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김은호는 짜증이 났다. 결국 강도준이 마틴을 찾아가 ‘잭에게 꼰지른 게 너냐’ 난리를 쳤는지, 한밤중에 마틴이 전화를 걸어와 강도준을 지정한 장소로 데려 오라고 한 까닭이었다. 안 그러면 강도준의 제일 친한 친구인 너부터 하나씩 피곤해질 거라고.
[씨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조금만 참으면 될 걸, 꼭 여러 사람 귀찮게 만들어, 새끼가.]
강도준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김은호는 강도준이 사는 집으로 직접 찾아갔다. 그러나 강도준은 집에도 없었다. 대신 강도준의 사촌동생을 불러낸 김은호는 강도준이 며칠째 자정마다 소리 없이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2일 00시 35분. 다시 전화를 걸어 봐도 강도준은 받지 않았다.
[‘그레이비’ 근처에서 봤다고? 확실해? 알았어. 고마워, 제인. 사랑해.]
몇 번의 수소문 끝에 김은호는 강도준이 목격된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강도준은 없었고, 김은호는 근처를 둘러보다가 며칠 전에 본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차 안에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엔, 마찬가지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강도준이 있었다.
“저 새끼 저기서 뭐하는 거야···?”
강도준은 자주 입던 새카만 후드 재킷을 뒤집어쓴 채 골목 안에 숨어 한 술집을 지켜보던 모양새였다. 잭이 자주 다니는 술집. 그때 낯선 남자가 통화를 끊고 차를 출발시켰다. 강도준도 통화하던 핸드폰을 내렸다.
새벽 1시 56분.
김은호는 수상함에 가만히 지켜보았다. 새벽 2시가 지나자 강도준이 초조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2시 7분이 되자 아주 안절부절못하더니, 술집에서 잭이 나오자 부리나케 더욱 어둑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잭에게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 그럼 마틴이 패거리를 끌고 와 지랄하는 것은 애교 수준의 사태로 번지게 된다.
김은호는 황급히 잭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잭은 신나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차를 타고 가버렸다. 그 순간, 김은호의 눈에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는 강도준이 들어왔다.
···기우였나.
안심하던 찰나, 저 멀리 가던 잭의 차가 멈췄다. 그리고 잭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김은호는 사정을 설명했다. 나중에 다시 강도준과 트러블이 생겨도 그땐 자신은 건들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하여.
-[도준이 그놈이? 하하, 나 급히 가봐야 하니까 일단 타. 날 걱정해준 보답으로 가는 길까지 태워다 줄게.]
위이잉 후진해서 김은호의 옆에 딱 멈추는 잭의 차량. 조수석에 오르려 하자 잭이 안 된다고 손사래 쳤다.
[오, 조수석은 안 돼. 내 애인 지정석이라 아무나 태우면 화내거든. 뒤에 타, 기특한 친구.]
“—컷! 수고하셨습니다! 이동할게요!”
직장 동료 얼굴을 학교에서까지 봐야하다니
차량 추돌 및 폭발 씬은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서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나중에 도심 배경을 따로 촬영한 영상에다 CG팀이 달라붙어 작업할 거라고.
사전에 촬영 허가를 받은 구간인지라, 멀찍한 곳에서 차량을 통제하는 불빛들이 반짝거렸다. 도로엔 사고 순간의 촬영이 먼저 끝나, 정말 사고 난 듯한 차량 넉 대가 나뒹굴고 있었다.
“사고 나는 순간 차내 씬은 한국에 돌아간 다음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댔고···, 이번 씬만 무사히 찍으면 미국 촬영은 끝인 거네?”
연쇄 추돌이 일어난 도로. 전복된 잭의 차량에서 김은호가 피를 흘리며 밖으로 기어 나오는 씬이었다. 1차 수정된 대본에선 차량에 갇힌 상태에서 폭발을 맞이할 예정이었는데, 막상 촬영 당일이 되자 또 대본이 바뀌었다.
“그러네요. 그런데···.”
한율은 손바닥을 펼친 채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꼭 비올 것 같지 않아요?”
손을 스치는 바람도 습했다.
“비오기 전에 끝나면 좋겠는데···.”
“한율 씨, 분장 할게요.”
“네.”
환한 조명 아래에서 한율은 간이의자에 앉아 분장을 시작했다. 스태프들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이사문PD와 액션팀 전문가가 한율이 있는 곳으로 오더니, 상처의 크기와 종류, 위치를 세세하게 지시했다. 한 스태프는 분장이 진행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중에 스튜디오에서 촬영할 때 상처와 모션을 맞춰야 하는 까닭이었다.
분장이 다 끝나자 조용히 지켜보던 조유찬이 감탄했다.
“당장 병원에 실려 가야 할 것 같은 얼굴인데?”
끼릭, 기기깅. 도로에선 크레인이 잭의 차량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 탑승했던 차량이 아닌, 같은 연도에 출시된 똑같은 모델의 폐차였다.
“저만 그런가요.”
한율은 추돌에 휘말리는 역의 다른 배우들을 가리켰다. 한 중년배우는 얼굴에 피 칠을 한 채 웃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이마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모양새인 다른 배우는 헛차! 헛차! 하며 체조를 하고 있었다.
가짜란 걸 앎에도 분장이 너무 리얼한 탓에 기괴함을 주는 광경이었다. 그 사이로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스태프들의 모습도.
“이런 여섯 명 안팎 사고 씬도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좀비 드라마 촬영 현장은 과연 어떨까?”
그때 조연출이 다가왔다.
“한율 씨부터 리허설 갈게요.”
크레인으로 우뚝 고정된 차량엔 액션팀의 스턴트맨이 들어갔다 나오며 점검을 마친 상태였다. 그는 한율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포즈를 취하고 있다가 나와야 하는지 몸소 시범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바닥 파편 조심하시고.”
진짜 차량유리 파편은 아니지만, 한율은 밟지 않도록 조심스레 차 안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초조하게 지켜보는 조유찬이 보였다. 이 광경을 담는 메이킹필름 제작자의 카메라도. 환한 조명을 든 스태프들 사이로 언뜻 윤상진도 보인 것 같았다.
[은호야, 준비됐니?]
음질이 나쁜 스피커를 통해 PD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집힌 차량 안에 나동그라진 자세를 잡은 한율은 핏줄기가 가느다랗게 그려진 손을 들어 OK사인을 보냈다.
[액션.]
* * *
쏴아아. 은은한 스탠드 조명으로 물든 창에 빗줄기가 쫙쫙 그어진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호텔로 돌아온 한율은 침대에 쓰러진 채 그 광경을 멍하니 보았다.
‘피곤해···.’
리허설 때는 내리지 않더니, 본 촬영이 시작되기 무섭게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사문PD는 촬영을 강행했다. 덕분에 한율은 비를 맞으며 한참동안 바닥을 기어야했다.
OK사인이 내려지자마자 조유찬이 달려와 우산을 씌워주고 담요까지 덮어주었지만, 낮아진 체온에 체력소모가 극심히 일어난 후였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마지막 촬영이었기에, 스태프들과 배우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다니기까지.
『한율아 잘했다. 고생 많았어. 나중에 한국에서 보자.』
그때 이사문PD는 처음으로 극 중 배역 이름이 아닌 진짜 이름을 불러주며 한율을 칭찬했다. 윤상진은 한율에게 조심스레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용기를 낸 얼굴로.
『종종 연락해도 돼요? 편하게 형이라 불러주면 더 좋고.』
“한율아, 피곤해도 씻고 자야지.”
조유찬이 강제로 한율의 몸을 일으켰다.
“너 이러다 진짜 감기 걸린다.”
한율은 무겁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비틀비틀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대충 씻고 난 뒤 다시 침대로 다이빙했다. 조유찬이 투덜거리면서 젖은 머리칼을 말려주는 것 같았지만, 한율은 그 상태 그대로 잠들었다.
몸에 활기를 돌게 하는 등의 회복마법 분야는 영 젬병이기에, 쓸데없이 집중력과 마력을 소모하느니 그 시간에 이렇게 잠이나 자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한율은 어리둥절해졌다. 잠든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벌써 1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TV에 부착된 메모지로 절로 시선이 갔다.
[일어나면 전화할 것.]
조유찬의 필체였다.
-[일어났어? 몸은 괜찮은 것 같아? 열은 안 나고?]
“괜찮아요.”
-[그럼 씻고 있어. 저녁 먹고 공항 가면 시간 딱 맞을 것 같다.]
“오늘 출국해요?”
촬영 끝나고 하루 종일 잠만 잤는데 바로 출국이라니.
조유찬이 웃으며 대답했다.
-[학교 가야지.]
“······.”
-[00시 35분 비행기타면 한국 날짜로 9월 2일 새벽에 도착할 거야. 음, 금요일이네? 그러니 학교에 가야지.]
촬영이 하루만 더 늦게 끝났다면 주말을 끼고 느긋하게 움직일 수 있었을 거란 얘기. 그런 생각이 들자 한율은 살짝 억울해졌다.
당초 대본이 수정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일정이 더 늘어질 것 같다 생각했건만, 새삼 날짜를 헤아려보니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촬영 일정이 바로바로 잡혀서 그런가?’
한율은 본인이 NG를 거의 내지 않아 촬영이 빨리 끝났다곤 생각도 못한 채, 알았다고 대답하며 통화를 끝냈다.
* * *
“몇 번을 돌려봐도 참···, 잘 나왔네요.”
어제 촬영한 영상을 돌려보며 조연출이 만족스런 얼굴로 말했다. 고해상도의 작은 모니터 안, 금방이라도 숨이 꺼질 것 같은 소년이 덜렁거리는 문 밖으로 필사적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반대편 조수석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는 누군가의 발을 노려보는 눈빛은, 열일곱 살 소년의 것이라 보기엔 믿기 힘들 정도로 진득한 배신감과 증오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물이 눈에 들어가는데도, 죽음을 직감한 인간이기에 더욱 감정에 처절하다.
“누가 이걸 보고 연기배운지 1년도 안 된 애라고 봐요, 누가. 방송 나가면 분명 난리 날 걸요? 아이돌 연습생 때려치우고 그냥 배우 하라고.”
이사문PD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대로 잘만 커주면 나중엔 정말 대성하겠어요. 한··· 4, 5년 정도?
그의 시선도 모니터 안의 서한율에게 박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주인공을 하려면 더 나중을 기약해야 하지 않을까요, PD님? 드라마나 영화 시나리오 주인공이 대부분 최소 20대 중후반에 맞춰서 나오니까, 그때까진 주인공을 하려면 그나마 애들이 좋아하는 가벼운 로맨스나 웹드에서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제야 이사문 PD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 * *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마중을 나온 부친의 차를 타고 집에 도착. 면세점에서 산 선물을 나눠드린 후, 씻고 새 교복을 걸쳐 새로이 편입한 대한예고로 등교. 개학한지 나흘 만의 첫 등교였지만, 이전에 몇 번 길우성을 찾으러 왔던 터라 낯설진 않았다.
“우리 학교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낯선 이여. 나는 나의 훌륭한 급우들을 굽어 살피는···.”
사전에 고지 받은 반으로 찾아가자,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길우성이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지껄였다. 거들먹거리는 그 표정이 너무나 꼴 보기 싫어, 한율은 길우성의 면상을 손으로 덮으며 밀어냈다.
“비켜.”
“우풉. ···퉷, 손이 왜 이렇게 짜!”
“자전거 타고 왔으니까.”
“그럼 손을 씻고 와야지, 불결해.”
한율은 가방에서 납작한 상자를 꺼내 흔들었다.
“그럼 이 불결한 손에 들린 건 안 받겠네?”
길우성이 눈을 반짝거리며 두 손을 모아 펼쳐 내밀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즈언하.”
“옜다.”
툭.
“자리나 안내해.”
길우성이 희희낙락하며 빈자리를 가리켰다.
“쌤들의 시선을 절대 피할 수 없는 센터 자리! 가운데 두 번째 줄이라네, 친구!”
“그래, 그리고 네 빚은 10만원 플러스 됐다.”
“으아아!”
길우성이 선물을 품에 안은 채 절규했다. 그제야 ‘오, 진짜 서한율이다’ 하며 쳐다보던 몇몇 학생이 한율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느영!“
그 중엔 예전에 기억에 환영을 덧씌우는 마법을 써보았던 김유일도 있었다.
“내가 진~짜! 너 실제로 보고 싶었다? 왜인 줄 알아?”
“···왜?”
한율은 살짝 긴장했다. 설마 기억에 문제가 생겨 부조화를 일으킨 건가?
“어떤 애가 너랑 나 같이 있는 거 봤다면서 아주 지랄지랄 생지랄을 떨었··· 커헉!”
퍽! 한 여학생이 거의 날아오다시피 하며 김유일에게 몸통 박치기 했다.
“닥쳐, 김유일!”
그러곤 김유일의 팔을 잡아 강제로 끌고 갔다.
“내가 착각한 것 같다고 했잖아! 너 같은 놈이 쟬 알 리가 없는데!”
“뭐? 나 같은 놈? 나 같은 놈이 어떤 놈인데!”
“김유일같은 놈!”
“이것은 칭찬인가 악담인가!”
“······.”
한율은 멀어지는 두 사람을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다른 아이들에게 적당히 사교적인 태도로 화답했다.
예고의 실용무용과라 그런지, 교실엔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연습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많았다. 혹은 들어갈 예정이거나, 이미 데뷔를 했거나.
“남석이 형 선물도 샀어?”
점심시간. 급식소에서 밥을 먹으며 길우성이 물었다. 한율은 이전 학교보다 맛없고 부실한 밥에 속으로 한탄하며 대답했다. 학비랑 급식비는 분명 여기가 더 비싼데.
“같이 몇 달간 방송한 의리로 하나.”
“다른 사람 선물은 하나도 안 샀다는 의미구만.”
“네 거 샀잖아.”
“빚이라며! 10만원 플러스 됐다며!”
“그거 3백 달러짜리야.”
“감사합니다, 소중히 아껴 쓰겠습니다.”
달그락. 그때 두 사람이 한율과 길우성의 옆자리에 식판을 놓으며 털썩 앉았다. 차남석과 박현우였다.
박현우가 앉자마자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직장 동료 얼굴을 학교에서까지 봐야하다니, 끔찍하네.”
“그러면서 굳이 옆자리에 와서 앉는 저의는 뭔가요, 선배님.”
“삥 뜯으러?”
“돈은 없고, 여기 고등어나 한 점 가져가시죠.”
“생각보다 일찍 귀국했다?”
박현우와 길우성의 심심한 인사를 무시하며 차남석이 물었다. 한율은 차남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간을 찡그렸다.
“몰골이 왜 그래요?”
안 본 사이에 차남석의 머리가 어둑한 자주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전엔 없던 피어싱까지.
“몰골이라니···.”
“배역 때문에 그래. 거기 감독님이 조금 더 양아치처럼 해오라고 하셔서.”
“염색하고 귀걸이 했다고 양아치라니! 우리나라 수백 만 명의 아이돌에게 사과하세욧!”
“언제 우리나라 국민 중 수백 만 명이 아이돌이 됐냐.”
“설마 나도 그런 꼴을 해야 하는 건 아니죠?”
“이번엔 꼴이냐.”
“써한, 데뷔 후 너의 모습이란다.”
길우성과 둘만 있을 때도 소란한 느낌인데, 두 명 더 가세하니 벌써부터 오디오가 끊이질 않는다. 마치 학교가 아닌 회사 구내식당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
결국 밥을 다 먹고 난 후 한율은 2학년 선배들에게 고했다.
“우리 웬만하면 학교에선 마주치지 말죠. 벌써 지긋지긋하네.”
차남석이 약 올리듯 대답했다.
“그래, 회사에서 보고 촬영장에서도 보자.”
“······.”
그 순간이었다.
우웅, 냐옹, 삐약, 띠링.
“······?”
네 사람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회사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중요 전달사항이 있으니 남자연습생 분들은 금일 17시 30분까지 C연습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WB래빗]
박현우가 중얼거렸다.
“설마··· 오늘 이렇게 갑자기 데뷔조 발표하진 않겠지?”
* * *
WB래빗 엔터테인먼트 3층 회의실.
사내에서 가장 넓은 회의실엔 좌기훈 대표를 비롯해 신인개발팀, 매니지먼트팀, A&R팀, 기획홍보팀, 스타일리스트팀, 경영지원팀과 재무회계팀까지. 각 부서의 주요 인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WB래빗에 소속되거나 계약된 트레이너들도.
거대한 모니터 앞에 서서 설명하던 강무기 팀장이 끝을 맺었다.
“···이상이, 저희 신인개발팀과 트레이너 선생님들의 의견입니다.”
우선 둘
창마다 커튼이 드리워진 캄캄한 회의실 내부 조명이 일제히 켜지고, 모니터에 뜬 영상이 꺼졌다. 회의실엔 옆 사람과 의견을 교환하는 낮은 웅성거림이 깔렸다. 서류를 넘기는 소리도 중첩되었다.
좌기훈 대표가 좌중을 둘러보다 한 자리를 보며 물었다.
“A&R팀은 이견 없으십니까?”
신인개발팀과 트레이너가 재목을 발굴하고 키워낸다면, A&R팀은 그 재목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음반 및 음원을 기획하고 제작한다. A&R팀 팀장 진장현은, 크리스탈 래빗에게 처음으로 공중파 음악 프로그램 1위를 안겨준 곡을 작곡, 프로듀싱한 장재천을 바라보았다.
장재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말했다.
“없습니다. 보컬과 댄스. 그 중심만 단단히 잡혀도 반은 가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먼저 발표하면 남은 아이들이 동요하지 않을까요? 파벌이 형성된다거나···.”
“그 모습도 최종 종합평가에 포함하려 합니다. 다들 쓰리포커즈 사건 기억하시죠?”
좌기훈 대표의 물음에 사람들은 아··· 하며 납득했다.
‘쓰리포커즈’는 6년 전에 데뷔한 보이그룹으로, 처음엔 그리 빛을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리더가 작은 케이블 예능이나 드라마를 종횡무진하며 제 한 몸, 이미지 망가지는 거 상관없이 ‘멱살잡이 하드캐리’를 했고, 덕분에 쓰리포커즈는 차츰 그가 속한 그룹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 데뷔 5년 만인 작년, 공중파 음방에서 처음으로 1위를 하며 서로 끌어안고 오열하는 장면은, 타 아이돌 팬들까지도 눈물을 글썽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환한 볕으로 나오면 그늘 속에선 보이지 않던 오물도 선명히 보이는 법.
팀의 존망이 위태로울 때에도 나 몰라라 매일 클럽을 드나들던 멤버의 목격담은 애교였다. 제 한 몸 희생하여 멱살잡이 하드캐리를 했다고 알려진 리더는 ‘너희들이 먹고 사는 건 다 내 덕분이다’라며 툭하면 멤버들에게 언어폭력을 일삼고, 인지도가 가장 낮은 멤버를 노예처럼 부린 폭군이었다.
심지어 그룹 내에 따돌림과 폭행이 있었다는 정황까지 낱낱이 드러나, 그들은 순식간에 일진돌, 조폭돌이란 이미지를 쓴 채 해체되고 말았다.
“저는 우리가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팀이 쓰리포커즈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랍니다. 예가 극단적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아이들 대부분이 미성년자이니까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한창 나이대의 남자애들이기도 하고.”
“그럼 이 표에서 가장 많은 수를 기록한 연습생은···.”
스타일리스트 팀장이 서류 중 하나를 보이며 말을 흐렸다. 얼마 전, 남자연습생들끼리 웃자고 했던 내기의 ‘욕 기록표’ 복사본이었다.
강무기 팀장이 힘없이 웃었다.
‘그 녀석들, 평가에 저게 쓰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겠지.’
“아주 가볍게 참고만 해주시면 됩니다. 아시잖습니까. 요즘 10대 남자애들, 욕이 아주 일상 언어라는 걸. 학교에서도 ‘안녕’이란 인사대신 ‘왔냐 새끼야’라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아이돌이 그러면 곤란하죠. 말이 곧 그 사람을 드러내는 척도인데요. 하물며 이미지가 중요한 아이돌에게 입에 걸레 물었냐는 소리가 나오면··· 이하생략입니다.”
“으음.”
그 외에 회의실 안엔 다양한 질답과 의견이 오갔다.
30분 후, 좌기훈 대표가 좌중을 향해 말했다.
“그럼 다들 충분히 검토하셨으리라 믿고, 평가표는 10분 후 걷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