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드라마 오디션 결과는 월요일, 회사를 통해 전달되었다.
결과는 탈락. 하지만 제작사 측에서 다른 배역으로 캐스팅하고 싶단 뜻을 전해왔다. 바로 주인공의 친구 역할로.
“주인공 중2병 시절 씬도 적은데 바로 그 시절의 친구 역할이라···. 미국에 가서 촬영하는 기간을 생각하면 영···. 그래도 기껏 좋게 봐주고 제안해준 건데 거절하기도 그렇고. 어떡할래, 한율아?”
“촬영이 언제 들어가는데요?”
“빠르면 2주, 늦어도 3주 후.”
“생각보다 촉박하네요. 원래 이렇게 급히 진행되는 거예요?”
“현지 로케는 그곳 사정에 최대한 맞춰야 하니까.”
데뷔조가 정해질 거라는 8월 월말평가 기간과 겹친다. 한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유찬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결정해야 돼요?”
“늦어도 오늘 오후까진 답변을 줘야지.”
“3층에 대표님 계세요?”
이럴 땐 혼자 부족한 정보로 계산하기 보단, 확실히 아는 윗대가리를 만나 묻는 게 더 빠른 법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네가 촬영 가있는 동안 평가에서 불이익을 당하진 않을까 걱정된다는 이야기구나.”
“네. 평가에 가산점이 될까 선택한 일 때문에 오히려 떨어지면 그만큼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웃으며 한율을 반긴 좌기훈 대표는, 8월 월말평가로 데뷔조가 결정된다는 소문의 진위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데뷔조 평가는 월말평가가 다가 아니라, 너희들이 그동안 얼마나 노력하고 증진했는지, 다른 아이들과의 호흡은 어떤지 다양하게 종합해서 결정되는 거니까.”
좌기훈 대표가 눈썹 끝을 내리며 웃었다.
“그리고 월말평가는 되도록 정해진 날짜에 다 같이 받도록 하곤 있지만, 네가 미국에 간다면, 남석이랑 촬영에 가있었거나 제주에 내려갔을 때 날짜를 미뤄 따로 보도록 한 것처럼 이번에도 그럴 거야. 화상 채팅으로 하든, 네가 직접 영상을 찍어서 보내든 그런 방식으로. 다만 지금 내가 걱정되는 건···.”
잠시 머뭇거리던 좌기훈 대표가 손끝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솔직히 말하면···, 한율이 네가 미국에 가게 되면 여기에 있을 때처럼 케어해주는 게 힘들 수 있어.”
중요한 역할도 아니고 조연의 조연같은 역을 하는 한율 한 사람을 위해 과도한 인력 비용을 지출하는 건 힘들다는 뜻이었다. 하물며 장소가 미국임에야.
“괜찮아요. 회사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말인데, 한율아.”
“네.”
좌기훈 대표가 책상 서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갈색 서류봉투였다. 그가 한율에게 봉투를 내밀며 은근히 웃었다.
“우리랑 정식으로 아티스트 계약을 하지 않으련?”
“······.”
역시 대표를 직접 찾아온 게 정답인 모양이었다.
* * *
좌기훈 대표에게 받은 계약서는 예전에 연습생 계약서나 CF 촬영 계약서를 받았을 때처럼, 부모의 손을 거쳐 변호사인 외숙의 손으로 들어갔다.
드라마 제작사 측과의 원활한 소통이나 업무를 위해선 출연 계약을 소속사가 맡아 처리하는 게 한율의 입장에선 여러모로 편하므로, 하루라도 빨리 계약서 검토를 마치고 도장을 찍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더니, 외숙이 직접 WB래빗까지 행차했다.
계약서를 받은 지 하루도 안 되어서.
“오오! 얘들이 크리스탈 래빗이야? 와~, 대한민국 미래가 밝다. 음! 밝아!”
외숙인 최은후가 로비에 걸린 대형 포스터를 보며 감탄했다. 한율은 그에게서 두 걸음 떨어진 채 생각했다. 어째 계약조항 세부조율은 핑계고 그냥 구경하고 싶어 온 것 같은데.
“대표님 사무실은 3층이에요. 따라오세요.”
“어? 온 김에 다른 데도 구경하면 안 돼? 안무 연습실이나 녹음실 같은 데. 나 그런 곳 정말 궁금했거든.”
“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 안 돼요. 따라오세요.”
“아무튼 저건 누굴 닮았는지···.”
외숙이 들으라는 듯 투덜거리며 한율을 좇아왔다. 그러면서 로비의 데스크 직원에게 영업용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표실에서 좌기훈 대표를 만나자 외숙의 영업용 미소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솔매 로펌의 최은후 변호사입니다. 여기 한율이의 외숙이기도 하고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대표 좌기훈이라고 합니다. 부모님 대신 외삼촌 분이 오신다고 하셔서 조금 의아하긴 했는데, 변호사셨군요.”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한 대표와 변호사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율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올라오기로 하고 대표실을 나왔다. 그러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2층 사무실에서 높은 여성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분명 여기 온다고 하고 나갔단 말이에요···! 그러니 한 번만, 아니, 제가 직접 둘러보면서 찾아볼게요. 네?”
“잠깐, 어머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중년 여성이 나왔다. 잔뜩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뒤따라 나오던 강무기 팀장이 한율을 발견했다.
“한율아, 혹시 고영이 못 봤니?”
“못 봤는데요.”
막 계단을 내려가려던 중년여성이 휙 몸을 돌려 한율에게 다급히 달려왔다.
“혹시 고영이랑 친하니?”
일그러진 표정이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어미와 같다. 그리고 사정을 들어보니 아주 틀린 추측도 아니었다.
이틀 전, 박고영이 같은 소속사의 친한 연습생들 집에서 머물겠다고 나갔는데, 어젯밤 이후로 소식이 뚝 끊겼다는 이야기였다. 박고영이 남긴 친한 연습생 연락처도 이곳 소속 연습생 연락처도 아니었고. 그리고 그 번호 역시 현재 꺼진 상태라고 했다.
“전에는 연락도 잘 되고 그래서 이번에도 괜찮겠거니 했는데···, 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강 팀장이 박고영의 모친에게 말했다.
“고영이처럼 아직 어린애들은 자율연습도 밤 10시를 넘기지 못하게끔 회사규칙으로 정해놨어요, 어머님. 당연히 여기서 자도록 두지도 않구요. 제가 다시 한 번 잘 살피고 애들한테도 물어볼 테니까, 어머님은 잠깐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주세요. 네?”
“흐윽······.”
다른 직원도 나와 박고영의 모친을 달래며 사무실 쪽으로 안내했다. 온갖 불길하고 끔찍한 상상이 이성을 좀먹고 들어가는지, 박고영의 모친은 넋이 나간 얼굴로 흐느끼며 비틀비틀 걸었다.
한율은 강 팀장과 계단을 내려가며 물었다.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낫지 않아요?”
“어머님이 오면서 하셨대. 한율이 넌 우성이랑 남석이한테 슬쩍 물어봐줄래? 뭐 들은 거나 본 거 없는지?”
소속 연습생이 연락 두절되어 부모가 직접 찾아온 상황이다. 이미 다른 연습생들에게 물어봤겠으나, 어른들에게 일부러 정보를 감추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당부였다.
그러나 지하로 내려갔을 때 강 팀장은 말을 바꿨다.
“아니다. 곧 있을 생방 무대랑 이런저런 촬영 준비도 해야 하는데. 한율이 넌 신경 쓰지 말고 연습에 집중해.”
드디어 마지막 화
[꽃을 단 토끼 서한율, SBC 1월 방영예정 드라마 캐스팅!]
[최근 <보컬리스트 시즌3>에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는 WB래빗 엔터테인먼트의 ‘꽃을 단 토끼’팀 서한율이 SBC에서 내년 1월 방영을 목표로 준비 중인 드라마 <하울링(가제)>에 캐스팅되었다.
서한율은 <하울링(가제)> 주인공으로 낙점된 이제설 분의 아역시절 친구 역할로, 곧 미국으로 건너가 촬영할 예정이라고 전해진다.
<하울링(가제)>는 수많은 명작 드라마를 탄생시킨 눈길 프로덕션의 이사문PD가······.]
-차남석도 어디 드라마 캐스팅됐다고 소문 돌던데.. 얘네 가수데뷔가 목표 아니었음? 웬 드라마??
ㄴ이런 애들 스리슬쩍 노선 갈아타는 거 한 두 번 보심?ㅋ 보컬 다른 상위권 애들한텐 뭐 별다른 소식 없나??
ㄴ배우 되겠다고 돈 수백 꼬라박고 공부하는 애들 박탈감 지리고요;;
ㄴ한율이도 회사에서 연기레슨 받음ㅅㄱ
-노래도 그냥저냥이던데 바로 이사문피디 드라마 캐스팅ㅋㅋㅋㅋㅋ역시 세상은 외모순ㅋㅋㅋㅋ
ㄴ그럼 고작 17살 연습생이 파리넬리처럼 부르길 원한거임? 배알 꼴리면 꼴린다고 솔직히 말해. 어린애한테 열폭하지 말고.
-그런데 ㅅㅎㅇ 인성논란 있지 않았음? 그거 어케 됨???
ㄴ허위사실 유포하면 골로 보내버린다고 회사가 엄포 놓으니까 급잠잠해짐.
-악플은 실시간으로 PDF따서 WB래빗으로 보냅니다. 그 못된 손가락들을 멈춰주세요☆
-우리 율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인터넷기사를 슥슥 훑던 좌기훈 대표가 투덜거렸다.
“아직 출연 계약체결도 안 했는데 대체 왜 벌써 이런 기사를 내보낸 거야, 상의도 없이! 괜히 우리 애만 욕먹잖아!”
그러곤 씩씩거리며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메일주소를 드러그했다.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던 기획홍보팀 강순철 팀장이 모니터 위로 고개를 빼들며 대답했다.
“눈길에서 자기네가 흘린 게 아니라는데요? 아무래도 투자자 쪽에서 흘린 것 같다고.”
“어, 그래요?”
좌기훈 대표는 바로 투쟁심을 가라앉혔다. 이 바닥에선 투자자가 갑 중의 갑이었다.
“그래, 이왕 터진 거 어쩔 수 없죠. 후······.”
“그럼 진위확인 문의는 일단 답변 보류할까요? 긍정하기엔 체결 전이고, 바로 부정하기엔 심기를 거스를 수 있으니.”
좌기훈 대표는 큰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 그때 신인개발팀 팀장 강무기가 노크 후 대표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심각한 강 팀장의 표정에, 좌기훈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강 팀장님. 무슨 일이에요? 고영이 찾았어요?”
“그게······.”
* * *
“어?”
연습생들 중 가장 먼저 이상을 눈치 챈 건 길우성이었다. 길우성은 무심코 지나쳤던 누군가의 캐비닛 쪽으로 상체를 휙 젖히며 더욱 큰소리를 냈다.
“어어?”
“왜 그래?”
단체레슨이 끝나고 휴게실에 줄줄이 들어오던 연습생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길우성이 자세를 바로 하며 캐비닛을 가리켰다.
“빡고 이름이 없어졌어.”
“뭐?”
“허얼?”
“뭐야? 얘 진짜 사고 친 거야?”
“바로 이름 뺄 정도면 뭔가 쳐도 단단히 쳤나 본데?”
“오늘 빡고네 엄마 찾아온 거 보고 뭔 일 날 것 같다 했더니···, 그래도 뺀 걸 보면 찾긴 찾았나보네.”
“······아, 빡고 폰 꺼놨어. 전화 안 받아.”
“아이고, 막내야. 대체 뭔 사고를 친 거냐···.”
한율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연습생들을 지나쳐 자신의 캐비닛을 열었다.
“이거 혹시 진짜 그 학원에서 나쁜 새끼들하고 엮인 거 아냐?”
“그런 듯. 착실하던 우리 막내가 변하기 시작한 게 그 학원 다니기 시작할 때쯤이었잖아.”
“에휴···.”
“유호 형 오면 섭섭하겠다. 그래도 빡고 제일 잘 챙겨줬었는데.”
“그것도 옛말이지. 전에··· 아, 아니다.”
“그런데 말이야, 전에 돼지 죽인 거··· 빡고는 아니겠지?”
“야! 사람 없다고 그렇게 바로 의심하는 건 아니지!”
“아니, 난 그냥···.”
“서한율, 바로 연습실 갈 거야?”
소란스러워진 가운데, 차남석이 다가와 물었다. 보컬리스트 무대 연습은 30분 후. 한율은 캐비닛에서 토끼가 그려진 보들보들한 다이어리를 꺼냈다.
“아뇨, 밀린 일지 좀 쓰고 가려고요.”
“연습 끝난 후엔 댄스연습?”
“그러려고요. 왜요?”
평소답지 않게 차남석이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중에 보자.”
“······?”
한율은 차남석을 의아하게 바라보다 캐비닛을 닫았다.
남자연습생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박고영이 회사를 나가기는 했지만 한율과는 별반 상관없는 일이기에, 한율은 평소처럼 차남석과 무대 공연 연습을 한 시간 동안 한 뒤 댄스연습실로 향했다. 그리고 두 시간 가량 자율연습을 한 뒤에야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휴게실로 복귀했다.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지하는 조용했다.
“어? 형 아직 안 갔어요?”
휴게실에는 차남석이 홀로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젖은 걸로 봐선 씻은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좀 검색할 게 있어서.”
“네엥.”
“야, 길우성. 너 우리학교에서 학폭하는 애 본 적 있냐?”
“아뇨? 우리학교가 어떤 학굔지는 형이 더 잘 알잖아요. 그런 짓 했다간 끽.”
길우성이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곤 바로 핸드폰을 가리켰다.
“바로 매장인데요.”
“그렇지?”
“캐릭터 연구?”
한율이 묻자 차남석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웬 캐릭터 연구? 형, 연기해요? 어디? 드라마? 영화?”
한율이 드라마를 찍게 되었다는 사실이 오늘 인터넷기사로 떠버리긴 했지만, 실은 회사 측에서 정말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진 되도록 알리지 말라 당부한 상황이었다.
“드라마. 너만 알고 있어. 다른 애들한텐 아직 말하지 말고.”
“오오오. 그런데 형 연기레슨···.”
“작년까지 받았었다고. 너도 쟤랑 같은 걸 묻냐.”
길우성은 흥미가 동했는지 아예 차남석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한테 비밀이면 형 대본리딩 연습은 어떡해요? 숙소에선 대본 꺼내면 안 되잖아요. 바로 들키니까.”
“그래서 내내 보컬 연습실에 처박혀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옷을 갈아입은 한율은 차남석을 돌아보았다.
“혹시 아까 단체레슨 끝나고 물어본 게 대본리딩 때문이었어요?”
“어.”
“트레이너 쌤은요?”
“쌤도 개별레슨 스케줄 빡빡하시잖아.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 따로 봐주실 순 있다곤 하는데···.”
“그럼 형도 이참에 연기학원 끊는 게 어때요? 안전하게 현우 형 다니는 데로.”
“······.”
차남석은 대답 없이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의견을 제시했던 길우성이 곧바로 목 뒤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아··· 학원비 비싸죠···. 음.”
“그냥 조금 이상하거나 어색하진 않은지 가볍게 체크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야. 꼭 전문가일 필요 없이. 어차피 전문적인 건 여기 쌤한테 봐달라고 하면 되니까.”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몇 달 간 붙어 다니면서 봐 온 차남석은 노래에 대한 욕심도 컸지만, 아이돌 데뷔를 목표로 둔 연습생이었다. 정말 노래만 부르고자 했다면 춤까지 그렇게 열심히 출 리도 없거니와 애초에 드라마 제안을 받았을 때 거절했을 것이다.
‘내가 데뷔 커트라인에 조금이라도 플러스 점수가 될까 하는 마음에 연기를 받아들인 것과는 지향점 거리 자체가 다를지도.’
“그런데 넌 씻고 갈 거냐?”
차남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화제를 전환했다. 길우성도 덩달아 일어났다.
“형 지금 가게요?”
“가야지, 그럼. 여기에서 자리?”
“그럼 이 야밤에 나 혼자 가야 되잖아! 안 돼!”
“나 먼저 갈게요.”
삐릭. 한율은 가방을 걸치며 문을 열었다. 차남석이 의자 아래에 뒀던 자신의 가방을 들었다.
“닫지 마. 나도 나갈 거니까.”
“앗, 조금만! 잠깐만 기다려! 나만 혼자 두고 가지 마, 이 매정한 싸람들아!”
“아, 배고프다.”
길우성 혼자 휴게실에다 버리고 나오며 차남석이 중얼거렸다. ‘아오, 나쁜 배신자들.’ 휴게실에서 길우성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복도까지 새어나와 웅웅 울렸다. 다급히 옷을 갈아입는지 쿵탕거리는 요란한 소리까지.
“선물 받은 거 다 먹었어요?”
“어떤 도둑놈이 하나둘씩 훔쳐 먹어서 진작 동났다. 분명 라이언 그 새끼 짓이야. 하··· 빨리 데뷔해서 그놈의 숙소 좀 벗어나고 싶다.”
“훔쳐 먹은 사람이 한 팀이 될 수도 있···.”
“다물어.”
서늘해지는 눈빛을 보아하니 이미 숙소에서 한바탕한 듯했다. 한율은 흘긋 던졌던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마저 말을 이었다.
“한 팀이 될 수도 있고, 그게 한 명이 아닐 수도 있고.”
“자꾸 재수 없는 소리 할래? 너도 한 번 거하게 털려봐야—.”
쾅. 계단을 오르는데 휴게실 쪽에서 굉음이 났다. 삐릭. 탁탁탁. 길우성이 씩씩거리며 맹렬한 속도로 두 사람을 향해 달려왔다.
“사람이! 어? 그렇게 기다려 달라 했는데! 어?”
빨리도 갈아입었네. 한율과 차남석은 동시에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형 결국 학폭 가해자 역할로 낙점된 거네요? 잘 어울린다.”
“···한 대 때려 봐도 되냐? 가해자 기분 좀 느껴보게.”
* * *
<보컬리스트 시즌3> 마지막 화 날짜가 성큼 다가왔다.
본래 자정이 넘은 시간에 방영하던 것을 몇 시간 앞으로 당겨 9시 30분부터 생방송으로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뮤닷 방송국 앞에는 오후 늦은 시간대부터 방청 신청에 성공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이전 방청 무대에 비해 참가자를 응원하는 각종 슬로건과 머리띠, 포스터를 든 사람들의 비율도 높아졌다.
한 방청객이 뮤닷 로고가 박힌 카메라가 다가오자 포스터 슬로건을 흔들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남석아 사랑해엑!!]
“······.”
“사랑한대요.”
‘꽃을 단 토끼’ 대기실. 바깥 상황이 실시간으로 나오는 TV를 가리키며 알려주자, 차남석은 붉어진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과연 처음 선물을 받았을 때 굉장히 좋아하며 사진부터 찍어대던 이의 반응다웠다.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넌 괜찮냐?”
바깥엔 차남석의 사진을 든 사람만큼이나 한율의 사진을 든 이도 적잖았다. [우윳빛깔 서한율♡] 머리띠를 달고 한율이 화사하게 웃는 포토 슬러건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한율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가슴 안쪽 깊은 곳을 찌르는 미약한 통증을 감추며.
“그래도 사람들 앞에선 좋아하는 티라도 내. 나중에 말 나와.”
“네.”
“대답만 잘하지···.”
한숨을 쉰 차남석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문득 한율에게 물었다.
“한 번 더 가볍게 연습···.”
“안 해요. 연습만 하다 정작 무대에서 진 빠진 모습 보이고 싶어요?”
두 번의 리허설을 한 이후에도 차남석은 대기실에서 몸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사실상 아이돌로 정식데뷔 전까진 이번이 마지막 무대라는 생각에 더욱 그런 듯했다.
“하··· 차라리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다.”
방송에 들어가기 전 처음 준비했던 건 네 곡. 촬영할 때마다 한 곡씩 소비하며 자연스레 남은 곡에 할당된 연습 시간은 늘었다. 그리고 2주 전부턴 두 곡 중 한 곡을 선택, 그 곡만 집중 연습했다. 버려진 한 곡에 그간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아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몇 달 동안 이어진 무대연습도 끝.
잠시 후.
“방송 30분 전!”
“뭐야, 벌써?!”
밖에서 스태프의 외침을 들은 차남석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다면서요.”
이젠 퍽 익숙해진 샵 직원과 스타일리스트가 두 사람을 다시 점검해주었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매니저 조유찬이 두 사람에게 일렀다.
“스트레칭 해, 스트레칭. 물도 천천히 마시고.”
똑똑, 벌컥. 카메라를 든 보컬리스트 스태프들이 들이닥쳤다.
“꽃토끼팀 인터뷰 할게요!”
참가자들이 마지막 무대에 오르는 소감을 인터뷰하는 동안, 4백 명의 방청객 입장이 모두 끝났다. 스태프들은 무대와 객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방청객들에게 유의사항 전달 및 리액션을 크게 취해주길 당부했고, 무대 뒤쪽 대형 스크린 구석에는 문자 투표 테스트 창이 자그맣게 떴다.
“생방송 10분 전!”
“후우······.”
대기실에 있던 참가자 여섯 팀이 무대 뒤로 모였다.
꺄아악! 돌연 객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참가자들은 그 비명에 어깨를 흠칫 떨었지만, 이내 서로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무대 대형 스크린에는 현재 채널에 송출되는 방송이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투명하게, 비타민.]
내가 데려왔는데
[상큼하게, 비타민.]
무엇 때문에 비명을 지른 건지 알게 된 까닭이었다. 평정한 상태였던 한율조차 손이 오그라들 것 같은 기분이 올라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앞으로 10분. MC와 심사위원들이 먼저 등장한 후에야 무대에 올라갈 수 있으므로 그보다 더 오랫동안 이렇게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여러 잡생각, 지금은 현재 나오는 비타민 음료 CF와 관련된 일이 떠올랐다.
1차 본선 방송과 맞물려 처음 저 CF가 나왔을 때 사람들 반응은 ‘오글거리지만 그래도 괜찮다’였다. 인기도 없는 프로그램 하나 찍고 CF까지 찍는 그들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게 자주 송출된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다음 주, 1차 본선 결과가 방송에 나가자 몇몇 사람들이 의문을 표했다. 본선 진출한 팀들만 있는 저 CF에 왜 탈락한 JZ엔터 팀이 끼어있는 거냐고.
‘뒤늦게 그들을 끌어들인 건 클라이언트였지만, 애꿎은 그들만 질이 나쁜 오해를 샀지.’
뭔가 모종의 뇌물 혹은 접대가 오간 거 아니냐며.
‘그러고 보니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기획사에서 나온 연습생들에게 접근해 안 좋은 곳으로 연결하거나 넘겨주는 브로커 역할을 하던 안인섭이 JZ엔터의 이해원에게 접근했다. 자기가 있는 회사로 옮기면 큰 계약금을 받고 데뷔할 수 있다고.
이해원과 오랜 친구이자 같은 팀이었던 고은훤은, 돈의 유혹에 거의 넘어가다시피 한 이해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데뷔 전, 조금이라도 자신들을 알리기 위해 방송에 나온 게 오히려 독이 된 셈이었다. 괜히 이상하고 더러운 오해를 사게 된데다, 한 명은 정말로 악취 나는 시궁창을 향해 후각 잃은 개새끼처럼 신나게 뛰어갈 판이 되었으니.
둥. 커다란 효과음과 함께 장내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드디어 <보컬리스트 시즌3> 마지막 화이자 생방송 무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