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검은색 테두리로 강조된 핑크빛 [♡꽃을 단 토끼♡] 슬로건을 든 길우성은, 암전된 스튜디오에서 유일하게 조명을 받으며 나오는 MC를 보며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기분이 이상하네.’
『그럼 안내해, WB래빗으로.』
미랑을 쫓아다니는 스토커로 오해했던, 수상하기 그지없던 첫 만남으로부터 고작 5개월. 기획사 오디션에서 동요 댄스나 추던 친구가 어느덧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생방송 무대에 서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방송이 끝나면 드라마 촬영 준비에 돌입한다.
본인 말로는 분량이 미미한 아주 작은 역이라 하지만, 서한율은 지난 몇 달 동안 보컬리스트 방송만이 아닌, 타 기획사 아이돌그룹 뮤비와 CF 2건을 촬영했다. 이건 갓 데뷔한 이와 비교해도 정말 빠른 속도로 이뤄낸 성과였다.
한 해에 데뷔하는 아이돌그룹은 수십 팀. 그 중 살아남는 팀은 극소수에 불과한 이 마당에, 데뷔도 하지 않은 연습생이.
‘그래서 안티도 많이 생긴 것 같긴 하지만.’
딱히 그에 관해선 걱정되지 않았다. 같은 열일곱 살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서한율은 멘탈이 단단하므로.
회사에서도 서한율만 봤다 하면 비꼬는 식으로 말을 하는 연습생이 있는데, 서한율은 자신을 돌려까며 시비를 걸고 있다는 걸 앎에도 표정하나 변하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정말 쌍욕만 안 할 뿐이지 말을 굉장히 심하게 해대서 나중에 괜찮냐 물어봤더니, 서한율은 지랄맞게 왈왈 짖어대는 개를 스쳐 본 사람처럼, 뭐 그런 사소한 거에 신경 쓰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걸 보면 천생 연예인 멘탈이긴 한데. 아니, 정치인 멘탈인가? 면전에서 욕을 들어도 타격이 없는 걸 보면?’
본인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은근히 승부욕 기질도 다분하여 뭐든 열심히 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실력 성장속도가 빠른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솔직히 조금 질투가 났다. 5개월도 안 되어 격차가 크게 벌어진 느낌에 초조함이 들었다.
내가 WB래빗으로 데려왔는데,
나보다 나은 건 노래 실력뿐이었는데.
『나도 같이 하자. 데뷔.』
『열심히 해. 네가 더 잘해야 같이 데뷔조에 들어갈 거 아냐.』
“으으음.”
“왜 그래?”
입을 꾹 다문 채 앓는 소리를 내자, 옆에 있던 유호가 길우성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 바로 어제서야 해외에서 수행을 마치고 돌아온 유호의 머리엔 [꽃보이스 차남석♡] 글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더 잘해야 하나, 이 생각하고 있었어요.”
“MBS 댄스 프로그램? 우승하면 되지?”
아주 쉽게 우승을 이야기하는 유호를 보며 길우성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우리나라에 춤 잘 추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괴물 크루 일원 한 명만 나와도.”
“대회 수상경력 있는 사람은 참가 불가잖아.”
“아뇨, 크루의 숨겨둔 비밀병기나.”
“그래서 자신 없어?”
“아뇨, 열심히는 할 건데.”
“우승을 목표로 할 거지?”
“그···? 그렇긴 한데··· 우승까진 힘들지 않을까···.”
“그럼 준우승이 목표야?”
“준우승도 좀···.”
“그럼 왜 나가? 열심히 한다는 모습만 보여주려고?”
“···어?”
길우성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냥··· 나도 뭔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청하기는 했지만, 어···, 솔직히는 깊게 생각 안 해봤는데.”
“한율이랑 남석이 보면서.”
유호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컬리스트 테마곡이 흐르며 심사위원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너도 지금껏 네가 해 온 노력으로 현재 어디에 설 수 있는지, 스스로도 확인해보고 싶었던 거 아냐? 그럼 된 거지.”
“······.”
“정말 ‘우승도 안 돼, 준우승도 안 돼’ 이런 생각으로, 그간 해 온 노력을 스스로 한 단계 깎아 낮춰놓고선 굳이 그 위치를 확인하려는 건 아니잖아.”
길우성이 심각한 얼굴로 유호의 옷을 콱 잡았다.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렵게 말하지 말아줘요, 형.”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그간 네가 했던 연습과 노력을 있는 그대로 보이면 된단 얘기야.”
“우승하라면서요.”
“네가 언제부터 내 말 들었다고.”
“어? 그러네?”
길우성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참가자 소개가 시작되었다. 지난 1차 본선 점수가 가장 낮은 팀부터 무대로 올라왔다. ‘꽃을 단 토끼’는 5등이었으므로 6등인 ‘흥보이즈’에 이어 두 번째로 등장했다.
꺄아악! 흥보이즈가 나왔을 때보다 조금 더 큰 함성소리. WB래빗 연습생들도 그에 가세했다.
“와아아아!”
“꽃토끼! 꽃토끼!”
“서한율 잘 생겼다아!”
“차남석 예쁘다아!”
길우성 또한 조금 전까지 했던 생각을 접고 꽃을 단 토끼를 향해 슬로건을 높이 흔들었다. 조금 질투가 나기는 했지만, 자신보다 앞서간다고 친구가 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써한! 잘 해에!!”
* * *
무대 순서는 등장 순서와 동일했다. 긴 서론에 이어 흥보이즈 팀을 제외한 다른 팀들이 무대에서 퇴장했다. 두 번째 순서인 꽃을 단 토끼 팀은 다시 무대 뒤에서 대기해야 했다.
“우리도 무대 끝나고 투표할 수 있나?”
“방송용 대기실에서 투표하는 장면도 나갈 거라고, 유찬이 형이 우리 둘 핸드폰 가지고 있다가 무대 끝난 뒤에 주겠대요. 그리고 스태프가 사인하고 카메라에 불 들어오면 문투하는 척 하라고.”
사실은 대기실에 있을 때 함께 들은 설명이었지만, 노래를 입속으로 흥얼거리며 집중하던 차남석의 귀엔 잘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차남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가만히 흥보이즈 팀의 노래를 감상하다,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소위 삑사리가 들린 까닭이었다. 음정도 불안했다.
‘리허설 때부터 목상태가 안 좋은 것 같더니, 결국.’
곧 무대가 끝나고 흥보이즈 팀이 내려왔다. 몇 가지 실수가 있긴 했지만 내려오는 그들의 얼굴은 후련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흥보이즈 팀이 말없이 씩 웃으며 한율과 차남석에게 손을 들었고, 네 사람은 바통터치를 하듯 가볍게 손을 부딪치며 방향을 달리했다.
“다음 순서는, 와아! 반응만 보면 벌써 데뷔한 아이돌 못지않은 것 같아요. 보니까 대형 포스터랑 응원 머리띠가 여기에서도 반짝반짝, 저기에서도 반짝반짝.”
MC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객석의 슬로건이 물결쳤다. 핸드폰으로 띄운 문구도 화려하게 깜빡거렸다. WB래빗 연습생들이 있는 곳은 아주 난리가 났다. 카메라가 스윽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 소년들의 꽃도 아름답게 만개해 반짝이고 있죠. —꽃을 단 토끼 팀 무대입니다!”
동시에 스튜디오가 암전되며 대형 스크린에 한율과 차남석의 프로필 사진이 떴다. 무대의 절반을 가리고 내려왔던 장막이 서서히 올라갔다. 커졌던 환호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장막 뒤에서 대기하던 한율과 차남석은 뚜벅뚜벅, 반짝거리는 객석을 향해 걷다가 약속한 위치로 갈라졌다.
대형 스크린엔 프로필 사진이 사라지고, 대신 별로 가득 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사각사각 효과음과 함께 곡명이 적혔다.
[꽃을 단 토끼 - One Thing]
[원곡 One Direction - One Thing]
원곡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전주가 흘러나왔다.
* * *
한율과 차남석에게 일명 ‘후드소녀’로 불리는 이아름은 불을 다 꺼놓은 방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엎드려 누워 있었다. 그리고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핸드폰 영상에 고정했다.
훌쩍. 이아름은 목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직접 가서 응원했어야 했는데···.”
지난번보다 방청신청 경쟁이 더욱 치열해져 실패하고 말았다. 부모님과 오빠, 동생의 아이디까지 총 동원했음에도.
이아름은 화면에 나오는 응원도구와 방청객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저 자리에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다 영상에 서한율과 차남석의 프로필 사진이 뜨자 히죽 웃었다. 사각사각. 꽃을 단 토끼 팀이 부를 곡명이 뜨고 무대가 시작되었다.
“······.”
이아름은 넋을 놓고 영상을 바라보았다.
예선과 1차 본선에서 꽃을 단 토끼 팀이 불렀던 발라드나 차분한 느낌의 곡과는 달랐다. 원곡은 모르지만, 10대 소년 특유의 경쾌한 에너지가 톡톡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습 또한 ‘내가 아이돌이다!’ 주장하듯 정말 화사하게 꽃단장을 하고 나왔다.
“이렇게 멋있게 하고 나오기 있기 없기···? 흑.”
먼저 노래를 시작한 서한율은 영상 하단 왼쪽에 자그맣게 나오는 가사처럼, 사랑을 고백하는 소년처럼 수줍게 미소 짓고 있었다. 뒤이어 노래를 받는 차남석 또한. 머리카락 사이로 슬며시 비치는 이어커프에 일순 시선이 빼앗긴다.
그리고,
[So get out get out get, out of my head!]
후렴구. 대부분의 아이돌 팬들이 풋풋한 남돌에게 바라는 이상적인, 순수하면서도 밝은 에너지가 화사한 봄꽃처럼 만개했다. 분명 더운 여름인데, 간질간질한 싱그러운 봄바람이 부는 듯했다.
정확한 타이밍에 서로를 바라보고, 눈빛 하나 동작 하나하나도 적절하게 어우러져 시선을 사로잡았다. 과연 이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수없이 반복연습 했을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어색함이나 망설임 따윈 전혀 없었다.
중간에 편곡으로 들어간 댄스 퍼포먼스 역시. 자신들은 단순한 보컬이 아닌, ‘아이돌’ 보컬임을 온몸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흐윽······.”
숨을 멈추고 있던 이아름은 무대가 끝나자마자 목으로 울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핸드폰에선 무대에 열광한 방청객들의 환호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아름은 사지를 파닥파닥 거렸다.
“이 쩌는 무대를 공연장에서 직접 영접했어야 했는데에···!”
퍽퍽. 매트리스가 흔들렸다. 그러나 곧 이아름은 정신을 차리고 벌떡 몸을 일으켜 노트북을 켰다. 부팅이 되기 무섭게 인터넷에 들어가 꽃을 단 토끼 팀의 무대 실시간 반응을 확인했다.
-얘네 라이브 맞음? AR 안 깐 거 맞음?
ㄴ퍼포 이후 호흡 좀 흔들리는 거 봐선 라이브 맞음ㅇㅇ
-서한율 노래 엄청 늘었네; 시원시원하네ㅋ
ㄴ원래 발성 자체가 나쁘지 않았음. 목소리도 좋고.
-남석이는 오늘도 존잘이었습니다.
-미모 미쳤따ㅋㅋㅋㅋ
-얘네 그냥 이대로 데뷔해도 될 듯. ㄱㄱㄱㄱ
-문투 올라가는 속도 봐라ㅋㅋㅋ문투 폭☆발☆
-아... 이건 아니지. 기생오라비 같은 것들이 이렇게 분위기 띄워놓으면 바로 다음 팀 발라드 어쩌라고ㅠㅠ;;;
ㄴ망해쬬.
ㄴ아직 고딩인 애들한테 기생오라비ㅇㅈㄹ
ㄴ아니 그런데 이러면 정말 빠순이들이 누구한테 몰표하겠냐고;
ㄴ괜찮음. 난 어린애들한테 관심 없음. 승허니만 있으면 돼.
ㄴ꽃토끼는 10대 애기들 취향이지. 신나긴 했다만.
ㄴ고맙다, 회춘시켜 줘서>ㅅ<ㅗ
이 외에 생각보다 잘했다는 선플도 많았지만, 이아름은 악플 언저리로 보이는 댓글마다 답댓글을 달았다.
-악플은 모조리 PDF따서 WB래빗에 보냅니다. 얍☆
미국 간다
한율은 평평한 바위 위에 편히 다리를 쭉 뻗은 채, 산과 어우러진 도시를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하···.”
눈을 감고 선선한 바람을 맞았다. 이렇게 조용하고 밝은 곳에 홀로 앉아있으니, 바로 어젯밤 올라갔던 <보컬리스트 시즌3> 마지막 무대가 마치 오래 전 일처럼 느껴졌다.
포털사이트 실검 말미에 ‘꽃을 단 토끼 One Thing’이 올라갔다 내려가긴 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그냥 연습했던 시간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건 성격상 견디지 못해, 되는 만큼 선보였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타인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든 상관없었다.
회사 관계자들을 제외하곤.
한율은 어젯밤, 잇몸을 만개하며 웃던 좌기훈 대표를 떠올렸다.
꽃을 단 토끼는 현장투표, 문자투표를 합산하여 6팀 중 3위를 했다. 부상은 마이크 모형 조각상 외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대표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거창하게 전체회식을 약속했다.
‘마지막 화 시청률이 1.4%. 순간 최고 시청률이 1.8%까지 올라가서 그런가?’
역대 <보컬리스트> 중 가장 높았다고 하니.
그래도 낮은 수치 아닌가? 순간 최고 시청률도 다른 팀이 나왔을 때 오른 건데. 하며 다른 잡생각을 하는 와중, 핸드폰이 울렸다. 차남석이었다.
-[어디야?]
“관악산이요.”
-[···진짜 산에 갔냐. 너 출국 날짜 나왔어?]
“다음 주 수요일?”
-[가면 언제 와? 다음 달 중순엔 돌아 오냐?]
“글쎄요. 제 위주로 촬영이 진행되진 않을 거라 장담은 못 할 것 같은데. 왜요?”
-[후우···.]
차남석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기 감독님이, 너 카메오로 나와 줄 수 있냐고 물어봐서. 일단 알았다, 나중에 보자.]
통화가 끊기고 시간이 떴다. 한율은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슬슬 집으로 돌아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다보면, 대본리딩 시간에 얼추 맞을 것 같았다.
* * *
<하울링(가제)>에서 한율이 맡은 배역은 대사가 열 개나 될까 싶을 정도로 비중이 적었다. 주인공의 아역 시절이 1화 밖에 되지 않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주인공의 아역 시절 역을 맡게 된 배우 윤상진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출국 전 한국에서 대본리딩 시간을 가져보는 게 어떻겠냐고.
주조연과 제작진들이 모두 모이는 공식 자리는 아니었지만, 몇몇 배우들과 조연출도 참석한다고 하여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주소는 여기가 맞는데.”
함께 온 조유찬이 핸드폰과 건물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간판이 없네.”
약속시간은 2시. 정확히 20분 전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때 묻은 안내판에서 [5F 어흥 엔터테인먼트]를 찾았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어흥 엔터테인먼트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활짝 웃으며 반겼다. 윤상진의 매니저라고 소개한 그는 두 사람을 내부 회의실로 안내했다. 소속된 배우가 열 명 안팎인 작은 회사였지만 사무실 한쪽 벽면엔 각종 트로피나 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모두 이곳 간판배우의 것이었다.
“괜히 회사로 오시게 해서 불편함을 드리는 건 아닐까 모르겠어요.”
“아닙니다.”
내부 회의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한율과 조유찬을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회의실 안에는 한율 또래의 아역 배우가 넷이나 와 있었다. 매니저 겸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도 셋. 사전에 연락받았을 땐 성인배우 두 명도 참여한다고 들었지만 아직 안 온 모양이었다. 조연출도.
윤상진이 직접 자신의 옆자리를 빼더니, 한율에게 손을 내밀며 다시 고개를 꾸벅였다.
“어제 무대 잘 봤습니다, 윤상진이라고 합니다.”
한율은 악수에 응하며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저기, 저 기억나세요? 오디션 볼 때 대기실에서 잠깐 같이 있었는데··· 하핫.”
그렇게 다른 아역배우들과도 통성명을 하고 나서야 한율은 자리에 앉았다.
“사실은 여기 주원이랑 저랑 친구거든요. 그래서 같이 대본리딩을 해보다가, 아예 아역들끼리 만나서 연습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연락드렸어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한율은 가벼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대본과 펜을 꺼냈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소녀 배우가 호기심가득한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제 무대요, 얼마나 연습한 거예요? 흥보이즈 팀 멤버들이랑 짝, 손바닥 치면서 지나가던데, 실제로도 친해요?”
그 모습도 방송에 나갔구나. 어쩐지 무대 뒤에도 카메라가 있더라니.
“진아야?”
한율이 대답하기 전, 강진아의 뒤에 벽에 기대고 서있던 여성이 낮게 깐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곤 한율과 조유찬을 향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어제 TV에 나온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애가 정신을 못 차리네요.”
“뭐 이런 것도 못 물···.”
“쓰읍.”
눈매가 닮은 걸 보아하니 모녀사이인 듯했다. 강진아는 꾹 다문 입을 삐죽거렸고, 윤상진은 한율에게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도 강진아의 모친에게 비슷한 경계를 받았다는 듯.
“리딩은 딱 2시 되면 있는 사람들끼리 먼저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아, 뭐 좀 드시겠어요? 이 건물 뒤쪽에 카페가 있는데, 커피 빼곤 다 맛있어요.”
“······?”
한율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깜빡였다. 카펜데 커피 빼고 다 맛있다고?
“안녕하십니까!”
그때 누군가 사무실로 들어오며 걸걸한 목소리로 크게 인사했다. 또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윤상진의 매니저가 문을 활짝 열며 나갔다.
“어서 오세요, 이쪽입니다.”
윤상진은 본래 아역배우들만 모여 연습하려고 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합류하고 싶다고 한 성인배우들이었다. 두 사람의 양손엔 음료수와 간식거리가 잔뜩 담긴 봉투가 들려있었다. 곧 조연출도 도착하여, 대본리딩이 시작되었다.
공식적인 리딩자리는 아니었지만, 리딩이 시작되자 조금 전까지 어색하게 웃거나 잡담을 나누던 배우들의 표정이 일제히 진지해졌다. 조연출이 이곳에 없는 배역의 대사를 무미건조한 톤으로 쳤지만, 그에 흔들리는 사람도 없었다.
[마틴 그 새끼가 꼰지른 게 틀림없어! 빌어먹을 개만도 못한 새끼!]
“진정해, 강도준. ···저 새끼들 다 듣고 있다고.”
대본리딩은 앉아서만 뿐, 정말 실제로 연기를 한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대본리딩을 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한율은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회사에서 레슨도 받고, 차남석의 상대를 해주었기 때문일까.
[내 앞에서 한국말하지 말랬지?! —아악! 씨발! 씨발!]
윤상진이 내뱉는 욕이 회의실 가득 쩌렁쩌렁 울렸다. 밖에서 들으면 정말 외국인 소년 하나가 미쳐 날뛰는 줄 알 터다.
‘카메라 앞에서도 이렇게 잘해주면 순조롭게 진행되겠는데?’
한율은 그렇게 생각하며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미친 새꺄, 그만 하라고! 총맞고 뒈지고 싶냐?!]
“—아가들아아! 너희들 한국인 맞지이?”
성인배우의 걸걸한 목소리가 걸쭉하게 늘어지듯 울렸다. 대중에게 그리 알려진 배우는 아니었지만 연극만 15년 넘게 했다는 베테랑다웠다. 목소리가 정말 멀리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며 말하는 듯 했다.
[뭐야, 저 꼰대새낀?]
“내가 이 동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한데에.”
“···그냥 가, 상대하지 마.”
한율은 잠시 쉰 뒤 영어로 외쳤다.
[가자고, 그냥!]
[씨발, 내가 왜 피해야 되는데?! 놔 봐.]
“야, 강도준! ···강도준!”
멀어지는 친구를 더 소리 높여 부르던 한율은 질렸다는 얼굴로 대본을 노려보다가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 한 번 뒈져봐야 정신을 차리지.]
이것으로 한율의 분량 절반이 채워졌다.
‘이렇게 보니 정말 적긴 적네.’
이후 한율은 자신의 대사가 없는 씬에선 조연출 대신 몇 가지 배역의 대사를 대신 쳐주기도 하면서 리딩을 이어갔다. 주로 현지인 배우를 쓰기로 한 배역의 영어대사를.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후 5시. 사전에 정한 연습시간이 끝나고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는 일단 저녁 먹으러 갈 건데, 안 바쁘시면 같이 어떠세요?”
윤상진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한율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사에 가봐야 해서요.”
“그렇구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럼 다음은 미국에서?”
“네.”
다른 사람들과도 일일이 인사를 나누며 한율은 칭찬도 들었다.
“발성이랑 딕션 정말 좋던데? 나중에 미국에서 봐, 한율아.”
“네, 그때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함께 어흥 엔터를 나온 사람들과도 재차 건물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조유찬의 차에 올라탔다. 한율은 나지막하게 한숨 쉬며 안전벨트를 맸다. 어째 대본리딩을 할 때보다 인사하는 데에 에너지가 더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
“왜요, 형?”
시동을 건 조유찬이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조유찬이 슬슬 차를 몰며 운을 뗐다.
“한율이 너 연기 잘하더라.”
“이제 와서요?”
“아니, 난 너 연기하는 거 뮤비 찍을 때 빼곤 한 번도 본 적 없잖아. 그래서 많이 놀랐어. 사실 눈길에서 연락 왔을 땐 그냥 ‘잘했나 보다’ 이렇게 막연히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까 윤상진한테 하나도 안 밀리더만. 영어도 엄청 잘하고. 너 정말 유학 안 갔다 온 거 맞아?”
“대한민국 밖을 나가본 적이 없어요, 전.”
한율은 속으로 진실을 덧붙였다.
이 몸으론.
“그런데 회식으로 뭐 먹는대요?”
“회.”
한율의 입가가 굳어졌다.
3년 전, 부친이 회를 포장해서 사온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 한 점 먹은 이후론 다신 입에 대지 않았다. 익힌 생선은 괜찮지만 날생선은 별로를 넘어 싫었다. 그냥 싫었다. 그 씹는 식감이.
“왜? 회 싫어해? 하긴, 너희 나잇대는 그다지 안 좋아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꽃게탕이나 고등어구이, 튀김 뭐 이것저것 다른 것도 많이 나오니까 괜찮을 거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