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8월 월말평가로 데뷔조가 결정된다는 소문은 진작부터 돌고 있었기에, 오늘 날아온 단체문자는 남자연습생 전원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공지된 5시 30분이 되기 전. 연습실에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상행동을 보이는 연습생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갑자기 윗몸일으키기를 하질 않나, 불안한 얼굴로 두 손을 꽉 잡은 채 중얼중얼 반성을 하질 않나, 심지어 벽에다 이마를 댄 채 시간을 거꾸로 돌려달라고 해괴한 주문을 읊는 연습생도 있었다. 마법의 기운은 한 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도 모 그룹처럼 멤버수가 막 열두 명, 열세 명씩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인원수 셀 때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리고?”
“데뷔조에 들어가도 중간에 체인지될 수도 있지 않냐?”
“그런 일 비일비재하지. 데뷔 날짜까지 다 정해졌는데 뜬금없이 3개월도 안 된 쌩신입이 들어와서 자리 꿰차기도 하잖아.”
“그래도 크래 선배님들 보면 우리 대표님은 안 그럴 거 같지 않냐? 다들 최소 1년 넘게 연습생 했던 분들 이잖음.”
“그 시점에 있던 연습생 전부 1년 넘었다는 건 생각 안 하냐, 멍청아.”
“아.”
“우리 회사가 작아도, 레슨 시스템도 좋고 밥도 막 주니까 한 번 들어오면 웬만하면 안 나가잖아. 설렁설렁 하는 놈도 없고.”
“큰 사고 친 거 아니면 잘 내쫓지도 않지.”
“문득 지난번에 쫓겨난 막내가 떠오르는 구나.”
“아, 나 전에 길 가다가 빡고 봤는데. 이 시키 나 보고도 모른 척 쌩까고 튀더라?”
“튀었다고?”
“어. 그래서 순간 벙찜.”
수많은 대화가 수군수군 오가는 가운데, 길우성은 구석진 곳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뭘 하나 하고 가봤더니, 핸드폰으로 본인이 나간 프로그램 홈피의 본인 영상 댓글을 보며 꿍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겨우 2차 예선 통과했는데···, 나 떨어지면 다 응원 같지 않은 응원을 한 써한 때문이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한율은 길우성을 발로 툭 밀었고, 길우성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지더니 벽 쪽으로 뒹굴 굴렀다.
“으으으···.”
딱히 초조해 보이지 않아 자신 있어 그런 줄 알았더니, 내심 긴장되기는 한 모양이었다.
한율은 잠시 ‘과거’의 기억을 헤집어보았다. 당시의 길우성을.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 길우성은 전혀 아이돌스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데뷔를 못했다 단정할 수도 없다. 데뷔를 해도 망했을 수도 있으며, 어찌어찌 연예인이란 직업을 유지했어도 그 특유의 분위기나 행태가 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므로.
‘현재는 나란 변수도 끼어들었고.’
그때 복도로 난 통유리 너머로 강무기 팀장이 나타났다. 그를 발견한 연습생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 기류를 읽은 다른 연습생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돌렸다가 몸을 바로 했다. 길우성도 벌떡 일어났다.
“전원 다 모였습니까?”
“네!”
“자, 그럼 다들 편히 앉아서 들어요.”
사근사근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강 팀장의 태도에 연습생들은 더욱 긴장했다. 잔인한 통보를 하기 직전에만 보이는 전조인 탓이었다. 연습생들의 시선이 강 팀장이 들고 온 새카맣고 두툼한 바인더를 향했다. 정말 오늘 데뷔조를 발표하는 건가? 저기에 적힌 건가?
“얘기를 들어보니, 예전부터 너희들 사이에서 8월 월말평가로 데뷔조가 결정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던데. 이 소문 들어본 사람?”
눈치를 보던 연습생들이 하나 둘 손을 들었다.
“음, 다들 들어봤구나. 하하, 일단 정보에서 소외되는 연습생은 없다는 거네?”
농담으로 하는 소린가? 연습생들이 뭐라 반응해야 좋을지 어리둥절해하자 강 팀장이 커흠 헛기침을 하곤 말을 이었다.
“쓸데없이 사족을 달거나 빙빙 돌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으니 바로 말하마. 현재 회사에선 내년 4월, 남자아이돌 그룹을 내보내기 위한 프로젝트 준비에 들어간 상태다. 하지만 멤버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는 없다. 너희는 회사가 짜 맞춘 틀에 들어가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이 아닌, 한 명, 한 명 개성을 가진 인간이며, 동시에 그런 아티스트가 되어야 하니까.”
연습생들과 일일이 시선을 맞추는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리고 회사에선 이번 그룹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두 명을 우선 추린 상태다.”
“두 명?!”
“헉······.”
연습생들이 일제히 동요했다. 그러면서 시선은 자연스레 셋으로 분산되었다. 유호, 차남석, 한율에게로.
한 연습생이 낮은 목소리로 옆 사람에게 속닥거렸다.
“셋 중 한 명은 ‘꼭 필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진 게 아니란 얘기잖아.”
“멍청아, 그렇게 치면 너랑 나도 거든?”
“우선 차남석.”
“···네?”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던 차남석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강 팀장이 호명만 하고 빤히 쳐다만 보자, 얼떨떨한 얼굴로 반문했다.
“저요?”
“그래, 한 명. 너.”
“아니, 이렇게 갑자기요···?”
사람이 감동받거나 기뻐할 준비라도 하게끔 발표해주면 안 되는 건가. 차남석은 뒤늦게나마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란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연습생들이 오오오! 하면서 박수를 쳐서야 머쓱해하며 웃었다.
차남석은 스스로 데뷔조에 들어갈 거라 자신하고 있었으며, 주변에서도 당연히 들어갈 거라 여긴 연습생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축하해주는 연습생들 얼굴엔 시기나 질투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남석이는 잘생기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단 인사 꼭 하고.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축하한다는 인사가 잦아들고 모두의 시선이 다시 강 팀장을 향했다. 강 팀장이 검은색 바인더를 펼치며 살피는 척 하더니 툭 덮었다.
“참, 내가 멤버 수가 몇 명인지 말해줬던가?”
“아, 팀장님!”
“이렇게 흐름 끊기 있습니까, 없습니까!”
“몇 명인데요!”
“이것들이 이젠 화를 내네···. 일곱 명이다!”
아이돌 그룹 하나를 런칭하고 앨범까지 내는 데엔 억대 자본이 기본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음 주자는 선발 주자가 본전 이상의 수익을 거둬야지만 초석이 다져지는 구조.
그렇다고 천운이 닿아 당장 대박을 터뜨려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고 수배에 달하는 수익을 얻는다 하더라도, 회사는 당장 후발 주자를 런칭하지 않는다. 잘되면 잘되는 대로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해당 그룹을 밀어주는 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므로.
“그럼 우리 중 여덟 명은···.”
“최소 2, 3년은 더 버텨야 한다는 소리지.”
“으아···.”
“그래서 다른 한 명은 누군데요?”
“그 전에.”
“아, 팀장니임!”
쉿. 강 팀장이 검지를 세우며 주의를 끌었다.
“먼저 알려둘 사항이 있다. 소위 데뷔조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너희들의 태도에 따라, 성적에 따라,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상시 교체가 될 수 있다. 이건 남석이랑 다른 한 명도 예외는 아니야. 예를 들어 남석이가 ‘내가 대표님, 회사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너 추천해줄게.’ 이러면서 금전 및 기타 등등을 요구한다? 그럼 남석이는 즉각 퇴출이다. 그러니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발생하면 즉시 나한테 보고하도록.”
조금 전까지 기뻐하던 차남석이 볼멘소리를 냈다.
“왜 하필 예를 들어도···.”
“그 외에!”
강 팀장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분란을 조장하는 언행도 큰 감점 요인이 될 수 있으니 이것 또한 명심하고.”
무언가 알고 있다고 암시하는 듯한 강한 시선에 몇몇 연습생들이 움찔거리며 눈을 피했다. 그때 한 연습생과 한율의 시선이 짧게 얽혔다.
평소 한율만 보면 은근히 시비를 걸던 정민솔이었다.
그는 차남석과 동갑인 18살이지만, 차남석을 비롯한 다른 연상이 없을 때만 골라 한율에게 들으라는 듯 비꼬아 툭툭 던져 말하기 일쑤였다.
『인기 좀 있다고 건방 떨다간 한 방에 훅 가지.』
『진짜 노래를 못해도 얼굴만 되면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간다니까?』
『씨발, 나도 누가 하드캐리 해줬으면 좋겠다.』
본인의 낮은 자존감을 타인을 깎아내리는 데에서 찾는 어린이의 시기에 일일이 대응할 가치를 못 느껴 가만히 뒀건만, 스스로 찔려 되레 고자질쟁이 보듯 눈을 부라리는 걸 보니 실소가 나올 것 같았다.
툭. 길우성이 한율이 팔을 가볍게 치더니 속닥거렸다.
“이참에 민솔이 형이랑 한판 뜰 거야?”
“왜?”
“그럼 왜 가소롭다는 듯 웃고 있···.”
“길우성?”
떠들지 말고 조용히 하란 뜻일까. 강 팀장이 은근히 힘을 준 목소리로 길우성을 불렀다. 길우성은 곧바로 입을 다물고 몸을 움츠렸다.
“이름을 불렀는데 왜 쪼그라들어? 데뷔하기 싫으냐?”
“네? 어······, 네?”
“······?”
한율도 강 팀장의 말을 두 차례 되감아본 뒤에야 의아한 눈을 들었다. 다른 연습생들도 뭔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강 팀장이 바인더로 길우성을 가리켰다.
“팀에 필요하다 낙점된 두 번째 연습생, 길우성.”
“—네에?!”
길우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강 팀장은 길우성의 반응을 무시하며 장내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나머지 다섯 명은 내일부터 한 명씩 진행되는 면담 이후, 다다음 주 월요일에 발표될 예정이니 다들 긴장 풀지 말고 레슨 잘 받도록! 이상!”
그리고 성큼성큼 연습실에서 나갔다.
강 팀장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연습생들이 하나 둘 씩 입을 열었다.
“와··· 이게 무슨 일이냐?”
“유호 형도 아니고 서한율도 아니고 우성이가?”
“대박···.”
그러게 평소에 잘했어야지
한율은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길우성은 엉거주춤 일어난 상태 그대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있었다. 데뷔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데뷔조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완전히 굳은 상태였다.
한율은 길우성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정신 차려.”
딱.
그제야 길우성이 크게 놀라며 현실로 돌아왔다.
“어···?”
“꿈 아니니까 정신 차리라고.”
“어···, 꿈 아니야···?”
한율은 두 번째 딱밤을 치기 위해 손을 들었고, 길우성이 고개를 옆으로 휙 피했다.
“오, 꿈이 아냐!”
“아니, 꿈이야. 한 대 더 맞아.”
“와아! 꿈 아니다! 와아아!!”
쿵쾅쿵쾅. 길우성이 사지를 팔딱거리며 목도리도마뱀처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우성이가 춤을 진짜 잘 추긴 하지’, ‘그래도 유호 형보다 앞서 불릴 정도라고?’, ‘포지션이 다르잖아’ 연습생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말들 따윈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듯 촐싹거리며.
“야, 축하한다!”
진심으로 가장 먼저 축하를 건넨 건 앞서 호명된 차남석이었다.
“히히헤헷?”
차남석이 뛰어다니던 길우성을 낚아채 등을 세게 치자, 길우성은 실성한 사람처럼 이상한 웃음을 흘리다가 차남석을 와락 끌어안았다.
“같은 팀이다아!”
“—징그러! 떨어져, 새꺄!”
차남석은 길우성을 밀어내려 했지만, 길우성은 그대로 차남석을 번쩍 든 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우하하하! 같은 팀이다아!”
박현우가 그 모습을 핸드폰으로 촬영했다.
“훗날 이 영상은 차남석 굴욕 샷으로 남을 것이다.”
“하하하하!”
“야 이 씨, 어지럽다고!”
“으하하하하!”
한율은 행여 영상에 함께 찍힐까, 박현우의 뒤로 성큼 물러났다. 그러다 무심코 스친 시야에 라이언이 들어왔다. 홀로 떨어져 서있는 라이언은 분함과 초조함이 뒤섞인 얼굴로 차남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언도 차남석이 데뷔조에 들어갈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막상 그가 가장 먼저, 그것도 꼭 필요하다 판단되었다는 얘기를 듣자 퍽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누가 봐도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을 한 그룹에 넣을 가능성은 낮으니. 그것도 둘 중 한 명이 팀에 꼭 필요한 멤버라면, 누구를 떨어뜨리겠는가.
그러나 지난 번 싸움이 일어났을 때 먼저 라이언을 의심하고 멱살을 잡은 건 차남석이었다. 라이언으로서는 자신이 먼저 화해를 청해야 하는 입장에 섰다는 것 자체가 분한 듯했다.
‘하지만 알아서 풀어야 할 일이지.’
차남석이 방송에 나가며 기대 이상의 성적과 인지도를 쌓는 몇 달 동안에도 두 사람의 사이는 평행을 달렸다. 같은 숙소에서 지내고 있으니 화해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써한.”
어느새 난리를 멈춘 길우성이 차분해진 낯짝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눈을 반쯤 내리깐 채 두 팔을 벌렸다.
“본의 아니게 내가 먼저 위로 올라가 너를 기다리게 되었구나. 그렇다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 아팟!”
꾸욱. 한율은 길우성의 발을 지그시 밟은 뒤 연습실을 나갔다.
* * *
토요일 아침, 한율은 조유찬과 함께 한 스튜디오로 향했다. 미국에서는 찍지 않았던 사고 순간의 차내 씬을 촬영하기 위해.
이사문PD를 비롯한 주요 촬영진은 아직도 미국에 있었지만, 스튜디오엔 미국에서 촬영 당시 입었던 옷과 신발, 차량까지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잭’의 배역과, 한율의 분장을 해주었던 스태프도 함께.
“와, 결정적인 충격 장면은 안전하게 역순으로 찍는 구나. 그런 건 진짜 생각도 못했는데. 그 방법을 생각해낸 분은 천재가 틀림없어.”
숙련된 시범을 보여준 액션팀 배우들의 도움으로 촬영은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었다.
차를 타고 회사로 가는 길, 조유찬은 스튜디오의 일을 곱씹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나저나 이걸로 진짜 하울링 촬영이 끝났네? 소감이 어때? 첫 드라마였잖아.”
소감이랄 건 딱히 없었다. 데뷔조 평가에 조금이라도 가산점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한 일이었으므로.
‘굳이 꼽자면···, 정보를 얻기 위해 잠입하여 연기를 했던 것과 비교하면 마음이 굉장히 편했다는 정도?’
실수를 하거나 NG를 내도 얼마든지 돌이킬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진심을 입 밖으로 낼 순 없기에, 한율은 적당히 대답했다.
“연기하는 나보단 뒤에서 준비하는 사람들이 더 대단해 보였다?”
고작 몇 초 나갈 장면을 위해 온갖 기계장비를 세팅하고, 팔이 아프도록 조명을 들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몸짓까지 연구하고, 원하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차를 흔들고, 찍고, 찍고, 검토하고, 다시 찍고.
조유찬이 흐뭇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겸손하네. 참, 카메오 건 말인데, 실제 촬영장소가 진짜 학교다 보니까 주말마다 몰아 찍는다더라. 하지만 네 분량은 적으니까, 내일만 가면 될 것 같아.”
“대본은요?”
“회사에 가면 줄게. 몇 줄 안 되니까 쉬울 거야. 너 미국에서도 그 긴 대사 죄다 외웠었잖아, 한 번도 안 틀리고. 그리고 조금 전에는 액션 전문배우 분들이 어색함 없이 바로바로 잘 한다고 칭찬까지. 크, 얼른 네 그 쩌는 연기가 방송을 타야 하는데. 4개월을 어떻게 기다리냐?”
오늘따라 묘하게 사람을 띄운다.
‘데뷔조 선발 발표에 안 들어갔다고 신경써주는 건가?’
그러면서 한율은 촬영 내내 꺼놓았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잔뜩 들어와 있었다. 조유찬이 흘끔거리며 물었다.
“누구야?”
“아는 애요.”
“여자앤 아니지?”
“여자애면 안 돼요?”
“응, 안 돼.”
곧바로 나오는 대답에 한율은 속으로 짧게 한숨 쉬었다.
-[엉어어엉어엉ㅜㅜ]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박세은인 까닭이었다.
-[정말 고마워 한율아ㅠㅠ 엉어어어엉 진짜 갖고 싶었던 거야ㅠㅠ]
-[한국에서 구매대행으로 사려면 너무 비싸고, 짝퉁 사기당할 위험도 높대서ㅠㅠ]
-[깨톡선물][박세은 님이 선물을 보냈습니다.]
-[깨톡선물][박세은 님이 캐시 선물을 보냈습니다.]
그 아래로 솜뭉치 같은 토끼 이모티콘이 줄줄이 이어졌다.
한율은 뉴욕에 가기 전 일을 떠올렸다. 메신저 상태메시지론 쇼핑 심부름을 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지만, 박세은의 경우엔 너무 간절해 보여 OK 대답을 보냈었다.
물건을 파는 장소도 공항 면세점이었던 터라, 함께 있던 조유찬도 부모님 선물인가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그리고 어제 물건을 넘길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토요일 아침 7시에 연기 레슨실 문 뒤쪽 구석에다 물건을 놓고 가겠다고. 메신저를 통해 물건 값도 제대로 받았으므로, 이건 선물이 아닌 거래였다.
‘그래도 말하면 분명 오해하겠지.’
아이들이야 ‘남사친 여사친 사이에 뭐 고작 그런 일로’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회사 입장에선 다를 테니.
“명심해. 네가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아도 되는 여자는 가족뿐이야. 알았지?”
애초에 연애 같은 건 전혀 할 생각이 없지만, 소소한 것까지 통제받는다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다.
“학교 친구는요?”
“우성이랑 놀아.”
한율은 시트에 뒷머리를 기댄 채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말을 말자.’
우웅. 그때 한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운전하던 조유찬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한율은 그에게 [강무기 팀장님]이 뜬 액정을 보여준 후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회사로 돌아왔을 땐 마침 저녁식사가 나오는 5시였다. 촬영하느라 점심을 거른 한율은 곧바로 구내식당으로 향했다가 줄을 서있던 유호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응, 촬영은 잘하고 왔어?”
“그럭저럭이요.”
“난 안 보이나봐?”
키가 큰 유호에게 가려져 있던 정민솔이 불쑥 고개를 내밀며 말했고, 한율은 식판을 집으며 덤덤히 대답했다.
“네, 안 보였네요.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정민솔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유호가 한율에게 물었다.
“남석이 나가는 드라마도 촬영한다고 들었는데. 언제야?”
“내일이요.”
“그럼 다음 주말 우성이 예선 응원갈 수 있겠네?”
“아마도요.”
심심한 잡담은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느릿느릿 이어졌다. 간혹 정민솔도 대화에 끼어들기는 했지만, 유호가 있어서 그런지 한율에겐 시비를 거는 시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율이 넌 면담 잡혔어?”
“네, 30분까지 오라고 하던데요. 형들은 다 했어요?”
“응. 아침부터 한 명씩 부르시더라고. 촬영나간 현우랑 남석이, 너 빼곤 다 했을 걸? 가면 나에 대해 말 좀 잘해줘.”
다른 연습생들에 대해서도 묻는 건가. 한율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서한율. 잠깐 나 좀.”
밥을 다 먹고 구내식당을 나갈 때였다. 정민솔이 한율을 불렀다. 그는 유호를 먼저 보낸 후 다른 사람들이 없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야 용건을 꺼냈다.
“그··· 일단 말해두는데, 내가 말주변이 없다. 뭔 말을 해도 좀 거칠게 나가.”
“······.”
“그래서 내가 평소에 너한테 했던 말들이 너한테는 섭섭하게 들리기도 하고, 뭐, 좀 그랬을 것 같아서.”
‘이 녀석 봐라.’
바뀐 태도를 보아하니 정말 면담 시에 다른 연습생들에 대한 질문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이러는 걸 보면.
별다른 대답 없이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자, 정민솔이 어색하게 웃으며 한율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아무튼 그동안 내 태도에 마음 상했다면 미안하다. 풀어.”
“괜찮아요. 딱히 형에 대해 신경 쓴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뭐?”
어색하게 웃던 모양새 그대로 정민솔의 입가가 굳었다.
“그럼 전 사무실로 가볼게요.”
한율은 그런 정민솔을 두고 돌아섰다. 멀어지는 등 뒤에서 기가 찬 정민솔의 혼잣말이 들렸다.
“하, 저 새끼 진짜.”
면담이 진행될 2층 사무실 내 회의실엔 신인개발팀 강무기 팀장과 A&R팀 진장현 팀장이 앉아있었다. 한율은 두 사람에게 인사 후 맞은편에 앉았다.
“촬영하고 와서 피곤하겠다. 밥은 맛있게 먹었고?”
“네.”
“그래, 7시에 레슨 있으니까 빨리 끝낼게. 우선 이것부터 볼까?”
강무기 팀장이 펼친 노트북 모니터엔, 한율이 처음 WB래빗에 들어와서 촬영한 오디션 영상이 떠있었다. 세 사람이 다 볼 수 있는 위치에 노트북을 놔둔 강 팀장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
턱. 영상이 시작된 지 10초도 안 되어 한율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6개월 전 자신의 모습을 차마 맨 정신으로 보기가 힘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저 때의 자신이 얼마나 노래와 춤에 무지한 초보 중의 초보였는지 절감한 까닭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3월 월평부터 쭉 다 같이 보고 싶은데, 시간이 없으니.”
강 팀장은 그 다음으로 8월 월말평가 영상을 재생했다. 한율이 뉴욕에서 보낸 것들이었다. 그제야 한율은 속으로 심호흡을 한 뒤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렸다.
“어때? 스스로 많이 발전했구나 하는 게 느껴져?”
“···네.”
“우리도 동감이야.”
강무기 팀장이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처음 한율이 널 봤을 땐 솔직히 레슨을 잘 따라올 수 있을까 걱정 많이 했거든. 데뷔하고 싶다고 찾아온 애 치곤 별로 의욕이 없어 보여서.”
“······.”
“그런데 첫 날부터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남아 연습하는 거 보고 많이 놀랐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실력이 쑥쑥 느는 게 보여서 그때 내가 널 잘 뽑았다는 생각도 들고.”
그 후 강 팀장은 연습생 생활이 어떤지, 방송에 출연하면서 어떤 걸 느꼈는지 세세히 물었다. 진장현 팀장은 한율이 방송에서 나간 곡을 불렀을 때의 느낌, 좋아하는 곡의 취향을 물었다. 평소 레슨을 받으면서, 차남석을 제외하고 함께 호흡을 맞춰보고 싶은 다른 연습생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면담 말미엔 한율에게 평가표를 한 장 내밀었다.
“네 이름은 안 적어도 되니까, 네가 느낀 바대로 솔직히 기재한 후 접어서 여기에 넣으면 돼.”
모든 남자연습생의 이름이 세로로 나열된 표엔 보컬, 댄스, 랩, 예능감, 팀워크(협조), 기타 의견란으로 나뉘어 있었다. 기타 의견란을 제외하고 줄 수 있는 점수는 1점부터 5점까지.
강 팀장은 속이 불투명하게 보이는 투표함 박스를 내밀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나가있을 테니까 편히 적어.”
“수고하셨습니다.”
이윽고 회의실에 혼자 남게 된 한율은 평가표를 가만히 보다가 펜을 들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정민솔’을 찾아 기타 의견란에 기재했다.
[동생들만 있으면 쌍욕함.]
신인 카메오는 열정페이
OSN은 뮤닷과 같은 그룹계열사의 드라마 전문 채널로, 최근엔 감히 장르 드라마의 명가라 자칭하는 곳이기도 했다.
차남석이 촬영하는 드라마는 바로 OSN이 새로 선보이는 범죄 수사물이었다. 남주인공은 억울하게 살해당한 수의사의 영혼(여주인공)이 달라붙은 형사로, 영혼의 조력으로 현장에서 미심쩍은 단서들을 포착하여 활약한다. 차남석은 해당 드라마의 3회 에피소드 사건에 등장하는 일진 고등학생 역할이었다.
“피해자 사망현장 근처에서 발견된 증거물로 유력 용의자로 붙잡혔는데 본인은 범인이 아니라며 극구 부인. 하지만 평소 행실이 쓰레기라 아무도 안 믿어주는 상황.”
임시 대기실로 사용되는 학교 체육관에서 한율은 차남석과 마주했다. 피어싱을 하고 교복도 사복과 섞어 불량하게 입은 차남석과 대조적으로, 한율은 흠 잡을 구석이라곤 없는 단정한 교복 차림에 안경까지 쓴, 전형적인 모범생 이미지였다.
한율은 대본을 툭 덮으며 차남석에게 말했다.
“그러게 평소에 잘했어야죠.”
“그래서 넌 뉴욕 양아치 역할 했었냐?”
“이렇게 갱생했으니 됐잖아요.”
“···아무튼 한 마디를 안 져.”
촬영장에는 학생 역할을 맡은 또래의 배우들도 많았다. 연기학원과 보조출연 전문 업체에 등록된 사람들이 뒤섞인 듯했다. 그리고 길 가다가 흔히 마주칠 법한 평범한 인상이 대다수.
“형 혼자 너무 튀는 거 아니에요?”
메이크업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도 붉은 보석이 박힌 피어싱 탓인지, 차남석의 얼굴은 화사해 보였다.
“그래서 다시 검은색 머리로 돌아갔잖아. 그리고 여기 있으니까 그렇게 느껴지지, 주연 배우 분들이랑 있으면 바로 그 분들 존재감에 압살되어서 딱 이 정도가 좋아. ···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셔서 괜찮아.”
배경이 되는 이 학교에선 주말 촬영만 가능해 몰아 찍고 있지만, 다른 장소에서의 촬영은 거의 마무리된 상태라고 했다.
“남석아! 리허설!”
“네!”
스태프의 부름에, 차남석은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부리나케 자리를 옮겼다.
카메오로 출연하기 위해 온 한율의 분량은 아주 적었다. 그리고 <보컬리스트 시즌3>로 얼굴을 알린 덕에 들어온 제안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이 바닥에선 인지도가 낮은 신인. 한율은 하염없이 자신의 촬영 순서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하울링(가제)>를 촬영할 땐 그나마 옆에 조유찬이 있기도 했고 대기하는 시간에 월말평가 연습이라도 했었지만, 여기에 함께 온 매니저는 현장전이었고, 차남석이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지도를 받거나 일하는 동안에도 어디에서 뭘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심심하네.’
스태프는 스태프들대로, 보조출연자들은 소속된 학원이나 업체대로. 그들 사이에서 혼자 덩그러니 방치된 한율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체육관을 나왔다. 그리고 체육관 옆에 세워진 핑크빛 푸드 트럭을 발견했다.
‘올 때만 해도 없었는데.’
푸드 트럭에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 오지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오지원 배우님을 잘 부탁드린다는 Oh! 지원입니다☆]
오지원의 팬클럽이 보낸 모양. 메뉴는 커피와 각종 과일주스. 간단한 샌드위치였다.
정작 오지원은 아직 안 온 것 같은데. 한율은 멀찍이서 메뉴를 멀뚱멀뚱 보다가 음료를 받고 가는 스태프들을 보았다.
“팬클럽이 힘 좀 썼네.”
“그만큼 인기가 많아졌단 증거죠. 그래도 어제 장미연이 희우 씨 응원한다고 스테이크 도시락 보낸 거 떠올리면···.”
“그런 거 보면 인맥도 무시 못 한다니까. 성공한 연예인 친구두면 비싼 밥차도 척척 보내주잖아.”
오지원의 팬클럽이 보낸 샌드위치와 커피를 무료로 나눔 받으면서, 다른 연예인의 푸드 트럭과 비교라. 그러면서 한율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거리낌 없이 주문을 하는 스태프들과 달리, 보조출연자들은 아무도 트럭 쪽으로 가질 않는다는 걸.
“왜 가만히 보고 있어요? 먹고 싶으면 그냥 가서 주문해도 되는데.”
그때 한 여성이 한율에게 다가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오래 걷기엔 불편해 보이는 구두와 세련된 정장. 아무리 봐도 일반 스태프론 보이지 않아, 한율은 일단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그냥 뭐가 있나 메뉴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딱히 끌리는 메뉴는 없나보다.”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여성의 표정이나 눈에서 ‘너는 나에 대해 몰라도 나는 너에 대해 잘 안다’라는 인상이 전해진다. 처음 보는데도 ‘한율아!’라고 친근하게 부르거나 말을 건네는 팬에게서 받던 느낌과 비슷했다.
“학생들 이동!”
체육관에서 한 스태프의 외침이 들렸다. 뭉뚱그려 부르는 걸 보니 이제야 학생 배역들이 등장하는 씬을 촬영할 모양.
“그럼 수고해요.”
여성이 한율에게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AD가 그녀에게 꾸벅하고 인사했다.
“부장님 오셨어요? 감독님은 저쪽에 계세요.”
제작 혹은 클라이언트 관계자인가. 그러나 떠오른 의문은 가볍게 날아갔다. 한율은 곧 여성에 대해 잊고 스태프의 손짓에 따라 이동했다.
학생들이 교실을 채웠다. 선생님 역을 맡은 배우는 정말 얼마 전 한율이 학교에서 받았던 수업을 진행했고, 한율도 소품으로 받은 노트에다가 필기를 했다. 그렇게 평범하게 수업을 받는 씬, 교실 뒤쪽에서 차남석이 피해자 역을 괴롭히는 걸 외면하는 씬 등을 촬영했다.
“지원 씨랑 희우 씨는 언제 온대?”
교실에 앉아 대기하는 보조출연자들과 배우들을 두고 감독이 조연출을 향해 물었다.
장소에 따라 몰아서 촬영하는 만큼, ‘사건’이 벌어진 극중 시간을 뛰어넘어 주인공이 피해자와 용의자에 대한 탐문을 하는 씬 촬영이 진행되어야 하지만, 아직 주연들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B팀 촬영에 조금 문제가 생겨서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될 것 같다고···.”
“뭐?!”
교실에 감독의 노성이 쩌렁 울렸다. 배우와 보조출연자들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지만, 여상히 외면하는 스태프들처럼 이내 아무 것도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냉랭해진 촬영장에 조연출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흐릿하게 퍼졌다.
“그··· 이희우 씨가.”
“됐어.”
조연출의 입에서 오지원과 함께 캐스팅된 주연배우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감독이 말을 잘랐다. 그러곤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고했다.
“134부터 갑니다.”
감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태프들이 부지런히 촬영 장비를 밖으로 옮겼다. 차남석이 한율의 어깨를 툭 치며 조심스레 물었다.
“너 감독님 모습에 겁먹은 건—.”
“······?”
“아니구나. 가자.”
교실엔 단역배우를 비롯한 수십 명의 보조출연자들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