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영양실조란다.”
“누가요?”
부스럭. 차남석이 에너지 바 포장지를 뜯으며 말했다.
“아침에 쓰러진 애. 무리한 다이어트로 인한 영양실조 추정.”
한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말라서 뼈 밖에 없던데, 다이어트요?
“어.”
“뺄 게 어디 있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자연습생들은 몸무게가 40대 넘어가면 데뷔 포기했다고 보잖아.”
“키가 있는데 40대요?”
“170 언저리는 48, 165 이하는 44. 키가 160 아래면 40 초반이 이상적이라고 하던데. 우리 회사가 다른 곳처럼 체중 정해놓고 사람을 갈구진 않지만, 애들 스스로 맞추는 거지.”
한율은 기가 찼다. 무조건 체중이 적게 나간다고 능사는 아닐 텐데. 하물며 다들 한창 성장기 아닌가. 거기에 매일 레슨까지 받느라 운동소모량도 적잖을 테니, 그렇게 한 순간 전원이 나간 기계처럼 의식을 잃고 쓰러질 수밖에.
“이 정도 체중이나 몸매관리도 못하는데 누가 데뷔시켜주겠어, 뭐 이런 강박증? 이 바닥에선 흔한 일이지.”
“흔해요? 비쩍 마른 몸으로 다이어트 한답시고 굶다가 쓰러지는 게?”
“예전에 거식증 앓았던 애한테 들었는데, 정말 심했을 땐 거울만 보면 실제보다 20kg은 더 찐 것처럼 왜곡되어 보였다더라. 그게 또 역겹게 느껴져서 새모이만큼 먹었던 걸 또 토하길 반복했다고. 하지만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다 본인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길이잖아. 본인 눈에도 본인이 예뻐 보이길 바라는 마음에 노력하는 거고. 그 노력이 다 올바른 방법이거나 무조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단 게 문제지만.”
한율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 말았다. 입안에 넣은 에너지 바를 씹어 삼킨 후 차남석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돌한텐 특히 더 잣대가 가혹하잖아. 얜 눈이 좀 이상하다, 턱이 이상하다, 어느 부위가 못생겼는지 구체적으로 까고, 예쁘면 성형빨, 화장빨이라고 까고, 그것도 아니면 웃는 모습까지도 가지고 트집 잡아 까고, 조금이라도 군살 보이면 살쪘다고 뭐라 하고, 남돌은 그냥 뭉뚱그려서 ‘저 새끼 못생겼다’ 이러고 끝인데.”
“······.”
“그런데 너 정말 안 먹을 거냐?”
차남석이 박스를 잔뜩 채운 에너지 바와 사탕을 가리키며 물었다. 후드소녀가 차남석과 함께 먹으라고 준 선물이었다.
한율은 에너지 바 하나를 꺼내면서 화제를 전환했다.
“형도 그 얘기 들었어요? 다음 달 월말평가로 사실상 데뷔조가 정해진다는 거.”
“어.”
저녁을 먹을 때 연습생들이 웅성거리며 떠든 내용이었다.
지난 번 A&R팀 장 선생이란 사람과 유호가 일본에 가서 만난 사람이, 보이그룹 곡 전문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유명한 ‘레몬 사이다’였다고. 그러니 내년 봄에 데뷔시키기 위해 슬슬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넌 누가 뽑힐 것 같냐?”
“형이요.”
“그건 당연한 거고. 다른 사람.”
“유호 형도 유력하다던데요. 들어보니 스엔에 있다가 대표님 따라 여기로 옮긴 거라던데.”
“작곡, 작사, 프로듀싱도 배우고 있으니 유호 형도 유력한 후보지. 또?”
“길우성은 힘들까요? 여기 들어오자마자 계약서 썼다던데.”
“으음···.”
에너지 바를 씹으며 차남석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놈이 춤을 잘 추긴 하지. 애가 좀 멍청하면서도 해맑은 면이 있으니 나중에 예능 나가서도 뻔뻔하게 잘 할 것 같기도 하고.”
“라이언은요?”
“그 새끼 얘긴 꺼내지도 말—.”
욱하면서 받아치던 차남석이 황급히 말을 흐렸다. 그리고 내내 이 자리에 없는 듯 가만히 앉아 차를 마시던 보컬트레이너의 눈치를 살폈다.
보컬트레이너가 손을 내저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해. 아직 휴식시간 2분이나 남았는걸.”
“하하···, 네.”
차남석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남은 2분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나 오디션 보러 간다.”
보컬레슨이 끝난 후, 휴게실로 가자마자 마주친 길우성이 한율에게 선언했다.
“너도? 무슨 오디션?”
“너도라니?”
“드라마?”
“아닌데?”
“······?”
“M본부에서 기획 중인 댄스 오디션 프로그램. 보컬이랑 다르게 일반인 참가자도 받는데, 아직 데뷔 전인 연습생도 도전이 가능하대서 한 번 나가보려고. 강 팀장님도 OK하셨고.”
“그래, 잘해봐.”
무미건조한 대화를 툭툭 주고받으며 한율은 캐비닛을 열었다.
“너도. ···응? 넌 드라마 오디션 나가는 거 맞지?”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해서.”
“크으, 이렇게 하나 둘 각자도생하여 성공하는 건가!”
농담 어조로 말하며 길우성이 괴상한 포즈를 취했다. 다음 달 평가로 사실상 데뷔조가 결정된다는 이야기를 함께 들었는데도, 길우성에게선 초조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너랑 남석이 형 7월 월평은 어떻게 한대? 아직 안 받았잖아.”
“내일 따로 받기로 했어.”
길우성이 두 손을 양 허리에 올리며 거드름피웠다.
“그래, 방송타서 인기 좀 얻었다고 설렁설렁하지 말고 잘해. 알았어, 써한?”
“길우성 너나 잘해.”
“네.”
* * *
드라마 <하울링(가제)> 오디션이 진행되는 한 작은 소극장.
“240번 분까지 대기실로 들어와 주세요.”
회사 측으로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이 직접 들어왔지만, 한율 역시 다른 지원자들처럼 지원 서류를 내고 다른 지원자들과 섞여 번호표를 받아야 했다.
‘237’이라고 적힌 번호표를 만지작거리며 복도에서 대기하던 한율은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TV에서 스치듯 본 적 있는 기성 배우부터, 한 눈에 봐도 잔뜩 긴장한 초보들까지 아주 다양했다. 외양은 모두 10대 중반 내지 후반. 겉만 어려 보일 뿐 실제론 20대인 사람도 있을 테지만, 비좁은 대기실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지원자들 간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처음부터 예선 참가자들을 정해놓고 시작한 ‘보컬리스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한율은 빈자리에 앉아 다른 지원자들처럼 번호표를 가슴에 달았다.
‘배역은 한 자리. 지원자는 4백 명 정도.’
이것도 그나마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해야 한다’라는 조건이 붙어 경쟁률이 낮은 거라고 했다.
한율은 대기실 벽면에 큼지막하게 붙은 종이를 보았다.
[심사위원에게 선물 및 잡담 금지. 시도 시 즉시 탈락.]
“221번부터 230번 분까지 나와 주세요.”
스태프의 고지에 열 명의 사람들이 조용히 이동했다. 꼭 쥐고 나가는 대본은 대부분 너덜너덜했고, 펜으로 눌러쓴 자국이나 형광펜으로 그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반면에 한율의 대본은 몇 군데 간단히 메모한 것 외에 깔끔했다.
곧 나간 사람만큼 대기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순번에 따라 들어왔다.
“231번부터 240번 분까지 나와 주세요.”
한율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무대가 있는 장내로 이동했다. 무대 바로 앞에는 긴 테이블에 다섯 명의 사람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 뒤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231번 지원자가 가장 먼저 무대 위로 올라가 힘차게 자기소개를 하자, 그를 무색하게 만드는 심드렁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대본은 내려 놓으시구요. 38페이지 14씬 보여주시겠어요?”
“네!”
냉랭한 반응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지원자는 곧바로 감정을 잡고 연기에 들어갔다. 친구와 영어로 말다툼을 벌이는 씬이었다.
‘잘하네.’
양이 적잖은 대본을 당연하다는 듯 전부 외우고 왔다. 대사를 받아쳐 줘야하는 상대방이 없어 어색할 법도 하건만, 발음도 유창하고 표정도 좋았다. 그러나 연기가 끝날 때까지도 지원자를 지켜보는 시선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네, 잘 봤습니다.”
“51페이지 11번 씬도 잠깐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한 명 한 명. 누군가는 올라갈 때부터 삐걱거리더니 대사 한 마디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퇴장했고, 누군가는 한 번만 대본을 보면 안 되겠냐고 사정하고선 신들린 것 같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나온 건지, 엉망진창인 영어 발음을 당당하게 읊는 지원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심사위원들 표정엔 아무 변화가 없었다.
“다음 올라오세요.”
이윽고 한율의 차례가 되었다. 한율은 덤덤한 얼굴로 무대 위로 올랐다.
지금까지 단발성으로 연기를 펼친 프로필 촬영이나 뮤비 촬영, 과거 목숨을 걸고 연기했던 때와는 결이 다르다. 그리고 여섯 명 중에서도 한 두 명이 좋은 연기를 선보이는 걸 보니, 확률 상 자신이 뽑힐 일은 없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한율은 올라가자마자 대본을 바닥에 둔 후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237번 서한율입니다.”
“낯익은 얼굴이시네?”
소개를 마치자마자 연기를 시켰던 다른 지원자들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그러나 한 사람만 그럴 뿐, 제일 나이가 들어 감독으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이 딱 잘라 말했다.
“65페이지 씬13, 볼 수 있을까요?”
대본은 진작 다 외워 머릿속에 통째로 들어가 있었다. 65-13은 화면에 4, 5초나 나갈까 싶을 정도로 짧은 씬. 대사도 없었다.
혼자 있을 때,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다른 무리와 맞닥뜨려 골목으로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은 후, 돌아서서 가는 놈들에게 달려들어 그 중 한 명의 머리에다 벽돌을 내리치는 씬.
구타당하는 내내 쌓였던 살의가 폭발하는 장면이었다. 엇나가는 동안 마음속에서 일었던 수많은 갈등과 후회. 그리고··· 애초에 걸어온 길이 곧았다면, 부모가 나만 미국 땅에 던져놓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텐데, 하는 해묵은 원망도.
‘이런 역할의 오디션을 보라고 제안이 왔을 때부터 의아하긴 했지만.’
지금껏 한율이 TV에서 보인 이미지와는 정반대, 그것도 극단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장면이었다.
‘이것 봐라.’
고의가 틀림없었다. 지원 서류를 제대로 봤다면 연기레슨이라곤 소속사에서 받은 게 전부란 사실을 알 터.
<보컬리스트 시즌3>가 시청률이 바닥인 프로그램이긴 해도 아주 조금이나마 주목을 받은 인물이라 부르긴 불렀다만, 자신이 있으면 제안 받은 대로 지원을 할 테고, 방송 몇 번 좀 탔다고 기고만장해하고 있다면 오디션 자리에서 바로 눌러버리겠다는 심보 아닌가.
‘기대와 달리 잘하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다는 건가.’
오기가 생겼다.
한율은 저벅저벅 무대 뒤쪽으로 뒷걸음질 치다 풀썩 쓰러졌다.
다섯 명의 소년들, 그것도 갱단과 연결된 거친 소년들의 폭력은 무자비하다.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일 수 있다. 그리고 한율은 실제로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 다수에게 무참히 구타당했던 경험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생애 처음 순수한 악의로 저를 바라보던 그들의 눈빛과 당시 느꼈던 고통, 당하는 내내 치밀어 올랐던 스스로의 무력감에 대한 분노와 가해자들을 향한 살의.
쓰러진 한율의 몸이 전체적으로 떨리며 흉곽을 비롯한 호흡기관이 들썩거렸다.
“흐윽, 크······.”
폐가 있는 쪽을 잘못 맞아, 입의 상처에서 난 피와 섞인 호흡이 부글거린다. 눈 주변도 맞아 한 쪽 시야가 일그러졌지만, 놈들에게 치밀어 오르는 살의가 의식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초점을 잡으려 애쓴다.
‘내가 고작 네깟 쓰레기 새끼들한테 이런 짓이나 당하려고 여기에 온 줄 알아?!’
저항하느라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다친 손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누군가 밟아놔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에서도 날카로운 통증이 전달된다.
“흡······.”
그러나 돌아선 놈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콱 깨문 채 신음 하나 흘리지 않으며 조용히, 비틀거리며 낮게 몸을 일으킨다.
오른손을 뻗어 보이지 않는 벽을 더듬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바닥에 놓인 벽돌을 발견한 한율의 눈에 음험한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실제론 없는 그것을 움켜쥔 순간, 한율은 절뚝거리면서 가상의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빨리 이상을 눈치 챈 한 명이 고개를 돌리고, 한율은 시선이 마주친 찰나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한율의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번졌다.
이 순간, 벽돌을 맞은 이가 정말로 죽을 수 있다는 생각, 이후 더욱 심한 구타를 당하며 자신 또한 죽을 수 있다는 걱정 따윈 하나도 없었다.
—쿵. 무대라 생각보다 소리가 크게 울렸다.
온몸을 날려 벽돌로 가상의 상대의 머리를 내리친 한율은 앞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풀썩 꺾인 무릎과 달리 두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무대 위엔 상대방이 없지만, 연기 안엔 있으므로.
“하···, 큿······.”
사람의 머리는 굉장히 단단하다. 벽돌로 있는 힘껏 내리치면 손과 손목, 팔에도 강한 충격이 전달된다. 오른손목이 나가 꺾인 것처럼 덜렁거리고, 왼손은 바들바들 떨었다.
“크큭···, 콜록, 콜록!”
한율은 제 아래에서 쓰러진 놈을 꼴좋다는 듯 웃다가 가슴의 통증으로 괴로워하며 기침했다.
···허억. 그러다 뒤로 휙 머리를 젖히며 괴로운 숨을 토해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머리와 팔을 잡아당긴 것처럼,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중심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더 강하게 몰려오는 통증에 숨도 꺽꺽거렸다.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을 듯 흐릿해진 한율의 눈과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
“······.”
정적이 흘렀다.
외삼촌이 등장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휙, 툭툭.
연기를 마친 한율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자세를 바로하며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흐릿해졌던 눈도 또렷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장내는 조용했다.
왜 아무 말도 없지.
한율은 멍하니, 혹은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심사위원들에게 말했다.
“13씬은 이걸로 끝인데요.”
그제야 심사위원들이 서류에 황급히 뭔가를 끄적거리며 반응했다.
“···아, 네. 잘 봤습니다.”
“그럼··· 이번엔 22-3씬 볼 수 있을까요?”
이번엔 그나마 무난한 영어대사 씬이었다. 한율은 더 자신이 생겼다.
『이상하네···. 율아, 혹시 학교 영어선생님들 모두 텍사스 출신이었니?』
며칠 전, 대본을 봐준 모친이 한율의 대사를 듣곤 그날 바로 뉴욕 소년들이 나오는 다큐나 드라마, 영화 파일을 꼼꼼히 챙겨주었다. 한율은 밤마다 자기 전 그 영상들을 보며 ‘카우보이’ 억양을 교정했다.
“네.”
한율은 여유롭게 대답한 후 연기를 선보였다.
잠시 후, 네 명의 심사위원들이 ‘발음 괜찮네’, ‘영어 잘하네’라며 속닥거리는 와중에 한 중년여성만이 안경을 고쳐 쓰며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 씨, 영어 어디에서 배웠어요? 텍사스?”
“······.”
한율의 어깨가 살며시 처졌다.
‘역시 짧은 시간 안에 오랫동안 밴 억양이 교정될 리 없겠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다. 오디션이 끝난 후 한율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극장을 나서며 야구 모자를 눌러썼다.
올 때는 조유찬이 차로 태워다 주었지만 돌아갈 땐 알아서.
본래라면 확정된 배역의 면접도 아닌 이런 오디션장까지 매니저가 태워다주는 것도 사치였다. 정식으로 회사와 아티스트 계약이 된 상태도 아니므로.
‘그나저나 여기 진짜 더럽네. 어제가 금요일이어서 그런가?’
한 블록만 건너면 술집이 늘어선 거리라 그런지 길은 무척 지저분했다. 습하고 뜨끈한 기온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각종 악취까지.
디링. 미간을 찡그린 채 지저분한 곳을 피하며 걷던 한율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율과 차남석이 1차 본선에서 부른 곡의 전주였다.
더운 날에 지저분하고 악취까지 올라오는 길에 오래 머물고 싶진 않았지만, 한율은 작은 호기심에 소리를 좇아 발길을 옮겼다.
아직 오픈하지 않은 식당의 야외 테이블석. 작은 울타리로 둘러진 그 안에서 세 명의 남자가 한 테이블에 둘러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한 명의 기타 연주에 맞춰.
기타는 고작 몇 달 집중연습해서 친 한율의 연주보다 훨씬 능숙한 솜씨였다. 노래는 차남석과 비교하면 많이 밋밋했지만.
“아, 나도 걔네처럼 반반하게 태어났으면 TV에 쉽게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응, 안 돼~ 넌 안 돼~.”
그러나 음악은 노래를 부르던 이의 푸념에 급선회하여 즉흥곡으로 변했다. 기타를 치는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죙죙 현을 쓸었다.
“머리가 커서 안 돼~에~에!”
뚝.
“야이 시벌럼아!”
좡좡좡.
“비율, 도 망! 하느님 부처님 절 만드실 때 뭘 쏟으신 겁니까 오 마이 가쉬~.”
“피부도 더럽, 지! 술담배 못끊, 지!”
“내가 이 새끼들을 친구라고···.”
음악을 즐기는 친구들끼리 노는 모양이었다. 한율은 싱겁게 끝난 연주에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 골목 여기저기엔 밴드나 아마추어 극단의 공연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다. 나이트클럽 특유의 포스터를 패러디한 라이브 카페 전단지도.
‘재밌어 보이는 게 많네.’
5년 후엔 사라질 가능성이 높은 문화요소들. 멸망을 향해 치달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잡초처럼 꿋꿋하게 이어나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결코 쉽진 않을 것이다.
우웅. 그때 가방 안에 둔 핸드폰이 작게 울었다.
-[한율아, 안녕ㅎ]
“······?”
새로 바꾼 번호를 아는 건 부모와 회사 관계자들, 차남석과 길우성이 전부였다. 한율이 핸드폰에 저장한 연락처도 극소수. 이전 번호로 가입했던 메신저도 모두 탈퇴하고 새로 가입해, 친구 목록은 한 페이지 밖에 안 될 정도였다.
그러나 메시지를 보낸 낯선 이는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프로필 사진도 기본 이미지라 누군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디서 번호가 샌 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무시하려 할 때, 또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다.
-[나 박세은ㅎ]
···아.
며칠 전, 무리한 다이어트로 인해 영양실조로 쓰러진 여자연습생이었다.
‘내 번혼 어떻게 알았지.’
그 의문을 고스란히 적는데, 박세은이 한 발 더 빨랐다.
-[남석이 오빠한테 네 번호 알려달라고 부탁했어ㅎ 놀랐다면 먄ㅠㅠ]
토실토실하여 솜뭉치같은 토끼 캐릭터가 훌쩍거리는 이모티콘도 함께 올라왔다. 한율은 느려진 걸음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핸드폰을 두드렸다.
[괜찮아. 넌 몸은 괜찮아?]
-[ㅇㅇㅠㅠ 걱정 고마워ㅠㅠ 그리고 그날 나 쓰러질 때 잡아주고 업어줘서 고마워ㅠㅠ..]
-[실은 직접 얼굴 보면서 인사해야 하는 게 맞는데ㅠㅠ.. 팀장님이 회사에서 그러면 다른 애들한테 오해 산다고, 괜히 이상한 소문날 수 있으니 안 된다고 하셔서 톡으로 하고 있어...ㅠㅠ...]
-[전화는 내가 지금 목소리가 망이라ㅠㅠ..]
박세은의 메시지에는 중간 중간 솜뭉치 같은 토끼 캐릭터가 끼어 있었다. 메시지 작성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한율은 조금 기다렸다가 답변을 적었다.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걷다보니 어느새 버스 정류장이었다. 주로 떠든 건 박세은 쪽이고 한율의 대답은 길어봐야 다섯 글자 안팎이었지만.
-[아 이제 레슨 들어가야겠다. 나중에 또 톡해도 돼?ㅠㅠ]
[가끔이라면.]
-[가끔.....ㅠㅠ]
-[ㅠㅠ.....]
-[ㅇㅇ...ㅠㅠ.....]
왜 자꾸 울어.
한율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WB래빗이 위치한 동네로 가는 버스가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