연습실에 남녀 연습생 모두 옹기종기 모아놓고 진행되었다. 외부 초빙강사가 와서 펼친 특별강의 주제는 <청소년 언어예절 교육>. 청소년 인성교육 중 한 갈래였다.

“요지는 이거네. 말에서 너의 인성이 다 드러나요, 그러니 바른 말 고운 말을 씁시다.”

“바른 말 고운 말 쓰라는 건 유딩 때부터 배웠는데, 그래도 지금 또 배워야 하는 거라면 늙어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 거 아니냐?”

“유딩 아니고 유치원생!”

“우리 내기할까? 지금부터 욕 쓰는 사람 건당 5백 원 빵!”

강의가 끝난 뒤 남자연습생 휴게실로 돌아가던 중 한 연습생이 큰 소리로 외치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가장 입에 욕을 달고 살았던 이가 곧바로 외쳤다. 

“거절한다! 애초에 욕먹을 짓을 안 하면 되지!”

“형은 칭찬할 때도 ‘잘했다 새꺄’라고 하잖아요.”

“어, 너 5백 원.”

“지금부터 시작된 건가.”

장난처럼 시작된 내기에 연습생들은 재밌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윽고 누군가 모든 남자연습생의 이름을 쭉 적은 A4 용지를 휴게실 벽에 붙였다. 

[욕 1건당 5백 원. ※증인 혹은 증거 필수!]

다음 날. 벽보 아래엔 속이 환히 보이는 야광 돼지저금통이 놓였다. 돼지저금통의 뚜껑은 본드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 

* * *

차남석은 눈앞에 놓인 준비된 액세서리를 보면서 해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핑크빛 모조보석이 박힌 꽃모양 브로치였다. 

“내가 잠시 우리 팀명을 잊고 있었다.”

“······.”

한율은 이동식 행거에 걸린 티셔츠를 슥 바라보았다. 새하얀 바탕에 한쪽 눈을 찡긋 윙크하고 있는 토끼 면상이 그려져 있었다. 이 꽃 브로치는 저 토끼의 한 쪽 귀에 달릴 예정이었다. 

“슬슬 옷 갈아입자. 브로치는 내가 달아줄 테니까 가만히 놔두고.”

스타일리스트가 행거에 걸린 토끼 티셔츠와 바지를 챙겨 두 사람에게 건넸다. 차남석이 먼저 터덜터덜 간이 탈의실로 들어갔다. 

현재 이곳은 뮤닷과 같은 그룹 계열사가 본사로 있는 한 음료 광고촬영 임시 대기실이었다. 촬영은 CG를 입히기 위한 스튜디오촬영과 야외촬영 두 가지로 잡혔는데, 오늘은 야외촬영만 진행하는 날이었다. 

장소는 온갖 아름다운 꽃으로 축제 중인 한 놀이공원의 식물원. 손님이 그나마 적은 평일 오전 시간이었다. 

“리허설처럼만 해주세요!”

길게 자란 아름다운 해바라기들 사이에서,  한율과 차남석은 서로에게 등을 비스듬히 맞댔다. 그리고 큐 사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에 들고 있는 비타민 음료를 들이켰다. 딸기향이 첨가된 밍밍한 맛이 식도를 적셨다. 

“···하!”

“컷. 한율 씨, 더 상큼하단 표정으로 웃어주세요! 남석 씨 브로치 위치 살짝만 조정할게요, 너무 반사돼서요!”

같은 장면을 각도 조정해서 찍고, 찍고, 또 찍고, 음료를 얼굴에 댄 채 웃고, 그 외 다른 여러 포즈로도 촬영하고. 

연기 자체는 감성소녀 뮤비를 촬영할 때와 비교하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뮤비 때와는 달리 이번엔 대사가 들어갔다. 

한율은 음료수를 가볍게 흔들며 부드럽게 눈웃음쳤다. 

“투명하게, 비타민.”

뒤이어 그 특유의 울림이 있는 중저음 목소리로 차남석이 턱 선을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 역시 음료수를 가볍게 흔들었다. 뽀글뽀글 투명한 기포가 올라왔다. 

“시원하게, 비타민.”

“컷! OK통과! 한 번 더 갈게요!”

···통과라며.

모순적인 감독의 외침에, 두 사람의 손에 들린 페트병이 살짝 우그러졌다. 

두 사람 분의 촬영이 끝난 후엔 장소를 이동, 다른 곳에서 촬영을 마친 참가자들과 합류했다. 

“미자 분들은 이쪽!”

그러나 제작업체 측은 참가자들끼리 만나서 인사를 나눌 시간도 주지 않았다. 놀이공원 측에서 허가받은 촬영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젠 이름도 안 불러주네···.”

<보컬리스트 시즌3> 2차 본선 진출자는 12명. 여기에 JZ엔터 연습생들까지 끼어 모두 14명이었다. 그 중 미성년자 출연자들은 아름다운 꽃나무가 심어진 인공 폭포를 배경으로 바위에 각자 걸터앉거나 섰다. 한율은 그 씬에서 17병째 음료를 마시며 방긋방긋 웃었다. 

‘배 터지겠네···.’

두 모금까지는 괜찮아도 그 이상 비어보이면 안 된다고 수시로 교체가 이뤄진 까닭이었다. 그럼에도 조금씩 마신 양이 적잖아, 위장이 온통 음료수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촬영은 쉬지 않고 진행된 덕에 오후 3시가 되기 전에 모두 끝났다. 제작업체 측이 부지런히 장비를 철수하는 가운데, 다른 참가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한율과 차남석은 근처 벤치로 가서 잠시 쉬기로 했다. 

“하···, 먹는 광고가 제일 힘들다더니···, 으윽······.”

차남석은 그대로 공원 벤치에 벌러덩 드러눕다시피 앉았다. 내내 촬영을 지켜보던 스타일리스트가 다가와 그 위로 양산을 씌워주었다. 한율은 스타일리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게요. 형은 다리 매너 좀.”

차남석이 팔자로 쭉 뻗었던 다리를 슬그머니 모았다. 그러곤 한율을 향해 볼멘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너만 쓰냐?” 

차남석의 몸 절반이 고스란히 햇볕에 노출되었다. 

“알아서 그늘 안으로 들어오시죠.”

“건방진 싴희.”

“누나, 들었죠? 남석이 형 욕하는 거. 나중에 증언해주세요.”

“너희들 아직도 그 내기하는 구나.”

“저기···.”

그때, 조금 전 인사를 나눴던 JZ엔터 연습생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오프닝무대를 꾸밀 때 차남석과 같은 팀이었던 고은훤이었다. 그 옆에는 고동 엔터의 안세현도 함께 있었다.

고은훤은 두 사람과 함께 있는 스타일리스트의 눈치를 슬쩍 보곤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

네 사람은 각자 회사 사람들에게 허락을 받은 후 근처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누가 봐도 아이돌 지망생처럼 생긴 소년 넷이 한 자리에 모여 있어서 그런지, 카페 직원들이나 손님들의 시선이 한 번씩 그들을 향했다. ‘어디서 봤는데···’란 표정으로 흘깃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계속 마시다 와서 그런지 딸기 주스가 안 넘어간다···.”

“저도요···. 속에서 안 받아···.”

“······.”

“다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와, 그런데 정말······.”

애꿎은 빨대만 한 번 씹었다가 놓은 안세현이 한율과 차남석, 고은훤을 쭉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웃으며 말했다. 

“진짜 셋 다 참말로 잘생겼네. 이대로 데뷔해도 되겠다.”

“하하···.”

고은훤이 머쓱해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내 자취를 감췄다. 심각한 용건인가. 한율은 앞에 놓인 키위 주스를 밀어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서요. 그게 뭐예요?”

“···한율 씨, 우리 팀 해원이 알죠?”

“편하게 한율이라고 부르세요. 네, 해원이 형이 왜요?” 

먼저 이야기를 들은 모양인지, 장난스럽게 웃던 안세현이 긴장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고은훤이 컵을 만지작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오프닝무대 연습 때···, 해원이가 안인섭이랑 친하게 지냈어?”

좋은 방법 같은데

한율의 머릿속에 안인섭이 유독 이해원에게 달라붙어 친한 척을 했던 모습들이 스쳤다. 당시 안인섭에 대한 소문을 아는 연습생들은 입을 다문 채 그와 거리를 뒀었다. 눈치가 빠른 몇몇 연습생들도 덩달아. 그러나 이해원은 1차 본선이 열리는 날에도 안인섭과 거리를 두지 않았다. 

이후엔 두 팀 모두 1차에서 떨어져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네, 제가 볼 때는요.”

“아······.”

고은훤은 고개를 숙이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세팅했던 머리가 다 엉망이 되었지만, 그는 한참동안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찡그리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현이한테 들어보니까, 처음 오프닝무대 연습 날 만났을 때 네가 안인섭에 대해 뭔가 아는 것처럼 선을 그었다던데··· 맞아?”

“네.”

“왜 그랬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그건 내가 설명할게요.”

가만히 듣던 차남석이 끼어들었다.

“내가 얘한테 안인섭 조심하라고 알려줬거든요.”

차남석은 한율에게 들려주었던 질이 나쁜 소문을 조용히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심각했던 고은훤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런 더러운 소문을 알고 있으면서, 그 새끼가 해원이한테 친한 척 하는 거 보고도 알려줄 생각은 안 들었던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안인섭과 얽히지 말라고 한 건 나예요, 형.”

고은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남석이 목소리를 더욱 낮게 깔았다. 말은 빨랐으나 발음은 또렷했다. 

“얘 이 바닥 들어오기 전이나 지금이나 이쪽에 아는 사람이라곤 쥐뿔도 없어요. 당연히 형네 엔터나 안인섭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고. 그러니까 얘 입장에선 둘이 원래 친한 사이였는지, 건너 건너 알고 있다가 프로그램에서 가까워진 건지 어떻게 알아요, 솔직히. 형 같으면 무턱대고 끼어들어서 ‘이 사람 소문 존나 구리니까 친하게 지내지 말아요’, 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

날카로워지려던 분위기가 그대로 무거워지며 짧은 정적이 흘렀다.

본래 목소리가 낮고 굵은 편인데다 또렷한 눈으로 상대방을 직시하기까지 하자, 고은훤은 차남석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고, 그 옆에 앉은 안세현도 안절부절못하며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한율은 새삼 놀란 눈으로 차남석을 보았다. 

이 녀석 지금 내 보호자 행세하는 건가?

“···후.”

차남석이 테이블 쪽으로 기울었던 상체를 떼어냈다. 

“죄송해요, 형. 조금 세게 말한 것 같네요.”

고은훤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네 말대로 한율이한테 뭐라 할 일이 아닌데···. 미안하다, 한율아.”

“괜찮아요. 그만큼 뭔가 일이 생겼다는 거잖아요. 안인섭과 관련해서.”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참가자들이 모였을 때 고은훤과 이해원은 가까이 있되 서로를 조금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한 바탕 언쟁을 벌인 사이처럼 어색해보였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가 생긴 지 얼마 안 됐어. 회사 규모도 작고, 연습생도 나랑 해원이 포함해서 고작 여섯 명 밖에 안 돼. 대표님은 본인이 돈이 많으니 당분간은 괜찮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음반 하나 제작하는 데에 몇 억이 훌쩍 들어가는데, 계속 돈만 까먹을 순 없잖아. 그래서 데뷔 전에 조금이나마 인지도를 쌓으면 나중에 도움 되겠지 싶어서 나랑 해원이랑 보컬리스트 출연하자고 한 거거든.”

고은훤은 작은 한숨으로 말을 쉬었다.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들이 고생 많았죠. 하필 제일 첫 타자로 무대에 올라가서 본보기용처럼 괜히 생트집 잡히고, 면박 당하고, 몇 시간 내내 계속 서서 웃고.”

“맞아. 진짜 너무 하더라.”

안세현도 속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훤이 쓴웃음을 지으며 컵에 담긴 빨대를 휘휘 저었다. 

“힘들긴 했지. 나중엔 얼굴 근육이 마비된 것처럼 웃는 면상이 안 풀어졌거든. 그래도··· 나름 각오하고 나갔던 터라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 TV에 나가는 거잖아. 그리고 오늘처럼 광고까지 찍게 되고. 그런데···.”

내쉬는 한숨이 더 커졌다. 고은훤은 자신을 주목하는 세 사람을 천천히 훑곤 멋쩍게 웃다가 눈을 흐렸다. 

“1차 본선에서 떨어지자마자 해원이가 그러더라. 회사를 옮기겠다고.”

“왜요? 안인섭이 꼬드긴 거예요? 자기네로 오라고?”

고은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서 처음엔, 대표님이 우리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방송 한 번 출연했다고 회사를 옮기겠다는 건 배신이나 다름없다고 막 뭐라 그랬거든. 그리고 안인섭네 회사도—.”

저도 모르게 언성이 커지자, 고은훤이 순간 말을 삼키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특별히 알려진 연예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 거기나 고만고만한데, 무슨 감언이설을 들은 건지는 몰라도 혹하면 안 된다, 이렇게 계속 설득했거든. 그러다가 얘기를 들었는데···, 안인섭이 그랬다는 거야. 자기네가 곧 데뷔하는데, 그 자금을 대주는 거액의 투자자가 뭔가 부족한 것 같다, 적어도 해원이처럼 외모 되는 애가 들어오면 좋겠다고, 해원이 너만 들어오면 바로 계약금 몇 억 받고 시작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했다는 거야.”

꾸욱. 테이블에 올린 주먹을 콱 움켜쥐며 고은훤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건 아무리 들어도 이상하잖아. 실력 그런 걸 다 떠나서 얼굴이 되니까 계약금 몇 억을 준다고?”

“그거 완전······.”

안세현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스폰······.”

“스폰서라고 다 나쁜 목적을 가지고 밀어주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인 게 이 바닥이잖아. 막말로, 데뷔한다 쳐도 성공보단 말아먹을 가능성이 더 큰데, 어떤 미친놈이 그런 데다 몇 십억을 쏟아 부어? 정신 나간 재벌이?”

“그리고 계약금도 결국 그걸 웃도는 수익금이 나기 전까진 족쇄나 다름없죠. 중간에 해지하려면 그 몇 배로 위약금을 물어야할 테고.”

“그래서 나도, 딱 봐도 구린 냄새 풍긴다고, 너 자칫하다간 데뷔고 뭐고 남창된다 그러면서 좀 심하게 얘기했거든. 그리고 대표님한테도 알려서 둘이서 계속 설득은 하고 있는데···.”

고은훤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 쥐어뜯을 것처럼 헝클었다. 차남석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이미 뭔가 먹은 모양이네요. 돈에 눈이 멀었거나.”

“아무튼 그래서··· 세현이한테 안인섭에 대해 물었더니 한율이 얘기를 하길래, 너무 답답해서 너희들을 찾은 거야. 하, 그런데 그 얘길 들으니까 진짜······.”

“해원이 형이랑 많이 친해요?”

“중2때부터 같이 춤추면서 붙어 다닌 게 벌써 5년째야. 그런데··· 이 미친 새끼가 말을 안 처먹는다, 진짜.”

가만히 자초지종을 듣던 한율은 키위주스를 들었다. 슬슬 한 두 모금은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은 방법 하나가 떠오르긴 했는데요.”

“어?”

“뭔데?”

세 사람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한율은 가라앉은 건더기를 빨대로 빠르게 저어 섞으며 대답했다. 

“군대 보내요. 그럼 뭐 어쩌지 못하겠지.”

“!!”

“와···, 어떻게 그런 극단적이고도 끔찍한 방법을······.”

“핸드폰 잠깐 빼돌려서 입대신청하면 되지 않나?”

“이 미친 서한율······.”

한율을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이 마치 끔찍한 악마를 보는 것처럼 변했다. 

“그러면 그쪽에서도 당장 해원이 형을 써먹는 게 힘들 것 같다 여기고 알아서 포기하지 않을까요? 그런 스폰서들은 화려하게 치장된 풋풋한 아이돌을 원하고 있을 테니까.”

“나는, 음, 영화나 드라마처럼 은훤이 형도 거기에 넘어가는 척 하면서 증거수집하고 터뜨리는 시나리오를 생각했는데···.”

안세현의 말에 차남석이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 영화나 드라마지. 현실에선 얼마나 위험한데.”

“그럼 정말··· 해원이를 군대로 보내버리라고?”

고은훤이 잘생긴 얼굴을 이상하게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한율은 키위주스를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본인을 속여 넘기거나 계약을 못하도록 시간을 끄는 등의 몇 차례 고비가 오긴 하겠지만, 결과적으론 안 좋은 곳에 빠지는 걸 막는 거잖아요. 군대 가서 정신도 좀 차리게 하고. 좋은 방법 같은데?”

“계약금으로 몇 억씩이나 부를 정도면, 스폰서는 물론이고 안인섭 쪽도 꼬리 잡히지 않는 데에 도가 텄을 거예요.”

차남석은 한율의 ‘군대나 보내버리자’는 의견을 아예 못 들은 사람처럼 고은훤에게 말했다. 

“그러니 최대한 설득해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땐 포기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냉정히 생각하면 결국 해원이 형에겐 형보다 눈앞의 돈이 더 중요하다는 거니까.”

“맞아요. 제일 친한 친구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귓등으로도 안 듣고 부득부득 가겠다는 거잖아요. 나 같으면 진작 버렸다.”

고은훤은 한참동안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는 웃음을 툭툭 터뜨리기도 했다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세 사람을 돌아보며 슬쩍 입가를 올렸다. 

“아무튼 고맙다. 형이 되어가지고 어린 너희들한테 이런 이야기나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기도 하고.”

“뭘요. 그리고 형도 아직 열아홉이잖아요. 빠른 생일이라 스무 살 취급받는 거면서.”

“뭐야. 우리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 거였어?!”

안세현이 충격 받은 표정을 지으며 고은훤을 휙 돌아보았다. 고은훤은 아직 한참 남은 주스를 마시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우웅. 차남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형. ···네, 이제 갈게요.”

“유찬이 형이에요?”

“어. ···그럼 우리 둘은 먼저 가볼게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 오늘 정말 고맙고 미안했다.”

“아니에요. 해원이 형 설득에 성공하길 바랄게요.”

고은훤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야지.”

두 사람과 짤막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 카페를 나온 한율과 차남석은 조금 전에 있었던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그늘이 진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조유찬이 보였다. 

차남석이 한율에게 넌지시 말했다. 

“너도 조심해. 언제 어디에서 그런 쓰레기가 너한테 접근해올지 모르니까.”

“괜찮아요. 절 꾀려면 세상과 버금가는 더 귀한 걸 내놓아야 할 테니까.”

덤덤하게 내뱉는 진심이었지만, 차남석은 아주 다르게 해석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말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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