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427)

* * *

볕이 들지 않는 학교 건물 뒤쪽. 차남석과 그를 따르는 학생 두 명이 한 학생을 에워쌌다. 

“자, 잘못 했어···!”

나중에 시체로 발견될 피해자 역의 배우가 벽에 몸을 기댄 채 몸을 웅크렸다. 차남석이 피해자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강제로 일으켰다.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한 한율은 자리를 피하려다 머뭇거렸다. 그리고 용기 내어 핸드폰을 꺼내, 피해자를 겁박하는 일진들의 모습을 조심스레 촬영했다. 

까득. 입에 문 막대사탕을 잘게 씹으며 차남석이 생글생글 웃었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하성아?”

“네, 네가 빌려간···, 악!”

차남석이 정강이를 걷어차는 동작 타이밍에 맞춰 피해자 배역이 정말 세게 맞은 것처럼 몸을 수그렸다. 타격음은 나중에 폴리 아티스트가 따로 작업하여 녹음할 것이다. 

“흐윽···.”

아파서 덜덜 떠는 피해자의 머리를 차남석이 툭툭 쓰다듬었다. 

“하성아아, 하성아?”

“으, 응······.”

“내가 너한테 뭐 빌린 적 있어?”

‘학폭 가해자 역할이라고 그렇게 싫어하더니, 잘 하네.’

예전에 대본 리딩을 도와주며 봤을 때보다, 정말 학폭 가해자의 느낌과 흡사했다. 목소리를 과하지 않게 긁고 있어 더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어, 없어, 미안해··· 내가 잘못 말했어···.”

“그래? 잘못했어?”

차남석이 입안에서 막대사탕을 한 차례 굴린 후 툭 뱉었다. 반이 깨진 채 떨어지는 사탕을 카메라 한 대가 클로즈업했다. 

“잘못했으면 맞아야지?”

“재, 재건아···! —악! 아악!”

합을 맞추는 연습을 적잖이 했는지, 정말 구타하지도 않는데 폭력이 가해지는 것처럼 실감난다. 그러나 감독은 컷을 수차례 외치며 배우들을 불러 함께 모니터링을 한 후 같은 씬을 반복 촬영했다. 

“너는 이 장면에서 손이 너무 ‘아 갈 곳 없네’ 이러면서 어색한 게 보여. 조금 자연스럽게 내려주고, 넌 이빨 괜찮냐? 또 찍어야 하니까 미리 좀 녹여먹고 있어.”

배우들에게 세세히 지시를 내린 감독은 차남석에게 직접 새 막내사탕을 건넸다. 그리고 한율이 찍은 핸드폰 영상을 보면서도 말했다. 

“지금 찍은 것보단 약간 우측으로, 방금 사탕이 떨어진 곳은 잡히지 않게. 알았지?”

“네.”

긴 씬이 아니기에 촬영은 금세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주연배우들이 나와야 하는 씬들 뿐. 그러나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한다던 주연들은 그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고, 감독은 별 다른 설명 없이 점심시간을 외쳤다. 

한율은 차남석과 함께 밥차로 향했다. 맛있는 냄새가 폴폴 나는 밥차 앞에는 온갖 반찬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밥은 볶음밥과 흰쌀밥 두 종류. 국은 소고기뭇국 하나뿐이었다. 

“열정페이로 일하느라 수고한다. 나중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기획사 입장에서는 신인의 얼굴을 조금이나마 내비칠 수 있는 기회, 제작사 측에서는 그런 메리트를 준다는 갑의 위치에서 편히 부릴 수 있는 신인 카메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3년 후에요?”

차남석이 WB래빗에서 연습생으로 있던 기간은 3년. 그동안 회사로부터 받았던 모든 레슨비 및 지원을 갚고 순수익이 나려면 앞으로 그만한 기간은 더 일해야 하지 않을까. 

넓고 둥근 그릇에다가 밥과 불고기를 반씩 채우며 차남석이 말했다. 

“정산은 멀었지만 떡튀순까지는 사줄 수 있다, 내가.”

“순대 말고 김밥이면 먹을게요.”

“다음 주면 촬영 다 끝날 것 같으니까 그때 먹으러 가자. 그런데 면담은 어땠어?”

“별 거 없어요. 다른 연습생들 노래나 춤, 그런 거 채점하라고 표 하나 주던데.”

“흐음. 애들 분위기는?”

그릇에다 음식을 쌓은 두 사람은 비어있는 파란색 간이 테이블에 앉았다. 

“나도 어제 내내 촬영하고 저녁 즈음에나 들어가서 잘은.”

“아, 하울링?”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남석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어때? 거기랑 여기 비교하면?”

“분위기요? 아니면 환경?”

“둘 다.”

“비슷해요. 거기나 여기나 수주 받은 전문프로덕션이 제작하는 거잖아요. 굳이 차이점을 하나 꼽자면··· 그쪽 PD님이 더 꼼꼼하고, 일반 스태프들한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신다는 것 정도?”

“배우들한테는?”

“극중 이름으로 부르는 것 외엔 딱히···?”

“그쪽이 더 좋다는 거네.”

고작 그런 걸로? 한율은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이다가 곧 차남석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깨달았다. 저 멀리에서 온갖 욕설이 바람에 실려 온 까닭이었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누군가 촬영용 소품 하나를 빠뜨렸다는 이유로 ‘왜 사냐 이 등신 머저리 같은 새끼야!’라는 욕을 먹고 있었다. 수많은 스태프와 배우들이 있는 앞에서. 

차남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수 하나에 저렇게 욕으로만 그치면 그나마 나은 편이라더라. 너도 임승준이 찍고 있던 드라마 제작 중단된 이유 들었지?”

“아뇨. 엎어졌어요?”

“어, 너 미국 가있을 때. 거기 조연출이 몇날며칠 밤새면서 일하다가 죽은 채로 발견됐단다. 밖으로 안 퍼지게 다들 쉬쉬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평소 PD한테 노예처럼 부려져서 밥 대신 우울증 약을 달고 살았대. 그래서 한동안 또 방송제작 환경 개선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던데··· 그때뿐이지.”

“그래도 그런 부조리가 자신을 자꾸 갉아먹는데도 참고 계속 한 건 본인 아니에요?”

“목표가 그 너머에 있으니까.”

차남석이 수저를 내려놓곤 보이지 않는 형체를 묘사했다. 

“열정을 담보로 개처럼 부려먹는 환경은,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수백, 수천 줄기의 가시덩굴이랑 같은 거야. 목표는 사방팔방 얽히고설킨 채 쫙 깔린 가시덩굴 그 너머에 있는 거고. PD만 되면 일반 스태프였을 땐 읍소하면서 쫓아다녔던 콧대 높은 기획사나 연예인이 오히려 굽실거리기도 하고, 잘해서 대박 나면 억대 연봉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데, 쉽게 포기가 되겠어? 그간 고생한 게 아까워서라도 그렇겐 못하겠지.”

“본인이 하고 싶은 작품도 기획할 수도 있고?”

“그렇지. 투자자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순 없겠지만, 그래도 능력 인정받고 독립하면 꿈도 아닌 일이잖아.”

“그렇다고 개처럼 부려먹는 환경을 견디는 건.”

“나쁜 건 나쁜 거니까 조금씩이라도 쳐내야지. 한꺼번에 들어내지 않는 이상 뿌리가 있어서 금세 또 자라나겠지만···은 어쩌다 얘기가 이렇게 샌 거지?”

얘 뭐지?

“아까부터 조금 궁금한 것도 있었는데.”

한율은 여전히 체육관 옆에 서있는 분홍색 푸드 트럭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앉아있는 바리스타는 무척 한가해 보였다. 지금 밥을 먹는 사람들이 다 먹고 나서야 조금 바빠지지 않을까. 

“보조출연자 분들이 저런 커피차 근처에도 안 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에요?”

“먹지 말라는 사람은 없지만 눈치는 보이지 않을까? 아무리 홍보성으로, 좋은 마음으로 보냈어도, 중요 배우나 스태프가 아닌 보조출연자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단가 4천 원짜리 커피를 마신다고 생각해봐. 여러 말 나오겠지.”

널린 게 보조출연 알바지망생이랑 업체인데, 배우 빈정 상하게 하는 사람들을 또 쓰겠어?

차남석은 그렇게 덧붙이면서 불고기 비빔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맛을 느끼는 게 아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연료를 채우는 것처럼 의무적인 행위로 보였다. 

“그럼 나는요? 이 밥 먹고 주스 마셔도 되는 거?”

“네, 너님은 드셔도 돼요. 공짜로 부리면서 밥도 안 주면 그게 사람이냐.”

“그런데 장전이 형은 어디 갔어요? 통 안 보이네.”

“어디 가긴, 다른 일 하러 갔지.”

차남석이 무슨 말을 하냐는 얼굴로 덧붙였다. 

“드라마 촬영처럼 오래 걸리는 일에 내내 붙어 있는 건 인력 낭비잖아. 아직 그렇게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고.”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그래도 끝날 때쯤엔 데리러 올 거야. 걱정 마.”

여느 때처럼 심심한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은 뒤엔 생과일주스를 한 잔씩 손에 들었다. 빨대를 입에 물었을 때, 차남석이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앱을 실행시켰다. 

“자, 여기 보고. 웃어.”

생긋. 찰칵. 

방송 촬영을 시작한 지 고작 몇 달 밖에 안 되었는데도, 렌즈가 저를 향하자 반사적으로 영업용 미소가 나오고 말았다. 

‘벌써 직업병에라도 걸린 건가.’

“···왜 찍는 거예요?”

툭툭툭. 차남석이 한 손으로 핸드폰을 조작했다. SNS에 올릴 사진 아래로 태그가 빠르게 덧붙여졌다. 

[#드라마촬영중휴식시간, #꽃토끼의리카메오, #서한율땡큐]

“장전이 형이 중간에 휴식 시간되면, 너랑 같이 사진 찍어서 SNS에 올리는 게 좋겠다고 해서.”

“검사도 안 받고 그냥?”

“웬 검사?”

차남석이 [올리기]를 누르며 되물었다. 

“나한텐 먼저 자기 보여준 후에 올리라 그러던데요, 유찬이 형이.”

“난 그런 말 못 들었는데?”

매니저마다 관리 스타일이 다른 건가 아니면 사람차별인 건가. 

그때였다. 촬영 관계자가 아닌 사람이 무분별하게 들어오는 걸 방지하기 위해 굳게 닫아놓았던 교문이 활짝 열리고, 새카만 벤 한 대가 들어왔다. 

차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구령대 앞에 끽 멈췄다. 벌컥 열린 문에서 오지원이 다급한 몸짓으로 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는 스태프들이 모인 곳을 향해 한 번, 임시 대기실로 사용하여 밥차와 커피차도 함께 세워진 체육관 쪽을 향해서도 한 번,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우렁차게 사과했다. 뒤늦게 교실에서 내다보는 보조출연자들을 발견하곤 그쪽에다가도 허리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원래 저래요?”

B팀 촬영이 늦어진 원인은 오지원이 아니라 이희우라 들은 것 같은데. 퍽 싹싹하고 겸손한 오지원의 태도에 의아함을 드러내자,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저랬어. 보조출연자 분들한테도 그렇고 스태프들한테도 꼬박꼬박 존댓말 쓰시더라고. 나 저 형 연기할 때 외에 인상 찌푸리는 것도 본 적 없어.”

그때 또 다른 새카만 벤이 들어왔다. 내린 사람은 죽은 수의사 영혼 역할의 이희우. 그녀는 크게 사과한 뒤 부리나케 감독을 향해 달려간 오지원과 달리, 조용히 감독부터 찾아가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뱉는 말과는 거리가 먼 태도. 그러나 오지원을 대할 때에는 덤덤하던 감독의 얼굴엔 꽃이 피었다. 

“촬영하다보면 별의 별 잡음으로 딜레이되는 거야 흔한 일이죠. 좀 쉬었다가 들어갈까요? 점심은?”

“원래 저래요?”

한율은 조금 전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어.”

이번에 차남석은 대충 고개만 끄덕이곤 핸드폰으로 분식집을 검색하며 화제를 돌렸다. 

“야, 그런데 넌 어느 분식 파냐? 상어? GOD전?”

“둘 다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요.”

“···너 진짜 친구 없는 거 아니지? 길우성 빼고.”

“친구란 게 분식집을 같이 다니는 동료를 뜻하는 건지 처음 알았네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 인마.”

한율은 음료를 한 모금 마신 후 빨대에서 입을 떼며 한숨 쉬었다. 차남석이 ‘형은 진심으로 네가 걱정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있어요. 봐요.”

뉴욕에서 촬영 이후 종종 윤상진과 톡을 주고받았던 걸 보여주었다. 그러나 차남석은 더욱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 분 너보다 세 살 위잖아.”

“친구하는 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너 나랑도 친구 먹겠다고 하겠다?”

“그래도 되냐, 남석아?”

“혼날래?”

차남석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정색하며 되물을 때, 멀리서 조연출이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 

“점검하고 대기!”

“네!”

차남석도 그에 못지않은 큰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한율의 팔을 덥석 잡았다. 

“달려.”

그러곤 체육관으로 뛰기 시작했다.

“······?!”

덩달아 뛰게 된 한율은 행여 음료가 넘칠까 신경 쓰면서도 차남석을 째려보았다. 배부르게 먹은 후 주스까지 마시고 있는데 뛰라니. 

설명은 분장팀에게 OK사인을 받은 후 교실로 가면서야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아직 해저 밑바닥이다. 그러니 뭘 하든 티나도록 빠릿빠릿하게, 그리고 항상 겸손하게 굴고 행동해야지. 아, 지원이 형 보면 잘 마셨다는 인사 꼭 하고.”

* * *

좌기훈 대표는 차남석의 SNS에 새로 올라온 사진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하고 있나보네.’

<보컬리스트 시즌3>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광고를 촬영하고, 둘 다 드라마에 캐스팅되었다는 말이 나가면서 악플 빈도가 살며시 높아졌기에, 현장에서도 그런 식의 매도성 발언이 흘러나오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을 많이 했었다. 

아이돌이 연기를 하면 흔히 사람들은 인기를 등에 업고 하는 거라며 흉보지만, 사실 데뷔하기 이전 연습생 시절부터 여러 오디션을 보며 열정페이 단역이라도 뛰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말이다. 

그러나 <하울링(가제)> 측에선 서한율이 생각보다 연기를 잘해 분량이 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차남석이 찍는 드라마 쪽에서도 아직 차남석을 중심으로 둔 잡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스태프들이 차남석 역을 두고 ‘잘생긴 쓰레기’라고 부른다는 것 외엔. 

‘그건 달리 말하면 연기를 실감나게 잘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좌기훈 대표는 차남석이 올린 사진의 하트 수가 올라가는 걸 재차 확인한 후 핸드폰을 내렸다. 그리고 사내 임원들과 연습생들이 작성한 서류더미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는 상대방에게 물었다. 

“그래, 애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단 말이지?”

“네. 아무래도 한율이가 타인과 자신과의 선을 정확히 긋는 성격이다 보니 그런 오해가 생긴 것 같아요. 거기에 초반부터 남석이랑 같이 다녀서 시기도 받은 게 아닐까···.”

유호가 어설픈 웃음으로 뒷말을 흐렸다. 좌기훈 대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땐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지. 하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내 판단이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유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실제로도 잘하고 있고요. 매일 늦게까지 남아 연습하는 만큼 실력도 눈에 띄게 느는데다, 연기도 잘한다면서요. 애들한테만 무뚝뚝할 뿐이지, 팬들한테는 다정하게 잘해준다고 하던데요?”

“그럼 유호 네가 봐도 한율이가 데뷔조에 들어가는 데엔 이견이 없다는 말이지?”

“네. 가장 최근에 한율이가 받은 보컬레슨 영상을 봤는데, 내년 데뷔할 때 즈음엔 고음을 깨끗하게 잘 뽑을 수 있겠구나란 확신이 들더라고요. 음역대가 넓은 멤버가 많을수록 소화할 수 있는 곡의 레퍼토리도 늘잖아요.”

“민솔이는? 민솔이가 현재 너희들 중에서 고음이 제일 잘 올라가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이 바닥이 실력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좌기훈 대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시선이 연습생들이 직접 작성한 평가표를 향했다. 

“그렇긴 하지. 어쨌든 얘기 들려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웃으면서 유호를 보낸 좌기훈 대표는 문이 닫히자마자 ‘WB래빗 남자연습생’이라고 적힌 두터운 바인더를 꺼냈다. 개개인의 인적서류와 평가표를 대조하며 일곱 장을 추린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생각했다. 

‘남석이랑 라이언 사이가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생각이 없는 애들도 아니니. 하지만 이대로라면 랩 라인이 너무 유해. 요즘 흘러가는 트렌드를 보면 보컬이니 랩이니, 파트를 또렷하게 나눌 필요도 없지만···.’ 

한참동안 고민하던 좌기훈 대표는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김 팀장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어요?”

* * *

한율이 상담실 의자에 앉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오지원이 한율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거 네가 찍었다며?”

핸드폰에는 한율이 몰래 촬영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오지원의 뒤에는 아주 도도한 얼굴로 팔짱을 낀 피투성이의 이희우가 있었다. 그러나 한율은 그녀를 아예 주의에서 배제한 채 어깨를 움츠렸다. 

“네···.”

“후우···. 걱정 마. 그때 네가 직접 나서서 말리지 않았던 걸 뭐라 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요?”

“영상에서는 잘 안 보이는데, 혹시 이때 재건이가 뭘 뱉었는지 기억해?”

또각또각. 이희우가 구두 소리를 내며 천천히 탁자를 돌았다. 한율은 ‘정말 혼내려는 게 아닌가’하는 얼굴로 오지원의 눈치를 보며 끄덕였다. 

“네, 사탕이요. 막대사탕.”

스윽. 이희우가 눈을 서슬 퍼렇게 뜬 채 한율의 얼굴 옆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율이 정말 진실을 말하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가 그대로 정지. 뚫어져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색인지도 기억해?”

이제 겨우 3화 촬영이었으나, 감독을 비롯한 현장 스태프들은 경험상 이 장면에서 NG가 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척 태연히 연기할 순 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숨결이 닿을 것처럼 얼굴이 가까운 데다 훑는 시선 또한 정말 원귀처럼 소름이 끼쳤다.

베테랑 연기자도 무의식중으로 어깨를 떨 수 있는 씬인데, 화제성을 조금 더 끌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부른 신인임에야. 

그러나, 

“네, 연한 녹색이요. 매점에서 파는 추파땡 사과 맛. 재건이가 그 맛만 먹거든요.”

“사과 맛만 먹는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는 걸까?”

이희우가 대놓고 고개를 90도로 꺾어 말을 거는데도, 한율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반면 이희우가 보인다는 설정의 오지원은 사이를 가로막은 이희우를 피해 살며시 상체를 옆으로 기울이며 목을 뺐다. 

“그 맛만 먹는다고?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가 있어?”

한율은 이 형사가 왜 갑자기 옆으로 몸을 기울일까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실제로는 이희우의 소름끼치는 얼굴이 바로 앞을 막고 있는데도. 

“그야 매점 셔틀시킬 때마다 사탕은 그 맛만 사오라고 하니까요. 저 말고도 반 애들이면 거의 다 아는 사실이에요.” 

한율의 눈을 또렷이 직시하던 이희우는 내심 감탄했다. 

‘얘 뭐지?’

내가 정말 안 보이니? 라고 말을 걸며 눈앞에다 손을 휘휘 젓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자신을 완벽히 배제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고맙다, 많은 도움이 됐어.”

한율은 오지원에게 꾸벅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가 머뭇거리며 오지원을 돌아보았다. 수첩에다가 들은 내용을 적던 오지원은 이희우가 톡톡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알려주어서야, 한 번 이희우를 보더니 황급히 한율을 바라보았다. 

“왜? 혹시 하고 싶은 말 있어?”

“이건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요···.”

한율은 아예 탁자 위에 올라가 앉는 이희우를 여전히 없는 존재 취급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만약에 재건이가 하성이 죽인 범인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재건이 또 학교에 나오는 거겠죠? 사람이 죽은 거랑 별개로··· 재건이가 벌였던 나쁜 짓들이 다 까발려졌잖아요.”

“아······ 그게.”

학교폭력 문제는 경찰이 개입하기 꺼려하는 문제 중 하나. 당혹스러워하는 오지원의 기색에, 한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난하고픈 마음까지 체념한 얼굴로 다시 꾸벅였다. 

“수고하세요···.”

끼익, ···탁. 

문이 닫힘과 동시에 감독이 시원한 목소리로 외쳤다. 

“OK, 컷!”

바쁘고 삭막하게 돌아가는 드라마 제작환경에 갈갈 갈리던 스태프들의 퀭한 시선이 얽혔다. 

‘한 번의 NG도 없이 원 테이크로 성공했어? 그것도 리허설에서?’

겸손한 캐릭터 연기한다 생각하고

핸드폰 하나를 들어 몰래 촬영하던 씬이야 별반 어려울 것 없었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이번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안 보이는 척 해야 하는데다 대사도 조금 길었다. 그래서 그들은 연기 검증이 안 된 아이돌 지망생이 얼마나 짜증을 돋우는 실수를 반복할까 내심 각오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이희우가 한율에게 바짝 얼굴을 갖다 댈 때부터 그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딕션도 좋고, 연기 잘하는데?”

“눈길의 이PD님이 괜히 기용했던 게 아니었네.”

“자, 다시 갑니다! 리허설처럼만!”

감독의 외침에 한율은 다시 상담실로 들어왔다. 그렇게 카메라 구도를 바꿔가며 씬을 반복 촬영했는데, 이번에도 NG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아, 잠깐만요. 렌즈가···.”

중간에 이희우의 콘택트렌즈가 살짝 돌아가서 잠깐 중단되었을 뿐.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상담실 씬을 끝으로 촬영이 다 끝났다.

한율은 배우들과 감독, 스태프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했다. 어제도 아침 일찍 회사에 갔다가 스튜디오 촬영을 갔다가 다시 회사로 가서 자정 넘게까지 연습했다. 그리고 오늘은 6시부터 나와 하릴없이 멍 때린 대기시간까지 포함하여 9시간. 일을 끝냈으니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피곤해.’

“수고했어. 조심히 들어가고.”

“네.”

감독이 한율의 팔을 툭툭 두드렸고, 한율은 재차 꾸벅인 후 상담실을 빠져나갔다. 앞서 오늘 분 촬영이 모두 끝나 제작진에게 인사까지 다 했던 차남석이 복도에서 한율을 맞았다. 

“수고했다.”

타악. 한율은 차남석이 살며시 든 손에 익숙하게 손을 맞부딪치고 나란히 걸었다. 

“장전이 형 10분 후쯤 도착한다니까, 체육관 가서 느긋하게 옷 갈아입으면 시간 맞을 것 같다.”

“형도 회사 들어갈 거죠?”

“어, 면담하러. 박현우도 오전에 잠깐 출근해서, 이제 면담 안 한 사람이 나 하나라고 하더라. 야, 그런데 너 정민솔이랑 뭐 있었냐? 박현우가 애들 분위기 좀 이상했다고 하던데?”

“딱히?”

대수롭지 않은 한율의 반응에, 차남석은 잠시 미심쩍은 표정을 짓다가 짧게 한숨 쉬었다. 

“너 오해사기 딱 좋은 타입이니까, 겸손한 캐릭터 연기한다 생각하고 애들하고 대화 좀 해. 살갑게.”

“형이 직접 선례를 보여주면 생각해볼게요.”

“선례?”

“라이언.”

“···여기에서 그 새끼 이름이 왜 나와.”

진짜 싫은가 보네. 한율은 진심으로 울컥하는 차남석의 얼굴을 보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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