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회사에 도착했을 땐 4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다들 레슨을 받거나 자율연습이 한창인 시간이라 그런지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본래라면 한율도 중국어레슨을 받아야 하는 시간이기에, 캐비닛에서 교재와 노트, 필기구를 챙기고 곧장 중국어레슨이 진행되는 2층 회의실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조용히 노크를 하고 들어간 한율은 강사와 다른 연습생들에게 꾸벅이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는 없었던 길우성이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왔, 써한?’
길우성이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인사를 건넸다. 연습생들 분위기가 이상했다는 것치곤 여상한 태도였다. 그러나 워낙 남의 눈치를 보거나 선입견이 들어간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 성격이란 건 진작 파악했기에, 한율은 빠르게 다른 남자연습생들을 훑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들은 어설프게 웃으며 입모양으로 인사를 건넸다.
시선을 피하거나 표정에 적의가 없는 걸로 봐선 정민솔이 뭐라 떠들었던 간에 일단 중립 기어를 박은 분위기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태도였다.
이곳은 학교가 아닌 연예기획사. 목소리만 큰 머저리가 무리를 우르르 몰고 다니면서 한 사람을 매도하는 식의 위세는 통하지 않는 곳이다. 하물며 한낱 연습생임에야.
앞서 데뷔조 호명엔 불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들 눈에는 ‘서한율’도 유력한 멤버일 테니, 괜히 안 좋은 뒷담에 동조하는 경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반박하기 애매한 사실들도 있어서 그냥 듣고만 있었어.”
중국어레슨이 끝나고 강사가 나가자마자 길우성이 말했다.
“뭐?”
“네가 형들이나 애들이 따로 만나서 놀거나 밥 먹자는 제안에 한 번도 응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말도 좀 정 없게 하는 것도 사실이고, 관심이 고픈 사람한테 관심을 안 주는 것도 사실이고, 다른 사람과 선을 딱 긋는 것도 사실이고, 그 태도가 남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
“우리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풍부한 관심이 고픈 10대들이라구? 그 점 좀 유의해달라고, 친구.”
뭐라는 거야.
한율이 살며시 미간을 구기자, 길우성이 검지를 들어 삿대질했다.
“그 표정이야, 그 표정! 담 너머에서 한심하게 노는 철부지 동네 꼬마를 보는 듯한 그 눈빛!”
“······.”
무슨 얘기야? 아직 나가지 않은 여자연습생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보았다. 길우성의 귀가 서서히 빨갛게 물들더니, 삿대질하던 손을 슬그머니 내린다.
“오늘 저녁 메뉴는 순두부찌개래.”
화제가 급선회했다.
그놈의 순두부.
“점심을 늦게 먹어서 생각 없어. 갔다 와.”
“계속 여기 있게?”
한율은 대답 대신, 중국어강사가 따로 내준 숙제를 가리켰다. 그동안 레슨에 빠졌던 분만큼 채워야 했다. 길우성의 시선이 흘끔 천장 구석에 달린 CCTV를 살폈다.
“여기에서 공부하면 감시당하는 기분 안 드냐?”
“별로? 휴게실엔 책상이 없잖아. 사람이 수시로 드나들어서 집중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뒷담으로 인해 흐려진 분위기를 피하고자 혼자 있으려 한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길우성은 ‘내가 아는 서한율은 그럴 리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이윽고 회의실엔 한율 혼자 남았다. 교재의 문제를 풀고, 문장과 단어를 쓰고 소리 내어 외우며 집중했다. 5년 뒤 세상이 뒤집어질 때 중국은 굉장히 많은 피해를 입게 되지만, 그럼에도 인구수가 많으므로 나중에 유용하게 사용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동안 숙제 및 공부를 하던 한율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슈트 차림의 누군가가 블라인드 아래로 슥 낮췄던 몸을 바로 하고 지나갔다. 회의실 안에서 누가 뭘 하나 살펴본 듯.
“······?”
일요일 저녁시간이지만 이쪽 업계는 주말 철야가 일상다반사. 한율은 관계자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교재로 시선을 내렸다.
7시 기타레슨은 한 시간. 8시가 되어 정해진 일정을 마친 한율은 자율연습을 하다가 갈까 아니면 집에 일찍 들어가 쉴까 고민하며 휴게실로 향했다.
‘슬슬 월말평가 곡도 생각해둬야 할 텐데.’
댄스야 길우성을 털면 알아서 추천 곡과 영상들이 튀어나오긴 하지만.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남자연습생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서한율. 잠깐 얘기 좀 하자.”
“······?”
남자연습생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스물두 살, 유호와 동갑인 김형수가 한율을 불렀다. 그 옆에는 정민솔이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엔 라이언과 이예찬, 변지욱이 있었다. 뒤의 셋은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올 게 왔구나, 싸움으로 번지면 어떡하지? 란 걱정을 얼굴에 드러낸 채.
“뭔데요?”
“뭔데요?”
한율의 되물음을 따라하며 김형수가 한율에게 다가왔다.
“드라마 촬영하고 와서 피곤해? 표정이 까칠하네?”
말투는 명백한 시비조인데 웃는 낯짝이다. 김형수가 한율의 어깨를 덥석 잡더니 그대로 몸을 슥 돌리게 했다. 그렇게 어깨동무를 한 채 정민솔에게 말했다.
“나 얘랑 둘이 조용히 얘기 좀 하고 올게.”
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멋대로 한율을 휴게실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쿵, 삐릭. 문이 닫히자마자 김형수가 한율의 몸에서 손을 뗐다.
“따라 와.”
김형수는 동갑인 유호와 비교해서 딱히 크게 잘나지도, 그렇다고 떨어지지도 않지만, 한율은 처음 인사를 했을 때 썩 달가워하지 않았던 그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래도 분위기를 못 읽고 머저리에게 휘둘릴 만한 타입으론 안 보였는데.’
“내가 무슨 일로 널 보자고 했는지, 짐작 가는 거 있어?”
빈 보컬연습실로 들어가자마자 김형수가 물었다.
“없는데요.”
“전혀?”
“네.”
“너 민솔이 개무시했다며. 호 있을 때만 인사하고 그랬다고.”
안 보여서 인사를 안 한 걸 그렇게 왜곡해서 떠벌렸나.
그러나 제삼자의 오해를 바로 잡는 건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다. 이미 상대에 대해 안 좋은 쪽으로 사고가 편중되어 있으니 덥석 믿었거나, 혹은 그렇게 믿고 싶어 동조한 걸 테니.
한율은 변명대신 입을 다물고 가만히 김형수를 쳐다보았다.
무려 다섯 살 위 연상과 독대를 하는데도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계속 말해보라는 식으로 눈을 직시하자, 김형수는 내심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후우···. 그래, 솔직히 나도 민솔이 말 다 믿는 건 아니야. 나도 몇 달 간 내 눈으로 본 게 있는데.”
정민솔 앞에서는 단단히 으를 것처럼 행동하더니. 금세 어깨에서 힘을 빼는 김형수를 보며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너희들보다 형으로서, 연습생 선배로서, 잘못된 게 있으면 바로 잡아주고 싶어서 그래. 안 좋은 오해가 있으면 바로 바로 풀어야지.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료들이고 어쩌면 같은 팀, 아니면 나중에라도 어디에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인연인데.”
그리고 이어진 건 연장자의 입장에서 내리는 충고 섞인 긴 잔소리였다.
“사람들은 TV에 나오는 연예인을 공인이라고 하면서 높은 도덕심을 요구하잖아. 특히 아이돌은 어린 팬들에겐 롤모델이 되거나,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가 되거나, 원하는 이미지를 실현시켜주는 환상의 동물로 인식되기도 하니까—.”
가타부타, 주절주절.
요약하자면, 네가 잘하는 만큼 주변사람들의 기대치도 주목도도 높아지니, 평소 언행을 주의하라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상꼰대로 보일 거 아는데, 그래도 한율이 너 똑똑하잖아. 그러니 동생이 더 치고 올라오는 데에 초조해하는 못난 형 좀 배려해준다 생각하고, 민솔이랑 잘 풀었으면 좋겠다. 알았지?”
차남석이 핵심이 섞인 실질적인 잔소리만 한다면, 이쪽은 본인 만족을 위한 언변 발산에 지나지 않았다. 듣는 사람을 굉장히 지루하게 만드는.
그러나 한율은 지루한 티를 내는 대신 입가를 올렸다.
『너 오해사기 딱 좋은 타입이니까, 겸손한 캐릭터 연기한다 생각하고 애들하고 대화 좀 해. 살갑게.』
‘연습이고 뭐고 오늘은 이만 집에나 가야겠다.’
늦게 먹은 점심이 이제야 소화가 되는지 배도 출출해졌다.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형. 민솔이 형한테는 제가 먼저 가서 오해를 풀게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김형수의 긴 설교에 마음이 동해 반성하는 얼굴이었다. 김형수가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어.”
다음 날. 한율은 6시 단체레슨이 있기 전 빈 보컬연습실로 정민솔을 불렀다. 어제 김형수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정민솔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부름에 응했다.
그러나,
“다 들었어요. 고작 방송 일 몇 개 좀 한 거 가지고 벌써부터 윗사람을 개무시하는데, 나중에 데뷔하고 나면 팀내 분란은물론 다 같이 욕 처먹이는 놈이 될 거라 걱정하셨다고.”
한율이 생글생글 웃는 낯짝으로 긴 운을 떼자, 정민솔의 표정이 멍해졌다가 왈칵 구겨졌다.
“뭐?”
“하지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중에 제 행동으로 인해 형이 피해를 입을 것 같진 않거든요.”
“너 이 새끼, 그 말은 내가 데뷔조에—!”
“요즘 누가 같은 팀이라고 싸잡아서 욕해요. 다 비즈니스 관계라는 걸 아는데. 개념 없는 멤버 챙기고 수습해주면 그래도 형 노릇한다고 오히려 칭찬해주지.”
“······.”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물론 함께 데뷔한다 해도 개념 없는 멤버 노릇할 작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싸가지 없이 툭툭 뱉는 버릇은 고치도록 할게요. 같은 팀이 되면 서로 멱살 잡고 캐리해 줘야 하는데, 그냥 멱살만 잡으면 안 되잖아요.”
“···잘 아네! 너 평소에 말하는 거나 태도가 얼마나 사람 무안하게 하는지 이참에 돌아봐. 형들이 기껏 잘해주려고 불러도 다 쌩까고! 뭐 너 혼자만 연습생이야? 너 혼자만 열심히 해?”
한율이 저자세로 나가자 정민솔은 기다렸다는 듯 이 말 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정민솔은 김형수처럼 한율이 WB래빗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리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냈었다. 그러나 대놓고 시비를 걸기 시작한 건 <보컬리스트 시즌3>에 출연이 결정된 이후.
“혼자 데뷔하려는 거 아니면 형들한테도 잘해야 할 거 아냐! 나도 다 네가 먼저 형들을 무시하니까···!”
그때 뽑힌 게 자신이 아닌 새파란 신입이란 사실에 눈이 뒤집힌 게 환히 보였는데도, 본인이 내뱉었던 악의적인 말들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고 합리화하며 밀가루반죽처럼 뭉개버린다. 그 모습에서 한율은 정민솔의 속내가 읽힌 듯했다.
‘섣불리 타인을 재단하는 건 지양하고 싶건만.’
불길하다, 불길해
정민솔은 ‘꽃을 단 토끼’의 서한율 자리에 본인이 있었다면 무조건 달라졌을 과정과 결과는 생각도 않은 채, 드라마나 CF촬영 자리에 본인을 대입하면서 스스로 배알을 뒤틀었던 거 아닐까.
—저기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그럼 저 환호성도, 팬들도, 주어지는 기회도 모두 내 거였을 텐데.
‘옆에 있으면 두고두고 짜증을 돋우는 유형의 인간.’
열등감도 적당히 내비쳐야 ‘덜 성숙한 아이라 그렇구나’ 하며 귀엽게라도 봐주지, 매일 얼굴을 맞대고 함께 일해야 하는 팀이 되면···.
한율이 생각하는 동안에도 혼자 떠들던 정민솔은, 멋대로 한율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고 보컬실 문을 활짝 열고 나가며 복도가 울릴 정도로 큰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우리 푼 거다?”
복도에는 막 연습실로 향하려던 연습생 몇 명이 있었다. 한율은 정민솔의 웃는 낯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생각했다.
정민솔과 함께 데뷔하는 일은 피해야겠다고. 어차피 5년 후면 뒤집어질 세상이지만, 미리 내칠 수 있는 스트레스 덩어리를 굳이 안고 갈 필요는 없으므로.
“정민솔이랑 잘 푼 거냐? 자기가 따끔하게 말했더니 네가 잘 알아듣더란 식으로 애들한테 떠들고 있던데.”
레슨이 끝난 뒤 차남석이 다가와 물었다. 이놈이 정민솔 같은 타입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성격이 아닌데, 라는 의심 섞인 얼굴로.
한율은 차남석에게 되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형이 겸손한 캐릭터 연기한다 생각하고 대하라면서요.”
“진짜 연기했냐? 걔는 그거에 홀랑 넘어간 거고?”
“그거야 모르죠. 이 이상 말이 많아지고 시끄러워지면, 회사 사람 귀에 들어가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을까 모른 척 넘어간 건지도.”
“진짜면 옹졸한 새끼다운 타협이네.”
차남석이 미간을 구기며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겸손한 캐릭터를 연기하라고 조언했을 때와는 퍽 다른 반응.
“길우성한테 무슨 소리 들었어요?”
“다 들었다. 정민솔 그 새끼가 보컬 출연 정해졌을 때부터 너나 어린애들만 있으면 대놓고 시비 걸고 욕까지 싸질렀다며. 넌 그걸 왜 가만히 듣고만 있었냐?”
“상대할 가치를 못 느껴서?”
“······.”
차남석은 기가 막힌 얼굴로 한율을 바라보다 짧게 한숨 쉬었다.
“···그래, 앞으로도 연기 열심히 해라.”
* * *
데뷔조 발표까지 고작 며칠 앞둔 수요일.
며칠만 지나면 누군가는 살짝 안심을, 누군가는 자리를 빼앗고 말겠다는 의지를, 누군가는 체념하거나 기다리는 길을 걷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연습생들에게 날벼락 같은 소문이 전해졌다.
『대표님이 요즘 밤새도록 언더래퍼 믹스테잎을 쌓아놓고 듣고 있다더라. 그것도 외모가 평타 이상치는 10대들 것만 추천받아서.』
이 소식을 들은 연습생들, 특히 노래보다 랩이 특기인 연습생들의 동요는 무척이나 컸다. 왜 하필 데뷔조 발표를 앞둔 이런 시기에 밤을 새면서까지 언더래퍼의 곡을 듣는단 말인가?!
“우리 대표님은 막판 끼워 넣기 안 할 거 같다고 한 놈 누구냐.”
“아니,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 아직 데뷔 날짜는커녕 데뷔조발표도 안 났는데······.”
“불길하다, 불길해.”
초조해하는 연습생들 중엔 길우성도 끼어있었다.
“나, 나, 나 도로 빠지면 어떡하지?!”
회사에서는 길우성을 데뷔조로 우선 발탁한 이후, 실력파로 소문난 현역래퍼를 트레이너로 초빙해 1:1 개별레슨 시간을 늘려주었다. 그럼에도 영 불안한 모양이었다.
“어제도 딕션이랑 딜리버리가 개발바닥에 뭉개진 똥 같다고 쌤한테 막 구박받았는데!”
“자랑이다. 쓸데없는 걱정 말고 넌 이번 주말 예선 무대 연습에나 집중해.”
“차남석 차가워!”
“그래, 이름 막 불러라?”
“그대, 차가워서 차남석인가?! ···악! 잘못했어요! 때리지 말아주세요!”
한율은 두 시간 내내 댄스레슨을 받고도 팔팔한 두 사람을 외면한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
여자연습생 쪽도 이제야 단체레슨이 끝났을 텐데, 웬일로 이 시간에 박세은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조금 전 회사 근처에서 이상한 사람이 어슬렁거려서 경찰이 출동했는데 사라졌대ㅠㅠ..]
-[꼭 품에 뭐 숨긴 것 같은 사람이라던데.. 이따가 나갈 때 조심해ㅠㅠ..]
이상한 사람? 가끔 크리스탈 래빗을 찍기 위해 편의점에 죽치고 앉는 남자들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 순간 예전에 크리스탈 래빗 멤버 미랑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던 사생 스토커가 떠올랐다. 경찰서에서 풀려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론 잠잠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도촬 범죄자.
‘그놈인가?’
하지만 그는 회사에서 몇 달 간 잡으려 노력해도 잡히지 않았을 정도로 용의주도했고, 비싼 변호사를 고용할 정도로 돈이 넉넉했다. 그런 인물이 이제 와서 눈에 띄게 혼자 어슬렁거릴까.
몇 시간 후. 한율은 평소처럼 자율연습을 하다가 자정이 되어서야 다른 연습생들과 함께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숙소로 가는 연습생들과 갈라져 택시를 타기 위해 대로로 나가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 한율은 난생처음으로 공영방송국 MBS에 발을 디뎠다. 다름 아닌 댄스 오디션 포맷 프로그램 <댄스단!수(秀)!> 3차 예선무대까지 진출한 길우성을 응원하기 위해서.
길우성이 차남석의 옷을 덥석 잡았다.
“우, 우왕청심환 사왔어요?”
“겁먹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해, 하던 대로.”
해당 프로그램 PD는 참가자 한 명당 방청 초대인원을 셋으로 제한했고, WB래빗에서는 한율과 차남석, 변지욱을 보냈다. 강무기 팀장은 셋을 뽑은 이유에 대해선 굳이 말해주지 않았지만 한율은 어림짐작했다. 자신과 차남석은 <보컬리스트 시즌3>로 얼굴을 알린 바 있으니, 그걸로 조금이나마 길우성의 주목도를 끌어보자는 생각에서.
‘그리고 차남석은 길우성과 함께 데뷔가 확정된 인물이기도 하고.’
변지욱은 아직 나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댄스트레이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유망주였다. 방송물을 조금이라도 먹은 또래 형들과 함께 움직이며 좋은 경험을 쌓으라고 보낸 게 아닐까. 지난 <보컬리스트 시즌3> 방청엔 빠졌으니.
“우우왕은 모르겠고.”
한율은 오면서 사온 우황청심환을 길우성에게 내밀었다.
“자.”
“오오! 고마워, 친구!”
예선녹화가 시작되기 전, 제작진들은 참가자 초대객의 대기실 방문을 허락했다. 카메라를 든 스태프 입회하에.
변지욱이 신기해하며 카메라 렌즈 앞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우와, 카메라 진짜 커. 이거 방송에 나가는 거예요?”
가족이나 지인에게 응원 받는 장면도 재미만 있다면 방송에 내보낼 셈인지, 스태프는 화를 내기는커녕 변지욱에게 물었다.
“잔뜩 긴장한 우성이 형한테 하고 싶은 응원 있어요?”
“형! 아까 올 때 보니까 제로-KUN 크루 형 있던데! 이따가 사인 좀 대신 받아주면 안 돼요?”
“어떻게 나 따위가 그 분에게 사인을 부탁해!”
“그러게요. 어차피 그 분이 형보다 훨씬 더 잘할 텐데, 뭐 하러 긴장하고 그래요. 누가 보면 라이벌인 줄?”
“어떻게 나 따위가 그 분의 라이벌이···!”
터억. 차남석이 길우성과 변지욱의 입을 동시에 틀어막았다.
“그만해, 바보들아.”
한율은 만약 이 장면이 나중에 방송을 탄다면 여러 이야기가 나올까, 카메라에다 대고 웃으며 말했다.
“우성이는 희망찬 응원의 말이 아닌 팩폭으로 다스려야 멘탈에 안정을 찾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시고, 우성이 잘 부탁드립니다.”
세 사람은 곧 스태프들의 지시에 따라 지정된 방청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장 앞줄이면서 좌측으로 조금 많이 치우쳐진 곳. 객석은 다소 화려하면서도 소란스러웠던 <보컬리스트 시즌3>와 비교하면 조금 차분한 분위기였다.
‘응원도구도 머리띠와 핸드폰까지만 허용해서 허전해 보이는 건가?’
무대는 타원형으로, 무대 좌측에는 패널들이 앉는 8개의 소규모 객석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우측에는 스무 개 가량 객석이 있었는데—.
차남석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쳤네···. 세계대회에서 상 받은 크루 분들이 보이는데?”
“저기 검은색 비니 쓴 산적 같은 아저씨, 예전에 제가 다녔던 댄스 아카데미 원장님이세요.”
“전문 판정단 점수랑 의견도 따로 받을 모양인데요?”
“헉, 저 분···! 우성이 형이 자주 보던 너튜브 채널 안무간데? 우성이 형은 저 분 오신 거 아나? 알면 기절할 것 같은데.”
3차 예선까지 올라온 참가자는 총 서른 명. 여기에서 하위권 10명만 탈락되고, 남은 사람들은 평균값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토대로 팀이 되어 본선으로 진출한다.
“과한 환호성은 자제해주시고, 표정 리액션과 박수는 크게 부탁드립니다!”
녹화가 진행되기 전, 스태프들이 돌아다니며 당부를 외쳤다. 누가 봐도 연예기획사에서 나온 응원 인원에겐 카메라를 의식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와도 모른 척, 렌즈 쪽으로 고개 돌리시면 안 됩니다. 무대에 집중해주세요.”
“네.”
이것도 <보컬리스트 시즌3>와 달랐다. 그땐 카메라가 오면 아예 얼굴을 들이대며 난리법석을 부렸던 것 같은데.
스태프들은 그 외에도 동영상 촬영, 플래시가 터지는 사진 촬영을 삼가주길 당부했다. 그렇게 한참. 길우성이 먹은 우황청심환 효과가 다 떨어지고도 남지 않았을까 슬슬 걱정이 될 때 즈음, 드디어 <댄스단!수(秀)!> 3차 예선이자 첫방 녹화가 시작되었다.
길우성의 첫 TV 출연이었다.
* * *
한율과 차남석에게는 ‘후드소녀’로, WB래빗 엔터테인먼트에서는 ‘루머악플 PDF제보요정’으로 불리는 이아름은 평범하다면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교통비를 제외하고 한 달에 받는 용돈은 10만원 남짓.
‘목에 좋은 차는··· 생강청도라지배? 생강, 청도라지배? 아니, 생강청, 도라지, 배구나··· 는 생강청이 뭐야? 생강이면 생강이지?’
<보컬리스트 시즌3>가 끝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건만, WB래빗 SNS 계정의 ‘꽃을 단 토끼’ 관련 글 조회수와 하트 올라가는 속도가 예전만 못하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법한 선물을 하며, 실망하지 말라고, 항상 응원하는 팬이 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뭐가 이렇게 어려워···?”
생강청 도라지 배즙을 만드는 방법을 검색하던 이아름은 저도 모르게 입으로 투덜대고 말았다.
“히익, 국내산은 가격도 비···, ······?”
이아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핸드폰 상단에 [크리스탈 래빗 공식 팬클럽 새 공지가 떴습니다.] 안내가 뜬 까닭이었다.
서한율과 차남석 이 두 사람과 같은 기획사니, 뭔가 작은 곁다리 정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입한 공카였다. 가입 승인 절차가 생각보다 많이 까다로워 골머리를 앓긴 했지만.
‘원래 이런 평일 오전에 이렇게 갑자기 공지가 올라오나?’
아이돌 덕질은 이번이 처음이라 잘 모른다. 이아름은 수업시작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한 후 크래 공카로 들어갔다.
[공지-최근 WB래빗을 방문하셨거나 주변을 지나간 분들의 제보를 받습니다.]
[안녕하세요, 달나라 여러분. 공카지기 강철절굿공이입니다.
갑자기 이 시간에 공지를 띄운 건 다름이 아니라···.]
천천히 공지를 읽던 이아름은 핸드폰을 책상에 던지듯 내려놓고 소름이 돋은 팔을 슥슥 문질렀다.
“···미친······.”
[···(중략) 범인은 주차장 기둥 뒤에 숨어 있다가, 택시에서 내리는 라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고, 소지하고 있던 가위로 라나의 머리카락을 자르려 시도, 그러나 이를 말리려 택시기사님이 차에서 내리자 바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WB래빗 측에선 사건이 일어난 즉시 경찰에 신고했지만, 범행당시 범인이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모두 가리고 있어, 키가 175 정도에 호리호리한 체격이란 것 외엔 인상착의를 알 수 없어 용의자 색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회사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며칠 전부터 회사 근처를 배회하던 수상한 남자가 있었다고 하니, 최근 WB래빗을 방문했거나 주변, 혹은 크리스탈 래빗 멤버들이 있는 곳 주변에서 수상한 사람을 목격하신 달나라 분들은 WB래빗으로 제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