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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리스트 시즌3> 공홈 게시판에 한 게시글이 올라왔다.
[보컬 참가자들 실제로 봤습니다*^ㅅ^*]
[ㅇㅇ공원 내 카페 알바생입니다.
출근 중에 우리 공원에서 누가 CF촬영을 하는 것 같기에 슬쩍 봤습니다. 그런데 바로 보컬 참가자들이 CF를 찍고 있던!!
아직 방송에선 예선이 안 끝나서 누구누구가 나오는지는 말 못하겠는데, 진짜 안구 정화 톡톡히 했습니다ㅠㅠ 그런데... 나중에 그 중 잘생긴 애들 넷이 내가 알바하는 카페에 들어왔을 때 레알 심장 떨어지는 줄Σ(๑°ㅁ°๑)!!!
하지만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지 넷이서 머리 맞대고 심각한 얼굴로 숙덕숙덕 거리더라구요... 나도 좀 껴주지ㅠㅠ]
-...이게 끝임?
ㄴ결론이 왜 이랙ㅋㅋ
-그게 누구누구였는데요? 네 명이면 밝혀도 되잖아요ㅠㅠ
ㄴ(게시자)말해도 되려나···. 꽃토끼랑
ㄴ!!!!
ㄴ꽃토끼 둘 다요?! 나머지 둘은요?!
ㄴ인증 없으면 뭐다?
ㄴ아 얘네 진짜 실물이 더 낫다던데··· 남석이도 존잘이고 한율이는 첫방때보다 키 더 컸다는 얘기도 들리고ㅠㅠ
ㄴ주문은 누가 했어요? 계산은??
ㄴ(게시자)한 달 후에 공개됩니다.
ㄴ야이 오류 먹은 수강신청 페이지 같은 사람아
* * *
다음 날, 스튜디오 촬영까지 무사히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조유찬이 룸미러로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너희들 오늘 감성소녀 컴백날인 거 알지? 여섯 시에 맞춰서 음원 공개, 뮤비 공개하면서 음방도 나온다더라.”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넷으로 봤어요. 뮤비 티저 컷도 띄웠던데.”
“봤어? 너희들도 나왔어?”
“아뇨.”
“이따가 홍보팀에 연락 넣어봐야겠네. 그리고 너희들 촬영할 때 보송에서 연락이 왔는데, 광고 촬영 날짜랑 장소가 정해졌단다. 날짜는 다음 주 목요일, 장소는 제주도. 하지만 수요일에 미리 내려가서 하룻밤 자고 촬영지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수요일 저녁 비행기랑 숙소도 다 잡아놨어. 괜찮지?”
한율은 며칠 전 보송화장품에서 보내준 기초화장품 세트를 떠올렸다. 10대 남학생 라인만이 아닌, 여학생 라인도 갖춰 WB래빗으로 잔뜩 보내왔다.
“제주도라···. 주원료가 제주에서 나고 자란 식물이라서요?”
그러면서 한율은 제주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한라산을 생각했다. 그곳 정상까지 올라갈 여유가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겠지. 아, 그리고 너희들 앞으로 어디 다닐 때 항상 행동 조심해. 인터넷에 너희 봤다는 목격담이 종종 올라오더라.”
돼지가 죽었다
오늘도 평화로운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지하 댄스연습실. 복도 저 멀리서 누군가 쿵쾅쿵쾅 시끄럽게 뛰었다. 이내 복도로 난 통유리 너머로 임승준이 나타났다.
벌컥! 임승준이 문을 열며 외쳤다.
“어떤 새끼야아!!”
“어, 욕했다. 임승준 5백 원···이 아니라! 뭐야! 돼지 왜 그래!”
씩씩거리면서 나타난 임승준의 손에는 등짝이 처참하게 반으로 갈라진 야광 돼지저금통이 들려있었다.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거나 이미 자율연습에 들어가 춤을 추던 연습생들이 일제히 입구로 모여들었다.
“수건으로 덮어져 있어서 이상하다 했더니, 어떤 새끼가 이렇게 등을 따놨더라!”
“미친.”
“와··· 거의 이마 위까지 차지 않았었나? 싹없어졌네?”
“가득 차면 다같이 ‘엄마손맛’ 가서 파티하기로 했는데···.”
털썩. 한 연습생이 무릎을 꺾으며 절망했다. 그 옆에 길우성도 함께 했다.
“내 새우버거 세트가 이렇게 허망하게······.”
임승준이 동전 한 푼 남지 않은 돼지 저금통을 흔들며 말했다.
“살아생전 돼지의 마지막 모습을 본 시간이 언젠지 한 명씩 불어봐.”
한율과 차남석이 돌아온 건 그 시점이었다. 다들 입구 쪽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어, 차남석이 임승준의 뒤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왜 다 모여있···. ···어?”
“좋아, 지금 온 얘네 둘은 일단 용의선상에서 제외. 어제 장쌤 손에 일본으로 끌려간 유호 형도 자동적으로 제외. 자, 이름순으로 길우성 너부터···.”
한눈에 상황을 파악한 한율은 임승준의 말을 잘랐다.
“통째로 훔쳐가지 않고 번거롭게 등을 갈라놓고 싹쓸이하려면 시간이 적잖이 걸렸을 텐데. 안 들킨 게 용하네요.”
“······?!”
“그럼 범인이 둘 이상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 한 놈은 망보고···.”
“뭐냐, 이거. 왜 갑자기 추리 만화됐냐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용의선상에서 제외된 한율과 차남석을 대표로 사무실로 보냈다. 등이 처참하게 갈라진 야광 돼지저금통을 본 강무기 팀장은 골치 아픈 얼굴로 슥슥 마른세수를 하다가 손을 내저었다.
“음···, 따로 알아볼 테니까 애들한테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전해. 그런데 얼마쯤 차있었던 것 같냐?”
“욕한 횟수를 기재한 표로 봤을 땐 대략 23만 원 정도요.”
“내기시작한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23만···. 후우, 어쨌든 알았다. 내려가 봐···.”
다시 지하로 내려갔을 땐 막 단체 댄스레슨이 시작되기 전이라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두 시간에 걸친 레슨이 끝나고 트레이너가 나가자마자 떠들기 시작했다. 조금 전 연습실에 없었던 다른 연습생들까지 가세하여 더 시끄러워졌다.
서로에 대한 의심을 거두기 위해 캐비닛을 모두 열어젖혀야 하지 않냐는 의견과, 프라이버시가 더 중요하다, 그게 오히려 의심한다는 증거다, 라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진작 다른 데로 빼돌렸거나 숨겼겠지, 멍청하게 그 무겁고 짤랑거리는 대량의 동전들을 캐비닛이나 가방에 뒀겠냐고.”
“상습 욕쟁이 몇 명은 지폐도 넣었거든?”
“다른 연습실 다 뒤져봤지만 없었잖아?”
“아니지. 여자애들이 쓰는 레슨실··· 그래, 지하 말고 다른 데다 둔 거면 어떻게 찾냐?”
“아니, 그럼 스케일이 너무 커지잖아.”
“23만 7천 5백 원이야! 그게 적은 돈이냐? 큰돈이지!”
“아이고, 내 새우버거······.”
한율은 절도사건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의심받는 라이언을 흘끔 살폈다. 라이언은 굉장히 우울해보였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중얼거리는 걸 자세히 들어보니 ‘불고기버거’를 읊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전혀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
‘용돈 받는 것도 없고, 알바도 전혀 못하고 숙식도 연습생 숙소와 회사에서 처리하느라 평소 먹고 싶은 게 있어도 돈이 없어 참는다 했었지.’
라이언에게도 야광 돼지저금통은 패스트푸드 파티를 위한 희망의 거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건 대부분의 연습생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무리 회사에서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해도, 학원비처럼 다른 부가적인 지출은 무시할 수 없으므로.
몇 달 동안 이들과 부대끼는 시간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건데, 지갑 사정이 넉넉한 연습생은 자신과 유호, 둘이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욕을 참지 못해서 23만 7천 5백 원이나 모인 걸 보면 우습기도 하고.’
“하암. 뭐, 알아서들 해. 난 피곤하니까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차남석···! 어떻게 네가···!”
“그래, 넌 방송도 나가고 CF도 찍고 왔다 이거지?!”
“네, 정산 받으려면 한~참 멀었구요.”
차남석이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나 먼저 간다.”
“저도 먼저 갈게요.”
한율도 차남석을 따라 연습실로 나갔다. 아무리 봐도 자율연습을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고, 이틀 연속 촬영하고 온 터라 여러모로 피곤했다.
저런 배신자들.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복도까지 새어나오기는 했지만, 딱히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한율은 야광 돼지저금통에 돈 한 푼 넣어본 역사가 없으므로.
* * *
“한율아, 오늘도 방송 안 볼 거야? 오늘 너희 팀 무대 나오는 날이잖아.”
씻고 나와 잘 준비를 하는 한율에게 모친이 물었다. 시간은 밤 9시 40분. 방송시간까진 세 시간 정도나 남았다.
한율은 피곤한 눈을 끔뻑거렸다.
“죄송해요. 어제 오늘 촬영했더니 좀 피곤해서···.”
모친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얼마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지 엄마도 잘 아는 걸. 그래, 우리 아들. 방송은 엄마아빠가 잘 볼 테니까, 푹 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방으로 들어간 한율은 불도 켜지 않은 채 곧장 침대로 몸을 날리듯 눕곤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 깊은 시간, 핸드폰이 여러 번 웅웅 울리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아주 푹.
-[써한율! 너 왜 이렇게 톡도 안 읽고 전화도 안 받냐? 혹시 잤냐? 어? TV에 나오는 놈이 잤어?!]
“아, 왜······.”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길우성으로부터 잔뜩 연락이 들어와 있기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길우성은 기가 찬다는 듯 한율에게 다다다 말했다.
-[인터넷 지금 난리 났다고! 방송 끝나자마자 어떤 새끼가 자기가 보컬리스트 출연자 중 한 명이라면서, 너 인성 어쩌고저쩌고 하는 글 올려서 장난 아니야, 지금!]
“······.”
-[여보세요? 써한, 듣고 있냐?]
“······아.”
-[이 자식, 본인 일에도 태평하게 잠드는 것 보소. 아오, 어쨌든 너 당분간 인터넷 들어가지 마. 괜히 열불 날 테니까.]
뚝. 전화가 끊겼다.
한율은 멍하니 핸드폰 배경화면을 바라보다가 포털사이트 앱을 눌렀다. [보컬리스트 서한율 인성]이 실검 7위에 떠있었다. 한율은 망설임 없이 눌렀다.
[현재는 삭제된 ㅅㅎㅇ 인성 폭로 게시글 원본 캡쳐본]
[안녕하세요, 저는 보컬리스트 시즌3에 출연했던 출연자 A라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는 건···, 우선 수많은 고민을 거친 끝에 나온 행동이란 걸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한율은 쭈욱 캡쳐본의 글을 읽으면서 천천히 눈을 끔뻑거렸다.
[S는 오로지 저만 무시했습니다. 처음엔 제 착각이겠거니 했습니다. 하지만 참가자들 중 유일하게 제 벗이 되어주었던 B군이 그러더군요. 자신이 저와 함께 있을 때마다 S가 눈치를 주었다고.
제가 아주 작고 힘없는 소속사, 그리고 외모도 실력도 안 되는 주제에 친한 척을 해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안인섭이 쓴 글이네.’
[저희 소속사는 가난해서 제작진 여러분들, 트레이너와 다른 참가자들에게 홍삼을 돌리지 못합니다. 멋진 프로필을 찍어주신 스튜디오의 수많은 분들에게도요. 하지만 그게 무시당하고 따돌림 당해야 마땅한 일인 걸까요?]
한율은 개소리를 슥슥 넘기고 댓글을 보았다.
벼르던 사람처럼 방송이 나갈 때 이런 글을 올린 걸 보면, 진짜가 아니겠냐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올린 이의 용기에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나 같아도 나 괴롭힌 인성 파탄자가 방송에서 잘 포장되는 거 보면 배알이 뒤틀릴 거라고. 여기에 편승해서 한율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날리는 악플러들도 많았다.
반면, 아직 한율의 입장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중립 기어를 박겠다는 댓글도 종종 보였다.
한율은 가볍게 전원 버튼을 누르곤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느긋하게 기지개를 켠 후 비실비실 방을 나섰다.
‘별 일 아니네.’
“내가 오늘 좌 대표를 만나서 확—!”
하지만 부모에겐 별 일이 아닌 게 아니었다. 아침부터 굉장히 분노한 부친은 조금 전부터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이번엔 모친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하게 현실적인 안을 내놨다.
“우선 은후한테 연락해서 법률 자문을 구한 뒤에.”
“전 괜찮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어떻게 신경을 안 쓰니?!”
“···회사에서 처리해 줄 거예요. 그래도 정 힘들면 그때 두 분께 도움을 청할게요.”
한율은 한참동안 씩씩거리는 부모를 달랜 후 자전거를 타고 WB래빗으로 향했다. 회사 앞에는 수상쩍은 사람 몇 명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한율은 익숙하게 입구 앞에서 끽 자전거를 세운 후 출입증으로 문을 열고, 그대로 슝 들어갔다. 물 흐르듯 빠르게 동작이 이어진데다 오늘은 미세먼지 탓에 마스크와 고글까지 써서 그런지, 누구도 한율을 알아보진 못했다.
“어? 혹시 앞에서 기자들한테 안 잡혔어요?”
“······?”
주말마다 자전거를 세워두는 로비 구석자리에서 헬멧을 벗는데, 주말에도 출근한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기자들이었어요?”
“네. 요즘 인터넷언론사나 그런 걸 표방하는 너튜버가 많잖아요. 기자 같지 않은 사람들. 같은 걸 돌려서 복붙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 해야 하나···.”
뒷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한율은 말없이 자전거와 헬멧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나마 오늘이 주말이라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아마 질 나쁜 기레기나 관종 너튜버 몇 명은 학교까지 찾아갔을 걸요? 어쨌든 공식 입장문이 올라갔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네, 감사합니다.”
새벽에 일이 터졌는데 벌써 공식 입장문이라. 행동력이 빠르네.
한율은 느긋하게 남자연습생 휴게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그러나 내려간 지 1분도 안 되어 길우성에게 잡혀 3층으로 끌려갔다.
“잠깐, 나 방금 휴게실에서 이상한 걸 본 것 같은데.”
“별 거 아냐. 죽은 돼지 머리에 검은색 테이프 두 줄 붙인 것뿐이거든.”
“······.”
“대표님, 써한율 데려왔어요!”
길우성은 대표실에 노크를 한 뒤, 대답이 들려오자 안으로 한율을 밀어 넣고 사라졌다. 다크서클이 눈 아래까지 내려온 좌기훈 대표가 자리에서 몸을 무겁게 일으켰다.
“어서 와라, 한율아. 자, 일단 앉아.”
한율은 좌 대표의 손짓에 따라 소파에 앉으며 그를 살폈다. 행색을 보아하니 밤을 꼴딱 샌 것 같았다.
“네가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좌기훈 대표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간밤에 너에 대해 악의적으로 이야기를 퍼뜨린 사람이 있어서, 회사에서 공식 입장문을 내놓았다. 그리고 우리 회사 일을 맡아주는 로펌에도 연락해, 할 수 있는 한 강력하게 법적 조치를 취하도록 할 거야. 허위사실 루머 생성자와 유포자, 악플러들까지 싸그리.”
“그렇게 까지요?”
대형 기획사도 고작 일방적인 인성 폭로 게시글에 이 정도로 발 빠르게 대처하진 않을 텐데. 그것도 한낱 연습생 일에.
그때 한율의 머릿속에 부친이 떠올랐다.
“저희 아버지 때문은 아니시죠?”
“음? 너희 부모님께도 죄송한 일이지. 귀한 아드님을 맡겨주셨는데 이런 일이 터지게 만들었으니.”
부친이 따로 연락을 한 건 아닌 듯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아직 모르는 모양.
“그리고 이건 회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그러니 한율이 넌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말고, 레슨이랑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생각해. 미워하고 싶어서 미움을 표출하는 못난 사람들보다, 널 믿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명심하고. 알았지?”
“네.”
“그래, 아침은 먹고 왔어?”
일어나는 좌 대표를 따라 한율도 일어났다.
“네. 그런데···.”
“음?”
“왜 묻지 않으세요? 그런 글을 올린만한 짐작 가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좌기훈 대표는 판다 같은 얼굴로 슥 미소 지었다. 그러곤 말없이 한율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짧은 면담이 끝난 뒤 한율은 혼자 3층 복도를 걸었다.
‘차남석에게 다 들었나? 아니면 조유찬?’
어서 와, 제주도는 처음이지?
10시에 진행되는 연기레슨 연습실. 한율이 들어가며 가볍게 인사하자, 다들 반갑거나 과도하게 미소를 지어주며 반겨주었다. 한율만 보면 일부러 눈을 마주치고 웃던 여자연습생이 특히.
한율이 자리에 잡자, 여자연습생들 간에 끊겼던 대화가 이어졌다.
“진짜 방송 한 번 타면 별의별 관종들이 다 달라붙는 것 같아.”
“예전에 미랑 언니는 학교에서 그냥 노래 들으면서 멍 때리고 있다가 누가 인사하는 걸 못 들었는데, 바로 다음 날에 후배 인사 씹는 인성 파탄녀라고 글 올라왔었잖아.”
한율은 그들의 잡담이 자신의 이야기로 파생되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피해자라 그러면 일단 믿어주니까 그거 이용하는 거지. 진짜 그런 것들, 지들이 한 만큼 열 배로 더 당해봐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그러다가 아니란 거 밝혀지면, 어? 아닌가 보다. 이러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 싹 닦고.”
“으, 소름 돋아.”
“사실은 조금 틀린데.”
가만히 듣던 길우성이 툭 끼어들었다. 어? 연습생들의 시선이 길우성을 향했다. 길우성은 안경을 고쳐 쓰면서 슬그머니 여자연습생들과 시선이 마주치는 걸 피했다. 귀를 발갛게 물들인 채.
“그 후배라는 것들이 예전에 누나 등 뒤에다 대놓고 ‘인터넷에 뜬 스폰받는 아이돌이 저년 아니냐’라고 한 것들이라서, 마침 이어폰도 끼고 있겠다, 일부러 못 들은 척 한 거···라던데.”
다른 연습생들까지 입을 쩍 벌리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더 분노했다.
“와, 뭐 그런 미친년들이 다 있어?!”
“미랑이 언니가 진짜 보살이었네. 나 같으면 바로 머리채 잡고 귀싸대기 날렸을 텐데.”
“그랬으면서 인터넷엔 그딴 식으로 글을 싸질렀다는 거잖아? 지들이 완전 피해자인 것처럼.”
“써한, 너 다음 주에 제주도 내려간다며?”
다른 연습생들을 분노하게 만들어놓고, 길우성이 대본에 낙서를 끄적이며 물었다. 한율은 다채로운 욕을 내뱉는 여자연습생들에게서 길우성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
“비행기 표랑 숙소는 다 잡았대?”
“어.”
“광고주 쪽이? 우리 회사가?”
“유찬이 형 말 들어보니 일단 회사에서 잡은 것 같던데. 왜?”
“아니, 그냥···.”
길우성이 말을 흐리면서 이번엔 괜히 대본을 팔랑팔랑 넘겼다.
“너도 가고 싶냐?”
예전에 길우성이 한율의 집에서 살았을 때 자연스레 알게 된 사실. 길우성이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아주 어릴 적 온가족이 제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그 뒤 예고로 입학하며 혼자 서울로 올라온 거라고. 그리고 종종 길우성의 집에서 택배로 귤을 보내주기도 했다.
“방학이니까 한 번 내려가 볼까 싶기도 하고···.”
그러나 웅얼거리면서 말하는 걸 보니 오가는 비용이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듯했다.
“한 번 팀장님한테 말해봐. 너 감소 뮤비 찍을 때 잘했다고 칭찬 받았었잖아.”
잠시 생각에 잠긴 길우성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것 같은데···, 정산 받을 정도로 큰돈도 아니고.”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했는지, 길우성은 레슨이 끝난 후 2층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먼저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있던 한율의 맞은편 자리에 식판을 들고 와 앉았다.
길우성이 우울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일 때문이 아니라서 회사에서 보내주는 건 자칫 편애 논란이 일 수 있어서 안 되고···, 대신 이번 출연료를 특별히 당겨서 지급해줄 순 있대.”
“그래서?”
티나게 시무룩한 표정을 짓던 길우성의 입 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니, 제주 흑돼지 묵어봤나?”
* * *
좌기훈 대표의 말처럼, 앞으로 소속 아티스트 및 연습생에 대해 악의적인 허위사실 생성자, 유포자, 악플러에 대해서도 강력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공식 입장문을 내놓자 무조건 폭로했던 사람을 믿고 함께 욕했던 여론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대신, 소속사 측에서 얼마나 당당하면 이렇게 빠르고 강하게 대처하겠냐는 의견과, 실제 한율의 지인이라 밝힌 사람들의 ‘애가 방송과는 달리 좀 무뚝뚝하기는 해도 그런 일로 사람 차별하고 무시하는 애는 아니다’라는 댓글의 공감 수가 높아졌다.
-그런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자칭 폭로자가 한 말 중에 ‘트레이너’라는 말이 있었잖아.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 트레이너가 들어갈 일이 있음?? 참가자들끼리 뭐 배우고 이러는 건 없지 않나? 방송 교육받음?
ㄴ1차 본선 방청하고 온 친구가 그러는데, 본선 오프닝무대로 참가자들 열 명씩 두 팀 해서 커버댄스 췄다고 함. 아마 그거 가르쳐준 사람 가리키는 거 아닐까 함.
ㄴ그렇다면 범인은 ㅅㅎㅇ이 있던 팀에···!
ㄴ자칭 폭로자 멍청 ㅇㅈ?
ㄴ그게 함정일 수 있지. 애초에 없는 말을 지어낸 ㅅㄲ데.
ㄴ크래 소속사에서 홍삼 돌린 건 사실이라고 하던데?
ㄴ누가 보면 진짜 뿌리달린 홍삼 돌린 줄 알겠네; 그 스틱으로 된 거 있잖아요, 인터넷으로 사면 개당 2천원도 안 되는 그거; 그거 한두 개씩 돌린 것도 그렇게 문제됨? 다른 소속사는 한 잔에 4, 5천 원씩 하는 커피 돌렸는데?
ㄴ왜 이렇게 잘 알아; 현장에 있던 자냐???
포털사이트엔 [보컬리스트 꽃을 단 토끼]가 실검에 슬쩍 올라갔다가 사라졌다. 자연스레 무대 클립영상 조회 수도 높아졌다. 노이즈 마케팅과 비슷한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월요일이 되어 학교에 가자, 아이들은 열폭하는 악플러들 따위에 지지 말라며, 무대 잘 봤다고 응원해주었다. 방학식 전날인 수요일이 이 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란 걸 알고는 미리 사진을 같이 찍자는 아이들도 많았다.
“우리, 수업 끝나고 서한율 송별회로 다 같이 라떼리아 콜?”
“미안. 레슨 시간 때문에 안 돼. 너희들끼리 놀아.”
“서한율···. 서한율 없이 서한율 송별회를 하란 거냐, 지금?”
“어.”
연예인, 특히나 아이돌일 경우엔 말 한 마디, 표정 한 번만 잘못 지어도 그걸 악의적으로 부풀리며 공격한다지만, 한율은 평소처럼 아이들을 대했다. 마지막 날인 수요일에도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덤덤하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마중 나온 모친의 차를 타고 귀가했다.
“친구들이랑은 인사 잘했어?”
“네.”
“섭섭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다음 학기부터 다닐 학교엔 우성이도 있고 남석이도 있어서 엄마는 솔직히 안심 돼. 같은 길을 걷는 친구들이 곁에 있는 게 여러모로 의지도 되고 좋잖아.”
같은 길.
한율은 쓴웃음을 지었다. 5년 후 갈라질 길 끝은 그들과 굉장히 요원해질 것임을 알기에.
“네.”
그날 저녁 한율은 짐을 챙기고 집에서 기다리다, 시간에 맞춰서 온 조유찬의 차에 올랐다. 차에는 차남석과 길우성이 먼저 타 있었다.
“하이, 써한.”
툭. 한율이 차에 타자마자 길우성이 천장의 조명 스위치를 껐다. 한율은 스케줄로 이동할 때 항상 스타일리스트나 샵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 앉아있던 뒷자리를 흘끔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른 분들은요?”
“다른 차로 가는 중이야.”
그렇구나.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별 생각 없이 안전벨트를 맸다.
“크큭.”
“······?”
길우성이 입을 주먹으로 꾹 누른 채 이상한 웃음을 흘렸다. 한율은 얘가 왜 이러나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흠칫 어깨를 굳혔다. 느낌이 이상했다. 아무도 없던 뒤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율은 뒷좌석을 휙 돌아보았다. 그 순간, 파란색 조명으로 물든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까꿍.”
“—어왓씨!”
한율은 알 수 없는 비명을 내뱉으며 가슴팍을 움켜잡았다.
“푸하핫! 나 서한율 저렇게 놀라는 거 처음 본다, 진짜.”
조수석에 앉아있던 차남석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파란색 라이트를 턱 밑에서 켠 채 나타난 박현우가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렸다.
“우리 싴크남 서한율 군, 괜찮아요? 많이 놀랐쬬?”
“하······.”
놀란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이런 장난을 칠 법한 어린아이들이란 걸 알면서도, 응징하고 싶은 충동이 욱하고 치밀어 오른다.
한율은 입을 다물다시피 한 채 박현우를 노려보았다.
“재밌어요?”
“써한, 여기 봐봐.”
길우성이 한율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운전석 뒤 구석을 가리켰다. 카메라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깜짜악!”
길우성이 두 손을 허공에서 휘리릭 말다가 활짝 펼쳤다.
“몰카!”
“······.”
한율은 말없이 손을 뻗었다.
“···—야, 그렇게 강제로 잡아당기면···! —유찬이 형! 써한이 카메라 망가뜨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