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여자아이돌 피습 미수 용의자 검거]
[지난 주, 인기 걸그룹 C의 멤버 L양에게 가위를 들고 피습한 용의자가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경찰은 용의자가 범행을 저지르기 이전부터 C그룹의 소속사 주변을 맴돌았다는 목격자들의 증언과 CCTV, 블랙박스 영상 등을 확보해 동선을 역추적하고, C그룹의 콘서트나 스케줄은 물론 사생활까지 침범하며 따라다니던 일부 극성적인 팬들 중 행적과 인상착의가 일치하는 유력용의자를 찾았으며, 체포와 동시에 자백을 받았다고 밝혔다.
현재 경찰은 용의자를 대상으로 정확한 범행 동기와 구체적인 경위를 조사하고 있으며, C그룹의 소속사 W측은 L양이 현재 충격에서 많이 벗어나기는 했지만 한동안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렸다.]
-와... 진짜 빨리 잡혀서 다행이다ㅠㅠ
-라나야 이참에 푹 쉬고, 다시 밝게 웃는 모습 보여줘ㅠㅠ
ㄴ라나가 누구?
ㄴ당한 애.
ㄴ인터넷기사는 다 이니셜인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 상황 무엇ㅠㅋㅋㅋㅋㅋㅋ
-역시 CCTV가 한몫 할 줄 알았다ㅋ
-근데 범인이 뭐하는 놈인지는 왜 안 알려주지?
ㄴㅆㄷㅎ ㅂㅌ. 이 이상 뭐가 필요함.
ㄴㅆㄷㅎ라도 보통 머리카락까지 가지려하진 않지; 저건 정신병자임.
ㄴ님들 모르는 구나. 아이돌 사생팬이 머리카락 뽑아가는 거 의외로 자주 벌어짐. 전에 블블도 당함. 음방녹화 끝나고 차에 타려는데 순식간에 팬들 다 밀치고 와서 그냥 머리카락 잡아 뽑아가던데;;
ㄴㅁㅊㄸ;;
ㄴ자라나라 머리머리ㅠㅠ
ㄴ걔네 얼마 전에 사생스토커가 회사 녹음실까지 숨어 들어가지 않았었나?
유명 포털사이트에는 [여자아이돌 피습 미수범 검거]가 실시간 검색에 등장했다. 그리고 짤막한 속보에 이어 자세한 기사가 뜨고, 해당 이슈 소란이 조금 가라앉을 무렵, 포털사이트 연예란에는 한 작은 기사가 떴다.
[<보컬리스트 시즌3>꽃을 단 토끼, 내년 정식 데뷔]
[최근 종영된 <보컬리스트 시즌3>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꽃을 단 토끼’팀의 소속사 WB래빗 엔터테인먼트가 내년 4월, 새 보이그룹을 런칭한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꽃을 단 토끼’의 차남석과 서한율은 해당 보이그룹의 데뷔조 멤버로 발탁되었으며, 내년 데뷔를 목표로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한다고 한다.
한편, 두 사람은 노래 외에도 연기력을 인정받아 각각 OSN과 SBC에서 방영 준비 중인 드라마에 캐스팅되어 촬영을 마쳤다.]
-ㄹㄴ 범인 잡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터지는 데뷔 기사.
ㄴ원래 내년 봄에 내보내려고 준비 중이었다 함.
-아직 9월이니 멀었네.
-그때까지 실력 많이 쌓으렴. 곧 묻히겠지만ㅋㅋ
ㄴ님보단 오억광년은 더 늦게 묻힐 테니 걱정ㄴㄴ
-나 아는 사람한테 들었는데, 서한율 연기 장난 아니라함.
ㄴ나왔다 아는 사람 피셜ㅋㅋㅋ 구라치지마 빠순아.
ㄴ빠순이 아니고 진짜 ㄹㅇ. 같이 출연한 배우가 서한율보고 ‘쟨 무조건 뜬다’고 ㅎㅆ음.
ㄴ네, 소속사 직원 분 언플 잘 들었고요.
ㄴㅋㅋㅋㅋㅋㅋㅋㅋ두고 봐라
* * *
한율은 자전거를 끌고 가면서 아직도 입안에 남은 얼얼함에 미간을 찡그렸다.
“매운맛은 통각이라는데, 대체 왜 자진해서 그딴 걸 먹는 거예요?”
지금껏 떡볶이라고는 초등학생 때 근처 분식집에서 컵에 담겨진 달달한 떡볶이를 한 번 먹은 게 전부였다. 그러나 이 세 사람과 함께 들른 분식집의 떡볶이는 그때 먹었던 것보다 20배는 더 매운 듯해 한 입 겨우 삼켰다.
떡볶이를 가장 많이 먹은 박현우가 정색하며 되물었다.
“그딴 거? 그딴 거라고 했냐 지금?”
“네, 그딴 거요.”
“음, 내 청각 이상 무.”
“난 분명 보통맛으로 시키자고 했어. 그래도 국물에 김밥 찍어먹으면 맛있지 않았어?”
“별로.”
“어? 저 사람 보배 형 아니에요? 보배 혀엉~!”
분식집이 회사와 버스 한 정거장 사이를 둔 곳에 있었기에 그냥 걸어가던 중이었다. 길우성이 저 멀리 서있는 강보배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고, 멍하니 있던 강보배가 아! 하는 표정을 짓더니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서 마주 손을 흔들었다.
“저 형 반응 좀 느린데?”
“어제 느꼈는데, 애가 좀 멍한 것 같기도.”
그들과 강보배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넷이 같이 오네?”
“하이.”
“오는 길에 떡튀김을 영접했거든요. 형은 여기에서 혼자 뭐해요?”
“난 잠깐 방향 좀 찾느라··· 그런데 떡튀김? 떡꼬치랑 다른 거야?”
방향을 찾다니. 길을 잃어서 멍하니 있었던 건가?
“떡볶이, 튀김, 김밥이요. 차남석 씨가 써한한테만 사주고 나랑 현우 형은 더치페이 시켰어요.”
“그리고 내가 우성이 걸 내줬지. 저건 치사하게 동생을 사주려면 차별을 하지 말아야지.”
“나 돈 없는 거 알면서 뭐래. 그리고 얘한테 사준 건 괜히 나 때문에 무임금으로 드라마 찍어서 그런 거거든?”
“드라마?”
강보배가 화들짝 놀라며 차남석과 한율을 돌아보았다.
“너희들 드라마도 찍어?”
강보배는 지금껏 거의 독학으로 랩을 배우고 자작곡을 만들고 부르며 가끔 인터넷에 올렸을 뿐, 연습생은커녕 연예기획사에 들어온 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바닥에 관해서도 거의 아는 게 없다고.
“원래 연습생들은 데뷔 전부터 이것저것 오디션 보고 단역이라도 나가서 연기하는 경우 많아요. 전혀 놀랄 필요 없음.”
“그럼 우성이 너도 드라마 찍은 적 있어?”
“정극은 아니고 감성소녀 뮤비에 잠깐···?”
박현우가 웃으면서 길우성의 옆구리를 찔렀다.
“댄스단수는 왜 빼냐?”
“으윽···.”
휘청. 길우성이 과하게 엄살을 피우며 비틀거렸다.
“왜 아픈 데를 찌르고 그래요···. 이제 겨우 허접한 무대를 보였단 수치와 탈락의 아픔을 치유하고 있고만! 그리고 그건 연기가 아니잖아요!”
“댄스도 무대 연기지 무슨.”
“그래도 과가 다르잖아요. 그리고 그때 형은 오지도 않았으면서.”
“안 봐도 뻔하지. 네 집중력이랑 몰입도, 표정 연기. 이 삼박자가 개허접이라 망한 거야.
“커헉···!”
길우성 호는 박현우의 팩트 폭력에 의해 침몰되었다.
강보배가 어쩔 줄 몰라하며 길우성을 살피는 사이, 세 사람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걸음을 옮겼다.
“데뷔조가 되었다고 해도 데뷔무대에 설 때까진 절대 긴장을 놓으면 안 돼. 앨범 녹음까지 다 해놓고도 ‘생각보다 영 아닌데’라는 소리가 나오면 막판에 교체당할 수 있거든.”
“그리고 데뷔조 여덟 명 중 한 명은 무조건 탈락이고. 좋았어, 그럼 난 일단 표정연기가 허접한 길우성의 자리를 노린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길우성이 빠지는 건 조금 곤란한데.
한율은 길우성을 돌아보았다. 강한 팩트 폭력을 얻어맞은 길우성은 강보배의 부축을 받으며 흐느적흐느적 액체괴물처럼 걷고 있었다.
“······.”
“아, 서한율.”
“······?”
차남석이 한율에게 말했다.
“나나 길우성은 어제 숙소에서 겪기는 했지만, 너 떨어진 애들이나 형들 마주치면 표정관리 잘해. 괜히 또 뚱한 태도 보여서 쓸데없는 오해사지 말고.”
“네.”
회사에 도착했을 땐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휴게실에는 데뷔조 멤버와 연습생들이 섞여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한율은 네 사람과 함께 우르르 들어가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어제는 오동식 팀장에게 설명을 들은 후 곧바로 귀가해서 볼 수 없었으나, 데뷔조에서 탈락한 다른 연습생들의 낯빛은 하나 같이 좋지 않았다. 아직 눈가가 붉은 연습생도 있었다.
“어제는 제대로 말 못했는데, 축하한다.”
“축하해요, 형들.”
“감사합니다.”
“고마워.”
지난주까지만 해도 거리낌 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던 연습생들 간에 어색한 인사가 오갔다. 몇 명은 아예 강보배를 무시하고 휴게실을 쌩 하니 나갔다. 정민솔도 그 중 하나.
“6시까지 시간 조금 남는데, 연습실 갈래?”
길우성의 물음에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생들과 데뷔조 간에 선이 그어지기는 했어도 여전한 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월말평가. 데뷔조에 들어간 이상 평가 잣대는 더욱 까다로워질 터다.
뭔 정이요?
데뷔조 전용 연습실이 된 B연습실로 가자, 문에는 어제까지 없던 리더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복도로 난 통유리 벽에도 시트지가 부착되어 이젠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삑. 출입증을 리더기에 갖다 대자 잠겼던 문이 열렸다.
“데뷔조만 출입할 수 있도록 해놨나 보다. 와, 소파랑 캐비닛도 설치됐어. 대박, 냉장고도 커짐.”
이런 소소한 것에서 정말 데뷔조가 되었다는 실감이 드는지, 길우성이 설레는 얼굴로 연습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냉장고를 벌컥 열었다.
“오오!”
냉장고 안에는 예전에 <보컬리스트 시즌3> 출연자들과 함께 CF를 찍었던 비타민 음료가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길우성이 그 위에 놓인 쪽지를 펼쳐 읽었다.
“데뷔조가 되신 분들에게 축하의 의미로 소소하게 준비했습니다. ···크으, 감동!”
한율은 혼자 좋아서 음료를 끌어안고 히죽거리는 길우성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감동하기 이전에 네 그 허접한 삼박자부터 걱정하는 게 순서 아니야?”
“······!”
길우성이 충격 받은 얼굴로 한율을 돌아보았다.
“연습할 때나 월평, 학교 수업 때만 해도 잘했던 무대가 방송국에선 왜 허접스럽게 됐는지, 원인부터 분석하고 개선해야 앞으로도 계속 이런 선물을 받겠지. 오늘 하루만 좋다고 마시고 말래?”
“왜 너까지 팩트로 명치 때리고 난리냐···. 그리고 방송국에선 내 생애 첫 TV 데뷔라 긴장을 너무 해서 망친 거라고! 평소 존경하던 쌤들이 판정단 석에 잔뜩 앉아있을 지도 몰랐고.”
“······.”
“왜 그렇게 의심스럽게 봐. 나 길우성! 다음엔 절대 긴장하지 않는다!”
과연.
한율은 길우성의 결연한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고 캐비닛을 열어보았다. 이제 안무연습용 신발은 휴게실에서 일일이 꺼내 가져올 필요 없이, 여기에 놔두고 다녀도 될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중국어레슨을 받은 뒤 온 보컬연습실.
한율은 디지털 피아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새로운 보컬트레이너를 기다렸다.
‘이제 슬슬 월평 곡도 준비해야 할 텐데.’
핸드폰 대신 지급받은 사과패드로 너튜브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곡저곡 검색하며 흥얼거릴 때였다.
“고음에 기교까지 들어간 노래는 아직 이릅니다.”
노크 없이 불쑥 들어온 남성이 한율에게 말했다.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미리 얼굴을 확인한 왕연수였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십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왕연수라고 합니다.”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좌기훈 대표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가수.
당시 곧게 뻗는 탄탄한 음색을 자유자재로 놀려, 그야말로 목소리를 훌륭한 악기로 사용한다는 실력파 가수로 이름을 알렸지만, 막 인지도가 오를 무렵 소속사와 매니저에게 사기를 당해 수익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연예계를 떠났던 인물.
그러다 3년 전, 과거에 활약했다가 사라진 연예인들을 재조명하는 TV프로그램에 나오며, 계속 묻혀있기엔 아까운 훌륭한 가수 중 한 명으로 꼽혀 각광을 받기도 했다.
왕연수가 한율을 보며 웃었다.
“영상보다 실물이 훨씬 잘생겼네. 나중에 좀 더 크고 젖살도 빠지면 더 볼만하겠는데? 자, 먼저 발성부터 볼까?”
딩.
“······?”
난데없이 날아온 외모 칭찬이 수업으로 이어졌다. 왕연수가 자리에 앉기도 전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한율을 바라보았고, 한율은 뒤늦게 음계에 맞게 소리 냈다.
“미—.”
딩.
“솔—.”
“이번엔 가성.”
딩.
“미—.”
“귀신 소리 말고 가성.”
딩.
“···미—.”
“한 시간 내내 미치게 할 거예요? 다시.”
왕연수는 내내 웃으면서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도돌이표 같은 선생이었다.
* * *
조유찬은 이번에 보이그룹 데뷔조가 만들어지면서 매니지먼트 B팀으로 새로 배치되었다. 일반사원에서 대리로 진급까지 했지만, 그는 아직 기뻐할 수 없었다. 데뷔조 관리는 매니지먼트팀 업무에 신인개발팀의 업무까지 곁들여야 하는 까닭이었다.
‘다른 기획사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 회사는 아직 작으니까.’
그가 현재 하는 업무는 데뷔조 멤버들이 들어올 숙소 단장. 조유찬은 2층 침대를 들고 오는 가구점 사람들에게 말했다.
“전부 머리가 남쪽으로 향하게끔 설치해주세요. 양쪽 벽에 바짝 붙여서요. 행거는 문 바로 옆 벽면에···.”
“소파는 여기에 둘까요?”
“네! 역시 센스 좋으시네요. 척하면 척이셔.”
그때 조유찬의 주머니에서 발랄하기 그지없는 크리스탈 래빗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함께 B팀으로 옮겨진 현장전의 전화였다.
“네, 조유찬입니다.”
-[선배님, 무공공 프로덕션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어디요?”
-[무공공이요. 그 왜 있잖아요, 작년에 웹드 <마법의 달력> 찍은 곳이요.]
“아아, 알아요. 거기서 왜요?”
-[거기서 이번에 웹툰 원작으로 짤막하게 웹드를 만들게 되었는데, 한율이를 캐스팅하고 싶대요.]
“오오! 무슨 웹툰이요? 어떤 역?”
-[그게······.]
현장전이 말을 흐렸다. 조유찬은 ‘애가 한껏 망가져야 하는 병맛 웹툰인가?’ 걱정하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가미난무>란 웹툰인데···, 조선시대 배경의 백정 역이에요.]
“···네? 뭔 정이요?”
-[백정이요. 배우 이희우가 한율이를 적극 추천했다고···.]
조유찬은 소리 없이 의문을 토했다.
대체 왜?!
‘···아, 혹시.’
조유찬은 얼마 전, 서한율이 이희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드라마에 카메오로 출연했음을 떠올렸다.
‘카메오로 맡은 배역은 다소 밋밋한 역이었는데, 이희우 촉이 좋은 건가?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난데없이 백정?’
대체 서한율에게서 뭘 보았기에?
조유찬은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이희우가 가끔 또라이처럼 군다는 소문은 듣긴 했지만··· 아니, 이건 너무 뜬금없잖아?!’
“팀장님은 뭐래요?”
-[한율이랑 미국에도 다녀오고, 친한 게 대리님이니까 대리님이 직접 검토한 후에 한율이한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네, 그럴게요. 그 웹툰 링크 보내줄 수 있어요?”
-[네, 금방 보내드릴게요.]
곧 링크가 첨부된 메시지가 도착했다.
조유찬은 우선 이희우에 대해 검색했다.
27살이란 젊은 나이에 비해 연기실력이 굉장히 뛰어나 미래가 더욱 기대된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청초한 민낯에 예쁘기까지 하여 팬들도 적잖고. 그러나 마이페이스가 심하고, 가끔 악플러와 직접 댓글로 싸울 정도로 호전적이기도 하다고.
[이희우 성질머리가 ㅈㄴ지랄맞긴 한데 연기론 못 까는 게 팩트ㅋ]
그러다 조유찬은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
[첫 데뷔작으로, 것도 비중 있는 조연으로 나온 게 작은아버지인 이사문 감독 작품이라, 조카라고 낙하산 태워준 거 아니냐 네티즌들이 ㅈㄹㅈㄹ했는데, 막상 작품 공개되니까 낙하산 논란 급잠잠해짐ㅋㅋㅋ]
‘이희우가 이사문 PD님 조카라고? 그럼 혹시······.’
주문한 가구가 모두 알맞은 자리에 배치되고 가구점 직원들이 퇴장한 뒤에야, 조유찬은 비닐이 씌워진 소파에 앉아 해당 웹툰을 보았다.
잠시 후.
“으으음···.”
조유찬은 웹툰을 볼수록 점점 일그러지는 미간을 손끝으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핸드폰 화면에는, 새빨갛게 피로 범벅이 된 쇠심줄을 입으로 물어뜯는 백정소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 * *
새벽 1시가 될 무렵. 자율연습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핸드폰을 돌려받은 한율은 조유찬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한율아, 시간 날 때 이 웹툰 정주행 한 번 해볼래? ^^;]
“······?”
난데없이 웬 웹툰? 그러나 이유 없이 시간을 뺏을 만한 걸 권하는 사람은 아니기에, 한율은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웹툰을 보았다.
웹툰 제목은 <가미난무>. 배경은 가상의 조선시대.
먼 옛날, 북방에서 귀화하여 조선에 자리 잡은 오랑캐의 후손으로, 아비를 따라 백정이 된 소년, ‘백자’가 있었다. 백자는 예쁘장하게 생긴 외형과는 달리, 어릴 적부터 험난하고 궂은 백정 일을 배워 입도 행동도 거칠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자는 홀로 수렵을 나갔다가 상처투성이에 후줄근한 행색으로 쓰러진 주인공 ‘윤가미’를 발견한다.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았기에 백자는 그를 인육으로 팔고자 대충 두 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 간다.
그 순간 기절한 줄로 만 안 윤가미가 ‘아씨익!’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키고, 백자는 그것에 놀라 한 대 후려갈겨 다시 기절시키고 만다.
알고 보니 윤가미는 가난한 양반 댁의 서자였다.
무과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던 그는,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여인이 먼 지방의 늙은 양반의 첩으로 팔려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급히 발길을 돌려 여인에게 가고자 하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괴한들에게 공격당한다. 그리고 도망치던 중 그만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져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대체 왜 이걸 보라고 한 거지?’
한참 웹툰을 보고 있자니 재차 떠오르는 의문. 그러나 메시지를 보내기엔 늦은 시간이라, 한율은 내일 물어보기로 하고 피곤한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조유찬으로부터 이유를 들은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나보고 이 캐릭터를 연기하라고?’
참 알다가도 모를 세계였다.
초반엔 외적인 이미지만 좇아 세상 순진한 얼굴로 토끼 귀를 하거나, 예쁜 누나를 쫓아다니는 철없는 남학생 연기를 요구하더니, 오디션을 보니 생각지도 못한 뉴욕 양아치 역으로 낙점되었고, 이번엔 백정 역할로 제안이 들어왔다.
‘색다른 경험은 되겠지만···.’
그동안 드라마에 출연했던 건 순전히 데뷔조로 들어가는 데에 플러스 요인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물론 데뷔조라 해도 데뷔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는 소리도 듣긴 했지만,
‘아이돌로 데뷔 전에 연기만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 않나?’
아무리 데뷔 전에 연기하는 이들도 많고, 아이돌로 데뷔한 이후 연기자로 전향하는 케이스도 많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수가 아닌가. 그런데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한 건 <보컬리스트 시즌3> 달랑 하나.
[형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웹드에 맞게 각색을 거쳐서 편당 20분, 10화 이내로 끝낸다지만 사극인 이상 준비나 촬영에 시간이 많이 걸릴 거야. 촬영장소도 대부분 지방일 거고. 그리고 무엇보다 활 쏘는 거랑 칼, 도끼 같은 것도 다뤄야 해서 다칠 위험도 커ㅋ 어쩌면 소 다루는 장면도 찍을지도 몰라;]
활, 칼, 도끼, 소.
활과 칼은 본래 세상에서 어느 정도 다뤄본 경험이 있는 것들이었다. 전장의 마법사는 적에게 있어 제거 1순위였던 터라, 나라에서는 마법사에게도 기본적인 무기 다루는 법 등을 가르쳐주었었다. 작전상 일반 병사로 위장해 다니는 일도 종종 있었고.
‘하지만 소를 다루는 건··· 조금 무서운데.’
거대하고 단단한 뿔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건 방어본능을 일으킨다. 만약 소가 뿔을 들이대기라도 한다면 저도 모르게 과잉방어를 하게 될지도.
-[그래도 괜찮다면 했으면 좋겠다. 네 미래를 위해서, 더 나아가 팀을 위해서^^]
지금부터 준비해 촬영을 한다 해도 완성은 빨라도 겨울, 혹은 내년 봄. 데뷔 시기와 맞물린다.
한율은 책상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카메라를 앞에 둔 연기는 말 그대로 해당 작품 속 가상의 인물이 되는 유희. 그래서 모니터 속에서 그 배역이 되어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땐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여러 개선점도 떠올리게 되고.
‘재미가 없지는 않았지. 그리고···.’
5년 후 게이트가 열리기 전까진 ‘서한율’의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 뒤론 이런 고민조차 사치였던 과거가 되어버릴 테니.
어쩌면 자신의 기억에만 자리 잡을, 사라질 과거가 될 수 있는 현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길우성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비어있는 옆자리에 앉았다. 한율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너 웹툰 보냐?”
“아주 심심할 때 가끔?”
“그럼 이것도 본 적 있어?”
한율은 핸드폰에 웹툰 <가미난무>를 띄워 내밀었다. 한참동안 웹툰을 살핀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예전에 보고 묵히고 있던 거야. 이거 벌써 60화까지 연재됐구나. 그런데 이게 왜?”
한율은 툭, 네모난 도축용 칼을 들고 있는 백정소년의 이미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 역으로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어.”
“왓?! 진짜야?! 네가—.”
턱. 한율은 손 대신 책을 들어 길우성의 입을 막았다.
“시끄러우니까 일단 닥치고. 너라면 어떡할래? 이제 막 데뷔조에 들어가서 빡세게 연습해야 하는데, 시간도 준비도 오래 걸리는 이런 역 제안이 들어오면?”
‘친구’사이라면 응당 할 법한 고민상담. 그러나 길우성은 고민할 필요 없다는 듯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면 한다.”
“왜?”
“조금이라도 팀 이름을 알리는 데에 도움이 되고, 또 그런 이유로 데뷔조에 남을 수 있을 테니까.”
“주목도가 낮은 웹드인데도?”
“우리나라엔 5년 넘게 활동해도, 차트 100위권은커녕 ‘누구세요?’ 소리를 듣는 아이돌이 굉장히 많아.”
아침마다 전쟁이겠네
끼익. 길우성이 의자를 더 가까이 끌어와 말을 이었다.
“주목을 받아야 인기도 얻고, 수익도 플러스되고, 좋은 곡도 많이 들어오고, 의욕도 살고. 응? 얼마나 좋아! 너도 매일 힘들게 연습했던 시간이 허무하게 날아가는 건 보고 싶지 않을 거 아냐.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지. 그러니 친구.”
터억. 길우성이 한율의 어깨를 잡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 멱살은 네게 맡긴다. 하드캐리를 부탁하네!”
정말 뻔뻔한 놈이었다.
툭. 한율은 길우성의 손을 쳐냈다.
“편히 묻어 갈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대본 리딩이나 도와.”
“네엡.”