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방송국에 있던 WB래빗 연습생들이 회사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 소식을 접한 건, 녹화가 다 끝나고 길우성을 차 안에 구겨 넣을 무렵이었다. 길우성은 아슬아슬하게 21위로 탈락된 것은 차치하고, 평소 존경하던 댄서들 앞에서 무대를 했다는 것과 한꺼번에 풀린 긴장으로 넋이 나가있었다.
“그거 명백한 테러 아니에요?! 와— 별 미친놈이!”
“선배님은 괜찮대요? 다친 덴?”
“다행히 다친 데는 넘어지면서 손이 조금 까진 것뿐인데··· 심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지. 이제껏 질 나쁜 스토커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처럼 흉기까지 들고 달려든 경우는 처음이었으니까.”
차를 출발시키며 조유찬이 덧붙였다.
“지금은 피해자 조사랑 상담 선생님 면담 마치고, 부모님계신 본가로 가서 안정취하는 중이래.”
안쪽 좌석에 구겨져있던 길우성이 벌떡 시트에서 등을 뗐다.
“혹시 범인 그 새끼 아니에요? 미랑이 누나 쫓아다녔던 그 새끼! 경찰이 풀어준 그 새끼!”
미친놈 뇌구조를 어떻게 알아
“이제야 정신 돌아왔냐? 그런데, 경찰이 풀어준 새끼라니?”
차남석이 되묻자 길우성은 아차하는 얼굴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 멍청이.’
몇 달 전, 미랑을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집요하게 루머와 악플을 달던 사생 스토커가 경찰에 잡혔던 건 회사에서도 소수만 아는 일이었다.
조유찬이 못 들은 척 말을 돌렸다.
“지금 회사 앞에 기자들 쫙 깔렸으니까, 오늘은 이만 각자 집이랑 숙소로 데려다줄게. 그리고 무슨 인터넷기사가 뜨든 모르는 연락이나 SNS 메시지가 오든, 다들 아무 것도 하지 마. 사람들이 뭐 아는 거 없냐고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고만 하고. 알았지?”
-[폰 확인해보니까 미랑이 누나 울고불고 난리났다ㅋ; 혹시 그 새끼가 라나 누나로 타깃 바꾼 거 아니냐면서]
-[너 그 새끼 어떻게 잡았어? 아니, 어떻게 잡으셨어요, 서쌤? 정답을 알려줘]
차에서 내려 아파트 공동현관을 지나자마자 길우성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한율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답장을 보냈다.
[회사에서 용의선상에 오를 법한 사생, 악플러들에 대한 정보 모두 경찰에 넘겼을 텐데, 그래도 안 잡힌 거 보면 그놈이 아닌 거 아닐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전에도 잡혔다가 금방 풀려난 거 보면 돈도 있고 빽도 좀 있는 모양이던데.]
[몇 달 간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미친놈 뇌구조를 어떻게 알아ㅋ]
하긴. 한율은 몇 달 전 미랑의 스토커의 방에 붙어있던 온갖 외설적인 사진을 떠올렸다.
‘수집하는 게 사진 종류만이 아니었나? 머리카락을 자르려 했다니···.’
한율은 직접 확인을 해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땐 길우성에게 빚을 지우기 위해, 스토커란 오해를 벗기 위해 행동에 나섰지만 이번엔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환한 시간대에 벌어진 사건이고 사방이 CCTV 천국인 대한민국이니, 곧 잡히겠지.’
라나의 사건은 [여자아이돌 피습 미수사건]으로 포털사이트 실검에 떴다. 환한 시간대에 벌어진 사건인데다 목격자들도 있었기에, SNS와 댓글을 통해 피해자가 크리스탈 래빗의 라나라는 사실은 밝혀진지 오래였다. 기자들이 보란 듯이 WB래빗 앞으로 모인데다, 크래 공카에도 수상한 남자 목격 제보를 받는다는 공지가 올라와 신빙성까지 더해졌다.
-가위들고 머리 자르려 했다며; 워씨 ㅈㄴ 무서웠을 듯ㄷㄷㄷ
ㄴ머리ㄴㄴ 머리카락ㅇㅇ
-대낮에ㅅㅂ저런 미친ㅆㅏ이코같은 ㅅㄲ가 가위들고 돌아다녔다는 거 아니냐!! 잡히면 손모가지를 가위로 잘라버려야 함. 질겅질겅.
ㄴ거기도 잘라야함. 질겅질걸.
-ㅋㅋㅋㅋㅋ듣보잡 실검 띄워주려고ㅋㅋㅋ진정한팬ㅇㅈ? ㅇㅇㅈ
ㄴ신고로 비공개된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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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네 이름도 실검에 띄워줄까 이 ㅈㅍㅁ야^ㅅ^)ㅇ?
-라나? 얘 첨 보는데 몸매 ㅈㄴ쩐다 워워
ㄴ그래서 범인이 더 용서가 안 됨. 어디 건드릴 게 없어서 라나를 건드려
ㄴ난 너도 용서가 안 된다. 안 예쁘면 저런 짓 당해도 되냐?
-저렇게 입고 다니니까 ㅂㅌ들이 꼬이지. 솔까 보라고 까놓고 다니는 거 아니냐?
ㄴ그럼 네 얼굴은 왜 내놓고 다니냐? 다른 사람 안구테러 작작해라.
ㄴ죄를 지은 건 가해잔데 원인을 피해자한테서 찾는 너 같은 ㅅㄲ들이 2차 가해자다.
ㄴ지 보라고 입고 다닌다 생각하는 자의식과잉환자ㅋㅋㅋ
ㄴ성범죄자의 흔한 뇌썩논리를 읊는 ㅂㅅ이 있다?
인터넷 댓글만 보면 인간의 3할은 한심한 종자로 채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율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침대 위로 툭 던졌다.
우웅.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메시지가 들어왔다.
-[인터넷 난리 났던데; 넌 괜찮아?]
배우 윤상진이었다. 한율은 조유찬의 충고를 떠올려 적당히 대답했다. 다른 일로 회사에 없을 때 벌어진 일이라고. 윤상진은 스토킹 범죄는 결코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고, 조심하라는 당부를 길게 늘어 적었다.
-[아무튼 범인 잡힐 때까진 한율이 너도 조심해. 꼭!]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이라.
한율은 방안에 떠도는 공기 중의 마나를 손으로 모았다. 순식간에 희미한 푸른빛을 띤 마나가 응축되었다. 그 색은 현재 한율의 눈동자를 물들인 색과 같았다.
심장에 차곡차곡 쌓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든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주변의 마나를 순간적으로 얼마나 빠르게, 다양하고 심도 깊게 유용할 수 있는지가 그 마법사의 급을 나타낸다.
‘나조차 인지할 수 없는 찰나에 목숨을 날릴 수 있는 수단이 아니고서야.’
츠팟. 한율은 모았던 마나를 흩뜨려놓았다. 이곳이 총기소지 허용국가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신경 써야 할 일이 더욱 많아졌을 테니.
다음 날 이른 아침. WB래빗에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어제의 불미스러운 사건과 안전 문제로 인해 오늘은 모든 레슨을 쉽니다. -WB래빗]
WB래빗 남자연습생 단톡방에 메시지가 쌓였다.
[이러다 내일 데뷔조 발표도 미뤄질 각?]
[지금 피가 다 말라가는데 더 기다리...ㄹ수 있겠습니다.]
[↑어느 쪽이냐]
[범인 빨리 잡혀쓰면 조켓어요ㅠㅠ]
[피방가실 분?]
[회사 선배님이 크게 다칠 뻔했는데 처놀러 다니다가 처맞고 싶냐ㅋ 눈치 챙겨라ㅡㅡ]
[오늘 점심 새우볶음밥이랑 함박스테이크였는데]
[헐]
[ㅁㅊ]
[내 새우복음밥!!!!! 함밖ㄱ!!!!!!]
[범인ㅅㅂㅅㄲ 잡히면 주겨버린다]
예정에 없던 하루 휴일이 주어졌다. 한율은 날씨 앱을 살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릴 예정. 등산을 가기엔 부적합한 날씨였지만 비가 쏟아지는 날은 대기의 마나 농도가 평소보다 더 짙다.
‘그럼 간만에.’
한율은 부모에게 외출한다 해놓고 아파트 옥상으로 향했다. 문은 열쇠로만 잠겨있어 마나를 이용해 쉽게 열었다.
만약을 위해 다시 잠근 후 옥상에 누가 없는지 확인한 뒤에야 옥상탑 뒤쪽 처마로 향했다. 맞은편에 다른 높은 건물이 없고 난간도 높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였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종종 이곳에서 마나를 유동시키곤 했었다.
‘바람이 이쪽으로 부네.’
우비를 챙겨 입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한율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조용히 마나를 유동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웅, 우웅.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반개하는 한율의 눈에 일렁거리던 푸른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받지 않고 무시하자 곧 부재중전화 표시와 함께 읽지 않은 메시지가 떴다. 발신인은 길우성.
-[써한, 쏘리,..]
-[미랑이 누나한테 그때 범인 잡은 거 너였다고 말해버림ㅋ;]
-[근데 진짜 말실수였음;; 문자였으면 절대 말 안 할 자신 있는데 통화하다 어쩌다보니;;]
이 새끼가?
한율이 저도 모르게 울컥하여 속으로 욕을 지껄였을 때였다.
우웅, 우웅. 다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네.”
-[흐으아앙···!]
깜짝. 한율은 받자마자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에 놀라 핸드폰을 귓가에서 뗐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를 정도로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다. 한율은 저도 모르게 사과를 뱉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흐윽, 그 나쁜 스토커 새끼 단단히 못 잡아서, 흑, 그래서 라나 언니가···.]
라나를 위협하고 머리카락을 자른 게 그때 경찰서에서 풀려난 스토커라면, 라나에게 벌어진 일이 자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잔뜩 질려있었다. 그 때문인지 쏟아내는 말 또한 불안정해진 멘탈처럼 두서가 엉망이었다.
-[히끅, 그렇게 된 걸 까봐, 흐윽······. 만약에 더 크게 다쳤으면 나 때문에 언니가아···!]
설령 그 스토커가 이번 사건 범인이 맞다 해도, 그건 죄를 저지른 가해자와 약한 처벌 탓이지 예전 피해자인 본인 잘못이 아닐 텐데.
-[경찰은, 훌쩍, 그놈이 이번, 사건, 범인 아닌 것 같다는데 혹시 모르잖아···, 흡, 그런데 한율이 네가, 그때 그놈 잡았다며···, 훌쩍.]
그래도 한참 정신없이 말을 쏟아낸 덕인지 서서히 울음이 잦아들어간다. 뒤늦게 통화 상대가 처음으로 말을 섞어보는, 아는 동생의 친구이자 같은 회사 후배란 사실도 떠올렸을 테고.
-[그래서···, 너라면 그놈 지금 사는 집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흑, 전화했어.]
“집주소라면 예전에 고소진행하면서 알게 되지 않았어요?”
-[법적 주소 말고 진짜 처박혀 사는 곳을, 흡, 알고 싶어!]
법적주소지와 실거주지가 따로 된 놈이었던 건가.
-[훌쩍, 내가 직접 찾아가서! 그놈한테, 그놈이 한 짓 아닌지 확인하고, 그놈이거나 그놈 사주를 받은 놈이 범인이면 내가 다 죽여 버릴 거야···!!]
“일단 진정하세요, 선배님.”
죄책감과 두려움만큼 분노도 이성을 흔들고 있었구나.
한율은 가벼운 손짓으로 투명한 바람 막을 만들어 짓쳐드는 빗물을 막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땐 제가 엉뚱한 오해를 뒤집어 쓴 게 억울해서, 범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그놈 집을 알아낸 거였거든요. 그리고 엿 좀 먹어보라고 그놈 집에서 심각한 범죄행위가 일어난 것 같다 경찰에 신고했는데, 정말 잡혀가서 저도 좀 놀랐고요.”
-[···훌쩍.]
“어쨌든 선배님이 그놈을 직접 찾아가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고, 그 전에 경찰은 그렇게 무능하지 않아요. 분명히 그놈도 주요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조사했을 테니, 일단 차분히 기다려보고···.”
-[그럼 어떻게 찾았는지 방법이라도 알려줘!]
“안 된다니까요.”
그러나 미랑은 가만히 앉아 범인이 잡히기만을 기다리기엔 불안감에 미쳐버릴 것 같다고 하소연했고, 한율은 중간 중간 잘 듣고 있다고,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신호를 보내며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었다. 불안한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은 누군가 그걸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으므로.
그렇게 다시 한참. 미랑이 겨우 진정되는 기미를 보였다.
-[미안해···. 그때 그놈을 잡게 해준 것도 넌데 떼를 써서···, 훌쩍. 선배로서도 면목이 없네···.]
“괜찮아요. 선배님이 불안해하시는 것도 다 이해되는 걸요.”
-[고마워···, 훌쩍.]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 선배님도 많이 놀라고 피곤하실 텐데.”
-[응···.]
“······.”
-[······.]
“······?”
그러나 대답만 하곤 전화를 끊지 않는다. 핸드폰 너머에서 작게 몇 번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미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안 알려줄 거야···?]
“···쉬세요.”
결국 한율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핸드폰에 뜨는 통화시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사위가 어둑해진 시간이었다. 빗줄기도 더욱 굵어졌다.
“······.”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검은색 모자에 검은색 마스크. 우산까지 써서 일부러 얼굴을 보려하지 않는 한 식별하기 어려운 수상한 모습으로, 한율은 한 집 앞에 주차된 차량 옆을 지나쳤다.
‘차량 종류는 같지만 번호판이 달라. 달린 블랙박스 종류도 다르고.’
추적마법을 사용했을 때 뒤쪽 범퍼에서 봤던 희미한 긁힌 자국도 없다. 걸음을 멈춘 한율은 주변을 살핀 후 우편함이 있는 곳으로 갔다. 우편함에 꽂힌 고지서의 이름도 달랐다. 당시 창에 쳐져있던 두터웠던 커튼에 비하면 새어나오는 불빛도 환하고.
미랑의 스토커는 그때 이곳에서 경찰에게 잡힌 이후 거처를 옮긴 모양이었다.
‘작은 찝찝함을 남겨두기 싫어 와 봤건만.’
결과적으론 헛걸음이 되었다.
한율은 발길을 돌려 주택가를 나왔다.
다음 날. 하늘은 언제 비를 쏟아냈냐는 듯 쾌청했다. 촤륵. 채 마르지 않은 빗물 웅덩이를 자전거 타이어가 빠르게 가르며 지나갔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등굣길.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한율과 같은 교복을 걸친 학생들이 많아지고, 한율은 아이들을 피해 속도를 늦추다 교문을 통과했다.
“어? 저···! 기···.”
그 순간 교문 근처에 서있던 누군가가 한율을 보고 손을 들었지만, 이미 바퀴가 교정 안으로 한참 들어온 뒤였다.
“······?”
뒤늦게 브레이크를 잡으며 돌아보자, 학교 경비원이 누군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약속하지 않은 방문객은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꼬질꼬질한 슈트 차림에 더벅머리를 한 남자가 경비원의 가드 사이로 고개를 휙휙 내밀며 한율에게 외쳤다.
“앗싸일보 연예부 기자입니다! 잠깐 서한율 군 인터뷰 좀···!”
“허락부터 받고 오시라니까요!”
이 학교에 워낙 현역 연예인 혹은 지망생이 많은 까닭에 경비는 엄중한 편이었다.
그저께 벌어진 라나 사건 때문인가. 한율은 자전거에서 내린 뒤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자전거를 끌고 교정을 가로질렀다. 아침부터 저렇게 기다리고 있었다면 이 학교에 재학 중인 다른 WB래빗 연습생들도 한 번씩 붙잡히지 않았을까.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길우성이 기다렸다는 듯 한율에게 다가왔다.
“혹시 오다가 기자님한테 잡힐 뻔···은 내가 너한테 잡히겠구나. 잘못했습니다, 다신 주둥이 잘못 놀리지 않도록 조심할게요.”
길우성이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한율은 대놓고 한숨을 내쉰 후 자리로 갔다. 길우성도 따라오더니 비어있는 옆자리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리고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하기로 했어?”
“뭘 어떻게 해. 선배님한테 안 들었어?”
“애먼 너한테 징징거려서 쪽팔린다고만 하던데.”
“그럼 꺼져.”
평소라면 여기에서 말을 심하게 한다고 뭐라 할 법도 하건만, 길우성은 사뭇 심각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몰라서 말하는데, 이번에 누나하고 연락 주고받았다고 괜히 딴 마음 품거나 그러면 안 된다, 진짜.”
“걱정 마. 그럴 일 전혀 없으니까.”
대표님이 낙석을 지고 왔다
“전혀 없다니···.”
단칼에 자르는 한율의 태도에 길우성이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누나가 얼마나 예쁜데!”
“대체 어쩌라는 거냐.”
우웅. 냐옹.
그때 두 사람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중요발표사항이 있으니, 남자연습생 분들은 금일 오후 5시까지 3층 대회의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WB래빗]
* * *
한율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자전거를 타고 곧장 회사로 향했다. 집에 들렀다 가기엔 시간이 촉박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회사 앞에서 버스를 타고 온 길우성과 차남석, 박현우와 마주쳤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버스는 수시로 정차하고 돌아가면서 시간 잡아먹잖아요.”
“으음, 그런 거 생각하면 자전거 타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살 돈이 없다.”
“따릉이 타, 따릉이.”
WB래빗이 이번 라나 사건과 관련해 회사를 방문하거나, 약속 없이 소속 아티스트, 연습생을 찾아가 인터뷰를 요청하는 행위를 자제해 달라고 공식 입장을 내놓은 덕인지, 회사 앞은 한산했다. 그러나 한율은 이쪽을 지켜보는 기분 나쁜 시선을 느꼈다.
흘끔 살펴보니 편의점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사람들 가방에서 카메라 렌즈로 추정되는 작은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아예 대놓고 핸드폰을 이쪽으로 세운 사람까지 있었다.
‘연예 쪽 가십 콘텐츠를 다루는 개인방송인가.’
한율은 리더기에 출입증을 대며 조용히 말했다.
“떠들지 말고 빨리 들어가요. 우리 찍는 사람들 있으니까.”
“달나라 사람들 아냐? 범인 직접 잡아 족치겠다고 완전 벼르고 있던데.”
“공카에서 괜히 잡음 일어날 수 있으니 당분간 여기 오지 말라고 공지 띄웠는데도요?”
“그래? 그런데 써한 넌 그 공지를 어떻게 봤···, 너 이 자식?”
크래 공카는 크래 최신앨범과 ID 앞자리를 적은 쪽지를 함께 넣은 인증사진, 크래 관련 질문 50문항 중 45문항을 맞추고, 크래에 대한 분석 글을 빙자한 찬양 글을 3천 자 이상 정성스레 적어야 가입 승인이 떨어진다.
한율은 짙은 의심이 섞인 길우성의 시선을 무시하며 데스크 직원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로비에 인사가 중첩되어 울렸다. 한율은 자전거를 세워두기 위해 로비 구석으로 향하고 다른 셋은 곧장 계단을 올랐다.
헬멧과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운 한율은 잠시 몸을 낮춰 체인을 살폈다.
‘하루 날 잡아서 세척 좀 해야겠는데. 귀찮으니 그냥 업체에 맡길까?’
딩동. 입구 쪽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데스크 직원이 인터폰 수화기를 들어 응답했다.
“네, WB래빗입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한율은 몸을 일으켰다. 투명한 문 너머로 처음 보는 교복에 후드티의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쓴 남학생이 초인종과 로비의 직원을 어지럽게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뭐라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직원은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스륵 문이 열리자 후드소년이 쭈뼛거리며 들어와 데스크 직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네. 2층 사무실의 신인개발팀으로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신인개발팀?
‘한동안 새로운 연습생은 뽑지 않는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러나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도 귀에 쏙쏙 박히는 좋은 목소리란 게 느껴진다. 한율은 의아해하며 걸음을 옮겼다. 뒤늦게 한율의 기척을 느낀 후드소년이 흠칫 놀라며 한율을 보곤 그대로 덜컥 굳었다. 그러나 이내 큰 소리로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여기 연습생 분이세요?”
억양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사투리의 향. 그러나 이곳 연습생 절반 정도가 서울경기 외 지방 출신이라 딱히 이상하게 들리진 않았다.
“네.”
“아, 역시. 그렇구나. 하하···.”
본인이 먼저 크게 인사를 건네 놓곤 어쩔 줄 몰라 한다.
‘혹시.’
한율은 며칠 전 좌기훈 대표가 언더래퍼의 믹스테잎을 쌓아놓고 듣더란 소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늘은 대망의 데뷔조 발표일.
“그럼 전 먼저.”
한율은 그에게 목례를 한 후 먼저 계단을 올랐다.
진위야 곧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