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427)

* * *

간밤에 WB래빗 엔터테인먼트 공식 SNS에 올라온 서한율의 사진. 한국시간으로 아침이 되었을 때 즈음, 댓글에 짤막한 인사 한 줄이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

이 사진 게시글을 기웃거리던 사람들은 이 댓글을 보고, 정확히는 이 인사를 올린 계정 이름을 보곤 앞 다퉈 해당 계정을 눌렀다. 그리고 계정 주인이 올린 단 한 장의 사진을 보며 ‘진짜다!’라고 외쳤다. 

현재 본인이 아니라면 올리기 힘든, 뉴욕의 야경을 배경으로 찍은 셀카인 까닭이었다. 그것도 막 씻고 나온 수수한 모습으로. 

[아직도 셀카는 어색하네요 :) 이번에 M본부 댄스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는 친구가, 다가올 생일을 기념해서 뉴욕에서 응원 메시지를 보내달라고 해서 올립니다. 이상한 놈이에요. 생일을 맞는 건 걔가 아니라 전데 말이죠. 시간여유 되시는 분만 냉정히 보시고 얘보다 잘하는 분에게 투표해주세요. (링크주소 www.m······.)

그럼 다들 즐거운 주말되시길!]

[#보고있냐길우성, #본인일은스스로알아서잘하자길우성]

-엉어ㅓ어엉 여러분 우리 한율이가 드디어 SNS를 시작했어요ㅠㅠ!!! 고마워요 길우성씨!! 

-아니왴ㅋㅋㅋㅋ 한율이생일인데 왴ㅋㅋ 생일기념으로 자기를 응원해달랰ㅋㅋㅋ 보통 반대 아니냐고욬ㅋㅋㅋㅋ

-그래도 친구 응원해주려고 SNS계정도 만들고ㅠㅠ 마음 따뜻한 우리 한율이 찐우정ㅇㅈㅠㅠ♡♥♡

-역시 어젯밤에 올라온 사진의 상처는 분장이었구나ㅠㅅㅠ 다행이다흙으윽흐윽ヾ(´;ω;`)ノ

-님들! 한율이 생일이 며칠 안 남았어요!! 

-사라진 응원의 행방을 찾습니다...

ㄴ잡았다 이상한 분. 

즉각 올라오는 여러 사람의 반응을 보며 한율은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핸드폰 전원을 가볍게 누르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새벽부터 일찍 일어난 탓에 너무 졸렸다. 

‘내일은 촬영이 없으니 월말평가로 보낼 춤이나 연습하고···.’

의식은 생각에서 수면으로 곧장 전환되었다. 

다음 날. 한율은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뒹굴거렸다. 춤과 노래를 연습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호텔에서 쿵쾅거리며 시끄럽게 굴 수는 없으므로. 

그러나, 

-[촬영이 앞당겨질 수도 있으니, 일단 나와서 대기하고 있는 게 좋겠대.]

조유찬을 통해 들어온 통보에, 한율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야했다. 

“이제 두 씬 남았나?”

“아뇨, 세 씬.”

잡담이 오디오에 잡히지 않도록, 한율은 조유찬과 함께 촬영장 뒤쪽에 멀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현재 촬영 중인 씬은 한국에서 온 수상쩍은 인물들과 갱단이 모종의 거래를 하는 현장. 김은호가 절대 나타날 리 없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 씬 촬영이 끝나고 장소를 이동할 수 있기에, 왜 불렀냐 구시렁거리기엔 일렀다. 도착하고 보니 촬영장엔 당장 투입되지 않을 법한 다른 단역배우들도 여럿 대기 중이었다. 부르기 전까지 근처 다른 장소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어도 되지만, 여러 이유로 그냥 있는 사람들. 

“강도준이랑 같이 다니는 학교에서 한 번 잡히고, 강도준을 찾으러 온 경찰과 만나는 씬, 마지막으로 갱단에게 소집되는 씬.”

“아··· 학교 씬도 있었지? 그럼 주인공이랑 만나는 장면은···.”

“학교에서 박차고 나가는 주인공 뒤통수 보는 장면 빼곤 없어요. 형도 대본 봤잖아요.”

“보긴 봤는데···.”

조유찬의 표정이 흐려졌다. 

“막상 촬영하는 걸 보니 참 분량이 적다 싶어서. 어제도 그렇게 잘했는데 너무 짧게 끝나서 좀 허무했고. 그럼 남은 대사는?”

“경찰 대면씬에서 세 줄, 갱단 소집씬에서 한 줄.”

“성공하자, 한율아.”

조유찬이 분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한율은 얘가 왜 이러나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를 이동한 뒤에도 대기시간은 한없이 길었다. 결국 한율은 스태프에게 양해를 구한 뒤 촬영장과 조금 떨어진 뒤쪽에 의자 하나를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핸드폰을 세웠다. 

8월은 본래 그룹댄스 평가가 있는 달이고 댄스트레이너가 어떤 곡의 안무를 출 지 지정해준다. 그러나 평가가 있는 날 높은 확률로 뉴욕에 있을 것 같다고 하자, 트레이너는 한율에게 한 보이그룹의 안무 영상을 보냈다. 그리고 한 멤버를 콕 집어, 

『한율이는 이 분 파트. 다른 멤버들이 있다는 가정 하에 동선까지 정확히 연습할 것.』

혼자 있더라도 그룹댄스를 추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다행히, 예전에 길우성에게 배웠던 안무였다. 

거울까진 빌려오기가 힘들어, 한율은 음악소리가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켜놓은 후 동영상 녹화 버튼을 누르고 춤 연습을 시작했다. 

음악소리는 작아도, 파워풀하면서도 절제된 것이 특징인 안무였다. 처음 댄스를 배울 때만해도 재롱을 부린다고 생각해, 내가 대체 뭘 하는 걸까 현타도 많이 맞았었지만 지금은 퍽 익숙해졌다. 

한율이 춤 연습을 시작하자 당장 할 일이 없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한율을 향했다. 한국이었다면 차량이나 근처 아무 곳에서나 대기하고 있었을 배우들도, ‘왜 사람들이 뒤쪽을 보지?’ 하면서 어슬렁어슬렁 와서 구경했다. 심지어 무슨 촬영 중인가 하면서 구경나왔던 현지인들도 슬쩍 그들 틈에 끼었다. 

“어우, 쟤 잔망스럽게 웃는 거 봐.”

“진짜 아이돌은 아이돌이네. 어떻게 몸이 저렇게 움직여?”

“아직 정식으로 데뷔는 안 하지 않았어요?”

“저러다 관절 나가겠다···.”

‘여기에선 반 박자 더 빨리 해야겠네. ···이 부분은 발 각도를 5도 더 밖으로 빼고.’

한율은 그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녹화된 제 모습을 보며 문제점을 캐치하곤 동일 부분을 재생해 다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다 보니 구경꾼들 사이에선 한율의 춤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주로 길어지는 대기 시간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배우들이었다. 

“이, 이렇겐가?”

“주원 씨 엄청 삐그덕거려.”

“이렇게 같은데?”

“아, 마지막에 뒷머리 헝클이는 것도 안무구나. 왜 자꾸 저 부분에서 터나 했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니, 왜 춤판이 벌어졌지?”

구경하던 사람들의 기척이 다 같이 변하자 한율도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땀으로 전신이 다 젖은 채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한율과 이사문PD의 시선이 마주쳤다. 

“혹시 방해가 됐나요? 아니면 제 순서?”

한율의 물음에, 이사문PD는 한율을 멀뚱히 보다가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장소 이동합니다! 은호 넌 몸살 나지 않도록 땀 잘 닦고.”

“네.”

이사문 PD의 외침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내내 곁에서 지켜보던 조유찬이 가방에 넣어뒀던 타월을 꺼내 한율에게 건네주었다.

“난 이제 회식자리에서 그 노래 춤만은 출 수 있을 것 같다.”

“크래 선배님들 춤도 잘 알지 않아요?”

“······.”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안무를 칼군무로 춘다는 크리스탈 래빗. 크래의 전 매니저였던 조유찬은 2초가량 침묵 후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화제를 전환했다. 

“앞으론 드라이 샴푸도 가지고 다녀야겠다. 이 근처에 파는 데 있으려나?”

* * *

뉴욕에 온 지 여드레 차. 한밤중에 스태프가 한율이 지내는 객실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난데없이 던지는 통보. 

“대본이 수정되었다고요?”

“네. 그렇게 많이 바뀐 건 아니고···, 일단 보세요.”

이제 갱단 소굴로 소집되는 마지막 한 씬만 남겨두고 있던 한율은 의아해하며 새 대본을 받았다. 

‘촬영 중에도 대본이 종종 수정된다는 소리는 듣긴 했지만, 대사가 딱 한 줄만 남은 배우한테 굳이 줄 필요가··· 있었네.’

수정된 부분에 핑크색 스티커가 붙어있어 한 눈에 찾을 수 있었다.

“단순 수정이 아니라 추가되면서 많이 바뀐 것 같은데요.”

“에이, 이건 별로 바뀐 것도 아니라니까요? 그럼 내일은 나오지 말고 푹 쉬고, 모레에 봐요.”

스태프가 떠난 뒤 객실에 혼자 남은 한율은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그리고 침대에 놓았던 본래의 대본을 들었다. 

“흐음···.”

‘강도준’과 ‘김은호’가 함께 있을 때 찾아온 낯선 남자는, 강도준에게 어떤 사람에 대해 묻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간밤에 강도준을 두들겨 팬 갱단 소속, ‘잭’이란 남자였다. 

한국의 대기업 명함을 보여준 낯선 남자는 정보료로 적잖은 금액을 제시했고, 지긋지긋한 뉴욕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던 강도준은 낯선 남자에게 잭에 대해, 그가 자주 가는 장소나, 늘 누군가와 함께 있는 그가 유일하게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해 다 말해주고 만다.

이 한 번의 입놀림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알지 못한 채. 

그 후 낯선 남자는 강도준이 잭이 속한 갱단과 연결된 소년무리의 일원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되레 강도준에게 자신에게 정보를 판 걸 잭과 갱단에게 알리기 싫다면 자기 일을 도우라고 협박한다. 

[간단해. 네 말대로 잭이 정말 금요일 새벽 두 시마다 혼자 가게를 나온다면, 12일로 넘어가는 새벽, 지켜보고 있다가 잭이 나왔을 때 나한테 전화해. 반드시 혼자 차를 타는지, 늘 가던 애인 집 방향이 있는 도로를 타는지 확인하고.]

[잘하면 수고비로 일전에 준 돈의 두 배를 줄 테니 너무 고깝게 생각하진 말고. 알았지?]

그리고 12일 새벽, 잭은 큰 사고에 휘말려 사망한다. 

갱단은 잭이 마지막으로 나온 가게 근처에서 강도준이 알짱거리고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평소 강도준과 어울린 소년무리를 소굴로 집합시킨다. 그곳에서 김은호는 입을 연다. 창고 앞에서 강도준과 함께 있을 때 낯선 남자가 찾아왔던 장면과 함께.

[제가 본 건 그게 다에요.]

이 대사 한 줄을 마지막으로, 김은호의 분량은 끝이었다. 

—이게 본래의 대본. 

그러나 수정된 대본의 해당 소집씬에서 김은호가 사라졌다. 대신 잭에게 사건이 벌어지기 전인 앞부분에 씬들이 추가되었다. 

그 부분부터 다시 대본을 천천히 훑은 한율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연쇄 추돌 이후 차량 폭발 씬이라······.’

다음 날 아침. 수정된 대본을 본 조유찬은 펄쩍 뛰었다. 캐스팅 논의 전에 미리 고지했어야 하는 위험한 씬을 이제 와서 갑자기 들이밀었다며.

그러나 촬영제작진에게 무작정 따지고 들 정도로 사회생활이 얕지 않기에, 그는 조연출에게 전화를 걸어 정중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위험할까봐 너무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돌려서 항의했다.

핸드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조연출의 목소리에 웃음이 깃들었다. 

-[당연히 위험한 씬에서 배우는 빼죠. 한율이는 안전하게 뒤집힌 차량에 갇힌 채 급박한 연기만 펼치면 돼요. 차량은 흔들리지 않게 크레인으로 단단히 고정하고, 불길은 모두 CG 처리. 아시잖아요. 요즘 CG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그래도···.”

-[그리고 수정된 대본을 보셨으면 이것도 아시겠네요. 한율이가 얼마나 중요한 키포인트를 쥔 캐릭터가 되었는지도.]

“네, 알죠. 아는데···.”

-[분량도 늘었고.]

“네, 늘었···죠······.”

-[임팩트 있는 씬을 촬영한 만큼 나중엔 회상 씬으로 수차례 리플레이.]

“으음···.”

-[아, 혹시 따로 스케줄 잡아놓은 게 있으신가?]

“아뇨, 없습니다···.”

그리고 사회생활 대부분을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온 조유찬은, 수정된 이 대본이 한율에게 얼마나 큰 기회로 작용하는지 금세 계산을 끝내고 말았다. 

조유찬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아.”

“네, 형.”

애초부터 조유찬의 항의가 먹히지 않을 거라는 걸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한율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날짜를 계산하고 있었다. 차남석이 찍는 드라마의 카메오 출연은 역시 힘들 것 같다고. 

조유찬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너 폐소공포증 같은 거 없지···?”

양보 좀 해주면 안 돼?

한편, 수정된 대본을 받은 건 윤상진도 마찬가지였다.

“······.”

윤상진은 바뀐 대본을 살피고 또 살폈다. 사실 윤상진 입장에선 대사 한두 줄 외에 크게 바뀐 건 없었다. 바뀐 대본 속 김은호가 강도준이 눈치 채지 못 하는 뒤에서 움직인 까닭이었다. 

‘추돌과 폭발 씬은 원래 있었어. 거기에 휘말리는 배우 하나만 더 는 거야. 그러니 서한율 때문에 굳이 넣은 게 아니라, 스토리에 살을 덧붙이는 과정에 ‘김은호’를 넣었다고 보는 게 맞아.’

머리로는 납득하지만, 심기가 불편해졌다. 

대본리딩 때는 단순히 잘한다, 발성 좋다, 그렇게만 느꼈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맞섰을 때, 카페인트 통을 걷어차는 갑작스런 애드립에 놀랄 법도 하건만, 서한율은 놀라기는커녕 대본과 달리 그의 멱살을 잡았다. 말 그대로 물 흐르듯 이어진 연기였다. 

그리고 앞서 충격을 준 오디션 영상. 

‘서한율이라면 이 수정된 대본도 충분히 소화할 거야.’

그리고 시청자들 뇌리에 강렬히 박힐 것이다. 

이건 배우로서의 예감이었다. 

윤상진은 촬영장 뒤편에서 춤 연습을 하던 서한율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원래 하던 거나 열심히 하지 왜 여기까지 넘보는 거냐고···!’

그제야 아이돌 출신 연기자를 아니꼽게 보던 선배들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아이돌은 기본적으로 외모가 평균 이상이다. 반면 배우들 대다수는 외모보다는 연기로 승부를 본다. 반반하게 생겨 인기를 등에 업고 이렇게 선을 넘어오면, 연기로 빛을 낼 수 있는 배우의 자리 하나를 빼앗는 거란 걸 정말 모르는 건가? 각자 분야에서만 활약하고 이쪽 담장은 넘보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그래, 춤 노래 연기 다 잘한다 치자. 그럼 많이 가진 자로서 양보 좀 해주면 안 돼?’

씬 스틸러 자리까지 꿰차야 속이 시원하겠느냔 말이다!

“후욱, 후우······.”

내면에서 소리를 꽥 내지른 윤상진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러다 불현듯 자괴감을 느끼곤 대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내가 대체 세 살이나 어린 애한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한심한 새끼······.”

* * *

호텔 식당에서 조식을 먹으면서 몇 번이고 본 대본을 뒤적거리던 조유찬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강도준 찾으러 온 경찰이랑 대면한 씬은 못 쓰게 된 거네? 하긴, 수정되면서 맥락상 안 맞게 됐으니···.”

“원래 촬영해놓고 버려지는 씬들이 많다고 하잖아요. 어떤 드라마에서는 한 캐릭터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통편집되기도 했다던데.”

“들어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은영이가 한 드라마에 카메오로 나갔었는데, 방송 나온 거 보니까 그날 고생하면서 찍었던 분량 절반 이상이 편집으로 날아갔더라.”

당시의 허탈감도 함께 떠올랐는지 조유찬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한율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 어떡할래? 오늘도 바쁠 줄 알고, 어제 미리 월평 과제 다 찍고 보내서 딱히 할 일도 없잖아.”

댄스는 촬영장 뒤쪽에서, 노래는 인적이 드문 도로에 차를 세워두고 그 안에서 불렀다. 그리고 추가된 씬의 배경시간은 모두 밤. 리허설을 감안해도, 내일부턴 이전처럼 아침 일찍부터 나갈 필요도 없었다. 

“마침 내일이 한율이 네 생일이기도 하니까, 하루 앞당겨서 놀다 올래? 한··· 두 시간? 아니다, 인심 써서 세 시간!”

“좋아요.”

“어? 진짜 갈 데 있었던 거야?”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호에 다녀올까 하고요.”

세 시간이면 바로 옆 동네나 다름없는 맨해튼의 소호에 다녀오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촬영이 다 끝난 후엔 느긋하게 쇼핑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고.’

그도 그럴게, 개학이 코앞이었다.

촬영 때문에 빠지는 거야 회사에서 촬영 증빙서류를 보내면 출석인정을 해주겠지만, ‘미자들은 가급적 학교수업 잘 받을 것’이라는 WB래빗 방침 상, 촬영 스케줄이 끝나면 바로 귀국해서 등교하라고 할 터다. 

“쇼핑 심부름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 애들한테 깜짝 선물?”

“뭐가 예쁘다고 선물을 사줘요.”

“어···, 그래도 남석이 건 준비해야지. 몇 달 간 같이 고생한 꽃토끼 의리가 있는데. 덤으로 팬 분들한테도 인증하고. 팬 분들이, 서로서로 챙겨주는 그런 모습 보는 거 엄청 좋아하시잖아.”

한율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차남석은 따로 뭘 사다달라고 하진 않았지만, 스스로도 데뷔조에 들어갈 유력 후보 중 한 명이라 자신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앞날을 위해 적당히 챙겨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소호까진 렌터카가 아닌 지하철로 이동했다. 차를 몰고 가기엔 안전한 주차장을 찾는 것도 일인데다, 주차요금도 만만치 않은 까닭이었다. 그리고 환한 오전이라 지하철을 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란 생각에. 

“드디어 환전한 돈을 써보는 구나.”

뉴욕에 온지 열흘이 다 되어가지만, 미리 환전해서 가지고 온 돈을 쓸 데라곤 호텔 직원에게 건네는 소액의 팁이 전부였다. 

“그래도 호텔로 돌아갈 땐 안전하게 택시타고 돌아가는 게 좋겠다. 대낮에도 길에 약쟁이가 드러누워 있거나 소매치기가 돌아다닌다고 하니까.”

그러면서 조유찬은 어른인 자신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소호에 도착해서도 어깨에 힘을 떡하니 준 채 사방을 경계했다. 

“야간보초 설 때, 200m 철책 너머에서 어슬렁거리던 짬타이거도 맨눈으로 식별한 놈이야, 내가.”

“······.”

“한율이 너 이만한 나방 혹시 본 적 있어? 정말 거짓말 안 하고, 진짜 이만한 나방이 있는데 우리는 그걸 팅커벨이라고 불러. 하루는 팅커벨이랑 짬타이거가 맞닥뜨린 걸 봤는데···.”

예비군의 신나는 군대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사태로 인해 중단되었다. 한 건물 모퉁이 안쪽에서 돌연 한 남자가 튀어나와 한율과 조유찬의 앞을 가로막은 까닭. 

난입자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환하게 웃었다. 

[헤이, 형씨들! 관광 왔어? 여기 토박이인 내가 친절히 안내해줄게, 5달러만!]

“어···, what?”

조금 전까지 기합이 들어가 있던 예비군이 당황해하며 짧은 영어를 던졌다. 남자가 바보처럼 멍한 얼굴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손이 덜덜 떨리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5달러!]

한율은 짧게 한숨 쉬며 조유찬의 팔을 잡고 빠르게 걸었다. 무시당한 남자가 두 사람의 등에다 대고 외쳤다. 

[3달러도 돼, 친구들!]

“뭘 가만히 듣고 있어요. 그냥 무시해도 되는데.”

“너무 친근하게 다가와서 말을 걸기에 나도 모르게···. 그런데 뭐지, 저 사람?”

“딱 봐도 마약중독자잖아요. 행색을 보니 최소 일주일은 노숙도 한 것 같고.”

“신기하네···. 그런 게 보여?”

한율은 대충 둘러댔다. 

“미드에서 봤어요. 각성제 종류는 동공 확장, 진정제 종류는 동공 수축. 저 사람은 동공이 정상인보다 수축되어 있고 뭔가 멍해보였잖아요. 헤로인이라도 한 거겠죠. 아니면 헤로인 베이스에 뭘 섞었거나.”

조유찬은 별 걸 다 안다는 표정으로 한율을 보다가 입으로 음악을 흥얼거렸다. 발음이 뭉개져있었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음악, 오프닝 곡이었다. 

한율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 딱히 욕심이 없었다. 깔끔한 걸 좋아하는 터라 기본은 챙기지만, 옷이란 그저 활동하기 편하고 무난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모친이 알아서 옷장을 채워주었다. 채워진 옷들이 대부분이 단정하고 무난한 스타일이었으므로, 별 불평불만 없이 있는 대로 걸치고 다녔다. 

그렇다 보니 한율은 직접 자신의 옷을 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처음 길우성의 모습을 확인하러 갔을 때 새카만 모자 하나를 산 게 전부. 

“이 코트 한율이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 히익, 4천 달러···.”

“예쁘네요. 걸쳐 봐도 되나?”

“헉, 그러다 잘못 되면 네가 사야 돼.”

하지만 이렇게 직접 자신의 옷을 골라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였다. 하릴없이 촬영장에 멍하니 앉아있던 것과 비교하면. 

“아···, 비싼 옷은 걸치면 안 되죠?”

한율은 예전에 <보컬리스트 시즌3> 사전 인터뷰 당시, 비싼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으면 위화감을 줄 수 있다고 하여 길우성의 옷을 빌려 입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 안 되는 건 아닌데··· 아니, 이거 4천 달러라고.”

“······?”

“······?”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라고 의아해하는 한율과, 아직 정산 받으려면 한참 먼 아이돌 연습생이 대체 왜,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야?’ 라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의아해하는 매니저의 시선이 얽혔다. 

“한율아.”

눈을 수차례 깜빡이던 조유찬이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 올 때 부모님이 용돈으로 얼마 주셨는지··· 물어봐도 돼?”

“5천 불?”

“······.”

이곳에서 쓸 수 있는 체크카드와 신용카드도 한 장씩 더 받았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여담이지만, 어릴 적부터 다달이 받고 있는 적잖은 용돈도 딱히 쓸 데가 없어 계좌에 차곡차곡 쌓인 상태였다. 

“평소 입고 다니는 옷이나 사는 아파트 보면서 부잣집 아들이라곤 생각했지만··· 아니, 그게 아니라. 벌써부터 외국에서 혼자 막 비싼 옷 사 입고 그러면 나중에 말 나올지 모르니까, 이 옷은 일단 놔두고 다른 가게로 가자. 여기 너무 비싸다.”

“네.”

그 후엔 적당한 가격의 옷 몇 벌과 차남석과 길우성에게 줄 선물을 구입했다. 함께 다니면서 물건을 골라주는 조유찬에게도 수고의 의미로 모자 하나를 선물했더니, 조유찬은 복잡한 얼굴로 웃으면서 바로 머리에 뒤집어썼다. 

* * *

8월 31일 유명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그곳에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보컬리스트> 서한율 팬, 830만원 기부]

[지난 30일, 최근 종영된 <보컬리스트 시즌3>에서 큰 활약을 펼친 ‘꽃을 단 토끼’의 서한율의 팬이라 자청한 익명의 기부자가 서한율의 생일인 8월 30일을 기념, 소아암을 앓는 어린이를 위해 써달라며 ㅇㅇ복지재단에 830만원을 기부했다. 

ㅇㅇ복지재단 측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생일을 기념해 베푸신 따뜻한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맡겨주신 기부금은 치료비가 절실한 어려운 형편의 소아암 환자 어린이를 위해 소중히 쓰겠습니다.’라고 전했다. 

서한율은 내년 SBC에서 1월 방영을 목표로 촬영 중인 <하울링(가제)>의 촬영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상태이며, 개인 SNS를 통해 생일을 축하해준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앞서 서한율은 팬들에게 선물은 손편지만 받겠다고 밝힌 상태로, 소속사인 WB래빗 측은 들어오는 선물은 모두 반송, 거절하고 있다.]

-정말 감사합니다ㅠㅠ

-얘 누구???

ㄴ기사에 나왔잖아 난독이냐

-와 830만원... 아직 팬클럽 없지 않음??

ㄴ소속사 언플 주작에 백 원 건다. 아님 가족이거나. 

ㄴ평소 10원 한 장 기부 한 적 없는 ㅅㄲ들이 꼭 이런 기사 와서 ㅈ1ㄹ하더라ㅋ 좋은 일 했으면 했는갑다 그냥 넘어가질 못해

ㄴ주작이든 가족이든 그게 뭐가 중요하냐. 팬이 가수를 살리네.. 잘해라 한율아ㅠㅠ

ㄴ...?? 좋은 일 한 건 맞지만 가수를 살리다니; 어감 좀;;

-예쁜 가수에 마음이 예쁜 팬ㅠㅠ

-사랑합니다ㅠㅠ♡

-한율아 하루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하울링 대박 가즈아ヾ(´▽`)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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